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서동요 / 향가 / 이해와 감상, 배경설화, 핵심정리 / 서동(백제무왕)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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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해설

이 단원은 이 단원에서는 고대 시기 국어 생활의 특징을 이해하고 우리말 표기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문자 생활 양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으며 아울러 우리말의 기원과 형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 고유 명사 표기 자료와 향찰 자료들을 제시하여 이들 차용 표기 자료에 반영된 원리를 이해하고 이를 적용하여 다른 사례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러 가지 지명 표기와 향가 자료를 기반으로 이러한 표기법의 채택 배경 및 원리를 이해하도록 하였는데 이 사례들로부터 고대로부터 우리말을 제대로 표기하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 왔음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 글의 특성

향찰(鄕札)로 표기되어 있다.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 핵심 정리

작 자 : 서동(薯童)[백제무왕(武王)]

연 대 : 신라 진평왕(眞平王) 599년 이전 때, 백제 무왕의 젊은 시절

종 류 : 향가(4구체)

문 체 : 운문체

성 격 : 민요적, 예언적, 암시적 - 참요적(讖謠的)

제 재 : 선화 공주의 비행(非行)

구 성 : - - -

주 제 : 선화 공주의 비행(非行) 폭로, 아내를 얻기 위한 계락

 

. 전문의 짜임

 

서동요 본문

善化公主主隱 선화 공주님은

他密只嫁良置古 남 몰래 결혼하고

薯童房乙 맛둥서방을

夜矣卯乙抱遣去如 밤에 몰래 안고 가다.

 

양주동의 해석

善化公主主隱 善化公主니믄
他密只嫁良置古 지 얼어 두고
薯童房乙 맛둥바
夜矣卯乙抱遣去如 몰 안고 가다.


<풀이>
(착할 선) (화할 화) (귀인 공) (주인 주) (숨을 은) : 음차(音借)
(주인 주) : 훈차(訓借)
(다만 지) (좋을 량) (옛 고) : 음차(音借)
(다를 타) (비밀 비) (시집갈 가) (놓을 치) : 훈차(訓借)
(아이 동) (방 방) (새 을) : 음차(音借)
(참마 서) : 훈차(訓借)
(어조사 의) (토끼 묘) (새 을) (보낼 견) : 음차(音借)
(밤 야) (안을 포) (갈 거) (같을 여) : 훈차(訓借)

 

서동요의 이해와 감상 : 백제의 서동(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 향가로 백제의 서동(薯童:백제 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지었다는 한국 최초의 4구체(四句體) 향가(鄕歌). 민요 형식의 이 노래는 이두(吏讀)로 표기된 원문과 함께 그 설화(說話)삼국유사(三國遺事)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전한다. , 무왕이 어릴 때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善花公主)가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 사모하던 끝에 머리를 깎고 중처럼 차려 신라 서울에 와서 마[]를 가지고 성안의 아이들에게 선심을 쓰며 이 노래를 지어 그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

 

내용은 선화 공주가 밤마다 몰래 서동의 방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는데, 이 노래가 대궐 안에까지 퍼지자 왕은 마침내 공주를 귀양보내게 되었다. 이에 서동이 길목에 나와 기다리다가 함께 백제로 돌아가서 그는 임금이 되고 선화는 왕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당시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로 보아 이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부정하는 설이 있다. 가장 타당한 설은 익산(益山) 미륵사(彌勒寺)의 연기(緣起)설화로서, 백제의 멸망 후 미륵사 승려들이 절을 구하고자 신라와 미륵사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지어낸 설화라는 것이다.

 

서동은 백제 무왕(武王)의 아명(兒名)이다. 이 노래는 선화 공주의 비행을 발설하여 왕궁에서 쫓겨나게 함으로써 마침내 자기의 아내로 맞을 수 있게 한 일종의 참요(讖謠)이다. 정교한 10구체 향가와는 달리, 4구체의 민요 형식에 의한 직설적인 표현으로 초보적인 표현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자신의 잠재적 갈망(渴望)과 욕구를 상대방의 것으로 전도시켜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어서 남몰래 얼어 두고란 표현도 진부하거나 천박해 보이지 않는다.

 

이 노래의 표기 체계는 한자를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던 향찰(鄕札) 표기이므로 정확한 해독은 어렵다. 우리는 이 노래가 안고 있는 동요적(童謠的)인 단순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설화 그대로 어떤 재기 발랄하고 야심 많은 한 젊은이가 몽환적(夢幻的)인 사랑을 재치와 기지로서 현실로 실현시키는, 한 영웅의 일대기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다. 노래의 내용은 남녀상열의 행동을 직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는 서동이 당시에 전승되어 불려지던 민요를 입수하여 그 가사에 고유 명사인 서동과 선화공주만을 대체시켜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발견해도 어떤 깊은 문학적 배경은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배경 설화의 내용에서처럼 서동이라는 한 영웅이 시련을 극복하고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서동은 용자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에 의해 성공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서동요는 이런 성공의 기능을 제시하고 있다.

 

서동요 배경 설화 :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극간(極諫)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며 시위(侍衛)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지는 모르나 우연히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맞는 것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니 지금 그 소재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에게 가서 금을 옮길 방책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중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서동(薯童 : 600-641) : 백제 제 30대 무왕. 휘는 장(). 아명이 서동(薯童). 신라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하였고, 당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병을 청하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서자 25(624)년에 당에 조공을 하여 당고조(唐高祖)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사비궁을 중수하고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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