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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이일 저일 / 전문 / 이광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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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상해] 이일 저일

 

安東縣[안동현] 奇遇[기우]

 

나는 世界一週[세계일주] 無錢族行[무전족행]을 할 생각으로 四年間[사년

] 人生[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時期[시기]를 바친 五山學校[오산학교]

떠나서 安東縣[안동현]에를 갔다. 五山學校[오산학교]를 떠날 때에 여러 어

學生[학생]들이 二十里[이십리] 三十里[삼십리]를 따라 오며 눈물로써

惜別[석별]해 준 情境[정경]은 내 一生[일생]에 가장 잊히지 못할 重大性

[중대성] 있는 事件[사건]이다.

그때 내 나이 二十三[이십삼], 胸中[흉중]에는 勃勃[발발]雄心[웅심]

空想的[공상적] 放浪性[방랑성]으로 찼었다. 그때 뜻 있다는 사람들온 많이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悲歌[비가]를 부르며 海外[해외]放浪[방랑]의 길

을 나섰던 것이다. 申采浩[신채호] 尹琦燮[윤기섭] 같은 이들이 다 그때에

五山[오산]을 거쳐서 떠났다. 나도 그 潮流[조류]에 휩쓸린 것이라고 하겠

지마는, 내게는 獨特[독특]한 나 自身[자신]理由[이유]도 있었던 것이

.

安東縣[안동현]서 한밤을 자고 나니 囊中[낭중]所存[소존]七十[

] [], 이것을 가지고 奉天[봉천][]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가지고는 乞食旅行[걸식여행]으로, 直接[직접] 河南等地[하남등지]를 지

南京[남경]으로, 上海[상해], 杭州[항주], 福建[복건]으로, 廣東[

]으로, 安南[안남]으로, 印度[인도], 波斯[파사]끝 없는 放浪[

]繼續[계속]하자는 것이었다.

바로 客主門[객주문]을 나서는데 千萬意外[천만의외]爲堂[위당] 鄭寅普

[정인보군]을 만났다. []數年前[수년전] 京城[경성]一面識[

면식]이 있었을 뿐이요, 아직 []하다고 할 만한 處地[처지]도 아니었

. 그러나 나도 爲堂[위당]文名[문명]欽慕[흠모]하던 터이므로 반갑

게 그의 명주 고름같이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이거 웬 일이요? 그런데 대관절 어디로 가는 길이요?

하는 것이 그가 내게 하는 인사였다.

나는 路傍[노방]에 선 채로 내 意圖[의도]를 대강 말하였다. 내 말을 듣던

爲堂[위당],

그게 말이 되나. 이 치운 때에……대관절, 上海[상해]로 가시오. 上海

[상해]에는 可人[가인](當時[당시] 洪命熹君[홍명희군][])도 있고,

湖岩[호암] (文一平君[문일평군][])도 있어. 나도 집에 다녀서는 곧

도로 上海[상해]로 나갈 테야.

하고 나를 强勸[강권]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몇 마디 固執[고집]을 부렸으나 마침내 爲堂[위당]好意

[호의]를 받았다. 爲堂[위당]自己[자기] 路需中[노수중]에서 中國[중국]

紙幣[지폐] 十圓[십원]박이 두 장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는

車場[정거장]을 나아기 서울로 []하였다.

나는 爲堂[위당]이 준 中貨[중화] 二十圓[이십원]을 가지고 上海[상해]

船票[선표]十四圓[십사원]에 사고 퍼런 淸服[청복] 한 벌을 사입고

岳州[악주]라는 英船[영선]船客[선객]이 되었다. 그때 同行[동행]

[삼인]인데, 하나는 벌써 故人[고인]이 된 鄭又影君[정우영군]이요, 하나

車寬鎬君[차관호군]이요, 또 하나는 閔忠植君[민충식군]이었다. 三人

[삼인]은 서울서부터 同行[동행]인 모양이지마는 나하고는 安東縣[안동현]

주막에서 처음 만난 同行[동행]이다. 그래서 船室[선실]도 그들 三人[삼인]

同室[동실]에 들고 나는 혼자 한 방을 차지하였다.

때는 十一月[십일월], 龍巖浦[용암포] 連山[연산]에 하얗게 눈이 덮이고

甲板[갑판]에 얼음판이 생길 지경이니, 暖房裝置[난방장치] 없는 船室[

]의 추위는 말할 것이 없어서, 出帆[출범]하기 []날 밤, 한 밤을 담

요로 몸을 꽁꽁 싸매고 한 간 통도 못되는 船室[선실] 안으로 왔다갔다 하

기로 새워 버렸다.

 

營口[영구]에서 困境[곤경]

 

배는 大連[대련]을 잠깐 들러서 營口[영구]에 왔다. 그런데 岳州號[악주

]는 무슨 일인지 營口[영구]에 머물러 버리고 우리 一行[일행]營口市

[영구시가]에 내어 던지었다.

우리는 市中[시중]의 어떤 中國[중국] 旅舘[여관]에 들어서 다음 배가 떠

나기를 기다리느라고, 分明[분명]記憶[기억]은 못하나 [], 四日[

]을 거기서 留連[유련]하였다.

이에 걱정이 일어났다. 그것은 내 路費[노비]가 떨어진 것이었다. 모두

十圓[이십원]에서 船票[선표]十四圓[십사원], 淸服[청복]이 아무리 싸도

三圓[삼원] 얼만가 四圓[사원]은 되었고, 安東縣[안동현]三大浪頭[삼대

낭두] 本船[본선]까지 오는 쌈판[]가 또 不少[불소]하였으니, 囊中[

]에는 一圓[일원]餘在[여재]가 없었던 판이다. 上海[상해]直航[

]만 하면 배에서 밥은 얻어 먹으니 걱정이 없으련마는, 中路[중로]에서

旅舘[여관]에 들게 되니 一泊料金[일박요금]도 내일 힘이 없었다. 그때에

나는 참으로 죽고 싶었다. 進退維谷[진퇴유곡]이라니 이런 困境[곤경]은 없

었다.

困境[곤경]의 눈치를 먼저 챈 이가 車寬鎬君[차관호군]이었다. []

營口[영구] 留宿費[유숙비]는 염려 말라고 나를 慰勞[위로]하였다. 그렇

지마는 上海[상해]에 간대야 돈 나올 구멍 없는 내가 客地[객지]에 난 남의

돈을 얻어 쓴다는 것이 염치 없는 일이지마는, 迫不得已[박부득기]하니

可奈何[무가내하]였다. 나는 車寬鎬君[차관호군]好意[호의]를 받아서 이

困境[곤경][]하였거니와, 아직 그 厚誼[후의]到底[도저]千圓

萬圓[천원만원]으로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때 鄭又影君[정우영군]

車君[차군]의 도움으로 旅行[여행]하던 모양이었다.

上海[상해]에 가는 船中[선중]에서 일어난 事件[사건] 하나를 더 붙여 말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내 帽子[모자]가 너무 낡았다 하여 閔忠植君[민충식

]美國[미국] 軍隊式[군대식] 帽子[모자] 하나를 내게 寄附[기부]한 것

이다. 속에는 때묻은 西洋木[서양목] 바지 저고리를 입고, 겉에는 퍼런 무

淸服[청복]을 입고, 美國[미국] 軍帽[군모]를 쓴 내 꼴을 想像[상상]

하면 只今[지금]失笑[실소]不禁[불금]한다. 게다가 그 淸服[청복]

染色[염색]安定[안정]되지 아니하여서 손과 모가지에는 아청물이 묻었

.

 

同 衾[동금]

 

上海[상해]에서는 白爾部路[백이부로] 二十二號[이십이호]인가, 洪命熹[

명희文一平[문일평趙鏞殷君等[조용은군등]同居[동거]하는 집에 갔

. 내게도 돈이 한푼도 없지마는 그 양반들도 강목을 츠는 판인데, 鄭寅普

[정인보군]本國[본국]서 돈을 얻어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침을 삼키

고 앉았는 꼴이라고 한다. 그렇게 궁한 판에 내라는 食客[식객]이 하나 늘

었으니 걱정이다. 침대를 장만할 돈이 있나, 衾枕[금침] 장만할 것도 없거

니와, 나는 洪命熹君[홍명희군]과 한 침대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침대

란 게 지질한가. 棕梠[종려] 노로 얽은 것 위에다가 얄딴 돗자리 하나를 깔

았으니, 무거운 궁둥이를 맞대고 낯을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자던 것이었

.

가끔 양식이 떨어져서는 이제는 故人[고인]이 된 睨觀[예관] 申檉氏[신정

]한테 얻어다가 먹은 일도 있다고 記憶[기억]된다.

그때 睨觀[예관]은 우리가 있던 집보다 좀 큰 집을 얻어 가지고 [],

八人[팔인] 學生[학생]留宿[유숙]시켰고, 英語講習所[영어강습소]

經營[경영]하였다. 申采浩[신채호]金奎植氏[김규식씨]睨觀宅[예관댁]

寓居[우거]하였다. 이를테면 이때, 一九一三年頃[일구일삼년경] 睨觀宅

[예관댁]上海[상해]뿐만 아니라 江南一帶[강남일대] 朝鮮人[조선인]

命客[망명객]本據[본거]였다. 同濟社[동제사]라는 結社[결사]睨觀[

]指導者[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朝鮮[조선] 사람 가는 곳에 궁이 따른다. []([])租界[

] 一隅[일우]에 모여 있는 朝鮮人[조선인] 亡命客[망명객]들에게는 가끔

絶糧[절량][]이 왔다. 우리는 하루 終日[종일] 즐기는 담배를 굶다

가 밥지어 주는 中國人[중국인] 下人[하인]好意[호의]自轉車票[자전

거표] 한 갑을 얻어 甦生[소생]의 기쁨을 찬양한 것이든지, 趙鏞殷君[조용

은군]帽子[모자]와 구두가 없어서 맨머리, 슬리퍼와 바랑으로 프랑스

[공원]에 볕쪼이러 다닌 것 밖에 出入[출입]을 못한 것이라든지, 다 그때

生活[생활]代表[대표]材料[재료]들이다.

 

붕 어 곰

 

나는 毒感[독감]이 들었다. 相當[상당]高熱[고열]이다. 이런 작자와 한

침대에서 궁둥이를 마주대고 자지 아니치 못하게 된 洪命熹君[홍명희군]

야말로 가엾은 일이다.

의사를 불러 올 形勢[형세]가 되나 申澈君[신철군]醫藥[의약]知識

[지식]이 있어서 내 主治醫[주치의]가 되었고, 나중에는 어디서 붕어를 한

놈씩 사다가 손수 고아서 주기를 [], 四日[사일]이나 하였다. 精誠

[정성]愛護[애호]感激[감격][]로 뼈에 사무쳤다. 내가 <어린

벗에게>라는 글에 쓴 것이 이 일이다.

내 그저. 되지 못하게 웬 冷水浴[냉수욕]은 하노라고.

하고 快癒後[쾌유후]洪命熹君[홍명희군]에게 실컷 嘲弄[조롱]을 받았다.

나는 그때부터 아침 冷水浴[냉수욕][]하여 버렸다.

 

(一九三[일구삼공년] 十一月[십일월] 一日[일일] 三千里[삼천리]

十號 所載[십호 소재])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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