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만필(西浦漫筆)
by 송화은율서포만필(西浦漫筆)
송강(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전후사미인가(前後思美人歌)'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이나, 그것은 문자(文字)로써는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 (樂人)들이 구전(口傳)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칠언시(七言詩)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가 없었다. 혹은 택당(澤堂)이 소시(少時)에 지은작품이라고 하지만, 옳지 않다. -송강 가사에 대한 평
구마라습이 말하기를,
"천축인(天竺人)의 풍속은 가장 문채(文彩)를 숭상하여 그들의 찬불사(讚佛詞)는 극히 아름답다. 이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만 알 수 있지, 그 말씨는 알 수 없다."
하였다. 이치가 정녕 그럴 것이다. - 번역으로 손상되는 문체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된 것이 말이요, 말의 가락에 있는 것이 시가문부(詩歌文賦)이다. 사방(四方)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진실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각각 그 말에 따라 가락을 맞춘다면, 다같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을 통할 수가 있는 것은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자기말을 버려 두고 다른 나라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니, 설사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이는 단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 여염집 골목길에서 나뭇꾼이나 물 긷는 아낙네들이 에야디야 하며 서로 주고 받는 노래가 비록 저속하다 하여도 그 진가(眞價)를 따진다면, 정녕 학사대부(學士大夫)들의 이른바 시부(詩賦)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논할 수는 없다. - 국어로 쓴 시문(詩文)의 참됨
하물며 이 삼별곡(三別曲)은 천기(天機)의 자발(自發)함이 있고, 이속(夷俗)의 비리(鄙俚)함도 없으니, 자고로 좌해(左海)의 진문장(眞文章)은 이 세 편뿐이다. 그러나 세 편을 가지고 논한다면, 후미인곡이 가장높고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그래도 한자어를 빌려서 수식(修飾)을 했다. - 송강 가사에 대한 찬사
('서포만필'에서, 홍인표역)
요점 정리
연대 : 숙종(肅宗) 때
작자 : 김만중(金萬重 ; 1637-1692)
갈래 : 수필, 평론
성격 : 비판적, 주관적, 단정적
주제 : 송강가사에 대한 평
의의 : 송강(松江)의 가사에 대한 비평인 동시, 국문학은 국어로 써야 된다는 국어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조선조 비평문학의 고전이다.
내용 : 언어는 제각기 색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잘 살려야만 좋은 글이 되는데, 이러한 의미에서 '관동별곡'과 '전후 사미인곡'이 뛰어나며, 그 중에서도 '속미인곡'이 더욱 뛰어나다.
출전 : 서포만필(西浦漫筆)의 사본
내용 연구
만필(漫筆) : 어떤 주의나 체계가 없이 붓가는 대로 글을 쓰는 일이나 그러한 글. 만문(漫文).
이소(離騷) : 중국 초(楚)나라의 시안 굴원(屈原)이 참소를 받은 슬픔에 읊은 시부(詩賦). 즉, 참소에 의하여 초나라 조정에서 쫓겨난 실의(失意)에 찬 나머지 멱라수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무한한 시름을 적은 장시(長詩). 여기서 이(離)는 '민남·걸림', 소(騷)는 시름의 뜻. 이를 한나라 유향이'초사' 가운데 첫째로 꼽은 데서 연유한 것으로, '동방의 이소'라고 하면 우리 나라 시가에서 첫째라는 뜻이고, 송강 정철의 작품을 우리 시가의 최고라고 하는 말과 같음
문자(文字) : 여기서는 한문을 뜻함.
악인(樂人) : 음악인.
칠언시 : 한 구가 일곱 자로 된 한시의 한 체. 칠언고시와 칠언율시가 있음.
택당(澤堂) : 조선 인조 때의 학자이며, 한문 사대가의 한 사람인 이식(1584~1647)의 호.
구마라습 : 중국 진나라의 승려로, 삼론종의 시조. 원래는 천축인인데 중국에 건너와서 금강경, 법화경 등 많은 불서를 번역함.
천축(天竺) : 옛날 중국에서 인도를 이르던 말.
문채(文彩) : 아름다운 광채.
찬불사(讚佛詞) :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의 가사.
시가문부 : 시와 노래와 문장과 부를 일컬음. 부는 감상을 그대로 쓰는 문체의 일종
천기(天機) : 천부의 성질. 천기(天氣).
학사대부 : 벼슬의 품계에 붙이는 칭호.
천기의 자발(自發)함이 있고 : 이 세 가지 별곡은 온갖 조화를 꾸미는 하늘의 비밀이 저절로 있고, 자발은 외부로부터의 자극 없이 자연히 발동함.
이속(夷俗) : 오랑캐의 풍속.
비리(鄙俚) : 천박스러움
좌해(左海) : 우리나라의 별칭.
전후사미인가 : 송강의 가사인 '사미인곡(思美人曲)'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말한다.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다 : 아무 멋도 맛도 뜻도 모르고 그저 기계적으로 재간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염집 골목에서~저속하다 하여도 : 민간에서 일반 서민들이 서로 읊조리는 것이 비록 속되고 촌스럽다 하더라도. 서민들의 노래에 담긴 감정이 진솔하고, 풍부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사대부들의 시부보다 훨씬 가치 있다는 뜻으로 서포의 문학론과 국어 존중에 대한 인식을 확인케 해 주는 부분이다.
이속(夷俗)의 비리(鄙俚)함도 없으니 : 오랑캐의 풍속같이 풍위가 없고 속된 데가 없으니.
유독 중국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 중국문학만이 가치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로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탈피.
관동별곡과 전미인곡은 ~ 수식을 했다 : '관동별곡' 과 '시미인곡'이 '속미인곡'보다 못한 것은 한자어를 빌려서 표현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나무꾼이나 아낙네들 ~ 논할 수 없다 : 진솔한 감정을 담은 우리말 노래야말로 진정 가치가 있다.
삼별곡은 ~ 좌해의 진문장 : 우리에게도 어느 나라 못지 않은 훌륭한 문학이 있다.
이해와 감상
조선조의 평론 문학은 대체로 '시화류(詩話類)'의 문집에 섞여 있었고, 수필과 비평의 구분이 확실하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서포(西浦)를 중심으로 하여 허균, 홍대용, 박지원, 홍만종 등이 이와 같은 예에 속하며 모두 탁월한 문학관과 비평을 남겼다. 여기서 소개된 부분은 서포의 문학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것으로, 국어로 표현된 문학이 참문학이라는 국문문학론을 펴서 국어 존중론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국문 문학론은 국문학사상 국어 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뛰어난 평론 문학관이라 할 수 있다.
서포 김만중은 한문학을 숭상하던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우리말의 가치를 높이 인식할 줄 알았던 선각자였다. 그는 송강의 '관동별곡'이나 '전후미인가'의 뛰어난 가치를 그 언어적 조건에서 찾았다. 그는 우리에게도 생각이나 감정을 잘 나타낼 수 있는 훌륭한 글이 있는데,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의 말을 쓰는 것은 마치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처럼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라,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革新)적인 생각에 이를 수가 있었다.
우리말에 대한 이러한 가치 인식을 토대로 그는 학사대부의 시부보다 초동급부의 노래소리가 훨씬 더 진실한 것임을 간파했다. 우리 민요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송강의 가사 중 '후미인곡(속미인곡)'이 특히 아름답다고 했는데 그것은 이 작품이 다른 작품에 비해 순연히 우리말을 구사하여 노래한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말의 가치를 중시한 서포의 이러한 생각은 국문 문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문학만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던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우리말 문학의 가능성과 그 훌륭함을 일깨워 주었으며, 천박하게만 여겼던 우리말 문학에 대한 생각에 일대 전환을 일으켜 민요와 같이 진솔한 생활 감정을 우리말로 담아 내는 문학이야말로 참 문장임을 널리 천명했던 것이다. 서포의 이러한 생각은 실로 민족 정신의 자주적 발양이며, 국학 정신의 선각자적 선언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 부분은 송강(松江)의 가사인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전후 사미인곡을 평한 부분으로, 송강의 가사를 한마디로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라하여 우리나라 시가의 최고라 했으며, 거듭 '좌해 진문장'이라 하여 우리나라의 참문장은 위에 열거한 세 편의 시가라 했다. 또한, 그중에서도 순수 국어로 표현된 후미인곡이 가장 뛰어나다고 평했으며, 서포는 송강의 가사를 평하면서, 시화(詩話)의 전통에 따라 시어의 희롱에 그치지 않고, 나라말의 묘미를 살린 것이면 어떤 나라 시라도 귀신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태도를 확실히 했다. 곧 언어는 제각기의 색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잘 살려야만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서포의 주체성 강조는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고, 지금처럼 모국어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세태를 비판적 안목으로 한번 눈여겨 볼만하다.
이해와 감상1
조선 후기에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수필·시화평론집. 2권 1책. 필사본. 여러 이본들이 전한다. 내용은 거의 같다. 이 책의 내용 중에서 ‘여재서새시(余在西塞時)’라는 대목으로 보면 1687년(숙종 13) 선천(宣川) 유배 이후인 말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서포만필≫ 권두에 김춘택(金春澤)의 서문이 있다. 권1인 상권에 102조, 하권에 161조 등이 실려 있다. 내용의 대부분은 우리 나라 시에 관한 시화(詩話)로 이루어져 있다. 또 소설이나 산문에 관계되는 것도 섞여 있어 수필·평론으로 다루어야 할 것도 있다.
≪서포만필≫은 작자 김만중의 사상적 편력과 박학한 지식을 알려주는 여러 가지 기사들이 엿보인다. 불가(佛家)·유가(儒家)·도가(道家)·산수(算數)·율려(律呂)·천문(天文)·지리(地理) 등의 구류(九流)의 학에 대한 견해가 점철되어 있다.
이 책에는 불가에 대한 작자의 긍정적 시각이 여러 번 나타난다. 이 때문에 진작부터 판본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필사본의 형태를 유지하여 전해지게 된 것 같다.
≪서포만필≫은 문학관의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은 한·중 문체의 비교, 통속소설관, 번역문학관, 조선조 시가관 그리고 국어관의 확립을 통한 소위 ‘국민문학론’ 등 김만중의 선각적 이론을 모두 담아내고 있다.
특히 여항(閭巷)의 나무하는 아이나 물긷는 아낙네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비록 쌍스럽다 하지만, 그 참값을 논한다면 사대부들의 시부(詩賦)보다 낫다고 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사대부들의 시문이 중국 한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이를 앵무새의 노래와 같다 하여, 조선 사람은 조선의 말로 글을 써야 한다는 높은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
≪서포만필≫은 김만중의 진솔한 문학관·불교관·유교관·도교관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김만중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라 하겠다.
≪서포만필≫의 이본은 현재 등사본으로 문림사본(文林社本)·고려대학교 도서관본이 있고, 수사본(手寫本)으로 조윤제(趙潤濟)·이가원(李家源)·임창순(任昌淳) 본과 국립중앙도서관본 등이 있다. 1971년 통문관에서 ≪서포집 西浦集≫과 함께 합책하여 영인하였다.
≪참고문헌≫ 西浦集·西浦漫筆解說(丁奎福, 通文館, 1971), 金萬重論(丁奎福, 韓國文學作家論, 螢雪出版社, 1977), 金萬重硏究(丁奎福 解說, 새문社, 1983), 金萬重의 詩論硏究(洪寅杓, 省谷論叢 15, 1984).(자료 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김만중(金萬重/1637~1692)
조선시대의 문신·소설가. 본관 광산(光山). 자 중숙(重叔). 호 서포(西浦). 시호 문효(文孝).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校理)를 거쳐 71년(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하였다. 이듬해 겸문학(兼文學)·헌납(獻納)을 역임하고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작고하여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등용되어 79년(숙종 5) 예조참의, 83년(숙종 9) 공조판서, 이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조지겸(趙持謙) 등의 탄핵으로 전직되었다.
85년 홍문관대제학, 이듬해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있으면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들 창협(昌協)의 비위(非違)까지 도맡아 처벌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상소했다가 선천(宣川)에 유배되었으나 88년 방환(放還)되었다. 이듬해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다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여기서 《구운몽(九雲夢)》을 집필한 뒤 병사하였다. 《구운몽》은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것으로 전문을 한글로 집필하여 숙종 때 소설문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한편,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국문학관을 피력하였다. 98년(숙종 24) 관직이 복구되고 1706년(숙종 32) 효행에 대해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저서에 《구운몽》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서포만필(西浦漫筆)》 《서포집(西浦集)》 《고시선(古詩選)》 등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서포만필(西浦漫筆)
조선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낸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1637∼92)의 수필집으로 2권 2책. 사본. 중국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여러 학설 중에서 의문되는 대목을 번역·해명하고 신라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는 명시(名詩)들을 비평하였다. 특히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을 평한 문장에서, 한국 사람이 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을 배우고 있음을 개탄하고, 한문 문장에 비하여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당시의 정세로 비추어볼 때 놀랄 만큼 진보적이며 주체적인 탁견(卓見)이었다 하겠으며, 조선조 문학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김만중의 문학관
김만중은, 문학은 도(道)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서포만필'의 다음 글에서 이러한 점을 알 수 있다.
백사 이공(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을 갈 때 철령을 지나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실어다가 / 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 볼까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었다. 하루는 광해군이 뒤뜰에서 잔치를 하며 노는데, 이 시조를 노래하는 궁녀가 있었다. 광해군은 "처음 듣는 노래로구나. 누가 지었다더냐?"하고 물었다. 궁녀가 "장안에 널리 불려지는데 이모의 작이라고 하더이다"라고 대답하니, 광해군은 이 시조를 다시 부르게 하고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한다. 시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와 같다.
광해군에게 도(道)를 역설한 이항복은 배척되었지만, 광해군을 생각하는 심정을 노래한 이 시조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지만,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홍대용의 '대동풍요서(大東風謠序)'에서
입으로 불러 노래가 되는 것이지만, 그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곡조가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천진(天眞)은 드러나는 것이다. 나무하며 부르는 노래나 농사지으며 부르는 노래라 하더라도 자연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이리저리 주워 모아 다듬으면서, 말은 옛 것을 쓰면서 천기(天機)를 깎아 없앤 사대부의 시(詩)보다 오히려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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