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
by 송화은율선(線)에 관한 소묘(素描)․1 - 문덕수
< 감상의 길잡이 1 >
이 시는 이른바 ‘무의미의 시’ 계열의 작품으로, 일체의 관념과 감정을 제거함으로써 이미지와 이미지의 결합에 의한 순수 조형물로서의 시를 보여 주고 있다. 문덕수가 그의 시에 동원하는 이미지들은 대부분 기하학적인 형상을 드러낸다. 기하학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는 그의 시작 태도는 선과 공간으로 요약되는 이미지의 원형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의 시는 이러한 이미지의 결합에 의해 창조되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물론 새로이 창조되는 공간, 새로운 세계는 앞서 지적한 대로 조형적이며, 균제의 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형상들을 놓고 거기에 내포되어 있는 어떤 철학적인 관념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의 시는 이미지 그 자체를 하나의 실체로 보려고 하는 모더니즘적 신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시작 방법은 소재 중심주의적인 시가 갖고 있는 좁은 한계를 벗어나 좀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려고 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 반응, 즉 이미지의 자율성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자유 연상과 자동 기술법이라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원용하는 한편, 거기에 모더니즘의 특성인 분석적 언어 해체의 묘를 가미시키고 있다.
이 시에서 ‘선’은 ‘실뱀’이 되기도 하고, ‘빗살’이 되기도 하고, 다시 ‘꽃’과 ‘불꽃’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유 관념들로서 다만 시인의 잠재 의식 속에서 자유 연상에 의해 우연히 추출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인이 추구하는 바를 찾아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을 뿐더러, 왜 이러한 표현을 했느냐고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것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 감상의 길잡이 2 >
모든 서정시가 인간의 정감을 주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감정을 철저히 제거하여 객관화된 정서를 구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시에서 우리는 엄정한 질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방만한 감정이 절제되어 균형감 있는 정서를 보여줄 때 우리는 또다른 창조적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 시는 `선'이라는 기하학적인 도형에 창조적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달아남과 쫓음이라는 동적인 움직임이 도형인 `선'에 부여되어 유연한 속도감을 얻는다.
1연은 `선'이 달아남을 뱀에 비유하여 뱀의 날렵하고 유연한 이미지를 획득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선은 마치 어두운 카오스에서 창조의 시작인 한 줄기 빛을 연상시킨다. 선이 달아나듯 움직이고 다른 선이 뒤쫓고, 다시 쏟아져 나오는 선은 꽃잎을 물고, 다시 뒤쫓아 물어 무수한 꽃을 만들어 낸다. 선과 선의 연쇄적 움직임은 2연에서 거미줄 같은 무변의 망사로 이루어낸다. 선과 선의 현기증 나는 움직임은 꽃이 떨어지고 그 떨어진 자리에 달걀처럼 동그만 우주가 내려앉음으로써 마감된다. 이로써 현란한 선의 움직임은 우주의 고요한 창조로 귀결되는 것이다. 달걀은 현란한 선의 움직임이 낳은 결과물이지만 창조를 위한 종결이라기보다 창조를 위한 또다른 예비라는 의미를 지닌다. 꽃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내려앉은 우주는 달걀의 형상을 하고 있음으로 해서 그 안에 또다른 생명의 징조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걀은 그 안에 또다른 세계를 담고 있다. 달걀과 같은 우주는 자체로 완결된 것이라기 보다 또다른 창조를 위한 씨앗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기하학적인 상상력은 단순히 공간을 선과 선의 짜임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창조적 우주의 성립으로 귀결시켜 다분히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자칫 추상적인 의미로 떨어지기 쉬운 선의 움직임은 마지막 연에 이르면 창조적 공간을 위한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설: 유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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