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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에 부쳐 / 워즈워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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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에 부쳐 / 워즈워드

 

오, 유쾌한 새 손(客)이여!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내 너를 '새'라 부르랴,

헤매는 '소리'라 부르랴?

풀밭에 누워서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이 산 저 산 옮아가는구나.

골짜기에겐 한갓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테지만

너는 내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여!

상기도 너는 내게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학교 시절에 귀기울였던

바로 그 소리,

숲 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바로 그 울음소리.

너를 찾으려

숲 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끝내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오, 축복받은 새여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같은 선경(仙境)처럼 보이는구나.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TO THE CUCKOO

 

O blithe new-comer! I have heard,

I hear thee and rejoice;

O Cuckoo! shall I call thee Bird,

Or but a wandering Voice?

While I am lying on the grass

Thy twofold shout I hear;

From hill to hill it seems to pass,

At once far off and near.

Though babling only to the vale

Of sunshine and of flowers,

Thou bringest unto me a tale

Of visionary hours.

Thrice welcome, darling of the Sprng!

Even yet thou art to me

No bird, but an invisible thing,

A voice, a mystery;

The same whom in my school-boy days

I listen'd to; that Cry

Which made me look a thousand ways

In bush, and three, and sky.

To seek thee did I often rove

Through woods and on the green;

And thou wert still a hope, a love;

Still long'd for, never seen!

And I can listen to thee yet;


요점 정리

문종 : 서정시, 낭만시, 번역시

성격 : 예찬적, 전원적, 신비적, 회상적

심상 : 청각적 심상

시어 : 평이하고 소박한 시어

표현상 특징

① 반복과 영탄을 통하여 내면의 강력한 감정을 자유로이 분출하고 있다.

②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통하여 평범한 소재로부터 비범한 의미를 이끌어 내고 있다.

③ 뻐꾸기 소리가 환기하는 심리적 연상과 회상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④ 자연과 선원의 사물을 소재로 하여 일간의 순수한 근원적 열정을 노래하고 있다.

⑤ 대상과의 심리적 공감 상태에서 자신의 주관적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⑥ 소재를 보는 관점과 화자가 지향하는 바에서 낭만적 태도를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주제 : 젊은 시절에 대한 회상과 동경 (성인이 된 시적 화자가 뻐꾸기 소리를 듣는 것을 계기로 하여 꿈

많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내용의 작품이다.)

특징 : 영탄법을 사용하여 대상에 대한 예찬적 태도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과 청각적 이미지를 사용

하여 대상자의 신비감을 부각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내용 연구

구성

구성

내용

시간

1

뻐꾸기를 소리를 듣는 기쁨

현재

2

뻐꾸기 소리를 듣는 정경

3

과거를 회상하게 하는 뻐꾸기 소리

과거와 현재의 연결

4

뻐꾸기 소리의 의미

5

뻐꾸기 소리에 귀 기울이던 학창시절

6

뻐꾸기와 학창 시절의 의미

7

뻐꾸기 소리로 인해 아름다워진 현실

현재

·1인칭 시점으로 뻐꾸기에 건네는 대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현재의 시점에서 회상과 현재가 교차하는 구성

·내용상 기-승-전-결의 구조로 볼 수 있음.

오, 유쾌한 새 손(客)이여! !

시적 대상의 찬미, 의인법, 은유법, 영탄법

예 듣고 지금 또 들으니

내 마음 기쁘다.

오, 뻐꾸기여!

내 너를 '새'라 부르랴,

객관적 인식의 대상

헤매는 '소리'라 부르랴?

주관식 인식의 내용 - 청각적 심상

소리는 수많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되는 매개, 즉 뻐꾸기

뻐꾸기 소리를 듣는

감정과 심상

(기쁨과 청각)

뻐꾸기에 대한 예찬 - 기쁨과 인식의 내용은 유쾌한 새, 손, 새, 헤매는 소리

풀밭에 누워서

한가로운 마음으로, 화자의 현재 행동

거푸 우는 네 소릴 듣는다.

멀고도 가까운 듯

알 수 없는 거리감

이 산 저 산 옮아가는구나.

1연의 손·헤매는 과 호응

풀밭에 누워 뻐꾸기

소리 들음

뻐꾸기와 알 수 없는 거리감을 느낌

골짜기에겐 한갓

햇빛과 꽃 얘기로 들릴테지만

객관적 인식 - 봄이 왔음을 알려 주는 새)

너는 내게 실어다 준다,

꿈 많은 시절의 얘기를

(주관적 인식 - 과거를 생각하게함.)

꿈많은 시절의

옛 얘기를 들려줌

뻐꾸기의 울음 소리의 의미 - 향수를 일깨워줌.

정말이지 잘 왔구나

봄의 귀염둥이여!

(시적 대상의 찬미, 의인법, 은유법, 영탄법)

상기도 너는 내게

상기는 아직도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의미있는), (알 수 없음) - 신비감

뻐꾸기는 귀엽고

신비한 새

뻐꾸기에 대한 예찬 - 귀여움과 신비감(봄의 귀염둥이, 보이지 않는 것, 하나의 목소리, 수수께끼)

학교 시절에 귀기울였던

(과거 - 꿈많은 시절)

바로 그 소리,

(변함없음을 강조)

숲 속과 나무와 하늘을

몇 번이고 바라보게 했던

(모습을 보기 위해서)

바로 그 울음소리.

모습을 찾게 하는

뻐꾸기의 소리

뻐꾸기에 대한 추억 - 소리의 실체를 찾으려 했던 학창시절

너를 찾으려

(소리의 실체)

숲 속과 풀밭을

얼마나 헤매었던가.

너는 여전히 내가 그리는

소망이요 사랑이었으나

(어린 시절의 꿈)

끝내 보이지 않았다.

(모습 - 꿈, 소망, 사랑의 실체)

지금도 들판에 누워

네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황금빛 옛시절은 젊은 시절

뻐꾸기의 소리를 들으면 황금빛 옛시절이 생각남

뻐구기의 의미와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 소망, 사랑, 끝내 보이지 않는 모습

오, 축복받은 새여

(시적 대상의 찬미, 의인, 은유, 영탄법)

우리가 발 디딘

이 땅이 다시

꿈같은 선경(仙境)처럼 보이는구나. (신비감)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뻐꾸기는 이 땅을 선경처럼 보이게 함

뻐꾸기에 대한 예찬 - 축복과 선경 - 축복받은 새, 자연(뻐꾸기)과 우리(인간)의 공존

(1) 내 너를 '새'라 부르랴, / 헤매는 '소리'라 부르랴? : 뻐꾸기를 단순히 사물적 차원의 '새'라 부르기보다는, 찾아 헤매는 상상의 대상인 '소리'로 부르고 싶다.

(2) 너는 내게 실어다 준다, / 꿈 많은 시절의 애기를. : 뻐꾸기 소리를 들으면서 꿈 많은 학창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3) 상기도 너는 내게 / 새가 아니라 / 보이지 않는 것 / 하나의 목소리요, 수수께끼. : 아직도 뻐꾸기 너는 단순한 사물적 새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어서 더욱 상상을 자극하고, 목소리로만 내게 귀뜸하여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궁금하고 그리운 대상이다.

(4) 그 소리에 귀 기울일라치면 / 황금빛 옛 시절이 돌아온다. : 눈에는 보이지 않고 소리로만 들리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꿈과 소망을 실어 그 소리를 찾아 헤매던,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던 그 아름다운 시절이 되살아 온다.

(5) 이 땅이 다시 / 꿈 같은 선경(仙境)처럼 보이는 구나, / 네게 어울리는 집인 양! : 뻐꾸기가 우리에게 꿈과 소망을 일깨우는 한, 현실이 우리가 찾는 꿈과 같은 세계로 비치게 되어, 뻐꾸기가 거주하기에 걸맞는 신비한 환경으로 전환된다

이해와 감상

① 시적 화자는 '뻐꾸기'를 단순한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지 않고, 특별한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여 예찬

하고 있다. 시적 화자에게 '뻐꾸기'는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는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② 뻐꾸기에 대한 예찬은 동시에 미지(未知)의 것을 추구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 찼던 '황금빛 젊은

날'에 대한 예찬이다.

③ 아직도 '뻐꾸기 소리'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송이기도 하다.

결국 시적 화자는 '뻐꾸기 소리'를 매개로 하여 과거와 현재, 인간과 자연을 포함하는 온 세상을 예

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낭만주의 시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전 7연으로 이루어진 이 시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뻐꾸기의 출현으로 시작하고 작중 화자는 풀밭에 누워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화자에게 뻐꾸기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작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낭만적 지향의 대상이기 때문에 뻐꾸기는 화자에게 가장 순수하고 열정적이었던 학창시절을 회상하게 해 준다.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는 자신의 소망과 꿈을 찾아 헤매는 화자의 모습과 유사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 화자는 뻐꾸기, 곧 자신의 소망과 꿈을 찾아 헤맨다. 뻐꾸기의 상징적 의미가 이와 같은 것이므로 그것을 찾아 헤매던 학창 시절은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회상된다. 여전히 그 때와 같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뻐꾸기는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까지도 꿈처럼 아름답게 여겨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심화 자료

'새'와 '소리'의 차이

'새'와 '소리'는 일차적인 시각적 존재와 청각적 존재라는 이미지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두 표현 사이에는 이미지의 차이뿐만 아니라 함축적 의미에서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 - 뻐꾸기에 대한 일반적 관습의 표현이며 드러나 있어 확인할 수 있는 실체를 의미하며, 그리하여 고정되고 안정적인 일상적 사물로 인정된다.

'소리'- 구체적인 개인의 경험에 의한 표현이이며 드러나지 않은, 신비한 어떤 실체로 여겨진다. 게다가 그것은 붙박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헤매는 소리'이다.

즉, '새'가 건조한 언어 관습의 산물이라면 '소리'는 낭만적으로 창조된 언어의 산물인 것이다.

낭만주의의 시 특징

신고전의 상식과 이성, 형식을 존중하는 것에 반대하며, 감각과 감성, 특히 상상을 중요시하며 형식보단는 내용을, 규칙보다는 자유를, 보편보다는 개성을, 세련보다는 신기한 것을 추구

romanticism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워즈워드와 낭만주의

18세기 말엽에서 대략 19세기 중엽 무렵까지는 낭만주의 문학의 시대요, 그것은 19세기 말이 가까와짐에 따라 자연주의로 진전한다. 낭만주의의 조류는 유럽 전역을 휩쓸게 되고, 러시아는 이 기운에 편승하여 서양 문학에 참여하게 되며, 19세기 후반에는 우수한 장편 소설로써 세계 문학에 이바지하게 된다. 미국 또한 자기 나라의 풍토와 사회 및 인간에 뿌리를 내린 참다운 미국 문학을 창조해 낸 것도 19세기로서, 19세기 중엽에는 우수한 작가를 배출하여 낭만주의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낭만주의란 무척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주의가 조화와 균제가 이루어진 형식을 사랑하고 이성과 인격의 통제를 존중하는 반면, 낭만주의는 첫째로 이성보다는 감정과 의지를 존중하여 감상에 빠져 들거나, 본능과 거친 자연을 사랑하고 개성과 자아를 집착한다. 둘째로 어떤 유형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여 변화와 공상 따위를 사랑하고, 무한한 것 또는 절대적인 것을 동경한다. 세째로 그 근본에는 범신론적인 사고가 있어 온갖 사상(事象)속에서 신을 보고 때로는 신과 합일하는 신비적인 기쁨을 맛보기도 하지만, 그 행복을 차지하지 못하고 방황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다. 네째로 그리스 및 로마의 전통과 기독교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간 속에 묻혀 있는 민요나 옛 이야기를 발굴하기도 하고 또는 민족 정신을 진작시킨다.

이런 사고 방식은 일찍부터 신흥 시민 계급 속에 싹이 터서, 영국의 소설가 골드스미드와 리처드슨 및 시인 번즈와 바이런에게도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을 이론화하여 힘차게 민 것은 프랑스의 루소와 독일의 헤르더였고, 그것이 이론으로 확립된 것은 독일의 실레겔 형제에 의해서라고 보고 있다.

영국의 낭만주의는 1798년 워즈워드 및 코울리지가 공동 저작하여 발표한 {서정시집(Lyrical Ballads)} 및 그 머리말에 의해 명확하게 낭만파 부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워즈워드는 젊은 시절 프랑스 혁명의 감화를 받고 인도주의적 전원 문학, 특히 자연에 대한 심원한 정념의 문학으로써 새로운 자연시인으로 세계 문학에 이바지하였다. 영국 낭만주의가 자랑할 뛰어난 자연시를 창작한 것이다. 한편 워즈워스와 완전히 취향을 달리하는 코울리지는 낭만적인 환상미를 시로 발휘했고 평론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영국에 있어서 낭만주의 부흥의 계기가 된 획기적인 시집인 {서정시집}은 사실은 익명으로 세상에 나왔던 것이다. 낭만주의는 엘리자베드 왕조 시대에 문예 부흥이라는 형식으로 개화한 것으로서 이성을 존중하고 고전을 중히 여기는 청교도, 왕정 복고, 의고전주의(疑古典主義)의 각 시대를 말없이 땅에 묻혀 살아오다가 드디어 여기서 싹이 튼 것이다. 1798년 브리스톨 시의 조세프 고틀이라는 출판사에 의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이 시집 출판의 해는 영국 낭만주의 부흥의 시초로 간주되고 있다. 물론 부흥 기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며 이미 시단에 있어서는 제임스 톰슨, 윌리엄 블레이크 및 로버트 번즈 등의 출현에 의하여 도시적 양식(良識), 풍취, 풍자 등을 높이 평가하는 풍조가 자라고 있었다.

낭만주의의 주조는 인간의 형식이나 습속으로부터 벗어나 그 사상, 형식에 있어서 자연적인 것, 따라서 진실한 것을 구한다는 주지를 하나는 자연과 친근해진다는 모습으로,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인 것을 동경한다는 형식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워즈워드와 코울리지는 바로 이 두 분야를 각각 분담하고 있다. 워즈워드는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구별이 없으며, 농민이나 천민도 시에 쓰여야 한다'고 말하고, 시의 소재와 시의 언어와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진술하여 종래의 기교에 치우친 문학에 반항하고 있다. (출처 : 김희보 편저, '세계 문예 사조사')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 4. 7 잉글랜드 컴벌랜드 코커머스~1850. 4. 23 웨스트모얼랜드 그래스미어.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1843~50년 계관시인을 지냈다. 테일러 콜리지와 공저한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1798)은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교육과 초기여행

워즈워스는 존 워즈워스(후에 론즈데일 백작이 된 제임스 로더 경의 업무 대리인)의 둘째 아들로 잉글랜드 북부의 호수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앤은 인접한 펜리스의 직물상인 윌리엄 쿡슨의 딸이었다. 워즈워스가는 본래 요크셔 가문으로 시인의 할아버지는 컴벌랜드로 이주해온 첫 세대였다. 존과 앤 워즈워스 부부는 다섯 자녀(리처드·윌리엄·도로시·존·크리스토퍼)를 두었다. 윌리엄이 8세 때 어머니가 죽었고 그후 5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었으며 남긴 유산은 간신히 교육비를 댈 수 있는 정도였다. 이때 아버지의 고용주인 제임스 로더 경으로부터 약 5,000파운드의 받을 돈이 있었으나 1802년이 되어서야 로더 경의 후계자가 이 돈을 갚았다. 윌리엄 형제 자매들은 두 외삼촌의 보호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후에 윌리엄과 크리스토퍼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 다닐 때 학비를 대주었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그보다 앞서 웨스트모얼랜드의 윈더미어 부근 혹스헤드에 있는 명문 그래머 스쿨을 기숙생으로 다녔으며, 이 기간을 '멋진 파종기'라고 불렀다. 그 학교의 젊은 교장이었던 윌리엄 테일러를 통해 18세기 초반의 명시와 최근의 시들을 알게 되었다. 이런 학교 교육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에스트웨이트 계곡과 그 주위의 초원지대였다. 바로 이곳에서 자연은 그의 교육을 이끌어가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죽은 후 자신이 애정을 쏟아부은 여동생 도로시와 떨어진 채 황금 제일주의자들인 펜리스 친척들의 냉대 속에서, 그는 가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사랑을 자연에서 발견했고 어린 나이에 '고독의 자족 능력'을 느끼게 되었다.

워즈워스는 1787년 10월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이것은 그 대학의 특별연구원으로 있던 외삼촌 윌리엄 쿡슨의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윌리엄 역시 특별연구원직을 취득하고 성직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성격이 거칠고 의지가 강한 북부 청년 워즈워스는 자기 세계와 동떨어진 세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 워즈워스의 학업 성적은 보통 정도였으므로 특별연구원이나 성직자가 될 수 없었다. 워즈워스는 편협한 교과과정, 경직되고 세속적이고 복잡한 그곳의 지적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는 친구들과 아주 기분에 맞는 '어슬렁거림'에 탐닉해 있었지만, 내적 자아는 고상한 고독의 분위기가 '속이 빈 요란함이나 피상적인 오락'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자였던 외삼촌들은 그가 돈과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워즈워스가 특별우등과정시험 준비를 그만두고 특별연구원이 될 기회를 포기했을 때 분노했다. 워즈워스는 결국 1791년 1월 보통 학위를 받았다.

워즈워스가 자신이 '시에 바쳐진 영혼'의 운명을 예감한 것은 1788년 마을의 무도회장에서 혹스헤드로 돌아오다가 본 한여름 새벽의 '잊지 못할 장관'에 의해서였다. 후에 발표된 워즈워스의 첫 장시 〈저녁 산책 An Evening Walk〉(1793)은 이 시기에 씌어졌다. 1790년 워즈워스는 한 친구와 함께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독일을 도보로 여행했는데 이 체험은 〈풍경 소묘 Descriptive Sketches〉(1793)에 칭송되어 있다. 1년 뒤 워즈워스는 장래의 교사로서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구실로 다시 프랑스에 갔다. 그곳에서 1년을 보냈는데 이 체류는 그의 보호자들이 생각한 것과 다른 면에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갖고 있던 공화주의에 대한 공감이 후에 공화국 군대의 장군이 된 미셸 드 부퓌와 나눈 우정으로 새롭게 강화되었고,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캐롤라인이라는 딸까지 두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적인 정치단체인 지롱드당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이나 아네트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자금부족과 외국에 더 오래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외삼촌들 때문에 포기되었다. 1792년 12월 워즈워스는 마지못해 영국으로 돌아왔으나 그뒤 '가혹한 숙명'을 신의 섭리로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2개월도 채 못 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하게 되었고, 1802년 일시적인 중단을 제외하고 20년 이상이나 전쟁 상태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1795년말까지 3년간은 워즈워스의 일생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그의 충성심과 애정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아무런 가망 없이 둘로 나누어져 있었고, 안정된 가정과 생계수단도 없었으며 보호자들의 냉대를 받았고,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진정한 소명의식도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 이후 벌어진 여러 사건들에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윌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 Political Justice〉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저작은 높은 인류애, 전쟁과 모든 부정에 대한 반대로 워즈워스에게 큰 매력을 주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순리성(純理性)은 워즈워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본능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워즈워스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프랑스의 마력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공화국과 싸운 자신의 조국 영국을 용서하고, 아네트와의 현명하지 못한 사랑에 빠져들어간 자신을 용서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복한 과거와 영국의 전원(田園)과의 유대를 새롭게 해야만 했다.

웨스트컨트리 시절

한 친구가 남긴 유산의 도움으로 1795년 10월 워즈워스와 그의 여동생은 함께 가정을 꾸리려던 오랜 꿈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싯에 있는 레이스다운라지에 정착했다. 벽지에서 도로시와 함께 지내면서 워즈워스는 예전의 조용한 명상과 회상의 습관을 되찾았다. 레이스다운에 있는 동안 워즈워스는 그의 유일한 희곡인 무운시격 비극 〈변경의 사람들 The Borderers〉을 썼다. 웨스트컨트리에 살게 되면서 워즈워스는 브리스틀에 살고 있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교제하게 되었고, 이들의 친분관계는 우정관계로 성숙되어 문인들의 전기에서 찾아보기 힘든 정신적 유대관계를 이루었으며 여동생 도로시의 이름과 그들의 이름을 묶어놓았다. 그들의 성질은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 콜리지는 격렬하고, 활기에 넘치고, 밝고,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 있었고, 워즈워스는 진지하고 내향적·내성적이며 신중했다. 도로시를 동반한 그들의 산책과 담화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자극했다. 이 세 비범한 인물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 콜리지가 서머싯에 있는 네더스터이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을 때 워즈워스 남매도 그곳에 와서 바로 알폭스던(지금은 알폭스턴이라고 씀) 파크에서 살도록 설득했다. 콴턱 구릉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알폭스던 파크는 경관이 웅장하고 세상으로부터 낭만적으로 격리되어 있어 완전한 인간관계와 새로운 시파의 탄생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되었다.

1798년 〈서정 민요집〉이 익명으로 발표되었다. 그 중 4편을 제외한 모든 시를 워즈워스가 썼으며 콜리지의 주요한 기여는 그 책에 첫 작품으로 실려 있는 〈노수부의 노래 The Rime of Ancient Mariner〉였다. 역사상 영시의 전환점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서정 민요집〉은 거의 파문을 일으키지 못했다. 워즈워스가 예상했던 대로 많은 독자들이 〈사이먼 리 Simon Lee〉·〈백치 소년 The Idiot Boy〉 같은 시에 대해서 분노를 표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노수부의 노래〉의 탁월성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워즈워스의 무운시 〈틴턴 수도원을 거슬러 수마일 지점에서 Lines Written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는 진부한 시어를 완전히 벗어나 열정적이고 근엄하고 순수한 시로 인정받았다.

2권으로 된 〈서정 민요집〉의 2번째 증보판은 1801년 1월 워즈워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발행연도는 1800년으로 기록됨). 그러나 콜리지의 시들도 전부 그대로 실렸으며 〈사랑 Love〉이라는 그의 시가 첨가되기까지 했다. 콜리지는 자신의 친구를 부각시키기 위해 표면에 나서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제2판에는 중요한 해설이 실린 〈서문 Preface〉이 실려 있었다. 실제로는 워즈워스가 썼지만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반은 콜리지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콜리지는 '워즈워스와 끝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다'. 몇 년 뒤 〈문학적 자서전 Biographia Literaria〉에서 콜리지는 워즈워스의 일부 이론과 그 이론을 구체화한 몇몇 시편에 대한 반대의견을 기술했다. 그러나 그 〈서문〉은 콜리지도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워즈워스는 시의 본질에 관해 상술하거나 시작(詩作)과정을 묘사할 때, 그리고 시인이란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밝힐 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말했다. 그뒤에 시와 시인에 관한 다른 의견을 발전시키기도 했지만 워즈워스의 설명은 시대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영원한 진리와 가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시는 모든 글 중 가장 철학적이며……시의 목적은 열정으로 진리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또한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연적인 유출이며 평정 속에서 떠오르는 감정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워즈워스와 그의 누이동생은 콜리지와 함께 1798~99년 겨울을 독일에서 보냈다. 이것은 원래 독일어를 배우고자 했던 콜리지의 생각이었다. 그는 독일어를 배우는 데 성공했지만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고슬라라는 먼 작은 도시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거의 외출을 하지 않은 채 지냈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자기 자신에게 몰입해 〈콜리지에게 바치는 시 Poem to Coleridge〉를 쓰기 시작함으로써 자신의 격리상태를 활용했다. 이것은 워즈워스 자신의 시심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결국 후에 〈서곡(序曲) The Prelude〉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여러 편의 회고록과 서정시들을 썼다. 〈루시 Lucy〉 시리즈와 〈그녀는 인적이 드문 곳에 살았네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 〈내가 겪은 이상한 열정들 Strange Fits of Passion Have I Known〉·〈선잠이 나의 영혼을 봉해버렸다오 A Slumber Did My Spirit Seal〉·〈3년간 그녀는 태양과 소나기 속에서 자랐네 Three Years She Grew in Sun and Shower〉 등이 그의 가장 섬세한 서정시에 속하는 것이었다. '루시'가 누구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콜리지의 생각처럼 도로시가 죽는다면 자신이 겪게 될 상황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일부 내용이 유래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워즈워스의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2년 뒤에 쓴 〈나는 낯선 사람들 사이를 여행했네 I Travelled Among Unknown Men〉는 이 〈루시〉 시리즈와 유사한데 워즈워스가 이전에는 프랑스에 동조했지만, 망명생활을 통해 진정 영국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레이크디스트릭트 시절

1799년 12월 21일 워즈워스와 도로시는 레이크디스트릭트로 돌아와 웨스트모얼랜드 그래스미어에 있는 도브 카티지를 구입했다. 그후 1802년 10월 워즈워스는 자신의 신부를 그래스미어로 데려왔는데 그녀는 메리 허친슨으로 학창시절의 친구이자 그를 사랑하는 숭배자였으며 도로시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 도브 카티지에서 그들의 세 자녀가 태어났다. 이곳 생활은 평범한 삶과 숭고한 사색 및 산책·담화·독서·시작·손님접대 등 일상의 순환이었다. 도로시의 아름다운 〈그래스미어 일기 Grasmere Journal〉에는 이 생활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비평가들은 대략 이 시기(1796~1806)를 워즈워스의 '위대한 10년'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그의 걸작들은 거의 모두 〈서곡〉과 〈영혼불멸송 Ode:Intimations of Immortality〉이 완성된 시기(1805~06)에 씌어졌다. 그러나 그후 워즈워스는 〈서곡〉을 크게 수정했으며 이 작품은 그가 죽은 후인 1850년에 발표되었다.

 

1808년 워즈워스는 그래스미어에 있는 집이 늘어나는 가족에 비해 협소했으므로 앨런뱅크로 이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1811년까지 지내다가 그래스미어 목사관에서 잠시 체류한 후 라이덜마운트에 자리를 잡았는데 워즈워스는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시 창작력이 왜 쇠퇴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프랑스를 단념하고 아네트를 마음에서 몰아내고 정착하여 점차적으로 영국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자신의 상상력도 억누르게 되었음을 시사해왔다. 그러나 모든 희화화처럼 이런 생각은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이다. 워즈워스가 주장했듯이 변한 것은 그가 아니라 사회였다. 그가 프랑스를 단념한 것은 프랑스인들이 '차례로 압제자가 되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를 보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아네트를 포기하지 않았다. 워즈워스는 아네트와 딸을 부양하기 위해 양심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는 메리 허친슨과 결혼하기 전 1802년 그들을 만나러 갔는데, 이 방문은 잠깐 동안 효력을 발휘했던 아미앵 평화조약에 의해 가능했다. 보수적이 되었다는 학설에 관해서는 워즈워스가 노령에 이르도록 살았으며 그가 누리던 영감은 청소년 시절 및 활발한 감각에 연관되어 있던 만큼, 중년이 지난 후 오래도록 그대로 존속할 수는 없었으리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워즈워스 자신도 1805년 또는 그 전에도 자신의 상상력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사실 그의 가장 위대한 단시 〈영혼불멸송〉은 '환상의 빛'이 사라져가는 것을 애도한 시이다. "내가 보아왔던 것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네." 1813년 워즈워스는 웨스트모얼랜드 지방 우표 배급직을 수락했는데 이것은 연봉 400파운드의 봉급을 받는 한직이었다. 1814년 〈소요 The Excursion〉를 비롯해 계속해서 많은 양의 시를 발표했으나 오직 가끔씩 초기 작품의 독특한 영감을 되찾을 뿐이었다. 1843년 친구인 로버트 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고 7년 뒤 죽었다. B. Willey 글 /金仁星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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