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일기(山城日記)
by 송화은율산성일기(山城日記)
중략 부분은 다음과 같다.
김류는 뒤늦게 군사의 퇴각을 명했으나, 대패하고, 삼백여 명의 군사가 죽음
김류는 제때에 구원하지 않았다는 죄로 원두표를 처벌하려 했으나, 홍서봉의 만류로 그만 둚
심기원이 패하여 양근으로 퇴각함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적진을 뚫고 광주까지 왔으나, 패하여 뜻을 이루지 못함.
요점 정리
연대 : 인조 14년(1636년)경, 병자호란
작자 : 어느 궁녀
갈래 : 일기체 수필, 궁중 수필
성격 : 기록 문학, 궁중 문학
표현 : 간결하고 중후한 궁중어 사용
문체 : 산문체, 내간체, 서사적 일기체
'산성일기' 전체의 구성 : 병자호란 당시의 전쟁 체험을 한글로 기록한 내간체인 일기인 '산성일기'는 도입부와 중심부 및 종결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도입부에서는 청 태조 누루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 장군(龍虎將軍)의 이름을 얻는데서 시작하여 47년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앞 중심부는 병자년, 곧 1636년 12월 12일부터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기까지 48일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종결부는 그 이후 3년 간의 일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① 인조가 남한 산성으로 피난가는 과정
② 산성에서의 처절한 항쟁
③ 삼전도에서의 항복(降伏)
병자 12월 17일 ~ 22일 : 소규모의 전투중에 청군이 화친을 제의함
병자 12월 23일 ~ 26일 : 왕의 독전과 적진에 세찬(歲饌)이 거절당함
병자 12월 27일 ~ 28일 : 근왕병의 구원은 오지 않고 김류는 패함
병자 12월 29일 ~ 정축 1월 1일 : 청태종이 도착함
정축 1월 2일 : 청으로부터 굴욕적인 서신을 받아옴
주제 :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치욕(恥辱)과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의 항쟁(抗爭)
출전 : 필사본 산성일기
내용 연구
'산성일기'의 내용 해설
이 일기는 병자호란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 전쟁의 상황, 눈물 겨운 항전, 치욕적인 항복, 전쟁의 뒷처리까지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란의 현장을 기록한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의 이면(裏面)을 생생히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사실을 간결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기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병자 12월 17일 : 인조가 남대문 옥좌에 앉아 애통교를 내리고 제신들이 애통해 함.
병자 12월 18일 ; 원두표가 적군을 맞아 싸워 여섯을 죽이고 이서가 병참을 맡음
병자 12월 19일 : 남문 대장 구굉이 발군하여 20명을 죽임. 김청음에게 명하여 성황 신에게 제사를 지냄
병자 12월 20일 : 마장이 통사 정명수를 보내 화친을 추진함.
병자 12월 21일 : 이기축, 신경진의 발군
병자 12월 22일 : 마부대가 통역관을 보내 다시 화의를 청해 왔지만 임금이 허락하지 않음
병자 12월 23일 : 동·서·남문에 군사를 내고, 왕은 북문에서 싸움을 독촉함
병자 12월 24일 : 임금이 세자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빎
병자 12월 25일 : 적진에 세찬을 보내어 그 기색을 살피게 함
병자 12월 26일 : 세찬을 가지고 적진에 가서 치욕적인 거절을 당함
병자 12월 27일 : 날마다 성을 지키는 근왕병을 구하나 한 명도 오는 사람이 없음
십칠 일에 상감께서 남대문에서 殿座(전좌 : 임금이 옥좌에 나와 앉음)하시고 애통교(애통한 교서)를 나리오시니, 뜰에 가득한 제신(여러신하들)이 아니 울 니 업더라.(아니 우는 사람이 없더라) - 17일 임금의 애통한 교서 하교
십팔 일의 북문 대쟝(북문대장) 원두표가 적군을 비로소 자못(자문받아로 해석하거나, 생각보다 매우) 바다 나가(맞아 나가, 밟아 나가) 싸워 도적 여섯을 죽이니라 . 성중 창고의 쌀과 피 잡곡 합하야 겨우 일만육천여 석이 이시니(있으니), 군병 만인의 일삭(한 달) 냥식(양식)은 되더라. 소곰, 장, 조, 면화, 병장기 집물(什物 : 살림살이에 쓰는 온갖 기구)가 다 이서(李曙 : 병자호란 때 장군)가 장만하여 둔 것을 쓰니 이서장군의 재주를 일큿더라(칭송하더라) - 18일 원두표와 이서의 활약(청군을 죽임)
십구 일의 남문 대쟝(남문대장) 구굉(具宏)이 발군하여(군사를 내어) 싸워 도적 이십 명을 죽이다. 대풍(大風)하고, 비 오려 하더니 김청음을 명하여 성황신께 제(祭)를 지내니, 바람이 즉시 그치고 비 아니 오더라. - 19일 구굉의 활약(성황신에 제사)
이십 일의 마장(馬將 : 청나라 장수 마부대를 가리킴)이 통사(通使 : 통역관) 정명수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언약하므로, 셩문(城門)을 여지 아니하고 성 위에서 말을 전하게 하다. - 20일 적의 화친 언약
이십이 일의 어영 별장 이기축(병자호란 때 어영 별장을 지냄)이 군을 거느려 적을 여라믄(십여 명)을 죽이고, 동문 대장 신경진(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운 장수)이 또 발군하여(군사를 내어) 도적을 죽이다. - 21일 이기축, 신경진의 발군
이십이 일의 또 마부대 통사 정수명(병자호란 때 용골대, 마부대의 통역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이제는 동궁(東宮 : 소현세자)을 청하지 않으니, 만일 왕자 대신을 보내면 정하여 화친하자 하므로 상감이 오히려 허락하지 아니하시도다. 북문 어영군이 도적 여라문(십여 명)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설흔아믄을 죽이다. 상감께서 내정(궁궐안)에서 호군(음식을 베풀어 군사를 위로함)하시다. - 22일 마부대의 화친 요청, 왕이 허락하지 않음
이십삼 일의 동·서·남문의 영문(營門)에서 군사를 내고, 상감께서 북문에서 싸움을 독촉하시다. - 23일 북문에서의 왕의 독전
이십사 일의 대우(큰비)가 내리니,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지킨 군사를 다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상감께서 세자로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사되
"금일 이에 이르기에는 우리 부자가 득죄하미니, 일성 군민(一城軍民 : 온 성 안의 군사와 백성)이 무슨 죄있겠습니까. 천도(天道)가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하옵건데 만민을 살려주옵소서."
군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청하되 허락치 아니하시더니, 미구(오래지 않음)에 비 그치고, 일기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城中人)이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 24일 성을 지키던 군사가 얼어 죽음, 임금의 기원
이해와 감상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산성(山城)을 지키는 비참했던 모습(難中之難 :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움)을 당시 수행했던 어느 궁인이 실기(實記)한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전란(戰亂)의 현장을 기록한 이 작품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와 함께 사건을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기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이 부분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사직을 지키려는 임금의 결연한 의지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고, 소규모의 전투와 함께 적군이 화의를 청해 왔으나 응하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치욕적인 외교의 일면이 생생하게 객관적으로 기록되었고, 남한산성에서의 처절한 항전(抗戰) 및 굴욕적인 외교의 일면과 암울했던 역사의 이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일까지도 상세히 씌어 있고, 당시에 권력을 장악한 김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궁체본(宮體本)과 해서체본(楷書體本)의 두 가지가 있으며, 강한영(姜漢永)의 교주(校註)가 《현대문학》(1958년 10월호, 59년 2·3·5·6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정황을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이고 긴장감 있게 그린 궁중수필이자 실기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큰 작품이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중기에 지어진 작자 미상의 일기. 1책. 한글필사본. 병자호란 당시의 일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체 작품이다. 작자와 저작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다음 두 가지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는 현종·숙종대 창작설이고, 또 하나는 효종대 작품으로 보는 견해이다. 작자에 대해서도 전자는 척화론자로 미관의 젊은이일 것이라는 견해인 데 반해, 후자는 당시 지식층 사람으로 궁인 혹은 사관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
낙선재본·국립중앙도서관본·구왕궁본(舊王宮本)의 세 가지가 있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청군(淸軍)에게 항복하기까지 약 50여일간의 사실이 일기의 형태를 빌려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정묘호란 이후 병자년 겨울 청군의 내침에서 비롯하여 정축년 정월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어서 2월 한(汗)의 철군,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의 심양(瀋陽)발행, 인조의 환궁, 4월 조선사신이 청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 일, 11월 삼전도(三田渡)에 청나라 황제의 송덕비를 건립하게 된 일까지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산성일기〉에 기술된 사실들을 역사 기록인 〈병자록 丙子錄〉이나 〈남한일기 南漢日記〉에서 찾아보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병자호란 당시 직접 인조를 보호하여 실전에 참여하고, 투항하기까지 국가의 중요시책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의 체험기가 아닌가 하는 인상이 짙다.
뿐만 아니라 〈산성일기〉의 작자는 문장에도 매우 능하여 상기한 역사적 사실을 발단에서 전개, 위기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는 하나의 단편처럼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누르하치와 홍타시에 관한 풍자적이며 완만한 필법에서 출발한다. 점점 논조(論調)가 강해져서 양국을 오가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시소를 타는 듯한 모습을 이루다가, 30일의 출성이 고비를 이루면서 차차 기울어진다.
이처럼 50여일의 긴 시간적 경과가 마치 한 숨을 몰아쉬는 듯한 긴박감으로 연결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굴욕적 망국의 역사적 사실 앞에 울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결국, 〈산성일기〉는 역사적 사실의 날줄에, 작자의 병자호란을 보는 심리적 의도의 씨줄을 먹여 자아낸 한 폭의 피륙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가치보다도, 작품을 통해 작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대적 상황의식이 아름다운 필체로 박진감 있게 표현되고 있어 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할 만한 작품이다.
≪참고문헌≫ 山城日記解說(姜漢永 校注, 現代文學 4-10, 1958), 山城日記硏究(南廣祐, 東大語文 1, 1971), 山城日記考(徐賢, 韓國語文學硏究 8), 山城日記의 文學的 價値(蘇在英, 壬丙兩亂과 文學意識, 1980).(출처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병자호란 (丙子胡亂)
1636년(인조 14) 12월∼37년 1월에 청나라의 제2차 침구(侵寇)로 일어난 조선 ·청나라의 싸움으로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 ·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 ·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 ·대신 ·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 ·몽골 ·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아 강화 ·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 ·원손(元孫)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彿)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 ·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刪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 ·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황제의 생일) ·정조(正朝) ·동지(冬至) ·천추(千秋:중국 황후 ·황태자의 생일)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 ·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 ·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가 사회 ·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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