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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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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 색인 : 샤르트르, 싸르트르

 

· 파리 해군 기술장교였던 쟝 바티스트 사르트르의 장남으로 출생

· 어머니 안느 마리 시바이쩌는 노베평화상 수상자인 시바이쩌의 사촌

 

󰏐 사상

 

❶ 존재(存在)와 무(無)

 

의식과 대상의 두 영역을 인정, 대상(객관적 존재)은 나의 의식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고 나의 의식도 내가 의식하는 대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의식으로서의 존재(즉자존재·卽自存在)와 그것의 대상으로서의 존재(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했다. 즉 즉자존재는 그냥 있는 것, 충만된 것, 안정된 것, 즉 대상으로서의 모든 사물을 가리킨다. 사람도 대상화되면 즉자존재이다. 이에 대해 대자존재는 공허한 것, 욕망하는 것,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 했다. 이것은 곧 의식을 가진 인간을 말한다. 이같은 인간 존재를 다른 사물과 구별하여 실존(實存)이라 했다.

 

그는 또 대자존재(인간의식)에는 마치 과일의 심에 벌레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본시 무(無)가 들어 있다. 그러나 ‘무가 있다’는 것은 모순형용이므로 그는 ‘무는 있지 않고 있어진다.’라고 말했다. 바로 이 무 작용 때문에 대자존재는 부정하고, 항거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라 했다.

 

❷ 인간의 실존(實存)은 본질(本質)에 앞선다.

 

그에 의하면 모든 대상(사물)은 그것을 구상하고 만든 사람의 의도에 복종한다. 예컨대, 한 목수가 책상을 만들 경우 먼저 책상의 형태를 고안해 가지고, 일정한 나무로, 일정한 크기의 책상을 만든다. 미리 정해진 일정한 설계에 따라 그 책상은 만들어졌기 때문에, 즉 만들어지기 전부터 그 책상은 목수의 머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기에 사실상 본질이 그 사물의 실재보다도 앞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어느 누구도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한 인간을 보면 그 인간은 순간 순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정을 내려서 행동한다. 그 인간이 잠시 후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의 본질을 규정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그가 행한 행위에 의해 그의 본질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선 실존하고 나서, 본질이 후에 있는 존재다.

---  장용학 소설 <요한시집>

 

󰏐 [20세기를 만든 책] 사르트르 `지식인들을 위한 변명'

 

- 기존체 제에 대한 논란 통해 지식인의 존재이유 진단

 

[존재와 무]의 철학자이자 [구토]의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는 점차 잊혀져가는 사상가가 되고 있다. 하이데거로부터 사사받으며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존재와 무]를 썼으나 그것은 이제 오독의 대표적 사례로만 인용될 뿐 더 이상 고전의 명단에는 낄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구토]의 경우도 실존주의 문학의 원조로 평가를 받지만 작품성에서 고전으로 꼽히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오히려 지난 1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해 프랑스 사상가들이 세계 지성계에서 큰 인기를 모은 동안에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사르트르라는 이름 넉자가 최근 다시 거명되기 시작한 것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다. 그가 65년 일본방문에서 행한 강연집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이 시점에서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관련해 재독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 리오타르는 [지식인의 종언]을 선언했다. 이때 지식인은 체제비판적인 좌파지식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르트르가 옹호하려 했던 바로 그 지식인상이기도 하다.

 

10여년만에 다시 읽어보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분명 그렇다. 기존체제에 대한 총체적 비판과 이에 맞서는 실천의 강조에서부터 {혜택받지 못한 계층의 행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또한 철저하게 연대를 맺어야 한다}는 역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반(ANTI)]에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지식인은 그 정당성을 떠나 현실 속에서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지식인]이란 단어에서 냉소적 뉘앙스까지 풍길 정도다.

 

이런 가운데 최근 다시 [지식인이란 누구이며 앞으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 세계 각지에서 제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여전히 사르트르적 입장이 유효하다는 차원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강조한다.

 

또 다른 입장은 이와 정반대에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체제 싸움이 끝난 상황에서 지식계층의 역할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번영을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비판했던 기능적 지식인들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중간적 입장도 있다. 사르트르식의 접근법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후쿠야마식의 역사 종언론을 받아들여 모든 비판을 철회하는 것 또한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의 경우도 이런 중간적 입장에서 사르트르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

 

물음은 이렇다. [90년 한국의 지식인은 누구이며 그들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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