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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눈에 비친 한국인 - 100년 전과 오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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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눈에 비친 한국인 - 100년전과 오늘

서 지 문 ( 고려대 영문학)

 

1.서 론

 

한국인들은 외국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하는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 관심은 아마도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이 주변국가들의 선의 또는 악의에 의해서 개인적, 국가적 행, 불행, 이익, 불이익이 좌우된 일이 많다는 슬픈 현실에 기인하는 것이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세계 어느 나라 사람치고 외국인들이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없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관심도가 조금 더 높다고 생각된다. 내가 이 관심도의 원인을 역사적인 현실로 추적하는 것은, 예를 들어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생활 정도가 낮고 약소국가의 국민들 앞에서는 비교적 자신들의 거동이 어떻게 그들의 눈에 비춰질까에 대해 신경을 덜 쓰고, 또 역사적으로도 우리나라와 멀고 우리나라의 운명에 별 영향력이 없다고 인식된 나라들의 국민들에 대해서는 신기하다는 호기심을 가졌지, 그들 앞에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조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운명에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나라는 물론 중국이고, 통치 이데올로기와 문명의 발상지가 중국이였으므로 중국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인식되는가는 한국 사람들의 지대한 관심 내지는 근심사였다. 한국을 여행했던 어떤 중국인이 한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찬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민족적 자존심을 북돋워 주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수세기동안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 칭송에 걸맞는 문화국민이 되려고 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제 물질적 의존과 이데올로기의 발상국가가 구미로 바뀐 지금, 우리는 미국인과 서구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가에 첨예한 관심을 갖고 있다. 알고난 뒤에는 그들이 호의적인 눈으로 보아준 데 대해 감사도 하고, 또는 그들이 우리나라의 고달픈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그들의 기준에 비추어 우리를 평가하는 것에 대해 분개도 하고 또 그들에게도 결점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그러므로 그들의 비판적인 시선을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이 스스로를 열심히 비판하고 분석하면서 가장 가혹한 채찍질을 하기도 하고 자조와 탄식에 빠지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우리는 어떤 자학적인 동기에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찾으려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습관과 고정관념에 의해서 무디어지지 않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를 좀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우리가 우리자신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던 점을 깨우칠 수가 있다. 외국인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우리의 행동이나 관습이 반드시 부조리한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다시 한번 그 합리성을 검토해 보아서 손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결점을 외국인들에게 감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습관을 합리적으로 바로 잡아서 인간관계를 바로 잡고 사회 부조리를 시정하며 우리의 해묵은 민족적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침착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국민성이니 민족성이니 하는 것만큼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도 없을 것이다. 민족성이나 국민성이라는 것이 애초에 생활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것임에 틀림없고, 그것이 역사적 환경 조건에 의해서 변천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 자신들의 수십 년밖에 되지 않는 삶의 체험을 통해서도 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민족성의 어떤 뿌리랄까하는 것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적 진리로서 인정하고 있다. 전자의 예를 들자면, 근대화 이전에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본인이나 서구인들에게 준 가장 강한 인상 중의 하나가 게으르고 무기력하다는 것인데, 현재는 가장 부지런하고 공격적으로 의욕적인 국민들 중의 하나로 전세계적으로 인정도 받고 있고 그로 인해 질시와 경원도 받고 있다. 한편, 서양인들은 우리나라의 인간관계에서 차지하는 <나이>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매우 기이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한국인으로서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 층이라도 이 <나이>의 절대성이 불합리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연장자를 대할 때 동년배와 같이 대할 수는 없으며, 사실상 스스로도 상대적인 연소자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상대적 연장자라는 사실을 의식에서 지울 수 없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한국인의 심리에서 <나이>라는 요인의 중요성은 앞으로 여러 세대를 두고 서서히 엷어질 수는 있을 지 몰라도 뿌리가 뽑히기는 어려울 것으로 우리 대부분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우리는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침착하게 검토해 봄으로써 우리의 모습을 좀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고, 우리가 계속 배양해야 할 우리의 민족적 기질과 우리가 버리고 지양해야 할 민족적인 습성에 대해 좀더 확고한 결정을 내릴 수가 있다. 진실로 철저한 연구가 되기 위해서는 조선족, 나아가서는 고려, 통일 신라,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리나라를 방문한 모든 외국인들의 소감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다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자료를 구하기가 힘들고 또 오늘날까지 우리 안에 존속하고 있고 우리의 개인적, 사회적 생활을 지배하는 국민성의 모든 면모가 조선조 말에 존재했다고 보아도 타당함으로, 우리나라가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던 개화기로부터 시작해서 외국인들이 남긴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기에서 근자에 우리나라에서 생활했던 외국인들의 우리나라 사람들과 삶의 동참기에 이르기까지 훑어 보아 색다른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재구성해 봄으로써 앞으로 우리 국민성의 체질 개선을 위한 우리의 과제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한국에 여행하고 체류한 외국인들의 견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즉 한국의 개화기에 한국에 거주했던 서양인들은 대부분이 선교사들이었고, 그외에 외교적인 직함을 갖고 체류한 관리들도 상업적인 이유에서 시장 개척을 목적으로 와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전도하는 외에 교육사업, 의료사업, 구호사업을 많이 하여 당시의 빈약하고 질병에 시달리고 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했던 한국의 서민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한국의 역사와 언어 문화를 연구하여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풍속과 환경이 서양과 판이하게 다르고 위생조건이나 편의시설이 너무나 나빴으므로,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장기 체류를 했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명감을 갖고 온 선교사들이나 공적업무 때문에 불가피하게 체류해야 하는 관리들이었고 장삿속으로 온 사람들은 그리 오래 견디지를 못했었는지, 그들이 쓴 한국체험기는 별로 없다.

 

그러나 일본인의 경우는, 물론 인접국가이고 역사적으로 접촉도 있었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계획이 있었으므로 시장개척과 국토개발을 위한 요원들이 대거 와서 항구도시와 상업요지에 일본인 거주지역을 형성하고 생활했다.

그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서는 쓴 것을 보면 한국을 말할 수 없이 미개국가로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어떤 일본인의 기록을 보면 마치 우리들이 30년 전 쯤 미국 흑인들에 의해 듣고 전하던 말을 연상케 한다. 한국인들은 너무도 더럽고 위생관념이 없어서 창호지 창문을 열고 요강에 담긴 오물을 길로 내던지지 때문에 길가는 사람들이 오물 세례를 받기 일쑤이고, 한국의 관청은 관리들이 정오 이전에 출근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관청이 관련된 사무는 한낮이 되기까지 도대체 볼 수가 없고, 관리들은 출근을 해서도 캄캄한 관청의 방에서 잡담과 모의만을 하는 것 같으며, 한국인 인부들은 생계의 보장이 전혀 없는 반 부랑자들인데도 한주일 주급을 받으면 그 주급을 다 쓰기 전에는 일터에 다시 나타나지를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단순히 일본 사람들에게 (일본의 기업진출을 위한?) 한국의 상황을 알리기 위한 글이므로 악의적인 거짓말은 썼다거나 왜곡을 한 글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일본인들은 한국과 한국인들을 다만 그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으므로 한국인들과의 인간적인 친교가 없었던 것은 물론 인간적인 관심조차 없이 다만 노동력으로서의 한국인을 평가했을 뿐인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한국인을 만난 서양인들의 인상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인 깊이가 있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인들이 옛날 왜구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 역사적 이유 때문에 일본인들에 대한 반감이 뿌리깊어 일본인들에게는 인간적 정을 주지 않은 반면에, 서양인들에 대해서는 낯선 땅에서의 그들의 어설픔 같은 것을 감안하고 또 그들 중에는 선교사등 우리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한국 사람들 편에서도 일본인들과 서양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 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실제로 일본인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벽촌의 사람들이 서양인과 일본인을 구분할 줄 몰라서 여행중인 비숍 여사에게 음식이나 잠자리 제공을 거절하며 일본인들과는 상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사실을 봐도 반일감정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서양인으로서 한국에 관해 최초로 본격적인 저서를 낸 사람은 영국의 여행가 이자벨라 버드 비숍 여사이다. 비숍 여사는 처음 미국기행기를 써서 대대적인 인기를 끈 후에 당시 영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동양의 나라들을 기행하기로 마음먹고 일본, 티벳, 중국 등을 여행하고 기행기를 썼는데, 한국기행기가 그녀의 모든 기행기 중에서 제일 관심과 인기를 끌어 1878년 출판되자 그 다음날로 2,000부가 매진되었고 재판도 열흘 안에 다 팔렸다고 한다. 이 인기의 이유에는, 물론 한국이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나라여서 신기했다는 점도 있지만 비숍 여사의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기억력, 그리고 해박한 동식물, 기타 건축이나 지형등 생활의 전반에 대한 풍부한 상식이 그녀의 기록을 더욱 생생하게 하고 신빙성을 부여하며 저자가 우리나라의 역사나 풍습에 대한 상세한 연구를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예를 들면 본 필자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상투를 어떻게 트는 것인지를 알았다), 또 그녀는 국제정세라든가 정치에 대해서도 상식 이상의 식견을 갖고 있어 그저 기행문 이상의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녀의 탁월하고 세밀한 묘사력은 그녀의 많은 모험과 그녀가 기술하는 사건과 풍경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녀가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우리나라를 여행했을 당시 나이가 63세에서 66세 사이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녀의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에 대해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비숍 여사가 한국인들에게서 받은 가장 강한 인상은 한국인들의 호기심일 것이다. 그녀가 한국을 여행한 1890년대에는 대개의 한국인들이 서양인을 본 적이 거의 없고 특히 서양인 여자는 전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비숍 여사는 자신이 구경거리가 된다는 것에 대해 달관한 심경으로 한국의 방방곡곡을 여행해야 했었다. 어느 날 여사의 일행이 어떤 부잣집을 밖에서 잠시 구경을 하고 떠나려니까 그 집의 여자 종들이 들어오라면서 비숍 여사를, 문자 그대로 거머쥐고 안채까지 끌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40명이나 되는, 모두 옷을 호화스럽게 차려입고 치장을 많이 한 늙고 젊은 처, , 시녀들에게 둘러싸였다. 정실부인은 인도 보석으로 치장을 한 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매우 예쁘고 피부색이 무척 아름다웠으나, 모든 여자들이 하나같이 예의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내 옷을 들춰보고 나를 이리 저리로 잡아당기고 내 모자를 벗겨서 써 보고 내 꽂은 머리를 풀어서 머리핀을 빼고, 내 장갑을 잡아 벗겨 가지고는 요란스럽게 웃으면서 그것을 끼어보고 나서, 나를 가지고 놀 수 있는 대로 실컷 논 다음에야 자기들 방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나를 어찌나 바짝 에워싸고 따라왔던지 나의 발이 거의 공중에 떴을 지경이었다”(p.88)라고 적고 있다.

 

여인숙에서 휴식하거나 유숙할 때 동네 사람들, 특히 여인네들의 호기심 때문에 치른 곤경의 한 예로 비숍 여사는 사방고리의 여인숙에서 겪은 경험을 술회하고 있는데, 그 여관에 있는 두 개의 방 중 한 방에 들었을 때를 내 방은 세 개의 창호지 문이 있었다. 벽이 아닌 공간은 단번에 여자, 남자, 어린아이들로 채워졌다. 문의 창호지는 모두 찢겨 나갔고 더러운 몽고인종의 얼굴들이 빽빽이 그 자리를 메웠다. 내가 캠브릭 천으로 휘장을 쳤지만 긴 막대기가 내 휘장을 방 한가운데로 밀었다. 사람들은 문을 밀치고 들어와서 나와 나의 도구들이 차지하지 않은 모든 공간을 차지했다.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내 이동 침대 위에 몇 겹으로 앉아서 내 옷을 살펴보고 내 머리핀을 빼어서 머리를 풀어 내리고, 내 슬리퍼를 벗기고 내 소매를 팔목까지 밀어 올리고는 내 살과 피가 그들과 같은 종류의 것인지를 보기 위해 나를 꼬집었다. 그들은 얼마 안되는 나의 소지품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나의 모자를 써보고 장갑을 껴보았고, 내 안내인에게 세 번을 쫓겨났지만 매번 다시 몰려왔으며 머리를 길게 땋아 늘인 총각들을 데리고 왔다. 이렇게 밀고 누르고 하는 소란과 혐오스러운 무례함, 요란한 아우성과 화씨 80도의 날씨 속에 풍기는 더러운 옷의 냄새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안내인은 그들을 네번째로 내어쫓고, 그 다음에 그들이 몰려올 때는 침대 위에 앉아서 권총을 소지하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안내인이 가자마자 그들은 다시 몰려왔으나 총을 보자 우루루 몰려 달아났고 그날 저녁 이후로는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참기 어려운 공격적인 호기심의 발동이 하루에 세 번씩 일어났고, 그런 상황 하에서 언제나 상냥함을 유지하기란 힘드는 일이었다”(p.126127)고 술회하고 있다.

 

서양남자들은 서양여자들만큼 그렇게까지는 진귀한 구경거리는 아니었겠지만 서양남자도 역시 어디를 가나 구경거리가 되었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그의 Korean Sketches에서 오랫동안, 마치 야수처럼 응시를 당한다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몹시 고독하고도 형언할 수 없이 우울하게 만드는 일이다. 창호지 문과 창문은 손가락 구멍으로 가득해지고 구멍마다 저편에는 한 개의 검은 눈이 자리를 잡고 눈꺼풀도 깜빡이지 않는 시선으로 너에게 못을 박는다. 사람을 앞뒤에서 포위하는 눈들이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의 가장 큰 시련 중의 하나이다. (p.26)라 술회하고 있다.

 

한국에 의료 선교사로 왔다가 나중에 미국 공사(公使)가 된 호레스 알렌은 고종황제를 비롯한 왕가의 전의가 되었는데 외국인 의사라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새 장난감만큼이나 신기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아픈 데가 있는 듯 싶어도 그를 불러 대었고 별로 아픈 데가 없어도 병약한 황태자를 핑계로 그를 불렀는데, 그것이 더욱 더 괴로웠던 것은 왕실 사람들은 낮에 자고 밤에 깨어 있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자정이 넘어서 왕실의 전령이 와서는 온 집안을 다 깨웠고, 그가 자다가 깨서 이브닝드레스의 정장을 차려 입고 궁전까지 몇 마일을 달려가면 황태자는 이미 잠이 들어서 그가 잠이 깰 때까지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알렌 씨는 이 왕가의 전의로서 정식 임명과 녹을 받으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미국 정부의 외교관리직을 수락했다.

 

어떤 미국인은 한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치를 한번 꺼냈다가 그의 신체의 모든 부분이 그렇게 해체가 가능한 것인지를 알아보려는 한국 사람들의 호기심 때문에 무진 애를 먹은 일도 있다고 한다.

 

생활이 일년 내내 단조롭고 기본 생활을 해결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이점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시 언급하기로 함)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구경거리를 몹시 갈망했는데, 그래서 비숍 여사가 여행을 할 때에는 여자들이 몇 리씩을 계란을 가지고 걸어와서 <구경값>으로 내놓으면서 그녀를 구경했고, 그녀가 배를 타고 여행할 때는 여자들이 허리까지 잠기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와서 그녀가 탄 배를 들여다보려 하고, 어떤 여자는 바위 위에 올라가서 보려다가 물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년에 두 번밖에 없는 호화무비한 임금님 행차 때는 구경 나온 인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비숍 여사가 본 1894년 고종의 성묘 행차 때에는 무려 15만의 인파가 숨을 죽이고 온종일 구경을 했는데 이는 서울 시민의 반에다가 사흘, 나흘씩 걸려 시골에서 임금님 행차를 구경하려고 걸어서 상경한 사람들을 합한 숫자였다고 한다.

한국인의 호기심 이상으로 한국을 여행하는 서양의 여행자를 괴롭혔던 것은 한국인들의 위생관념의 결여와 한국인의 주거환경의 불결성이었다.

 

비숍 여사는 사대문 안의 서울을 묘사하기가 두렵다고 말하며, “북경을 볼 때까지는 서울을 지구상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라고 생각했었고, 샤오싱의 냄새를 맡을 때까지는 가장 악취가 나는 도시라고 생각했었다. 한 나라의 도시인 큰 도시치고 그 조악함이란 이루 묘사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2층집을 짓는 것은 예법상으로 금지가 되어 있기 때문에 25만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땅에서 살고 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미로가 같은 좁은 골목, 즉 짐을 진 두 마리의 황소가 엇갈려 지나가지를 못하고 사람이 짐을 진 황소를 비켜 지나가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데다가 군데군데 뚫린 고약한 구멍과 미끌거리는 시궁창으로 인해 더욱 좁아진 그런 골목을 끼고 살고 있고, 이 시궁창들은 집들에서 버려진 고체, 액체의 오물을 운반하는데 그 더럽고 썩은 시궁창가가 새까맣게 땟국이 흐르는 반라의 어린이들과 크고 여위고 흐릿한 눈동자를 가진 개들이 즐겨 노는 곳이고, 또한 이곳에서 잡화와 아닐린 물감으로 염색을 한 요란한 색깔의 사탕을 파는 행상인들이 판자조각을 시궁창에 걸쳐 놓고 그들의 상품을 판다”(p.40)고 기록하고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 볼 것 같으면 예를 들어 어떤 여관방은 8자에 6자 사방에다가 천정이 다섯자 두 치의 높이이고 방안에는 양팍과 쟁기와 삽의 쇳날, 누더기 옷뭉치, 해초, 그리고 천정에 매달린 수수이삭, 말 안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간장을 담으려고 띄우는 메주와 반쯤 소금간을 해서 말리고 있는 생선”(p.157)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마당은 반쯤은 두엄더미이고 반쯤은 돼지우리인데 거기 바로 우물이 있어서 여자들이 태연하게 그 우물에서 음료수를 길었다고 한다. 그 밖에는 수렁이 있어서 밤새도록 역겨운 냄새를 풍겼고, 방이 하도 좁아서 누가 방에서 무엇을 꺼내러 오면 비숍 여사는 마당으로 나가야 했다고 한다. 여름에 원산에 도착했을 때는 악취가 무지무지했고 먼지는 숨막힐 정도였는데 비참해 보이는 개들의 숫자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가 햇볕에 검게 변해가고 있는 모습은 구토증을 일으키게 했다고 한다(p.172). 알렌 씨는 서울의 위생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그것이 부재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여섯 내지 여덟 명이 붙을 땐 바닥에 끼어서 자는 8 6자 사방의 방의 음독한 공기를 숨쉬고도 어떻게 한국 사람들이 건재한지는 정말 경이적인 일이다라고 말하며, “이런 방의 문을 열 때 나는 냄새는 묘사할 수가 없을 정도이고 백인은 숨이 막혀서 어떠한 날씨에라도 숨을 쉬러 밖으로 나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아마도 이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적자만이 살아남은 결과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pp.108109).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조악한 환경 속에서 개선의지도 없이 살았다는 것은 어쨌든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더러움과 악취에 대해 무신경했다는 말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등뼈가 휘어지게 일만 하고도 연명하기가 힘들 정도로 생존의 조건이 힘들어서 주위환경의 미추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기는 하지만, 또한 많은 한국사람들이 쓸 데 없는 잡담을 하고 마슬을 다니면서 조잡한 모의를 할 여가가 무척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많은 한국인은 환경정리에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있었어도 환경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집이 깨끗하면 가난한 살림도 덜 가난해 보이고 그래서 혹시 수탈에 눈독을 들인 관리들과 양반의 표적이 될까봐 그랬다는 견해도 또한 있을 수가 있으나 그래도 비숍 여사나 알렌 씨의 기록에 나오는 정도의 추악한 환경이라면 생리적인 둔감성이 아니고서야 의도적으로 참아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아무리 추함 속에서 편안을 느끼는 사람이라도 해도 불결함이 병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자기보존본능에서라도 추악한 환경을 개선하려고 했을 터인데 병은 역귀들이 가져 오는 것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이 무지 탓으로 불결함이 더욱 더 개선되지를 않았던 것이리라.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장래에 대해 암담하게 느끼게 되었던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게으름이다. 자신의 팔보다 길기 때문에 스스로 불을 붙일 수가 없는 장죽이 그 상징인, 한국인의 게으름은 많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발전가능성이 없고 한국인은 가난을 자자손손 물려줄 수밖에 없는 인간들로 생각하게 했다. 그러나 한국을 조금 깊이 이해한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열심히 일해서 자본을 축적하고 경작지를 늘리고 생활을 편리하게 할 도구를 장만하지 않는 이유가 양반계급의 수탈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의 양민들은 목숨을 연명하는 데 필요한 기본 소비품 이외에 조금이라도 저축이라든가 물자가 있는 것이 알려지기만 하면 돈을 주고서 관직을 샀고 그러므로 <본전>과 이자를 뽑아야 하는 관리들이 그를 어떤 죄목으로든지 잡아가서 그나 그의 가족들이 그 양반이 요구하는 돈이나 물품을 토해 놓을 때까지 가두고 곤장을 쳤으므로 한국의 양민들은 가난에서 보호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가난은 천성적인 게으름보다는 근면함이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근면해서 모은 재물이 화를 불러오기 때문에 게으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결과가 또 원인이 되어서 한국인들은 어떠한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만 있으면 하지 않으려고 <>를 부리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리기도 했다. 비숍 여사가 한국 여행에서 처음 교통수단으로 사용한 초라한 작은 배의 주인이자 사공인 김씨는 배를 제공하고 저어 주는 대가로 월 30달러의 보수를 받았는데, “그의 게으름은 경이적인 것이었다. 꾸물꾸물 거리며 배를 젓고, 늦게 출발해서 일찍 배를 붙들어매고, 그리고 최소한의 힘을 들여 노나 삿대를 젓는 것이 그의 시책이었다. 한시간 동안을 사는 데 한나절을 보내고, 지친 시늉을 해서 나의 동정을 사고, 그리고 게으른 자의 모든 핑계를 사용하는 것이 그의 관례였다” (p.70)고 기술하고 있다.

 

최초의 한국어 사전 편찬자인 게일 선교사는 한국에서는이라는 단어가 액운, 손해, 고달픔과 동의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미국인이라면 아무리 주변머리가 없는 인간이라 해도 마음 속에 노동이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개념이 존재한다.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는 인데, 그 단어의 부차적인 의미는 피해, 손해. 해악, 불운, 이런 것들로서 그 단어가 이 모든 뜻을 연상시키고 표현한다. 한국인들은 게으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고래로부터의 논리에 의해 당연한 귀족으로서의 그의 권리를 증명한다”(p.17).

 

그러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물건을 제대로 만드는 장인(匠人)이 없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고 나전칠기라든가 죽세공품들은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다웠고 한국의 장농이라든가 목수일 등도 훌륭했고 외국인들이 몹시 선호하는 물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국 여자들은 새벽부터 깊은 밤까지 밥 짓고 길쌈을 하고 모든 한국 사람은 횐 옷을 입기 때문에 끊임없이 옷을 빨아야 하는 데 그것도 옷을 빨 때마다 다 뜯어서 빨아서 모든 사람들이 자는 밤에 늦게까지 다듬이질을 해서 무명이 거의 비단과 같은 광택이 날 정도로 두들겨서 새로 바느질을 하고, 솜을 둔 옷은 매번 솜을 다 거둬서 빨아서 다시 솜을 두어서 꿰매고, 한 여자가 평균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아서 한 아이를 세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이기 때문에 한국 여자들은 삼십 세가 되면 오십 세가 되어 보이고 사십 세가 되면 이빨이 다 빠져 버린다고 말하고 있다(p.340). 그러므로 적어도 한국여자를 보고 게으르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렌 씨는 말하기를 권력이 없는 농민이나 노동자는 눈에 보이는 재물을 축적하지 않으려 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는 다만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지낼 만큼의 재물만을 원했고, 끊임없이 피울 수 있을 정도의 담배와, 그리고 그의 신세를 가끔 잊게 해주는 술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것들과 그가 살아 있을 동안 그에게 효도하고 죽은 다음에 그에게 제사를 드려 줄 아들이 있는 것이 그의 소원이 전부였다. 그가 자기 것으로 지킬 수 있는 그런 것을 마련하는 데 썼다”(p.103).

이렇게 한국 사람들의 게으름에 후천적, 사회환경적 요인이 많으므로 한국 사람이라도 사회 문화환경이 바뀌면 생활태도가 바뀌는 것이 당연했다. 비숍 여사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소련령 시베리아로 가서 거기 한국인 거주지에서 그 깨끗함과 한국인들이 근면으로 이룩한 번영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한국인들이 게으르게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관료들의 무지막지한 수탈 때문에 한국인이 게으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시베리아 거주 한국인들의 근면성과 계획성은 진실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들의 거주지는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거주지와 뚜렷한 대조가 되었고 중국인들의 생업을 장악해 버리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에 대한 적대행위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비숍 여사는 한국에서만 한국인을 본 사람들은 이런 말이 좀체 믿어지지를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관찰한 것 말고도 아주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카바로프카 근처에 거주하는 한국인들도 중국인들과의 야채재배 경쟁에서 어찌나 성공적으로 이겼던지 이제는 그 지역의 야채 공급은 전적으로 한국인들이 장악하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들의 조국에서 겁 많고 의심 많고 비굴하던 그의 태도가 이곳에서는 아주 기분 좋은 솔직함과 남성다운 자립심의 태도로 바뀌었다”(pp.225226)고 말하며 여행자가 이 지역의 한국인 가정에서 내가 받았던 것보다 더 유쾌한 후의와 깨끗하고 안락한 잠자리를 제공받기란 불가능한 일이다”(p.235)고 단언하고 있다.

 

이것이 모두 돈을 벌 기회가 있고, 또 벌어도 탐욕적인 관리나 양반에게 수탈을 당하지 않고 그 반대로 돈이 있다는 것이 어떤 사람의 유능함의 증거가 되는 환경에 있기 때문이었다고 분석하며,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와 사람이 번 재물에 대한 보호가 있게 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pp.235~236).

일을 신성한 것으로 알고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죄악으로 여기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망해 가는 나라에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고귀한 신분의 징표인 줄 알고 놀고먹으면서 위엄만 부리려고 하는 한국의 양반들이란 모조리 개혁을 해서 폐지되어야 할 신분으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람의 극심한 빈곤과 후진성이 양반 출신의 관리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매관매직을 하고 양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한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 본 외국인들에게 양반의 모습이 가증스럽고 가소로운 것 이상으로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비숍 여사는 양반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국의 저주 중의 하나는 이 양반 또는 귀족이라는 특권 계층인데 그들은 스스로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해서는 안되지만 친척들에게 얹혀 사는 것은 그들에게는 수치가 아니며 그들 중의 다수는 그들의 아내들이 몰래 빨래나 바느질 품삯을 팔아서 연명하고 있다. 양반은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들고 다녀서는 안되고, 심지어는 그의 담뱃대도 들고 다녀서는 안된다. 양반 생도들은 자기 책도 집에서 서당까지 들고 다니지를 않는다. 관습은 양반이 여행을 할 때는 그가 모을 수 있는 한 많은 종자를 데리고 다니도록 하고 있고, 그는 말을 타고 갈 때도 시종이 옆에서 부축을 하며 완벽한 무력함을 인습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의 종들이 양민들을 위협하고 윽박질러서 양민들의 닭과 달걀을 거저 수탈한다”(pp.101~102).

 

또 관직에 있는 양반들은 거의 자기 임지에 있지를 않고 서울에서 살면서 그들의 시간과 녹봉과 수탈한 돈을 서울에서 쓰고 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p.87). 그리고 한국의 전반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저주는 무수히 많은 사지가 멀쩡한 남자들이 그들보다 나은 친척이나 친지들에게 매달려서 사는 것이라고 하며 이런 관행에 대해 수치심도 없고 이런 관행을 비난하는 여론도 부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생충과 같은 측근이 많은 사람은 관직을 사서 양민들을 수탈을 해서 자기의 측근들을 먹여 살리려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p.446).

 

게일 씨는 한국의 양반이라는 아주 유머러스한 챕터에서 양반이 가장 존중하는 단어는 예의인데 그러나 누가 양반에게 조금이라도 를 경시하는 말을 하면 양반은 광란을 하면서 난폭해지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를 완전히 잊어버리며(p.182) 양반은 예에 한치라도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어떠한 노동도 하지를 않고 일생을 앉아서 하인들만을 부리며 그의 담뱃불을 부치거나 벼루를 가는 일조차도 남이 해주어야 하고 아무리 간단한 일도 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손은 부드럽고 그의 손톱은 길어지고 항상 앉아만 있기 때문에 그의 뼈가 모두 붕괴되어서 중년이 되기 전에 거의 연체동물이 되어 버린다(pp.183~184)고 적고 있다. 그리고 양반은 <부정확성>의 명수로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기를 꺾거나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주제는 아무 것도 없고, 배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만 보고도 증기기관의 원리를 설명하고 혜성의 꼬리가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도 말할 수 있고 월식을 일으키는 개의 색깔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고 한다(pp.188~189). 그리고 또 양반은 여자를 지극히 경멸하며 대개 여자를 <계집>이나 암컷이라고 부르면서 여자가 그의 일생에서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기회 있을 때마다 보이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어떠냐하면 그 작은 여자가 그의 집안을 다 조종하고 한국 남자보다 더 철저히 처 시하에 사는 남자는 없다고 한다(pp.189~190). 그리고 양반이 어떤 목표를 위해 진력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한국 양반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어휘는 못 하오 또는 할 수 없소 라고 말한다(pp.191~192).

 

이렇게 양반계급은 무능과 무위도식이 그 신분의 조건이다시피 했고, 이런 양반들의 지배 하에서 서민들은 성실히 일함으로써 발전과 번영을 이룰 꿈조차 꿀 수가 없었던 오랜 세월의 생존 조건 때문에 한국인들은 무언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노력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기질은 심히 결여되어 있었지만, 그러나 오랫동안을 모든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임기응변적인 기술이 상당히 능했고 터무니없이 부적합한 재료를 가지고도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모든 한국에 체류하고 여행해 본 외국인들의 체험담이다. 비숍 여사는 한국을 여행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난관에 봉착을 했지만 일행 중의 길안내인이나 통역, 마부들의 기지와 끈기. 그리고 순발력으로 모면을 했었다. 해안을 따라 여행할 때 비숍 여사가 본 배들은 못이나 쇠붙이, 보존용 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만들어진 것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통나무와 판자가 일시적으로 무연히 모여 있는 물건처럼 보였다고 한다(p.174). 그리고 당시 한국에 체류했었던 외국인들은 대부분 <boy>라는 보통명사로 통했던 한국인 어른 집사 겸 요리인 겸 하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boy>들은 사통팔달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고, 외국인들이 언어도 서툴고 한국 물정에도 어두운 것을 이용해서 여러 가지로 실속도 챙기고, 그러면서도 그들의 고용주가 위험이나 곤경에 처하게 되면 목숨까지도 걸고 충성스럽게 그들을 구하고 지켜주었다고 한다.

 

게일 선교사의 체험적 증언에 의하면 한국인 보이는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한다. ‘압니다가 그의 좋아하는 모토이다. 그는 자신의 소신에 의해 행동하며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도 모든 것을 안다. 보이는 여러 가지 재주가 많다. 그를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 상황이란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는 논두렁의 지푸라기 몇 가닥을 가지고 밧줄을 만들 수 있으며 폭풍치는 황야에서도 주인에게 안락한 안장을 마련해 줄 수가 있다. 그의 세계는 태초의 단순성으로 지어졌는데 그러나 그는 필요할 때는 현대 문명의 이기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pp.146~147). 한번 그의 집에서 손님을 초대했을 때 그의 보이가 그의 집에 없었던 돈주고도 구하기 힘든 서양식 고급 빵과 기가막힌 로스트 비프를 서브해서 그의 아내를 놀라고 공포에 질리게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보이가 자기 맘대로 그 손님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음식을 가져오도록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럭저럭 한국인과 인간적인 접촉을 해 본 외국인들은 한국인들의 어떤 면에 대해서는 머리를 내두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서구인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인간적 애정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성격과 멘탈리티에 대해서 비숍 여사는 한국의 교육이 이제까지 애국자도, 사상가도, 정직한 사람도 길러내지 못했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사는 한국의 교육이라는 것이 그저 옛 성현들이 한 말을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력을 길러 주지 못하며 교육받는 자로 하여금 그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지 못하며, 비록 어려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훌륭한 지적 훈련이고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이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이렇게 순전히 과거급제만을 목표로 한 암기식 교육의 결과는 교만하고 오만하고 노동을 경멸하는 헛된 자존심과, 관대한 공공정신과 사회적 신뢰감을 파괴시키는 이기적 개인주의와 2천년 묵은 관습과 전통 아래 생각과 행동의 예속, 지적 견해의 편협함, 얄팍한 도덕 감각, 그리고 인격을 타락시키는 여성에 대한 관념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p.388). 여기서 비숍 여사가 <이기적 개인주의>를 한국 고유 산물 중의 하나로 꼽은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개인주의>라는 것을 전적으로 서양 문화의 산물로 생각하고 있는 오늘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이 견해를 접한다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 비숍 여사는 이 모든 결함을 양반 계급 전반의 결함으로서 열거한 것 같은데 비록 개인적 예외가 얼마든지 들 수가 있겠지만 이 시대의 양반계급을 총체적으로 볼 때 더한 혹평을 했다 하더라도 부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반계급에 대해서는 혐오감만을 느꼈던 비숍 여사는 부패한 관리와 간신들을 쳐부수려고 반란을 일으켰지만 황실에는 충성을 선언하는 동학군의 선언문을 읽고 애국의 맥박이 조선의 어디에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 농민들의 가슴 속일 것이다”(p.177)라고 말했다.

 

그리고 살해되기 전의 민비를 알현하고 그녀의 영리함과 의지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에 민비의 죽음을 매우 애석해 했고, 고종은 수차례에 걸쳐서 알현을 하고 어영을 촬영할 윤허도 얻었기에 고종의 인간적 선량함을 잘 알았던 비숍 여사는 고종이 민비의 사후에 간신들에 둘러 싸여 원성을 많이 듣는 탐관오리들을 중용하고, 특히 아관파천 이후에는 전에 발표했던 개혁정책들을 모두 번복하고 국가재정이 견딜 수 없는 사치스러운 행사, 공사를 많이 벌인 것을 몹시 유감스러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의 정치에는 이념이 부재한 것에 주목했다. 한국의 정치에는 음모와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데 그것은 어떤 이념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다만 자기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고, 한국에는 자기의 소신을 관철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그런 혁명가가 없다(p.447)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관들은 서로를 불신해서 같이 협동을 하는 일이 없으며 각자가 서로 왕에게 더 신임을 얻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쓴다고 관찰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의 한국은 자원도 없고 황량하게 누추한 나라이지만 한국에도 바다와 땅에, 그리고 강건한 사람들의 자원이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 사람들의 에너지가 잠자고 있는 상태 라는 것이다. 양반계급은 어리석은 전통 때문에 마비상태에서 빈둥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중인들에게는 직업의 문이 열려져 있지 않고 그들이 추구할 수 있는 기술직이 없고 양민들은 가난에서 신변보호를 구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이렇게 잠자고 있는 에너지를 깨울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면 한국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비숍 여사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의 성격에 관해서는 한국에 관해 기록을 남긴 모든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친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게일 선교사는 한국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친절이다”(p.238)고 말했고, 알렌 씨도 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한 민족이다”(p.115)라고 말했고, 두 사람 다 한국에는(외국인 거주지역 근처를 빼 놓고는) 거지가 없다는 점을 특기하고 있다. 비숍 여사도 한국 사람들의 태도가 다정하고 적의가 없으며 외국인은 절대적으로 안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서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렇게 안전한 도시는 세계의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고 여자들이 보호자 없이 성문 밖 어디를 나가도 아무도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고(p.40), 게일 선교사도 한국인들은 질서가 있고 시장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도 경찰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비록 이교도들이지만 개화한 자기네 나라 사람보다도 더 신뢰할 만하다고 감탄했다(pp.240~241).

 

또한 내각의 한 부서가 예의를 관장하는 부서였던 나라답게 한국인의 예의가 뛰어나게 바르다는 점도 많은 외국인들이 지적했다.

 

그런데 비숍 여사가 1897년의 현대적 복장을 한 한국 군대에 관해서 통넓은 바지를 입고 높직하고 상하기 쉽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길고 펄럭거리는 긴 두루마기를 입은 보통 한국 사람은 유순하고 악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유럽식 제복과 무기가 그를 흉맹하고 반항적이며 야만적이며 시민적 감정이나 애국심이 없고 권력과 약탈에 탐욕적인 인간으로 만든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부대들은 그들의 잔인성과 그들이 자행한 약탈에 양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pp.434~435)고 한 것은 매우 심사숙고해 볼만한 관찰이다.

 

비숍 여사는 한국인들은 예술감각이 결여되어있고, 한국의 상점에 있는 모든 물품들은 모두 조잡하다고 말했다.(p.41)이점은 물론 앞서 지적한 추악한 환경과 풍요로운 인상을 주는데 대한 두려움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보수성에 관해서 비숍여사는 1895 12 30일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의 한국인들의 반응을 매우 상세하고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데,그녀는 그들이 증오하는 세력이 국가를 장악하고 그들의 왕비가 시해되고 그리고 그들의 왕이 실질적으로 감금생활을 하는 것도 대체적으로 조용히 감수했던 한국인들이 그들의 머리칼에 대한 손상은 참지 못했다”(P.359)고 비꼬고 있다.그리고 한국인들이 이렇게 머리를 깎이느니보다는 차라리 자살을 할만큼 머리칼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한국인들이 비록 애국심은 없지만 민족적인 본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이 자립심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게일 선교사는 서구의 자립정신 또한 한국인들에게는 어필하지 않는다. <발군의 하나>라는 미국의 독수리의 영광을 그는 순전한 광기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 인간이 그렇게 경마와 같은 삶을 살아야하는지 그는 그것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는 인생의 조건을 오로지 예종으로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립이라는 것은 다만 의심과 상호불신과 무법의 상태를 연상시킬 뿐이다. ‘어디 가십니까?’ 가 길에서 하는 보통 인사말이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가 그 다음에 오고 그 편지 어디서 온 겁니까?’ 하고 묻고는 모두 함께 달려들어 남의 편지를 읽는다. 이런 평범한 일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을 격분하게 한다. 그래서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일을 두사람이 하고 그들을 모둔 지적인 기능과 역행하는 듯이 보이는 독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혼자 하면 두배로 편한 일을 다른 사람과 같이하는 불편을 참는다”(P.176) 그리고 한국사람들은 삽질도 혼자서는 못하고 세명 내지 다섯 명이 있어야 삽 하나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P.64)

 

그 외에 한국사람들은 외국인들이 그들이 말로 한 약속은 지키기를 기대한다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말이란 인생에서 제일 값싼 요소이기 때문에 말을 신성한 것으로 취급하고 돈 한푼 들지 않는 말에 대해서 그 책임을 물으며 대화의 흐름을 깬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그래서 한국인들의 교류는 말이란 지나가는 인사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해 하에 진행된다고 말한다.(P.180)

 

그러나 앞서도 본 것같이 게일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신뢰할만하고 충성스러운가에 대해 경탄하고 있으므로 이 관찰은 한국인이 정직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 외에 비숍여사는 한국인들은 체격이 좋은 용모가 다양하며 특히 이마는 넓고 지적으로 보이고 그들의 용모에서 풍기는 인상은 의지력의 강인함보다는 지적인 영민성이라고 평했다(P.13)

 

한국인의 성격이나 민족성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특징은 아니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해 특기할 만한 것으로 언급한 것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탐식인데 한국사람들은 한 사람이 한 자리에서 복숭아나 작은 참외를 25개쯤 먹는 것은 보통이고 한국 사람들은 식사에 있어서 질보다 양적인 만족을 구하고 한국의 어린이는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가 밥을 먹이는데 더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아이를 눕히고 배를 토닥거려가며 계속 먹였다고 전하고 있다(P.153).

 

어쨌든, 비숍여사는 여행을 한국을 아주 떠날 때쯤은 내가 처음 이 나라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은 애정에 가까운 관심으로 변했고,이전에 나의 어느 여행에서도 그렇게 정답고 친절한 친구들과 헤어진 일이 없으며 더 섭섭하게 헤어진 친구들도 없다”(p.459)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한국과 한국사람에 대해 혐오감과 애정이 섞인, 그러나 애정이 훨씬 강한 감정을 느낀 서양인은 비숍이 첫사람이 아니었으며 마지막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비숍 여사는 3년에 걸쳐 우리나라 전역에 여행하며 고종황제에서부터 뱃사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본의 한국인들을 접촉해 보았고 게일 선교사는 오랜 선교활동을 통해 또한 여러 계층의 한국인과 친교를 가졌었고 알렌씨는 처음 의료 선교사로써 나중에는 미국의 정부의 외교 사절로서 역시 황제로부터 극빈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한국인들을 만났었다. 특히 그는 대한 제국의 첫 주미공사의 신임장제정을 위해서 한국의 외교사절단을 워싱턴까지 동반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들의 관찰은 그들이 비록 한국의 조직사회나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생활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단히 신빙성이 있는 것이고 사실 그들이 한국의 조직사회에 소속되지 않았었기에 더 객관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관찰은 대개가 일반론적인 것이고 그래서 물론 개별적인 예외는 많이 들 수가 있다. 또 그들의 양반계급이나 유교식 교육에 대한 견해 같은 것은 그 원칙이나 원래의 의미를 모른 채 팅팅폐단만 계급제도나 교육에서 그 원뜻은 거의 사라지고 폐단만이 남았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다음 단원에서 우리가 만날 러트 신부는 그로부터 60년 후에 게일 선교사의 Korean Sketches를 읽으면서 이렇게 세상인 많이 변했는데 어쩌면 사람들은 이렇게도 똑같으냐고 혼자 속으로 감탄을 했다고 한다. 거의 1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도 같은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인지,결론 부분에 가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리는 그러면 한국의 해방 이후에 한국에 오래 거주하며 한국의 조직사회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국인의 삶에 깊이 동참했던 한 미국인과 한 영국인의 증언을 통해 한국인의 변화한 또 변화하지 않은 모습을 바꾸어 놓았는지 또 그 변화는 반가워할 만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3.1950년대,60년대 한국인의 모습

 

해방 이후 서양문물을 이입의 초기에 한국인을 관찰했던 외국인으로 미국인 의료선교사 폴 크레인(Paul Crane)과 영국인 성공회 목사 리처드 러트(Richard Rutt)를 들 수 있다. 크레인 씨는 어린 시절을 선교사인 양친과 함께 한국에서 보냈고, 1947년이래 한국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외교적 업무로 선교 사업상 또 상업적 업무로 한국에 오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입문서로 가장 많이 읽히는 그의 저서 Korean Patterns 의 서문에서 크레인 씨는 서구인의 동양인을 불가사의한 존재로 보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역사 문화 사회 종교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국인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한국인은 매우 인간적이라고 말하며 서양인이나 한국인이나 인간으로서의 감정은 같지만 다만 그것이 표출되기 전에 여과되는 그 문화적 틀이 다르고 어떤 감정을 감추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관념이 서양인과 한국인들 사이에 다를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특질로 꼽는 것은 상하 질서를 주축으로 하는 인간 관계이다. 그래서 상대편을 그 사람의 지위와 연령과 학력, 가문 이 모든 것에 합당한 적절한 <대접>을 하는 것이 원만한 인간 관계의 기본이고 이런 예의를 모르는 사람은 <쌍놈>이다. 이렇게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데 실패를 하면 원수가 생기고 모략을 받아서 결국은 패가망신을 하게 되는 수가 많으므로 한국인은 인간 관계에 특별히 극도의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천성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들이지만 조금의 실수로라도 남에게 결례를 행하게 되면 평생을 두고 원한을 사게 된다. 크레인 씨는 한국인들은 결코 모욕이나 피해를 잊지 않는다 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런 한국인의 편협성은 한국이 폐쇄사회이고 원체 국토가 좁고 사람들이 모두 빽빽이 끼어서 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서 도망칠 수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므로 한국 사람은 인간관계에 특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p.29-32).

 

크레인씨는 이런 한국 사람들의 편협성 내지 폐쇄성을 한국 교육제도와 연결시키지는 않았으나, 한국에서는 일류 학교를 나오는 것이 출세의 보증이고 그래서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일류학교에 넣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학교 교육의 내용은 대부분이 암기 위주이기 때문에 한국의 아동들은 암기력에 있어서는 서구의 아이들보다 우수하지만, 그 댓가로 한국 어린이들의 사고력, 문제해결 능력, 가치가 능력, 그리고 독자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는 능력이 손상된다고 말하고 있다(p47). 크레인의 이런 관찰이 타당한 것이고 보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한국인들이 긴 안목을 가지고 어떤 불화의 원인을 다각도로 고찰해 보고 상대편을 이해하는 능력이 없는 것도 이런 주입식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보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오래 한국에 거주한 <한국통>답게 크레인 씨는 한국 관리의 생태를 잘 알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정부를 하나의 귀찮은 존재, 통치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한국인들은 국가에 대해서는 감정적 충성심을 갖고 있지만 집권 행정부에 대해서는 충성심이 거위 없고 한국 사람의 관심사는 어디서 정부의 압력을 극소화할 수 있는가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정부 관리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어 적절하게 비위를 맞추고 그의 봉급 갖고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해 주고 상급관리 앞에서는 결코 불쾌감을 나타내지 않는 것 등이 생존의 기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부의 부패 그 내막을 떨어먹고 사는 기자들 또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해야되기 때문에 자리에 붙어 있을 동안 축재를 해 놓아야 되는 관리들의 생리 등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척도는 어떤 사람이 그가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사람의 수가 얼마이며 그의 비위를 맞추어야 하는 사람의 수가 얼마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윗사람의 숫자를 줄이고 아랫 사람의 숫자를 늘이는 재주가 그 사람의 성공의 기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의 <자신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한국인들은 무슨 일이나 맡기면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있고 생소한 기계라도 뜯어보고 나서 접합체나 고무줄이나 철사로 다시 붙여서 그럭저럭 돌아가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1950년에 인민군이 후퇴할 때 버린 소련제 트럭이 16년이 지난 후에도 짐 운반차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의 자신감의 한 예로 들고 있다. 또 때로는 한국인의 자신감이 그를 다소 위험요소에 대해 둔감하게 만들어서 한국인들은 사고가 나기 전에 사전 안전관리라는 것을 모른다고 지적하고 있다(P.91).

 

그리고 한국인들은 수많은 인생의 고난 -압제, 부패, 불의, 모욕, 그리고 신체적인 고문까지도 -을 견인적인 침착성을 가지고 인내하는 것이 큰 장점인데, 그러나 어려운 상황 하에서는 도덕이나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도 죄악이 아니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일제나 인공 치하에서 협력하게 한 것도 형편상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용납이 된다고 하며 한국에선 사람을 어떤 추상적 이상에 얽어매는 윤리적 종교적 가르침이 없고 그래서 생존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지 정당화가 될 수 있다고 고찰한다(P.96).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도 기업이나 기업인이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누구를 아는가가 더 중요하고 아첨이 생존의 기술이며 성급함은 치명적 실수이고 예리한 촉각으로 서서히 눈치를 잘 살피는 사람이 살아 남을 수 있으면 많은 기업인들이 장래를 위해서 기업을 운영하지 않고 단지 그날을 위해서 사업을 하기 때문에 제품의 품질관리가 되지 않고 문서로 된 계약도 사정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이행을 하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긴다고 관찰하고 있다(p 99).

 

그는 결론적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질병과 기생충 때문에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하고, 그래서 의욕과 판단력의 기능이 손상을 받는 고로 한국인들은 서구인들보다 훨씬 느린 보조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문제들은 이렇게 장기적인 산소 부족의 신체적 효과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많은 문제들은 이렇게 장기적인 산소부족의 신체적 효과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p.140).

 

끝으로 한국에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은 한국인 동료들과 동화되려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윤리적 기준을 포기하거나 수정하게 되는 유혹과 위험이 있으므로 한국인과 거래를 할 때는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한국식으로 사업을 하게 되면 한국사람은 그렇게 하고도 안전할 수가 있으나 외국인은 그렇게 하고 빠져나갈 수가 없으면 한국인들도 서구인들이 한국식 방식으로 사업을 하려고 할 때 존경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끔 본국에 돌아가서 한국에 대해 거리를 두고 생각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p.142).

 

리처드 러트 신부의 Korean Work and Day는 크레인 씨의 저서와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한국생활의 기록이다가 외국인들에게 한국 사람들의 행동 패턴의 이상한 점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외국인이 한국의 사회에서 살아나가고 한국 사람들과 사무적인 관계를 갖는 데 있어서 알아두어야 할 지식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크레인 씨의 책과는 달리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독신 목사가 그를 사랑하는 한국인 신도들 사이에 뜰 때까지 장이 서고 글방에서 아동들이 공부를 하는 그런 조그만 마을에서의 생활을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로 기록한 책이다. 목욕할 시설이 없어서 지프차를 타고 반 시간 가량 떨어져 있는 미군 기지에까지 가서 목욕을 하고 읍내에 볼 일이 있으면 초 만원의 고물 시외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10마일 달려야 하고 그 속에서 사람과 어물 채소 속에 끼여 앉아서 가끔은 짐을 올려 둔 선반에 서 새우가 쏟아져 세례를 받기도 하는 생활 성찬에 쓸 포도주가 얼어버리는 난방이 없는 교회에서의 예배 집전 이 모든 것을 그의 유머와 인간미로 정감을 자아낸다. 그러므로 그의 책에는 한국인의 성격에 대한 비판적 고찰은 별로 없지만 그의 정겨운 묘사 속에 한국인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국민학교 졸업식장에서 울음 바다가 벌어지는 한국인들의 감상성, 단오와 추석 때 농악대의 소박한 행락, 글방의 면학 분위기, 장례식에서의 적나라한 슬픔의 표현, 설날에 어린이들이 외국인 신부에게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기다리는 동심의 세계, 이런 데서 한국인들의 때묻지 않은 모습들을 볼 수 있다.

 

한국인들의 주 활동이 대화이다라고 러트 신부는 말하고 가는데 시루 속같이 덥고 빽빽한 만원버스에서 뼈마디가 어긋날 것 같아 흔들리며 읍내로 가는 길에 뒷자리에 앉아서 하필이면 지극히 미묘한 기독교의 종파간의 차이에 대해 질문을 한 한국인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p.108).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부실한 설비를 갖고도 무슨 일이든지 잘 꾸려 나가는가 하는 것은 마을의 사진관 청년에 대한 대목에 잘 나타나 있다. 사진관은 흙마루의 방인데 한 쪽엔 각색 물감으로 풍경을 그린 판자가 잇고 조명은 큰 유리창과 유리도 된 지붕의 일부분 그리고 흰 반사판으로 한다. 보자기가 깔린 테이블 위에 종이꽃이 담긴 화병이 있고 의자가 두개 있는 것이 설비의 전부이고 그 젊은 사진사의 암실은 두 건물사이의 좁은 빈 터인데 한쪽에는 담요가 문과 벽을 겸해 쳐져 있고, 한쪽에 좁다란 선반과 그 위에 좁은 오렌지색 창문이 있는 곳이다. 그 속에서 증류되지 않은 물과 두 개의 병 속의 이름 모를 화학약품을 섞고 흔들고 해서 요술처럼 훌륭한 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p.198).

 

러트 신부가 한국인에 대해 비판적인 말은 한 것은 꼭 한 곳이다. “나의 젊은 한국인 친구는 특히 그가 우월감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음양이라는 개념을 온통 비웃는다. 그는 이 음양철학이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융의 심층심리학과 상응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 교회에서 남자들은 오른편, 남쪽, 해가 비치는 쪽-즉 양의 쪽- , 여자들은 그늘진 왼쪽 북쪽-음의 쪽-에 앉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는 스펙트럼에 대해 주절대지만 <오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는 서구의 문학과 예배 의식에서 동양의 황제의 색깔인 황색이 서양에서는 그 보색인 자주빛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말고는 오색이 동양의 전통에서와 똑 같은 상징적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존주의와 핵 에너지와 콩트와 죤 스튜어트 밀과 기술적인 발전이다. 아마 이것은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만약 마지막 방사능 낙진 후에 살아남고 그의 기술과 통계를 제어할 능력을 잃게 되더라도 그의 심장은 계속해서 색채와 햇빛의 상징에 반응할 것이고 죽음과 부활의 영원히 계속하는 것이다. 그가 무엇보다도 관심이 있는 초월적 실체의 실질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 한 민족의 신화는 그 민족이 존속하는 한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미국이 한국의 스승으로 최적격자인지도 모른다 . 왜냐하면 미국은 신화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정신적 유산을 침범할 가능성이 제일 적으니까”(pp 91-91).

 

4.20세기 말의 한국인

 

폴 크레인 씨 이후로는 한국인에 대한 총체적인 기술을 시도한 외국인은 없는 것 같다. 이미 한국인은 한 권의 책 속에 집어넣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집단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서구화 근대화 이후의 급격한 사회적 성장과 변화 동요로 한국인은 전 국민이 심한 가치관의 혼동과 정체성의 혼란에 시달렸다. 그래서 한국민들 사이에서 계층, 연령, 성별 집단 간의 이질성이 크게 두드러지게 문제로서 인식이 되었고 외국인들의 편에서도 한국의 사회 변화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라든가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한국 여성의 갈등 같은 것에 관한 주제별 연구는 시도되었지만 한국인의 행동 패턴을 총괄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기를 시도한 저서는 근자에 나오지 않았다. 60년대 이후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과 그와 병행한 정치적 동요가 한국을 자주 세계의 언론에 오르내리게 했지만, 이기간은 한국 사회의 현대적 갈등에 주목을 하다 보니 한국인들에 대한 인간적인 관심은 오히려 엷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불만도 물론 민족성에 따라 그 양상이 차이를 띠기는 하지만 그러나 경제 성장에 대한 욕구와 추구라든가 민주화에 대한 욕구와 투쟁은 근본적으로 서구인들에게 “exotic” 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근대화 이후에 한국인위 민족성에 대한 연구는 한국인들에 의해 주로 이루어졌고 -이어령 이규태, 김열규 같은 이들이 가장 많이 읽힌 한국인에 대한 연구를 한 사람들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한국인들의 적의를 살까 봐 감히 이런 연구를 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문제를 유발하는 한국인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 한국인의 국민적 사고의 틀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는 노력은 없지 않다.

 

클라크(Donald N.Clark) 교수가 편집한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 학자들의 연구 논문집을 보면 어떤 미국학자는 한국 사람들이 미국이 광주사태에 개입을 해서 광주 시민의 희생을 막아 주지 않은 데 대해 왜 원망하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결국 한국인들은 역사적 관습적으로 제3자가 중재를 해서 충돌을 막아줄 것을 기대하고 자신들의 울분을 공중 앞에서 표출한다는 한국인의 심성적 습관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제서야 이해를 할 수가 있었다고 말했는데 이런 것이 국민성적 관점에서의 현상 해석의 좋은 예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세나 경제 상황을 분석하는 서구의 학자나 언론인들은 대부분이 한국인들을 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또 한국인들이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외국인들의 그들에 대한 견해에 몹시 민감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인들에 대한 집단적인 심리분석 같은 것은 자제를 많이 한 편이다. 간혹,롤링 스톤지의 오루크 기자의 1988년도 한국의 대통령선거 유세 광경 취재 기사처럼 겁없고 분별도 없이 한국인을 마구 욕해댐으로써 재미교포들에게 엄중한 항의를 받은 글들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책임 있는 언론들은 과학적이고 논증적이지 못하면서 물의만 일으킬 위험이 있는 그런 일은 피해 왔다. 그래서 70년대 이후의 한국인에 대한 서양인의 견해는 개인적인 논평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서구인들이 갖고 있는 한국에 대한 호감은 대부분이 한국인이 매우 친절하고 인간적이라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단기 체류 외국인의 경우에는 대개 한국인들이 길거리에서 길을 물었을 때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거나 하는 종류의 친절을 말하는 것이고, 조금 장기체류한 외국인의 경우라면 별로 대접을 받을 만한 이유가 없는데도 융숭한 식사에 초대를 한다거나 언어의 불편을 고려해서 교통 편의를 제공하려고 각별히 신경을 쓴다거나 하는 친절을 대부분 받아 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 친절이 항상 사심 없는 호의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다. 친절을 베풀고 나서 무언가 <투자>한 이상의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약소국가의 국민으로서 강대 국가의 국민에게 거는 자연스러운 기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인을 잘 아는 외국인들 중에는 한국인의 친절을 매우 경계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고 어느 정도 반대 급부를 바라고 베푸는 친절도 무관심이나 냉랭함보다 낫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순전히 계산만으로 누구에게 친절을 베풀 만큼 냉혈적이지 못하다. 많은 한국인들은 호감을 느끼는 외국인들에게 친절도 베풀고 인간적 유대도 가지고 필요할 때는 신세도 지려고 한다. 한국을 잘 아는 어떤 영국인 학자는 한국인들의 의존성을 몹시 혐오하는 것 같았는데도 나를 보고는 여러 번 너는 너무 독립심이 강하다하고 약간 불만스러운 듯한 어조로 말하고 했다. 아마도 그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거나 신세를 지지 않는 것도 좋지만 또한 그에게 신세를 자주 지는 한국인들처럼 그를 깍듯이 모시지 않는 것이 조금 서운하게도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니까 외국인이 한국인을 친절하다고 칭찬할 때 그것은 그들이 한국인의 친절에서 받는 실질적인 도움에 대한 감사라기보다는 한국인의 <친절>이 대표하는 어떤 인간적인 정(), 그것이 빚어내는 유대감, 이런 것에 대한 음미의 말일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좋아하는 바로 이 친절이 한국인 자신에게는 인간 관계 속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때 한국인들에게 그것이 월권임을 상기시키고 경계선을 그어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으나 한국사람들 간에는 그것이 어렵고,한국 사람들 간에는 인간적 관심 속에 시기, 경계심들의 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게재되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웃과 친척, 친지의 인간적인 관심이 항상 마음 푸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비행기가 김포 공항에 가까워지면 해방감에 온 몸이 흥분된다고 말하는 외국인이 있는가 하면, “김포 공항에 비행기가 가까워지면 압박감에 가슴이 옥죄어 온다고 말하는 한국인도 있는 것이다.

 

친절함 이외에 외국인들이 100년전 또는 30년 전에 한국인들의 장점으로 생각했던 한국인들의 유순함, 충직성, 그리고 소박한 인정 같은 것은 오늘날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많이 옅어지고 변질되었다.

 

질이나 비중으로 보면 장점이 압도적일지는 몰라도 항목으로 보면 외국인들이 지적한 한국인의 단점이 장점보다 훨씬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 게으름은 거의 고쳐졌고, 극단적인 위생관념의 부재와 불결함에 대한 둔감성도 어느 정도 나아졌고, <>에 관계된 미신도 거의 치유가 되었다. 반상제도가 철폐되어 양반계급은 없어졌고, 경제번영과 함께 식사의 질도 높아지고 위생과 의료환경이 개선되어 탐식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기생충문제도 사라지면서 헤모글로빈수치도 선진외국인에 비해 과히 뒤지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빼면 서양인들이 100년전, 30년전에 지적한 한국인들의 결점이 모두 남아있고, 또 어떤 것들은 더 심화되고 악성화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다. 특히 크레인씨가 지적한 갖가지 사회비리는 조금 개선된 것도 있고 더 나빠진 것도 있는데 뿌리째 뽑힌 것은 없다고 생각된다. 개선된 것은 가시적인 현상이고-예를 들어 부인은 남편의 두발짝 뒤에서 걷는다던가 하는-관리와 사업자의 관계라든가 <상황논리>로 과오를 은폐하는 것이라든가 경쟁자에 대한 모략 같은 것은 외연적으로 훨씬 덜 드러나지만 좀 더 세련되고 음흉해진 느낌이 강하게 된다. 그리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권위의식은 매우 집요하다. 게다가 전근대적인 관의 부패도 근대화해서 전처럼 신체적 가해에 의한 강탈은 사라졌지만 미묘하고 조직적으로 힘없는 자에게 모든 것을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한국이 체계적으로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정의의 실현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한국인들은 자주 자조와 자기 혐오에 빠지게 된다. 한국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동족의 민족성적 결함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남을 모략해서 밀어내고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심사, 우애나 충성심을 가장한 혈연, 지연, 학연들로 뭉친 이익 집단의 형성, 인격으로써 진정한 존경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대우를 받으려고 하는 태도, 또 사람을 인격에 따라 대우하지 않고 지위에 따라 대우하는 태도,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부도덕하고 잔인한 습성, 전혀 의도적이 아닌 언사나 행동에 대해 원한을 품고 복수의 날을 기다리는 것,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 형식이나 겉치레는 무척 따지면서도 남의 감수성이나 감정에는 무신경한 것, “설마 무슨 탈이야 날라구하는 식의 안전관리의 태만, 우선 저질러 놓고 보면 뒷감당은 어떻게 그럭저럭 되겠지 하는 주먹구구식의 무계획성, 진정한 <명예>보다 <체면>에 더 집착하는 것,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것이 한국인들의 소박성이라고 스스로 자찬하면서도 그것을 하급자에게 험악하고 무례하게 대하는 핑계로 사용하는 것, 조금이라도 불편한 상황에 놓이는 것이 싫어서 남에게 실컷 희망적인 언질을 주고 나서 일이 틀어졌을 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아서 남의 계획에 중대한 차질이 오게 만드는 것, 물질적인 자기 과시를 위한 과소비로 못 가진 자에게 설움을 주는 것, 모든 종교를 기복 신앙으로 타락시켜 버리는 것, 상대편이야 망하건 그로 인해 빚때문에 자살을 하게 되건 간에 터무니 없는 혼수를 받아서 자신의 탐욕과 자만심을 채우려는 심리, 원리원칙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남보다 빨리 어떻게든 유리한 위치를 점해야 되겠다는 기회주의, 그리고 예전에 관을 업고 세력을 써 보려고 권력욕과 별 다름 없는 민중을 업고 세력을 잡아 보겠다는 야심.. 이런 무한히 많은 한국인들의 원래적인 결함에다가 이제는 성문란, 마약 복용, 권위의 부재같은 현대적 병폐까지 곁들여졌으니 한국 사회는 사회적 불만이 들끓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인의 민족성의 저열함 때문에 망할 수 밖에 없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지는 않다. 비록 현재 한국 사회의 무수한 크고 작은 부조리들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혐오스러운 것이라 해도 그들 중의 어떤 것도 유사이래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는데 한국만이 지닌, 그러므로 한국은 영원히 거기서 놓여날 수 없는 그런 병폐는 없다. 투기 열풍만 하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사회이건 급격히 사회 구조가 바뀌면서 부가 급성장을 할 때는 항상 투기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금광의 발견과 더불어 일어난 금광 투기, 1830년 첫 철도 개통이래 수많은 영국인들을 들뜨게 하고 횡재도 가져도 주고 파산도 가져다 준 철도 투기, 유럽 전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일어난 상아, , 금광석, 향료 등의 투기 등 많은 투기가 있었다. 이제 구라파나 미국은 사회가 안정되고 급격하게 부가 만들어진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투기가 가라앉았는데, 동구라파의 개방과 자본주의화와 함께 투기는 다시 회오리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또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 구조적 모순이나 분배의 부정의로 인한 노사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으로 말하더라도 구라파 각국이 산업 혁명 과정에서 몇 세대에 걸쳐 몸살을 앓았고, 미국도 19세기 말에서 1930년대까지 많은 폭력 사태를 빚고 희생자를 내고, 여러 개의 법적 장치를 마련하고서도 2차대전 발발로 경기가 회복되고 애국심이 고조되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계급 의식도, 반상의식은 사실상 붕괴되었고, 현재는 부와 <출세>를 근간으로 한 새로운 계급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셈인데, 우리는 반상제도의 병폐가 너무 컸기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계급의식은 오만과 선망으로 구성되어 있고 지배계급에 대한 진정한 존경이 없기 때문에 가령 영국 같은 나라와 비교해서 심리적 구속력은 훨씬 약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이 가진 자들에게는 비굴하다던가 하는 현상들은 우리보다 생활 수준이 낮고, 빈부의 차가 더 심한 나라에 가 보면 그 현상이 훨씬 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5.결 론

 

그렇다면 결국 국민성이란 전부 환경의 소산이고 그러므로 어떤 국민에게건 고유한 국민성이란 것은 없고 환경이 나아지면 모두 국민성의 결함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라는 말인가? 다니엘 벨 같은 사회학자는 국민성이란 것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어떤 나라의 국민성에 관한 묘사에건 그럼 그 나라 남쪽 사람들은 어떠냐?”는 질문을 던지면 그 부당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물론 어떤 나라의 국민성에건 지역적인 차이는 현저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유로서 국민성이라는 것의 존재가 부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국민에게서건 어떤 한 시대 또는 한 시점에서 그 국민 전체를 대개 포괄할 수 있는 국민성의 윤곽을 잡을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국민들이 유구한 세월 동안 공유해 온 생존의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개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생존 조건이 그와 유사하지 않았던 민족과 비교를 한다면 뚜렷한 민족적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개의 사람들이 이것을 경험적 사실로서 수긍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민족성이란 한번 결정되면 영구히 그 민족에게 저주처럼 숙명지어진 것이라는 생각 또한 그른 것이라고 확신한다. 생존조건이 달라지면 민족성도 거기에 호응해서 달라질 것이지만, 그러나 민족성 자체가 그 민족의 생존 조건을 형성하는 커다란 요인임으로 매 세대마다, 또는 매 십년마다 새롭게 민족성이 일신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생존 조건의 외적 요인이 급격하게 변하면 한 세대 간의 민족성의 차이도 현격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비록 필자가 가끔 왜 젊은 학생들이 저토록 고루하고 구세대적인 의식 구조를 가지고 있을까?”하고 한탄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에서 세대간의 생존에 대한 자세는 참으로 많이 다르다.

 

그러므로 필자가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국인들은 한국인들의 많은 단점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인의 국민성의 결함에서 놓여나는 길은 해외로 이민을 가는 길뿐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나 법제도를 여론의 힘으로 또는 정치적인 투쟁으로 고치듯이 국민성을 그렇게 개조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제도를 개선하고 사회 환경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켜 국민성을 부분적으로 수정할 수는 있다.경제적 자립과 번영의 기회가 게으른 우리 국민을 단시일 내에 부지런한 국민으로 바꾸어 놓았고, 아직도 실력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일이 자주 있지만 그래도 인사 행정이 실력 위주로 많이 개선되었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실력 사회로 더욱더 향상을 하면 사람들의 심리도 <연줄>을 잡으려고 소모하던 정신적 에너지를 실력 향상에 쏟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첨과 비굴, 눈치작전 같은 비리가 생존의 테크닉으로서의 가치를 잃을 것이다. 한 가지 사회적 모순이 시정될 때마다 한가지 좋지 못한 민족성이 도태되기 시작한다고 보아서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전적으로 좋고 사랑스럽기만 하지는 않는 국민성이라 하더라도 무언가 우리 국민에게 동질성을 부여하고 유대감을 존속시켜 줄 어떤 국민성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게르만이 라틴 국가에 몇 대를 살아도 완전히 라틴 민족같이 되지는 않듯이 역시 무언가 민족성의 좀더 지속적인 뿌리도 있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국민성 중에서 우리를 인간답게 하면서 또 발전적으로 우리의 에너지를 활용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특질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나이에 대한 집요한 의식 같은 것도 권위주의적인 장유유서의 이념적 양상을 띠고 있지만 그것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를 해서 연장자는 연소자를 너그러움과 사람으로 지도하고 연소자는 연장자를 친밀한 가운데 공경하는 풍토로 가꿀 수 있다면 사회적 지속성과 유대감을 증진시켜서 사회적, 개인적 정서 안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민족적 동질성 인식을 고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민족성이건 좋은 면과 나쁜 면을 함께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드물기 때문에 성격의 어떤 한 면을 장려하고 배양한다는 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현명한 일인지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가 우리의 인정이나 소박함, 참을성, 예의 같은 장점을 기르고 우리가 우리 국민성 중의 사행심이나 비굴함이나 무책임성, 이기주의, 기회주의, 모함주의 같은 것을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 민족의 국민성에 대해서 절망과 비관과 자조는 분열과 불화와 국민성의 타락만을 낳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합심하여 아름다운 민족성을 가꾸어 자손들에게 물려 주고 외국인이 친하고 싶고 진정으로 애정을 느끼는 국민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그 노력은 나 스스로를 내가 갖고 싶은 이웃과 같은 사람으로 가꾸고 정돈하는 데서 시작한다면 어떨까. / 계간 <사상> 9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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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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