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삶에 대한 다양한 태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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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점쟁이가 자기 앞날을 점쳐보니 틀림없이 임금이 될 팔자였다. 그래서 그 점쟁이는 그 날로 모든 일을 집어 치우고 방안에 틀어 박혀 임금이 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이 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노쇠해진 그는 드디어 병들어 눕게 되었다. 그래도 임금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 그는 급히 자기 부인과 자식들을 자기 곁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얘들아! 짐이 붕어하신다!"고 외치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 이야기는 점쟁이는 남의 앞날은커녕 자신의 앞날도 예견하지 못한다는 점을 희화화하여 점술의 미신성을 폭로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이야기를 빌미로 해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삶의 방식 또는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주인공인 점쟁이가 점쟁이인 자신의 신분을 잊고 임금이 된다는 허황된 환상에 빠진 것과 같이 어떤 환상에로 현실을 도피하는 방식, 둘째, 그런 헛된 환상에 빠지는 대신에 주어진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과 같은 체념적 방식, 셋째, 점쟁이로 만족할 수 없었다면 임금이 된다는 턱없는 목표 대신에 가능한 작은 목표를 설정해서 그것을 이루려는 것과 같은 개량적 방식, 넷째, 정말 임금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다면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어떤 극단적인 수단이라고 동원해서 임금이 되는 길을 모색하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방식 등이다.

 

 

현실도피적 태도

 

첫 번째의 경우, 즉 임금이 된다는 환상 속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은 현실도피적 태도이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만족할 수 없을 때 그렇다고 그 현실을 벗어나기도 어려울 때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매달림으로써 위안이나 자기 만족을 얻는 방식을 택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점쟁이는 적어도 임금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확신이 있는 한 현실의 불만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이 어려울수록 환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철저히 다른 세계가 옴으로써 그 환상이 실현될 것으로 믿는다. 이야기의 점쟁이도 어느 날 갑자기 점쟁이에서 임금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종말론을 비롯하여 미신스런 종교나 기복 신앙은 대개 이런 현실도피적인 기능을 한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그런 종교들이 발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 그들은 메시아가 나타나 선택받은 자기들을 구제한다는 즉 이 세상을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천국으로 바꾼다는 유태인들의 메시아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 대한 박해가 심하고 또 그들의 처지에서는 무력하기만 할 때 그런 신념이 더 강하게 받아들여진다. 기독교의 천당에 대한 믿음이나 불교의 극락 세계에 대한 믿음도 같은 차원의 것이다. 계몽주의자들과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바로 종교 특히 서구를 지배했던 기독교의 이런 측면을 비판한 것이다. 특히 마르크스가 "종교는 억압받는 자들의 신호이며, 가슴 없는 세상의 감성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그것은 민중의 아편이다"라면서 종교를 아편에 비유한 것은 종교의 이런 현실도피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갖는다는 것이 다 현실도피로 흐르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모순을 극복한 보다 나은 처지에 대한 환상은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모순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된다. 전혀 허황된 환상이 아니고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있는 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는 그 환상이 아니라 그 환상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모순된 현실의 여건이다. 그것은 인간의 무지일 수도 있고, 지배자의 압제일 수도 있고, 현실의 지배적인 구조일 수도 있고, 이들의 복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환상으로 갖고 있는 보다 나은 세상이 실현가능한 것이라고 믿을 때는 그것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의 질서가 문제가 되고 따라서 그것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이 점에서 뚜렷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는 다 현실의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자기들이 이상으로 그리고 있는 환상의 세계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예언자들의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말은 역설적인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 회개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너희들이 회개하지 않아서 천국이 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천국을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 특히 지배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천국이라는 것도 오늘날 기독교 특히 미신화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천당이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순, 부정, 부패 등을 없앤 보다 정의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이 점을 간과하고 종교의 현실도피적인 한 면만 보았다. 유토피아 사상이나 예술의 이른바 '미적 환상'도 단순히 현실도피로 끝나버릴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토피아 사상이나 예술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유토피아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 <정감록>에 대한 민간인들의 믿음이 동학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날 이른바 민중예술이 탄압을 받는 것도 또한 우연이 아니다.

 

 

체념적 태도

 

둘째의 경우 점쟁이가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 점쟁이로 안주하는 것은 체념적인 태도이다. 환상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현실을 변화시키거나 벗어나기는 어려우므로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만족하고 사는 현실수용적이거나 체념적인 태도이다. 이것도 저것도 어렵거나 안되니까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이런 체념적 태도는 흔히 인간사를 포함하여 모든 세상사가 미리 결정돼 있어 될 대로 되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할 수 없다고 믿는 숙명론을 동반한다. 숙명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그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최면제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어진 여건을 개선하고 향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데 대한 자기 기만이나 변명으로 숙명론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런 체념적 또는 숙명론적 태도는 권력자들과 그 밖에 현상유지로 이득을 보는 자들이 가장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는 태도이다. 피지배자들에게 열등감을 조장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배당하는 현시를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지배자들이나, 한국인들에게 '조센징'은 별 수 없다는 생각을 심은 일제나, 해방 후로 제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할 자격이 없다느니 하며 제 국민을 비하한 독재 권력은 다 같이 사람들에게 이런 체념적인 태도를 주입시킨 것이다.

 

이런 체념적인 태도는 때로 냉소적인 태도와 궤를 같이 한다. 세상은 언제나 악으로 가득차 있고 소수의 악한 자들이 영화와 권세를 누리고 많은 사람들은 발버둥을 쳐도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태도이다. 이른바 세상은 "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냉소적인 태도는 지식인들 가운데에 많다. 특히 프랑스의 이른바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상으로 하여 오늘날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근대 계몽주의적 사고 방식을 냉소적으로 본다. 그런 계몽주의적 태도야말로 오늘날 세상의 여러 문제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근대 사상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여 탈근대를 외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계몽주의 사상으로 하여 자유와 평등의 영역을 넓혀왔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이 비판하는 자유와 평등의 실현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계몽주의의 합리적 사상이 "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을 조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그런 태도야말로 "같은 것의 영원한 반복"을 조장한다.

 

 

개량적 태도

 

셋째의 경우 즉 더 나은 처지를 향해 달성할 수 있는 작은 목표들을 설정해서 그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은 개량적인 태도이다. 점쟁이가 점쟁이 노릇이 싫었다면 턱없이 임금이 될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우선 점쟁이를 벗어나는 노력을 했어야 한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작은 성취들이 쌓이면 커다란 변화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의 신분 상승과 같은 것은 노력에 의해서도 성취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인간의 신분 상승을 막는 사회 구조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신분상승은 어려운 일이다. 가령 과거의 인도의 카스트 제도하에서는 개인이 세습한 자신의 계급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조선 사회에서도 상민이 상민의 처지를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사회의 구조나 신분 제도가 엄격해서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계급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한낱 헛된 것에 불과하다. 그런 사회에서 개량주의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현실을 도피하거나 체념에 빠지거나 아니면 급진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개량적 태도를 막는 것은 대개 기득권을 가진자들이다. 그들은 대개 현상을 타파하는 어떠한 개량적 조치에도 저항적이다. 그들은 필요한 작은 개량적 변화에 저항하여 사회에 모순이 가득 쌓이게 한 나머지 대개 혁명 등에 의해 내부로부터 멸망하든지 아니면 외부의 도전에 대처하지 못하여 파멸하고 만다. 조선조는 병자호란, 임진왜란과 같은 엄청난 외부 도전을 겪고도 변화할 줄 몰랐고, 또 동학 운동과 같은 내부의 민중 운동의 도전을 겪고도 하등의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부패할 대로 부패한 나머지 일제에 먹히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도 새로운 많은 변화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기득권만을 고수하다가 파멸을 자초하였다.

 

오늘날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것처럼 스스로 멸망하지 않고 아직도 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체제를 더욱 공고히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깨닫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재빨리 받아들여 변화를 시도한 데 있다. 말하자면, 복지 정책과 같은 일종의 사회주의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르크스의 예언대로 자본주의는 벌써 파멸되었을 지도 모른다.

 

지배자들이 자유와 정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응하여 양보하지 않고 계속 자기들의 기득권만을 고수하면 개량적인 태도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그런 체제는 결국 모순이 심화된 나머지 폭력 혁명에 의해 무너져 버리고 만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이란 혁명은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이런 경우에 개량적 태도를 주장하는 것은 기회주의적인 태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개량주의적 태도는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갈 때만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개량적인 태도는 모순된 체제의 유지에 기여할 뿐이다. 이야기의 점쟁이가 조선조와 같은 사회에서 어떻게 점쟁이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가 그런 노력을 한 것 같이 얘기가 전해진다면 사람들은 그 사회가 상당히 융통성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합리적이고 개량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회가 합리적이라는 허상을 심어줌으로써 그 체제 유지에 기여하는 셈이다.

 

 

급진적 태도

 

마지막의 경우 즉 어떤 극단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목표를 성취하려는 것은 급진적인 태도이다. 점쟁이가 어떻게든 임금이 되려고 발버둥을 쳤다면, 그는 이런 급진적인 태도를 보인 셈이다. 이런 급진적인 태도는 흔히 어떤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의 여건과 가능성을 개의치 않고 현실을 그 이상에 맞추어 뜯어 고치려는 변혁적인 행동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그것의 철저한 변혁으로 해소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현실의 모순을 철저히 고치려는 적극적인 자세이긴 하지만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과 방법에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여건이 성숙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이상이라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그런 상태에서 억지로 그것을 실현시키려면 무리한 조치와 그로 인한 부작용만 낳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는 갑오경장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때를 성숙하게 하는 것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좌우된다. 변혁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현실의 모순을 인식시키고 그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헛된 환상으로 도피하거나 체념으로 자포자기하지 않고 현실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말하자면 변혁을 위해서는 변화를 위한 분위기를 먼저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작업이야말로 변혁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진정한 변혁의 기회가 와도 그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런데 흔히 변혁을 주창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현실성도 없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만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자세는 체념적인 태도나 냉소적인 태도와 별로 다를 바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극단적인 개념 유희는 자기 만족은 될지언정 현실의 변혁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주장이 극단적일수록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체념적인 수가 많다. 또 극단적인 주장은 지배 세력에 탄압의 구실을 제공한다. 또 인간성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수 없는 한 체제를 뜯어고쳤다고 당장에 이상 사회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계급 없는 이상 사회를 실현한다는 공산주의 사회에도 당원과 비당원 간의 또 관료와 비관료 간의 계급 사회를 형성하였고 부정과 부패가 심했다. 게다가 사유제가 아니므로 생산성이 떨어져 빈곤의 공산주의가 되고 말았다. 하루아침에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성과 제도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다.

 

누구든 현실의 모순과 부정을 직시할수록 그 현실을 당장에 그리고 철저하게 뜯어고치고 싶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제도를 하루아침에 뜯어고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인간성을 하루아침에 뜯어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성을 철저히 변화하지 않는 한 제도도 변질되게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이 그에 상응하지 않으면, 그 제도도 타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법보다는 운영이라고 말한다.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것을 타락시키는 것도 인간이다. 우리는 나쁜 제도를 뜯어고쳐야 하지만 제도를 뜯어고치는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나쁜 제도는 그 제도하의 사람을 타락시켜 놓기 때문에 제도의 변혁과 함께 사람도 바꾸어야 한다. 따라서 나쁜 제도를 뜯어고쳐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하려는 일은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기 쉽다. 그래서 변혁은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지난한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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