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선생 / 전문 / 이태준
by 송화은율불우선생 / 이태준
H군과 나는 그를 '불우선생(不遇先生)'이라 부른다.
불우선생을 우리가 처음 알기는 작년 여름 돈의동(敦義洞) 의신여관에 있을 때다. 하루는 다 저녁때 늙은 손님 하나가 주인을 찾았다.
"이리 오너라."
부르는 소리만은 아마 그 집 대문간에서 나던 소리 중에는 제일 점잖고 위풍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눈딱부리 주인마님은 안마루에 앉아 저고리 가슴을 풀어헤치고 콩나물을 다듬고 있다가 너무나 놀라워서 허겁질을 해 일어섰던 것이다.
객실이 너절한만치 우리 같은 무직자들이나, 유직자들이라 해도 무슨 보험회사 외교원 같은 입심으로 사는 친구들만 모여들어, 그악은 혼자 부리면서도 늘 밥값은 받는 것보다 떼이는 것이 더 많은 마나님이라 찾아온 손님이 그 목소리만 점잖은 듯하여도 게서 더한 반가움은 없는 듯하였다.
주인마님은 저고리를 여미고 가래 끓는 목청을 다듬으며,
"네에."
소리를 거듭하며 달려 나왔다.
그때 문간방에 있던 H군과 나는 '저 마누라의 능청떠는 걸 좀 보리라' 하고 잠잠히 문간 쪽을 엿듣고 있었다. 그랬더니 우리의 상상과는 딴판으로 주인마님의 목소리는 고분고분하지가 않았다.
고분고분은 그만두고 무뚝뚝한 것도 지나쳐 반 역정을 내는 데는 너무나 의외였다.
"당신이 찾소? 누구를 보료?"
"아니 누구를 보러 온 게 아니오, 여관 영업 패가 붙었으니 묵으러 온 것이지……."
"무슨 손님이 보따리 하나 없단 말요?"
"허! 이게 여관업자로 무슨 무례한 말씀이오. 보따리가 밥값 내오?"
주인마누라는 겉보기와 속마음은 딴사람이었다. 아니 겉과 속이 다르다기보다 H군의 말마따나 금붕어에다 비긴다면 그 마나님은 겉과 속이 꼭 같은 사람이었다.
눈알이 불거진 것도 금붕어요 얼굴이 붉고 궁둥이가 뒤룩뒤룩하는 것도 금붕어요 또 마음이 유순한 것도 금붕어 같은 마님이었다. 팔자 타령과 함께 역정이 날 때는 집을 불이라도 지르고 끝장을 낼 것 같다가도 그는 오래 성내고는 자기 속이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다.
밥값들을 안 낸다고 방마다 문을 열어 젖히고 야단을 친 그날일수록 오히려 옷가지를 잡혀다가라도 반찬을 특별나게 차려 내놓는, 인정 많은 마나님이었다.
그래서 그날도 처음 나가 말 나오듯 해서야 그 손님이 어딜 문안에 들어서다니, 단박 쫓겨 나가고 말 것 같았으나 결국은 우리 있는 옆방으로 방을 정해 들여앉힌 것이다.
과연 그 손님은 목소리만은 점잖스러웠다. 의복이 초췌해 그렇지 신수도 좀스럽거나 막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후줄근한 모시 주의에 맥고모자는 삼년상을 그 모자로만 치르는지 먼지가 더께로 앉고 베 헝겊조차 땀에 얼룩이 져 있었다. 툇돌 위에 벗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 툇마루 위에 올려놓는 신발도 그리 대단스럽지는 못한 누르퉁퉁한 고무신이었다.
이 새로 든 손님은 우리 방에서 같이 저녁상을 받게 되었다. 그가 든 방은 겨우 드나드는 문 하나밖에 없어 낮에도 어둡고 바람이 통치 않아 웃돈을 받고 있으래도 못 견딜 방이다.
그래서 주인마님도 여름만 되면 아예 휴등을 해두고 말기 때문에 늦은 저녁을 불 있는 우리 방에서 같이 먹게 된 것이다.
우리는 밥상을 받기 전에 이웃방 손님과 통성을 하였다. 그는 우리에게 존장뻘이 훨씬 넘는 중노인으로 이름은 송아무개라 하였다. 그는 별로 말이 없어 한 손으로 부채질만 하면서 밥만 급한 듯 퍼먹었다. 우리는 반 그릇도 못 먹었을 새에 그의 밥사발은 밑바닥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는 밥숟갈을 놓자마자 자기 손으로 밥상을 든 채,
"실례했소이다."
하면서 우리 방에서 나갔다.
그날 밤이다. 우리는 저녁 후에 가까이 있는 파고다공원에 가서 두어 시간을 보내고 오니까, 우리 옆방, 그 굴 속 같은 어두운 방 속에선 왕― 왕― 글 읽는 소리가 났다. 물론 새로 든 그 방 주인의 소리겠지만 그렇게 청승스럽게 잘 읽는 소리는 처음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귀를 빼앗기고 듣고 있었다. 그때는 무슨 글인지는 몰랐으나 '굴원이 기방(旣放)에'니 '행음택반(行吟澤畔)할새 안색이 초췌(顔色憔悴)'니 하던 마디를 생각해 보면 굴원(屈原)의「어부사(漁父辭)」를 읽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무조건하고 글소리만에 그에게 경의를 느꼈다. 그리고
"송선생님?"
하고 그를 찾아 그 방은 더우니 우리 방에 와 자자고 청하였다. 그는 조금도 사양 없이 우리 방으로 왔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를 물으면 두 가지 세 가지씩 자기의 신변담을 비롯하여 밤이 깊도록 떠벌렸다. 그때 그의 말 중에 제일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자기는 십여 년 전만 하여도 천여 석 추수를 받아 먹고 살던 귀인이었다는 것과 그 재산이 한말(韓末) 풍운 속에서 하룻밤 꿈처럼 얻은 것이라 불순한 재물인 것을 깨닫던 날부터는 물 퍼내 버리듯 하였다는 것과 한동안은 시대일보(時代日報)에도 중요 간부였었고 최근에 중외일보(中外日報)에도 자기가 산파역을 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는 것과, 오늘의 자기는 이렇게 행색이 초췌해서 서울을 객지처럼 여관으로 돌아다니지만 여섯 식구나 되는 자기 집안이 모두 서울 안에 있다는 것과 이렇게 여관으로 다니는 것은 집에선 끼니가 간데없고 친구들의 신세도 씩씩할 뿐만 아니라 친구들이라야 모두 문사 간부급의 인물들이라 그들의 체면도 생각해야겠고, 또 그네들이 요즘 와선 무슨 은행이나 기업회사의 중역처럼 아니꼬움 부리는 것이 메스꺼워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과, 또 이렇게 여관으로 다니면 동지라 할까 나 같은 사람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까 함이라는 것, 이런 것들이다.
"그러면 송선생은 송선생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무슨 일을 하시겠소?"
우리가 물었더니 그는,
"알아만 주는 것으로 일이 되오, 돈이 나올 사람이라야지."
하였다.
"돈도 많이 낼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나 그럼 신문사 하겠소. 요즘도 셋이나 있긴 하지만 그것들이 신문사요? 조선선 그런 신문사 백이 있어도 있으나마나요……."
하였다.
"선생님 댁은 서울이라면서 이렇게 다니시면 댁 일은 누가 봅니까? 자제분이 봅니까?"
"나 철난 자식 없소. 어머니가 아직 생존해 계시고 여편네하고 과수 된 제수 하나하고 딸년 두울하고 아들이라곤 이제 열둬 살 나는 것 하나하고 모두 여섯 식구가 집에 있지만 난 집안일 불고하지요. 불고 안 한댔자 별도리가 무에요만!"
"그럼 댁에서들은 달리 수입이 계십니까?"
"수입이 무에요. 굶는 데 졸업들이 돼서 잘들 견디지요. 몇 달에 한 번 혹 그 앞을 지날 길에 들여다보아야 그렇게 굶고들도 한 명 축가는 법도 없지요. 정히 굶다 못 견디면 도적질이라도 하겠지요."
"그러면 도적질이라도 하게 두신단 말씀입니까?"
그때 H군이 물어 본 말이었다. 그는 늙었으나 정력이 가득 차 보이는 눈이 더한층 빛나며 태연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내 식구들만 먹이기 위해서 도적질을 한다면야 그건 죄가 되지요. 그러나 제각기 제 배가 고파서 훔치는 건 벌받을 만한 죄악은 아니겠지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다니오."
그날 저녁 그는 우리 방 윗목에서 잤다. 드러누워서 어찌 방귀를 뀌는지 H군이 견디다 못해 '무슨 방귀를 그렇게 뀌느냐' 하니 그는 '호랑이 방귀'라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니까 '끼니를 규칙적으로 못 먹고 몇 끼씩 굶었다가 생기면 다부지게 먹으니까 창자 속에 이상이 일어난 표라'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도 주인마나님은 이 허줄한 손님에게 조반을 주었다. 그리고 조반상이 끝나자 나와서,
"어서 두어 끼 자셨으니 다른 여관으로 가시우."
하였다. 그러나 손님도 손님이라 노염도 타지 않고,
"여관에서 객을 마대다니 참!"
하였다.
"왜 객을 마다오, 누가? 그럼 선금을 내시구려."
"돈 잡히고 밥 사먹는 녀석이 어디 있소?"
"그럼 어서 나가시오. 나 두 끼 밥값도 안 받을 테니 어서 가슈. 별꼴 참 다 보겠군…… 댁이 내게 무슨 친정붙이나 되시오? 무슨 턱에 내 집에 와 성화요? 암만 있어야 밥 나올 줄 아오?"
"안 내보내면 굶구 견데 보리다……."
그날 저녁은 정말 우리 밥상만 나왔다. 그러니 덥다는 핑계로 (사실 그의 방엔 들어앉아 있을 수도 없었지만) 우리 방에 와 있으니 사람을 옆에 두고, 더구나 우리는 점심이나 먹었지만 그는 긴긴 여름날 하루를 그냥 앉아 배긴 사람을 모르는 체하고 우리만 먹을 수가 없었다.
"같이 좀 뜨십시다."
"아니오, 나는 노형네와 달러 잘 굶소. 아무렇지도 않소. 노형네가 미안할 것이니 저녁상이 끝나도록 나는 내 방에 가 있으리다."
하고 일어섰다. 그러나 우리는 일어서는 그를 잡아 앉히었다. 그리고 수저를 내오라고 어멈을 부르려니까 그는 여기 있노라 하며, 조끼에서 커다란 칼을 집어내었다.
그 칼은 이상한 칼이었다. 철물전에 가면 혹 그 비슷한 것은 있어도 그와 똑같은 것은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어찌 생긴 칼인고 하니 칼은 칼 모양으로 되었는데 칼만 달린 것이 아니라 병마개 뽑는 것, 국물 떠먹기 좋은 움푹한 숟가락, 서양 사람들이 젓가락 대신으로 쓰는 사시창까지 달린 칼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잡아 뽑고 사시창을 잡아 뽑고 하더니 한끝으론 밥과 국을 떠먹고 한끝으론 김치쪽을 찔러 먹는데, 젓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우리보다 더 빨리 더 편리하게 먹었다. 그리고 오이지가 긴 것이 있으니까 칼날까지 열어 젖히더니 숭덩숭덩 썰어 가면서 먹었다. 그 칼은 그에게 없지 못할 무기 같았다.
그는 그 이튿날 아침에도 우리 조반상에서 그 완비한 무기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밖에 나갔다 저녁에 들어오니 그는 자기 방에도 우리 방에도 있지 않았다. 주인마님에게 물어 본즉 '내어쫓았다' 했다.
H군과 나는 그가 없어진 것을 적이 섭섭하게 느끼었다. 그래서 며칠 동안은 그의 인상을 이야기하며 그를 '불우선생'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이 불우선생을 다시 만나 보기는 그 후 한 달쯤 지나 삼청동에서다. 그는 석양이 가까운 그늘진 삼청동 골짜기에서 그 곡선미도 없는 비쩍 마른 몸뚱이를 벌거벗고 서서 돌 위에서 무엇을 털럭털럭 밟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두루마기는 빨아서 풀밭에 널어 놓고 적삼과 중의를 말리다 말고 구김살을 펴느라고 밟고 섰는 꼴이었다.
"저런 궁상 좀 보게."
하고 우리는 웃었으나 그가 불우선생인 것을 알고는 반가워 그냥 지나쳐지지가 않았다.
"허허, 이게 웬일들이시오?"
하고 말은 그가 먼저 내었다.
"네, 송선생을 여기서 뵙겠습니다그려."
하고 우리가 바투 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니까,
"허허, 이거 실례요."
하고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털럭털럭 빨래를 밟는다.
"왜, 댁에 들어가 빨아 입지 않으시고 손수 이렇게 하십니까?"
"빨래 좀 해 입으려고 두어 달 만에 들어갔더니 집이 없어졌구려!"
"없어지다니요?"
"잡혀먹고 삼사 년이 되도록 이자나 어디 물어 왔소."
우리는 벌거벗은 그와 마주 섰기 민망하여 길게 섰지는 못하고 이내 헤어졌다. 우리는 그의 곁을 지날 때 땅바닥에 펼쳐 놓은 조그만 손수건 위에서 그의 전 소유물을 일별할 수 있었다.
전 소유물이라야 노랗게 전 참대 물부리 하나, 유지 부채 하나, 반나마 닳은 빨랫비누 하나 그리고는 예의 그 칼인데 역시 그 칼이 제일 값나가는 재산 같았다.
*
그 후 우리는 불우선생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어제 우연히 행길에서 그를 만난 것이다.
"허! 이거 이공이 아니시오? 참 반갑소이다."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손을 내어밀었다. 나도 반가웠다. 그러나 그를 초췌한 행색 그대로 다시 만나는 것은 조금 섭섭하였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무슨 사업이나 잡으셨습니까?"
"사업이라니요…… 그저 그렇지요…… 그런데 이공? 내가 시방 시장하오. 어디 좀 들어가 앉읍시다. 그리고 내 이야기도 좀 들어 주시오."
나는 그와 어느 청요릿집으로 들어갔다.
"이공! 허!"
그렇게 낙관이던 그의 눈에는 눈물이 핑그르 어리었다.
"네?"
"사람 목숨처럼 궁상스럽고 질긴 게 없구려……."
"왜 그렇게 언짢은 말씀을 하십니까? 더운 걸 좀 자시겠습니까?"
"아무게나 값싼 것으로 시키슈…… 내가 죽을 걸 살지 않았소!"
"글쎄, 신상이 매우 상하셨습니다."
"상하다뿐이겠소. 월여 전에 전찻길을 건느다가 그만 전차에 뒤통실 받혔지요. 그걸 그 당장에 전차쟁이들이 하자는 대로 못난 체하고 쫓아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고쳤드면 그다지 생고생은 안 했을 것인데 그 녀석들 욕을 몇 마디 하느라고 고집이 나서 따라가질 않고 그저 바람을 쐬고 다녔구려…… 아! 그랬드니 골 속이 붓지 않나요. 이런 제기, 그러니 벌써 며칠 뒤라 전기회사로 찾아갈 수도 없고 병원으로 가자니 돈이 있길 하오, 그냥 그러고 쏘다니다가 어떤 친구의 집엘 갔더니 그 친구의 아들이 의학교에 다닌다게 좀 봐달라고 하지 않었겠소. 그랬드니 골이 썩기를 시작하니 다른 데와 달러 일주일 안에 일을 당하리라는구려. 허! 일이 별일이오. 죽는 것 아니겠소? 슬그머니 겁이 듭디다그려. 그래 그 길로 몇몇 친구를 찾아다녔으나 한 사람도 만나 주지를 않어 그냥 돌아서니 그젠 눈물밖엔 나는 게 없습디다. 골은 자꾸 뜨겁고 쑤시긴 하고…… 그제는 그 끔찍할 것도 없는 집안 사람들 생각이 간절해집디다그려. 그래서 뉘 집 뜰아랫방이란 말만 듣고 가본 적은 없는 데를 두루 수소문을 해서 찾아가지를 않었겠소. 그러나 촐촐히 굶주리는 판에 돈 한 닢 들고 들어가지는 못하나마 병신이 돼서 죽으러 들어가구 보니 누가 반가워하겠소?"
"참, 댁에서도 경황없으셨겠습니다."
"경황이 무어요, 그래도 남 아닌 건 어머니밖엔 없습디다! 눈 어두신 어머님이 자꾸 붙들고 밤새 울으셨지요. 참 내가 불초자요……."
하고 그의 눈엔 눈물이 다시 핑그르 돌았다.
"그래 어떻게 일어나셨습니까?"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하루는 어느 친구가 어디서 들었는지 알고 인력거를 보냈습디다그려. 그땐 그만 자격지심에 그까짓 그냥 죽어 버리고 말려고 하는데 집안 사람들이 기어이 끌어내서 병원으로 가지 않었겠소. 그러나 병원에선 보더니 한다는 소리가 때가 늦었으니 가만히 나가 있다가 죽는 것이 고생은 덜 한다고 그리는구려. 그러니 꼴만 점점 더 사납게 되지 않었소? 그래 죽더래도 칭원을 안 할 테니 수술을 하라고 했지요. 뭐 내가 살구파서 수술을 하라고 한 건 아니오. 경칠 놈의 세상 사람을 너무 조롱을 하는 것 같더라니 악이 받혀 대들은 셈이지요, 허! 그래서 이렇게 다시 살아났구려. 그때 죽었으면 편했을 걸 다시 이렇게 욕인 줄 모르고 살아 다니는구려!"
"참, 머리에 험집이 크게 나셨군요."
"고생한 데다 대면 험집이야 아주 없는 셈이죠."
"아무튼 불행 중 다행이십니다."
"욕이죠. 이렇게 살아나서 이선생을 또 만나는 건 반가워도 이렇게 신세지는 게 다 욕이 아뇨?"
"원, 별말씀을……."
음식이 올라왔다. 나는 배갈병을 들어 그의 잔에 가득히 부었다.
"드십시오."
"네…… 그런데 요즘 일중 문제가 꽤 주의를 끌지요?"
한다.
"글쎄요, 저는 그런 방면엔 문외한이올시다."
하니,
"그럴 리가 있소. 저렇게 발발한 청년 시기에…… 요즘 극동 풍운이 맹랑해지거든……."
하는 데는, 불우선생은 돌연히 지난 여름 의신여관에서 보던 때와 같은 형형(炯炯)한 정열의 안광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나의 음식을 먹으면서도 나를 자기가 먹이는 듯 무엇인지 나를 압박하는 것이 있었다.
청요릿집을 나와서,
"송선생, 어디로 가시렵니까?"
하니,
"허! 아무 데루나 가지요. 어서 먼저 가슈."
하고는 물끄러미 서서 때묻은 두루마기 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내가 전찻길로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출전:삼천리25(1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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