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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와 불평등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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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와 불평등 / 한완상

경쟁과 불평등

 

사람이 사는 곳에는 불평등이 있기 마련이다. 부리는 사람과 부림을 당하는 사람 사이에 있는 불평등,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사이에 있는 불균형, 존경받는 사람과 멸시받는 사람 사이에 있는 차이 같은 것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불평등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역사의 문제라는 점을 우리는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을 부릴 수 있는 힘과 사람까지도 살 수 있는 힘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힘은 곧 권력과 금력과 권위인데, 이것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쏠려 있었다. 문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힘들을 가지려고 하는 데에 있다. 권력과 금력과 권위라는 보상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 경쟁이다. 그러니 경쟁의 출발점도 계층이고, 경쟁의 종착점도 계층이다. 계층은 곧 구조화한 불평등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한 물음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 계층이라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일까? 만일에 많은 사람들이 불평등을 옳지 않은 것으로 보면 기존 사회 구조와 역사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어 변동의 물결 속에 휩쓸려 들게 된다. 왜냐 하면, 기존 구조를 정당하지 않은 불평등의 구조로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바꾸어 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곧 전쟁 ·혁명·혁신·음모·억압· 숙청따위의 비극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유토피아란 무엇일까? 순하디 순한 양이 사나운 늑대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사슴이 사자와 어깨동무를 하고, 비둘기와 독수리가 손을 맞잡고 사는 세계를 유토피아라고 하면, 유토피아에서는 불평등이 시기와 분쟁의 촉진제가 아니라 대화와 평화의 촉진제임을 뜻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불평등이 부당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차이가 있되 이것이 차별의 구실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둘기다 또는 독수리다 하는 차이 때문에 서로 더 가까워질 수가 있다. 여기에서의 불평등은 온당하다.

불평등이 온당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에 사회의 부조리와 역사의 비극이 생기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동물처럼 부려지고 물건처럼 천대받게 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혁명과 반혁명의 악순환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왜 불평등이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 될까? 그리고 정당한 불평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의로운 분배 기준

 

흔히 사회 정의를 정당한 불평등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례적인 불평등을 뜻하기도 한다. 주어진 얼마 안 되는 보상을 무엇무엇에 비례해서 분배받기 때문에 비례의 기준이 올바르다고 판단되면 이 기준에 따른 분배와 이 분배에 따른 불평등을 올바른 것으로 여긴다. 이때에 사회 정의가 될 수 있는 보상의 분배 기준은 보편 타당성을 가져야 한다.

대체로 인류 역사에 나타난 정의로운 분배 기준은 세 가지로 간추릴 수 있겠다. 하나는 능력이요. 또 하나는 노력이요, 또 다른 하나는 필요이다. 능력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며, 노력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정의로운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분배가 이루어져도 정의로운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 가지 기준들 사이에 있는 엄청난 차이에 눈을 주어야 한다. 능력이 있을수록 노력을 적게 해도 되고 능력과 노력에 관계없이 필요한 양은 높아질 수도 있고 또 낮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능력이라는 기준을 생각할 때에 우리 사회에서 능력에 따라 보상이 분배되고 있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예컨데, 능력을 학력으로 잰다고 하자. 학력이 높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이 돈과 힘과 명에를 참으로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을까? 오히려 학력과는 관계없이, 얼마 되지 않는 보상을 놓고 도덕의 원칙도 없이 마구 미친 듯이 덤빌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돈과 힘과 명예가 분배되는 것이나 아닐까? 이 경우의 능력은 정정당당하게 경쟁에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부도덕한 일을 겁 없이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여기에서 오는 불평등은 올바른 것이 될 수 없다.

불평등과 깊게 관련된 희소한 보상의 현실은 자연히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경쟁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이 열심히 경쟁에 뛰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미 유리한 자리를 차지한 집단일수록 경쟁에의 욕구는 높은 법이다. 아니, 이들만이 경쟁 의욕을 키울 수 있도록 기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보자. 아니, 백년전의 우리 나라 형편을 보자. 이른바 양반 계층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권을 독차지하려고 그들만이 과거를 볼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또 이러한 제도가 반발을 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아랫계층의 사람들을 어릴 때부터 자기들의 분수를 깨닫도록 가르쳤다. '쌍것'은 평생을 쌍것으로 살아야 했다. 백정의 아들은 평생 백정 노릇을 해야 했다. 경쟁 의욕은 날 때부터 싹뚝 잘려 있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거세해 버리면 커서도 성욕의 고통을 느끼지 않듯이, 아예 세상에 나올 때부터 출세 의욕이나 경쟁심을 거세해 버렸다. 그리고 양반들끼리 보상을 나누어 먹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더 높고 더 넓은 기준에 따라 모든 일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도시화니 산업화니 하는 따위의 사회 구조의 변동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넓고 높은 기준에 따라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대중 교육 제도가 이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제는 누구라도 돈과 권력과 명예를 찾고자 한다. 출세하려는 욕망은 기존 계층의 차이와는 관계가 없이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으로서 하나의 보편 현상이 되고있다. 어떤 국민 학교에 가서 아이들에게 앞날에 무엇이 되려는지를 물어 보라. 대체로 그들은 사장, 장군, 장관, 대통령,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콩나물장수, 푸줏간 임자, 연탄 장수 따위의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부모들의 직업은 서로 다르지만, 아이들의 욕구에는 차이가 없다. 이와 같이 기대 수준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경쟁의 논리와 경쟁의 윤리는 상당히 변질될 뿐만 아니라, 불평등을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었다.

경쟁의 논리는 단순하다. 능력에 따라 보상의 양이 결정되는 것이 곧 경쟁의 논리다. 그런데 이 논리가 현실 속에서 자주 꺾이게 된다. 조선 시대에 어떤 계층의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버림을 받았고, 세뇌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기들의 '무능력'을 숙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지배 계층은 이 '능력 없는' 민중들을 경쟁 대열에 아예 끼워 주지 않고 떨어뜨려 버렸고, 나아가 교묘한 기술로써 이들을 지배해 왔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는 이념과 가치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긴 사대부 계층은 이것을 무기로 삼아 이른바 쌍것들에게 제 몸을 다스리는 데에만 힘쓰도록 가르쳤다. 제 몸도 다스리지 못하는 녀석들은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나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문제를 건방지게 들먹일 수가 없다고 못박아 버렸다. 오로지 제 몸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민중들은 사대부들의 부림을 달게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쌍것들이 스스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게 하여 적은 양의 보상에도 만족하도록 닥달하였다. 그들은 오로지 순종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체념 속에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눈부시도록 갑작스럽게 도시화되고 공업화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경쟁의 논리가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만감을 불러일으킨다. 왜냐 하면, 이제는 능력을 계급에 따른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쌍것들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사람들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열려진 사회이다. 그러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도 경쟁 논리에 따른 보상의 양을 획득할 수 없다고 하는 새로운 자각이 생기게 되고 경쟁자들은 이와 같은 자각 속에서 기존 구조의 잘못된 점을 의식하게 된다. 여기에 오늘날의 사회 비극이 있다.

 

경쟁의 논리와 윤리

 

경쟁의 윤리는 경쟁의 논리를 전제로 한다. 곧 경쟁자의 능력과 비례해서 보상의 양이 결정되어야 하고, 이 결정에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된다고 윤리적으로 못박는다. 이와 같은 윤리의 요청은 경쟁자가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경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다른 윤리의 요청에 바탕을 둔다. 그러므로 경쟁 윤리는 똑같은 출발선에서 경쟁자가 출발하여 능력에 따라 결승점에 이르게 되고 도달한 차례에 따라 보상의 양이 결정되어야 함을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 같은 경쟁 윤리를 통해 오늘의 현실을 조명해 볼 때 적어도 세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첫째는 똑같은 선 위에 모든 경쟁자가 서 있는지의 문제이고, 둘째는 비록 같은 출발점에서 뛰었다고 하더라도 뛰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결승점에 이를 수 있는지의 문제이고, 셋째는 먼저 결승점에 이른 사람이 가장 귀한 보상을 가장 많이 분배받는지의 문제이다.

먼저 출발점의 문제부터 따져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모든 사람이 출발점에서 서로 동등함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사람은 날 때부터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하고, 교육을 평등하게 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출발점에서 서로 동등하다고 함은 곧 기회의 균등을 뜻한다. 잘사는 집안의 아이도 못사는 집안의 아이도,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의 자식도 낮은 자리를 가진 사람의 자식도 모두 출세할 기회를 똑같이 가지고 있다. 경쟁은 교육 경쟁이 가장 기본이 되므로 모든 사람들은 똑같이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진다고 헌법이 규정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잘사는 집안의 자식과 못사는 집안의 자식을 서로 견주어 보자. 그들이 모두 같은 출발점에서, 곧 같은 교육 기회를 가지고 경쟁한다고 하자. 참으로 그들의 출발점이 같은 것일까? 오늘날에 반딧불 밑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케케묵은 동화의 소재로나 쓰일 수 있는 것이고, 가난한 집안의 자식들이 잘사는 집안의 자식들보다 더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가족의 뒷바라지가 없이는 공부를 잘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 달에 몇 십만 원씩을 과외 수업에 투자할 수 있는 넉넉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고서는 좋은 윗학교에 가기도 어렵게 되어 버렸다. 기회는 똑같이 주어질지 모르나, 그것만을 강조하여 경쟁을 온당한 것으로 생각하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기회 균등의 사상은 이미 버티고 있는 부당한 불평등을 튼튼히 한 이데올로기적인 작용을 한다. 여기에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 이익을 보존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뚤어진 현실인식을 뜻한다.

따라서 고전 민주주의의 자유 방임 사상이 비판을 받는다. 공개 시장이나 공개 경기장에서 능력을 가진 사람만이 계속해서 이미 얻은 이권을 보호하고 강화할 수 있기 대문이다. 기회 균등의 사상은 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깊게 함으로써 잘사는 사람을 더욱 잘살게 하고 못사는 사람을 더욱 못살게 하는 비극을 낳는다.

 

 

이러한 부당한 불평등을 없애려고 이른바 사회 복지 정책을 마련한다. 이 정책의 하나로 누진세 제도가 나온다. 많이 버는 사람에게는 많은 세금을 물리고 적게 버는 사람에게는 아주 적은 세금을 물린다. 얼핏 보기에는 이와 같은 정책이 출발선의 불평등을 줄일 것 같으나, 실제로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이러한 정책을 쓰기 전에 모든 사람을 진실로 똑같은 선에 있도록 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누진세는 중산층이 위의 계층으로 올라갈수 있는 기회를 막는 결과를 만든다. 그러나 이미 부자가 된 사람은 많은 부동산에서 얻는 소득으로 부를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 아주 가난한 사람들은 상당한 혜택을 받아 중산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중산층 수준에서 머물러야 한다. 중산층에서 위의 계층으로 올라가려면 힘에 겨운 세금 때문에 자꾸 제자리로 떨어진다. 이것이 오늘의 선진 자본주의 공업 국가들의 문제이다. 복지 정책을 써도 불평등을 없애지는 못한다. 특히 출발선의 불평등은 없어지지 않고 사회에 잠재된 불안 은 커 가고만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흑인들은 출발선에서 동등하기를 바라기보다는 종착점에서 동등하기를 더 바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출발선에서 동등해지려면 꽤 오랜 동안에 걸쳐서 종착점에서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얼핏 보기에는 억지 같다. 가정과 사회 계층의 뒷바라지를 받지 못해서 늦게 도착한 사람도 그 출발선의 구조적인 약점을 인정받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논리에 따르면 흑인과 백인의 품삯에는 차이가 없어야 한다. 비록 능력이 없는 흑인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남자와 여자의 품삯에도 차이가 없어야 한다. 여자가 오랫동안 부당하게 차별 대우를 받아 온 결과로 현재와 같은 능력의 차이가 나왔으므로 앞으로 꽤 오랫동안 능력의 차이를 무시하고 남녀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이 되는 능력 본위주의를 밑바탕에서부터 부정하고 있음을 뜻한다. 중세의 형편에 견주면 근대 사회의 기회 균등 사상이나 출발선의 동등 사상은 혁명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종착점에서의 평등 사상과 견주면 매우 보수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능력에 따라 종착점에 이르는 문제를 살펴보자. 같은 출발선에서 경쟁의 호르라기 소리가 났다고 치자. 그러면 제 능력껏 달린 사람이 종착점에 먼저 이르게 될까? 이러한 문제를 들추는 데에는 심각한 까닭이 있다. 경쟁자들이 달려야 할 길에는 도로의 차선처럼 선이 뚜렷이 그어져 있어서 경쟁자들이 반드시 그 선을 따라 뛰어야 한다. 선을 벗어나서 가로질러 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치 야구에서 1루의 주자가 2루를 거치지 않고 바로 3루로 가는 것 같은 편법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유럽에서나 미국에서 첫 번째의 문제, 곧 출발선의 문제인 기회 균등의 사상이 도전을 받는다고 하면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둘째 문제와 셋째 문제가 매우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곧 달리는 사람들이 제 길을 따라 달리는지 그렇지 않으면 마구 가로질러 가는지 하는 문제와, 비록 모든 사람들이 제 길을 바로 달렸다고 하더라도 종착점에서 분배되는 보상의 양이 공정한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친 것처럼 제 길들을 벗어나서 달리는 것 같다. 정육점에서는 물 먹인 소고기가 버젓이 팔린다. 불량 식품이 거리에 흔히 보인다. 집은 날림으로 지어진다. 심지어 수출 상품까지 불량품이 만들어진다. 차는 복잡한 거리에서 곡예를 하듯이 하며 빨리 달린다. 차선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기업가들은 당당하게 제 길을 달려 돈을 벌려고 하기보다는 옆길이라도 달려 염치없이 돈을 긁어 모으려고 한다. 외화를 나라 밖으로 빼돌리고 탈세를 한다. 학생들과 그 부모들은 학교 교육을 받는 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귀족적인 과외 수업에 열중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애쓰고 힘을 기울여 목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권총이나 칼을 들고 은행을 털든지 아이를 유괴하든지 사람을 죽이든지 하여 돈을 손에 쥐려고 한다. 제 길을 벗어나는 것을 누워서 떡 먹듯이 하다. 왜 이럴까? 대답은 간단하다. 지름길로 가야만 종착점에 먼저 이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이 텔레비전에서 경기하는 것을 보라. 가볍게 웃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마구잡이로 하는 것을 보면 슬프게 느껴진다. 그들의 경기는 바로 이 나라의 사회 상태를 비춰 주는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끔 소름이 끼치게 한다.

이렇게 볼 때에 우리 상황에서 잘 달리는 능력이란 제 길을 따라 충실하게 열심히 달리는 능력이 아니라, 옆길로 빠져 지름길에 들어설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 같다. 누가 법과 질서를 더 잘 깨뜨리는지를 겨루는 경쟁과 같다. 미쳐 날뛰는 경쟁이다. 이것은 사회 철학자 홉스가 말한 대로 막되어 먹은 '자연 상태'와 비슷한 처절한 동물 사회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누가 정직하게 뛰려고 할 것이며, 누가 길을 따라 능력껏 뛰려고 할까?

모두가 길을 따라 열심히 능력껏 뛰었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다. 종착점에 이른 차례에 따라 보상이 분배되는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정직하게 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견주어 부당하게 적은 양의 보상을 받았다고 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종교와 인종과 성의 차이로 말미암아 먼저 온 사람이 뒤에 온 사람보다 나쁜 대우를 받으면 이러한 사회는 무너질 운명을 안고 있는 사회이다. 이것은 의롭지 못한 불안한 사회이다. 사회 정의가 없어진 캄캄한 사회이다.

 

상대적인 분노와 불만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비극은 서로 견주어 보는 데서 오는 비극이다. 옛날처럼 자기 처지를 숙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을 때에는 서로 견줌에서 오는 불행한 느낌은 예외현상이었다. 예컨데 『춘향전』에 나오는 방자는 이 도령과 자기를 견주어 보고 신세 타령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향단은 춘향이와 견주어 보고 자기의 신세를 비관하지 않는다. 그들은 계층과 신분의 차이를 숙명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차이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떨어진 오늘날의 젊은이는 길거리에서 대학을 다니는 고등 학교 동기생을 만났을 때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을 속으로 느낀다. 술집에서 일하는 '경아'는 길거리에서 어떤 대학교 배지를 단 고등 학교 동기생을 보았을 때 짐짓 고개를 돌려 자기를 못 알아보게 하면서 속으로는 울고 있을 것이다. 공부를 많이 했으나 허름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 지식인들은 에스컬레이터를 장치해 놓은 대궐 같은 집에서 사는 벼락 부자를 볼 때 속에서 구역질이 날 것이다. 날품팔이를 하는 지게꾼은 벤츠나 캐딜락을 타고 거드름을 피우는 족속들을 보면 배알이 꼴릴 것이다. 왜 오늘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를 남과 견주어 볼까? 그리고 왜 견주면서 기분이 틀려질까?

여기에는 한 가지의 중요한 의식이 깔려 있다. 이 의식 때문에 자기가 불행함을 느끼면서까지 남과 자기를 견주게 된다. 그것은 남들이 정당하게 뛰어서 오늘의 저 부러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비판 의식이다. 견줌의 대상이 되는 남들이 자기와 똑 같은 출발점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뛰어서 자기보다 먼저 들어섰다고 믿으면 이와 같은 상대적인 불만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출발점이 같았음을 의심하고, 뛰는 과정에서 정직하지 않았음을 느끼고, 또 늦게 들어왔으나 부당하게 많은 보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하는 의혹이 생기므로 상대적인 불만이 생기게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들은 자기보다 실력도 없고 자기보다 도덕적인 결단성이 모자라는 사람들인데, 배경 조건 때문에 자기보다 유리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여 분노하게 된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불만과 상대적인 분노가 얼핏 보기에는 분수 의식이 모자라서 생겨난 개인의 심리 현상과 같은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속에는 구조적인 요소가 있다. 이 불평등은 구조에서 나온다. 옆길을 달리고 지름길을 달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 꽤 많기 때문에 이것은 개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 현상이다. 종착점에서도 분배를 다루는 집단이 제멋대로 정한 가치 기준에 따라 보상의 분배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들어선 차례가 문제되지 않는다. 어떤 유능한 경주자가 1등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가치 기준에 따라 불온전하거나 괘씸하다고 인정되면 보상의 분배에서 부당하게 차별 대우를 받게 된다.

이른바 인권이 탄압되고 있는 숱한 정치적인 후진국에서 이러한 부당한 분배 기준이 많은 지식인들을 분노시킨다. 필리핀에서도, 인도에서도 인도네시아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상대적인 분노 속에서 이를 간다. 한국에서도 상대적인 불만과 상대적인 분노가 꽤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하는 근본 요인이다. 이와 같은 요인은 하루 속히 구조를 개편하여 없애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에서는 능력 본위주의라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서구에서는 능력에 따른 보상 제도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고 기회 균등의 이념이 비판을 받고 있지만, 우리 형편에서는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지켜 주었으면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길이 열릴 것 같다.

서구에서는 출발점에서의 평등을 이루려고 종착점에서의 평등을 부르짖고 있다. 심지어 복지 정책마저 소유 계급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권을 계속해서 누리려고 못 사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해 얼마씩 양보하는 것이라고 욕한다. 누진세 정책이 중산층을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게 막아 버려서 마침내 상류층과 중산층으로 양극화시키는 결과를 빚어 낸다고 꼬집는다.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

 

우리가 볼 때에는 이와 같은 비판은 서구의 상황에서는 적절한 것이겠으나 우리에게는 어쩐지 사치스러운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우리의 상황에서는 비록 기회 균등이 기존의 불평등을 더 튼튼하게 만드는 것을 도와 준다고 하더라도 기회 균등이나마 제대로 이루어졌으면 한다. 능력에 따른 경쟁이 기존 이권층의 권리와 이익을 더 두텁게 하더라도, 우리 형편에서는 능력이라도 제대로 평가되었으면 한다.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도 제대로 이루어지면 사회 정의는 착실하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될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은 절대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을 띠어서는 안 된다고 새삼스레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능력의 평가 기준이 이권층의 특수성을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특수성이 모든 보상 분배의 원칙이 되면 부당한 불평등은 더욱 넓게 번질 것이며, 나아가 이것이 끝내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권마저 파괴시켜 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능력만을 분배 기준으로 할 수 없으므로 이것에 다른 것을 더 보태고자 하면 그것은 이권층의 특수성 말고 경쟁자의 노력과 그들의 필요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능력은 없더라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경쟁자에게는, 비록 그가 좀 늦게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그 노력을 따져 두터운 보상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회 구조에서 따질 때에 워낙 힘이 모자라 제대로 경쟁을 해낼 능력도 없고 노력의 의욕도 갖지 못하는 소외된 민중에게는 필요라는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능력과 노력과 필요를 모두 적절히 따져 기존의 부당한 불평등을 고쳐 나가면 이 땅 위에도 정의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불평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다만 잘못된 불평등을 나무라고 거부할 뿐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부리는 사람과 많이 가진 사람과 존경받는 사람이 있고, 부림을 당하는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과 천대받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평등이 정당한 기준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의 물음을 늘 던져야 한다. 이 기준이 정당한 것일 때에 부리는 힘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가 되며 사고파는 힘은 졸부(猝富)가 아니라 청부(淸富)가 된다. 이런 곳에서 사자는 사슴과 어울리고, 독수리는 비둘기와 함께 노래할 것이다. 정의의 사회가 펼쳐질 것이다.

한완상/ 서울대학교 교수 및 부총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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