선상탄(船上嘆)
by 송화은율선상탄(船上嘆)
미천하고 노쇠한 몸을 통주사로 보내시므로
을사년 여름에 진동영(부산진)을 내려오니,
변방의 중요한 요새지에서 병이 깊다고 앉아 있겠는가?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굳이 올라가서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뜨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을 따르는 노란 구름은 멀고 가깝게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같은 빛일세.
배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옛날과 지금을 생각하고
어리석고 미친 마음에 배를 처음 만든 헌원씨를 원망스럽게 여기노라.
바다가 아득히 넓게 천지에 둘려 있으니,
참으로 배가 아니면 풍파가 심한 만 리 밖에서
어느 오랑캐(왜적)가 엿볼 것인가?
무슨 일을 하려고 배 만들기를 시작했는고?
(그것이) 오랜 세월에 끝없는 큰 폐단이 되어
온 천하에 만백성의 원한을 기르고 있도다.
아! 깨달으니 진시황의 탓이로다.
배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왜족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일본 대마도로부터 빈 배가 저절로 나올 것인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동남동녀를 그토록 데려다가
바다의 모든 섬에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을 만들어 두어,
통분한 수치와 모욕이 중국에까지 다 미치게 하였는가?
장생 불사약을 얼마나 얻어 내어 만리장성을 높이 쌓고 몇 만년을 살았던가?
남처럼 죽어 갔으니 유익한 줄 모르겠도다.
아! 생각하니 서불의 무리가 너무 심하다.
신하의 몸으로 망명 도주도 하는 것인가?
신선을 만나지 못했거든 쉽게나 돌아왔으면
통주사(자신)의 이 근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 두어라. 이미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는 시비를 팽개쳐 던져 버리자.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니 내 뜻도 고집스럽구나.
황제가 처음으로 배와 수레를 만든 것은 그릇된 줄도 모르겠도다.
장한이 강동으로 돌아가 가을 바람을 만났다고 한들
편주를 타지 않으면 하늘이 맑고 바닥 넓다고 해도
어느 흥이 저절로 나겠으며, 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평초 같은 어부의 생활을
자그마한 배가 아니면 어디에 부쳐 다니겠는가?
이런 일을 보면, 배를 만든 제도야
매우 묘한 듯하다마는, 어찌하여 우리 무리는
날 듯이 빠른 판옥선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
풍월을 읊되 흥이 전혀 없는 것인가?
옛날의 배 안에는 술상이 어지럽더니
오늘날의 배 안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구나.
똑같은 배건마는 가진 바가 다르니
그 사이의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못하도다.
때때로 머리를 들어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시국을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에 뒤떨어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고서
그 백분의 일도 아직 씻어 버리지 못했거든,
이 몸이 변변치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고 늙었다 한들,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었을 것인가?
강개를 못 이기는 씩씩한 기운은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마는,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분함을 씻고 원한을 풀어 버리기가 어려울 듯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멀리 쫓았고,
발이 없는 손빈이 방연을 잡았는데,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온전하고 목숨이 살아 있으니
쥐나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이나마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 들어 선봉을 휘몰아치면
구시월 서릿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왜적을)헤치리라.
칠종 칠금을 우리라고 못할 것인가?
꾸물거리는 저 섬나라 오랑캐들아, 빨리 항복하려무나.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두 죽이겠느냐?
우리 임금님의 성스러운 덕이 너희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시느니라.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 시대와 같은 화평한 백성이 되어
해와 달 같은 임금님의 성덕이 매일 아침마다 밝게 비치니,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들도 고기잡이 배에서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늦도록 노래하고),
가을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성군 치하의 태평 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요점 정리
작가 : 박인로
연대 : 선조 38년(1605년), 노계 45세 때
갈래 : 전쟁 가사
율격 : 3(4).4조 4음보 연속체
문체 : 가사체, 운문체
표현 : 인용법, 대구법, 은유법, 설의법
성격 : 우국적(憂國的), 비판적, 기원적
구성 : 열서식(내용은 다섯 문단으로 나누기도 함)
서사 - 통주사가 되어 진동영에 내려옴
본사 1 - 헌원씨를 원망함
본사 2 - 왜적이 생긴 것을 개탄함
본사 3- 배로 누릴 수 있는 풍류와 흥취
본사 4 - 옛날과 배는 같지만 풍류가 다름
본사 5 - 수치심과 작자의 우국지심
본사 6 - 설분신원(雪憤伸寃)을 다짐
결사 - 태평 성대가 도래하기를 염원함
제재 : 임진왜란의 체험
주제 : 전쟁을 혐오(嫌惡)하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싶은 마음. 우국단심(憂國丹心), 전쟁의 비분을 딛고 태평성대를 염원함. 전쟁의 상처가 극복되고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의의 : '태평사(太平詞)'와 함께 전쟁가사의 대표작. 감상에 흐르지 않고 민족의 정기와 무인의 기개를 읊었다.
특징 : 민족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표현상 예스러운 한자 성어와 고사가 지나치게 많고, 왜적에 대한 적개심은 그럴 만하나 모화사상(慕華思想)이 나타나는 점이 흠이다.
출전 : 노계집(蘆溪集)
내용 연구
서사 - 진동영에서의 심회, 통주사가 되어 진동영에 내려옴
늙고 병든 몸[화자가 자신을 낮추어 표현]을 통주사(수군 / 해군 함장에 해당함)로 보내시므로
을사년(임진왜란후 1605년 선조38년) 여름에 동쪽을 지키는 진영[부산진]에 내려오니
변방의 중요한 요새지[부산진으로 일본과 가장 가까움]에서 병이 깊다고 앉아 있겠는가? [우국충정]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굳이 올라가서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뜨고[왜에 대한 적개심] 대마도를 굽어보니[무인으로서의 호방한 기개],
바람을 따르는 노란 구름[왜적 혹은 전쟁의 기운을 비유적으로 표현]은 멀고 가깝게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망망대해]은 긴 하늘과 같은 빛일세.[수평선을 말함]
- 통주사가 되어 진동영에 내려와 병선을 타고 대마도를 굽어 보는 심정
: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천석고황(泉石膏 )'의 경지에서 자연을 몹시 사랑함을 '병'으로 표현한 관습적, 상투적인 표현이다.
- 태평사와 더불어 중요한 전쟁 문학 작품이며, 이 글은 진동영에서의 심회를 읊은 것으로 글 전체의 서두로,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연상하는 시상도 엿볼 수 있으며(강호애 병이 깁퍼), 왜적 침공에 대해 헌원씨를 원망하는 표현 등 고졸(古拙)한 한문투의 성구와 전고(典故)를 많이 이용하고 있다.
배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서성이며)
옛날[임진왜란]과 오늘날(지금)을 생각하고
어리석고 미친 마음에 배를 처음 만든 헌원씨를 원망스럽게 여기노라.
바다가 아득히 넓게 천지에 둘려 있으니,
참으로 배가 아니면[헌원씨를 원망하는 이유] 풍파가 심한 만 리 밖에서
어느 사방의 오랑캐(왜적)들이 엿볼 것인가?
(훤원씨는) 무슨 일을 하려고 배 만들기를 시작했는가?
왜 그는 천만년 후에 끝없는 폐단이 되도록
넓은 하늘 아래에 있는 온 천하에 만백성의 원한[임진왜란으로 인한 조선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원한]을 길렀는가.
- 본사 1 - 왜적의 침범이 배 때문이라 하여 배를 처음 만든 헌원씨를 원망함
: 헌원씨는 배를 처음 만든 사람으로, 배가 없다면 왜구의 침입이 없으리라는 뜻.[잘못된 인과 관계의 오류 : 단순한 선후 관계를 인과 관계로 추리하는 오류 ]
아! 깨달으니 진시황의 탓이로다.
배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왜족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일본 대마도로부터 빈 배가 저절로 나올 것인가?
누구의 말을 곧이듣고 동남동녀[총각과 처녀]를 그토록 데려다가[진시황이 왜국에 문물을 전해 주었다고 생각함]
바다의 모든 섬에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왜적]을 만들어 두어,
원통하고 분한 수치와 모욕이 중국에까지 다 미치게 하였는가? [모화사상이 반영됨]
장생 불사약을 얼마나 얻어 내어[진시황이 불로장생약을 구하려 왜에 '서불'을 보낸 것을 의미함] 만리장성을 높이 쌓고 몇 만 년을 살았던가?
남처럼 죽어 갔으니[인생무상과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음] 유익한 줄 모르겠도다.
아! 생각하니 서불[진(秦)나라 낭야(琅邪) 사람. 방사(方士). 서복(徐福)이라고도 한다. 진시황(秦始皇)에게 바다 속에 삼신산(三神山)과 신선이 있다고 상서하면서 이름이 봉래(蓬萊)와 방장(方丈), 영주(瀛州)라 했다. 진시황의 명령으로 어린 남녀 수천 명을 거느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 바다로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금 일본에 서불의 무덤이 전한다고 함.]의 무리[원망의 대상]가 너무 심하다.
신하[서불을 가리킴]의 몸으로 망명 도주도 하는 것인가?[진시황의 신하였던 서불이 불로장생약을 구하지 못해 일본에 망명한 사건을 원망함]
신선을 만나지 못했거든 빨리나[쉽게나] 돌아왔으면
통주사(화자 자신)의 이 근심[오랑캐로 인한 근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중국 고사의 인용은 왜적에 대한 강한 분노와 전쟁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본사 2 - 진시황과 서불로 말미암아 왜적이 생긴 것을 개탄함
문단에서 비록 헌원씨가 배를 만들어 왜적이 타고 왔지만 진시황이 불사 장생약을 구하러 서불을 보내지 않았다면 왜적이 생기지 않아 오늘날같이 왜적의 침입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으로, 배를 잘못 이용한 진시황과 서불을 탓하고 있다.[잘못된 인과관계의 오류임]
그만 두어라. 이미 지난 일은 탓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 인식의 전환]
아무 소용이 없는 시비를 팽개쳐 던져 버리자.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니 내 뜻[헌원씨에 대한 원망]도 고집스럽구나.
황제가 처음으로 배와 수레를 만든 것은 그릇된 줄도 모르겠도다.
장한이 강동으로 돌아가 가을 바람을 만났다고 한들
작은 배를 곳[강세조사] 타지 않으면 하늘이 맑고 바다가 넓다고 해도 [ 이 작품은 한문 어구를 중심으로 노래가 전개되고 있다. 이는 작가가 문학적 표현에 치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서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저변에는 작가의 모화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당시 지배층의 사고가 그런 모화사상에 푹 빠진 문제점을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어느 흥[배의 긍정적 기능]이 저절로 나겠으며, 삼공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평초 같은 어부의 생활을
자그마한 배가 아니면 어디에 부쳐 다니겠는가?[배가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식으로 배를 통해 풍류를 즐길 수 있다는 긍정적 인식]
- 본사 3 - 배가 있음으로 해서 누릴 수 있는 풍류와 흥취
: 진나라 장한이, 가을 바람이 불자 향수를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 이백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장한이 강동으로 간 것은
바로 가을 바람 불 때요
맑은 하늘의 한 기러기 소리에
바다는 넓고 돛배는 느리다.
문단에서는 왜적을 만들어 낸 진시황을 원망하다가 다시 장한의 고사를 인용하여, 배에서 흥취와 풍류, 배의 효용 등으로 배의 공덕을 노래했다.
이런 일을 보면, 배를 만든 제도야
매우 묘한 듯하다마는, 어찌하여 우리 무리는
날 듯이 빠른 판옥선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
풍월을 읊되 흥이 전혀 없는 것인가? [전운이 감돌고 있기 때문에]
옛날의 배 안에는 술상이 어지럽더니
오늘날의 배 안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구나.
똑같은 배건마는 가진 바가 다르니
그 사이의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못하도다.
- 본사 4 - 옛날과 지금의 배는 같지만 근심과 풍류가 다름
: 옛날 배 위에는 술상이 어지럽게 흩어졌더니 - 상황이 다르다는 말
송나라 소동파의 적벽부 끝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객은 기뻐하고 웃으면서 |
여기서는 배 위에서의 흥겨움과 풍류를 나타내고 있다.
: 앞의 구절과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같은 배이지만 전란으로 인한 근심을 묘사한 것이다.
위의 글은 음풍영월하던 당시의 배와 같은 배이지만 고금의 우락이 서로 다름을 소동파의 고사를 인용하여 가슴 아픈 전선(戰船)에서의 감회를 잘 나타내고 있다.
배의 이중적 의미 : '선상탄'에서 '배'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배'가 있음으로써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 때 작가는 '배'에 대한 원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한편으로 '배'는 풍류와 흥취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소재로, 작가는 태평성대가 와서 고깃배를 타고 즐길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때때로 머리를 들어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시국을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에 뒤떨어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고서
그 백분의 일도 아직 씻어 버리지 못했거든,
이 몸이 변변하지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서로 달라 못 모시고 늙었다 한들,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었을 것인가?
- 본사 5 - 해추 흉모에 당한 수치심과 작자의 우국 단심
: '북신'은 임금이 계신 곳, 즉, 연군의 정을 의미하고 '노루'는 나라를 걱정하며 흘리는 눈물로서 우국의 정을 나타내고 있다.
: 왜적들의 흉악한 모략에 빠져 천추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변방을 지키는 관리로서 느끼는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 충정을 보이고 있다.
위의 글은 지은이의 우국충절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으로 '북신을 바라보며'는 연군의 정을, '노루'는 나라를 걱정하여 흘리는 우국의 눈물이다.
강개를 못 이기는 씩씩한 기운은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마는/ 늙을수록 더욱 씩씩함,
보잘 것 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분함을 씻고 원한을 풀어 버리기가 어려울 듯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의를 멀리 쫓았고,
발이 없는 손빈이 방연을 잡았는데,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온전하고 목숨이 살아 있으니
쥐나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이나마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 들어 선봉을 휘몰아치면
구시월 서릿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왜적을)헤치리라.
(제갈 공명이 맹획을 일곱 번 놓아 주었다가 일곱 번 다시 잡았다는)칠종 칠금을 우리라고 못할 것인가?
- 본사 6 - 설분 신원을 다짐하는 무인의 기개
: 평생에 공명을 두려워하던 중달이 공명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쳐들어갔으나, 의외에도 공명이 의젓이 가마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도망쳤다는 고사의 인용으로 , 이 때 가마에 앉은 것이 사실은 공명의 시체였다함.
: 손빈과 방연 전국 시대의 병법가 손자 병법에 뛰어남. 방연이 손빈의 재주를 시기하여 발을 잘랐으나,뒤에 서로 다른 나라의 장수가 되어 싸웠을 때 방연은 손 빈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일
: 마음대로 할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곱 번 놓아주었다가 일곱 번 다시 잡는다는 말은 제갈 공명이 남만의 맹획을 칠 때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함.
위 글에는 무사다운 기개로 왜구를 무찌르고자 하는 우국 단심을 제갈 공명과 손빈의 고사를 인용하여 노래하고 있다.
결사 - 태평 성대가 도래하기를 염원함
꾸물거리는 저 섬나라 오랑캐들아[왜적을 비하하는 말], 빨리 항복하려무나.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두 죽이겠느냐?
우리 임금님의 성스러운 덕이 너희와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시느니라.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 시대와 같은 화평한 백성이 되어
해와 달 같은 임금님의 성덕이 매일 아침마다 밝게 비치니,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들도 고기잡이 배에서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늦도록 노래하고),
가을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성군 치하의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 않음[태평 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 태평성대 기원
: 구물거리는 섬나라의 오랑캐들아, 얼른 항복하여 용서를 빌려무나
: 태평세월이 계속됨을 나타냄
결사 부분으로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평화에의 희구를 노래했다. 평화를 지향하려는 작자의 심정이 강건체의 문장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현대역
(서사)
늙고 병든 몸을 통주사(수군)로 보내시므로 을사년(선조38년) 여름에 부산진에 내려오니, 변방의 중요한 요새지에서 병이 깊다고 앉아 있겠는가? 긴 칼을 비스듬히 차고 병선에 굳이 올라가서 기운을 떨치고 눈을 부릅떠 대마도를 굽어보니, 바람을 따르는 노란 구름은 멀고 가깝게 쌓여 있고 아득한 푸른 물결은 긴 하늘과 같은 빛이로구나.(통주사가 되어 진동영에 내려와 병선을 타고 적선을 바라봄)
(본사 1)
배 위에서 서성이며 옛날과 오늘날을 생각하고, 어리석고 미친 마음에 중국에서 처음 배를 만들었다가는 헌원씨(중국 고대 전설적인 황제로 곡물 재배를 가르치고 문자, 음악, 도량형 등을 정했다고 함)를 원망하노라. 큰 바다가 아득하고 넓어서 천지에 둘려 있으니, 참으로 배가 아니면 거센 물결이 굽이치는 만 리 밖에서 어느 오랑캐들이 엿볼 것인가? 헌원씨는 무슨 일을 하려고 배 만들기를 시작하였는가? 왜 그는 천만 년 후세에 끝없는 폐단이 되도록 넓은 하늘 아래에 있는 많은 백성들의 원망을 길렀는가? (왜적의 침범이 배 때문이라 하여 처음 배를 만든 헌원씨를 원망함)
(본사 2)
아, 깨달으니 진사황의 탓이로다. 배가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왜족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일본 대마도로 빈 배가 저절로 나올 것인가? 누구의 말을 곧이 듣고 동남동녀를 그토록 들여서 바다의 모든 섬에 감당하기 어려운 도적을 만들어 두어, 통분한 수치와 모욕이 중국에까지 다 미친다. 오래 사는 불사약을 얼마나 얻어 내어 만리장성을 높이 쌓고 몇 만 년을 살았던가? 남처럼 죽어 갔으니 유익한 줄 모르겠도다. 아, 생각하니 서불(진시황 때의 술객術客)의 무리가 너무 심하다. 신하의 몸으로 망명 도주도 하는 것인가? 신선을 만나지 못했거든 쉽게나 돌아왔으면 통주사(나)의 이 근심은 전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진시황과 서불로 말미암아 왜적이 생긴 것을 개탄함)
(본사 3)
그만 두어라. 이미 지나간 일은 탓하지 않는 것이라는데 말해 무엇하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는 시비를 팽겨쳐 던져 버리자. 깊이 생각하여 깨달으니 내 뜻도 고집스럽구나. 황제가 처음으로 배와 수레를 만든 것은 그릇된 줄도 모르겠도다. 장한(중국 진나라 사람으로 왕이 대사마를 삼았는데 가을 바람이 불자 고향이 그리워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했다고 함)이 강동으로 돌아가 가을 바람을 만났다고 한들 편주(작은 배)를 타지 않으면 하늘이 맑고 바다가 넓다고 해도 어느 흥이 저절로 나겠으며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경치가 좋은 곳에서 부평초 같은 어부의 생활을 자그마한 배가 아니면 어디에 부쳐 다니겠는가? (배가 있음으로 해서 누릴 수 있는 풍류의 흥취)
(본사 4)
이런 일 보면 배를 만든 제도야 매우 묘한 듯하다마는 어찌하여 우리 무리는 날 듯이 빠른 판옥선을 밤낮으로 비스듬히 타고 풍월을 읊되 흥이 전혀 없는 것인가? 옛날의 배 안에는 술상이 어지럽더니 오늘날의 배 안에는 큰 칼과 긴 창뿐이로구나. 똑같은 배이건마는 가진 바가 다르니 그 사이에 근심과 즐거움이 서로 같지 못하도다.(옛날과 지금의 배가 같지만 근심과 풍류가 다름)
(본사 5)
때때로 머리를 들어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며 시국을 근심하는 늙은이의 눈물을 하늘 한 모퉁이에 떨어뜨린다.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에 뒤떨어지랴마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왜적의 흉악한 꾀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안고서 그 백분의 일도 아직 씻어 버리지 못했거든, 이 몸이 변변치 못하지만 신하가 되어 있다가 신하와 임금의 신분이 달라 못 모시고 늙었다 한들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스런 마음이야 어느 시각인들 잊었을 것인가? (해추 흉모에 당한 수치심과 작자의 우국 단심)
(본사 6)
강개를 이기지 못하는 씩씩한 기운은 늙을수록 더욱 장하다마는, 보잘것없는 이 몸이 병중에 들었으니 분함을 씻고 원한을 풀어 버리기가 어려울 듯하건마는, 그러나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의을 멀리 쫓았고, 발이 없는 손빈이 방연(손빈의 친구로 손빈의 재주를 시기하여 그의 다리를 잘랐다가 그에게 죽음을 당함)을 잡았는데 하물며 이 몸은 손과 발이 온전하고 목숨이 살아 있으니 쥐나 개와 같은 왜적을 조금이나마 두려워하겠는가? 나는 듯이 빠른 배에 달려들어 선봉에 휘몰아치면 구시월 서릿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왜적을 헤치리라. 칠종칠금을 우리라고 못 할 것인가? (살분신원을 다짐하는 무인의 기개)
(결사)
꾸물거리는 오랑캐들아, 빨리 할복하려무나.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 법이니 너희들을 구태여 모두 죽이겠느냐? 우리 임금님의 성스러운 덕이 너희와 더불어 살아 가고자 하시느니라. 태평스러운 천하에 요순시대와 같은 화평한 백성이 되어 해와 달 같은 임금님의 성덕이 매일 아침마다 밝게 비치니, 전쟁하는 배를 타던 우리들도 고기잡이배에서 저녁 무렵을 노래하고, 가을달 봄바람에 베개를 높이 베고 누워서 성군 치하의 태평성대를 다시 보려 하노라. (태평성대가 도래하기를 염원함)
이해와 감상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운이 감도는 부산진에 내려온 작자가, 왜적에 대한 비분 강개와 평화에 대한 염원을 노래한 전쟁 가사로서, '태평사(太平詞)'와 더불어 중요한 전쟁 문학의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문화 민족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왜적에 대한 적개심과 연군(戀君)의 정, 그리고 태평 성대에 대한 간절한 희구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가사가 개인의 서정이나 사상의 표출만이 아니라,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민족적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문학 양식임을 보여 주는 한 예가 된다 하겠다.
임진왜란 때 직접 전란에 참여한 작자가 왜적의 침입으로 인한 민족의 수난을 뼈져리게 겪으면서, 싸움배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아 부산에 부임하여 지은 것으로, 왜적에 대한 근심을 덜고 고향으로 돌아가 놀이배를 타고 즐겼으면 하는 뜻과 우국 충정의 의지를 함께 표현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가사가 현실을 관념적으로 다룬 데 반해, 이 작품은 전쟁의 시련에 처한 민족 전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어, 가사가 개인적 서정이나 사상의 표출만이 아니라 집단적 의지의 표현에도 적합한 양식임을 실증하고 있다.
임진란이 발발한 해에서 1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은 가시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죽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뒤를 이어 화친(和親)을 맺고자 교섭이 잦았던 때이다. 노계 박인로가 이 때에 진동영을 부방(赴防)했으니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이 작품에 투영해 보면 어주(魚舟)에 창만(唱晩)하고 성대(聖代)를 누리고 싶다는 작자의 소회(所懷)에 십분 공감이 간다.
표현상 한문투의 수식이 많고 직서적인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결점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전쟁 문학이 일반적으로 범하기 쉬운 속된 감정에 흐르지 않고 적을 위압할 만한 무사의 투지를 담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또한, 작가가 타고 있는 배를 중심 소재로 내세워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도 눈여겨 볼 만하다.
심화 자료
1561년(명종 16)∼1642년(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 때는 무인(武人)으로도 활약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 또는 무하옹(無何翁). 경상북도 영천 출생. 아버지는 승의부위 석(碩)이며, 어머니는 참봉 주순신(朱舜臣)의 딸이다.
그의 82세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보면, 전반생(前半生)이 임진왜란에 종군한 무인으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졌다고 한다면, 후반생(後半生)은 독서와 수행으로 초연한 선비요, 문인 가객(歌客)으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이미 13세에 〈대승음 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어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해 영양군까지 잇따라 함락되자 분연히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 때는 강좌절도사(江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선조 32)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제수받았다.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囊中)에는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이며 가객으로서의 삶이었다. 곧,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 연구에 몰두하였다.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여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였다. 또한, 꿈 속에서 성·경·충·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自省)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덕형(李德馨)과는 의기가 상합하여 수시로 종유하였다. 1601년(선조 34) 이덕형이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영천에 이르렀을 때, 처음 대면하여 지은 시조가 〈조홍시가 早紅枾歌〉이며, 1605년에는 〈선상탄 船上歎〉을 지었다.
1611년(광해군 3) 이덕형이 용진강(龍津江) 사제(莎堤)에 은거하고 있을 때 그의 빈객이 되어 가사 〈사제곡 莎堤曲〉·〈누항사 陋巷詞〉를 지었다.
1612년 도산서원에 참례하여 이황(李滉)의 유풍을 흠모하였고, 그 밖에도 조지산(曺芝山)·장여헌(張旅軒)·정한강(鄭寒岡)·정임하(鄭林下)·정연길(鄭延吉)·최기남(崔起南) 등과 교유하였다. 1630년(인조 8)에는 노인직으로 용양위부호군(龍蚊衛副護軍)이라는 은전(恩典)을 받았다.
1635년에 가사 〈영남가 嶺南歌〉를 지었고, 이듬 해 〈노계가〉를 지었다. 그 밖에 가사 〈입암별곡 立巖別曲〉과 〈소유정가 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蘆溪集, 원본 노계가사(이준철, 계몽사 영인, 1956), 蘆溪歌辭通解(朴晟義, 백조서림, 1957), 개고 박노계연구(이상보, 일지사, 1962), 蘆溪詩歌硏究(李相寶, 二友出版社, 1978), 노계가사신고(김창규, 경북대학교국어국문학회논문집 6, 1958), 蘆溪立巖曲의 系譜(金思燁, 경북대학교논문집 3, 1958), 노계시조분석고(장광덕, 명지어문학 3, 1966), 노계가사의 특질(박성의, 월간문학 3-4, 1970), 蘆溪歌辭問題點考察(黃忠基, 국어국문학 58∼60합병호, 1972), 蘆溪集의 形成(姜銓瓏, 국어국문학 62·63합병호, 1973), 박노계 오륜가소고(김기평, 공주교육대학논문집 11, 1974), 朴萬戶所唱의 立巖別曲考察(金一根, 국어국문학 81, 1979), 立巖別曲과 立巖二十九曲의 對比考察(黃忠基, 국어국문학 82, 1980), 蘆溪의 小有亭歌考(金文基, 국어국문학 84, 198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상탄'의 구성
'선상탄'은 내용을 기준으로 삼을 때,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노계가 왕명으로 통주사가 되어 배 위에 올라 대마도를 굽어보는 모양이 펼쳐지고 있다. 특히 '勵氣瞋目�야 본다'는 데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선상탄의 기본 정서임을 알 수 있다.
둘째 단락에서는 배를 맨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진 헌원씨와 왜국에 사람이 살게끔 함으로써 호전적인 족속을 만들어 놓은 진시황 및 그 사신이었던 서불(徐市)을 탓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침략의 주체, 도구의 근원에 대한 원망을 통하여 반일의 정서를 뚜렷이 한 단락이다.
셋째 단락에서는 배의 유용성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였던 과거와 그렇지 못한 현재의 상황을 대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넷째 단락에서는 비록 젊은 몸은 아니지만 우국충정으로 왜적의 무리가 무찌를 수 있다는 노계 자신의 기개와 기백을 토로하고 있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왜인들이 항복하여 태평스러운 시대가 오면 고깃배를 타고 즐기는 생활을 영위하겠다는 기원을 노래하고 있다.
'선상탄'의 창작 배경
'선상탄'이 창작된 시기인 1605년은 우리 민족이 참혹한 피해를 입은 전란인 임진왜란이 종료된 지 7년밖에 지나지 않은 해로서, 악화된 대일 감정이 지속되고 있던 때이다. 따라서 반일과 극일은 당시 우리 민족의 일반적 정서였고, 또한 정세아(鄭世雅) 휘하의 의병으로 또 성윤문 막하의 수군으로 일본에 대항, 항전에 직접 참여했던 노계의 기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시적 재능을 지닌 노계가 전란의 기억이 생생한 시절에 다시 통주사로 나라 수비의 임무를 맡게 됨에 따라 반일과 극일의 정서, 나아가 우리의 자신감과 우월감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 애호의 정서를 뚜렷이 의경화한 의론지향의 시가인 '선상탄'을 지은 것은 매우 시의(時宜) 적절한 시가 창작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런 작품의 창작 배경은 조선 후기의 군담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상과 굴욕적 침략을 현실적으로 견딘 후에, 이를 이상적으로 초극하려는 의지와 민족의 염원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이런 문학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선상탄(船上歎)
1605년(선조 38)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가사. 전문 68절 144구. ≪노계집 蘆溪集≫에 실려 있다. 지은이가 통주사(統舟師)로 부산에 부임할 때 전선(戰船)에서 전쟁의 비애와 평화를 추구하는 심정을 노래한 작품이다.
내용은 다섯 문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문단은 “늙고 병든 몸을 주사(舟師)로 ”부터 “아득梨 창파(滄波)勘 긴 하堪과 梨빗칠쇠”까지로 나눌 수 있다. 왕명을 받들어 부임하게 된 경위와 각오를 노래하였다.
제2문단은 “선상에 배회悧며 고금을 사억(思憶)悧고”부터 “주사(舟師) 이 시럼은 젼혀 업게 삼길럿다.”까지이다. 황제(黃帝)와 진시황(秦始皇)·서불(徐市) 등을 원망하는 내용이다.
만리 밖의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온 백성이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된 것은 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여, 배를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를 원망하였다.
그러나 문득 깨달으니, 불사약을 구하려고 서불 등을 시켜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과 더불어 동해로 보내 마침내 바다 가운데 모든 섬에 물리치기 어려운 도적을 낳게 한 진시황이 원망스럽다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신하된 자로 신선을 못 만났다고 망명해 버린 서불 등이 더욱 심하였음을 말하였다.
제3문단은 “두어라 기왕불구(旣往不咎)라 일너 무엇悧로소니”부터 “기간우락(其間憂樂)이 서로 枷지 못悧도다.”까지이다. 배로 인하여 생기는 흥취와 풍류를 노래하고 있다. 옛날의 배는 술자리가 어지러운 흥취 있는 배였다.
그런데 지금 지은이가 탄 배는 같은 배로되 술상 대신 큰 검과 긴 창뿐인 판옥선(板屋船 : 널빤지로 위를 덮은, 옛날 싸움배의 하나)이다. 바람 쏘이며 달을 읊어도 전혀 흥이 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당시의 삭막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그렸다.
제4문단은 “시시로 멀이 드러 북신(北辰)을 槨라보며”부터 “칠종칠금(七縱七禽)을 우린槪 못浬 것가”까지이다. 지은이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을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으나, 국운이 불행하여서 왜구로부터 씻지 못할 수치를 받았다고 하였다. 비록 지은이 자신은 미약하고 병들었지만 나라 위한 정성과 장한 기개를 가졌음을 노래한 것이다.
제5문단은 “준피도이(蠢彼島夷)들아 수이 걸항悧야嗜라”부터 마지막 “성대(聖代) 해불양파(海不揚波)肩 다시 보려 悧노라”까지이다.
왜구들에게 항복할 것을 재촉하고, 평화를 되찾아 태평시절이 돌아오면 전선을 고깃배로 바꾸어 타고 풍월을 노래하고자 하는 소망을 읊었다. 이 작품은 무부(武夫)로서의 지은이의 패기와 우국단심(憂國丹心)을 잘 드러내었다.
≪참고문헌≫ 松江·蘆溪·孤山의 詩歌文學(朴晟義, 玄岩社, 1972), 蘆溪歌辭問題點考察(黃忠基, 국어국문학 58∼60 합병호, 1972), 蘆溪詩歌硏究(李相寶, 二友出版社,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륜가(五倫歌(박인로))
조선 중기에 박인로(朴仁老)가 지은 시조. 25수의 장편 연시조로 ≪노계집 蘆溪集≫에 전한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을 주제로 한 5수, 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형제우애를 주제로 한 각 5수, 붕우유신(朋友有信)을 주제로 한 2수에다 작품의 끝에 총론 3수를 덧붙여 마무리한 구성으로 보아 박선장(朴善長)의 〈오륜가〉 형식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주제를 표출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오륜을 힘써 실천할 것을 직설적으로 권유하는 교술성이 강한 것에서부터 자신의 의연한 태도와 결의를 스스로 다짐하는 것, 혹은 자신의 심정과 처지를 정감 깊게 노래함으로써 서정성을 강하게 보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 가운데 북풍의 찬 바람에 임금을 걱정하는 충정을 담은 작품과, 두 아우를 잃은 작자의 외로움을 처연하게 노래한 작품은 서정성과 형상성이 특히 돋보인다.
≪참고문헌≫ 仙源遺稿, 愼齋全書(周世鵬先生遺蹟宣揚會, 1979), 朴善長의 五倫歌(李相寶, 時調文學硏究, 正音社, 1980), 周世鵬과 道德歌(李東英, 국어국문학 84, 1980), 儒敎道德樂章考(金倉圭, 崔正錫博士回甲紀念論叢, 曉星女子大學校出版部, 1984).(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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