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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山居)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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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거(山居)

 

春去花猶在 춘거화유재

天晴谷自陰 천청곡자음

杜鵑啼白晝 두견제백주

始覺卜居深 시각복거심

봄은 갔으나 꽃은 오히려 피어 있고

날이 개었는데 골짜기는 절로그늘지도다

두견새가 대낮에 울음을 우니

비로소 사는 곳이 산 속 깊음을 알겠도다

요점 정리

 

지은이 : 이인로

형식 : 오언절구

성격 : 서정적, 한정적

구성 :

기 - 늦봄의 풍경

승 - 깊은 골짜기의 모습

전 - 대낮에 우는 두견새

결 - 산 속 깊음을 깨달음

운자 : 음, 심

시간적 배경 : 늦봄 한낮

대구법 : 기와 승구 / 대조법(봄이 가다 - 꽃이 피어 있다, 날이 개다 - 골짜기가 그늘이 지다)

주제 : 깊은 산 속의 풍경, 자연 속에서 은거하고 싶은 심정

내용 연구

산거 : 산 속에 있는 집

두견(杜鵑) : 두견과의 새. 편 날개의 길이는 15~17cm, 꽁지는 12~15cm, 부리는 2cm 정도이다. 등은 회갈색이고 배는 어두운 푸른빛이 나는 흰색에 검은 가로줄 무늬가 있다. 여름새로 스스로 집을 짓지 않고 휘파람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휘파람새가 새끼를 키우게 한다. 한국,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 분포한다. 유사한 단어에 귀촉도·두견(杜鵑)이 있음 ① 두견새·두백(杜魄)·두우(杜宇)·두혼(杜魂)·망제(望帝)·불여귀·사귀조(思歸鳥)·시조(時鳥) ② 자규(子規)·주각제금·주연(周燕)·촉백(蜀魄)·촉조(蜀鳥)·촉혼(蜀魂)·촉혼조. (Cuculus poliocephalus)두견이 목에 피 내어 먹듯 남에게 억울한 일이나 못할 짓을 하여 재물을 빼앗음을 이르는 말.

두견새는 본래 밤에만 우는 데, 계곡이 깊어 밤인 줄 알고 운다는 의미임.

제백주 : 두견은 본래 밤에만 우는데, 계곡이 깊어 두견이 밤인줄 알고 운다는 뜻

복거 : 살 만한 곳을 점침. 또는 살 만한 곳을 가려 정함

비로소 사는 곳이 산 속 깊음을 알겠도다 : 시적 화자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말이고, 시적 화자의 여유가 담겨 있는 부분으로 그윽한 산 속에서 묻혀 사는 삶에 만족하는 화자의 심정이 드러남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그윽한 산 속에서 묻혀 살아가는 작자의 적적하고 고요한 심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유유자적한 삶의 태도가 담겨 있다.

심화 자료

이인로

1152(의종 6)∼1220(고종 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원(慶源).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馬), 호는 쌍명재(雙明齋). 가문은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3대가문의 하나였던 경원이씨(慶源李氏)이다. 누대에 걸친 왕가의 외척으로서 부동의 문벌을 형성해왔다. 증조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오(靂)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을 볼 수 없다.

이인로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 ; 화엄종의 우두머리)인 요일(寥一)이 그를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켰다. 그래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1170년 그의 나이 19세 때에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 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그 뒤에 환속하였다.

이인로는 25세 때에 태학에 들어가 육경(六經)을 두루 학습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에는 진사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31세 때인 1182년 금나라 하정사행(賀正使行)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하였다. 다음해 귀국하여 계양군(桂陽郡)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뒤에 문극겸(文克謙)의 천거로 한림원에 보직되어 사소(詞疏)를 담당하였다. 한림원에서 고원(誥院)에 이르기까지 14년간 그는 조칙(詔勅)을 짓는 여가에도 시사(詩詞)를 짓되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복고(腹藁)’라는 일컬음을 들었다.

이인로는 임춘(林椿)·오세재(吳世才) 등과 어울려 시와 술로 즐기며 세칭 ‘죽림고회(竹林高會)’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아들 세황(世黃)의 기록에 의하면 “문장의 역량을 자부하면서도 제형(提衡 : 과거의 시관)이 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다가 좌간의대부에 올라 시관(試官)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시석(試席)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역임한 최후의 관직은 좌간의대부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열전(列傳)에서 이인로에 대하여 “성미가 편벽하고 급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거슬려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다(性偏急 尨當世 不爲大用).”라고 평하였다. 그 자신은 문학 역량에 대하여 자부가 컸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상과 현실간의 거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인로의 문학사상의 골자는 시의 본질과 그 독자적 가치에 대한 인식, 그리고 ‘어의구묘(語意俱妙 ; 말과 뜻이 함께 묘함을 갖추어야 한다)’를 강조한 작시론(作詩論)이라 하겠다. 또한 어묘를 위해서는 무부착지흔(無斧鑿之痕 ;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움)의 자연생성의 경지를, 의묘(意妙 ; 뜻의 묘함)를 위해서는 신의(新意 ; 새로운 뜻)를 중시하였다. 이인로의 저술로는≪은대집 銀臺集≫·≪쌍명재집≫·≪파한집≫ 등이 있다고 하나 ≪파한집≫만이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破閑集, 東國李相國集, 補閑集, 高麗朝漢文學硏究(徐首生, 螢雪出版社, 1971), 高麗竹林高會硏究(李東歡, 高麗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68), 李仁老의 現實觀과 文學思想(金鎭英, 冠嶽語文硏究 4, 서울大學校國語國文學科, 197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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