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봄 / 홉킨즈(Hopkins, Gerard Manely)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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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홉킨즈(Hopkins, Gerard Manely)

 

봄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어라.

이름 없는 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릇파릇 아름답게 자라고

티티새의 알은 낮은 하늘과 같아 티티새 자신은

메아리치는 숲을 노래로 울리며 귓전을 때려

그 소리를 들으면 벼락을 맞은 듯하고,

윤기 도는 배나무 잎사귀와 꽃잎은

하늘을 닦아 내어 푸르름이 다가오는 풍요로움.

뒤도는 어린양들은 깡충거리나니

이 생기 넘치는 활력과 기쁨은 무엇이던가.

에덴 동산에서 비롯된 대지의 감미로운 흐름이니

그것을 차지하여라 소유하거라, 그것이 죄 때문에

싫어지고 흐려지고 더러워지기 전에, 주 그리스도여,

소년 소녀가 지닌 티 없는 마음과 오월의 날을

동정녀의 아들이여, 당신 선택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값어치있는 것을 가지게 하라.


요점 정리

작자 : 홉킨즈(Hopkins, Gerard Manely)

이해와 감상

홉킨즈는 종교 시인으로 유명하다. 여기 수록한 '봄'은 홉킨즈의 30편 가량 되는 소네트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주위의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의 구현을 보고 그것을 찬미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시의 특징은 대상의 핵심을 투시하는 투철하고 정확한 파악이며, 카톨릭신부로서의 깊은 신앙심인데, '봄'에서도 역시 그러한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심화 자료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44. 7. 28 잉글랜드 에식스 스트랫퍼드~1889. 6. 8 더블린. 영국의 시인, 예수회 신부로 빅토리아 시대의 독창적인 문인이다. 그의 선시집은 1918년에 출판되었는데 이 시집은 많은 20세기의 주요시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홉킨스는 영국국교도인 맨리 홉킨스의 9명의 자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하와이 주재 영국 총영사를 지냈고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홉킨스는 하이게이트 그래머 스쿨에 다닐 때 시를 잘 써 시경연대회에서 장원에 입상하기도 했고 1863년에는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대학교의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고전을 공부하면서 시작(詩作)을 계속했다.

영국 교회와 로마 가톨릭교 사이의 관계 정립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표출된 옥스퍼드 운동이 한창이던 1866년 홉킨스는 존 헨리 뉴먼 추기경에 의해 로마 가톨릭교에 입문했다. 이듬해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베일리얼의 교수이며 후일 이 대학의 학장이 된 벤저민 조웻은 그를 '베일리얼의 별'이라고 불렀다. 대학 졸업 후 홉킨스는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1868년 예수회 수도원에 들어갔고 '신부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시 따위는 다시 쓰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그때까지 써온 시들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1875년까지 일기를 계속 썼는데 여기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민감한 반응과 나름대로의 철학관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뒤에 자신의 철학이 중세의 프란체스코 수사인 던스 스코투스와 같다는 것을 알고 대단히 기뻐했다. 홉킨스의 철학은 모든 자연물이 갖고 있는 개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 개성을 '인스케이프'(내면의 풍경)이라고 불렀다. 홉킨스는 또한 모든 감각적인 인상에는 잘 파악되지 않는 '자기'(自己)가 있으며 모든 풍경은 저마다 독특한 의미를 갖는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1874년 홉킨스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노스웨일스에 있는 세인트뷰노 칼리지로 갔다. 그곳에서 웨일스 말을 배웠고 웨일스 시와 선배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875년 해상에서 배가 난파되어 5명의 프란체스코 수녀들이 죽은 사건에 마음이 움직여 그는 7년간의 침묵을 깨고 장시 〈도이칠란트의 난파 The Wreck of Deutschland〉를 썼다.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의 귓바퀴에서 오랫동안 맴돌던 '새로운 리듬의 울림'을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예수회 월간 잡지인 〈먼스 The Month〉는 이 시의 게재를 거부했다. 그는 또한 〈황조롱이 The Windhover〉 같은 걸작을 포함한 여러 편의 소네트를 썼다. 독특한 언어구사, 풍성한 리듬 의식 등으로 이 시는 영어권 시들 중에서 널리 분석되는 명편이다. 그는 시를 계속해서 썼으나 친구들에게 낭송하여 들려주었을 뿐 출판하지 않았다. 이들 친구 중에는 나중에 계관시인이 된 로버트 브리지스, 코번트리 팻모어, 리처드 웟슨 딕슨 목사 같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너무 선구적인 홉킨스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계속해서 그를 지원했다.

1877년 사제서품을 받은 홉킨스는 런던·옥스퍼드·리버풀·글래스고 등지의 예수회 교회에서 근무했고 랭커셔의 스토니허스트 칼리지에서 고전을 가르치기도 했다. 1884년에는 더블린에 있는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그리스 문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홉킨스는 더블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곳의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과로에다 늘 건강이 좋지 못했다. 1885년부터 그는 〈캐리언의 위안 Carrion Comfort〉으로 시작되는 또다른 시리즈의 소네트를 썼다. 이 시에는 정신적 고갈감과 예술적 좌절감이 빚어낸 적막감이 감돌고 있다. 이 시들은 '형편 없는 소네트'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감각적 세계에 대한 환희와 그 환희를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 사이의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지고 또 신부직에 대한 숭고한 사명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더블린에 있을 때 홉킨스는 또다른 재능을 발휘해 작곡을 시작했다. 그의 음악은 시만큼이나 독창적이다. 그는 또한 그림에도 능해 일기에다 꽃·나무·파도 등의 스케치를 빽빽하게 했다. 비록 친구들이 계속 시집을 펴내라고 권유했지만 홉킨스는 번번이 거절했다. 그가 생전에 발표한 것이라고는 몇 편의 미숙한 시편과 라틴어 시뿐이었다. 홉킨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죽었고 더블린의 글래스베닌 묘지에 묻혔다. 그의 미완성 유고로는 예수회 교단의 창설자인 성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쓴 〈영성수련 Spiritual Exercises〉에 대한 주석이 있다. 그가 죽은 뒤 로버트 브리지스는 그의 시를 보다 널리 알리려는 희망을 가지고 가장 잘 된 시 여러 편을 추려 시선집의 발간을 추진했다. 1918년 당시 계관시인이던 로버트 브리지스는 이제 홉킨스의 시를 소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홉킨스의 시집은 처음에는 잘 나가지 않았으나 1930년 제2판이 발간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문학적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그의 시는 T. S.엘리엇, 딜런 토머스, W. H. 오든, 스티븐 스펜더, C. D. 루이스 같은 20세기의 대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홉킨스는 보다 강력한 '운문의 수사학'을 추구했다. 미묘한 어구의 적절한 선택, 영어의 음악성에 대한 놀라운 감각, 시적 울림의 적절한 사용, 두운과 반복의 절묘한 연결, 고도로 농축된 시문 등을 이용하여 신의 신비·장엄·자비 등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노래했고 '낯설고, 독창적이고, 보기드물고, 이상한 것들'이 주는 기쁨을 표현했다. 그는 '돌발 리듬'이라는 독특한 운율을 이용하여 남성적인 힘, 유연함, 강렬함, 떨림, 치밀한 구성 등을 이끌어냈고 그렇게 하여 관찰력, 상상력, 깊은 정서, 지적 감응을 절묘하게 조직했다(돌발 리듬은 시행[詩行]의 강세음절의 수를 바탕으로 비강세음절의 수를 자유롭게 허용하는 비규칙적인 운율체계임). 홉킨스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가 뛰어난 비평적 감식안과 준열한 자기비판, 관대함 마음씨, 그리고 강력한 의지를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친구들도 그의 성실성과 '순결한 마음'에 대하여 입을 모아 칭찬했다. 친구였던 코번트리 팻모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그를 닮으려고 했던 우리들 모두에게 매력적인 것이었고 동시에 비난이기도 했다." J. C. Reid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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