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변동과 문화 변동 / 임희섭(林熺燮)
by 송화은율사회 변동과 문화 변동 / 임희섭(林熺燮)
1. 서 론
전통 문화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해체되는 것인가, 아니면 급격한 사회 변동의 과정에서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 전통 문화의 연속성과 재창조는 왜 필요하며,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외래 문화의 토착화(土着化), 한국화(韓國化)는 사회 변동과 문화 변화의 과정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상과 같은 의문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입장에 따라 상당한 견해 차이도 드러내고 있다. 전통의 유지와 변화에 대한 견해 차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단순하게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차이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이미 한 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광범하고 심대(深大)한 사회 구조적 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전통 문화의 변질을 어느 정도 수긍하지 않올 수 없는가 하면, 사회 변동의 강력한 추진 세력 또한 문화적 전통의 확립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국 사회에서 전통 문화의 변화에 관한 논의는 단순히 외래 문화이냐 전통 문화이냐의 양자 택일적인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하다. 근대화는 전통 문화의 연속성과 변화를 다 같이 필요로 하며, 외래 문화의 수용과 그 토착화 등을 다 같이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통을 계승하고 외래 문화를 수용할 때에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이냐 하는 문제도 단순히 문화의 보편성(普遍性)과 특수성(特殊性)이라고 하는 기준에서만 다룰 수 없다.
근대화라고 하는 사회 구조적 변동이 문화 변화를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에, 전통 문화의 변화 문제를 사회 변동의 시각에서 다루어 보는 분석이 매우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2. 근대화와 문화 변동
근대화라고 불리는 사회 변동은 근본적이고도 광범한 사회 구조상의 변동이다. 전통 사회는 사회 분화의 정도가 낮아, 사회의 기본 단위도 소규모적이고 자급 자족적이며, 폐쇄적이고 정체적(停滯的)인 사회 이다. 사회 성원들은 거주지, 직업, 지위 등을 거의 바꾸는 일이 없이 혈연(血緣)이나 지연(地緣)으로 맺어진 동질적 사회 성원과 함께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자연히 혈연이나 지연을 중요시하는 가족주의, 지방주의 등이 강하고, 신분에 따른 위계적(位階的) 인간 관계가 강조되는 권위주의적 가치 지향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화가 시작되면 위에서 말한 사회 구조적 특징이 거의 정반대의 방향으로 바뀌게 된다. 사회 분화가 진행됨에 따라 사회 단위는 전체 사회가 하나의 생활 단위가 되어 크게 확대되며, 경제도 농경 위주의 개인적 생존 경제에서 벗어나 공업 위주의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경제로 바뀌게 된다. 사회 성원들은 그 직업과 거주지와 사회 경제적 지위의 변동을 심하게 경험하게 되고, 사회 관계도 이질적인 개인들이 기능적으로 상호 의존 관계를 맺는 일이 더 많아지며, 과거처럼 혈연과 지연의 중요성은 강조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사회 구조적 변동은 자연히 가치관에도 크게 변화를 일으켜 가족주의보다는 개인주의, 지방주의보다는 개방주의, 권위주의보다는 평등주의, 특수주의보다는 보편주의 등으로 바뀌게 되며, 사회 관계에도 정의성(情誼性), 인격성(人格性), 비공식성(非公式性)보다는 비정의성, 비인격성, 공식성이 더욱 강조되는 등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근대화는 전통 사회의 생활 양식에 거의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급속한 근대화로 인해 전통 사회의 해체 과정이 급격해진만큼 문화도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다. 급격한 생활 양식의 변화는 전통 사회 문화의 해체 과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와 같은 과정에서 전통 사회의 문화는 대체로 모든 후진과 낙후의 책임을 둘러쓰게 되고, 봉건의 잔재(殘滓)나 누습(陋習)으로 규탄되는 등 일단은 급속한 해체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전통 사회의 해체는, 물론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 구조에 대해서 전통적인 문화가 당면하게 되는 적합성(適合性)의 위기에서 초래되는 것이다. 수백 년 내의 생활 양식으로 유지되었던 전통 사회의 문화가 사회 구조 변화의 속도에 맞먹을 정도로 신속하게 변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 따라 근대화 추진 엘리트들은 변화하는 사회 구조와의 상충성(相衝性)이 가장 많은(또는 새로운 사회 구조에 대한 적합성이 가장 적은) 유형(類型)부터 집중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전통적인 문화의 해체를 촉진하기도 한다.
근대화의 저해 요인(沮害要因)으로 간주될 정도로 적합성의 위기에 당면한 전통 사회의 생활 양식은, 새로운 사회 구조에 적합하도록 재조정되고 재적용되며 재창조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이미 해체되어 가는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대신할 근대적인 생활 양식은, 근대화의 초기 단계에 있는 사회 내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근대적 사회 구조를 먼저 가지게 된 사회, 즉 선진 사회의 생활 양식을 수용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우리는 외래 문화의 차용기(借用期)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근대화에 앞서 가는 사회의 생활 양식과 근대화 초기 사회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 사이에는 또다른 적합성의 문제가 일어날 것도 분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의 상충성이 가장 적으면서도 근대화의 추진에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비교적 보편적인 대응 가치(對應價値)와 규범들이 수용되고 확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수용되는 외래 문화가 아직은 ‘차용 문화(借用文化)’의 단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외래 문화가 대중 사이에 폭넓게 내면화되어 있지 않고 근대화 추진 엘리트들 사이의 상징적인 가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대화라고 불리는 사회의 구조 변화가 충분히 진행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당한 부분의 전통적인 생활 양식이 아직도 많이 보존된 상태에서 외래적인 행위 양식도 적지 않게 도입된다. 이와 같은 중간적인 단계에서의 문화는 일종의 혼합 문화(混合文化)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의 문화적 특징은 생활 양식과 가치관 등에서 계층 간, 세대 간, 도시와 농촌 간의 격차가 심하고, 소위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인 혼재(混在)가 일어나는 상황이다.
사회 성원들은 상황에 따라 이중적인 가치와 규범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문화의 이중 구조에 속하게 되고, 일반적인 적합성을 가지는 행위 양식을 발견하기 어려운 아노미(anomie)를 경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아노미 상황에서는 일탈적(逸脫的)인 적응 기제(適應機制)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소위 가치관의 혼란과 왜곡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사회 성원들은 관념적으로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으면서도, 실제의 행위 양식에서는 권위주의적 규범에 더 가깝게 행동하는 등 가치와 가치, 가치와 규범, 규범과 규범 간의 갈등과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과도적인 가치와 규범은 흔히 외래적인 가치의 왜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함께 도입되는 물질주의는 배금주의(拜金主義)나 황금 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로 변질되기 쉽고, 근대적 시민 사회의 중심적 가치의 하나인 개인 주의는 이기주의로 전락하기 쉬운 것이다.
과도적 혼합 문화는 적어도 세 가지의 새로운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세 가지의 위기란, 첫째는 적합성 (適合性)의 위기, 둘째는 정체성(正體性)의 위기, 셋째는 통합성(統合性)의 위기이다.
과도적인 생활 양식은 전통 사회의 생활 양식의 일부와 외래적인 생활 양식의 일부가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격차를 보이면서 서로 융합되지 않은 채로 혼재하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변질된 과거의 생활 양식이 외래적인 유형과 적당히 타협해서 일시적인 적응을 가능하게 하는 형태의 관행(慣行)이 된 다. 이와 같은 과도적인 행위 양식들도 행위 변화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끊임없이 그 적합성에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도적인 행위 양식 속에 혼재해 있는 외래적인 양식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끊임없이 시험받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과도적인 혼합 문화는 잘 통합되어 있는 문화가 아니며, 충분히 제도화될 수 있을 정도로 영속적(永續的) 적합성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과도적인 문화 속에는 한국 사회에 적합성을 가지지 못하는 차용된 외래 문화가 많다. 그와 같은 차용 문화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른 전통 문화의 해체(解體)에 의해서 일어나는 문화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도입된 외래 문화이기 때문에, 충분히 선택적으로, 비판적으로, 주체적으로 수용되었다기보다는 모방과 도입에만 급급하면서 받아들인 문화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모방과 도입기를 거쳐 외래적인 행위 양식이 상당히 널리 확산되는 단계에 이르면 외래 문화는 문화적 전통의 정체(正體)를 위협하게 된다.
이처럼 정체의 위기에 당면한 사회에서는 문화적 전통과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 그러나 문화적 정체의 회복이 전통 사회 문화로의 복귀나 외래 문화의 배격과 같은 문화적 복고주의(復古主義)나 문화적 폐쇄주의로 성취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문화적 복고주의나 문화적 폐쇄주의는 정체를 회복시키는 데에는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적합성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체의 회복과 문화적 전통의 확립은 문화의 적합성을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즉 현대 사회와 적합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문화적 전통’의 재발견과 그와 같은 문화적 전통과 잘 통합되는 외래 문화의 선별적 수용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과도적인 문화는 많은 혼란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 전통 사회의 유형과 외래적인 유형이 혼재(混在)하며, 세대 간, 계층 간, 지역 간의 문화적 격차가 일어나고, 명확한 규범의 부재에서 일어나는 아노미가 발생하는 등 과도적인 문화는 그 통합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위기에서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의 문화적 격차가 줄어들고, 현대적 사회 구조와 한국의 문화적 전통과 적합성을 지닌 명확한 가치와 규범이 확립됨으로써 문화의 통합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3. 문화적 전통의 확립
문화적 전통은 과거의 문화 유형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현재에 적합성을 가지는 문화적 유산을 뜻한다. 곧, 근대화가 계속되더라도, 적합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문화적 정체(正體)를 살려 주는 문화적 연속성을 발견하는 일이 문화적 전통을 확립하는 길이다. 그떻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전래(傳來)의 관행을 재조정하고, 재적용하며, 재창조해야 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 전통의 확립은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것은 근대화에 따라 진행되는 사회 구조적 변동에 맞추어 현대적 사회 구조에 높은 적합성을 가져야 한다는 조건, 우리 문화 고유의 문화적 특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조건, 그리고 문화적 제 요소, 즉 가치와 규범 및 관행 간의 일관성과 체계성이 확립되어야 하는 문화적 통합성의 조건 등이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문화적 전통의 확립 내지는 새로운 한국 문화의 창조를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 변동의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즉, 한국 사회의 구조는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이해한 다음, 미래의 사회 구조에 높은 적합성을 가지는 문화 유형을 형성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우리는 현대 사회 구조에 적합성과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문화적 전통의 발견과 연구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조상의 것이면 무엇이나 미화(美化)하지 않고서는 민족적 긍지를 가질 수 없다는 식의 전통주의(傳統主義)는 불필요한 열등 의식에 의해서 일어나는 과잉 반응(過剩反應)일 뿐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적합성을 가질 수 있는 전통의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인 것이다. 그와 같이 진정한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우리는 한국 문화의 정체성(正體性)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셋째, 전통의 확립과 문화 창조의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만일 사회 변동에 따른 문화적 적합성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강조하게 되면 문화의 정체를 상실하게 될 위험을 안게 되며, 만일 문화의 정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다시 문화의 적합성의 위기를 가중(加重)시킬 위험을 초래하게 되며, 또한 만일 문화의 통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화적 획일주의(劃一主義)에 빠져 문화의 침체를 가져을 위험이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화의 적합성, 정체성, 통합성에 대하여 다 같이 관심을 두고, 세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문화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문화적 전통은 자연스럽게 연속성을 가지게 되며, 동시에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향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4. 결 론
급속한 근대화를 경험한 사회의 문화 변동은,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서 전통 사회의 문화가 적합성의 위기를 맞이함으로써 급속하게 해체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서 생겨나는 문화적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외래 문화가 도입되고, 모방되는 문화의 차용기를 거치면서, 문화의 세대 간, 계층 간의 갈등과 혼란이 심화되며, 가치관의 혼란과 왜곡, 이중 구조 등을 드러내는 아노미성을 지닌 과도적인 혼합 문화가 일시적인 적응 기제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와 같은 과도적 혼합 문화는 결국 새로운 적합성의 위기, 정체성의 위기, 통합성의 위기 등에 일시에 당면하게 된다. 그와 같은 세 가지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전통은 자연스럽게 확립되고, 외래 문화의 토착화, 한국화 등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로 새로운 한국 문화가 창조된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 변동의 과정에 비추어, 오늘날 한국 문화가 당면한 문제는 적합성과 정체성과 통합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문화를 어떻게 창조하느냐 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이처럼, 문화 창조의 과업(課業)은 단순한 문화적 복고주의에 의해서도, 문화의 획일주의에 의해서도, 제한 없는 개방주의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과업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한국의 문화적 전통, 즉 살아 있는 문화의 유산을 더 잘 이해하도록 연구해 내는 일과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 변동의 성격을 학문적으로 구명하는 일이다. 그와 같은 이해와 연구에 바탕을 둔 과학적 조명 위에서 한국 문화의 적합성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 통합성의 문제를 해결할 기준이 마련될 것이며, 그러한 기준에 따라 오늘의 한국 문화가 당면하고 있는 세 가지의 위기를 극복해 나감으로써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까지 연속되는 한국 문화의 전통이 확립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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