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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민(山民)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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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민(山民)

 

下馬問人居 하마문인거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婦女出門看 부녀출문간 아낙네문간에 나와 맞이하네

坐客茅屋下 좌객모옥하 띠집처마아래 손을 앉게 하고

爲我具飯餐 위아구반찬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오네

丈夫亦何在 장부역하재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扶犁朝上山 부리조상산 아침에 따비를 메고 산에 올라

山田苦難耕 산전고난경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日晩猶未還 일만유미환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

四顧絶無隣 사고절무린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

鷄犬依層巒 계견의층만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中林多猛虎 중림다맹호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

採藿不盈盤 채곽불영반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

哀此獨何好 애차독하호 슬프다 외딴 살이 어찌 좋으리

崎嶇山谷間 기구산곡간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樂哉彼平土 락재피평토 평지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欲往畏縣官 욕왕외현관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창협(金昌協)

연대 : 조선 숙종 때

갈래 : 오언 배율

성격 : 현실고발적, 비판적

표현 : 직설법

압운 : 看, 餐, 還, 巒, 盤, 間, 官

구성 : 수함경미의 사단 구성

1~4행 - 산가 방문과 아낙의 소박한 대접

5~8행 - 산 속 생활의 고단함

9~12행 - 산 속 생활의 외로움과 두려움

13~16행 - 산 속에 사는 이유

산중

평지

사나운 호랑이

관리들의 횡포

백성들의 고통스런 삶

주제 : 관리들의 횡포와 평민들의 고된 삶 / 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삶

출전 : 농암집

내용 연구

 

下馬問人居 하마문인거 말에 내려 인가를 찾아가 보니

婦女出門看 부녀출문간 아낙네 문간에 나와 맞이하네[백성들의 인정있는 모습]

坐客茅屋下 좌객모옥하 띠집 처마아래 손을 앉게 하고

爲我具飯餐 위아구반찬 나를 위해 밥과 반찬 내어오네(작가는 산 속에서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한 민가에 들어서게 된다. 어렵게 사는 생활이지만 손님을 위한 대접에는 소홀하지 않는 순박한 농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 산 속 민가의 우연한 방문 -수

丈夫亦何在 장부역하재 남편은 어디에 나가 있냐 하니

扶犁朝上山 부리조상산 아침에 따비를 메고 산에 올라

山田苦難耕 산전고난경 산밭을 일구느라 고생을 하며

日晩猶未還 일만유미환 저물도록 돌아오지 못한다네(부녀만 있는 집에 들어 가서 잠시 머물며 바깥 주인의 출타 여부를 묻자, 아낙네는 산 속에 있는 밭을 일구러 쟁기를 메고 올라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되게 일을 한다고 알려준다. 산속에 사는 농민의 고달픈 생활을 알 수 있다.) - 산 속 농민의 고된 생활 - 함

四顧絶無隣 사고절무린 사방을 둘러봐도 이웃은 없고[사고무친(四顧無親) :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음]

鷄犬依層巒 계견의층만 개와 닭도 산기슭에 의지해 사네

中林多猛虎 중림다맹호 숲 속에는 사나운 호랑이 많아[원님보다는 덜 무서운 산짐승]

採藿不盈盤 채곽불영반 나물도 마음대로 못 뜯는다네(만중운산의 깊은 산속으로 키우는 가축들도 사람이 그립고, 먹을 것도 없어 산 속을 헤매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니고 그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만큼 깊은 산골이기 때문에 산짐승이 무서워서 함부로 돌아다니면서 나물도 뜯지 못하는 형편이고, 그런 까닭에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늘 외로움과 두려움에 휩싸여 산다는 것이다.) - 산 속 생활의 외로움과 두려움 - 경

哀此獨何好 애차독하호 슬프다 외딴 살림살이 어찌 좋으리

崎嶇山谷間 기구산곡간 험하고 험한 산골짝에서……

樂哉彼平土 락재피평토 평지[사람들이 사는 곳]에 살면 더없이 좋으련만

欲往畏縣官 욕왕외현관 가고 싶어도 벼슬아치 두렵다네(산골에 사는 이유와 벼슬아치가 두렵다는 말에서 당시 민중들의 고달픈 삶의 원인이 탐관오리들의 학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기’의 ‘단궁편(檀弓篇)’에 나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뜻으로, 혹독한 정치의 폐가 큼을 이르는 말)를 떠올리는 구절로 당시 민중의 고단한 삶이 결국은 정치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황구첨정(黃口簽丁 : 조선 후기에, 군정(軍政)이 문란해져서 어린아이를 군적(軍籍)에 올려 군포를 징수하던 일), 가렴주구(苛斂誅求 :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백골징포(白骨徵布 : 선 후기에, 죽은 사람의 이름을 군적과 세금 대장에 올려 놓고 군포(軍布)를 받던 일.) 등이 있었다. - 학정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달픈 삶 - 미

이해와 감상

 

산민(山民)은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을 피해 산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곳에서 산은 관리들을 피해서 살 수 있는 도피처이지만 그 도피처는 단지 고달픈 삶만을 제공하는 산일 따름이다. 그곳에는 인간의 교유가 없고, 단지 극한적인 생존만이 존재한다. 그런 극한적인 생존도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학정보다는 견딜만하다는 데에서 당시 민중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예기’에 나오는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의 고사성어를 연상하게 한다. 다시 말해서 가혹한 정치는 백성들에게 있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는 고통보다 더 무섭다는 말로 춘추 시대(春秋時代) 말엽, 공자(孔子:B.C 551∼479)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조정의 실세(實勢)인 대부(大夫) 계손자(季孫子)의 가렴 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이 몹시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공자가 수레를 타고 제자들과 태산(泰山) 기슭을 지나가고 있을 때 부인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일행이 발길을 멈추고 살펴보니 길가의 풀숲에 무덤 셋이 보였고, 부인은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자비심이 많은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에게 그 연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자로가 부인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부인, 어인 일로 그렇듯 슬피 우십니까?" 부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더니 이윽고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는 아주 무서운 곳이랍니다. 수년 전에 저희 시아버님이 호환(虎患)을 당하시더니 작년에는 남편이, 그리고 이번에는 자식까지 호랑이한테 잡아 먹혔답니다."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여기서 살면 세금을 혹독하게 징수 당하거나 못된 벼슬아치에게 재물을 빼앗기는 일은 없지요." 자로에게 이 말을 전해들은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苛政猛於虎]'는 것을…‥."

결국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위정자들의 반성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촉구일 따름이지 실천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 그것을 보여 준다.

심화 자료

김창협(金昌協)

1651(효종 2)∼1708(숙종 3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또는 삼주(三洲). 경기도 과천 출신.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자,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 어머니는 안정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성두(星斗)의 딸이다. 영의정을 지낸 창집(昌集)의 아우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해 전적에 출사한 뒤,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 朱子大全箚疑≫를 명에 의해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군)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는 평소에 부드럽고 화기가 가득하지만 의리를 분별해 밝힐 때는 목소리를 높여 기개와 절조를 표현해 그의 말을 끊을 수 없었지만, 선입견이 없어 다른 사람의 의견이 옳으면 곧 주장한 바를 양보하였다. 또한 후학을 순순히 교화해 모두 심복하게 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해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고, 그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학문은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라고 해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그는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도한 그는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성악론변 性惡論辨〉에서 그는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는 이기설에서 대체로 이이보다는 이황의 설에 가까우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특히, 문장에 능하며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주자대전차의문목 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 論語詳說≫·≪오자수언 五子粹言≫·≪이가시선 二家詩選≫ 등이 있고, ≪강도충렬록 江都忠烈錄≫·≪문곡연보 文谷年譜≫ 등을 편집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農巖集(金昌協),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5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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