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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타령 - 흥보가 놀부에게 통사정하는 장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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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보가 하릴없어 형의 집에 건너갈 제 의관을 한참 차려, 모자(帽子) 터진 헌 갓에다 철대1)를 술로 감아 노갓끈2) 달아 쓰고, 편자3)는 좀이 먹고, 앞춤에 구멍이 중중, 관자(貫子)4) 뙨5) 헌 망건을 물렛줄로 얽어 쓰고, 깃만 남은 베 중치막6)을 열 두 도막 이은 술띠로 시장찮게 눌러 매고, 헐고 헌 고의 적삼에 살점이 울긋불긋. 목만 남은 길버선7)에 짚대님이 별자로다. 구멍 뚫린 나막신을 두 발에 잘잘 끌고, 똑 얻어 올 걸로 큼직한 오쟁이8)를 평양 가는 어떤 이 모양으로 관(月寬)뼈9) 위에 짊어지고 벌벌 떨며 건너갈 제 저 혼자 돌탄(돌嘆)10)하여,

 

"아무리 생각하나 되리란 말 아니 난다. 모진 목숨 아니 죽고 이 고생을 하는구나."

 

형의 문전에 당도하니, 그 새 성세(聲勢) 더 늘어서 가사(家舍)가 장(壯)히 웅장하다. 삼십여 간 줄행랑11)을 일자(一字)로 지었는데 한가운데 솟을대문 표연(飄然)히 날아갈 듯. 대문 안에 중문(中門)이요, 중문 안에 벽문(壁門)이라. 거장(巨壯)12)한 종놈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짝을 지어 쇠털벙거지, 청창(靑창)13) 옷에 문문(門門)에 수직(守直)14)타가 그 중에 늙은 종은 흥보를 아는구나. 깜짝 놀라 절을 하며, 손을 잡고 낙루(落淚)하며,

 

"서방님 어디 가셔 저 경상(景狀)15)이 웬일이오. 수직방(守直房)에 들어앉아 어한(禦寒)16) 조금 하옵시다."

 

방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붙여 주며,

"서방님이 저리 될 제 아씨야 오죽하며, 그 새에 아기는 몇 분이나 더 낳으시고, 어찌하여 저 꼴이오. 서방님이 나갈실 제, 우리들 공론(公論)한 말이 군자(君子) 같은 그 심덕(心德)에 어디 가면 못 살겠나, 암데 가도 부자되지, 그럴 줄만 알았더니 세상이 공도(公道)17) 없고."

 

끌끌 혀를 차며 화로의 불을 뒤져 가까이 놓아 주니, 흥보가 불 쬐고 눈물을 흘리면서 목 맺힌 소리로,

"복 없으면 할 수 없대. 아들은 스물 다섯. 아씨야 말할게 있나. 나 차라고 온 의복은 게다 대면 장갓길18). 이 식구 스물 일곱 똑 죽게 되었기에 형님 전에 고간(苦懇)19)하여 얻어 가자 왔네마는, 문안(問安) 일향(一向)20)하옵시고 성정(性情)21) 조금 풀리셨나."

 

"문안이사, 그 앞에 가 무슨 병(病)이 얼른하며, 좀체 귀신이 꼼짝할까. 일생 태평하시옵고, 성정 말씀이야 서방님 계실 제와 장리(長利)22)나 더 독(毒)하오. 두말씀 할 것 있소. 이번 제사 때에 음식 장만 아니 하고, 대전(代錢)23)으로 놓았다가 도로 쏟아 내옵는데 지난달 대감24) 제사(大監祭祀)에 놓았던 돈 한 푼이 젯상 밑에 빠졌던지 몇 사람이 죽을 뻔. 이번은 의사(意思)가 또 생겨 싸돈25)으로 아니 놓고 꿰미채26) 놓았습죠."

 

흥보가 방에 앉아 담배 먹고 불 쬐니 몸이 조금 녹았다가 이 말을 들어 보니, 등골이 썬득썬득 찬 물을 끼얹고, 가슴이 두근두근 쥐덫이 내려진 듯하고, 머리끝이 꼿꼿하여 하늘로 치솟은 듯 온 몸을 벌벌 떨면서 하는 말이,

"저기 들어가지 말고 바로 가는 수가 옳지. 이럴 줄 아는 고로 아예 아니 오쟀더니, 아씨에 못 견디어 부득이 왔네그려."

그 종이 하는 말이,

 

"이 추위에 저 꼴하고 예까지 왔삽다가 못 얻으면 그만이지, 무슨 탈이 있으리까. 어서 들어가 보시오."

"전일에 계시던 방에 그저 계신가."

"아니오. 그 방 옆에 화계(花階)를 꾸며 놓고, 화계27) 앞굽은 길에 방석(方席)이 깔렸으니, 그리 휘돌아 가면 외밀28)이 쌍창(雙窓)을 열고 화류(樺榴)틀29) 완자영창(卍字映窓)30), 양편 체경31) 붙인 방에 비슥이32) 누워 계시오다."

"함께 가서 가르치소."

 

"아니오. 못 하지요. 이런 위태한 일, 만일 아차 하게 되면 나더러 데려왔다 둘이 다 탈이오니 혼자 들어가 보시오."

흥보가 하릴없이 이를 꽉 아드득 물고 팔짱을 되게 끼고 죽을 판 살 판으로 가만가만 자주 걸어 초당(草堂)33) 앞을 당도하니, 과연 놀보가 영창문을 반쯤 열고, 잘돈피(돈皮)34) 두루마기 우단(羽緞) 왜단(倭緞)35)은 무겁다고 양색(兩色) 단의(單衣)를 하고 청모관(靑毛冠)36) 비껴 쓰고, 십상37) 백통[白銅] 오동수복(烏銅壽福)38) 부산장인(釜山匠人)39) 맞춤대에 팔장생(八長生) 별각죽(別刻竹)을 기장 길게 맞추어서 양초(洋草)40) 피워 잎에 물고 안석(案席)41)에 비스듬히 누웠구나.

흥보가 아주 죽기로 자처하고, 툇마루에 올라서서 곡진(曲盡)히 절을 하고, 떨며 유무42)를 드려,

"떠나온 지 적년(積年)43)이니 기체(氣體) 안녕하옵신지."

 

놀보가 한 손으로 안석을 잡고 배 앓는 말[馬] 머리 들 듯 비슥이 들어 본다. 한 어미 배로 나와, 함께 커서 장가 들고 자식 낳고 함께 살다 쫓아낸 동생이니, 아무리 오래 되고 형용이 변했던들 모를 리가 있겠나만 우애(友愛)하는 사람이라 아주 모르는 체하여,

"뉘신지요."

 

흥보는 정말 모르고 묻는 줄 알고, 갔던 연조(年條)44)까지 고하여,

"갑술년(甲戌年)에 나간 흥보요."

놀보가 무수히 되씹으며 의심하여,

"흥보, 흥보, 일 년 새경45) 먼저 받고 모 심을 때 도망한 놈, 그 놈은 황보렷다. 쟁기질 보냈더니 소 가지고 도망한 놈. 그 놈은 숭보렷다. 흥보, 흥보, 암만 해도 기억치 못하겠다."

흥보가 의사 있는 사람이면, 수작46)이 이러하니 무슨 일이 되겠느냐, 썩 일어서서 나왔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을, 저 농판 숫한47) 마음에 참 모르고 그러하니 자세히 일러 주면 무엇을 줄 줄 알고 본사(本事)를 다 고하여,

"동부 동모(同父同母) 친형제로 이름자 항렬(行列)하여 형님 함자(銜字)48) 놀보 자(字) 아우 이름 흥보라 하온 줄을 그다지 잊으셨소."

 

놀보가 생각하니 다시 의뭉49)을 떨자 한들, 흥보의 하는 말이 밤송이 까 놓듯 하였으니 의뭉집이 없었구나. 맞설밖에 수 없거든,

"그래서 동부 동모나, 이부 이모(異父異母)나, 친형제나, 때린 형제나 어찌 왔는고."

원판 미련키는 흥보 같은 사람 없어, 얻으러 왔단 말을 그 말 끝에 할 것이랴. 엔간한 제 구변(口辯)50)에 놀보 감동시킬 줄로 목소리 섧게 하고, 눈물을 훌쩍이며 고픈 배 틀어쥐고 애긍(哀矜)51)히 빌어 본다.

"형님 나를 내보낸 건 미워함이 아니오라, 형님 덕에 유의유식(遊衣遊食)52) 사람 될 수 없었으니 각(各)살이53) 고생하면 행여나 사람될까 생각하여 하였으니, 그 뜻 어찌 모르리까."

 

놀보가 저 추는 말은 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 말은 썩 대답하여, "아무렴."

"형님 댁을 떠날 때, 부부 손목 서로 잡고 언약을 하옵기를 밤낮으로 놀지 말고 착실히 품을 팔아 돈 관(貫)54)이나 모으거든 흰떡 치고 찰떡 치고 연계(軟鷄)55) 삶아 위에 얹어 내 등에 짊어지고 찹쌀 청주(淸酒) 웃국56) 질러 병에 넣어 자네가 들고 형님 댁에 둘이 가서 형님 부처(夫妻) 잡숫는 것 기어이 보고 오세."

놀보가 음식 말을 듣더니 침을 삼키며 추어,

 

"그렇지"

"단단 약속하였더니 어찌 그리 무복(無福)하여 밤낮으로 벌려 해도 돈 한 푼을 못 모으고 원찮은 자식들은 아들이 스물 다섯. [중략] 식구가 이러하니 아무런 듯 할 수 있소. 빌어도 많이 먹으니 다시는 빌 데 없고, 굶은 지도 원 오래니 더 굶으면 죽겠으니, 예, 형님 전(前)에 왔사오니 전곡간(錢穀間)57)에 조금 주면, 스물 일곱 죽는 목숨 여상(呂尙)58)의 일단사(一簞食)59)요, 학철(학轍)60)의 일두수(一斗水)61)니 적선을 하옵소서."

 

두 손을 비비면서 꿇엎디어 섧게 우니, 놀보가 생각한즉 저놈의 쪼된 법이 빌어먹기 투가 나서, 달래서는 안 갈 테요, 주어서는 또 올 테니 죽으면 굶어 죽지 맞아 죽을 생각을 없게 하는 수가 옳다 하고, 부잣집 바람벽에 도적 방비하려 하고 철퇴(鐵槌) 철편(鐵鞭)62) 마상도(馬上刀)며, 단단한 몽둥이를 오죽 많이 걸었겠나. 그 중에 단단하고, 손잡이 좋은 몽둥이 하나를 내려 손에 들고, 엎드려 우는 볼기짝을 에후루쳐 딱 때리고, 추상같이63) 호령한다.

 

"하늘이 사람 낼 제 정한 분복(分福)64) 각기 있어, 잘난 놈은 부자되고, 못난 놈은 가난하니 내가 이리 잘살기 네복을 뺏았느냐. 뉘게다가 떼쓰자고 이 흉년에 전곡(錢穀) 주소 목 안으로 소리하며, 눈물 방울 흩뿌리면 네 잔꾀에 내 속으랴. 조금 지체하다가는 잔뼈 찾지 못할 테니 속속(速速) 출문(出門) 어서 가라."

 

몽둥이를 또 들메니 불쌍한 저 흥보가 제 형 성정을 아는구나. 눈물 씻고 절을 하며,

"과연 잘못하였으니 나무 진념(軫念)65) 마옵시고 평안히 계십소서. 동생은 가옵니다."

 

[중략]

 

흥보가 형의 집에 전곡 타러 왔다가 몽둥이만 잔뜩 타고 비틀걸음으로 걸어간다.

 

내용 연구

 

1) 철대 : 갓철대. 갓양태의 가에 두른 테.

2) 노갓끈 : 노끈으로 만든 갓끈.

3) 편자 : 망건(網巾) 편자의 준말.

4) 관자(貫子) : 망건에 달아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

5) 뙨 : 떨어진.

6) 중치막 : 벼슬하지 않은 선비가 입던 웃옷의 일종.

7) 길버선 : 먼 길을 갈 때에 신는 허름한 버선.

8) 오쟁이 : 짚으로 만든 작은 섬. /섬 : 곡식을 담는 짚으로 엮은 그릇.

9) 관(月寬)뼈 : 몸통과 다리를 연결시키는 한 쌍의 뼈.

10) 돌탄(돌嘆) : 혀를 차며 탄식하여

11) 줄행랑 : 대문 좌우로 죽 벌여 있는 방.

12) 거장(巨壯) : 키가 크고 기운 셈.

13) 청창(靑창) : 청색(靑色)의 소창(小창)옷. 두루마기와 같은데 소매가 좁고 무가 없음.

14) 수직(守直) : 맡아서 지키는 일.

15) 경상(景狀) : 모습.

16) 어한(禦寒) : 몸을 녹임.

17) 공도(公道) : 공평하고 바른 도리.

18) 장갓길 : 장가갈 때의 성장(盛裝) 차림.

19) 고간(苦懇) : 몹시 간절히 청함.

20) 일향(一向) : 한결같이.

21) 성정(性情) : 성질과 심정, 또는 타고난 본성.

22) 장리(長利) : 물건의 길이나 수효가 본디의 것에 절반을 더한 만큼의 것.

23) 대전(代錢) : 물건 대신 주는 돈.

24) 대감 : 정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존칭. 무당들은 제신(諸神)들을 높여 부르는 이름으로도 씀.

25) 싸돈 : 낱돈.

26) 꿰미채 : 노끈이나 꼬챙이 따위에 꿴 것.

27) 화계 : 화단.

28) 외밀 : 기둥 모서리를 홈처럼 파 낸 외줄.

29) 화류(樺榴)틀 : 자단(紫檀)의 목재로 만든 틀.

30) 완자영창(卍字映窓) : 창살을 卍자 모양으로 만든 창.

31) 체경 : 몸 전체를 볼 수 있는 것울.

32) 비슥이 : 옆으로 비스듬하게.

33) 초당(草堂) : 집의 원체에서 따로 떨어진 정원에 억새, 짚 등으로 지붕을 인 작은 집.

34) 잘돈피(돈皮) : 검은 담비의 모피.

35) 왜단(倭緞) : 털이 고운 비단(緋緞)의 하나.

36) 청모관(靑毛冠) : 띠로 만든 관.

37) 십상 : 썩 좋은.

38) 오동수복(烏銅壽福) : 오동(烏銅)으로 박은 '壽福'의 자형(字形).

39) 부산장인(釜山匠人) : 부산 사람인 장색(匠色). 부산죽(釜山竹)이 유명했음.

40) 양초(洋草) : 담배.

41) 안석(案席) :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

42) 유무 : 소식. 편지의 옛말.

43) 적년(積年) : 여러 해.

44) 연조(年條) : 어떤 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조목.

45) 새경 : '사경(私耕)'의 변한 말. 한 해 동안 일 하여 준 대가로 머슴에게 주는 돈이나 물건.

46) 수작 :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

47) 숫한 : 순박하고 어리석은.

48) 함자(銜字) : 남의 이름을 높여 이르는 말.

49) 의뭉 : 겉으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면서 속으로는 엉큼한 것.

50) 구변(口辯) : 언변(言辯). 말솜씨. 말재주.

51) 애긍(哀矜) : 불쌍하고 가련함.

52) 유의유식(遊衣遊食) : 하는 일 없이 놀면서 입고 먹음.

53) 각(各)살이 : 분가하여 사는 일.

54) 관(貫) :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

55) 연계(軟鷄) : 영계.

56) 웃국 : 간장이나 술 같은 것이 익은 뒤에 맨 처름에 떠낸 진한 국.

57) 전곡간(錢穀間) : 돈이나 곡식이나 간에.

58) 여상(呂尙) : 중국 주초(周初)의 현신(賢臣). 속칭 강태공(姜太公).

59) 일단사(一簞食) : 단(簞)은 죽기(竹器), 사(食)는 반(飯)으로 적은 밥의 뜻.

60) 학철(학轍) : '학철부어(학轍부魚)'의 준말.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 장자의 고사에 나오는 말로 몹시 궁박하여 목숨이 경각에 매여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61) 일두수(一斗水) : 적은 양의 물.

62) 철편(鐵鞭) : '고들개 철편'의 준말. 포교가 가지고 다니던 고들개가 달린 쇠채찍.

63) 추상같이 : (호령 등이)위엄이 있고 서슬이 푸르게.

64) 분복(分福) : 타고난 복.

65) 진념(軫念) :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사정을 걱정하여 생각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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