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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열전(伯夷列傳) / 사마천(司馬遷)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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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열전(伯夷列傳) / 사마천(司馬遷)

(전략)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백이·숙제는 고죽국(孤竹國) 군주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는 아우인 숙제를 후사(後嗣)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아버지가 죽게 되자 숙제는 형 백이에게 양위(讓位)하려고 했다. 그러자 백이는,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아버님의 명이다."

하고 끝내 국외로 도망가 버렸다. 숙제도 또한 제위에 오르기를 즐겨하지 않아 도망해 버렸으므로 고죽국 사람들은 중자(中子)를 군주로 세웠다.

 

그 후 백이·숙제는 서백 창(西伯昌)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말을 듣고 거기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서백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부왕(父王)의 목주(木主)를 받들어 문왕(文王)이라 칭하고 동쪽은 은(殷)의 주왕(紂王)을 치려 하고 있었다.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간하였다.

 

"부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하려고 하니 이 어찌 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의 몸으로 군주를 시살(弑殺)하려고 하시는데, 이 어찌 인(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무왕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이 두 사람을 베려고 하였으나 태공망(太空望)이,

"이 이야말로 의인(義人)이다."

하고 부축하여 데려 가게 하였다.

무왕이 은의 난을 평정하니 천하의 사람들은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러나 백이·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周)의 녹봉을 먹으려 하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끝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었다.

오늘도 저 서산(西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 무왕

신농(神農)·순(舜)·우(禹)의 호시절은

홀연히 사라졌구나.

이제 우린 어디로 가야 하나,

아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이렇게 해서 끝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것으로 보아 과연 두 사람의 마음가운데에는 원한이 없었을까?

 

어떤 사람은 말했다.

"천도(天道)는 공평 무사하여 언제나 착한 사람의 편을 든다."

하지만 백이·숙제와 같은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인가.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쌓고 청렴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또한 공자의 고제 칠십인(高弟 七十人) 가운데 중니(仲尼)는 오직 안연(顔淵)만을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추상(推賞)했다. 그러나 회(回)는 가끔 쌀뒤주가 비어 있었으며, 지게미나 쌀겨도 배불리 먹지 못하다가 끝내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된 셈일까?

 

한편 도척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간(肝)을 회치는 등, 포악 방자하여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으나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다. 이것은 그가 어떤 덕행을 쌓았단 말인가?

 

이러한 것은 가장 현저한 예라 하겠지만 근세에 이르러서도 소행(素行)이 도(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고도 종신(終身)토록 일락(逸樂)하여, 부귀가 자손 대대로 끊이지 않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정당한 땅을 골라서 딛고 정당한 발언을 해야 할 때만 말을 하며, 항상 큰 길을 걸으며 공명 정대한 이유가 없으면 발분(發憤)하지 않고, 시종 근직(謹直)하게 행동하면서도 오히려 재화를 당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서 나는 매우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천도라는 것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고.

 

공자는 이에 답하여 말한다.

"도를 같이하지 않는 사람끼리는 서로 상의하지 않는다."라고.

이것은 곧 각각 자기 의사(意思)에 따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또 이런 말도 했다.

"부귀라는 것이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마부와 같은 천한 직업이라 할지라도 나는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해도 얻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도를 행하고 덕을 쌓겠다."

 

또한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차가운 계절이 되어서야 소나무·잣나무가 푸르러 조락(凋落)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세상이 모두 혼란 오탁(汚濁)할 때라야 청렴한 선비가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곧 세속 사람이 부귀를 그렇게 중하게 여기는데 청렴한 선비는 그 부귀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 아닐까?

 

공자의 말과 같이 '군자는 세상을 마친 후에도 이름이 칭송되지 못함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다.

한(漢)의 가자(賈子)는 '탐욕한 사람은 재물에 목숨을 걸고 의열(義烈)한 사람은 명예에 목숨을 걸고 권세욕이 강한 사람은 그것에 끌려 죽고 범용한 일반 사람은 그저 생명을 탐하고 아낄 뿐이다.'라고 했다. '같은 종류의 광명은 서로 비쳐주고, 같은 종류의 만물은 서로 구하고, 구름은 용을 따라 용솟음치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라 일어난다. 성인이 나타나 만물이 이를 우러러보는 것처럼' 백이·숙제가 현인이기는 하지만 공자의 칭송을 얻음으로써 그 이름이 더욱더 드러났고, 안연은 독실한 선비이지만 공자의 덕으로 그 덕행이 더욱더 드러났다. 이와 같이 암굴(暗窟)에 숨어 사는 덕이 높은 선비가 그 진퇴에 시운이 맞았다 하더라도, 그 이름이 묻혀 칭송되지 못하는 수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촌리(村里)에 살면서 행실을 닦고 이름을 떨치고자 하더라도 공자와 같은 성현의 덕으로 칭송되지 않는다면, 어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겠는가? <사기 열전>

요점 정리

작자 : 사마천(司馬遷)/ 홍석보 옮김

갈래 : 열전

성격 : 교훈적, 서사적

주제 : 백이·숙제의 정의로운 삶의 자세

줄거리 :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 군주의 두 아들이다. 둘은 왕위에 오르기를 원치 않았고 주문왕이 노인을 따뜻하게 모신다는 말을 듣고 그에 귀속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이르고 보니 주문왕은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동쪽 은의 주왕을 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이·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들고 이의 부당함을 간했으나 무왕은 이를 듣지 않는다. 백이와 숙제는 이를 부끄럽게 여겨 몸을 숨기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 마침내 굶어 죽는다.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중국 주(周)나라의 전설적인 형제성인(兄弟聖人). 백(伯)과 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본래는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河北省 昌黎縣 부근)의 왕자이었는데, 아버지가 죽은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다. 그 무렵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왕조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仁義)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서우양산[首陽山]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로 크게 높였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백이·숙제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사마천의 서술로 구성되어 있다. 백이, 숙제가 정의로운 삶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극악무도한 도척과 같은 인물은 천수를 다하는 세상의 모순 속에서 선악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고자 했던 사마천의 역사 철학이 담겨져 있다.

이해와 감상1

 

서양에서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동양에서는 사마천을 역사의 비조(鼻祖)로 부른다. 사마천은 궁형(宮刑)이라는 비참한 형벌을 당했으면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고, 올바른 역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마침내 '사기'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았다.

 

'사기'의 구성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열전'은 문호·학자·정치가·군인·자객·유협(遊俠)·해학가·관리·실업가 등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의 일생의 일을 기록한 전기이다. '열전'은 그 분량면에서도 방대할 뿐만 아니라 인물의 성격이나 활약상을 유려한 문체로 흥미진진하게 그려 주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실린 백이·열전은 백이·숙제의 정의로운 삶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역사 철학적 관점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기도 한다. 폭력으로서 폭력을 치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니냐는 백이·숙제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무왕이 듣지 않았기 때문에 백이·숙제는 마침내 비극적으로 최후를 마쳤다. 뿐만 아니라 도척과 같은 극악 무도한 인물은 간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천수를 다 했다. 바로 이 점에서 사마천은 천도(天道)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회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고뇌 끝에 사마천은 모순에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선악 정사(善惡正邪)를 바로 드러내어 후세 사람들의 감계(鑑戒)로 삼는 것이 바로 역사가의 할 일임을 깨닫고 마침내 역사 집필의 붓을 들었던 것이다.

이해와 감상2

 

백(伯)과 숙(叔)은 형제의 서열을 나타낸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하면 고죽군(孤竹君:고죽은 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루룽 현[盧龍縣])의 아들이라고 한다. 고죽군은 막내아들인 숙제에게 나라를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가 죽은 뒤 숙제는 이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여 맏형인 백이에게 양보했지만 백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나라를 떠나 서백(西伯) 문왕(文王)의 명성을 듣고 주나라로 갔다. 그곳에서는 이미 문왕이 죽고 아들인 무왕(武王)이 문왕의 위패(位牌)를 수레에 싣고 은의 주왕(紂王)을 정벌하러 가려는 참이었다. 두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병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효이며 신하로서 군주를 치는 것은 불인(不仁)이다"라고 하며 말렸지만 무왕은 듣지 않고 출정해 은을 멸망시키고 주의 지배를 확립했다. 두 사람은 주의 녹(祿)을 받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지금의 산시 성[山西省] 융지 현[永濟縣])에 숨어살며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 굶어죽었다.

심화 자료

백이·숙제(伯夷·叔齊)

 

중국 은(殷)·주(周)나라 교체기인 BC 1100년 무렵의 전설적 성인(聖人) 형제. 백(伯)·숙(叔)은 장유(長幼)를 나타낸다. 《사기(史記)》 <백이열전>에 의하면, 은나라 때의 고죽국(孤竹國)의 국군(國君) 아들로서, 아버지가 죽은 뒤 왕위를 사양하고, 함께 나라를 도망쳐 주나라의 서백창(西伯昌;文王)의 덕을 사모하여 주나라로 갔다. 그러나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아버지 문왕이 죽은 뒤, 즉시 은나라 주왕(紂王)을 친 것을 불효·불인(不仁)이라 하여 주나라의 조[粟]를 먹는 것을 거부하고, 수양산(首陽山)에 은거하여 고사리를 음식으로 삼았으나 결국 굶어서 죽었다고 한다. 김연수(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도척 (?∼?)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대도적(大盜賊). 도척(盜蹠)이라고도 쓴다. 노(魯)나라의 현인(賢人) 유하혜(柳下惠)의 동생이었다는 설(說)에 따르면 춘추시대의 사람이지만, 실재인물이었는지의 여부는 분명치 않다. 성격이 포악하여 날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으며 사람의 간을 생으로 먹고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수천의 부하를 모아 천하를 횡행하고 여러 나라를 뒤흔들어 놓았다고 전한다. '장자(莊子)'의 <도척편>에 공자와 도척이 가공적으로 문답하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몹시 악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사기(史記)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의 저서. 상고의 황제(黃帝)로부터 전한의 무제(武帝)까지 2천 수백 년에 걸친 통사이며, 역대왕조 편년사인 본기 12권, 연표 10권, 부문별 문화사 8권, 열국사인 세가(世家) 30권과 개인전기집인 열전 7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친 사마담(司馬談)의 유언을 받아 BC 104년 전후부터 편찬에 착수했다. 중도에 이릉(李陵)의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宮刑)을 받았지만 그 굴욕을 극복하며 집필을 계속해 BC 91년 무렵 초고를 완성했다. 그때까지 중국에는 유교의 경전으로 중시한 《상서(尙書)》 《춘추》 《시전》 《주역》 《예기(禮記)》 및 춘추에서 전국시대에 걸친 사상가의 저작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있었다. 어느 것이나 전문학자들이 전승하고 해설해 왔으나 고대에서 한나라까지의 통일된 역사서는 없었다. 사마천은 서로 대립하는 학자적 입장을 떠나 고래의 전적(典籍)을 충분히 이용해 첨가하고, 궁정에 보관된 남은 풍부한 사료와 넓은 견문을 바탕으로 본기·표·서·세가·열전 등 독특한 형식으로 종합적인 기술을 하는데 성공했다. 사마천은 중국 최초의 역사학자이고 또한 대표적인 중국역사가이다. 특히 그가 창시한 본기·열전 등과 같이 성질이 서로 다른 역사기술방법을 병용한 종합사형식을 기전체(紀傳體)라 한다. 이는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에 이어 이후 왕조의 관선정사(官選正史)의 표준이 되었다.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의해 완성된 편년체와 함께 기전체는 중국 역사기술의 기본 형식이다. 김희진 (출처 :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사기열전

1. 백이열전

2. 관·안 열전

3. 노자·한비 열전

4. 사마·양저 열전

5. 손자·오기 열전

6. 오자서 열전

7. 증니제자 열전

8. 상군 열전

9. 소진 열전

10. 장의 열전

11. 저리자·감무 열전

12. 양후 열전

13. 백기·왕전 열전

14. 맹자·순경 열전

15. 맹상군 열전

16. 평원군·우경 열전

17. 위공자 열전

18. 춘신군 열전

19. 범수·채택 열전

20. 악의 열전

21. 염파·인상여 열전

22. 전단 열전

23. 노중련·추양 열전

24. 굴원·가생 열전

25. 여불위 열전

26. 자객 열전

27. 이사 열전

28. 몽염 열전

29. 장이·진여 열전

30.위표·팽월 열전

31.경포 열전

32.회음후 열전

33. 한신·노관 열전

34. 전담 열전

35. 번·역·등·관 열전

36. 장승상 열전

37. 역생·육고 열전

38. 부·근·괴성 열전

39. 유경·숙손통 열전

40. 계포·난포 열전

41. 원앙·조조 열전

42. 장석지·풍당 열전

43. 만석·장숙 열전

44. 전숙 열전

45. 편작·창공 열전

46. 오왕비 열전

47. 위기·무안후 열전

48. 한장유 열전

49. 이장군 열전

50. 흉노 열전

51. 위장군·표기 열전

52. 평진후·주보 열전

53. 남월 열전

54. 동월 열전

55. 조선 열전

56. 서남이 열전

57. 사마상여 열전

58. 회남·형산 열전

59. 순리 열전

60. 급·정 열전

61. 유림 열전

62. 혹리 열전

63. 대원 열전

64. 유협 열전

65. 영행 열전

66. 골계 열전

67. 일자 열전

68. 귀책 열전

69. 화식 열전

70. 태사공 자서

사마천(司馬遷)(병)Sima Qian (웨)Ssuma Ch'ien.

BC 145경 중국 룽먼[龍門]~BC 85경.

중국의 천문관, 역관(曆官),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사기 史記〉의 저자이다.

생애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의 구성과 내용

〈사기〉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 〈춘추 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기록된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유교 경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반고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유교적 도덕기준은 사마천의 시기에는 반고의 시대(1세기경)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학파를 절충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국교(國敎) 혹은 널리 통용되는 도덕적·정치적 기준이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주술적·초자연적인 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린 도덕적 평가는 어느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부합될 수 없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그가 서술한 과거의 사실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대기를 따로 가지고 있던 많은 독립적인 제후국에서 유래하는, 서로 모순되는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5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5부분 가운데 본기(本紀)는 당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표(表)는 연표(年表)인데 여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어떤 시기에 각 제후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각 제후국의 상세한 역사는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들 부분으로부터 그가 유교의 도덕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시 점점 중앙집권화되고 있던 조정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던 실제적·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끝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는 뒷날 기타 왕조사(正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훨씬 긴데,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책에서처럼 인류의 전역사를 다루려는 시도를 한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훨씬 다양했다. 그는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이 책의 주제는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어 대부호·상인·협객·비적떼·배우·총신(寵臣)과 훌륭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관리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 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영향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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