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비판적 이성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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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이성

 

 

비판은 흔히 인간의 이성적 속성을 함축한 말로 이해된다. 이런 비판은 여러 가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적 의미로는 '주어진 권위에 대한 반대적 사유'를 지칭하고, 칸트적인 의미로는 '이성과 지식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성찰'을 가리키고, 헤겔의 젊은 제자들이 발전시킨 의미로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형성한 의식의 구속성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른바 이데올로기 비판에서의 비판은 '어떤 현실과 그 현실을 대변한다는 주장간의 괴리를 폭로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흔히 사용하는 비판의 의미는 어떤 사안에 대한 주장이나 정책의 잘잘못을 따지는 행위이다. 특히 겉으로는 옳은 듯이, 사실인 듯이, 또는 합리적인 듯이 제시되는 주장이나 정책을 시시비비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시시비비를 제대로 가리기 위해서는 분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도 "시비하는 마음이 지혜의 시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판은 일방적인 주장이나 정책의 모순이나 오류를 지적하는 일종의 반박 행위이다. 그리고 그런 반박 행위는 정치적으로는 흔히 반대 행위가 된다. 비판이나 비판자가 정치적 박해를 받는 일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권좌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의 정책을 애국심과 동일시하고 그에 대한 비판을 불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나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 비판은 박해의 대상이 아니라 장려의 대상이어야 한다. 비판은 중대한 잘못들에 대한 불가결한 교정 수단이기 때문이다.

 

비판은 또한 인간의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언어를 매개로 한다. 비판이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비판이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인 행동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이 허용되는 사회라면, 그에 대한 반대 행위는 자연히 언어라는 평화적 수단에 의거하게 된다. 그러나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반대 행위로서 비언어적, 물리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비판이 허용됨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수단으로 반대를 표시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한 책임은 물리적 수단을 사용한 측에 있다. 그러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물리적 수단을 사용한 데 대한 책임은 물리적 수단에 호소한 측에가 아니라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측에 있다. 반대 행위가 물리적 수단에 호소하지 않기 위해서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반대 행위, 즉 비판이 허용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시 국가에서의 삶과 언어 능력 속에서 인간을 그 최고의 가능성을 달성하는 존재로 보았다. 희랍의 자유인들은 도시 국가에서 언어를 통해서 자신들의 일을 처리한다는 점에서 야만인과 노예와는 다르다. 그들이 정부와 법에 복종했던 것은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득에 의한 것이었고, 이것은 언어를 매개로 한다. 언어는 비폭력적이고 비강제적이기 때문이다. 야만인들은 폭력에 의해 다스려지고 노예는 강제에 의해 노동한다. 폭력이나 강제가 효과적이기 위해서 언어는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야만인이나 노예는 언어가 별로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은 바로 이런 희랍의 자유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을 야만인들이나 노예들과 구별하기 위한 말이었다. 언어로써가 아니라 폭력이나 강제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야만인이나 노예인 것이다.

 

언어는 이성적이다. 철학자인 하만은 언어를 이성의 기관이라고 했다. 또한 언어를 뜻하는 희랍어의 로고스라는 말이 동시에 이성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잘 증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했는데 이 로고스는 서양 철학의 기본 개념이다. 물론 언어에는 비이성적인 측면도 있다. 그래서 언어는 감정적인 설득에 동원될 수도 있고 심지어 위협이나 조작에 동원될 수도 있다. 그러나 비판이라는 냉철한 시시비비에 사용되는 것은 이성적 언어이다. 이성적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비판이라는 반대행위도 이성적이다. 이런 점에서 비판은 언어의 감정적인 면이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주로 이용하는 선전이나 선동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비판은 반박이나 반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더 진실한 것, 더 선한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정의로운 것, 더 자유로운 것, 더 평등한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비판은 파괴적인 행위가 아니라 생산적인 행위이다. 진실로 파괴적인 행위는 비판이 아니라 비판을 가로막는 행위이다. 비판을 파괴적인 행위로 몰아붙여 금지하는 행위야말로 더 나은 것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퇴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발전이 아니라 안정이라는 미명의 현상 유지나 퇴보가 있을 뿐이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폭력과 감정이 그 대안이며 퇴보가 그 산물이다.

 

비판은 어떤 사안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을 반박하는 또 다른 하나의 주장이다. 때문에 그것은 그것이 반박하는 주장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만일 비판에 이런 현실성과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비방에 불과하다.

 

비판에 대안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이 비판을 가로막는 근거가 될 수도 없다. 비판에는 흔히 대안이 있게 마련이지만 설사 대안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비판을 막거나 비판을 폄하 하는 하등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비판에 대한 정당한 대처는 그 비판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또 다른 비판이어야 한다. 비판에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은 비판에 비판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회피하거나 비판에 비난으로 맞서는 교활한 책략일 뿐이다. 비판에 위협이나 폭력으로 대처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비판을 회피하거나 비판에 비난으로 맞서는 것은 그 비판과 비판이 제시하는 주장의 정당성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비판에 대하여 비판으로 맞서지 않고 비판을 회피하거나 비판에 대해 비난으로 맞서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비판에 위협이나 폭력으로 대처하는 행위는 사회의 평화와 안정과 이성을 해치고 사회에 폭력을 초래하는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사회는 비판에 위협이나 폭력으로 대처하는 행위를 엄단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세력들에 대해서, 사회는 그 자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그들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문명 사회는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적인 언어에 의해서 발전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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