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과 주시경
by 송화은율서재필과 주시경
최 정 호( 연세대 신문학)
서재필은 1866년에, 그리고 주시경은 1876년에 태어났다. 서재필은 1951년에 여든여덟살의 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으며, 주시경은 1919년에 서른아홉살의 한창 나이에 요절했다. 올해 1978년은 서재필의 27주기가 되는 해이자 주시경의 탄생 102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서재필은 주시경보다 10년 앞서 태어나서 주시경보다 두곱도 더 되는 긴 삶을 살았다.
주시경은 한국 땅에 태어나 38년이란 삶을 오직 한국 땅에서만 발을 붙이고 살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의 연구에 몸을 바치고 끝내 한국 사람으로 죽었다. 주시경의 외길을 걸은 이러한 삶의 이력에 견주면 서재필의 삶은 사뭇 갈피가 어지럽다. 그는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 85년의 긴 생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63년 동안을 미국에서 살았고, 끝내 필립 제이슨이란 미국의 시민으로 미국 땅에다 뼈를 묻었다. 그가 순전한 한국 사람으로 한국 땅에 살았던 십대 끝까지의 19년 동안에도 서재필은 일본 육군 유년 학교에 유학하려고 꼭 1년 동안 외국 생활을 한 일이 있다. 그가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한국 개화사에 가장 찬연한 기여를 한 바 있던 제 1 차 귀국 시절이나, 1947년에서 1948년까지 남조선 과도정부 최고 정무관으로 일하던 제 2 차 귀국 시절에도 서 재필은 이미 미국 시민이 되어 있었다.
주시경의 생가는 황해도 무릉골의 가난한 선비의 집안이고, 그가 열세살 되던 해에 양자로 든 서울 큰아버지 집안은 남문시장에서 해륙물산 위탁판매업을 하고 있던 장사치였다.
요절한 주시경에 견주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육이오의 남북 전쟁까지 멀리서 구경하며 조용히 세상을 떴던 서재필은 그의 아버지가 전라도 동북군의 군수로 있을 때에 출생했으며 그 집안은 예부터 많은 인물이 나왔을 뿐 아니라 그의 선대에는 서종제라는 이의 딸이 영조 대왕에게 출가한 인연으로 해서 왕가와 외척 관계에 있던 명문 귀족이었다. 서재필이 일곱살되던 해에 공부하려고 서울로 올라와 머물러 있었던 외가댁의 외숙 김성근은 그때에 판서의 직위를 맡고 있던 장안 정계의 거물급이었다.
얼핏 보아 서재필과 주시경은 이처럼 그들의 태어남과 삶과 죽음에서 서로 동떨어진 관계에 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서로 맺는 대목은 무엇인가?
한국 땅을 무대로한 서재필의 활약은 세 시기로 매듭된다. 첫번째는 1884년의 갑신 정변의 시기이니 서재필의 나이 겨우 열아홉살 때의 일이다. 두번째는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 12년 만에 돌아와 1896년부터 1898년까지의 2년 동안으로 그가 정부의 중추원 고문으로 활약하던 시기이다. 그의 나이는 이때에 삼십대의 장년기에 들어선다. 한국 땅에서의 그의 이 제2기는 비단 개인의 생애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 세기 말의 한국 근대화 운동에서도 가장 찬란한 고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이 서재필을 만나 크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도 이 시기이다. 따라서 이 글의 중점도 저절로 여기에 주어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재필이 한국에서 활약한 세번째 시기는 1947년부터 1948년까지의 1년 동안 미군정청의 고문으로 초빙되어 와 남조선 과도 정부의 최고 정무관으로 일하던 제 2 차 귀국 시기이다. 이때에 그는 나이가 이미 여든이 넘은 노년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거의 때를 같이 해서 두번째로 미국에 되돌아간 그는 3년 뒤에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몸이 되고 말았다.
1884년의 갑신정변 때 서재필은 스무살의 고개도 넘지 못한 십대 말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이 정치극의 한 주동 인물로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이해 봄에 그는 일본의 육국 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고종에게 사관 학교 창설을 진언하여 그 교장이 될 것을 약속 받은 바 있었다. 이에 앞서 열세살되던 해에 전강에서 장원 급제를 하기도 한 그는 그러고 보면 문과 무를 다 갖춘 한말의 빼어난 개화 엘리트였다. 김옥균, 박영효 들과 함께 쿠데타에 참여한 그는 갑신정변의 삼일천하에서 홍안의 소년으로 병조참판 및 정령관이 된다. 그는 “혁명의 신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의에 잠긴 혁명가 서재필은 박영효, 서광범 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국내에 남은 그의 가족은 역적 가족이라고 하여 체포령이 내려져 아버지, 어머니, 형, 아내는 약을 먹고 자살하고, 아우는 칼에 맞아 죽었으며 두살 먹은 어린 아들은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었다. 더러는 그의 망명과 미국에의 귀화에 대해서 논란도 있으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다른 대책이 있을 수 없었던 당사자의 선택은 그 한계 상황을 자기 것으로 겪지 않은 바깥 사람이 함부로 시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의 미국 망명을 비난함은 마치 히틀러의 독일에서 외국으로 망명하여 목숨을 건진 저항 투사를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몰아세우는 비난처럼 공허한 메아리를 낳을 것 같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새 삶을 시작했다. 이것은 미국에 같이 망명한 세 사람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어린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새로운 환경에 대한 강인한 적응력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세 사람 가운데서 그의 아저씨되는 서광범은 일본에서 알게 된 언더우드의 소개로 뉴요크에 있는 그의 형이며 부호인 언더우드로부터 여비를 받아 맨먼저 홀로 떠나 버렸다.
뒤에 처진 박영효와 서재필은 극도의 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외국 생활에서 아주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서재필은 나이도 젊었고, “내 생활은 내 힘, 내 손으로 개척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막노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영효는 그러지 못했다. 그는 본디 귀엽게 자랐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사위로 지금까지의 생활이 “손가락 한 개 움직이지 않고 지내 오던 귀공자”의 생활이라 노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도꾜 유학 시대에 알게 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카되는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 그에게 배삯을 빌어 두달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때에 박영효가 남긴 것이라고 전해지는 얘기가 흥미롭다.
“미국 사람들은 양반을 몰라 본다. 양반이 노동을 할 수는 없다. 일본서는 내가 양반인 것을 알아줄 것이기 때문에 설마 천한 일은 안 하게 될 것이다.”
같은 개화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박영효와 서재필의 차이는 여기에서 두드러진다. 박영효는 미국이라고 하는 새로운 천지, 곧 고국과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공간적으로 단절된 신세계에 와서도 여전히 양반이라는 한국의 전통 사회의 신분을 나와 남을 향하여 고집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지리적인 공간이 전혀 다른 새로운 환경속에서도 동일한 사회적인 시간 속에서 살고 있었던 셈이다. 비록 몸은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주의의 나라인 미국에 맡기고 있었지만 그의 의식은 단절됨이 없는 한국 사회의 신분질서 속에서 헤메고 있었다. 분열과 단절이 있었다면 오직 그를 둘러싼 바깥 세계에 있었을 뿐이지 그의 내부 세계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는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던 통일된 인격이었다. 그래서 그의 “과거”를 인정해 주지 않는 “현재”를 그도 현실로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서재필에게는 미국은 다만 지리적인 공간으로서 새로운 환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시간에서 보더라도 전혀 새로운 출발점을 의미했다. 그의 “과거”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자마자 “백지상태”로 되어 돌아 갔다. 왕가의 외척 관계에 있는 명문 귀족의 가문 출신이요, 열세살에 장원 급제하고 일본 육군 유년학교를 졸업한 개화 엘리트로서 갑신정변의 삼일 천하에서 병조 참판이 된 서 재필은 죽고, 새로운 서재필이 다시 삶의 원점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의 가문이나 신분이나 과거의 지위 같은 것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하루에 수십리를 돌아다니면서 남의 집 대문을 기웃거리며 광고지를 돌리는 일에서부터 농장에서 포도를 따 주는 일, 학교 교장 집의 정원 일을 돌보아 주는 일과 같은 “천한 일”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칠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조지 워싱턴 대학의 의학부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고 그로부터 삼년 뒤에는 미국 철도 우편 제도 창설의 공로자인 조지 암스트롱의 둘째 딸과 결혼했다. 그때에 그는 이미 미국 시민권을 얻은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이 되어 있었다. 그는 “두 세계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과거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현재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 개의 삶, 두 개의 인격을 산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새 서재필”을 어느 날 뜻밖에 “과거”가 다시 방문했다. 그는 다시 미국에 망명한 박영효를 12년 만에 우연히 워싱턴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영효를 만난 그는 고국의 사정을 듣고 불현듯이 서울로, 그의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은 억누를 길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미국 생활을 통해서 더욱 단단하게 다져진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한국에 실현할 수 있는 오랜 기다림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내와 더불어 부랴부랴 귀국의 채비를 서둘렀다.
그의 생애에 한국에서 활약하게 되는 두번째 시기, 그리고 가장 눈부신 시기가 시작되었다. 고국에 돌아온 서재필은 외무 대신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를 굳이 사양했다. “환국한 주요 목적이 인민을 가르치고 인민을 지도 계발하려는 데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정동에 있는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 머물면서 미국의 한 시민으로서 중추원 고문의 일을 맡았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의 독립은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고 확신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을 발간해야 되겠다고 뜻을 굳혔다. 그는 곧 내무대신 유길준을 찾아가 교섭하여 정부 예산에서 오천원의 보조금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마침내 1896년 4월 7일에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의 창간호는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일찌기 영국의 토머스 칼라일은 “종이와 인쇄술이 있는 곳에 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의 독립신문이 가로 22 센티미터, 세로 33 센티미터의 한지에 인쇄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에 과연 이곳 한반도에는 하나의 거센 혁명의 물결이 일게 되었다. 그것은 한국 역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커뮤니케이션의 대혁명이었다.
1896년의 한국 사회는 위로 “대군주 폐하”를 모신 신분의 위계 질서가 예부터 지배해 온 폐쇄 사회였다. 그 속에서 독립신문은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 하고 모두 조선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이라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로써 그것은 나라의 조정과 그 바깥과 사회의 여러 신분을 세로 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구실을 굳건히 맡고 나섰다.
독립신문의 창간은 다만 사회의 위 아래를 꿰뚫는 수직 커뮤니케이션의 구실만을 노린 것은 아니다.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겠다고 한 독립신문은 그래서 “우리가 서울 백성만을 위할 게 아니라”고 못박아 두고 있다. 그렇기에 나라의 중앙과 지방을 가로지르는 수평 커뮤니케이션의 다리를 놓으려고 독립신문은 그 제1호에 “분국이 제물포, 원산, 부산, 파주, 송도, 평양, 수원, 강화 등지에 있더라”고 “광고”하고 있다.
한편 독립신문은 나라를 세로 지르고 가로 지르는 커뮤니케이션의 길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안팎을 서로 연결하는 “세계와 한국”의 다리이고자 하였다. 따라서 “외국 사정도 조선 인민을 위하여 간간히 기록할 터이니 그걸 인연하여 외국은 가지 못하더라도 조선 인민이 외국의 사정도 알 터”라 하였고 거꾸로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 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하리라고 하였다. 요즘말로 “대외 홍보” 또는 “국제 커뮤니케이션”을 꾀한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처럼 나라 안과 밖과 서울과 지방을 잇고, 남녀, 노소, 상하, 귀천을 잇는 신문이 발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를 사볼 만큼 돈이 없거나 글을 읽을 만큼 배우지를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림의 떡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독립신문은 “취리하려 하는 게 아닌 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남녀, 상하 귀천이 모두 보게” 하려고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기로 하였다. 독립신문은 다만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일 뿐만 아니라 도대체 한국 역사에 최초로 인쇄된 한글 전용의 공기록이었다. 그것은 한국인의 문자 생활에서 세종대왕 이래의 큰 혁명이요, 그런 점에서 그것은 참된 뜻에서의 커뮤니케이션 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의 정신이란 다름아닌 독립이요, 평등이요, 자유요, 민주주의의 개화 정신이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신문만으로는 대중에게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고취하기가 곤란할 듯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무슨 정치적인 당파를 하나 조직하여 여러 사람의 힘으로 그 사상을 널리 전파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독립신문이 궤도에 오르게 되자 곧 같은 해 7월에 이상재, 이 준, 윤치호, 이동녕, 이승만 들의 서른명쯤의 동지들을 모아 독립협회를 결성하였다. 독립협회는 지난 날에 중국 사신들이 오면 잔치를 베풀어 주던 모화관을 뜯어고쳐 “독립회관”이라고 부르고 거기를 본부로 삼아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민중 계몽 운동에 나섰다. 독립신문이 “대중 매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간접 방편이었다고 한다면 독립협회는 “대중 조직”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의 더 인간적인 직접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중 강연, 공중 토론, 일간 신문 및 그때에 이용할 수 있던 교육 시설 같은 것으로써 조선의 평민 교육을 해 보겠다”고 생각한 서 재필은 요즘 말로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채널”을 동원하려는 그의 전략을 더욱 밀고 나갔다. 그는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는 무상한 방편이 아니라 “어떤 영구적인 건설 곧 공원이나 대중 건물이나 혹은 공중 대로 같은 것을 건설하고 ‘독립’ 이라 명명하여 그 독립이라는 글자가 조선 사람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주도록” 궁리해 보았다. 이리하여 그는 귀국한 해의 11월에 독립협회를 발기해서 서대문 밖 무악재의 옛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독립신문, 독립협회, 독립문, 곧 대중 매체, 대중 조직, 조형의 상징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의 이 세 가지 통로는 글과 말과 물체를 통해서 “독립 사상”을 고취하려는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전략가 서재필이 한국 근대화 운동을 위해서 만든 세 개의 밑기둥이요, 세 개의 금자탑이었다.
일찌기 열아홉살의 어린 나이로 그가 참여했던 갑신정변이 왕권을 등에 업고 “위로부터의 혁명”을 꾀한 엘리트 주의의 발상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면, 독립신문, 독립협회, 독립문의 총체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동원하여 30대의 서 재필이 전개한 민중 계몽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꾀한 새로운 형태의 개화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갑신 정변이 권력 지향의 정치 혁명, 얼마 안 되는 엘리트에 의한 정치 근대화에의 발돋음이었다고 한다면 독립협회 운동은 더 많은 민중을 발판으로 삼은 보편적인 문화 혁명, 민주주의 사상 교육이었다.
갑신정변에 뛰어든 서재필에게는 명치유신 뒤의 일본, 특히 그의 부국 강병 정책의 상징인 육군 유년학교 유학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 재필에게는 12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통해서 미국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배경이 있었다. 일본에서 십대의 서 재필이 국가를 배웠다면, 미국에서 이십대의 서 재필은 “인민”을, “민중”을 발견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
주시경이 만난 서재필은 이 제2의 서재필, 곧 새로운 서재필이었다. 그러나 주 시경은 서 재필을 만나기에 앞서 이미 “주시경”이 되고 있었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이회중이란 진사의 서당에서 1892년 곧 열일곱살 때까지 한문을 공부하던 주 시경은 어느날 홀연히 마음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내가 배우려고 하는 것은 결국 한문으로 씌어진 뜻, 그 교훈이 아닌가? 말이라는 것은 결 국 우리의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요, 한문도 결국은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어려운 한문을 통하지 않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우리말을 가지고 어떠한 교훈을 가르 치게 되면 우리는 당장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한문을 배워야만 그 교훈 을 알게 되어 있으니, 만일 우리가 저 교훈을 우리말로 적어 놓기만 하면 얼마나 편리하고 쉬 깨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자 주시경은 서당 공부가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옳지,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의 말이 있고 그 말을 적을 수 있는 훈민정음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한문만을 글이라 하고 훈민정음은 돌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절대로 옳지 못한 일이다. 한문은 중국의 말을 적은 것이 아닌가? 우리말이 중국말보다 못할 것이 무엇이며, 훈민정음이 한자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아니, 훈민정음이 한자보다 못한지 않을 정도가 아니다. 그 어렵고 배우기 힘든 한자에 비한다면 훈민정음은 얼마나 알기 쉽고 아름다운가? 그렇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훈민정음을 내가 빛내어 보리라. 바로잡아 보고 말겠다.”
주시경의 이 깨달음과 마음 잡음은 우리나라 언어와 문자 생활의 바른 길을 열게 되는 국어학 역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제 나라 말과 글을 바로 깨닫고 바로 쓰려는 이 너무나도 당연한 자각이 주시경이라는 한 소년의 머리에 떠오르기까지 한국의 역사가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에도 450년 동안이나 기다려야 했었으니 말이다. 진리란 참으로 가까운 데에 있는 것이요, 천재란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잊어버리고 있는 진리를 깨닫는 사람이다.
한문의 마력에서 깨어난 주시경은 서당을 뛰쳐나와 1895년의 단발령이 내리기에 한해 앞서 스스로 머리를 깎고 배재 학당에 들어갔다. 서재필이 돌아와 한때 배재 학당에서 교편을 잡게 되자, 주시경은 그에게 배우게 되었고 그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서재필이 순 한글로 독립신문을 발간했을 때에는 주시경은 그의 회계 및 교보원으로 뽑혔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에도 주시경은 주동 인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또 한편으로 입헌 정치 사상을 고취한 서재필의 입김으로 배재 학당에 진보적인 정치 단체인 협성회가 조직되었을 때에도 주시경은 양흥묵, 이승만, 신흥우와 함께 발기인이 되었다.
서재필이 정치 혁명보다 보편적인 문화 혁명으로 그 활동의 궤적을 넓히고 있었다면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의 문화적인 자각에서 우리나라와 겨레의 정치 개화라는 더 일반적인 차원으로까지 그의 활동의 폭을 넓혀간 셈이다. 서재필이 1898년에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간 뒤에 주시경의 국어 연구는 더욱 깊어졌다. 1907년에 그의 건의에 따라 정부가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두게 되자 그도 위원으로 뽑혔다. 1908에는 그의 [국어 문법]이, 1914년에는 [말의 소리]가 책이 되어 나왔다. 그것들은 짧지만 굵직한 삶을 산 생애의 이정표들이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역사의 큰 고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매우 여러 갈래의 교양을 몸에 지닌 “보편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 재필은 과거에 장원 급제한 유학자요,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군대 교육을 받은 군인이요, 혁명 투사요, 신문 발행-편집인이요, 교육자요, 정치가요, 의사였다. 주시경도 국어 학자이면서 개화 투사요, 신학문에 대한 그의 욕구는 항해술, 측량술, 의학, 영어, 일어, 중국어, 기계학, 종교학에 이르기까지 그의 공부의 폭을 넓혀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서재필과 주시경을, 오직 우리나라의 근대 커뮤니케이션 혁명이라는 측면에서만 잡아보려고 꾀했다. 대중매체나 대중 조직만이 아니라 무릇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기본 수단으로서의 말과 글의 세계에서 서재필과 주시경은 같은 뜻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은 우리나라의 선각자였다.
서재필과 주시경이 시작한 우리말과 글의 혁명은 그러나 오늘에 이르도록 완수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한글의 문화 혁명은 전진과 후퇴를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현재도 진행중이다. 앞서 간 사람들의 일의 바로 이러한 “미완성”이 뒤에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취 뒤의 잊어버림 속에서 편히 잠들 수 없게 한다. 그런 뜻에서는 서재필과 주시경은 “어제의 사람”이 아니다. 아직도 “오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문제”는 지금도 “우리의 문제”이다.
이 땅의 사람들(뿌리깊은나무사) (93 박은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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