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박흥보가 - 신재효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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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보가 - 신재효본

 

우리 나라가 군자의 나라요, 예의의 땅이라. 작은 열읍에도 충신이 있고, 일곱살 어린이도 효제를 일삼으니, 무슨 불량한 사람이 있을까마는, 요임금 때에도 도척이란 큰 도둑이 있었으며, 순임금 세상에도 네 사람의 악인이 있었으니, 아마도 한 가지 나쁜 기운은 어찌 할 수가 있겠는가.

 

충청, 전라, 경상 3도 어름에 사는 박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데, 같은 부모 소생이지만, 성정이 아주 달라 서로 떨어져 관계가 멀었다. 사람마다 오장육부였지만 놀보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술보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병부주머니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려 있어, 심사가 말할 것 없고, 일망무제로 나오는데 똑 이렇게 나오는 것이었다.

본명방에 벌목을 하고, 잠사각에 집짓기며, 오귀방에 이사를 권하고, 삼재든 데 혼인하며, 동내 주산 팔아먹고, 남의 선산에 묘지쓰기, 길 가는 과객 양반 재울 듯이 붙들어다 해가 지면 내쫓고, 일년품팔이 외상 사경(私耕)에 농사지어 추수하면 옷을 벗겨 내쫓고, 초상난 데서 노래하고, 역신든 데서 개를 잡고, 남의 노적에 불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빼기, 불 붙는 데 부채질하기, 야장할 제 웨장하기, 혼인발에 바람 넣고, 시앗 싸움에 덩달아 싸우기, 길 가운데 허방 놓고, 외상 술값에 억지쓰기, 전동다리에 딴죽치고, 소경 의복에 똥 칠하기, 배 앓는 사람에게 살구 주고, 잠든 사람 뜸질하기, 내달리는 사람에게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 놓기, 열리는 호박 덩쿨을 끊고, 패는 곡식은 모가지 뽑기, 술 먹으면 주정부리고 욕설 퍼부으며, 장터에서 억지로 물건 팔기, 좋은 망건은 편자 끊고, 새 갓 보면 땀대 떼기, 가난한 양반 보면 관을 찢고, 걸인 보면 자루 찢기, 상인 잡고 춤추기와 여승 보면 겁탈하기, 새 초분에 불지르고, 소대상의제청 치우기, 애 밴 여자의 배통 차고, 우는 아이에게 똥 먹이기, 먼 길손의 노비 도적, 급주군 잡고 실랑이질, 관차사의 전령 도적, 진영 장병의 막대 뺏기, 지관 보면 패철 뺏고, 의원 보면 침 도적질, 물동이 인 여자에게 입 맞추고, 상여꾼에게 형문치기, 만만한 놈 뺨치기와 고단한 놈 험담하기, 채소밭에 물똥 싸고, 수박밭에 외손질과 소목장인 대패 뺏고, 초라니패 탈짐 도적, 옹기짐에 작대기 차고, 장독간에 돌 던지기, 소매치기 벌금돈과 잔 도적의 끝돈먹기와 다담상에 흙덩이질, 이장할 때 뼈 감추기, 어린 아이 불알을 발라 말총으로 호아매고, 약한 노인 엎어뜨리고 마른 항문 비역하기, 제주 병에 개똥 넣고, 사주병에 비상 넣기, 곡식밭에 우마 몰고, 부형벌 사람과 벗질하기, 귀먹은 이 욕하기와 소리할 때 잔말하기, 날이 새면 행악질, 밤이 들면 도적질을 평생에 일삼으니, 제 어미 붙을 놈이 삼강을 아나, 오륜을 아나. 굳기가 돌덩이요, 욕심이 족제비라. 네 모난 소롯으로 이마를 비비어도 진물 한점 날 리 없고, 대장장이 불집게로 불알을 꽉 집어도 눈도 아니 깜짝이는 사람이었다.

흥보의 마음씨는 저의 형과 아주 달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에게 존경하며, 이웃간에 화목하고, 친구에게 믿음이 있어, 굶어서죽을 사람 먹던 밥을 덜어주고, 얼어서 병든 사람 입었던 옷 벗어주기, 노인이 짊어진 짐 자청하여 져다 주고, 장마 때 큰 물가에 삯 안 받고 건네주기, 남의 집에 불이 나면 세간살이 지켜주고, 길에 보물이 빠졌으면 지켜 섰다 임자 주기, 청산에서 백골을 보면 깊이파고 묻어주며, 수절 과부 보쌈하면 쫓아가서 빼어 놓기, 어진 사람 모함하면 대신 나서서 변명하고, 불쌍한 사람의 횡액을 보면 달려들어 구원하기, 길 잃은 어린 아이는 저의 부모 찾아주고, 주막에 병든 사람 본집에 기별 전하기, 막 깨어난 벌레를 죽이지 않고 자라는 초목을 꺾지 않으며, 남의 일만 하느라고 한 푼 돈도 벌지 못 하니 놀보가 오죽 미워하겠는가.

하루는 놀보가 흥보 불러 하는 말이,

"사람이라 하는 것이 믿는 것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안되는 법이다. 너도 나이 장성하여 계집 자식 있는 놈이 사람 생애 어려운 줄을 조금도 모르고서, 나 하나만 바라보고 놀고 먹고 놀고 입는 모양 보기 싫어 못살겠다. 부모의 세간살이가 아무리 많아도 장손의 차지될 것인데, 하물며 세간은 나 혼자 장만하였으니, 네게는 돌아갈 것이 없다. 네 처자를 데리고서 어서 멀리 떠나거라. 만일 지체하였다가는 살육지환이 날 것이니, 어서 급히 나가거라."

하니 가련한 흥보 신세에 지성으로 비는 말이,

"제발 빕니다. 형님 전에 빕니다. 형제는 일신이라, 한 조각을 베어내면 둘 다 병신 될 것이니, 그 수모를 어찌하리. 동생 신세는고사하고,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뉘 집에 가서 의탁하며, 무엇을 먹여 살리겠어요. 당나라 장공예는 아홉 세대가 함께 살았다 하는데, 아우 하나 있는 것을 나가라 하십니까. 할미새는 짐승이지만 벗 사이의 정이 두텁고, 상체는 한갖 꽃이지만 즐겁게 사귀는 깊은 정을 품었으니 형님 어찌 모르십니까. 오륜의 뜻을 생각하여 십분 통촉하십시오."

놀보가 분이 나서 그런 야단이 없었다.

"아버님 계실적에 나는 생 일만 시키고서 작은 아들 사랑스럽다고 글 공부 시키더니, 너 매우 유식하구나. 당태종은 성주였지만 천하를 다투어서 그 동생을 죽였으며, 조비는 영웅이나 재주를 시기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나같은 초야 농부가 우애지정을 알겠느냐."

하고 구박하여 문 밖으로 쫓아내니, 흥보 신세 가련하다. 입도 뻥끗 못 하고서 빈 손으로 쫓겨나니 광대한 이 천지에 집없는 손이 되었구나.

불쌍한 흥보댁이 부자집 며느리로 먼 길 걸어보았겠나. 어린 자식 업고 안고 울며 불며 따라갈 때, 아무리 시장하나 밥 줄 사람 어디 있으며, 밤이 점점 깊어간들 잠잘 집이 어디 있나. 저물도록 빡빡 굶고 풀밭에서 자고 나니 죽을 밖에 수가 없어 염치가 차차 없어 갔다. 이곳 저곳 빌어먹어 한두 달 지내가니 발바닥이 딴딴하여 부르트는 일이 아예 없고, 낯가죽이 두터워서 부끄러움이 하나도 없어졌다. 1년 2년 넘어가니 빌어먹는 수가 터져서 흥보는 읍내 나가면 객사에나 사정에나 자리를 떡 버티고, 외촌을 갈 양이면 물방아집이든지 당산 정자 밑에든지 사처를 정하고서, 어린 것을 옆에 놓고 긴 담뱃대 붙여 물고 솥을 닦아내는 솥솔을 매든지, 또아리를 곁든지, 냇가 방축 가까우면 낚시질 앉아 할 때, 흥보의 마누라는 어린 아이 등에 붙여 새끼로 꽉 동이고, 바가지에 밥을 빌고 호박잎에 건건이를 얻어 허위허위 찾아오면, 염치없는 흥보에 소견에 가 장 티 내느라고 가속이 더디왔다, 짚었던 지팡이로 매질도 하여보고, 입에 맞는 반찬 없다고 앉았던 물방아집 불도 놓아보려 하고, 별꼴을 매양 부렸다.

하루는 이 식구가 양다리 쭉늘어 앉아 헌 옷의 이를 잡으며, 흥보가 하는 말이,

"우리 신세가 이렇게 되어 이왕 빌어먹을 테면 전곡이 많은 데로 가 볼 밖에 수가 없으니 포구 도방을 찾아가세."

일 원산, 이 강경, 삼 포주, 사 법성리, 낙안 부원다리, 부안 줄내, 근방을 다 찾아다녀 보니 비린내에 속 뒤집혀 암만해도 살 수 없다. 산중으로 다녀 볼까, 우복동 수인섬과 청학동 백학동 두류산 속리산 순창 복흥 태인 산내, 한다는 좋은 데를 다 찾아다녀 봐도 소금 없어 살 수가 없다. 고향 근처 도로 와서 한 곳에 이르니 촌 이름은 복덕이요 인심이 순후한데, 빈 집 한 칸 서 있어서 잠시 주접 살아보니, 집꼴이 말이 아니어서, 집 마루에 이슬 오면 천정에 큰 빗방울, 부엌에 불을 때면 방안은 굴뚝이요, 흙 떨어진 욋대 구멍에 바람은 살 쏘듯 했다. 틀만 남은 헌 문짝에 공석으로 창호하고, 방에 반듯 드러누워 천정을 올려다 보면 개천도를 부친 듯이 이십팔수 세어보고, 일하고 곤한 잠에 기지개를 불끈 켜면 상투는 허물없이 앞 토방으로 쑥 나가고, 발목은 어느 사이에 뒤원에 가 놓였다. 밥을 하도 자주 안하니 아궁이의 풀을 뽑으면 한 마지기 못자리는 넉넉히 할 만했다.

그럭저럭 여러 해에 자식은 더럭더럭 풀풀이 생겨나고, 가난은 버석버석 나날이 늘어가니, 여러 식구 굶어내기가 초상난 집의 개에 비길 만했다.

흥보의 마누라가 견디다 못 견디어 가난 타령으로 섧게 울었다.

"가난이야 가난이야 만고에 있는 가난. 아무리 헤아려도 내 웃수의 가난은 다시 없네. 아주 좁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도정절의 가난하기도 내 집에 비하면 대궐이요, 삼순구식 십년일관이란 정관문의 가난하기도 내게 대면 부자로다. 제나라 오룽중자가 굶주렸으나 오얏은 얻어먹고, 한나라 소중랑은 굶을 때에 방석 털을 삼켰다 하지만, 오얏을 어찌 보며 방석이 어디 있나. 선산을 잘못써서 이러한가. 파묘나 하자 해도 종손이 말릴 것이고, 귀신이 저희 하는 점이나 하자고 해도 쌀 한 줌이 없으니 복채를 낼 수가 있나. 애고애고 서러운지고. 기한이 이러하니 불고염치 절로 되네. 여보시오 아기 아버지, 형님댁에 건너가서 전곡 간에 얻어다가 굶은 자식 살려냅시다."

흥보가 걱정하여,

"형님댁에 건너가서 애절히 사정하여 돈이 되나 쌀이 되나 주시면 좋커니와, 어려운 그 성정에 만일 안 주시고, 호령만 하시면 근래같은 세상 인심에 형님 실덕이 될 터이니, 아니 가는 편이 옳으이."

"주시고 안 주시기는 처분에 계시오니 청하다가 못되며는 한이나 없을테니, 수인사대천명이라고 길을 두고 뫼로 갈까. 되든지 안 되든지 허사 삼아 가보시오."

흥보가 할 수 없어 형의 집으로 건너갈 때, 의관을 한참 차려, 모자 터진 헌 갓에다 철대를 실로 감아 노갓끈을 달아 쓰고, 편자는 좀이 먹고 앞춤에 구역 중중, 관자 띤 헌 망건을 물렛줄로 얽어 쓰고, 깃만 남은 베 중치막 열두 도막 이은 실띠로 시장찮게 졸라 매고, 헐고 헌 고의적삼 살점이 울긋불긋 목만 남은 길버선에 집대님이 별조였다. 구멍 뚫린 나막신을 두 발에 잘잘 끌고, 꼭 얻어올 양으로 큼직한 구럭을 평양 가는 어둥이처럼 관뼈 위에 짊어지고 벌벌 떨며 건너갈 때, 저 혼자 혀를 차며 탄식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되리란 말이 안 나온다. 모진 목숨 죽지 않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형의 문 앞에 당도하니 그새 위세가 더 늘어서 가사가 아주 웅장했다. 30여 칸 줄행랑을 일자로 지었는데, 한가운데 솟을 대문이 표연이 날아갈 듯하고, 대문 안에 중문이요 중문 안에 벽문이 늘어섰다. 건장한 종놈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쇠털 벙치 청창의를 입고 문마다 수직하다가 그 중에 늙은 종은 흥보를 알아 보았다. 깜짝 놀라 절을 하며, 손을 잡고 눈물 흘리며,

"서방님 어디 가서 저 모습이 웬일입니까. 수직방에 들어 앉아 몸이나 조금 녹이십시다."

하고, 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붙여 주며,

"서방님이 저리 될 때에야 아씨야 오죽하며, 그새에 아기네는 몇 분이나 더 나시고, 어이하여 저 꼴이 되셨어요? 서방님 나가실 때 우리들 공론말이 군자같은 그 심덕이 어데 가면 못살겠나, 어디를 가도 부자되지. 그럴 줄만 알았더니 세상이 공도 없지요."

혀를 끌끌 차며 화로의 불을 뒤집어 가까이 놓아주니, 흥보가 불 쪼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 메인 소리로,

"복 없으면 할 수 없데. 아들은 스물 다섯. 아씨 말도 할 말 있나. 내 차리고 온 의복은 게다 대면 장가길이지. 이 식구 스물 일곱, 딱 죽게 되었기에 형님께 말씀드려 뭐 좀 얻어가자 왔네마는 문안일향하시옵고 성정 조금 풀리셨는지."

"문안이야, 그 앞에 가 무슨 병이 얼른하며, 좀체 귀신이나 꼼짝할까. 일생 태평하시옵고, 그 성정 말씀이야 서방님 계실 때보다 몇 배나 더 독하지요. 두 말씀 할 수 있어요. 이번의 제사 때에도 음식 장만도 아니하고, 대전으로 놓았다가 도로 쏟아내옵는데, 지난 달 대감 제사에 놓았던 돈 한 푼이 제상 밑에 빠졌든지 몇 사람이 죽을 뻔했어요. 이번엔 또 의사 나서 싸돈으로 아니 놓고 꿰미채 놓았습죠."

흥보가 방에 앉아 담배 피고 불 쪼이니, 몸이 조금 녹았다가 이 말을 들어보니 등어리가 선듯선듯 찬물을 끼얹고, 가슴이 두근두근 쥐덫이 내려지고, 머리 끝이 쭈뼛쭈뼛하여 하늘로 올라 가서, 온 몸을 벌렁벌렁 떨면서 하는 말이,

"거기 들어가지 말고 바로 가는 수가 옳지. 이럴 줄 미리 알고 아예 아니 오쟀더니, 아씨에게 못 견디어 부득이 왔네 그려."

그 종이 하는 말이,

"이 추위에 저 꼴 하고 예까지 오셨다가 못 얻으면 그만이지, 무슨 탈이 있겠어요. 어서 들어가 보시오."

"전일에 계시던 방, 그저 거기 계신가?"

"아니오. 그 방 옆에 꽃계단을 꾸며 놓고 꽃계단을 앞 굽은 길에 전석이 깔렸으니, 그리 휘도라 가면 외밀이 쌍창 열고, 화류틀 만자영창 양편 거울 붙인 방에 비슥 누워 계시옵니다."

"같이 가서 가르치소."

"아니오. 못하지요. 이런 위태한 일을, 만일 아차 하게 되면 날더러 데려왔다고, 둘이 다 탈이오니 혼자 들어가 보시오."

흥보가 할 수 없어 이를 꽉 아득 물고 팔장을 되게 끼고 죽을판 살판으로 가만가만 자주 걸어, 초당 앞에 이르니, 과연 놀보가 영창문을 반만 열고 검은 담비모피 두루마기 우단 왜단 무겁다고 양색단의를 하고 청모관을 빗겨 쓰고, 색 좋은 백동 오동수복 부산장인 맞춤 담뱃대에 팔장생 별각죽을 기장 길게 맞추어서, 양담배 피워 입에 물고, 안석에 비슥 누웠구나.

흥보가 아주 죽기로 각오하고 툇마루에 올라서서 극진히 절을 하고 떨며 눈물을 흘리며,

"떠나온 지 여러 해인데 기체 안녕하옵신지."

놀보가 한 손으로 안석 짚고 배 앓는 말이 머리 들듯 비슥이 들어보이며 한 어미 배로 나와 함께 커서 장가들고, 자식 낳고 함께 살다 쫓아낸 동생이니, 아무리 오래 되고 형용이 변했다고 모를 리가 있을까마는, 우애없는 사람이라 아주 모르는 체하여,

"뉘신지요?"

흥보는 정말 모르고 묻는 줄로 알았구나. 나가던 연조까지 고하여,

"갑술년에 나간 흥보요."

놀보가 무수히 곱씹으며 의심내어,

"흥보, 흥보, 일년 새경 먼저 받고 모 심을 때 도망한 놈, 그놈은 황보렸다. 쟁기질 보냈더니 소 가지고 도망한 놈, 그놈은 흉보렸다. 흥보, 흥보, 암만해도 기억하지 못하겠소."

흥보가 의사 있는 사람이면 수작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될 것인가, 썩 일어서 나왔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인데 저 농판 순박한 마음에 참 모르고 그러하니, 자세히 이르면 무엇을 줄줄 알고, 본사를다 고하여,

"동부 동모 친형제로 이름자 항렬하여 형님 함자 놀 자(字) 보 자(字) 아우 이름 흥보라 하는 것을 그렇게 잊으셨소?"

놀보가 생각하니 다시 의뭉을 피우자 해도 흥보의 하는 말이 밤 까놓듯 하였으니, 의뭉집이 없어졌구나. 맞설 밖에 수가 없어,

"그래서 동부동모나 이부이모나 친형제나 때린 형제나 어찌 왔나?"

원판 미련키는 흥보같은 사람이 없어 얻으러 왔단 말을 그 말끝에 할 것인가. 엔간한 제 구변으로 놀보 감동시키려고, 목소리를 섧게 하 고 눈물을 훌쩍이며 고픈 배를 틀어쥐고 애절하게 빌어본다.

"형님 나를 내보내기는 미워함이 아니시라, 형님 덕에 유의유식하는 사람될 수 없었으니 각 살이로 고생하면 행여나 사람될까 생각하여 하셨으니, 그 뜻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놀보가 저를 추켜주는 말은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말에는 썩 대답하기를,

"아무려믄."

"형님댁을 떠나을 때 부부가 손목을 서로 잡고 언약을 하옵기를, 밤낮으로 놀지 말고 착실히 품을 팔아, 돈 관이나 모으거든 흰떡 치고 찰떡 치고 영계 삶아 우에 얹어 내 등에 짊어지고, 찹쌀 청주 웃국 질러 병에 넣어 잔에 들고, 형님댁에 둘이 가서 형님 부부 잡숩는 것을 기어이 보고 오세."

놀보가 음식 말을 듣더니 침을 삼키며 추어 말하기를,

"그렇지."

"단단히 약속하였더니, 어찌 그리 복이 없어 밤낮으로 벌어도 돈 한 푼을 못 모으고, 원치 않는 자식들은 아들이 스물 다섯."

놀보가 뒤로 물러나 앉으며 군소리하기를,

"박살할 놈, 그 노룻을 하여도 밤이면 대고 파대니, 다른 일 할 틈 이 있어야지. 계집년 생긴 것이 눈이 벌써 음녀거든."

"식구가 이러하니 아무런들 할 수 있어야지요. 빌어도 하도 먹으니 다시는 빌 데 없고, 굶은지도 꽤 오래니 더 굶으면 죽겠기에, 형님 찾아 왔사오니 전곡 간에 조금만 주시면 스물 일곱 죽는 목숨 제 나라 여상이의 일단사요, 학철에 일두수라니 적선을 해주세요."

두 손을 비비면서 꿇어 엎드려 슬피 우니, 놀보의 생각에는,

'저놈의 생긴 것이 빌어먹기에 투가 나서 달래서는 안 갈테고, 주어서는 또 올테니, 죽으면 굶어 죽지 맞아 죽을 생각은 없이 하는 것이 옳다.'

하고, 부자집 바람벽에 도적 막는다고, 철퇴 철편 마상도며 단단한 몽둥이를 오죽 많이 걸었겠나. 그 중에 단단하고 손잡이 좋은 몽둥이 하나를 내어 손에 들고, 엎어져 우는 볼기짝을 에둘러쳐 딱 때리고 추상같이 호령했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제 정한 복이 각기 있어, 잘난 놈은 부자되고, 못난 놈은 가난한 법이니 내가 이리 잘 사는 것이 네 복을 뺏었느냐. 누구에게다가 떼 쓰자고 이 흉년에 곡식 주쇼! 목 안으로 소리하며 눈물 방을 흩뿌리면 네 잔꾀에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조금만 지체했다가는 잔뼈도 찾지 못 할테니 속속 출문 어서가라."

몽둥이를 또 들러메니 불쌍한 저 흥보가 제 형의 성정을 아는구나. 눈물 씻고 절을 하며,

"정말 잘못 하였으니 너무 노여워 마옵시고 평안히 계옵소서. 동생은 가옵니다."

하직하고 나올 때에 놀보 아내가 거지에게 밥을 싸주었다. 진가리 퍼서 주고 공알답인 한다 해도 모두 거짓말이고, 이 년의 마음씨는 놀보보다 더 독하여 낭자하고 긴 대 물고 안 중문에 비껴서서 시종을 구경하다가 흥보가 가는 것을 보고 제 서방을 나무래며,

"저러한 억지꾼놈을 단단히 쳐 주어야 다시는 안 올 텐데, 어떻게 때렸관대 여상으로 걸어가네. 제 계집은 잘 잡죄지. 다리칼 공알주먹, 동생은 우애하여 사정을 보았구만."

흥보가 형의 집에 전곡 얻으러 왔다가 몽둥이만 잔뜩 타고 비틀걸음으로 건너간다.

이때에 흥보 아내는, 여러 날 굶은 가장을 형의 집에 보내고서 전 곡 간에 얻어오면 굶은 자식 먹일 줄로 알고 동리 어구에 나가서 기다린다. 스물 다섯 되는 자식, 다른 사람 자식 낳듯 한 배에 하나 낳아, 삼사 세 된 연후에 낳고 낳고 하여서야 사십이 못 다 되어 어찌 그리 많이 낳겠는가. 한 해에 한 배씩, 한 배에 두셋씩 대고 낳아 놓았구나. 그리해도 아이들은 칠칠일을 지나면 안기도 하여 보고, 백일이 지나며는 업기도 하여 보고, 첫돌이 지나면 손 잡고 걸어보고, 서너 해 지나면 의복 입고 다녔어야 다리에 골이 오르고 몸이 활발할 터인데, 이 집 자식 기르는 법은 멍석을 겨를 적에 세 줄로 구멍을 내어, 한 줄에 열 구멍씩 첫 구멍 조그맣고 차차 구멍 크게 했다. 한 배에 낳은 자식 둘이 되나 셋이 되나 앉혀 보아 앉으면 첫 구멍에 목을 넣고, 하루 몇 때씩을 암죽만 떠 넣으면 불쌍한 이것들이 울어도 앉아 울고, 자도 앉아 자고, 똥 오줌 마려우면 멍석쓴 채로 앉아 누워, 세상에 난 연후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쳐본 일이 없고, 한번도 문턱 밖에 발 디디어 본 일이 없고, 다른 사람 얼굴 보아 소리 들어본 일이 없고, 그저 앉아 큰 것이라. 때 묻은 야윈 낯이 터럭이 거칠거칠 동지 섣달 강아지가 아궁이에 자고난 듯, 멍석 쓴 채 세고 보면 빼빼 마른 몸둥이가 짱둥이를 엮어놓은 듯, 못 먹고 앉아 크니, 워낙 무르게 되어 큰 놈들은 스무 살씩, 작은 놈들은 십칠팔 세, 남의 자식 같으면 농사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 게 어메, 아비. 음식 이름 아는 것이 밥 뿐이로구나. 다른 음식 알자 한들 세상에 난 연후에 먹기는 고사하고 보거나 듣거나 하였어야지. 밥 갖다 줄 때가 조금만 지나면 뭇놈이 각청으로,

"어메 밥,어메 밥."

하는 소리가 비 올 때 방죽의 개구리 소리도 같고, 석양 하늘에 떼매미 소리도 같다. 언제라도 밥 들고 들어가도록,

"어메 밥,어메 밥."

하는구나.

이날도 흥보댁이 여러 자식놈들 '어메 밥' 소리에 정신을 못 차려서, 벗은 발에 두 손 불며 동문 밖에 나서 보니 흥보 금방 건너올 때, 지거나 메지도 아니 하고, 빈 손 치고 정신 없이 비틀비틀 오는거동은 조창배 격졸들이 일천 석 실은 곡식 풍랑에 파선하고 열번이나 삼년 체수 고생 겪고 오는 모양. 댓바리 고마 마부가 관가 봉물(封物) 싣고 갔다가 백 냥짜리 말 죽이고 주막마다 빌어 먹어 빈채 들고 오는 모양. 경색이 말이 안 되어 흥보댁이 깜짝 놀라 손목을 잡으면서,

"어이 그리 지체하고 어이 그리 심난한가. 오죽이 시장하며 오죽이 춥겠는가."

자세히 살펴보니 쑥 들어간 두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간신히 살 가리운 고의 뒤폭 툭 미어져 빼빼 마른 볼기짝에 몽둥이 맞은자리에 구렁이가 감겼는 듯. 흥보 아내 대경하여,

"애겨 이게 웬일인가. 저 몹쓸 독한 사람, 굶은 사람 쳤네 그려."

하고 가슴 탕탕치며 발 구르니, 흥보가 달래기를,

"자네 그게 웬 소린가. 형님댁에 건너가니 형님이 반기시고, 좋은 술 더운 밥을 착실히 먹인 후에 쌀 닷 말 돈 석 냥 썩 내어주시기에, 쌀 속에 돈을 넣어 오장치에 묶어 지고 땀으로 등을 적시면서 오노라니, 이 넘어 깊은 골에 끔찍한 두 사람이 몽둥이 갈라 쥐고 솔밭에서 왈칵 나와 볼기짝 때리면서, '이놈 목숨이 크냐 재물이 크냐' 한번 호통에 정신 놓아, 졌던 짐 벗어 주고 겨우 살아 오느라고 서러워서 울었으니 형님 원망은 마시오."

홍보댁이 믿지 않고 손뼉을 딱딱 치며,

"그렇다고 해도 내가 알고 저렇다고 해도 내가 알지. 몹쓸 양반 몹쓸 양반. 시아재는 몹쓸 양반. 하나 있는 그 동생을 못 본 지가 몇 해인데, 오늘 같이 추운 아침에 형 보자고 간 동생의 차린 모양을 보면 오려논에 새 볼 터이오. 의복을 보면 구럭 속에 쇠고기든 듯 얼굴은 부황 채색, 말소리는 기진 함함하니, 여러 해 굶 은 것과 조금 하면 죽을 경색을 번연히 알 터인데, 구원하기는 고사하고 저리 몹시 때렸으니 사람이 할 일인가. 애고애고 설운지고. 옛사람의 아우 생각, 구름 보면 낮졸음, 수유꽃 꺽어 꽂고 소일탄을 한다는데, 우리집 시아재는 어찌 그리 독살스러운고. 남의 뭔망 쓸데없지. 모두 다 내 죄로다. 국난에 어진 재상, 가빈에 어진 아내 생각하고, 내가 설마 음전하면 불쌍한 우리 가장을 못 먹이고 못 입힐까. 가장은 처복이 없어 내 까닭에 굶거니와 철모르는 자식 정경 더구나 못보겠네. 짐숭은 미물이나 입으로 밥을 물어 자식을 먹여 주며, 추우면 날개 벌려 자식을 덮는 것을 나는 어찌 사람으로 수다한 자식들을 굶기고 벗기는고. 각결의 아내같이 밭이나 매어 볼까. 양흥의 아내같이 물이나 길어볼까. 직녀성에 빌어서 바느질품을 팔아볼까. 탁문군의 본을 받아 술장수를 하여 불까."

하니, 흥보가 깜짝 놀라,

"자네 그것 웬 소린가. 죽었으면 그저 죽지, 자네 시켜 술 팔겠나? 가사는 임가장이니 내가 가서 품을 팔테니, 자네는 집에서 채전이나 가꾸고, 자식들 길러내소."

흥보가 품을 팔 때, 매우 부지런히 서둘러 상평하평 김매기, 원산근산 시초 베기, 먹고 닷 돈에 장 서두리, 십리 돈 반에 승교 메기, 새로난 조기 밤짐지기, 시간 정하고 급주하기, 방 뜯는 데 조역군, 담 쌓는 데 자갈 줍기, 봉산 가서 모 품팔기, 대구영에 약태전, 초상 난 집 부고 전하기, 출상할 때 명정 들기, 공관 되면 상직자기, 대장간에 풀무 불기, 멋있는 기생 아씨 타관 애부에게 편지 전하기, 부자집 어린 신랑 장가갈 때 기러기를 들고 신랑 앞에 서서 가기, 들병당수 술짐 지기, 초란이 판 나무 놓기, 아무리 벌어도 시골서는 할 수가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군칠이집의 종노릇을 하다가 소주 가마 눌려 놓고 뺨 맞고 쫓겨와서, 대신 매를 맞고 돈을 받는 매품 팔러 병영 갔다가는 차례에 밀려 태장(苔杖) 한 대 못 맞고서 빈 손 쥐고 돌아오니, 흥보 아내가 품을 판다. 오뉴월 밭매기와 구시월 김장하기, 한말 받고 벼훑기와 입만 먹고 방아찧기, 삼 삶기, 보(洑) 막기와 물레질, 베짜기와 머슴의 헌 옷 깁기, 상가에서 빨래하기, 혼인이나 장례집 진일하기, 채소밭에 오줌주기, 소주 곱고 장달이기, 물방아에 쌀 까부르기, 밀 맷돌 갈 때 제 집어넣기, 보리 갈 때 밑거름 주기, 못자리 때 망풀 뜯기, 아기 낳고 첫 국밥 제 손으로 하여 먹고, 기운을 방통(放通)하는데 절구질로 땀을 내니, 한 때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벌어도 늘 굶는구나.

흥보댁이 할 수 없어 죽기로 자처하고, 복을 못 타고난 신세 자탄을 진양조로 서글피 울 때, 마음 있는 사람들은 귀에서도 눈물 난다.

"애고 애고 설운지고, 복이라 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잘 타고나는고. 북두칠성님이 마련을 하시는가. 제왕 산신님이 점지를 하시는 가. 생년 생월 생일 생시 팔자에 매었는가. 승금상수(乘金相水) 혈토인목(穴土印木) 묘지 쓰기에 매었는가. 이목구비 오악(五嶽)으로 생기기에 매었는가. 좋은 일을 하고 악을 측은히 여기고 선을 우러러 행하는 마음씨에 매었는가. 어찌하면 잘 사는지 세상에 난 연후에 의롭지 않은 일 아니 하고 밤낮으로 벌어도 서른 날에 아홉 끼니 먹기도 어렵고, 일년 사철 헌 옷이라. 내 몸은 고사하고 가장은 부황나고 자식들은 굶어죽을 지경을, 사람 차마 못 보겠네. 차라리 자결하야 이런 꼴 안 보고 싶구나. 애고애고 설운지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니 흥보가 울며 말려,

"여보소, 아기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가 살아서도 내 신세 이러할 때는 자네가 죽게 되면 내 신세 어떠하고, 자식들이 어떻게 되겠소. 부인의 백년 신세 가장에게 매였는데, 박복한 나를 얻 어 이 고생을 하게 하니, 내가 먼저 죽을라네."

허리띠로 목을 매니, 흥보 아내 겁을 내어 가장의 손을 꼭 붙들고서 둘이 서로 통곡하니, 아주 초상난 집 같았다.

이 때에 중 하나가 촌 중으로 지나는데, 행색을 알 수 없이 연년묵은 중, 헐디헌 중 초의불침부불선(草衣不針復不線) 양이수견미복면(兩耳垂肩眉覆面) 다 떨어진 훌치송낙, 이리 총총 저리 총총 헝겊으로 지은 것을 귀에 흠뻑 눌러 쓰고, 누덕누덕 헌 베 장삼, 율무 염주 목에 걸고, 한 손에는 절로 굽은 철죽장, 한 손에는 다 깨어진 목탁을 들고, 동냥을 얻으면 무엇에 받아갈지 목기짝, 바랑 등물 하나도 안 가지고 개미가 안 밟히게 가만 가만 가려 디뎌 촌 중으로 들어올 때, 개가 쾅쾅 짖으면 두 손을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

사람이 말 물으면 허리를 굽히면서,

"나무아미타불."

이집 저집 다 지나고 흥보 문전 당도하니, 오랫동안 주저하며 울음 소리 한참 듣다 목탁을 두드리며 목 내어 하는 말이,

"거룩하신 댁 문전에 거지 승 하나 왔사오니 동냥 조금 주옵소서."

목탁을 계속 치니 흥보가 눈물 씻고 애절히 대답하기를,

"굶은 지 여러 날에 곡식이 없사오니 아무리 섭섭하나 다른 데나 가보시오."

노승이 대 답하되,

"주인의 처분이니 그저 가기는 하겠지만, 통곡은 웬일이오."

"자식은 여럿인데 가세가 몹시 가난하여 굶다 굶다 못 하여서, 가련한 부부 목숨 먼저 죽기 다투어서 서로 잡고 우옵니다."

그 중이 탄식하여,

"어허 신세 가련하오. 부귀가 임자 없어 적선하면 오는 것이니 무지한 중의 말을 만일 듣고 믿을 터면, 집터 하나 가르칠테니 소승 뒤를 따르시오."

흥보가 크게 기뻐하여 천 번 만 번 치하하고 대사의 뒤를 따라가니, 배산임수(背山臨水) 개국(開局)하고 무성한 숲과 긴 대 두른 곳에 집터를 정하는데 명당수법 완연했다.

"감계룡(坎癸龍) 간좌곤향(艮坐坤向) 탐랑득거문파(貪狼得巨門破)며 반월형 일 자로 앞을 가로막은 산에 문필봉(文筆峰) 창고사(倉庫砂)가 좌우에 높았으니 이 터에 집을 짓고 가난하지만 안락한 마음을 가지고 지내면 가세가 속히 일어날 테니 월나라 재상 도주와 노나라 부자 의돈에 비길 만할 것이오, 자손이 영광되고 귀하여 만세 유전하오리다. "

부자될 집터에 주된 기둥 자리 막대 넷 박아 주고, 한 두 걸음 나 가더니 얼른 보이다가 쓱 사라지는 것이었다.

도승인 줄 짐작하고, 있던 집 헐어다가 그 자리에 의지라고 간신히 지낼적에, 백설한풍 깊은 겨울 벌거벗고 굶주린 배로, 아니 죽고 살아나서 정월 이월 얼음이 풀리니, 산수 경개 참으로 좋다. 버들은 연한 황록색이요, 꾀꼬리는 노래하고, 배꽃 백설 향기에 나비가 춤을 춘다. 까치는 손수 제 집을 지어 가지는 재주가 내 집보다는 단단하고, 산골짜기 다리 밑에 모인 암꿩이 우는 소리가 나는 때를 얻었도다. 집은 당장 새려는데, 소쩍새는 비오비오. 쌀 한 줌 없는 것을 저 새소리, '솥 작다' 하고 뻐꾸기는 운다마는 논이 있어야 농사를 하지. 오디새야 날지 말아, 누에를 쳐야 뽕을 따겠다. 배가 저리 고프거든 이것 먹소 쑥국새, 목이 저리 갈증나거든 술을 줄까 사다새. 먹을 것이 없으니 닭개를 기를까. 살해를 아니 하니 고라니와 사슴이 벗이로다. 삼월 동풍이 부는 이른 봄의 화창한 날씨에, 온갖 새와 짐승이 즐길 적에 강남서 나온 제비, 옛날 왕사당전 제비가 이제는 백성의 집에 날아들었네. 흥보의 움막에 날아드니, 흥보가 좋아하고 제비 보고 치하한다.

"소박한 세상 인심 부귀를 추세하여, 적막한 이 산중에 찾아올리 없건마는, 제비는 가난한 집 저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니, 붉게 칠한 난간과 채색한 누각 다 버리고, 썩 좁은 이내 집을 찾아 오니 반갑도다. "

저 제비의 거동 보소. 그래도 성조라고 남남지성 하례하고, 좋은 진흙 물어다가 처마 안에 집을 짓고, 수컷이 날고 암컷이 따르며 오르내리며 사랑하여 알을 낳아 새끼 까서 밥 물어다 먹이면서, 새끼와 어미가 지저귀며 즐기더니, 천만 뜻밖에 대망이가 제비집에 들었거늘, 흥보가 깜짝 놀라 정설하며 쫓는구나.

"무례하고 방자한 저 대망아 너 먹을 것 많구나. 푸른 풀 우거진 지당 곳곳에 있는 개구리들과 여기저기 봄꿈을 미처 깨지 못한 새들, 허다한 것을 다 버리고 구태여 내 집 와서 제비 새끼를 잡아먹노. 한 고조 과대택에 적소검 드는 칼로 네 허리를 베고지고, 남악사에 시정을 하소연하여 신병을 몰아다가 네 큰 목을 자르겠다. "

급급이 쫓고 보니 제비 새끼 여섯에서 다섯을 먹고 하나가 남아 혈혈이 아니 죽고 날기 공부를 하다가, 대발 틈에 발이 빠져 거의 죽게 되었거늘, 흥보 보고 대경하여 제비 새끼를 손에 놓고 무한히 탄식한다.

"가련한 너의 목숨 대망에게 죽지 않아 완명으로 알았더니, 다리가 부러지니 웬일이냐. 전생의 죄액이냐, 잠시의 횡액이냐. 삼백 우족 많은 중에 죄 없는 게 제비로다. 네 알이 아니었던들 은(殷)나라가 없었을 것이다. 네 턱이 아니었으면 만리 봉후를 어이 하였으리. 백 가지 곡식에 해가 없고 사람을 별로 따라, 공량락연니는 문장의 수단이요, 연어조량만은 정부(情婦)의 수심이라. 네 경색이 가련하니 기어이 살리리라."

칠산 조기 껍질을 벗겨 두 다리에 돌돌 말고, 오색당사로 찬찬 감어 제 집에 넣었더니, 십여 일 지낸 후에 두 다리가 완고하여, 비거비래 노는 거동은 보기에 가장 좋았다. 구만리 장공에 높이 높이 날아 보고, 일대장천 맑은 물에 배도 쓱 씻어 보고, 평평한 넓은 들에 아장아장 걸어 보고, 길게 맨 빨랫줄에 한들한들 앉아도 보고, 바람에 떨어진 꽃 또기또기 차도 보고, 가랑비 젖은 날개 실근실근 다듬으며, 아로 새긴 들보 위에 고은 말로 하례하고, 해당화 그늘 속에 오락가락 날아 보니, 흥보가 좋아하고 집 안에 있을 제는 제비하고 소일하고, 나갔다 들어오면 제비집을 먼저 보아 다정히 지내더니, 7월에 화심성(火心星)이 흐르고 8월에 물억새를 베어 들이니, 이슬이 서리 되고 가을 바람이 쌀쌀하여 9월엔 입을 옷을 받으니 동방에 귀뚜라미가 울어 깊은 수심 자아내고, 장공에 기러기 우는 소리는 먼 데 소식 띄워 온다. 용산에 술 마시고, 망향대(望鄕臺) 에 손님 보낼 때에 섭섭하다 우리 제비는 고향 강남으로 가려고 하직을 하는구나.

흥보가 탄식하여,

"사랑스럽다 우리 제비. 날 버리고 가려느냐. 강남이 멀다 하니 며칠이면 당도할가. 내년 봄에 나오거든 부디 내 집 찾아 오라."

제비 저도 못 잊어서 나갔다 도로 와서 아리따운 말소리로 이별을 아끼는 듯. 흥보는 본래 서러운 사람이라 눈물보씩이나 흘리고 이별을 하였구나.

십이제국 갔던 제비 구월 그믐 돌아와서 시월 초하룻날 제 장수께 현신하고 새끼 수를 점고하여 문서 치부하는구나. 노나라 갔던 제비 첫째로 들어가고, 조선에 왔던 제비 둘째로 들어갈 때, 흥보의 제비가 현신하니 장수가 묻는 말이,

"어찌 새끼를 하나만 까고 두 다리가 부러졌노."

제비가 여쭙기를,

"새끼 여섯을 깠삽더니 대망이가 다 먹삽고, 다만 하나 남은 것이 대발 틈에 발이 빠져 거의 죽게 되었더니, 주인 흥보의 힘을 입어 간신히 살렸으니, 흥보의 어진 덕은 백골난망이옵니다."

제비 장수가 분부하기를,

"장령을 어기면 번번이 탈이 있느니라. 금춘 이월 나갈 적에 그날이 을사일 사불원행이니 가지 말라 분부하되 고집으로 나가더니, 뱀 날 떠났기로 뱀의 환을 만났구나. 흥보의 한 일을 생각하니 금세의 군자로다. 보배 하나를 갖다 주어 은혜를 갚게 하라. 명춘에 나갈 적에 내게 다시 고하여라."

삼동을 다 지내고, 이월 초에 발행할 때 흥보가 살린 제비 장수전에 하직하니, 보물 하나 내어 주며,

"이것을 물어다가 흥보에게 잘 전하라,"

제비가 받아 물고 조선으로 나올 적에, 무인지경 누만리에 인가를 볼 수 있나. 봄 제비가 돌아와 수풀 나무에 집을 짓고 밤이면 나무에 자고, 날이 새면 다시 날아 삼월 삼일 정한 날에 흥보 집을 찾었다.

이 때에 주인 흥보가 제비를 보내고서, 일념에 못 잊어서 자주 생각하다가 삼짇날이 돌아오니, 그 제비가 다시 올까 품 팔러도 아니가고 기다리고 앉았더니, 반가운 저 제비가 처마 안에 날아들 때, 부러진 두 다리가 옛 모습이 뚜렷하다.

"아지주지."

고운 소리는 그리던 회포를 말하는 듯, 흥보가 좋아하고 무한히 정설한다.

"네 왔느냐. 네가 왔느냐. 내 제비 네가 왔느냐. 강남 수천리를 다 지나 네가 왔느냐. 강남 아름다운 땅을 어이하여 내버리고 누추한 이내 집을 허위허위 찾아왔느냐. 인심은 남을 속여 한 번 가면 잊건마는 너는 어찌 믿음이 있어 옛주인을 찾아 왔느냐."

한창 이령게 반길 적에 제비가 입에 물었던 것을 흥보 앞에 떨어뜨리니 흥보가 집어 들고 저의 댁을 급히 불러,

"여보쇼 아기어멈, 어서 와서 이것 보소. 제비가 물어왔네."

흥보댁이 들고 보며,

"애겨, 이게 무슨 씨 아닌가."

여인의 소견이라 당치 않게 대어 보아,

"그것 아마 외씨지,"

"아니로세. 옛날에 진나라 소평이가 벼슬이 무섭다고 외 심어서 팔았으나, 그 땅이 관중이라 강남은 아니고 외씨가 이리 클 리가 있는가."

"그리하면 여지 씬가?"

"아니로쇠. 양귀비 고운 얼굴 화색을 내려 하고 여지만 먹었으나, 촉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니 강담 소산 아니었고, 여지씨는 울툭불툭 벌레 먹은 형상이니, 오, 그것이로구나. 약방에서는 백편두라 한다던가,"

"그게 강낭콩 아닌가?"

"아니로세. 강낭콩은 훨씬 넓고 가에 횐 테를 둘렀는데."

"애겨, 무슨 글자가 써 있네."

"이리 주소, 어디 보세. 갚을 보(報), 은혜 은(恩), 박 표(瓢), 보 은 표. 보은 표, 보은은 충청도 땅, 옥천 옆에 그러니까 이 제비 올 적에 공주로 노성으로 은진으로 온 것이 아니라, 보은으로 옥 천으로 연산으로 이리 왔나? 여러 고을 지나 오며 어찌 똑 보은 박씨 무엇하자고 물어 왔나. 보은 대추 좋다 하되 박 좋단 말 못 들었네. 그러나 저러나 강남 것일런지 보은 것일런지, 저 먹을 것 아닌 것을 물어온 게 괴이하고, 내 앞에다 떨어뜨리니 더욱이 괴이하니 아무러나 심어보세."

을불재종 날을 보아 대장군 안선방을 둥그렇게 깊이 파고, 오줌독에 담근 신짝 여러 죽을 포개 쌓고 흙과 재를 잘 버무려 단단히 심었더니, 싹이 트는 것을 보니 박은 정녕 박이었다. 순이 차차 뻗어 나니 산나무 가지 꺾어 드믄드믄 순을 주어 지붕 위로 올렸더니, 화창한 바람과 단비 내리는 호시절에 밤낮으로 무성하여 삿갓 같은 넓은 잎이 온 집을 덮었으니, 비가 와도 걱정 없고, 닷줄 같은 큰 넝쿨이 온 집을 얽었으니 바람 불어 걱정 없어, 흥보가 벌써부터 박의 힘을 보는구나, 마디마디 피는 꽃이 노인 기상 조촐하다.

박 세 통이 열렸는데 처음은 까마귀 머리 만큼, 종자 만큼, 보시기 만큼, 화로 만큼, 장단 북통 만큼, 폐문 북통 만큼, 밤낮으로 차차 크니, 약한 집이 무너질까 흥보가 걱정하여 단단한 장목으로 박통 놓인 데마다 천정을 괴었더니, 그렁저렁 상풍팔월 박타는 계절이 이르니, 흥보가 저의 처와 의논할 때,

"여보쇼, 아기 어멈, 이 아니 좋은 땐가, 우리 동네 사람들은 오례 잡아 서리쌀, 풋동부, 풋콩 까서 밥을 짓네, 송편하네, 창 앞에 대추 따고, 후원에 알밤 줍고, 논귀에 붕어 잡고, 두엄에 집장 띄워 먹을 것 많건마는, 가련한 우리 신세 먹을 것이 전혀 없네. 세상에 죽는 목숨 밥 한 덩이 누가 주며, 찬 부엌에 굶은 아내 조강인들 볼 수 있나. 철 모르고 우는 자식 '밥을 달라 밥을 달라', 무엇으로 달래볼까. 우리는 저 박을 타서 박 속은 지져 먹고, 박짝은 팔아다가 한 끼 구급하여 보세."

동네 도끼 얻어 들고, 집으로 올라 가서 박꼭지는 찍었으나 끌어내릴 수가 없어, 정월 보름 끌던 줄을 당산 나무 감았는데, 그 줄을 풀어다가 박통을 동이고서 흥보는 됫줄 잡고 처자는 앞줄 당겨 간신히 내려 놓고, 박목수의 큰 톱을 얻어 박통을 켜려는데, 흥보 꼴은 이러하나 속 맛은 담뿍 들어,

"여보쇼, 아기 어멈. 평지에다 지어도 절은 절이오, 성복술에도 권주가 한다고, 우리의 일년 농사 논을 하는가 밭을 하는가. 모심을 때 상사소리, 밭맬 때 메나리 불러 볼 수 없었으니, 우리는 이 박을 타며 박노래나 하여 보세."

"무슨 노래 사설을 알아야 하지."

"묵은 사설 때 묻으니 박 내력을 가지고서 사설 지어 먹이거든, 자네는 뒤만 맡소."

"그리 합세."

흥보가 톱질 소리를 먹인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주소 톱질이야, 성인이 풍류질 제 금·석·사·죽·포·토·혁·목, 이 박이 아니면 팔음이 어찌 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아성 안자 안빈낙도, 이 박이 아니면 일표음을 어찌 하며, 소부의 세상을 피한 높은 절개가 이 박이 아니고야 기산괘의 표주박을 어찌 걸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군자가 말 없기는 무구포가 아니겠나. <남화경>에 있는 박은 크기만하고 쓸 데 없어 아깝도다. "

"어기여라 톱질이야."

"인간 대사 혼인할 제 표주박 술잔으로 술 돌리고, 강산의 시주객은 표주박잔을 들어 서로 권하는 것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도 이 박을 타서 쌀도 일고 물도 떠서 가지가지 잘 써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탁 타 놓으니, 청의 입은 동자 한 쌍이 박통 밖에 썩 나 서며,

"이것이 흥보씨 댁이오?"

하니, 흥보가 깜짝 놀라 뒤꼭지 탁탁 치며,

"이런 재변 보았는가. 초나라 유자 속에 노인 바둑 둔다더니, 박통 속에 동자가 들다니 천만고에 처음이라. 내 이름을 어찌 알고 무엇 하자고 와서 묻는지. 허참, 이 노룻이 도망이나 할 수 있나. 죽자 원, 내가 흥보다. 이 칡풀밭에 누워서도 진드기 한 마리가 붙을 데 없는 사람을 찾아 무엇 하겠느냐?"

저 동자가 소매에서 대모쟁반을 내놓는데, 병과 접시에 종이봉지가 드믄드문 놓였구나. 눈 위에 높이 들어 흥보 앞에 드리면서 절하고 여쭙기를,

"삼신산 열위선관이 모여 앉아 공론하기를, 흥보씨 지극한 덕화는 금수까지 미쳤으니 그저 있지 못하리라. 몇 가지 약을 보내시니 백옥병에 넣은 것은 죽는 사람 혼을 불러 돌아 오는 환혼주, 밀화 접시에 놓은 것은 소경이 먹으면 눈이 밝는 계안주, 호박 접시에 담은 것은 벙어리가 먹으면 말 잘 하는 개언초, 산호 접시 담은 것은 귀막힌 이 먹으면 귀 열리는 개이용, 설화지로 묶은 것은 아니 죽는 불사약, 금화지로 묶은 것은 아니 늙는 불로초, 가지가지 있삽는데, 약 이름과 쓰는 데를 그 옆에 썼사오니 그리 알아 쓰옵소서. 가다가 동정 용궁에 전할 편지가 있삽기로 총총히 가옵니다. "

사흘 굶은 저 흥보가 헛 수인사 한 번 하여,

"저러하신 선동이 날같은 사람 보려 하고 그 먼 데서 오셨다가 아무리 소금밥이나 점심 요기해야 하지."

동자가 웃고 대답하기를,

"세상 사람 아니기에 시장하면 구전단, 목 마르면 감로수, 연화식을 못 하오니 염려치 마옵소서."

하고 인홀불견 간데 없다.

흥보가 생각하기를 허술한 집구석에서 선약을 흑 잃을까, 조그마한 오장이에 모두 넣어 꽉 동여서 움막방 들보 위에 씨나락 모양으로 단단이 얹었구나. 동자를 보낸 후에,

"어허, 괴이하다."

박짝 속을 또 굽어보니 목물들이 놓였는데, 하나는 반닫이 농만하고, 하나는 벼루집만한데 주홍 왜칠 곱게 하고, 용·거북 자물쇠를 단단히 채고서, 초록 당사 벌매듭에 열쇠 달아 옆에 걸고 둘 모두뚜껑 위에 황금 정자 쓰였는데, '박흥보 개탁'이라. 흥보 보고 장담하기를,

"내가 비록 산중에 사나 이름은 멀리 났지. 봉래산 선동들도 내 이름을 부르더니 목물 위에 또 썼구나."

둘 다 열고 보니 하나는 쌀이 가득, 하나는 돈이 가득. 부어내어 되고 세니 동서방 상생수로 쌀은 서 말 여덟 되, 돈은 넉 냥 아홉 돈, 온 집안이 대희하여 그 쌀로 밥을 짓고, 그 돈으로 반찬을 사서 바로 먹기로 드는데, 흥보의 마누라가 살림살이 약게 하나 양식 두고 먹은 일이 있나. 부자아씨 같으면 식구가 스물 일곱, 모두 칠홉 낼지라도 이칠이 십사, 칠칠은 사십구, 말 여덟 되 구홉이니, 채워 두 말 하였으면 오죽 푼푼하련마는, 평생 양식 부족하여 생긴대로 다 먹는다. 부부가 품 판 삯을 양식으로 받아 오나 돈으로 받아 오나, 한 돈어치 팔아 오나 두 돈어치 서 돈어치 판대로 하여도 모자라기만 하였기로, 서 말 여덟 되를 생긴 대로 다 할 적에 솥이 적어 할 수 있나. 쇠물솥 그 중 큰 집 찾아 가서 밥을 짓고, 넉 냥 아홉 돈을 쇠고기를 모두 사서 반찬을 하려 할 때, 식칼 도마가 어디 있나.

여러 자식놈들이 고기를 붙들고서 낫으로 자를 적에 고기 결을 알 수 있나. 가로 잘라 놓은 모양 서까래 머리 잘라 놓은 듯, 기둥밑 잘라 놓은 듯, 건개와 양념들도 별로 수가 많지 않아, 소금 뿌리고 맹물 쳐서 토정에 삶아 내고, 그릇 없어 밥 푸겠나 씻지도 않은 쇠죽통에 밥 두 통을 퍼다 놓고, 숱가락은 근본 없고 있더라도 찾겠는가, 여러 해 물기 안 한 손물통 가에 늘어 앉아 서로 주워 먹을적에, 이 여러 자식들이 노상 밥이 부족하여 서로 뺏어 먹었구나. 그리 많은 밥이지만 큰 놈 입에 넣는 것을 작은 놈이 뺏어 훔쳐 큰놈도 뺏기고, 서로 집어 먹었으면 싸움 아니 하련만, 악을 쓰며 주먹 쥐어 작은 놈 볼통이를 이가 빠지게 찧으면서, 개 아들놈 쇠 아들놈, 밥통이 엎어지고 살벌이 일어나되, 무지한 저 흥보는 밥 먹기에 윤리도 잊어버려 자식 몇 놈 뒈져도 살릴 생각 아예 않고, 그 뜨거운 밥인데도 두 손으로 서로 쥐어서 쭉방을 놀리는 식으로, 크나큰 밥덩이가 손에서 떨어지면 목구멍을 바로 넘어, 턱도 별로 안 놀 리고 어깨춤 눈 번득여, 거진 한 말어치 처치를 한 연후에, 왼편 팔 땅에 짚고 두 다리 쭉 뻗치고 오른편 손목으로 배가죽을 문지르며, 밥더러 농담하기로 들어,

"여봐라 밥아, 내가 하도 시장키에 너를 조금 먹었으나, 네 소위를 생각하면 대면할 것 못되지. 세상 인심이 간사하여 세력을 따른다 하지만 너같이 심히 하랴. 세도집과 부자집만 기어이 찾아 가서 먹다 먹다 못다 먹어, 개를 주며 돼지를 주며, 학 두루미 떼 거위를 모두 다 먹이고도, 그리해도 많이 남아 쉬네 썩네 야단하며, 나와는 무슨 원수 있어 사흘 나흘 예상 굶어 뱃가죽이 등에 붙고 갈빗대가 따로 나서, 두 눈이 캄캄하고 두 귀가 먹먹하여, 누웠다 일어나면 정신이 어질어질, 앉았다 일어서면 다리가 벌렁벌렁, 말라 죽게 되었어도 찾는 일이 전혀 없고 냄새도 못 맡게 하니, 그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에라, 이 괴이한 것 그런 법이 없느니라."

아주 한참 준책하더니 도로 슬쩍 달랜다.

"내가 그리한다고 노여워 아니 오려느냐. 어여뻐서 한 말이지 미워 한 말이 아니로다. 친구가 조만없어 정지후박 매였으니 어찌 서로 이리 늦게 만났는가, 원하기는 떨어지지 말고 지내보세. 아겨 아겨 내 밥이야. 아겨 아겨 내 밥이야. 옥을 주고 바꿀소냐, 금을 주고 바꿀소냐, 아겨 아겨 내 밥이야."

밥이 더럭더럭 오게 새 정을 붙이려고 이런 야단 없었구나. 밥하고 수작할 때 흥보의 열일곱째 아들놈이 장난을 하느라고 쌀궤를 열어 보고 깜짝 놀라 아비 불러,

"애겨, 아뷔 이것 보오, 이 궤속에 쌀 또 있네."

흥보가 의심하여,

"그 말이 웬 말이냐? 돈 든 궤를 또 보아라."

"애겨, 돈도 또 들었소."

"어허, 그것 참으로 좋다."

그 많은 자식들이 팔을 바꾸어 종일을 부어내어도 웬 전곡이 어림짐작도 없다. 자식들은 그 노룻을 하라 하고 뱃심이 든든할 때, 둘째 통을 또 켜는데 늘상 굶던 흥보 신세 뜻밖에 밥 보더니, 아주 밥에 골몰하여 톱질하는 선소리를 밥으로 메기었다.

"어이여라 톱질이야. 좋을씨고, 좋을씨고. 밥 먹으니 좋을씨고. 수인씨의 교인화식 날 위하여 가르쳤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강구노인 함포고복 나만치나 먹었던가. 엽피남묘 전준지희 나만치나 즐기던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만고에 영웅들도 밥 없으면 살 수 있나. 오자서도 도망할 제 오시에 걸식하고, 한신이 궁곤할 제 표모에게 기식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진문공 전간득식, 한광무 호타맥반, 중한 것이 밥 뿐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이 박통을 또 타거든 은금보패 내사 싫어, 더럭더럭 밥 나오소."

슬근 슬근 탁 타 놓으니 온갖 보물 다 나온다.

비단으로 볼작시면 천문일사황금방 번듯 돋아 일광단, 능도중천만국명, 산하영리 월광단, 평치수토 하우공덕, 구주토산 공단, 금성옥진 높은 도덕 공부자의 대단, 진시황 안 무섭네 입이 바로 모초단, 남궁연 대풍가의 금도천지 한단, 팔년간과 지은 죄로 조공 바치던 왜단, 훈금어 삼군무늬 노돌십진 영초단, 나는 짐승 우단, 기는짐승 모단, 쥐털 모아 짜내니 불에 씻는 화한단, 일조 낭군 이별 후 에 숙폐공방 상사단, 계수나무 꺾었으니 낙수청운의 장원주, 가련금야 숙창가 옥빈홍안 가기주, 팽조와 동방삭이 오래 사는 수주, 만동묘 대보단에 만세불망 명주, 만경창파 바람결에 번듯번듯 낭릉이며, 삼월방춘 좋을씨고. 숭이숭이 화릉, 성자도 좋을씨고. 세세 초장수 항라, 황국 단풍 구경 가세 소소금풍 추라, 천간 열을 세어보니 그중 거수 갑사, 남월 북호를 머다 마소 주먹 쥐고 뒤쥐사, 만물지리무궁하니 천지대덕 생초, 상풍구월 축장포에 백곡등풍 숙초, 뭉게뭉게 구름무늬, 두리두리 대접무늬, 이견대인 용무늬며, 낙서 짓던 거북무의요, 한수 춘색 포도무의,용산축신 국화무늬, 팔작팔작 새발 무늬, 투덕투덕 말굽무늬, 북포·저포· 황저포·세목·중목·상목이며, 마포·문포 갈포 등물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갓 보패 다 나온다.

금패 ·호박 ·밀화며, 산호·진주·청강석·유리·진옥·수만호· 대모· 서각·고래수염·사향·용뇌·우황이며, 용주·한충· 이궁전이 꾸역꾸역 다 나오고 온갓 쇠가 다 나온다. 황금·적금·백동이며, 오동·주석·놋쇠며, 유납구리·말근·짐생동·무쇠· 시우쇠. 안방 세간 볼짝시면 삼층 이층 외층장, 오흡삼흡 자드리 상자, 지농·목농·자개 함농·두지장·앞닫이·흡합경대 ·쌍룡 그린 빗접고비, 바느질 상자·반닫이·선반·횃대·장목비·큰 병풍·소병풍 온갓 그림 황홀하고, 핫이불·누비이불 각색 비단 좋을씨고. 화문 보료 우단 요와 녹전처네 원앙침을 한데 모두 모아 놓고, 왜단 보로 덮었으며, 왕골 세석 쌍봉화문 홍수주로 꾸몄으며, 지도서로 꾸민 족자, 산호구에 거는 주렴, 방장·휘장 모기장과 순금 반상·천은반상·놋쇠반상 ·화기반상 ·시저 ·주걱 ·국자며, 밥소래 ·놋동이 ·양푼 ·유할 ·탕기 ·쟁반 · 열구자 ·전골탄과 노기 ·남비 ·대화로며, 대양 ·요강·놋광명정·촛대 함께 놓았으며, 사랑 세간이 다 나왔다.

문갑 ·책상 ·왜각계수리 ·필연 ·퇴침 ·찬합 등물, 사서삼경 백가어를 가득가득 담은 책장, 오음 육률 묘한 재미 가지가지 풍류 기계, 흑각장궁 유엽전을 궁대 전통에 각기 넣고, 조총 ·철편 ·등채 ·환도 ·호반 기계가 좋구나. 금분에 매화 피고 옥황에 붕어 떴다. 요지반도 동정귤을 대모접시에 담아 놓고, 감로수 천일주를 유리병에 넣었으며, 당판책 보아가다 안경 벗어 거기 놓고, 귤중선 두던 판에 바둑 그저 벌였구나. 풍로에 얹은 차관 불엔 내가 아직 일어나고, 필통 옆에 노인 부채는 횐 깃이 조촐하다.

질요강 침 타구와 담배 서랍 재떨이며, 오동 빨주리, 천은 수복 호박통, 각색 연통, 수락 화락 별각죽에 맵시있게 맞추어서 댓 쌈이나 놓았으며, 부엌 세간, 헛간 기물, 농사 연장, 길쌈기계, 가지가지다 나온다. 밥솥·국솥·대철이며, 가마·두멍·쇠소댕·개수·구유·살강발과 물항아리 뒤웅박이며, 소래·시루·항아리· 소반·모반·채반이며, 대소쿠리 ·나무 함지 ·나무 함박 ·솥솔·조리·쪽박이며, 사기 그릇·사푼때기·재고무래·부지깽이·부지땅·부엌비며, 공석·멍석·맷방석· 짚소쿠리· 멱서리며, 삿갓·뉘역 ·접사리· 장기·따비· 써레·발판·쟁이·가래·호미·살포·지게·도끼·낫 자루며, 벼훑이·갈퀴·도리깨·물레·돌꼇·씨아·베틀 따른 각색 기계, 빨래 방망이 ·다듬잇돌·흥두깨 방망이며, 심지어 됫간가래 다른 나무 무겁다고 오동으로 정히 깎아 자주칠 곱게 하여 꾸역꾸역 다 나오니, 이러한 많은 기물 방 좁아 놀 수 없고, 뜰 좁아 쌀 수 없어, 스물 다섯 자식 중에 둘은 어려 못 시키고, 스물 세 명 데리고서 크나큰 동학에다 비단 따로 포목 따로 철물 따로 목물 따로 보물 따로 기명 따로 환부곡식 다발 짓듯 각기 각기 쌓아 놓으니, 적막한 이산중이 불시에 종로되어, 육주비전 공상전과 마상전 박물판과 똑같이 되 었구나.

흥보 아내가 그 안목에 전후 하나나 본 것이 있나. 그래도 가장네는 서울도 갔다 오고, 병영도 다녀오고, 읍내 장에 다녔으니 매우 박람한 줄 알고, 청옥단 통허리를 집어 들고 하는 말이,

"애겨, 그것 장히 좋소. 무명보단 광도 넓으이. 이렇게 긴 바디를 어디서 얻었으며, 짜던 여인네튼 팔뚝도 길던가 봐. 이 편으로 북 던지고 이 편에서 제가 받아, 물은 우리 치마물, 청동인지 쪽물인지 청물이 채가 더 곱거든, 짜 가지고 들였을텐데 반들반들한 데하고 어릉어릉한 데하고 빛이 어찌 같잖으니."

그 껄껄한 두 손으로 비단 무늬를 만지니 오죽이나 붙겠는가.

"애겨, 그것 이상하다. 손가락 아니 놓네."

흥보가 견문이 있어서 수가 터진 사람이면,

"선전의 시정들도 비단 짤 줄 모른다네, 거 어찌 알 것인가."

쉽게 대답하련마는 여편네에게 졸렬하게 비칠까하여 본 것처럼 대답하기를,

"비단 짜는 여인네는 팔뚝이 훨씬 길지. 그렇기에 중국서는 며느리 선볼 적에 팔뚝을 먼저 보지. 물은 그게 청동물 청이 곱고 안 곱기는 잿물 넣기에 매였지. 웅얼웅얼한 것들은 물들여 가지고서 갖풀로 붙였기로 손가락이 딱딱 붙지."

흥보댁이 팍 속아서,

"애겨, 그렇거든 우리 부부 평생 한이 의복 없어 한하다가 먼저 통에 밥 나와서 양대로 먹었더니, 다행히 이 통에서 옷감이 하도 많으니 각기 눈에 드는 대로 옷 한 벌씩 하여 입세."

"내 소견도 그러하네. 언제 바빠 옷 짓겠나. 우리의 식구대로 한 필씩 가지고서 위에서 아래까지 우선 휘감아 보세."

"그리할 일이오. 무슨 비단 가지고서 당신부터 감으시오."

"우리가 넉넉했더면 큰 자식을 성취시켜 전가를 벌써 하고, 건방으로 갈 터이니, 제 방위색 찾아 혹공단을 감으려네."

"나는 무슨 색을 감을까?"

"자네는 곤방 차지 횐 비단을 감을테지."

"옛소. 백여우 같게, 붉은 비단 감을라네."

"딸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하소."

"큰 놈은 막 부득이 진방차지 청색이오, 그 남은 자식들은 제 소견에 좋은 대로 한 필씩 다 감아라."

흥보댁이 또 말하기를,

"저 두 말째놈은 온필로 감어서는 숨 막혀 죽을테니, 까치저고리 본보기로 각색 비단 찢어내어 어깨에서 손목까지 잡아 매어 드리우세 ."

"오, 좋으이. 그리하소."

흑공단을 한 필 빼어, 흥보 먼저 감을 적에, 상투에서 시작하여 뺨과 턱을 휘둘러서 목덜미 감은 후에, 왼 어깨에서 시작하여 손목까지 내려 감고, 도로 감아 올라와서 오른 어깨 손목까지 빈틈없이 감아 올라, 겨드랑이에서 불두덩에 차차 감아 내려와서, 두 다리 갈라 감고 두 발은 발감개하듯 디디고 썩 나서니, 여인네와 자식들은 상투가 없으니까, 머리 동여 시작하여 똑같이 감은 후에 항렬 차례대로 뜰 가운데 늘어서니, 흥보 보고 재담하기를,

"이게 어디 호사이냐, 늘어선 조를 보면 큰 마을 당산의 법수도 같고, 휘감아 놓은 품은 진상 가는 청대 죽물. 색으로 의논하면, 내 조는 까마귀. 아기 어멈 고추잠자리. 큰 놈은 쇠새, 여러 놈들은 꾀꼬리, 해로라기 새 한 떼가 늘어선 데, 저 두 말째 놈은 비단 장사 다니는 길에, 서낭당 나무로다. "

온 집안이 크게 웃고, 흥보가 하는 말이,

"이번 호사를 다 했으니 이 통 하나 마저 탑세."

흥보의 마누라가 박통을 타 갈수록 밥도 나오고 옷도 나오니 마음이 아주 좋아, 이 통을 또 타면 더 좋은 보물이 나을 줄로 속재미가 부쩍 나서,

"이 통 탈 소리는 내 사설로 먹일테니 집에서는 뒤만 맡소."

흥보가 추어,

"가화만사성이라니, 자네 저리 좋아하니 참기물 나오겠네. 어디 보세, 잘 메기소."

흥보댁이 메나리 목으로 제법 메겨,

"여보소 세상 사람, 나의 노래 들어보소. 세상에 좋은 것이 부부밖에 또 있는가."

"어기여라 톱질이야."

"우리 부부 만난 후에 설운 고생 많이 했네. 여러 날 밥을 굶고 엄동에 옷이 없어 신세를 생각하면 벌써 아니 죽었을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가장 하나 못 잊어서 이 때까지 살았더니, 천신이 감동하사 박통 속에 옷 밥 났네. 만복 좋은 우리 부부 호의호식 즐겨보세."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방에서 잠을 잘 때, 부자 서방 좋다 하고 욕심낼 년 많으리라. 암캐라도 얼른하면 내 솜씨에 결단나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탁 타 놓으니, 천만 뜻밖에 미인 하나가 아리따운 맵시를 하고 나오는데, 구름같은 머리털로 낭자를 곱게 하여 쌍용새김 밀화비녀 느직하게 찔렀으며, 매미 머리, 나비 눈썹, 추파같은 모자, 고운 흑백이 분명하고, 연지 뺨, 앵두 순에 박씨같은 고운 잇속, 삘기같은 두 손길, 세류같은 가는 허리, 응장성식 금수의상, 외씨같이고운 발시 보보생련 나오는 양은 해당화가 조으는 듯, 모란화가 말하는 듯, 쇄옥성으로 묻는 말이,

"흥보씨 댁이오?"

흥보가 깜짝 놀라서,

"이게 하도 괴이하여, 당치 않은 세간살이 그리도 많이 나을 적에 만단 의심하였더니 임자 아씨 오셨구나."

납작 엎드려 절을 하며,

"호 좁은 박통 속에 평안히 오십니까? 이 세간 임자시면 모두 가져 가옵시오. 쌀 서 말 여덟 되와 돈 석 냥 아홉 돈은 한끼 양식반찬하였삽고, 몸에 감았던 비단까지 도로 풀어 놓았으니, 한 가지 것 속이오면 벗긴 개자식이오."

저 미인 대답하기를,

"놀라지 마옵시고 내 말씀 들으시오. 당 명황 천보간에 머리를 돌려 한 번 웃음에 백 가지 아름다움이 생기니, 여섯 궁중의 후궁들의 분대를 무색케 하던 양귀비를 모르시오? 어양의 북소리 천지를 진동하여 오니 서쪽으로 가옵다가 아름다운 양귀비가 말 앞에서 죽으니, 마외역에 죽은 향혼 천하에 주류하여 임자를 구하더니, 제비 편에 듣사온즉 흥보씨 적선 행인 부자가 되었다니, 천자 서방 나는 싫으이. 육군 분발할 수 없데. 각선 강남의 부가옹 부자의 첩이 되어, 봄을 따라 밤을 새며 무궁행락하여 보세."

흥보가 저의 가속 흑각 발톱 단목다리 이것만 보았다가 이런 일색 보아 놓으니 오죽이 좋겠는가. 손목을 덤벅 쥐다 깜짝 놀라 턱 놓으며,

"어디 그것 다루것나, 살이 아니고 우무로다. 저러한 것 한참 좋을 제, 잔득 안고 채었으면 뭉게질텐데 어찌할까."

서로 보며 농탕치니, 흥보의 마누라가 좋은 보물 나오라고 소리까지 먹인 것이 못 볼 꼴을 보았구나. 부정 탄 손님 같이 불시에 틀려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고개를 외로 틀고 뒤로 돌아 앉으면서,

"저것들 지랄하지. 박통 속에서 나온 세간 뉘 것인 줄 채 모르고 양귀비와 농탕치는고. 당 명황은 천자로되 양귀비에게 정신 놓아 망국을 했다는데, 박통 세간이 무엇이냐. 나는 열 끼 곧 굶어도 시앗꼴은 못 보겠다. 나는 지금 곧 나가니 양귀비와 잘 살아라."

흥보가 가난하여 계집 손에 얻어먹어 가장 값을 못 했으니 호령이나 할 수 있나. 곧 빌기를,

"여보소, 아기 어멈. 이것이 웬일인가. 자네 방에 열흘 자면 첩의 방에 하루 자지. 그렇다고 양귀비가 나같은 사람 보려고 만리 타국 나왔으니, 도로 쫓아 보내겠나."

처첩하고 수작할 때, 박통 속이 우근우근 무수한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남녀 종이 백여 구, 석수·목수·와수·토수 각색장인 수백 명이 각기 연장 짊어지고, 돌과 나무, 기와 등물 수레에 싣고, 썰매에 싣고, 소에 싣고, 말에 싣고, 지게로 지고, 떼비로 메고 줄로 끌며, 지레로 밀며, 방아타령, 산타령에 굿 치며 나오는데, 이런 야단이 또 있는가, 마른 담배 서너 댓참을 뚝딱뚝딱 서두르니 기와집 수천 간을 동학이 그득하게 경각에 지어 놓고 모두 다 간데 없다. 흥보 살살 둘러보니 강남 사람 재주들은 참으로 이상하여 벽 붙인 그 진흙을 어느 겨를에 다 말리어 도배까지 하였구나.

원채에 본처 두고, 별당에 양귀비요, 안팎 사랑 십여 채며 사면행랑에 노속이오, 사랑을 굽어보면 좌상에 손님이 가득차고, 사죽이 낭자하며 시부로 소일하고, 곳간마다 열고 보면 전곡이 가득가득, 남은 곡식 노적하고, 흥보는 심심하면 양귀비 데리고 후원에 화초구경, 옥난간 밝은 달에 둘이 마주 빗겨 앉아 예상우의곡을 한가하게 의논하니, 이러한 지상신선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흥보가 졸부되었다는 말이 사면에 퍼져가니, 놀보 듣고 생각하여,

'그것 모두 뺏어다가 부익부를 하면 좋되 이 놈이 잘 안 주면 어떻게 처리할건고. 만일 아니 주걸랑은 흥보가 부자로서 제 형을 박대한다고 몹쓸 아전 뒤를 대어 영문 염문 적어 주고, 출패를 돈 백 먹여 향중에 통분내고, 도회까지 붙였으면 이 놈의 살림살이 단번에 떨어엎지.'

흥보의 사는 동내를 급히 물어 찾아 가니, 고루거각 오간팔작 벌집같이 빽빽하며 천문만호 즐비하고 웅장했다. 대문을 여럿 지나 안사랑 앞에 이르니, 흥보가 제 형을 보고 버선발로 내려와서 공손히 절을 하고 반기어 하는 말이,

"형님이 오십니까. 어서 올라가사이다. "

방으로 들어가서 상좌에 앉힌 후에 흥보가 두 손 잡고 고개를 숙이고서 조용히 사죄한다.

"박복한 이 놈 신세가 자분필사 하였더니, 선영의 음덕이며 형님의 덕택으로 부자가 되었기에, 자식들을 데리고서 형님 댁에 건너가서 형님을 뵈온 후에, 형님을 모시옵고 선산에 성묘하자고 날짜를 받았더니, 형님 먼저 오셨으니 하정에 황송합니다. "

놀보의 하는 어조는 좋게 하는 말이라도 평생 남을 잡어 뜯어,

"저러한 부자들이 우리같이 가난한 놈 찾아오기 쉽겠는가. 어찌하여 부자 된고?"

흥보가 제비 살려 박씨를 얻어 부자가 된 내력을 종두지미 다 고 하고,

"한퇴지는 취식강남이라 하더니 나는 좌식강남이오. 밥이나 옷이나 기명이 다 강남 것이오."

놀보 바로 가기로 들어,

"내가 집에 일 많은데 부득이 나왔더니 어서 가야 하겠고."

흥보가 만류하려,

"안으로 들어가서 처자나 보옵시고 무엇 조금 잡수어야 돌아가시는 채비를 하시지요."

놀보가 어서 가서 제비를 청할 터이나 양귀비 구경키로 흥보 따라 들어가니, 제수 나서 영접하여, 이 놈이 양귀비 찾느라고 눈을 휘휘 내둘러 수숙이 절한 후에 제수 먼저 문후하여,

"아주버님 뵈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니 기체 안녕하십니까?"

놀보놈의 평생 행세로 제수 보기를 종같이 하여 아주머니는 고사하고 하오도 안 했더니, 오늘은 전과 달라 앉은 방, 차린 의복, 새눈이 왈칵 띄어 홀대를 하여서는 탈이 정녕 날 듯하고, 경대를 하자하니 혀가 아니 돌아가서 매운 것 먹은 듯이 입을 불며 얼버무려,

"허, 평안하오."

흥보가 종을 불러,

"도련님네 계시느냐? 들어들 와 뵈오래라."

이것들이 멍석 구멍에 근본 길이 들었구나. 세 줄로 늘어 엎드리어 절하고 꿇어앉으니, 소위 백부되는 놈이,

'모시고들 잘 있더냐?' 하든지, '선영의 음덕이다. 좀들 잘 생겼느냐.' 하든지 할 말이 좀 많은데, 저 때려 죽일 놈이 흥보를 돌아보며,

"너 닮은 놈 몇 되느냐?"

흥보 부처 넓은 소견에 개같은 놈 탓하겠는가,묵묵히 말이 없었다. 자식들 나간 후에 또 종 불러,

"이리 오너 라."

이것들이 강남서 나왔기로 아주 열쇠같이 재빠르지.

"예."

"강남 아씨 여쭈어라."

갑자기 미인 하나가 들어오는데, 당 명황같은 풍류 천자도 정신을 놓았는데, 놀보같은 상놈 눈에 오죽이나 놀라겠나. 보더니 턱을 채고 일어서 절 받기를 큰 제수에 비하면 갑절이나 공순하다. 양귀비 거동 보소. 옥수를 땅에 짚고 청산 눈썹 나직하고, 앵도순 반개 하여 옥쟁반에 구슬이 떨어지는 목소리로 문후를 하는데,

"먼 데 살고 천한 몸이 이 댁 문하에 의탁한 지 오래지 않삽기로 처음 문안드립니다. "

놀보놈이 제 생전에 처음 보는 미색이요, 처음 듣는 옥음이라, 넉넉잖은 제 언사에 어찌 대답할 수 없고, 떡 들입떠 안고 싶어 정신올 놓았구나. 벌벌 떨며 대답하기를,

"오시는 줄 알았더면 내가 와서 박타지오."

앵무같은 아이 종이 주물상을 올리는데, 소반 기명의 음식 등물은 생전에 못 보던 것. 형제가 함께 상을 받고, 종년이 옆에 앉아 술을 연해 권하는데, 놀보가 좋은 술을 십여 배 먹어 놓으니 취중에 광증이 나서, 참다가 못 견디어 양귀비 고운 손목 색 들입떠 쥐면서,

"술 한 잔 잡수시오."

다른 계집 같으면 뺨을 치며 욕을 하며 오죽 야단 났겠는가. 안색이 천연하여 좋게 대답하는 말이,

"왜, 내가 물에 빠져요?"

놀보놈이 깜짝 놀라 손목을 썩 놓으며,

"일색뿐 아니시라 <맹자(孟子)>도 많이 읽었구나."

양귀비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흥보의 마누라가 그 뒤를 따라 가는구나. 놀보놈이 무안하여 술상을 물리고서 무슨 심사를 부리자고 사면을 살펴보니, 좋은 비단 붉은 보로 이불을 덮었는데, 일어서서 쑥 빼내어 청동 화로 백탄 불에 부비어 던지면서 분담을 하는 말이,

"계집년은 내외하여 안으로 가려니와, 이불도 내외 하나?"

저 비단이 불에 붙더니 재가 되기는 커녕, 빛이 더옥 고와갔다.

놀보가 묻기를,

"그게 무슨 비단이냐."

"화한단이오. 불쥐털로 짠 것이라 불에 타면 더 곱지요."

"이애, 그것 날 다고."

"그리 하옵지요."

"또 무엇을 가져갈꼬. 네 그 첫 통 속에 쌀 들고 돈 들었던 궤를 둘 다 주려느냐?"

"부자된 밑천이니, 둘 다 어찌 드리겠어요. 하나씩 나눕시다. 어떤 것 가지시려우?"

"돈 궤를 가질란다. "

"그리 하옵시요. 또 무엇이 생각 있소?"

"다 주면 좋건마는 내가 바삐 가야겠기로 그것만 가져가니, 다시 생각나는 대로 연해 와서 가져가지, 내가 번번이 올 수 없으니 기별을 하는 대로 칭탁 말고 보내어라."

"그리 하오리다. "

벼루집같은 궤를 화한단 보에 싸서 제 손수 옆에 끼고 제 집으로 급히 가서, 문 안에 들어서며 종을 불러 하는 말이,

"짚 댓 뭇 급히 취하여, 돈꿰미 한 천 발을 어서어서 꼬와 오라."

안으로 들어가서 제 계집에게 자랑하여,

"여보소, 흥보놈이 참 부자 되었거든. 그 놈의 세간 밑천 내가 여기 뺏어 왔네."

화한단 보를 풀며,

"이것은 불에 타면 더 고운 것이라네."

돈 궤를 내 놓으며,

"이것은 돈이 생겨 부어 내면 또 생기지."

궤문을 열어 놓으니 돈은 난정돈, 몸뚱이는 예전 돈 꿴 듯, 구부려 누운 길이 넉 냥 아흡 돈만한 싯누런 구렁이가 고개를 꼿꼿 들고 긴 혀를 널름널름했다. 놀보 부처가 대경하여 궤문을 급히 닫고 노속을 바삐 불러,

"이것을 갖다가서 문 열어 보지 말고 짚불에 바로 살라라."

놀보 계집이 말리기를,

"애겨, 그것 태우지 맙소. 인제 그런 흥한 것들이 돈 나는 궤 주었다고 자세하면 어찌 하게. 구렁이 쌌던 보를 두어서 무엇하게.

그 보로 도로 싸서 급히 보내시오."

놀보가 추어,

"자네 말이 똑 옳으네."

사환을 급히 시켜 흥보집에 환송하니, 흥보 받아 열고 보니 구렁이는 웬 구렁이, 돈이 하나 가득하지. 제 복이 아니며는 할 수 없는 법이었다.

욕심 없는 놀보놈이 제비를 청하려고 차비를 장만할 때 이런 야단이 없었다. 신 잘 삼는 사람들을 십여 명 골라다가 매일에 서 돈 품삯에, 삼시 먹고 술 담배 착실히 대접하고, 외양간 더그매에 신삼을 찰벼짚을 여남은 짐 내어 놓고, 제비받개 수백 개를 밤낮으로 결어내어, 안채·사랑·행랑이며, 곳간·사당·뒷간채에 앞뒤 처마 다 지르고, 제 대가리 상투 밑에 풍잠을 지른 모양으로 앞뒤로 갈라 꽂고 제비 몰러 나갈 적에, 서리맞은 일이 월의 꽃보다 붉은 한산의 들길을 올라가고, 눈 개고 구름도 흩어진 북풍이 찬 초나라 오나라산을 다 찾았지만 제비 소식은 알 수 없다. 놀보가 제비에게 상사병이 달려들어, 길짐승은 쪽제비를 사랑하고, 마른 그릇은 모제비만 사고, 음식은 칼제비 수제비만 하여 먹고, 종이 보면 간제비를 접고, 화가 나면 목제비를 하는구나.

그렁저렁 겨울 지나 정월 이월 삼월 되니, 강남서 오는 제비 각 집을 날아들 제, 신수 불길한 제비 한 쌍이 놀보 집에 들어가니, 놀보가 제비를 보고 집짓기에 수고된다. 제가 손수 흙을 이겨 메주덩이만하게 뭉쳐 처마 안에 집을 짓고, 검불을 많이 긁어 소 외양간 짚 깔 듯이 담뿍 넣어 주었더니, 미친 제비 아니며는 게다 알을 낳겠느냐. 집을 잘못들어 알 여섯을 낳았더니, 마음 바쁜 놀보놈이 삼시로 만져 보아, 다섯은 곯고 하나만 까서 날기 공부를 익힐 때에, 성질이 모진 놀보 소견에 구렁이가 먹으려 할 때 쫓았으면 저리 되었을까. 축문을 지어 제사하여도 구렁이가 오지 않아, 대발틈에 다리 부러지면 제가 동여 살려줄까, 밤낮으로 축수하여도 떨어지지도 아니하여, 날기 공부하느라고 제 집 가에 발 붙이고 날개를 발발 떨면 놀보놈이 밑에 앉아,

"떨어지소, 떨어지소."

두 손 싹싹 비비어도 종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렁저렁 점점 커서 날아가게 되었는데 놀보가 실패하자 제비 절로 다리부러지기를 기다리면 놓치기 염려되니, 울려 놓고 달래리라. 제비집에 손을 넣어 제비새끼 잡아내어 연약한 두 다리를 무릎 대고 자끈 꺾어 마루바닥에 선뜻 놓고, 천연히 모르는 체 뒷짐지고 걸으면서 목소리 크게내어 풍월을 읊는 것이었다.

"황성에 허조 벽산월이오, 고목은 진입창오운."

안으로 돌아서며 제비새끼 얼른 보고, 생침 맞는 된 목으로 제 계 집을 급히 불러,

"여보소, 아기 어멈. 내가 아까 글 읊노라 미처 보지 못했더니, 제비 새끼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으니 불쌍하여 보겠는가. 어서 감아 살려 주세,"

저 몹쓸 놀보놈이 제비 다리 감으려 할 때, 흥보보다 더 잘 한다고 대민어 껍질 벗겨 세 겹을 거듭 싸고, 당사실은 가늘다고 당팔사 주머니 끈으로 단단이 동인 후에 제 집에 도로 넣고, 행여나 찬바람 쐴까 섶 두텁고 큰 포대기를 서너 겹 둘렀더니, 놀보를 망하게 할 제비기에 죽을 리가 있겠느냐. 십여 일이 지나더니 부러진 다리가 완합하여 비거비래 출입하더니, 연지사일 사소거, 강남으로 들어갈 때, 놀보가 부탁하여,

"여봐라, 내 제비야. 딱 죽을 네 목숨을 내 재주로 살렸으니, 아무리 짐숭인들 재생지덕 잊을 리 없지. 흥보의 은혜 갚은 제비가 세 통 박씨를 주었으니, 너는 갑절 더 보태어 여섯 통 열릴 박씨를 부디 수이 물고 오너라. 삼월까지 있지 말고, 과세 즉시로 발행하여 정월 보름 안에 당도하면 기다리기 괴롬잖고 오죽이나 좋겠느냐."

저 제비가 들어가서 놀보의 전후 내력을 장수 전에 고한 후에 박씨 하나 얻어두고 명춘 삼월 기다릴 때,

이 때에 놀보놈은 정월 보름에 제비 올까 앉은뱅이 삯군 얻어 강남 급주도 보내 보고, 안질난 놈 비싼 삯을 주어 제비 오는 망을 보아, 제비에게 드는 돈은 아끼지 않고 써 낼 때, 그렁저렁 삼월 되어 지붕 위에 오락가락 하는 제비가 놀보 집에 다시 오니, 놀보가 아주 반겨,

"반갑다, 내 제비야. 어디 갔다 인제 왔나. 김천씨 새에게 벼슬을 내렸으니, 벼슬하러 네 갔더냐. 상고의 유소씨가 나무로 집을 세웠으니, 그것 배우러 네가 갔더냐. 오의(烏衣) 옛 거리에 지는 해 빗기었다. 왕사당전에 네 갔더냐. 얼마나 많은 홍분이 진흙으로 쌓였으랴, 미앙궁전 네 갔더냐. 어이 그리 더디 와서 내 간장을 다 녹이느냐. 박씨 물어 왔거들랑 어서 급히 나를 다오."

손바닥을 떡 벌리니 저 제비의 거동 보소. 물었던 박씨 하나를 놀 보 손에 떨어뜨리고 두 날개 편편하여 돌아도 아니 보고 백운간에 날아가니, 놀보 좋아 춤을 추며,

"얼씨구나, 좋을씨고. 부익부를 하겠구나."

저의 가속을 급히 불러 박씨를 주며 자랑한다. 놀보 가속이 박씨를 보고,

"애겨 이것 내 버리소. 갚을 보(報)자, 원수 구(仇)자, 바람 풍(風)자 쓰였으니, 원수 갚을 바람이니 어디 그것 쓰겠어요."

놀보가 대 답하기를,

"자네가 어찌 알아. 원수 구라 하는 글자 군자호구란 짝 구(逑)자와 통용하니 어떠한 미인으로 내 짝 갚는다는 말이로세."

놀보 가속이 들어 보니 이런 죽을 말이 있나. 못 할말을 연해 하여,

"만일 그러하다면 바람 풍자는 웬일인가."

"바람 풍자는 더 좋지. 태호 복희씨는 풍(風)자 성으로 왕 하시고, 순임금은 오현금으로 <남풍시>를 노래하고, 문왕 무왕은 장한 덕화로 태평한 시대를 만들었으며, 주공은 성인이라 <빈풍시>를 지으시고, 한태조는 수수풍, 광무황제는 곤양풍, 와룡선생은 적벽풍, 대풍이 세 번 한나라를 도왔으니 장하다 하려니와, 백이숙제 고절풍, 엄자릉의 선생풍, 도정절의 북창풍이 만고에 맑았으니, 그도 아니 좋을손가. 우리도 이 박을 심어 솔솔 부는 봄바람에 입묘하여 사월 남풍 점점 자라, 우순풍조 호시절에 꽃이 피고 박이 열려, 팔월고풍 따서 켜면 보물이 풍풍 나와 집안이 풍덩풍덩, 근래 풍속 좋은 호사 갑사 풍차 금패 풍잠 학슬 풍 안경을 떡 고이고, 은 장식한 백마 높이 타고 봄바람에 달려, 풍호무운하여 보고, 구름은 엷고 바람 가벼운데 오천이 가까운 데에 방화수류하여 보고, 풍류스런 사람 좋은 팔자 밤낮 풍악으로 지낼 적에, 네 귀에 풍경 단 집 방안에 병풍 치고, 풍로에 차관 얹고, 풍석 없는 자네 배를 선풍도골 내가 타고, 풍편에 가끔 들리는 방아찧는 소리 풍풍 찧었으면 경수에 바람은 없는데 물결 스스로 일어나 잘금잘금 날 것이니, 그만하면 풍족하지 잔말 말고 심어 보세."

책력을 펴 놓고 씨뿌릴 날 가려 내어 사당 앞을 급히 파고 못자리 할 거름을 모두 게다 퍼 쟁이고, 단단이 심었더니, 아침에 심은 것이 오후가 겨우 되어 솟아난 큰 박순이 수종난 놈 다리만큼 자라났다.

놀보 아내 깜짝 놀라,

"여보시오, 아기 아버지 이것을 급히 빼 버리시오. 은나라의 나쁜 조짐으로, 아침에 났던 것이 저녁 때 큰 아람져서, .요물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정녕 재변이요."

놀보가 장담하여,

"나물이 되려는 것은 떡잎부터 알 것이니, 네다섯 달이 지나가면 억만금 세간살이 그 넝쿨에 날 터이니 일찍 아니 잡아 쥐지 않겠나."

이 박의 크는 법이 달마다 갑절씩이 더럭더럭 크는구나. 옆에서 순이 나고 순이 나고, 한 순이 커지기를 한 아름이 넘는구나. 어디가 턱 걸치면 모두 다 무너질 때 사당에 걸치더니 사당이 무너져 신주가 깨어지고, 곳간에 걸치더니 곳간이 무너지고, 왼 동내 집집마다 부지불각 턱 걸치면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면 값을 물고 무너지면 값을 물어, 그렁저렁 이렇게 든 돈이 삼사천 냥 넘었으니, 놀보가 벌써부터 박의 해를 보는구나.

꿎이 피어 박 맺을 때에, 첫 번 바로 북통만씩, 십여 일이 지내더니 나루에 거루선만하고, 한 달이 되더니 조창 세곡선만 하고, 여섯통이 열렸거든 놀보가 좋아하며 가르키며 국량하여,

"저 통 색이 노란 수가 속에 정녕 금이 들었지. 황금 적금이라니 은도 누르겠다. 어느 통에 미인이 있노, 그 통을 똑 알면 포장으로 둘러 두게."

한참 이리 걱정할 때, 허망이라 하는 놈이 성명을 듣고 행사 보면 이름이 헛되지 않음을 알겠구나. 동네 사람 앉으며는 놀보 공론하는구나.

"놀보같이 약은 놈이 박에다가 쓰는 돈은 아끼지 않고 써내니, 무슨 꾀로 돈 천이나 쓰게 할꼬."

허망이가 장담하여,

"나밖에 할 이 없지."

하고, 놀보 집에 건너가서,

"여보소 놀보씨, 박통 일을 알 수 없어 걱정을 하신다니 나를 어이 안 찾는가?"

놀보가 반겨 물어,

"자네가 알겠는가?"

허망이 대답하기를,

"모수가 자천 하는 말을 남은 암만 웃더라도 노형이야 속이겠나. 값 정하여 주었다가 박 타 보아 안 맞거든 그 돈 도로 찾아가소."

"그리 하기로 하세."

맞추면 천 냥 절가, 3백 냥 선금 내시고 박 속의 일을 알려 할 때, 허망이가 지닌 재주는 오행으로 점을 치는 복구분법이었다. 박통 노인 묏자리 복구분법으로 보아가니, 신통히 맞추거든. 첫 통 보고 하는 말이,

"모두 다 생금인데 누가 혹 가져갈까 노인 한 분이 수직한다. "

둘째 통을 한참 보다가,

"사람이 많이 들었구나."

놀보가 옆에 앉아 손수 장담하는 것이 더 우스웠다.

"집 지을 장인들과 종들이 들었나보이."

셋째 통 또 보더니,

"애겨 계집이 많이 있다. "

"서시가 나오는데 계집종들 따라오나,"

넷째 통을 또 보더니,

"풍류 기계가 많이 있다. "

"내가 두고 행락하라고."

다섯째 통 가리키며,

"그 가마 아주 길다. "

"나하고 서시 둘이 타라고."

여섯째 통 가리키며,

"그 말 아주 좋다. "

"타고도 다닐 테요. 밧줄.늘여 매어 두지."

"대강만 볼지라도 들 것 다 들었으니 어서 타고 보는 수일세."

책력을 펴 놓고 길일을 가려 내어 박통을 타려할 때, 섬 술 빛고, 섬 밥 짖고, 소 잡히고, 개 잡혀서 음식을 차린 후에, 팔 힘 세고 소리 좋은 건장한 역꾼들을 질끈 먹고 댓 냥 삯에 30명을 얻어다가 생금통 먼저 탈 때, 놀보가 좋아하며 제가 소리 메기는데, 똑 금이 나올 줄로 알고 금으로 메긴다.

"여보소 세상 사람 금 내력 들어 보소. 운남성 여수에 생겨나고, 흙 속에 묻히어서 전국 논객 소진은 구변으로 많이 얻어 실어 오고, 곽거는 효성으로 묻힌 황금솥을 파내었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오행의 가운데요, 팔음의 머리로다. 범아부를 이간시키기로 진평은 흩었는데, 고인이 주는 것을 양진은 어이 마다했는고."

"어기여라 톱질이야."

"나는 제비를 살렸더니 금 박통씨 얻었으니, 이 통을 어서 타서 금이 많이 나오며는 석숭을 부러워할까. 이 동네가 금록되리."

"어기여라 톱질이야."

"서시와 왕소군을 앉히도록 황금집을 지어 볼까. 자류청총 말을 달리게 황금채찍을 만들고저."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의 타니 박통 속에 우군우군 글 읽는 소리가 난다.

"맹자 견양혜왕 하신대 왕왈 수불원천리 이래하시니 역장유이리 오국호잇까? 마상에 봉한식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보내는구나. 가련 놀보 망하니, 상전이라 할 자가 뵈지를 않는구나?"

놀보가 듣고 하는 말이,

"어디 그게 박 속이냐? 정녕한 서당이지. 글귀는 당음인데, 강포가 놀보 되고, 낙교가 상전되러 그것은 웬일인고."

한참 의심하는 중에 박통 문을 반만 열고 노인 한 사람이 나오는 데, 차린 복색이 제법이었다. 헐고 헌 체뿔관에 빈대 알이 따닥따닥 붙고, 생마포 적삼 위에 개가죽 묵은 배자가 무릎 아래 털렁털렁하고, 구멍 뻥뻥 헌 중치막은 아랫단에 황토 뭍고, 대대로 물려받은 묵은 바지는 오줌 싸서 얼룩지고, 석 자 가옷 홑베 주머니는 일가산 을 넣어 차고, 따닥따닥 기운 버선 네날 초혜 들메 신고, 곱돌 조대 중동 쥐고 개털 부채로 얼굴 가리고, 놀보의 안방으로 제 집같이 들어가니, 놀보가 보고 장담하여,

"흥보는 첫 통 탈 때 동자가 왔다더니, 내 박은 첫 통에서 노인이 나오더니 그로만 볼 지라도 관동지분이 있고, 저 주머니 속에 든 게 모두 다 선약이지."

바삐 바삐 따라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토깽이같은 낮에 빈대 코가 맵시 있다. 뱁새 눈 병어 입에 목소리는 아주 커서,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을 모르느냐? 네 할아비 덜렁쇠, 네 할미 허튼덕이, 네 아비 껄덕놈이, 네 어미 허천례, 다 모두 댁 종이라. 병자 팔월일에 과거 보러 서울 가고, 댁 사랑이 비었을 때 성질이 흉악한 네 아비놈이 가산 모두 도적하여 부지거처 도망하니 여러 해를 탐지하되, 종적 아직 모르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자세히 들어보니 너희 놈들 이곳에 있어 부자로 산다기로, 불원천리하고 나왔으니 네 처자, 네 세간을 박통 속에 급히 담아 강남 가서 고공살이를 하라."

놀보가 들어 보니 정신이 캄캄하여 아무렇게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라 하자 한들 삼대나 되었으니 증인 설 사람이 없고, 싸워나 보자 해도 이 양반 생긴 것이 불에 넣어도 안 타게 생긴데다, 송사를 하자 하니 좋지 않은 그 근본을 읍촌이 다 알 것이니, 어찌 하면 무사할까. 저 혼자 궁리할 때, 저 양반의 호령 소리가 갈수록 무서웠다.

"이놈 놀보야, 옛 상전이 와 계신데 네 계집, 네 자식이 문안을 아니 하니 이런 변이 있단 말이냐. 이리 오너라."

박통 속이 관문 같이,

"예."

범강·장달·허저같은 힘세고 무섭게 생긴 여러 놈이 몽치를 들고, 올바를 들고 꾸역꾸역 퍼나오니, 놀보가 이 광경을 보니 죽을밖에 수가 없었다.

엎디어 애 걸한다.

"여보시오, 상전님, 이 동네가 반촌이오. 아비의 가세 부요키로 관을 쓰고 지내오니 이 고을 통경내에 모모한 양반 댁이 다 모두 사돈이요. 이 소문이 나게 되면 소인은 고사하고 그 양반들 우세오니, 자라는 초똑목 꺽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하여 아무 말씀 마옵시고 속전으로 바치옵게 속량하여 주옵소서."

"그 사이에 여러 십년 네 놈의 아비 어미, 네 놈과 계집 자식 고공살이 아니 하였으니 공돈은 어찌할꼬?"

"분부대로 하오리다. "

"네 놈 죄상을 생각하면 기어이 잡아다가 주야 악역 시키면서 만일 조금만 잘못하면 초당 앞의 말말뚝에 거꾸로 매어 달고 대추나무 방망이로 두 발목 복숭아뼈 꽝꽝 때려가며 부려먹자 하였더니, 네 말이 그러하니 또한 사람으로 좋게 대접하지. 공돈 속돈 바칠테면 지체 말고 썩 들여라."

놀보가 물어,

"몇 냥이나 바치올지."

"너만한 놈을 데리고서 돈 다소를 다투겠나."

조그마한 주머니를 허리에서 끌러주며,

"아무 것이든지 여기만 채워 오라."

놀보놈이 제 소견에 저 양반 저 억지에 많이 달라 하게 되면 이일을 어찌할꼬, 잔뜩 염려하였다가, 이 주머니 채우자면 얼마 아니들겠거든, 아주 좋아 못 견디어,

"그리 하오리다. "

주머니를 가지고서 제 방으로 들어가서 돈 열 냥을 풀어 놓고, 한 줌 넣고 두 줌 넣어 열 줌이 넘어가되 아무 동정도 없었다. 푼돈이라 그러한가. 양돈으로 넣어 보아, 닷 냥 열 냥 스무 냥을 암만 넣어도 간데 없다. 묶음으로 넣어 볼까, 스무 냥씩 묶은 묶음, 백 묶음이 넘어가도 형적이 없다. 이 주머니 생긴 품이 무엇을 넣으려 하면 주둥이를 떡 벌려서 산덩이도 들어갈 듯, 넣고 보면 딱 오무려 전과 도로 같아진다.

"어허 이것 어찌 할꼬."

돈 천 냥 잠근 궤를 궤째 모두 밀어 넣어도 어디 간지 알 수 없다. 이대로 하다가는 묵은 상전 고사하고 자신을 팔아 버려 새 상전 생기겠다. 부피가 많기로 곡식을 넣어보자. 쌀 백 석을 넣어 보아, 2백 석 3백 석을 곧 넣어도 그만이라. 벼 천 석 쌓은 노적 나무벼늘, 짚벼늘, 심지어 뒷간 거름 모두 다 쓸어 넣어도 발심도 아니 한다. 놀보가 겁을 내어 주머니를 들고 보아,

"이게 어디 구멍 났나?"

혼술 밑을 다 보아도 가죽으로 만든 것이 바늘 찌를 틈이 없다.

"애겨 이것 어찌할꼬. 사람 죽일 것이구나."

주머니를 가지고서 양반 앞에 다시 빌어,

"여보시오, 상전님, 이게 무슨 주머니오?"

"네 이놈, 왜 묻느냐?"

"아무 것이라도 들어가면 간데 없소."

"에라, 이놈 간사하다. 그럴 리가 왜 있으리. 조그마한 주머니를 채워 오라 하였더니, 아무것도 아니 넣고 이 소리가 웬 소린고. 이리 오너라. 네 저놈 매를 때려라."

놀보가 황급하여 애절히 빌었다.

"비옵니다. 상전님 덕택에 살려주세요. 공돈 속돈 또 바치지, 이 주머니는 채울 수 없소."

"네 원이 그러하면 네 할아비, 네 할미, 네 아비, 네 어미, 네 아들, 네 딸년, 네놈까지 일곱 식구, 매 식구에 일천 냥씩 7천 냥을 바쳐라. 만일 잔말 하였다가는 네놈 여기 넣으리라."

주머니 떡 벌리니 놀보가 황겁하여 7천 냥 또 바치니, 저 양반이 그 돈을 받아 주머니에 들어치니 경각에 간데 없다.

놀보가 속량터니 상전이라 아니하고 생원으로 부르겠다.

"여보시오, 생원님. 이왕 끝난 일이니 주머니 이름이나 가르쳐 주옵소서."

속였던 저 양반이 억을 것을 다 먹더니 마음이 낙락하여 말씨를 좋게 하여,

"이 주머니가 능천낭이다. 천지 개벽한 연후에 불충 불효하는 놈들 도덕도 의리도 없이 모은 재물 뺏어 오는 주머니다. "

"누구누구 것 뺏어 왔소?"

"어찌 다 말하겠나? 한나라 양기의 세간은 한 편 귀도 못 차더라."

"그 세간은 얼마나 되드라우?"

"돈만 해도 30여 만만이지. 당나라 원재의 세간도 한 편 귀도 못차더라."

"그 세간은 얼마나 되드라우?"

"호초만 하여도 8천 석이지야."

"그렇게 뺏어다가 다 어디 써 계시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구 구제하는 사람, 형세가 가난하면 이 재물 나눠 주어 부자되게하였지. 그것도 조선 땅이지, 박흥보라 하는 사람 마음이 인자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되, 형세가 가난키로 이 주머니 있는 세간 절반 남아 보냈지야."

놀보놈 평생의 성질이, 다른 사람 하는 말은 기어이 뒤받겠다.

"만일 그러할 양이면 안자같은 아성인이 단표누항하였으며, 동소남의 하늘이 낸 효도로도 숙수공양 못하오니 주머니에 있는 세간 왜 아니 보내었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많이 많이 보냈더니, 염결하신 그 어른들 무명지물이라고 다 아니 받더구나. 누가 허물 없으리오. 고치면 귀할 테니 너도 이번 개과하여 형제간 우애하고, 인근에 화목하면 이 재물 더 보태어 도로 갔다 줄 것이요, 그렇지 아니 하면 한장 설 때 한 번씩을 큰 비가 올지라도 우장쓰고 올 것이니 지질하게 알지 말라."

당하에 내려가더니 갑자기 간데 없었다.

박을 타던 역군들이 이 꼴을 보아 놓으니 무색이 막심하여 다시 탈 흥이 없어 각각 집으로 돌아가려 하니 놀보가 만류하여,

"아까 왔던 그 노인이 상전인 게 아니라, 은금이 변화하여 내 지기를 받자 하니, 만일 중지하여서는 저 다섯 통에 있는 보화를 흥보 갖다 줄 것이니, 대명당을 쓰려 하면 초년패가 꼭 있나니 무안해 하지 말고 어서어서 톱질하소."

놀보가 설소리를 또 메기면서 부자만을 원하것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인간의 좋은 것이 부자밖에 또 있느냐. 요임금은 어찌하여 일이 많다고 마다 하시고, 맹자는 어찌하야 불인하면 된다 하셨는고. 다사해도 나는 좋고 불인해도 내사 좋으이,"

"어기여라 톱질이야."

"월나라 범여가 부자된 것은 그 스승 계연의 남은 꾀요, 전국시대 백규의 치산하기 손오의 병법이라. 재물이 없으며는 잘난 사람 쓸데없네, "

"어기여라 톱질이야."

"공자같은 대성인도 자공이 아니며는 철환을 천하 어찌하며, 한 태조 영웅이나 소하 곧 아니면 통일천하 할 수 있나."

"어기여라 톱질이야."

"배금문입자달에 임금도 사랑하고, 일백금전편반혼 귀신도 안 무서워."

"어기여라 톱질이야."

"이 통을 어서 타서 좋은 보물 다 나오면, 부익부 이내 형세 무궁행 락하여 보세."

슬근슬근 거진 타니 피채 꿰미가 박통 밖에 빼족 내밀었다. 놀보가 보고 좋아하며,

"애겨 이것 돈꿰미."

쑥 잡아 빼어 놓으니 줄봉사 5, 6백 명이 그 줄을 서로 잡고 꾸역꾸역 나오더니, 그 뒤에 나오는 놈은 곰배팔에 앉은뱅이, 새앙손에 반신불수, 지겟다리 갈 디딘 놈, 밀지로 코 덮은 놈, 다리에 피 칠한 놈, 가슴에 구멍난 놈, 얼어 부푼 낯바닥에 댕강댕강 물 떨어지는 놈, 입술이 하나 없어 잇속이 으등한 놈, 다리가 팅팅 부어 모기둥만씩한 놈, 등덜미 쑥 내밀어 큰 북통 진 듯한 놈, 키가 한자 남짓한 놈, 입이 한 편 돌아간 놈, 가죽관 쓴 놈, 체뿔관 쓴 놈, 패랭이 꼭지만 쓴 놈, 웅장건을 끈 달아 쓴 놈, 물매 작대 멜빵만 진 놈, 감태 한 줌 헌 공석 진 놈, 온 몸에 재 칠하여 아궁이에서 자고난 놈, 헐고 헌 고의 적삼 등잔 기름에 절음한 놈, 그저 삐걱삐걱 나오는데, 사람들 모은 수가 대구 시월영(十月營)만한데, 각각 소리질러 놀보를 불러대니 이런 야단이 없구나. 그 중에도 영좌와 공원이 있어, 영좌라 하는 영감 나이 50 남짓한데, 오랫동안 과객질에 공것 먹는 수가 터져 힘도 별로 안 들이고 여상으로 하는 수작이 사람 죽일 말이로다.

헌 갓에 벼릿줄, 헌 중치막에 방울띠, 아주 긴 담뱃대를 한가운데 불끈 쥐고 점잖게 나오더니, 동무들을 책망하여,

"왜 이리들 요란하냐. 한 달 두 달 내에 끝날 일이 아닌 것을, 어이 그리 성급한고. 아무 말도 다시 말고 내 명패로 시행하지."

놀보 안채 대청 위에 허물 없이 올라 앉아, 끝없는 반말 소리로,

"바깥주인이 어디 있노. 이리 와서 내 말 들어라."

놀보가 전 같으면 이러한 과객 보고 오죽 호령 잘 할 테지만, 여러 걸인의 호령 소리에 정신을 놓았다가, 이 분의 하는 것이 점잖아 보이거든, 원정을 하여 보자 하고, 올라 가 절한 후에 공순히 여쭙기를,

"본댁은 어디온데 무슨 일로 오시오며, 저리 많은 동행 중에 성한 사람 없사오니, 어찌하여 오셨나이까?"

영좌가 대 답하기를,

"우리들이 온 내력은 5, 6일간 쉰 후에 그로부터 수작하겠지만, 수다한 동행들이 저 좁은 박통 속에 여러날 고생하여 기갈이 자심하니, 좋은 안주 술 대접과 갖은 반찬 더운 점심, 정결한 사처방에 착실히 대접하라."

놀보가 깜짝 놀라 애절히 비는 말이,

"저 많은 손님네에게 주식 대접할 수 있소? 대전차하 하옵시다."

영좌가 대답하기를,

"손님 대접하는 법이 밥상 하나 하자 하면 접시 일곱, 종지 둘, 조칫보에 갖은 반상, 반찬 값만 할지라도 댓 냥이 넘을 터이나 주인의 폐를 보아 댓 냥으로 결정하니, 손님 한 분에 매일에 밥값 석 냥, 술·담배 값 한 돈씩 파전 쇠전 섞이지 않게 착실히 차하하라."

놀보가 할 수 없어 3천 냥을 내어 놓고, 한 끼 밥값을 차하하니 몇 냥 남지 않는구나. 놀보가 다시 빌어,

"귀하신 손님네를 여러날 만류하여 쉬어 가면 좋겠으나, 내 집 열 배 더 있어도 못 다 앉힐 터이오니, 오신 내력 말씀하여 쉽게 처분케 하옵시다."

"주인 말이 그러하니 아뭏거나 하여볼까. 우리나라 벼슬 중에 활인서란 마을 있어, 관원 서리 창고지기들이 누만 냥 이를 남겨 수많은 우리 걸인 돈을 주어 먹이더니, 주인 조부 덜렁쇠가 삼천 냥 본전 쓰고 병자년에 도망하여 거처를 모르게 되었으니 매년 삼리, 삼삼은 구를 본전에서 그렁저렁 수십 년에 본전이 다 없어서, 우리 발료를 받지 못 하더니, 조선 왔던 제비 편에 주인 소식을 자세히 듣고, 활인서에 발괄한즉 관원의 분부로 '만리 타국에 있는 놈을 공문으로 오가기 번거로우니, 너회들이 모두 가서 여러 해 밀린 변리 받아 오되, 만일 완강히 거절하거들랑 그 놈의 안방에 가서 먹고 반듯 누웠어라.' 분부 모시고 나왔으니, 갚고 아니 갚기는 주인의 소견이지."

놀보가 기가 막혀 공손히 다시 물어,

"우리 조부가 그 돈 쓸 때 수표에다 수표 착명 중인 있었소?"

"있지."

"여기 가져 오셨습니까?"

"아니 가져 왔지."

"수표가 있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징벌하지 않는 법인데, 수표도 안 가지고 빚 받으러 오셨습니까?"

"일 년쯤 되었으면 강남 왕래할 터이니, 우리 식구 여기서 먹고, 동행 하나 보내어서 수표를 가져오지."

놀보가 들을수록 사람 죽을 말이로다. 무한히 힐난하다, 곱친 이자로 육천 냥에 원한을 풀어 보낼 적에, 영좌가 하는 말이,

"갖다가 바쳐 보아 당상께서 적다 하면 도로 찾아 올 것이니, 홀홀히 떠난다고 섭섭히 알지 말지."

일시에 간데 없었다. 걸인을 보낸 후에 셋째 통 또 타려고 할 때, 놀보 저도 무안하여 아니리를 연해 짜넣어,

"선흉후길이오, 고진감래요. 세 번 호령하고 다섯 번 타일러 훈계 한다하니, 무한 좋은 보화가 이 통 속에는 꼭 들었지."

박 타는 역군 중에 입바른 사람이 있어 옆구리에 칼이 와도 할말은 똑 하겠다.

"여보소 놀보씨, 이 통 설소리는 내가 메기면 어떤가?"

놀보가 허락하니, 놀보를 꾸짖는 박사설로 메기었다.

"요순우탕 태평시에 인심들이 순박, 공자맹자안자증자 성인님은 행실들이 검박, 밀화 늙어 호박, 구슬 발은 주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근래 풍속 그리 소박, 사람마다 모두 경박, 남의 말을 대고 타박, 형제간에 몹시 구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흥보의 심은 박, 제비 은혜 받는 박, 놀보가 심은 박, 제비 원수 받는 박, 양반 나와 바로 결박, 걸인 나와 무수 공박."

"어기여라 톱질이야."

"네 정경이 저리 절박, 네 사세가 하도 망박, 불의로 모은 재물 부서지기 쪽박."

슬근슬근 톱질하여 거진 타니, 사당패의 법이란 게 그 중에 연계사당이 앞서는 법이었다.

흩은 낭자머리 때묻은 옷으로, 박통 밖에 썩 나서니 놀보가 깜짝놀라,

"애겨 서시 나오노라, 하님이 먼저 나온다."

내외를 시키기로 금잡인이 대단하여 일꾼 떨거지를 모두 몰아 문밖으로 보내고서, 휘장이 모자라니 홑이불, 이불 안팎, 돗자리, 문발이며 심지어 멍석까지 담뿍 둘러 막았더니 그 뒤에 서시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낭자도 하였으며, 길게 딴 고방머리 곱게 빼고, 명주사 수건 자주 수건 머리도 동였으며, 연두색 저고리에 긴 담뱃대 물었으며, 따라오는 짐꾼들은 곱게 겨른 오장치에 이불보·요강·망태·기름병도 달아 지고 꾸역꾸역 나오더니, 놀보 보고 절을 하며,

"소사 문안이요.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로 의논하면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담양·옥천·정읍·동복·함평의 월량산 여기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으로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 강남 황제 분부로써, '네 나라 박놀보가 삼국에 유명한 부자라니 박통 타고 그리 가서 수천 냥을 뜯어내되, 만일 적게 주거들랑 다시 와서 알리어라.' 분부 모시고 나왔으니 후히 차하하옵소서."

놀보가 할 수 없어 제 손수 눌키겠다.

"나오던 중 상이로다. 너회들 장기대로 염불이나 잘 하여라."

사당 거사가 좋아하고,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의 절차대로 연계사당 먼저 나서서 발림을 곱게 하고,

"산천초목이 다 무성한데 구경가기 즐겁도다. 어야여, 장송은 낙락, 기러기 훨훨, 낙락장송이 다 떨어진다. 성황당 어리궁 뻐꾹새야 이 산으로 가며 어리궁 벅궁, 저 산으로 가며 어리궁 벅궁."

"이야, 잘 논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초월이요."

또 한 년이 나서면서,

"녹양방초 다 저문 날에 해는 어찌 더디 가며, 오동야우 성근 비에 밤은 어찌 길었는고, 얼사절사 말 들어 보아라. 해당화 그늘 속에 비 맞은 제비같이 이리로 흔들 저리로 흔들, 흔들흔들 넘논다. 이리로 보아도 일색이요, 저리 보와도 일색이라."

"이 애, 잘 논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구강선이오."

또 한 년 나오더니,

"갈까보다 갈까보다, 잦힌 밥을 못 다 먹고 임을 따라 갈까보다. 경방산성 빗도리길로 알박이 처자 앙금 살살 게게 돌아 간다. "

"네 이름은 무엇이냐."

"일점흥이오."

또 한 년이 나오면서,

"오돌또기 춘향 추향월의 달은 밝고 명랑한데, 여기다 저기다 얹어 바리고 말이 못 된 경이로다. 만첩 청산 쑥쑥 들어가서 휘어진 버드나무 손으로 주루룩 훑어다가, 물에다 둥덩실 둥덩실, 여 기다 저기다 얹어 버리고 말이 못 된 경이로다. "

"잘 한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설중매요."

또 한 년이 나오며, 방아타령을 하여,

"사신 행차 바쁜 길에 마죽참이 중화로다. 산도 첩첩 물도 중중 기자왕성이 평양이라. 청천에 뜬 까마귀가 울고 가니 곽산, 모닥 불에 묻은 콩이 튀어 나오니 태천, 찼던 칼 빼어 놓으니 하릴 없 는 용천검, 청총마를 들입다 타고 돌아보니 의주로다. "

"잘 논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월하선이오."

또 한 년이 나오면서 자진방아타령을 하여,

"유각골 처자는 쌈지장사 처녀, 왕십리 처자는 미나리장사 처녀, 순창 담양 처자는 바구니 장사 처녀, 영암 강진 처자들은 참빗장사 처녀, 에라뒤야 방아로다. "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옥이오."

한참 서로 농탕치니 놀보댁 강짜가 나는구나.

천도머리 돔방치마 속곳 가래 풀어 놓고, 버선발 평나무신 왈칵 뛰어 냅따 서서, 놀보 앞에 앉으면서,

"나는 누구만 못 하기에 사당 보고 미치느냐?"

놀보가 전 같으면 볼에 상처가 곧 날 테나, 사당에게 우세될까 미운 말로 별나게 보아,

"차린 의복과 생긴 맵시가 정녕한 관물이지. 풍류랑들 보았으면 여럿 패가시키겠다. 염불하던 사당들이 예쁘기도 하거니와, 강남 황제 보냈으니 홀대할 수 있겠느냐."

매 사람에 일백 냥씩 후히 주어 보낸 후에, 설소리꾼에게다 분을모두 풀어,

"방정스런 저 자식이 톱질 사설을 잘못 메겨 떼방정이 나왔으니, 물렀거라 내가 메길께."

놀보가 분을 내어 통사설로 메기것다.

"헌원씨가 만든 배를 타고 나니 이제불통, 공부자 가르침에 게으르지 아니하여 칠십 제자 육예 신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한나라 숙손통, 당나라 굴돌통, 옛 글에 있는 통 모두 다 좋은 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어찌 다 이내 박통은 모두 다 몹쓸 통, 첫번 통은 상전통, 둘째 통은 걸인통, 셋째 통은 사당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세간을 다 뺏기니 온 집안이 아주 허통, 우세를 하도 하니 처자들이 모두 패통, 생각하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절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어서 타세 넷째 통, 이번은 분명히 세간통, 그렇지 않으면 미인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내 신수가 아주 대통, 어찌 그리 신통, 뺏뜨려라 이내 죽 통, 흥보 보면 크게 호통."

"어기여라 톱질이야."

슬근슬근 거진 타니, 열댓 살 된 아이가 노란 머리칼에 창옷을 입고 박퉁 밖에 썩 나서니, 놀보가 아주 반겨,

"애겨 이게 선동이지."

삼십 넘은 노총각이 그 뒤를 따라 또 나오니 놀보가 더 반겨,

"동자가 한 쌍이지."

그 뒤에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오는데, 앞에 선 두 아이는 검무장이, 북잡이라. 풍각장이, 각설이패, 방정스런 외초라니 등물이 지껄이며 나오더니, 놀보네 안마당을 장판으로 알았던지 훨썩 넓게 바리잡고, 각 차비가 늘어서서 가야금 '둥덩둥덩', 퉁소 소리 '띠루띠루', 해적소리 '고개고개'. 북 장단에 검무 추며, 번개 소고, 벼락 소고, '동골동골'.

한 편에서는 각설이패가 덤벙이는데, 백호 밑에 훨썩 돌려 숭늉 쪽박 엎어 놓은 듯, 가로 약간 남은 머리에 개미 상투 엇비슷하여 이마에 딱 붙이고, 전라도 장타령을 시작하여,

"떠르르 돌아왔소. 각설이라 멱설이라 동설이를 짊어지고 뚤뚤 몰아 장타령, 흰 오얏꽃 옥과장, 누런 버들 김제장, 부창부수 화순장, 시화연풍 낙안장, 쑥 솟았다 고산장, 철철 흘러 장수장, 삼도 도회 금산장, 일색 춘향 남원장, 십리 오리 장성장, 애고애고 곡성장, 누리누리 황육전, 풀풀 뛰는 생선전, 울긋불긋 황화전, 팟뀌팟뀌 담배번, 얼걱덜걱 옹기전, 딸각딸각 나막신전."

한 놈은 옆에 서서 두 다리를 빗디디고 허리짓 고개짓을 하며, 살만 남은 헌 부채로 뒤꼭지를 탁탁 치며,

"잘 한다 잘 한다, 초당 짓고 한 공부냐 실수 없이 잘 한다. 동삼 먹고 한 공부냐 기운차게 잘도 한다. 기름 되나 먹었느냐, 미끈미끈 잘 나온다. 목구멍에 불을 켰나, 훤하게도 잘 한다. 뱃가죽 두껍다. 일망무제로 나온다. 네가 저리 잘 할 적에 네 선생이 오죽하랴. 네 선생이 내로구나. 잘 한다 잘 한다. 목 쉴라 목 쉴라 대목장에 목 쉴라. 가만 가만 섬겨라. 너 못 하면 내가 하마."

한참 이리 덤벙일 제, 한 편에서는 고사 초란이가 덤벙이는데, 구슬 상모, 털벙거지, 바짝 맨 통 장고를 턱 밑에 되게 메고,

"꽁그락공 꽁꽁."

"예, 돌아왔소, 구름같은 댁에 신선같은 나그네 왔소. 옥같은 입에 구슬같은 말이 쑥쑥 나오."

"꽁그락 꽁."

"예, 오노라 가노라 하니 우리 집 마누라가 이 집 마님 앞에 문안 아홉 꼬쟁이, 평안이 아홉 꼬쟁이, 이구 십팔 열 여덟 꼬쟁이, 낱낱이 전하라 하옵디다."

"꽁그락 꽁."

"허페 ."

"통영 칠 도리판에 쌀이나 담아 놓고, 귀 가진 저고리, 단 가진 치마, 명실 명전 갖은 꽃 소반 고사나 하여 보오."

"꽁그락 꽁꽁."

"허페 페."

"정월 이월 드는 액은 삼월 삼일 막아내고, 사월 오월 드는 액은 유월 유두에 막아내고, 칠월 팔월 드는 액은 구월 구일 막아내고, 시월 동지 드는 액은 납월 납일 막아내고, 매월 매일 드는 액은 초란이 장고로 막아내세."

"꽁그락 꽁."

"허페."

놀보가, 보다가 하는 말이,

"저러한 되방정들 집구석에 두었다는 싸라기도 안 남겠다. "

돈 관씩 후히 주어 길을 떠내 보냈구나.

잡색꾼들을 보낸 후에 남은 통을 켜자고 하지만, 이 여러 박통 속이 탈수륵 잡 것이라, 놀보댁은 옆에 앉아,

"애고 애고."

통곡하포, 삯 받은 역군들은 무색하여 만류했다.

"그만 타소 그만 타소. 이 박통 그만 타소. 삼도에 유명한 자네 형세 하루 아침에 탕진하였으니, 만일 이 통을 또 타다가 무슨 재변 또 나오면 무엇으로 막아낼까. 필경 망신될 것이니, 제발 덕분에 그만 타소."

고집 많은 놀보놈이 가세는 기울어도 성정은 안 풀리어,

"너의 말이 녹록하다. 천금산진환부래라는 옛 문장의 말씀이 있고, 뺏던 칼 도로 꽂는다는 것이 대장부의 할 일인가. 무엇이 나오든지 기어이 타 볼테네."

톱 소리를 아주 억지쓰기로 메겨,

"어기여라 톱질이야."

"초패왕이 장감을 칠 때 삼일 양식만 가졌으며, 한신이 조나라 진여를 칠 때 배수진이 영웅이라."

"어기여라 톱질이야."

"미불유초 선극유종이라고 성인이 하신 경계를 자네 어찌 모르는가. 나는 기어이 타 볼테네."

"어기여라 톱질이야."

"틀림없이 좋은 보패 이 두 통에 있을테니 일락서산 더 저물기 전에 큰 힘 써서 당기어라."

슬근슬근 거진 타니, 큼직한 쌍가마 긴 가마채가 꺾음섬의 가시목을 네모 접어 곱게 깎아 생피로 단단히 감아 철목을 걸었는데, 박통 밖에 뽀쪽하니, 놀보가 크게 기뻐하여,

"아무러면 그러하지. 아무리 박통 속이 내외하기 좋다 한들 천하에 횐 그 얼굴이 걸어 올 리가 있나. 틀림없는 쌍가마 속에 서시가 앉았으니, 쌍교채 모셔다가 안채 대청 놓을테니 휘장 칠 법 다시 없다."

장담하며 기다릴 때, 쌍가마는 무슨 쌍가마. 송장 실은 상부인데 강남서 나오다가 박통 가에 이르러서, 세상에 나올테니 상여를 받침틀하여 마목틀 괴어 놓고, 어동육서 좌포우혜 제를 진설하느라고 그 새 조용하였구나.

불시에 소리가 나는데,

"영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

하고,

"워허너허 워허너허 ."

"명정 공포 앞을 서고, 행자 곡비 곡을 하소."

"워허너허."

"행진강남 수천 리에 고생도 하였더니, 박통문이 열렸으니 안장처가 어디신고?"

"워허너허 , "

"금강·구월·지리·묘향산은 산운이 불합하여 갈 수 없다. "

"워허너허 ."

"날씨가 구름 끼어 비올 기운이 있다. 앙장 떼고 우비 써라, 가다가 저물세라 어서 가자 놀보 집에."

"어허너허 어허너허."

그 뒤에 상인들이 각청으로 울고 올 때, 낳은 아들 하나요, 삯 상인이 여섯이니 먹이고 날 댓돈에 목 좋은 놈만 얻었구나. 한 놈은 시조창으로 울고, 한 놈은 방아타령으로 울고, 한 놈은 너무 울어서 목이 조금 쉬었기로 목은 아예 쓰지 않고 자진모리 아니리로 남을 노상 웃기것다.

"애고 애고, 막동아, 기운 없어 못 살겠다. 놀보 집에 급히 가서 개 잡혀서 잘 고아라. 애고 애고, 오늘 저녁 상여를 어디다 멈출꼬. 놀보의 안방 치우고 포진을 잘 하여라. 애고 애고, 좆 꼴리어 암만해도 못 참겠다. 놀보의 계집 뒷물시켜 수청으로 대령하라. 애고 애고, 이 행차가 초라하여 못 하것다. 놀보 아들 행자 세우고, 놀보 딸은 곡비 세워라. 애고 애고, 철야할 때, 심심하여 어찌할까. 글씨 잘 쓴 경쇠 한 목, 쇠 좋은 놈 얻어 오라. 애고 애고 설운지고, 가난이 원수로다. 삯 한 돈에 몸 팔리어 헛울음에 목쉬었다. 애고 애고."

"어허너허."

땡그랑 요란하게 나오더니 놀보 안방에 상여를 세우고 허저같은 상여꾼들 벽력같이 외치는 소리,

"주인 놀보 어디 갔나? 큰 병풍 치고 젯상 놓고, 촛대에 밀촉 켜고, 향로에 불 피워라, 제물 먼저 올린 후에 상식상 곧 차려라. 방 더울라 불때지 말고, 고양이 들어갈라 굴뚝을 막아라."

이런 야단이 없구나. 놀보가 넋을 잃어 처자를 데리고서 대강 거행한 연후에 상제에게 문안하고, 공손히 묻자오되,

"어떠한 상행차인지 내력이나 알아봅시다. "

상제가 대답하기를,

"오, 네가 박놀본가?"

"예 , "

"우리 댁 노생원님이 너를 찾아 보시려고 첫 박통에 행차해서 너를 속량하여 주고, 환행차하신 후에 네 정성이 극진하여 자식보다 낫더라고 매일 자랑하시더니, 노인의 병환이라 병환나신 하루만에 별세를 하시는데 박놀보의 안채 정간 장히 좋은 명당이라, 내 말하고 찾아가면 반겨 허락할 것이니, 갈 길이 멀다 말고 부디 게 가 장사하되, 만일 의심하거들랑 이것을 보이면 믿을 표적이 되리라고 재삼 유언하시기로, 상행차 뫼시고서 불원천리 찾아왔다. "

소매에서 능천낭을 슬그머니 내놓커늘, 놀보가 이걸 보니 송장보다 더 밉구나. 꿇엎디어 설에 빌어,

"상제님 상제님, 소인 살려 주옵소서. 노생원님 하신 유언 임종시에 하셨으니 정신이 혼미하여 정신없이 하신 말씀이니, 진나라 대부 위과가 하신 말을 상제님이 모르시오? 산리로 말할지라도 이 집터가 명당이면 하루 아침에 패가하겠습니까. 운진한 땅이오니 상행에 쓰인 경비 산 땅값을 대전으로 바치올 것이니 환행 안장하옵소서."

전답문서 전당잡히고, 돈 삼만 냥 빛을 내어 상행 치송한 연후에, 남아 있는 여섯째 통 타기로 달려드니, 제 계집이 옆에 앉아 통곡하며 만류한다.

"맙쇼 맙쇼 타지 맙쇼. 그 박씨에 쓰인 글자 갚을 보(報)자, 원수 구(仇)자, 원수 갚자 한 말이라 탈수록 망할테니, 간신히 모은 세간 편한 꼴도 못 보고서 잡것들에게 다 뜯기네. 이럴 줄 알았더면 시아제 굶을 적에 구원 아니 하였을까. 만일 잡것 또 나오면 적수공권 이 신세에 무엇으로 감당할까. 가련한 우리 부부 목숨까지 빼앗길테니, 기어이 타려거든 내 허리와 함께 켜소."

박통 위에 걸터 엎어져 경상도 메나리조로 한참을 울어내니, 놀보가 할 수 없어 저도 그만 파의하여,

"이내 신세 생긴 모양이 계집까지 덧내서는 정녕 아사할 터이니, 여보소, 톱질꾼들 양줄 풀어 톱 지우고, 저 박통 들어다가 대문밖에 내버리소."

한참 수쇄하는 차에, 천만 의외로 통 속에

"대포수."

"예 ."

"개문포 세 방 쏴라."

"예."

"떵 떵 떵."

박통이 한 가운데 딱 벌어지며, 행군 호령을 똑 병학지남으로 하것다.

"행영시(行營時)에 만일 앞에 수목이 막혔거든 청기를 들고, 물이나 연못으로 막혔거든 흑기를 들고, 병마에 막혔거든 백기를 들고, 산과 험한 것으로 막혔거든 황기를 들고, 연화(煙火)에 막혔거든 홍기를 들고, 보는 것이 지나거든 곧 모두 거두라. 한 길로 뚫렸거든 고초기률 일면에 세우고, 두 길이 평행하거든 두면에 세우고, 세 길이 평이거든 삼면에 세우고, 네 길이 평이거든 사면에 세우고, 대영행이거든 오면에 세우되, 뒤의 대장이 입으로 전하여, 전노(全路) 어떤 색 고초기를 몇 개 세우라 하거든 중군이 진을 바꾸는 호령을 즉시 거행하라."

"정수(鉦手) ! "

"예."

"명금 이하인 행취타하라."

"예 ."

"쨍 나니나노 퉁 꽝."

천병 백마가 물 끓듯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나오는 장수는 신장이 팔척이오, 얼굴은 먹빛 같고, 표범 머리에 고래 눈과 제비 턱, 범의 수염, 형세는 닫는 말과 같고, 황금투구 쇄자갑옷, 심오마를 높이 타고, 장팔사모 빗겨 들고, 우레 같은 큰 목소리로,

"이놈 놀보야."

박 타던 삯군들이 소리에 깜짝 놀라, 창자가 터져 죽는 놈이 여러 명이 되는구나. 놀보놈은 정신을 잃고, 박통가에 기절하여 넘어지니, 저 장수의 거동 보소. 놀보의 안채 대청이 엔간한 지휘대인 줄 알고, 하마포에 말을 내려, 승장포 세방 쏘고, 오색 기치 방위 찾아 청동백서 세워놓고, 각 영 장졸은 버티어 서서 바라를 쳐서 울려 좌기 취한 연후에 대상에서 호령이 나는데,

"놀보놈 나입하라."

비호같은 군사들이 놀보의 고추상투 덩겅 잡아 나입하니, 대장이 분부하기를,

"네 죄를 헤아리면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 내 목성 나는 대로 네 놈 수죄를 할 양이면 네가 놀라 죽겠기에 조용히 분부하니 자세히 들어보라. 한나라가 말세되어 천하가 분분할 때 유·관 ·장 세 영웅이 도원에서 결의하고 한 왕실을 다시 일으키자, 천하에 횡행하던 삼형제 중 말째되고, 오호대장 둘째 되는 탁군서 살던 성은 장이요, 이름은 비요, 자는 익덕이라 하는 용맹을 들었느냐? 내가 그 장장군이로다. 천지에 중한 의가 형제밖에 또 있느냐. 한날 한시에는 못 났어도, 한날 한시에 죽는 것이 당연한 도리인데, 네 놈은 어이하여 동기 박대를 그리 하며, 날짐승 중에 사람 따르고 해 없는 게 제비로다. 내가 근본 생긴 모양, 제비 턱을 가졌기로 제비를 사랑하더니, 제비 말을 들어 본즉 생다리를 꺾었다니, 그러한 몹쓸 놈이 어디가 또 있겠느냐. 내 평생에 가진 성기, 내게 이해 불고하고, 몹쓸 놈이 있으며는 장팔사모 쑥 빼내어 퍽 찌르는 성정인 고로, 어찌 쾌인 익덕 같은 이를 만나 세상에 인심을 배반한 이를 모두 죽인다는 말을 너도 흑 들었느냐? 네놈이 흉맹극악하여 동생을 쫓아내고, 제비 절각시킨 죄로 똑 죽이자 나왔더니, 돌이켜 생각하니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을 받은 자는 다시 거느릴 수 없다 하니, 네 아무리 회개하여 형제우애하자 한들 목숨이 죽어지면 어쩔 수가 없겠기에, 목숨을 빌려주니 이번은 개과하여 형제우애 하겠느냐?"

놀보 엎드려 생각하니 불의로 모은 재물을 허망하게 다 날렸으니 징계도 쾌히 되고, 장장군의 그 성정이 독우라도 채찍질했으니, 저같은 천한 목숨은 파리만도 못 하지. 악한 놈에게 어진 마음은 무서워야 나는구나. 복복 사죄하며 울며 빈다.

"장군 분부 듣사오니, 소인의 전후 죄상은 금수만도 못 하오니, 목숨 살려 주옵시면 옛 허물을 다 고치고 군자의 본을 받아 형제간 우애하고, 이웃에 화목하여 사람 노릇 하올테니 제발 덕분에 살려주오."

장군이 분부하기를,

"네 말이 그러하니 알기 쉬운 수가 있다. 남원이나 고금도나 우리 중형 관우씨 계신 곳에 내가 가서 모시고 있다가 네 소문을 탐지하여 개과를 하였으면 재물을 다시 주어 부자가 되게 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바로 와서 죽일테니, 군사나 잘 먹여 위로하라. 이제 곧 떠나겠다. "

놀보가 감화되어 양식대로 밥을 짓고, 소와 닭 개 많이 잡아 군사를 먹이면서 좋은 술을 연해 부어 장군 앞에 올리니, 제 계집이 말려,

"애겨, 그만 합쇼. 그 장군님 술 취하면 아무 죄 없는 놈도 편타를 하신다네."

놀보가 웃으며,

"자네가 어찌 알아. 그 장군님 장한 의기는 엄안이라도 항복하게 하셨나니."

장군이 군사를 돌이키신 후에, 가산을 돌아보니 한번 패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이 되었구나, 방성통곡하고 흥보집을 찾아가니, 흥보가 크게 놀라 극진히 위로하고, 저의 세간 반 나누어 형우제공 지내는 모습은 누가 아니 칭찬하리. 도원에 남은 의기가 천고에 전하여지니, 이러한 어리석고 못난 인간,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하고 나약한 자도 일어서는 백이 숙제의 풍속과 같은가 한다.

세재 무오 정월 하한에 성두 베낌.

***** '박흥보가' 첫 번째 판 수의 끝입니다.*****

(자료 출처 : 인터넷 다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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