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소설(白雲小說)
by 송화은율백운소설(白雲小說)
시에는 좋지 못한 아홉 가지 체(體)가 있는데, 내가 깊이 생각한 끝에 터득한 것이다.
한 편의 작품 속에 옛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인용하는 것은 '귀신을 수레에 하나 가득 실은 체(體)'다. 옛 사람들의 뜻과 심정을 인용할 때에 쓰는 것도 나쁜데, 훔쳐 쓴 것도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은 '어설픈 도둑이 쉽사리 잡히는 체(體)'다.
근거 없이 어려운 일을 글로 다루는 것은 '센 활을 당기지 못하는 체(體)'다.
자기 재주를 측량해 보지도 않고 압운(押韻)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은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체(體)'다.
좀처럼 뜻을 알기 어려운 힘든 글자를 써서 사람을 곧잘 미혹시키기 좋아하는 것은 '함정을 만들어 장님을 이끄는 체(體)'다.
말이 순조롭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하는 것은 '자기를 따르도록 남을 무리하게 이끄는 체(體)'다. 상스러운 말을 쓰는 것은 '품격 없는 사람이 모여드는 체(體)'다.
공자, 맹자를 함부로 쓰기 좋아하는 것은 '존귀한 분을 범하는 체(體)'다. 말을 구사함에 있어 거친 데를 삭제해 버리지 않은 것은 '밭에 잡초가 우거진 체(體)'다.
이러한 좋지 못한 체들을 면한 다음에라야 함께 시를 논할 만하다.
시는 뜻의 경지가 주가 되므로 이 뜻의 경지를 잡는 것이 가장 힘들고 그 다음에는 말을 맞추는 것이다. 또 뜻의 경지는 재주 있는 기운이 주가 되는데, 재주의 우열에 따라 뜻이 깊고 얕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재주란 타고난 것이어서 배워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재주가 없는 사람은 글 다듬는 것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뜻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개 글을 깎고 다듬어 구절을 아름답게 하면 분명히 아름답게 되기는 하나 거기에 깊은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볼 만하나, 음미해 보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중략>
남이 자기의 시를 보고 결점을 말해 줄 때 기쁜 것이나 문제될 만한 것이면 받아들이고, 그렇잖으면 자기 마음의 원래대로 행할 것이다.
굳이 임금이 충신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 끝내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같이 남의 충고의 소리를 듣기 싫어 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대개 시가 되면 반복하여 보되, 자기 시가 아니라 다른 사람 및 평생에 몹시 미워하는 사람의 시를 보고 결점을 잘 찾아 내듯이 하고 결점이 하나도 없도록 해서 비로소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동국이상국집)
요점 정리
연대 : 고려시대
작자 : 이규보[1168~1241]
형식 : 문학비평, 원리비평(이론비평)
성격 : 풍자적, 비유적
주제 : 한시를 짓는 데 피해야 할 체격과 시정신
출전 :<동국이상국집>
내용 연구
터득 : 스스로 연구하거나 생각하여 이치를 깨달아 알아냄
체 ; 문장, 글씨, 그림 등에서 나타나는 방식이나 격식
압운 : 시를 지을 때 일정한 곳에 운율을 붙임
미혹 : 무엇에 홀려서 제 정신을 못차림.
구사함 : 자유자재로 다루어 사용함
능사 : 자기에게 가장 알맞아 잘 해낼 수 있는 일
간하다 :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아뢰는 것
옛 사람들의 ~ '귀신을 수레에 하나 가득 실은 체'다 : 자신에게 스스로 우러나와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공연히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나 들먹이는 것은 주체성과 창조성이 결여된 태도임을 지적한 말이다.
옛 사람들의 뜻과 심정을 ~ '어설픈 도둑이 쉽사리 잡히는 체'다 : 옛 글을 근거도 밝히지 않고, 표절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도둑과 같다. 더구나 표절이나 모방한 원뜻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하면서, 인용하는 것은 섣부른 도둑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남의 글을 응용하려면 원전의 근거를 대고 충분히 소화한 후에 응용해야 한다.
근거 없이 어려운 일을 글로 다루는 것은 '센 활을 당기지 못하는 체'다 : 시에는 운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무리한 운을 억지로 써서 대단해 보이려고 하는 것은 무리하게 능력 밖의 글을 쓰는 격이다. 따라서 자기가 응용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글을 쓰자.
자기 재주를 측량해 보지도 않고 ~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체'다 : 압운을 지나치게 써서 기교를 부리면 알맹이가 없는 글이 된다. 자기 재주를 과신해서 기교를 많이 부리는 것은, 술을 지나치게 마셔 정신을 못 차리듯, 의미 없이 미사여구(美辭麗句)만 나열한 경우다.
좀처럼 뜻을 알기 어려운 ~ '함정을 만들어 장님을 이끄는 체'다 : 사람들이 잘 쓰지 않는 어렵고 괴
팍한 글자를 써서, 다른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것은 함정을 파 놓고 사람을 빠지게 하는 것과 같다.
말이 순조롭지 않은데~ '자기를 따르도록 남을 무리하게 이끄는 체'다 : 자기 실력만으로는 안 되니까 본문보다 인용을 무리하게 하여, 본문과 인용문이 서로 화합하여 어울리지 못하고 각각 분리되는 현상이다. 잘 맞지도 않는 경우를 가득히 인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상스러운 말을 쓰는 것은 '품격 없는 사람이 모여드는 체'다 : 문장이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므로, 작가는 책을 통하여 자신의 고결한 인격을 독자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데, 품위 없는 상말로써 작가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독자의 수준도 떨어지게 저술한 것은 옳지 못한 문체이다.
공자, 맹자를 함부로 쓰기 ~ '존귀한 분을 범하는 체'다 : 대수롭지 않은 글을 쓰면서 상투적으로 성현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은, 귀한 분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격이니 함부로 인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말을 구사함에 ~'밭에 잡초가 우거진 체'다 : 글을 다 쓴 뒤에 다듬는 퇴고 과정의 중요함을 강조한 말로,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자기 글이 뛰어났다고 자만하는 것과 같다. 잡초와 곡식이 같이 자라고 있을 때, 잡초를 골라내지 않으면 곡식도 잡초가 되는 것처럼, 글은 반드시 다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 논할 만하다 : 결국 이 글은 시를 지으려면 평소에 남의 글을 많이 읽어보고, 많이 지어 보아 독창적인 글을 지어야 함을 지적한 글이다
시는 뜻의 경지가 ~ 맛이 없어져 버린다 : 기교보다 시인의 고고한 시정신을 잘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
굳이 임금이 ~ 할 필요가 있겠는가 :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을 반어법으로 강조
대개 시가 되면 ~ 비로소 세상에 내놓는 것이다 : 자기의 시도 남의 시처럼 냉철한 비판의 눈으로 볼 것을 강조한 말임.
이해와 감상
'백운소설'은 고려 때 이규보가 지은 한문으로 된 시화집으로 시 창작을 둘러싼 일화와 비평이 섞인 짧고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이 글에서는 아홉 가지 마땅하지 못한 시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작자 이규보의 문학관과 당대의 문학적 논의의 수위를 가늠케 해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 설명함에 있어 그 비유가 매우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을 지망하는 이들에게도 암시해 주는 바가 매우 큰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문학 창작은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독창적인 것이 소중한 것은 시대가 바뀌면 경험과 고민이 다르므로 고인을 모방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각성에 밀려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표절하지 말고, 어렵게 쓰려고 애쓰지 말고, 일상어를 잘 활용하라는 등의 가르침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자는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다소, 서투르고 껄끄럽더라도 참신한 표현이 아름답다고 했다.
심화 자료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 : 한시를 짓는 데 피해야 할 아홉 가지 체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만노불승체(挽弩不 勝體)
음주과량체(散酒過量體)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
능범존귀체(凌犯尊貴 體)
낭유만전체( 滿田體)
시(詩)에는 아홉 가지의 마땅하지 못한 체(體)가 있으니, 이건 내가 깊이 생각해서 내 나름으로 체득한 것이다.
한 편의 시 속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1)요,
옛 사람의 뜻을 몰래 가져다 쓰는 것은, 도둑질을 잘 한다고 해도 오히려 도둑질하는 것이 옳지 않은데, 여기다 또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것은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2)요,
강운(强韻)으로 압운(押韻)을 하되 근거(根據)가 없으면, 이것은 만노불승체(挽弩不 勝體)3)요,
재주는 헤아리지 않고 지나치게 압운을 하면, 이것은 음주과량체(散酒過量體)4)요,
험벽(險僻)한 글자를 쓰기 좋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미혹(迷惑)되기 쉽게 하는 것은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5)요,
말이 순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이걸 쓰도록 강요하는 것은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6)요,
일상 용어를 많이 쓰는 것은 촌부회담체(村夫會談體)7)요,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의 이름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능범존귀체(凌犯尊貴 體)9)요,
글이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은 낭유만전체( 滿田體)10)이다. 이 마땅하지 못한 시체(詩體)를 면할 수 있게 된 다음에라야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휘 풀이
1) 귀신을 수레에다 가득 실은 문체
2) 서투른 도둑이 사로잡히기 쉬운 문체
3) 쇠뇌를 당기지만 그 쇠뇌를 이기지 못하는 문체
4)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문체
5) 구덩이를 파 놓고 장님을 이끄는 문체
6) 남을 강요해서 자기를 좇도록 하는 문체
7) 촌사람이 이야기하는 식의 문체
8) 존귀한 이를 함부로 범하는 문체
9) 강아지풀이 밭에 가득한 문체.(밭에 난 강아지풀은 곡식에 해가 됨 )
이규보의 문학관
이규보는 시의 표현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 결과 터득한 것이 이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 문체이다. 그는 시의 창작이 표현은 독창적이면서 생동하고, 평범 속에서 깊은 공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시를 통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명을 감당하면서 겪은 어려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규보가 문학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민족적인 평가와도 연결된다. '백운소설'의 서두를 문학사 같은 체제로 택했다. 맨 먼저 을지무문덕이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시를 들고서, 그처럼 굳센 기상을 나타낸 작품이 후대에는 말이나 다듬느라고 맥이 빠져 다시 나타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겼다. 그 다음 최치원을 다루었는데, 이인로는 최치원이 가야산에 들어가 은거하다 사라졌다는데 관심을 보였지만, 이규보는 최치원이 당나라에 가서 명성을 얻었어도 끝내 그 나라 문인일 수 없음을 지적하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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