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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헌곡(不憂軒曲)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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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헌곡(不憂軒曲)

제1장

산사회 수중포 일무유궁

향양명 개남창 명불우헌

좌금서 우박혁 수의소요

위 낙이망우 경 하질다

평생립지 사우성현 (재창)

위 준도이행 경 하질다

제2장

만생원 노급제 낙천지명

재훈도 삼교수 회인불권

가숙삼간 구취동몽 상설구독

위 순순선유 경 하질다

불역낙호 부급서생 (재창)

위 자원방래 경 하질다

제3장

재상소 벽이단 의호중용

진이례 퇴이의 수신위대

비원상대 구신미원 인년치사

위 여석중부 경 하질다

일개고신 남승천총 (재창)

위 재삼원종 경 하질다

제4장

경전식 착정음 부지제력

상량신 설빈연 형제붕우

담소지간 불황타급 효제충신

위 낙차유의 경 하질다

무지도지 가영성덕 (재창)

위 기천영명 경 하질다

제5장

윤지임 혜지화 아무능언

성지시 안지락 내소원야

상하원천 하불우인 심광체반

위 불구불우 경 하질다

불기불구 하용부장 (재창)

위 고훈시식 경 하질다

제6장

임진세 사월초 억유기사

항유서 도형문 여리관광

염개자수 불구문달 교회동몽

위 과몽포장 경 하질다

특가삼품 시치혜양 (재창)

위 성은심중 경 하질다

제7장

낙호이은저 불우헌이역

낙호이은저 불우헌이역

위 작차호가 소견세려 경 하질다

요점 정리

형식 : 경기체가

연대 : 1472년(성종3)

작자 : 정극인

구성 : 전 6장(6장의 마지막의 낙구를 독립된 장으로 본다면 7장)

주제 : 성군의 만수무강을 축원

내용 연구

1장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거문고와 책과 바둑과 장기를 즐기며 소일하는 모습

2장

향리의 소년들과 타향에서 공부하고자 찾아 온 학동들을 모아놓고 교육하는 즐거움

3장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에 임하여 베푼 왕의 망극한 은덕

4장

태평성대에 춤을 추고 노래하며 왕의 성덕을 기리는 모습

5장

자기 분수를 지켜 안빈낙도하는 심경을

6장

삼품산관의 유서를 받고 성은에 감격하는 모습

7장

작자 자신의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로 지어 세상 근심을 떨쳐 버리는 모습

고려 고종 때의 '한림별곡'의 형식을 본받고 있는데, 다만 제6장 끝에 독립된 낙구를 가진다는 점에서 '한림별곡'과 크게 구별된다. 이같은 현상은 그 유래를 권근의 '상대별곡'에서 찾을 수 있다. '불우헌곡'보다 약 70년 앞선 '상대별곡'의 형식은 고려 때 '한림별곡'의 형식과 같으나, 다만 끝에 낙구가 첨가된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불우헌곡'의 낙구는 '상대별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불우헌곡'의 형식은 경기체가 형식의 변천과 그 계보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이다. 동시에 '불우헌곡' 이전의 조선 시대 경기체가가 악장이라는 국가적 소용이었다면 '불우헌곡'은 개인적 소용으로 변모한 첫 작품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1장

山四回 水重抱 一畝儒宮

向陽明 開南  名不憂軒

左琴書 右博奕 隨意逍遙

偉 樂以忘憂 景 何叱多

平生立志 師友聖賢 (再唱)

偉 遵道而行 景 何叱多

제2장

晩生員 老及第 樂天知命

再訓導 三敎授 誨人不倦

家塾三間 鳩聚童蒙 詳說句讀

偉 諄諄善誘 景 何叱多

不亦樂乎 負 書生 (再唱)

偉 自遠方來 景 何叱多

제3장

再上疏 闢異端 依乎中庸

進以禮 退以義 守身爲大

備員霜臺 具臣薇垣 引年致仕

偉 如釋重負 景 何叱多

一介孤臣 濫承天寵 (再唱)

偉 再參原從 景 何叱多

제4장

耕田食 鑿井飮 不知帝力

賞良辰 設賓筵 兄弟朋友

談笑之間 不遑他及 孝悌忠信

偉 樂且有義 景 何叱多

舞之蹈之 歌詠聖德 (再唱)

偉 祈天永命 景 何叱多

제5장

尹之任 惠之和 我無能焉

聖之時 顔之樂 乃所願也

上下怨天 下不尤人 心廣體 

偉 不懼不憂 景 何叱多

不 不求 何用不臧 (再唱)

偉 古訓是式 景 何叱多

제6장

壬辰歲 四月初 抑有奇事

降諭書 到衡門 閭里觀光

廉介自守 不求聞達 敎誨童蒙

偉 過蒙褒奬 景 何叱多

特加三品 時致惠養 (再唱)

偉 聖恩深重 景 何叱多

제7장

樂乎伊隱底 不憂軒伊亦

樂乎伊隱底 不憂軒伊亦

偉 作此好歌 消遣世慮 景 何叱多

이해와 감상

작가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 태인에서 안빈낙도하는 생활을 하면서 향리의 자제들을 힘써 교육하였고, 이로 인하여 성종으로부터 삼품의 작위와 더불어 그 지방 관찰사로 하여금 때때로 혜양하는 은전을 받았다. 이에 감격하여 '불우헌가'와 함께 이 노래를 지어 성군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임금의 관심과 군신간의 관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케하는 작품이다.

심화 자료

불우헌집 (不憂軒集)

 

저자가 죽은 지 300년 후인 1786년(정조 10)에 후손 효목(孝穆)이 수집 간행한 것을 1969년 정씨서륜당(丁氏敍倫堂)에서 중간(重刊)하였다. 권1에는 시(詩), 권2에는 문(文)과 가곡(歌曲)이 수록되고, 책머리에는 행장(行狀) ·가장(家狀) ·묘문(墓文) 등이 실려 있다. 단종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저자는 벼슬이 정언(正言)에 이르렀을 때,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태인(泰仁)으로 내려가 후진 교육에 전렴하였다. 이 무렵에 지은 <상춘곡(賞春曲)>은 한국 문학사상 최초의 가사(歌辭)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불우헌곡 (不憂軒曲)

 

단가(短歌)인 《불우헌가(不憂軒歌)》와 같은 동기에서 지은 장가(長歌)로서,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 작자는 벼슬을 버리고 향리인 태인(泰仁)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는데, 1472년(성종3) 임금이 그 공을 인정하여 삼품교관(三品敎官)의 벼슬을 내리자 성은에 감동하여 지은 작품이다. 당시 붕괴되는 과정에 있던 경기체가의 형식을 취하여 전원생활의 즐거움과 교육의 보람 및 성은(聖恩)과 자신의 진퇴(進退) 등을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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