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北間島) / 요점정리 / 안수길
by 송화은율작자소개
안수길(安壽吉: 1911-1977)
호 남석(南石). 함남 함흥(咸興) 출생. 1922년 간도(間島)로 이주하여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하였다. 함흥고보 2학년 때 맹휴를 주동하여 자퇴, 상경하여 경신학교(儆新學校)에 편입했으나, 광주학생사건의 여파로 일어난 학생운동에 앞장섰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또다시 퇴학당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1년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에 입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1935년에 단편 《적십자병원장(赤十字病院長)》이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당선되면서 작가활동을 시작, 1936년에 간도일보(間島日報)에 입사하여 그 후 광복 때까지 간도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40년에 중편 《벼》, 단편 《4호실》 《새벽》 등 재만(在滿) 한국인의 생활상을 그린 작품들을 발표하고, 1944년에 장편 《북향보(北鄕譜)》를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연재한 후 광복을 맞았다. 흥남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다가, 공산학정을 피하여 1948년에 월남, 그 후 교직에 종사하면서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1949년에 단편 《여수(旅愁)》 《풍속》 등을 잇달아 발표했고, 1953년에는 《제3인간형(第三人間型)》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 후 계속 《도청도설(塗聽塗說)》 《배신》 등의 단편을 발표하다가 1959년에 거작(巨作) 《북간도(北間島)》를 《사상계(思想界)》지에 발표하기 시작, 1967년에 완성했다. 이한복 일가의 4대에 걸친 가족사를 통해 민족의 수난과 항일 투쟁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5부작은 민족문학의 큰 수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야후 백과 사전>
요점정리
갈래 : 장편소설, 대하소설
배경 : 1870년 조선 말기부터 광복까지의 만주 북간도
시점 : 3인칭 전지적 시점
경향 : 사실주의
문체 : 함경도 방언 사용
제재 : 4대(代)에 걸친 이민 수난사
주제 : 땅에 대한 농민(간도 유민)들의 애착과 강렬한 민족 의식, 자주 정신
인물 : 이한복(1대) - 자주 정신이 강하며,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당을 차려
손자를 가르친다. 민족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
간도 이주 1세대.
장손(2대) - 청국인 지주(地主) 송덕비 제막에 협조하지 않는다.
창윤(3대) - 송덕비 비각을 불사르고 용정으로 가 사포대에 가입하고
사포대를 조직.
정수(4대) - 4대 중 공부를 가장 많이 했고 독립군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최칠성 - 현실주의자.
장치덕 - 현실주의자도 아니고 이상주의자도 아닌, 중간적 인격자.
이해와 감상
1959년부터 1967년까지 <사상계>에 연재된 5부작의 장편 대하(大河)소설. 1870년 조선 말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만주 북간도로 이주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그린 작품으로, 4대에 걸친 북간도 이주민의 가족사를 통해 조선 농민의 수난과 끈질긴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어느 개인의 운명을 다루었다기보다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다룬 서사시적(敍事詩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1870년경부터 1945년 8·15 광복까지 이한복 일가 4대가 겪는 수난과 민족 자주권 쟁취를 위한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을 그린 대하 소설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광복될 때까지 우리의 역사를 배경으로, 간도를 개척하고 삶의 근거지를 마련했던 이주민들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정부를 가지지 못한 탓에 망국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통한이 처절하게 서술된다. 농토를 두고 청나라 사람들과 계속 갈등을 겪어야 했고, 일본의 세력이 간도까지 미치면서 다시 새롭게 일본과의 갈등과 충돌을 겪어야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족의 얼'을 지켜 나가기 위하여 고심 참담하는 모습이 리얼하게 전개된다. 시대적인 특수성과 백두산 정계비가 있는 간도라는 지역적 특수성, 그리고 민족사의 문제가 망국인의 문제와 결부되어 제기되고 있다.
이 소설에는 역사의 격변기에 대응하는 우리 민족의 세 가지 인물 유형이 제시되어 있다. 이한복·장치덕·최칠성, 이 세 사람은 변경 지방에서 살다가 간도에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든다. 그들은 간도가 우리 땅이라는 전래(傳來)의 이야기를 믿고 일을 착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그 땅이 자기네 땅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귀화할 것을 종용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지 소유권을 인정할 수 없고 청나라 법률에 따르지 않는 한 추방하겠다고 압력을 가한다. 이때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이주민의 전통적 가치관으로 볼 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청나라에서 변발 흑복(抪髮黑服)을 강요했을 때 최칠성은 이에 응했고, 장치덕은 머리만 깎아 버렸으나 이한복은 이에 철저히 항거한다. 최칠성은 배신형, 장치덕은 적응형, 이한복은 저항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인물의 가세나 태도는 그의 후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들의 행동 양식에서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온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다.
줄거리
월강(越江)이 금지되어 있는 두만강 건너편 비옥한 토지를 개간하여 이한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북간도에서 농사를 짓는다. 어느 날 밤, 몰래 감자를 가져온 그는 아들 장손(2대) 때문에 관가에 잡혀가서 신관 사또에게 당당히 북간도의 현실을 말하다가 곤장 10대를 맞고 풀려 난다.
한편, 사또는 이한복을 다시 불러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확인하기에 이르고, 이후로 정부의 협조로 북간도의 이주가 시작된다. 이런 사실을 안 청국에서는 조선 사람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 그러나 이한복을 중심으로 한 비봉촌 사람들은 끝까지 항거한다.
어느 날, 창윤(3대)이 청국인(淸國人) 지주의 밭에서 감자를 캐다가 잡혀 머리를 깎인 채 청국인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다. 이한복은 손자의 억지 변발(抪髮)을 가위로 자르다가 분함에 쓰러져 죽고 만다.
비봉촌에서 차츰 청국인 지주 동복산의 주구(走狗)로 변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그날 밤 송덕비 비각이 불타고, 창윤은 용정으로 도망가서 사포대(私砲隊)데 지원한다. 얼마 후,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살았으나, 자식 정수(4대)의 교육과 지주의 잦은 압력으로 용정으로 이사한다. 정수는 신명(新明)학교에 다니면서 좋은 성적을 내고 창윤은 기와 굽는 일이 잘 되어 가는데 1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정수는 자신에게 항일 의식을 길러주던 교사 주인태와 같이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고 만세를 부르짖는다. 김좌진 장군 휘하에 있는 정수는 일본군과 교전(交戰)도 하였으나 주위의 설득과 애인 영애의 권유로 자수, 형(刑)을 살고 나온다. 옥에서 나온 정수는 우여곡절 끝에 직장을 가지나 다시 잡혀 옥에 갇힌다.
1945년 8월 15일, 정수는 영애의 마중을 받으면서 감옥에서 나온다.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