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돼지 / 본문 일부 및 해설 / 김우진
by 송화은율산돼지 / 김우진
장소 : 서울 가까운 어떤 군 읍내
등장인물 : 최원봉(29세) 차혁(28세) 최영순(20세) 최 주사댁(58세) 정숙(25세)
제 1 막
주사댁 집 앞마당을 중심으로 오른편으로 건넌방, 그 앞에 뒷마루. 왼편으로 큰 대청, 또 그 왼 편으로 안방 영창문이 있고, 그 앞으로 부엌간이 내밀고 있다. 중류 계급의 견실 순박한 기풍의 세간살이, 장독대, 뒤주, 찬장, 심지어 걸레질 잘 해 놓은 마룻바닥, 잘 쓸어 놓은 마루 밑까지 나타나 있다. 여름날 석양. 바람 한 점 없는 뜨거움이 서늘하게 열어 젖힌 대청 안에서 도사리고 있다.
막이 열리면 대청 중앙에 원봉이와 혁이가 바둑판을 마주 놓고 앉아 있다. 세 번째 승패의 끝판이다.
차 혁 : (기가 난 듯이 다리를 세우며) 흥, 끝판에 탁 대들어 본다. 오냐, 대들어 봐라.(바둑을 놓는다.)
최원봉 : (냉연하게) 네가 말 안 해도 벌써 이렇게 대들지 않았니?(놓는다.) 이리로 막아 버리면 네 살길이 어디냐?
차 혁 : (놓으며) 또 이리로 막아 버리면 네 길은 어디고.
최원봉 : (웃으며) 이 넒은 세상에 길이 없을까 봐. (놓는다.)
차 혁 : 아, 이놈 보게. (생각한 뒤에 놓는다.)
최원봉 : 넒은 세상에 길 없을까 봐, 넒은 세상에 길 없을까 봐. (놓는다.) 넓은 세상에……
차 혁 : (웃으며) 길만 찾지만 하는 수가 있니. 다 죽어 가는 놈이……. (놓는다.)
최원봉 :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놓는다.)
차 혁 : 이 애가 왜 이 모양이야. (놓는다.) 세 집 다 결딴났는데.
최원봉 :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죽더라도 죽을 때까지. (생각한 뒤에 놓는다.)
차 혁 : (놓으며) 이러면 이 집도 날아갔다.
최원봉 : 날아가는 것은 날아가거라. (놓는다.)
차 혁 : (승리의 환희) 그리고 남는 것은 목 베인 항우(項羽)만…….
최원봉 : 목 베여도 살 수 있으니까 항우란다. 이놈! (놓는다.)
차 혁 : (더 큰 환희) 이러면 영영 죽었지. (놓으며) 자 인제 그만두자. 다 되었는데 내기 한 것이나 얼른 내놔라.
최원봉 : 이거 왜 이래. 세기나 다 하고 난 뒤에 조르렴. (센다.)
차 혁 : 죽는 놈 마지막 청이구나. 제 송장 꼴 보려고 예순, 일흔, 아흔, 스무집이나 달리지 않았니? (영순이가 꿀물과 복숭아와 칼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와서 옆에 놓는다.)
최영순 : (혁에게 말하듯이) 오빠, 너무 골리지 말아요. 백주에 일년생을 가지고.
차 혁 : 자, 인제 마지막 백기를 들어야지.
최원봉 : 이것 영영 졌구나. (물러앉으며) 하는 수 없이 또 당하는 수로군.
차 혁 : (또한 물러앉으며) 아까 네가 욕심부리다가 여기 있는 것을 거두었기 때문에 탈이었다. 아, 패전한 배상이 겨우 이건가?
최원봉 : (바둑을 치우며) 얘, 이래 보여도 이 복숭아가 15전씩이란다. 천진수밀도(天津水蜜桃)야, 알기나 아니?
최영순 : 일부러 오시라고 해 갖고 무얼 대접할 게 있어야지요.
차 혁 : (웃으며) 영순 씨는 어찌도 그리 잘 아세요. 오라버니 패전할 것을. 세어 보기도 전에 이런 것을 갖다 놓으니.
최영순 : 그러니까 오라버니 동생간이지요. (복숭아를 깎는다.)
차 혁 : 이리 줍시오. (받아서 깎으며) 나도 참 영순 씨만한 누이만 있었으면 하지만 패전 예보만은 쏙 빼놓고 말이지요.
최원봉 : (웃으며) 패전이라도 알아주니 그만큼 고맙지 않나? 동시에 자네에게는 승전 예보의 천사가 된 셈일세.
차 혁 : 잔 다르크란 말인가?
최영순 : (잠깐 얼굴을 붉히며) 저는 싸우지도 않았는데 잔 다르크예요? 그리고 잔다르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천사 미카엘이었더래요.
차 혁 : 하하, 이것 또 무식이 탄로되었군. 하지만 오라버니가 미리 질 줄을 알고 있는 것만은 천사 될 자격이 넉넉히 있습니다.
최원봉 : 즉 자네 승전을 미리 알고 있는 천사란 말이지. 똑똑하게 안다.
차 혁 : 그 말도 더 똑똑하게 안 말이다. (웃는다.)
최영순 : 잡수세요. (바둑판을 치우고 쟁반을 가운데 놓는다.)
최원봉 : 이기기는 자네가 이겼어도 결국은 다 내 덕인 줄 알게, 이런 좋은 복숭아는 물론이고, 영순이가 자네 천사인가 무엇인가 된 것까지.
최영순 : 에그, 오빠도.
차 혁 : 지고 나서는 그게 변명인가?
최원봉 : 자네나 너나 다 내 앞에 절해야 한다. 위대한 개선 장군 앞에 가서 두 애인이 손잡고 축복을 받으려는 것과 같이……
차 혁 : 그런 히니꾸는 빼놓고 해라. 비위 상한다.
최원봉 : 비위가 상해? (얼굴이 침울하게 변해지며) 개선 장군이란 실상은 패전 장군이란 말뜻을 모르니? 게다가 목숨 붙은 장군이 아니라 죽어 자빠진 석상(石像)이란 말이야.
차 혁 : 이따금 자네 왜 그런 소리는 자꾸 내놓나?
최영순 : 그만 두세요. 다른 이야기나 하세요.
차 혁 : 자네 그러다가는 나하고 당초에 바둑 못 두네.
최원봉 : 목이 달아난 패전 장군인데 어떻게 또 두어 볼 용기가 나겠는가?
최영순 : 아이고 오빠도. (혁에게) 다른 이야기 하세요 좀.
차 혁 : 예끼, 사내답지 못한!
최영순 : 모처럼 어머니도 안 계신데 오셨으니, 서로 웃어가며 이야기하세요.
최원봉 : (먹던 복숭아를 내버리고 길게 호흡한다.) 시끄럽다.
최영순 : (꿀물을 주며) 이것 잡수세요. 속 시원하게.
최원봉 : (받아 마시고) 너 왜 그 치마는 또 입고 있니?
최영순 : 이것밖에는 없는 걸 어떻게 해요. 새로 장만하려면 또 돈 들지 않아요?
있는 것 먼저 입어버려야지요. 고운 것 아낀다고 발가벗고 있을 수 있어요?
최원봉 : 흰 모시 치마에다가 집에 있을 때는 행주치마 두르고 있으라니까. 그 치마 아니면 연애 못하니?
최영순 : 에그, 오빠도?
최원봉 : 얼른 들어가 바꿔 입고 와! 그 동안 혁이가 실컷 보았으니까 괜찮아.
최영순 : 어제 잉크 엎질러서 죄다 버렸어요.
최원봉 : 방정! 공부할 때에도 행주치마 입고 있을 것이 뭐야.
최영순 : 행주치마였기 때문에 괜찮았지요. 흰 모시 치마도 안 아까운 것은 아니지만
최원봉 : 그래 오늘 혁이 보는 데 입을려고 잉크 엎질렀구나.
차 혁 : 여보게. 나가 산보나 하세. 집안에 들어앉아서 공연히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지만 말고.
최영순 : 저녁때 다 되었는데 잡숫고 나가시지요.
차 혁 : (일어서며) 회관에나 가 보세. 상무 간사가 되면 일요일이라도 한 번씩은 휙 둘러봐야 하는 법이야.
최원봉 : 법은 무슨 법이야. 저희들이 욕을 하든 말든 내 양심대로만 해 나가면 그만이지.
차 혁 : 또 그따위 소리 내놓는구나. 그러니까 못써.
최원봉 : (마루 끝으로 나와 앉으며) 못쓰면 하다 못해 끈이라도 달아 쓰려무나.
최영순 : (혁이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왜 또 무슨 말썽이 일어났어요.?
차 혁 : 자포 자기는 또 무슨 자포자기야. (원봉이 가만히 앉았다. 영순에게) 일전 총회 때 불신임안이 제출되었더랍니다.
최영순 : 누구 불신임안?
차 혁 : 아직 못 들으셨소? 상무 간사 불신임안이래요.
최영순 : 왜? 이번에는 또 무슨 까닭으로요?
차 혁 : 까닭은 무슨 까닭이 있겠수. 청년회 간사 욕했다고 그 여독이 안 풀어진 게지요. 원봉이가 접때 바자 수입금에서 돈 썼다고 탈을 잡는답니다.
최영순 : 이제 와서는 별 죄명을 다 붙이는군요. 회계 검사해 보면 알 일 아니예요?
차 혁 : 회계에 명백하게 기입이 되어 있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나요? (말을 그친다.)
최영순 : (말뜻을 호의로 오해하고) 그런데 왜들 그런답니까? 오빠 하나 못 잡아먹어서. 바자는 뉘 덕에 열리게 되었는데. 괜히 남의 충동에만 놀고 있는 자기네들이 부끄러운 줄은 모르고. (혁 침묵) 그것도 저희들이 나쁜 짓을 하니까 누가 되든지간에 말해야 옳은 일 아니예요? 왜 이광은이 따위가 떠나는 데 송별연이니 무엇이니 그리 야단을 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남의 여자 꾀어 가지고 일본 좀 간다고 그것이 그리 영광이 되고 명예될 게 무엇 있어요. 그런 데다가 백여 원씩쓰는 돈은 하늘서 떨어진 돈이랍니까? (다 침묵) 글쎄 왜들 그래요. 한 단체로 앉아서 아무 관계없는 이광은이 따위를 위해 돈을 쓴단 말이오. 남의 여자를 빼돌려 가지고 달아나는 그런 더러운 인격자를 무슨 명예가 된다고 그리 찬송을 한답니까. 그렇게 공격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면 정정당당하게 싸워 보지 왜 인신 공격은 해요. 접때도 순희가 와서 이야기하는데 오빠 화상을 게시판에다가 그려 가지고……. (혁이 눈짓을 한다.) 그게 무슨 되지 못한 야만의 짓들이예요. 글쎄 왜들 그래요?
차 혁 : 그만둡시다. 우리끼리만 분하게 여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최원봉 : (획 돌아앉으며) 그래 내 화상을 그려 놓고 어쨌더란 말이냐?
최영순 : 오빠 화상을 게시판에다 그려 가지고 '산돼지 토벌'이라고 써 놓고 야단들이었드래요. 그 앞에 서서 모두 손뼉을 쳐 가면서…….
최원봉 : 흥, 산돼지 화상! 산돼지 얼골! (자기를 조소하듯이 웃는다.)
차혁 : 영순 씨 고문두시오. 그까짓 개자식들 하는 것 일일이 가리다가는 우리만 사람답지 않게 됩니다.
최영순 : 그런데 왜 오빠더러 돈 썼다고 야단들예요?
차혁 : (원봉에게) 딴 남들까지 다 알고 있는 처지에 영순 씨에게 말못할 게 무엇 있니.(영순에게) 장부와 현금은 확실히 50여 원이 축이 난답니다. 그러니까 현금 출납을 맡게된 원봉 군에게 불신임안이 제출되는 것도 무리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 불신임안은 결국 불통과가 되었으니 근심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몇 명 힘있는 자 외에 일반은 불신임안을 부인하겠다는 생각보다도 원봉 군을 용인하겠다는 생각으로 불통과가 되었습니다.
최원봉 : 그것이 실상인즉 내 맘을 괴롭게 만드는 것인 줄 네가 알겠니?
최영순 : 오빠, 그러면 회계 검사를 시키면 될 일이 아니예요. 당연한 정당 방어라고 할 수 있지 않아요.
차혁 : 그 문제보다도 이 불신임안이 제출되게 된 원인을 캐서 폭로시켜야 할 것이지요. 왜 그런고 허니, 한 회의 상무 간사로서 앉은 책임이 있는 이니까, 설령 회계에 축이 났다고 하더라도 제가 물어 넣으면 고만일 게 아니냐 말이야. 그런 걸 가지고 일반 회원들의 사실상 신임을 무시하고서는 상임 간사의 불신임안이라니 말이 되는가. 자기 회를 자기가 똥칠하는 그런 무식하고 무정견한 짓이 어디 있겠소. 이 내용을 조사해서 확적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으면 안 되네.
최원봉 : 설령 증거를 잡아 낸다면 무슨 소용 있니?
차혁 : 너 또 그 소리 내놓는구나. 너 그러다가는 성인 군자 밖에 안 된다. 생각을 해 봐. 남의 회의, 더구나 일 개인으로 앉은 이에게 분풀이 좀 하려고 그회의 간부들을 매수하다시피 한 그런 악랄한 자식들이 어디 있어! 이런 악랄한 청년회 놈들과 눈감고 그놈들의 손가락에 놀아난 간부 놈들을 대소독시켜 버리지 않고 어쩌잔 말이야. 첫째로는 이런 바칠루수 소독하기 위해서, 둘째로는 처지와 주장이 태평양만큼 떨어져 있는 저 적군을 전멸하기 위해서 이번에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 있어! 이 기회를, 천재 일시의 이 좋은 기회를 자네가 모른 척하고 앉을 테면 그것은 한 가지의 죄악일세. 모르고 행하는 악행보다도, 주의 주장이 달라서 행하는 악행보다도 큰 죄악이라고 할 수 있어. 자네는 자네의 개인의 사정으로만 이걸 생각해서는 안 되네. (영순에게) 이건 한 회원으 자격으로 앉아서 영순 씨에게 충고하는 말이오. 이번 일을 그대로 넘겨서는 결코 안 될 일이오. (원봉에게) 자네도 사람이 아닌가? 의기와 피를 가진 청년이 아닌가? 사람으로서 청년으로서, 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하세.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사는지, 사회를 위해서 사는지 이 문제는 손쉽게 이야기 못 할 것일세. 그러나 다만 한 가지의 점, 나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이 실현된다면 이것처럼 장엄한 사실이 어디 있겠나. 자네 자신으로 앉아서도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고 주저하는 일이 있겠지. 그러나 그 의문과 주저에 몸을 맡긴다면 대체 무슨 까닭으로 죽지 않고 살아 있단 말인가?
최원봉 : 얘, 듣기 싫다. 네 웅변은 인제 기운 빠진 나팔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차혁 : 책임 가지고 앉은 상무 간사의 대답이 그것뿐인가? 예, 우리는 다 결점 가진 사람이 아니니? 너의 개인 사정은 개인 사정이고, 회 사정은 회 사정이 아닌가? 그렇지만 이 두 가지가 기회라는 절호기에 와 닥친 것을 눈 앞에 보고 앉아서, 쓸데없이 가슴만 쥐어뜯고 앉아도 잘난 짓이 못 되네. 그래 이 기회 - 나는 이 기회를 말하네. 모든 전선이 다 배포된 이 자리에 앉아서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되네. 칼을 들고 일어 나서야 하네. 마지막 결전의 생각으로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하고 대들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결전하는 생각으로 행동해야 한다. 알아듣겠니?
최원봉 : 그따위 소리는 연단에서나 가서 하라니까. 이것은 내 집이야! 내 집. 네 웅변으로 될 것 같니?
<하략>
〈조선지광〉〈1926〉
작자 : 김우진(金祐鎭)
형식 : 희곡
배경 : 1920년대 서울 가까운 어느 읍(邑)
구성 : 장막극. 6단 구성
특징 : 표현주의를 통하여 자기 시대의 빈궁한 삶을 있는 그대로 나타냄으로써 일제에 대한 공격이나 저항, 비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주제 : 식민지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의 새로운 삶의 방향 모색과 생명력.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저항과 좌절
출전 : <조선지광>(1926)
의의 : 우리 나라 문예 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다.
줄거리
이 작품은 3 막으로 되어 있다.
원봉이 청년회에서 불신임당하는 제 1막은 본문의 내용에 이어 원봉의 애인인 정숙이 다른 남자와 일본으로 도망간 사실. 영순과 애인인 차혁과의 충돌, 그리고 원봉의 아버지는 동학군으로서 관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사실 등이 노출됨으로써 원봉이 겪고 있는 심리적·사회적 갈등이 '집안에 갇힌 산돼지'라는 데서 비롯됨을 시사한다.
제 2막은 원봉의 집 건넌방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원봉은 영순의 어머니(최주사댁)로부터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게 된다. 원봉은 동학군이었던 박정식의 아들로 박정식이 관군에게 잡혀 죽자 부친과 같은 동학군이었던 최 주사가 그를 데려다 키운 것이다. 최주사는 딸 영순과 원봉을 결혼시키라고 유언했지만, 원봉은 정숙과, 영순은 차혁과 교제한다. 원봉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원봉은 부모가 동학군으로 고난을 겪는 상황을 몽환 장면으로 보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동학 이념을 과제로 안고 고민하는 산돼지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제 3막의 무대는 봄의 들판, 원봉은 영순과 여자가 할 일을, 그리고 정숙과는 앞으로 서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논의를 하며 원봉이 시를 낭송하면서 서서히 막이 내린다. 여기에 인용되는 시는 원봉이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를 읊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데, 조명희의 시 마지막 연을 다음과 같다.
미칠 듯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엄마! 엄마! 소리를 내었더니
땅이 우애! 하늘이 우애! 하오매
어느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없어라.
구성
발단 : 청년회 상무 간사인 원봉이 바자회 수입금 유용 명목으로 청년회로부터 불신임을 당함.
전개 : 최 주사의 유언에도 불구하구 원봉과 정숙, 영숙과 차혁이 각각 교제함.
위기 : 원봉이 동학 이념을 실현하지 못해 안타까워함.
절정 : 원봉이 신경 쇠약증에 걸림.
대단원 : 정숙의 귀향.
1문단 : 주인공 원봉은 사회를 개혁하고자 청년회에서 봉사를 하지만, 정숙이 다른 남자와 소개하면 일본으로 도망가고, 청년회원들이 불신임안을 내자, 이로 인해 고민에 빠진다.
2문단 : 영순은 차혁을 사랑하게 되고, 불신임안의 뒷처리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차혁과 대립한다.
3문단 : 자기 성장의 비밀과 영순과 정숙에 대한 애정으로 고민한다.
4문단 : 환몽 중의 일을 확인하기 위해, 비밀을 숨기려 하는 최 주사댁에 강력히 저항한다.
5문단 : 자신에게 지워진 사회 개혁의 사명감과 현실과의 괴리로 고민한다.
6문단 : 여성 해방주의자 정숙은 자유를 얻기 위해 현실을 도피하려 하고, 이에 원봉과 갈등을 일으키지만, 모든 것이 포기된 상태에서 정숙을 안주할 곳으로 생각한다.
등장 인물의 성격
최원봉 : 동학군인 부모가 죽임을 당하자 최 주사에 의해 성장함. 식민지 조선의 청년 지식인의 전형
차혁 : 원봉의 친구이며 영순의 애인
최영순 : 최 주사의 딸로 원봉과는 남매 사이로 되어 있지만, 최 주사가 유언으로 원봉과 결혼시키려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음
최 주사댁 : 영순의 어머니. 남편 최 주사의 유언대로 영순과 원봉을 결혼시키려 함
정숙 : 원봉의 애인. 다른 남자와 동경으로 갔다가 돌아옴. 당시 젊은 지식인들의 자유 연애 사상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인물로 보임
바둑의 암시적 성격 : 바둑은 문제와의 대결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상징적 의미를 생각한다.
길의 상징성 : 길이 지닌 여러 가지 의미를 생각해 본다. 이 단어는 발단에서 던지는 암시적 요소이다.
죽더라도의 함축 : 바둑을 두고 하는 말이면서도 또 다른 의미를 함축하는 중의적인 표현임에 주목한다. 최원봉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대사다.
목 베인 항우(項羽) : 살아서는 천하 장사였지만 이미 목이 잘린 죽은 항우, 즉 좌절한 영웅의 모습을 드러냄. 목 베인 항우는 바로 최원봉 자신을 이르는 말이다. 아버지의 유명(遺命)에 대한 의무감과 현실적 무력함 속에서 좌절하고야마는 최원봉을 상징하고 있다.
이 넓은 세상에 길 없을까 봐 : '이 넓은 세상'은 바둑판이 넓다는 말도 됨과 동시에 인간 세상이 넓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는 이중성을 가진다. 이런 이중성은 그 뒤에 계속 이어지는 '넓은 세상'의 반복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길'은 <바둑길>로, '길'은 새로운 방법, 방향을 의미하며,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죽는 놈 마지막 정이구나. 제 송장 꼴 보려고 : 상대방에게 이미 진 바둑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의미의 표현이다. 상대방을 골려 주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다.
차혁과 영순의 관계 : 서로 애인사이로, 이들의 대화가 은근함에 주목한다. 이러한 대화 전개는 이 극의 시대 배경인 1920년대의 남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음에 주목한다.
잔다르크의 시대성 : 인용되는 사례에서도 점에 착안하여 감상한다. 잔 다르크는 여성으로서 구국 영웅이었고, 1920년대의 한국 선구자이었던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개인의 이익 추구보다는 사회·민족적 이념이 선행하고 있음에 주의를 기울인다.
허지만 패전 예보만은 쏙 빼놓고 말이지요 : 나도 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부러움을 표현하면서, 그러나 바둑에 졌다는 것을 미리 알려 주는 일은 없는 누이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
그 말도 더 똑똑하게 안 말이다 : 혁과 영순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미리 발설한 그 말도 맞는 말이다.
히니꾸 : 빈정거림. 비꼼을 일컫는 일본어
패전장군의 의미 :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점에서 글의 대사는 일상적인 말과는 달리 압축·상징적임을 이해한다.
성격 추리 : 대사는 인물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그 동안 혁이가 실컷 보고 있었으니까 넉넉하다 : 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시 치마를 입은 것이겠지만 혁이가 그만큼 보았으니 이제 됐다.
대사의 줄거리 압축 기능 : 대사는 사건의 전개를 압축해서 알려주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이런 대사를 통해 갈등의 성격이 구체화된다.
아직 못 들으셨소 : 앞으로 전개될 사건은 이러한 과거의 사실을 바탕으로 뒤얽히게 된다는 암시적 효과를 겨냥한 대사이다. 특히 이 말을 이어가는 대사에서 그 동안의 사건 전모와 갈등 요인이 압축적으로 요약·제시되고 있다.
이리 툭적 하지만 말고 : 여기다가 시비해 보고 저기다가 불퉁거려 보고 하지 말고
나가 산보나 하세∼이리 툭적 저리 툭적 하지만 말고 :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꿔 보고자 혁이 산보를 제안한다. 혁의 신실한 성격이 느껴짐.
청년회 간사 욕했다고∼돈 썼다고 탈을 잡는답니다 : 원봉이 청년회 간사를 욕해서 생긴 안좋은 뒷감정이 남아 있어, 원봉이 바자 수입금을 유용한 것을 이유로 상무 간사 불신임안이 제출된 것이다.
남의 여자 꾀어 가지고 ∼명예될 게 무엇 있어요 : 남의 여자는 바로 원봉의 애인인 정숙을 가리킨다. 이광은과 정숙이 함께 동경으로 떠날 때 송별연 문제로 청년회 간사와 최원봉 사이에 언쟁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못 쓰면 하다못해 끈이라도 달아 쓰려므나 : 여기서 '못 쓰다'는 '나쁘다' 또는 '안 된다'의 뜻인데, 이것을 사용한다의 뜻으로 바꾸어 '못 쓰면'이라고 받고 있다. 이는 관용적 표현에 속하며 흔히 사용되는 말로 하면 엉뚱한 대답이다.
그것도 저희들이 나쁜 - 옳은 일이 아니예요 : 자기네가 나쁜 짓을 하니까 나쁜 쪽으로만 몰아간다. 누구든지 간에 말은 해야 한다.
한 단체로 앉아서 :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 같은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
무정견 : 일정한 원칙이나 기준이 없음
확적 : 정확하여 틀림없음
천재일시 :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 천재일우(千載一遇)
너 그러다가는 성인 군자밖에 안 된다. : 그렇게 나가다가는 자기 정당화는 하지 못하고 그저 참기만 하는 사람이 된다. 여기서는 '성인군자'란 허울만의 칭찬 또는 알맹이 없는 이름뿐의 처세를 뜻한다.
이런 바칠루스 소독하기 위해서 : '바칠루스'는 '바실루스'의 잘못된 표기. 세균의 한 종류. 청년회 구성원 중 원봉과 대립되어 있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나라는 것과 사회라는 - 사실이 어디 있겠나 : 나의 이상과 사회의 나아감이 같이 보조를 맞추어 나가게 되어 우리의 기대와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면 이런 위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말은 당시의 청년들이 품고 있던 이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두 가지가 기회라는 절호기에 와 닥친 것을 : 이 두 가지 일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말의 표현이 어색한 것은 당시의 어투가 그러하기 때문이며, 게다가 유식한 티를 내기 위해 멋을 부린 데서 그리 된 것이다.
기면병 : 고열이나 극도의 쇠약, 또는 기면성뇌염 따위로 말미암아 외계의 자극에 응하는 힘이 약해져서 수면 상태에 빠져 드는 병
산약봉 : 가루약 봉투
동심의맹 : 의로움을 위해 마음을 같이할 것을 맹세함
서계 : 맹세하여 경계함
무대 한참 동안 공허 : 몽환(夢幻)의 장면 설정은 최원봉의 부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그 몽환 장면이 그대로 현실의 최원봉에게 연결되도록 한 것은 표현주의 수법을 원용한 것이다.
사문난적(斯文亂賊) : 유교 교리를 어지럽히는 언행을 하는 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원봉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동학군의 후예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 양반과 탐관 오리들을 무찌르고 원수를 갚아 주지 않으면 산돼지 탈을 벗겨 주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은 봉건 제도의 파괴라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산돼지'라는 제목부터가 사회 개혁의 정신적 표징으로 보인다.
여기에 신여성의 방황과 고뇌, 여동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작품의 심각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정숙은 김우진의 애인 윤심덕을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시대 정신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원봉이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 개혁의 사명감과 기존 질서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자아를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등장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현실에 대한 저항과 순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순응에서 저항으로, 다시 저항에서 순응으로 이행하는 것이 "산돼지"의 전체적인 작품 구조라 할 수 있다.
해설 1
작품의 주인공인 원봉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동학군의 후예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 양반과 탐관 오리들을 무찌르고 원수를 갚아 주지 않으면 산돼지 탈을 벗겨 주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은 봉건 제도의 파괴라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산돼지'라는 제목부터가 사회 개혁의 정신적 표징으로 보인다.
여기에 신여성의 방황과 고뇌, 여동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작품의 심각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정숙은 김우진의 애인 윤심덕을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시대 정신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원봉이 자신에게 부여된 현실 개혁의 사명감과 기존 질서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자아를 포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등장 인물들 사이의 갈등을 현실에 대한 저항과 순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김봉군 저 지학사)
해설 2
이 작품의 주인공인 원봉은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했다가 죽음을 당한 동학군의 후예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뜻을 받아 양반과 탐관 오리들을 무찌르고 원수를 갚아 주지 않으면 산돼지 탈을 벗겨 주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주인공은 봉건 제도의 파괴라는 숙명을 지니고 있는 셈인데, '산돼지'라는 제목부터가 사회 개혁의 정신적 표징으로 보인다.
여기에 신여성의 방황과 고뇌, 여동생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깔려 작품의 심각한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다. 특히 여주인공 정숙은 김우진의 애인 윤심덕을 모델로 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지은이의 인생관과 시대 정신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산돼지"의 원봉이 갖는 의미
① 남성성(여성성에 대립하는)
② 아들(어머니 주사댁과 누이인 영순과 대립되는)
③ 비정상적 출생(동학군의 아들로서 유복자로 태어나 영순, 혁의 정상적 출생과 대립되는
④ 현실 초월을 지향하나 실패자(현실 안주형인 혁과 대립되는)
⑤ 젊음(최 주사 내외의 늙음, 아버지가 부과한 의무감과 대립되는)
⑥ 사랑의 실패자(혁에게 영순을, 광은에게 정숙을 뺏김으로써 사랑의 승리자와 대립되는)
'산돼지'의 갈등 구조
1. 이 작품의 주된 갈등은 동학당이었던 아버지의 우명한 1920년대 청년 지식인인 원봉의 현실적 무력함 사이의 갈등이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 사회와 민족을 위해 나서야 할 원봉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좌절하는 상황은 20년대 우리나라 지식인이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2. 원봉과 청년회 사이의 갈등은 원봉이 공금을 유용했다는 데서 발단이 된다. 청년회의 성격은 불분명하나 1920년대의 청년 단체의 하나로 새로운 방향 모색이 요구되는 단체임을 알 수 있다.
3.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원봉에게는 혁과 영순의 교제도 하나의 갈등이다. 최 주사는 영순과 원봉을 혼인시키라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4. 원봉의 애인인 정숙은 이광은과 함께 동경에 갔다가 돌아온다. 이 두 사람의 갈등은 봄 잔디밭에서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것으로 해소된다.
극의 상징적 의미
극은 눈앞에 펼쳐지는 하나의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사실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지닌 상징이 된다. '산돼지'라는 작품만 하더라도 제목부터가 상징적이다. 주인공의 별명이 산돼지라는 것은 이 점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 야산에 있어야 할 산돼지가 집안에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속박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초반의 '바둑두기' 역시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바둑은 이기는데 목적을 둔 놀이지만 거기에는 상대가 있다. 주인공은 막바지에 몰려 '넓은 세상'에서 '길'을 찾다가 '목 베인 항우'가 되고서도 '제 송장 꼴 보려고' 집을 세어 본다. 주인공의 깊은 좌절감과 동시에 끈질김을 암시하고 있다. 또, 바둑에서 졌듯이, 사실은 친동생이 아닌 동생 영순을 차혁에게 빼앗기게 될 것도 암시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를 향한 암시보다 그것이 독자에게 주는 암시이다. '최원봉'과 같은 인물은 오늘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인간에게 꿈이 있는 한 이러한 시련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동학의 시련이나 일제 강점기의 속박은 옛날 일이지만, 그와 같은 일은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서 극은 상징적이다.
창작 배경
이 작품은 친구 조명희(趙明熙)의 시 "봄잔디 밭 위에"에서 영감을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그의 사회 개혁 사상을 잘 보여 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끌고 간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신의 '생의 행진곡'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기 지식인의 임상 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산돼지" 작품의 특징
이 작품은 사랑과 사회 개혁, 이상과 행동, 산돼지와 집돼지, 병과 건강의 공간을 주요 대립적 의미 체계로 활용하여 1920년대 식민지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과 행동 유형을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사회 개혁의 이념을 동학군 박정식에게서 온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봉건·신분제 사회에 반기를 든 시민 사회적 역사 의식이라는 이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상주의와 행동주의의 갈등과 무기력한 사회적 행동의 결여를 '어머니-땅', '현실=이 곳=어머니=조선'에의 사랑으로, '시-예술로의 대체'라는 방법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결말의 의미는, 곧 식민지 사회에서 사회 개혁, 조선의 되찾음이라는 이상은 존재하되 행동의 방법은 찾지 못하였던 작자의 비극적 세계 인식인 동시에 시인-예술가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산돼지'와 표현주의
김우진은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매우 빨리 수용하여 실제 창작에 적용했다. 김우진은 '산돼지' 제2막에서 몽환(夢幻) 장면을 설정하여 최원봉의 부모 이야기를 하고 그 몽환 장면이 그대로 현실의 최원봉에게 연결되도록 하여 표현주의 수법을 원용하고 있다. 당시 신파극에서 근대극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상태였던 우리 연극계에 김우진의 이러한 실험은 많은 자극을 주었다. 주인공의 강한 감정 표현, 고뇌의 격렬성, 환상적 장면 전환 처리 방법 등에서 표현주의의 영향을 찾을 수 있다.
표현주의<Expressionismus>(表現主義)
20세기 초 주로 독일·오스트리아에서 전개된 예술운동. 특색은 작가 개인의 내부생명, 즉 자아(自我)·혼(魂)의 주관적 표현을 추구하는 ‘감정표출의 예술’에 있다. 이 운동은 우선 회화에서 시작되어 다른 조형예술을 거쳐 문학·연극·영화·음악에까지 미쳤다. 미술에서의 표현주의라는 명칭은 베를린의 《슈투름(폭풍)》지(誌)의 주간 헤르바르트 바르덴이 보급한 것이며, 이 경우에는 1910~20년에 벌어진 모든 반인상주의(反印象主義)를 표방하는 운동의 총칭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광의로는 시대를 초월한 유럽 미술의 저류(底流)의 하나이다. 즉, 지중해 세계에 대립되는 북방 게르만의 풍토를 반영하고 조형적인 ‘형식’과 그 자율성에 대해 혼의 힘과 그 분출을 특징으로 하며, 고전주의에 대한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프랑스 회화의 범국제적인 보편성과 비교하여 표현주의를 특징짓는 강한 정신체험, 가시적(可視的) 세계를 초월한 환상, 때로는 냉혹·잔인할 만큼의 분석과 풍자는 위기적인 시대상황에 찢긴 개인의 미와 윤리에 수렴되는 비중이 훨씬 크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주의의 선구는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들, 특히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祭壇畵)》에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는 반인상주의의 입장에 섰던 뭉크, 호들러, 앵소르, 고흐, 고갱의 1885년부터 1900년에 걸친 화업(畵業)이 주목의 대상이 된다. 상징주의와 아르 누보 양식의 박진성과 평행하는 이들 화가들의 주관적 표현은 드라마틱하고 또한 집념에 가까운 테마를 소수의 강렬한 색채와 대비시키고 왜형(歪形)된 포름(형식), 단순·긴밀한 구도, 선의 그래픽한 예리함과 역동성(力動性)으로 파악하였다. 이상의 조형적 특색은 그대로 독일의 표현파 작가에게도 공통된다.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는 세 그룹이 있다. 첫째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결성된 ‘브뤼케(橋)’ 그룹으로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외에 놀데, 페히슈타인도 참가하고 연차전(年次展)과 집회가 조직되었다. 이 그룹은 독일 현대회화의 출발점을 이루었고 프랑스의 포비슴과 북유럽의 뭉크에 고취되었다.
그 중심인물은 원시미술에서 생명력을 파내고, 격앙된 색채와 예리한 관찰로써 대도시의 가두풍경을 그린 키르히너이다. 둘째는 10년 베를린에서 바르덴이 창간한 예술잡지 《슈투름》 및 같은 이름의 화랑(畵廊)에 의하여 만들어진 ‘슈투름그룹’으로, 오스트리아의 화가 코코슈카의 자아와 외계의 상극을 새긴 심리적 초상화로 대표된다. 바르덴은 자기 나라의 젊은 전위화가(前衛畵家)를 화랑에 결집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미래파, 초기의 프랑스 큐비스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였고, 잡지에는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논문 및 들로네(클레의 번역에 의하여), 레제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전위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약 15개국 90명의 작가와 366점의 작품을 모아 일찍이 보지 못한 최대의 국제전을 열었다. 셋째로는 칸딘스키, 마르크를 중심으로 11년 뮌헨의 신예술가동맹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결성한 청기사(靑騎士) 그룹이다. 구성원으로는 이 밖에도 클레, 야우렌스키, 마르케, 쿠핀, 뮌터 등이 있고, 전람회는 뒤에 드레스덴의 ‘다리’, 베를린의 ‘분리파협회’, 프랑스 작가(루소, 피카소, 브라크 등), 러시아 작가(말레비치)를 추가하여 확대시켰다.
이론가인 칸딘스키는 논문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을 발표하여 유물론과 리얼리즘에 지배당하고 있는 미술에 반기를 들었으며, 화가의 내적필연(內的必然)에서 우러나는 정신성·환상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작과 더불어 마르크, 클레 등의 형태의 분석·종합의 시도는 ‘청기사’ 운동이 지향하는 현대 추상회화의 중요한 주류의 하나로서 주목된다. 이 밖에 베크만, 그로스 그리고 여류화가 모다존 베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표현주의 화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료 후, 재차 그룹을 결성하지도 못한 채 나치스 체제의 발흥과 동시에 ‘퇴폐예술’로 낙인찍혀 개별적으로 어려운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혹은 스스로 붓을 꺾고 예술활동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벨기에에서 일어난 플랑드르 표현파가 있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코브라’ 그룹(알레신스키, 아펠)의 추상적 표현주의, 초기의 루오, 그로메르 등의 화가도 표현주의의 진영에 넣을 수 있다. 조각에서는 확대된 인체(人體)의 모습을 추구한 렘브루크, 농민의 중후한 종교성을 탐색한 바를라흐가 있다.
표현주의 건축은 최근의 연구에서 관심을 끌 만한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환상적 형태와 색채에 특색을 보인 T치히와 타우트를 들 수 있다. 문학·연극에서는 베데킨트, 트라클, 카이저, 조르게, 괴링, 베르펠, 하인리히 만 등이 있고, 음악에서는 쇤베르크, 힌데미트 등을 대표적 작가로 꼽는데, 이 두 사람은 한결같이 영감에 의하여 파악된 감정의 표출과, 자아감정(自我感情)을 고양시키는 것을 기조로 하여, 참신하고 대담한 수법에 의한 예술적 변형에 특색을 나타내었다. 또한 표현주의는 대도시의 실내장식·포스터·진열장 전시에 이르기까지 일세를 풍미하였는데 특히 영화사의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슈투름’의 세 화가(헤르만 바름, 발터 뢰리히, 발터 라이만)가 협력한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1919)는 그 금자탑(金字塔)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산돼지
1926년 김우진 ( 金祐鎭 )이 지은 희곡.
〔개 요〕
3막. 1926년 봄부터 구상하여 출분 뒤 동경 ( 東京 )에서 8월에 탈고한 그의 자전적인 작품이다. 친구였던 조명희 ( 趙明熙 )의 시 〈봄잔디밭 위에〉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처음 제목은 ‘봄잔디밭 위에’였다.
〈산돼지〉는 시와 희곡의 조화를 꾀한 작품이면서 동시에 가장 자전적이며, 그가 쓴 희곡 5편 중 자살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낭만성이 짙은 이 작품은 본격적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사회개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식민지시대라는 상황에서 봉건적 인습의 고옥(古屋) 속에 유폐되어 몸부림치던 개화 초기 지식인의 좌절을 가장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내 용〕
주인공 원봉은 구국전선에 나섰다가 죽은 동학군의 아들이며, 마을의 청년회 상무간사로서 공금유출 혐의를 받고 불신임 직전에 놓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또한 누이동생 영순을 사랑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든 비정상적인 상황을 산돼지를 집돼지로 길들이려는 사회의 모순과 연결시키고 있다.
원봉의 어머니는 그를 잉태하고 있을 때 동학란이 일어나 쫓겨다니던 중 관군(官軍)에게 강간을 당하였고, 원봉을 낳은 지 며칠 만에 죽었다. 원봉은 최주사댁에서 길러졌는데, 그녀에게 영순이라는 딸이 있었다.
영순의 아버지는 원봉과 영순을 결합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최주사댁은 비밀을 덮어두고 영순을 원봉의 친구인 혁과 혼인시킨다. 원봉은 꿈속의 환각을 통하여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동학군인 아버지도 만나나, 현실적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고 공상만 하는 무능한 인물이다.
원봉은 무한한 자유를 갈망하고 있으나, 혈연적이며 가정적인 일상생활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던 까닭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는, 산돼지를 집돼지로 걸식시키게 하는 1920년대의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고백하였듯이, ‘자신의 생의 행진곡’으로서 개화기 지식인의 고뇌를 함축해놓은 희곡이다. 특히 자연주의·상징주의·표현주의의 방법을 광범위하게 차용하여 새로운 연극적 실험을 한 점은, 아직 신극 ( 新劇 )이 정립되지 않은 1920년대의 실정에서는 매우 선구적인 일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金祐鎭全集 Ⅰ·Ⅱ(金祐鎭, 전예원, 1983), 韓國現代戱曲史(柳敏榮, 홍성사, 1982), 韓國近代戱曲史硏究(徐淵昊,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82).
김우진(金祐鎭 )
1897∼1926. 극작가·연극이론가. 호는 초성(焦星) 또는 수산(水山). 장성군수 성규(星圭)의 아들로, 할아버지도 헌관 ( 獻官 )이었으며 지주였다. 장성군 관아에서 태어났으며, 목포에서 소학교를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구마모토농업학교(熊本農業學校)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여 1924년에 영문과를 졸업했다.
당초부터 시인을 꿈꾸어 구마모토농업학교 시절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고, 대학시절부터는 연극을 꿈꾸어 1920년에 조명희 ( 趙明熙 )· 홍해성 ( 洪海星 )·고한승(高漢承)·조춘광(趙春光) 등과 함께 연극연구단체인 극예술협회 ( 劇藝術協會 )를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 ( 同友會巡廻演劇團 )을 조직하여 국내순회공연을 했는데, 이 때 공연비 일체와 연출을 담당했고, 상연 극본인 아일랜드의 극작가인 던세니의 〈찬란한 문〉(단막)을 번역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해서 상성합명회사(祥星合名會社)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 시기에 시·희곡창작·평론에 몰두해 48편의 시와 5편의 희곡, 20여 편의 평론을 썼다.
그러나 가정·사회·애정문제로 번민하다가 1926년에 출분(出奔:도망해 달아남)하여 동경으로 갔고, 그 해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 尹心悳 )과 현해탄에 투신하여 정사(情死)했다.
그는 보수적인 유교적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서구 근대사상에 철저하게 탐닉했다. 그의 사상적 바탕이 된 니체라든가 마르크스 같은 철학자는 물론 러시아혁명 이후의 사회주의에도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급진적 사상은 연극에서 스트린드베리(Strindberg,J.A.)의 표현주의와 전통부정정신, 쇼우(Shaw,G.B)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에게 있어 전통인습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자세를 견지하게 만들었다.
그의 자살원인이라든가 작품세계도 이러한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될 수가 있다. 시 〈죽엄〉·〈사와 생의 이론〉·〈죽엄의 이론〉 등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그의 시세계는 철저한 현실부정과 개혁의 세계를 보여준다. 희곡세계 또한 시대적·가정적 고통을 담은 자전적 세계를 보여준다.
〈두덕이 시인의 환멸〉(1막)은 제목에서도 풍기는 것처럼 전통윤리와 새로운 서구적 윤리의 첨예한 갈등을 그린 것이고, 〈이영녀 李永女〉(3막)는 그가 살던 목포 유달산 밑의 사창가를 무대로 빈민들의 처참한 생활상을 자연주의 수법으로 그린 작품이다.
그리고 대표작으로 꼽히는 〈난파 難破〉(3막7장)와 〈산돼지〉(3막)는 우리 나라 문예사상 최초의 표현주의 희곡으로서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파극만 존재했던 1920년대로서는 대단히 전위적인 실험극이다.
〈난파〉는 그가 자살한 해인 1926년 봄에 쓴 작품으로서, 복잡하게 얽힌 유교적 가족구조 속에서 현대적인 서구윤리를 지닌 한 젊은 시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매우 관념적이고 상징적인 이 작품은 그대로 그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산돼지〉는 친구 조명희의 시 〈봄 잔디밭 위에〉에서 암시를 얻어 쓴 작품으로, 좌절당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을 음울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그의 사상인 사회개혁을 잘 보여주며, 지극히 몽환적으로 끌고간 것이 특징이다. 그가 이 작품을 가리켜 자신의 ‘생의 행진곡’이라고 고백했듯이, 개화지식인의 임상보고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는 또한 뛰어난 평론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에서 〈소위 근대극에 대하여〉·〈 자유극장 ( 自由劇場 ) 이야기〉·〈사옹(沙翁)의 생활〉·〈구미(歐美) 극작가론〉은 탁월한 논문이다. 그리고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인조인간(人造人間)을 보고〉라는 글은 연극평의 한 모범을 보여 준다.
또 〈창작을 권합네다〉라는 글에서 표현주의를 체계적으로 소개했으며, 전통적 인습타파를 작품 주제로 삼은 한국작가들에게는 표현주의가 가장 알맞은 창작방법이라는 논지를 폈다.
그는 대단히 진실적인 문학관을 가지고 있어서 〈이광수류(李光洙類)의 문학을 매장하라〉·〈아관(我觀) 계급문학(階級文學)과 비평가〉라는 논문을 통해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조선말 없는 조선문단에 일언(一言)함〉이라는 평론에서는 서양의 경우를 예로 들어 순수한 조선어의 부흥과 개량을 역설했고, 새 문전(文典)의 제정과 사전의 출현, 구비전설과 민요·동요의 수집을 촉구했고, 우리의 독특한 시가율(詩歌律)을 가질 것과 외국문학의 우리말 번역, 신문·잡지의 대중화 등을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겪은 시대고를 적절히 희곡 속에 투영함으로써 당시 계몽적 민족주의나 인도주의 내지 감상주의에 머물렀던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점에서 유일한 극작가이다.
또한, 해박한 식견과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韓國新劇史硏究(李杜鉉, 서울大學校 出版部, 1966), 焦星金祐鎭硏究 上·下(柳敏榮, 한양대논문집 5·국어교육 17, 1971), 韓國演劇散考(柳敏榮, 문예비평사, 197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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