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바닷가에서 / 고티에

by 송화은율
반응형

바닷가에서 / 고티에

 

달은 높은 하늘에서

손에 들었던 금부채를

바다의 그 새파란

융단 위에 떨어뜨렸네.

 

주워 올리려고 엎드려

은빛 팔을 펴지만

그 흰 손아귀를 빠져서

부채는 물결 따라 흘러가네.

 

천 길 물 속에 이 몸을 던져

부채를 돌려 주랴, 빛나는 달이여,

그대 하늘에서 내려온다면

나는 하늘로 올라가리라.


요점 정리

작자 : 고티에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스페인의 바닷가에서 착상을 얻은 고티에는 낭만파에서 고답으로 건너가는 교량 구실을 한 시인답게 낭만파의 감상이나 도취를 피하여 냉정한 태도로써 객관적인 묘사를 하는 데 있다. 따라서 그 시는 회화적인 시각미를 존중한다.

고티에의 다른 시

비둘기 떼

 

저기 무덤 흩어진 언덕 위에는

푸른 깃털처럼

머리를 쳐든 종려 한 그루.

해거름이면 몰려 온 비둘기 떼

보금자릴 틀지 몸을 숨기지.

 

하지만 아침이면 그들은 가지를 떠난다.

알알이 떨어지는 목걸이인가.

푸른 하늘로 하얗게 흩어지는 비둘기 떼.

보다 먼 어느 지붕 위에 나랠 접는다.

 

내 영혼은 한 그루 나무.

밤마다 비둘기 떼처럼 무릴 지어

하이얀 꿈의 영상이 하늘에서 내린다.

나래를 파닥이며

아침 햇살에 날아가는 꿈의 영상이 …

 

 

이해와 감상

 

영혼에 꿈의 영상이 내려왔다가 아침이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종려 나무에 비둘기떼가 쉬었다가 날아가는 것에 비유하여 표현한 시로, 현실을 벗어나 끊임없이 먼 어딘가로 향하는 감정을 노래한 낭만시이다.

심화 자료

고티에(Theophile Gautier)

별칭은 착한 테오(Le Bon Theo). 1811. 8. 31 프랑스 타르브~1872. 10. 23 뇌이쉬르센. 프랑스 시인·소설가·비평가·저널리스트. 프랑스 문학의 감수성이 초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19세기말의 탐미주의와 자연주의로 바뀌던 시절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파리에서 주로 살았고 샤를마뉴 중학에서 제라르 드 네르발을 만나 평생 우정을 맺었다. 원래는 그림을 공부했지만, 얼마 후 자신의 참된 소망은 시를 쓰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낭만주의 운동에 공감하여,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 Hernani〉가 1830년에 파리에서 처음 공연된 뒤에 일어난 문화적 투쟁에 가담했다. 〈낭만주의의 역사 Histoire du romantisme〉(1874)와 〈당대의 초상화들 Portraits contemporains〉 (1874)이라는 책에서 이 시대를 익살스럽게 회상하였는데, 특히 〈당대의 초상화들〉에서는 친구인 오노레드 발자크를 잘 묘사했다. 〈청년 프랑스 Les Jeunes-France〉(1833)에서는 자신을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의 지나친 행동을 풍자했다. 〈괴짜들 Les Grotesques〉(1834~36)은 낭만주의 작가들보다 먼저 개인주의를 제창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 대한 책이다.

고티에의 최초의 시들은 1830년에 발표되었고, 마법사의 손아귀에 들어간 젊은 화가를 이야기체로 묘사한 장시(長詩) 〈알베르튀스 Albertus〉는 1832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낭만주의의 신조에 등을 돌리고 예술을 위한 예술(예술지상주의)의 옹호자가 되었다. 〈알베르튀스〉에 붙인 서문과 소설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1835)은 그의 견해를 표현하고 있는데, 전통윤리를 무시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최고라고 주장해 문단에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다.

1840년 고티에는 5개월 동안 스페인을 방문했는데, 여행중에 그 지방과 사람들에게 받은 인상을 시집 〈스페인 Espana〉(1845)에 실린 그의 가장 훌륭한 시 몇 편과 〈스페인 여행 Voyage en Espana〉(1845)이라는 산문에 썼다. 자신과 2명의 정부(情婦) 및 3명의 자식, 2명의 누이까지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언론계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여행이 끝난 뒤 그는 여행이 직장의 끊임없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고마운 탈출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1836~55년 〈프레스 La Presse〉지와 〈모니퇴르 위니베르셀 Le Moniteur Universel〉지에 1주일에 1번씩 기고했고, 1851년에는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의 편집장이었으며, 1856년에는 〈아르티스트 L'Artiste〉지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그밖에도 여러 정기간행물과 신문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고티에는 자신의 생활형편을 자주 한탄하곤 했는데, 언론활동 때문에 시를 위한 창조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행, 특히 그리스 여행은 고전시대의 예술형태를 숭배하는 그의 예술론을 더욱 강화해주었다. 그는 예술이 비개인적이야 하며 도덕적 교훈을 가르치는 의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예술가는 오로지 형태의 완성을 달성하는 것에만 목표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티에는 시에서 스스로 '치환예술'(transposition art)이라고 부른 기법을 개발하여, 그림이나 다른 예술 작품에서 느낀 정확한 인상을 기록했다. 〈 에나멜과 카메오 Emaux et camees〉(1852)라는 책에 발표된 이 시들은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한다. 이 책은 테오도르 드 방빌과 르콩트 드 릴처럼 심미안을 가진 다른 작가들에게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 샤를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의 헌사를 고티에에게 바침으로써 경의를 표했다.

고티에의 시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은 고대 폼페이나 이집트를 환기시키는 초자연적 이야기인 〈죽은 연인 아바타르 La Mort amoureuse, Avatar〉(1857)라는 소설에서도 돋보인다. 그는 수많은 글을 썼지만 미술 평론과 연극 비평만이 그의 평판을 지켜주었는데, 이것의 일부는 〈유럽의 미술 Les Beaux-Arts en Europe〉(1855)과 6권으로 된 〈프랑스 연극 25년간의 역사 Histoire de l'art dramatique en France depuis vingt-cinq ans〉(1858~59)에 재수록되었다. 발레 비평가로서는 지금도 그를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는 희곡에도 손을 댔고, 베르누아 드 생조르주와 함께 인기있는 발레 〈지젤 Giselle〉도 썼다.

동시대를 살았고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문인 플로베르, 생트 뵈브, 공쿠르 형제, 방빌, 보들레르 등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 마틸드 공작부인의 친구가 되었는데, 공작부인은 그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도서관 사서라는 한가로운 직책을 주었다.

고답파(高踏派 : Parnassiens) (영)Parnassians.

르콩트 드 릴이 이끌었던 19세기 프랑스 시파(詩派). 릴은 낭만파 시인의 감상주의와 모호한 언어에 반발하면서 신중함과 객관성, 완벽한 기교와 정밀한 묘사를 강조했다. 고답파가 이끈 시운동은 운율과 시형식에서의 새로운 실험과 소네트의 부흥을 가져왔다. 이것은 19세기말에 희곡과 소설이 사실주의로 기운 경향과 병행하는 것이다. 고답파 시인들은 초기에는 현실 사회에서 주제를 찾았으나, 차차 다른 영감을 얻기 위해 신화, 서사시, 북구의 모험담과 고대 문명, 특히 인도와 고대 그리스 문명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은 그들의 시선집(詩選集), 즉 루이 자비에 드 리카르와 카튈 망데스가 편집하고 알퐁스 르메르가 출판한 3권으로 된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1866, 1871, 1876)에서 고답파(Parnassien)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파르나스(Parnasse)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아폴론과 뮤즈가 살았다는 산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시파의 근본원리는 이에 앞서, 예술지상주의 이론을 설명한 테오필 고티에의 〈모팽 양 Mademoiselle de Maupin〉(1835)의 서문과 르콩트 드 릴의 〈고대의 시 Poemes antique〉(1852)의 서문, 망데스의 잡지 〈르뷔 팡테지스트 La Revue Fantaisiste〉 등에서 표명되었다. 1852년에 나온 고티에의 〈에나멜과 카메오 Emaus et camees〉는 신중하게 쓴 완벽한 형식의 시를 모은 것으로써 시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으며, 알베르 글라티니와 테오도르 드 방빌, 프랑수아 코페, 레옹 디에르, 조제 마리아 드 에레디아와 같은 주요 고답파 시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에레디아는 정밀한 세부묘사와 이중각운(二重脚韻), 낭랑한 단어와 이국적인 이름 등을 추구하였으며 소네트의 제14행을 가장 인상적으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두었다.

고답파 시인의 영향은 유럽에 두루 퍼졌고,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현대주의 운동과 젊은 벨기에 운동(Jeune Belgique)에 뚜렷한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말에는 스테판 말라르메와 폴 베를렌을 따르는 새로운 세대의 시인인 상징주의자들이 나타났다. 젊은 시절에는 이들도 고답파 시인이었지만, 미묘한 어감과 음악적 암시를 지닌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 정밀한 묘사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