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나비- 김기림
by 송화은율바다와 나비
- 김기림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여성」(1939년 4월)
<핵심 정리>
▶ 감상의 초점
바다와 나비는 1920년대 낭만주의의 병적 감상성과 경향파의 정치적 관념을 부정한 이른바 모더니즘 운동의 대표작이다. 초기시(기상도)에서 자주 보이던 낯선 외래어의 사용이나 경박함이 배제되고,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연약한 나비와 광활한 바다와의 대비를 통해 ‘근대’라는 엄청난 위력 앞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1930년대 후반 한국 무더니스트의 자화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이 시는 영국의 대표적인 시인 ‘S. 스펜더’의 시 바다의 풍경 제3연과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그의 시에서는 두 마리의 나비가 익사하는데, 김기림의 시에서는 나비가 바다로 내려갔다가 지쳐서 되돌아온다. ‘나비’는 생명체 곧 인간을, ‘바다’는 죽음 또는 영원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성격 : 감각적, 상징적
▶ 특징 : ① 서글픔과 애처로움이 뒤섞인 관조적 미의식
② 바다, 청무우 밭, 초승달의 푸른빛과 흰나비로 대표되는 흰빛의 색채 대비
③ 바다와 나비 등의 상징적 시어 사용
▶ 구성 : ① 바다가 무서운 줄 모르는 나비(1연)
② 바다로 날아갔다가 지쳐 돌아온 나비(2연)
③ 나비의 모습(3연)
▶ 제재 : 바다와 나비
▶ 주제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과 좌절감
<연구 문제>
1. 이 시에서 ‘나비’가 바다에서 궁극적으로 찾는 대상은 무엇인가?
☞ 꽃
2. 이 시에서 힌 나비와 이미지가 대조되는 시어나 시구를 모두 찾아 쓰라.
☞ 바다, 청무우 밭, 새파란 초승달
3. 어떤 평론가는 이 시에서 ‘바다’를 서울과 동경 사이에 있는 현해탄을 암시한다고 했다. 그럴 경우, ‘나비’가 ‘바다’를 향해 내려갔다가 지쳐서 돌아오는 행위는 거대한 문명 앞에 무릎 꿇는 당시 지식인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비’가 ‘바다’에 도전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당시 지식인들의 행위와 관련하여 15자 내외로 쓰라.
☞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
4. 이 시에서 ‘나비’는 어떤 존재를 이미지화한 것인지 두 문장으로 설명해 보라.☞ 무서운 파도가 치는 ‘바다’를 ‘청(靑)무우 밭’으로 오인하는 낭만적 감정을 소유한 사람을 ‘나비’로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나비’는 낭만적인 꿈을 가지고 여행하는 순수하고 연약한 존재를 형상화한 말로 볼 수 있다.
<감상의 길잡이>(1)
시집 <바다와 나비>(1946) 머리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벌써 피할 수 없는 ‘근대’ 그것의 파산의 예고로 들렸으며 이 위기에 선 ‘근대’의 초극이라는, 말하자면 세계사적 번민에 우리들 젊은 시인들은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의식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작품이 바로 바다와 나비이다. 이 시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바다’와 ‘나비’가 갖는 상징일 터이다. ‘바다’는 수심(水深)도 알 길이 없고, 삼월에도 꽃이 피지 않는 무생명의 공간으로 나타나 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바다는 근대화 과정에서 겪어야 할 모험과 시련의 의미를 띠게 된다.
근대의 몰락을 예견하며 그것의 초극을 꿈꾸었던 김기림으로서도 현실적 상황의 열악함에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도 무력했던 것일까? 그가 제시한 것은 지친 한 마리 나비에 불과하다.
근대라는 엄청난 물결 앞에 무력함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30년대 후반 한국 모더니스트들의 자화상을 눈에 보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도 한국 모더니즘 시의 회화적 특성과 문명 비판적 성격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푸른 바다에 대비되는 흰나비, 나비 허리에 걸린 새파란 초승달의 이미지는 그 회화적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특히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라는 구절은 문명의 무생명성 혹은 불모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 문명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감상의 길잡이>(2)
김기림은 1930년대 중반 이후 모더니즘 시론(특히 주지주의)의 수립과 시 창작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의 도입 등으로 시인으로서보다는 비평가로서의 업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김기림의 시는 어떤 사상적 깊이보다는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감각적 이미지만이 뚜렷하게 부각되는데, 이것은 모더니즘, 특히 이미지즘 계열시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그가 한때 T.S.엘리어트에 경도됨으로써 <기상도>등에서 자주 나타나던 생경한 외래어나 경박함이 사라진 대신, 견고하고 선명한 이미지 제시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비교적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월 바다의 푸른색과 흰나비, 그리고 새파란 초생달의 색채의 대비가 특히 두드러지는 이 시는, 간결한 이미지가 ‘- 다’로 끝나는 어조 속에서 그 냉정함의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조화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결 사나운 바다에 나비를 대비시킨 김기림의 상상력은 신선하다 못해 신비스럽기까지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S.스펜더의 <바다의 풍경> 3연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비난을 듣기도 한다.
‘바다’는 삼월에도 꽃이 피어나지 않는 무생명의 공간으로 문명의 무생명성 내지 불모성을 상징한다. 그 곳을 ‘청무우 밭’으로 오해해서 내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오’는 ‘흰나비’는 현실의 모진 세파(世波)를 경험해 보지 못한 낭만주의적 존재로 어쩌면 김기림의 청년 시절 모습일지도 모른다. 육당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이후 ‘바다’는 근대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할 모험과 시련, 또는 문명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곳일 뿐 아니라, 1936년 29세의 나이로 시인으로서의 명성과 조선일보 기자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개 외국 문학도가 된 그의 낭만적 기질을 고려해 본다면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무한한 바다와 한갓 미물에 불과한 흰나비의 대조를 통해서 시인은 역사 혹은 운명과 같은 거대한 힘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는 표현으로 형상화함으로써 힘없이 날개만 파닥거리던 당시 식민지 지식인의 초라한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
<감상의 길잡이>(3)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孤掌難鳴)」는 속담이 있다. 혼자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미 역시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기호론자(記號論者)들이 잘 인용하는 해골표를 두고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만약 해골 표시를 한 깃발이 길가에 꽂혀 있었다면 그것은 교통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위험 지역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바다의 배에 그런 기(旗)가 달려 있었다면 해적선이라는 전연 다른 의미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작은 병에 해골 표시가 있으면 독약을 의미하는 것으로 함부로 먹지 말라는 것이고, 큰 상자에 그런 표시가 달려 있었다면 방사성 물질이 담겨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가 될 것이다.
김기림(金起林)의 「바다와 나비」를 읽는데 있어서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으로 접근해야 할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바다와 나비」라는 제목부터가 두 단어의 연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비라고 하면 「탐화봉접(探花蜂蝶)」이란 숙어대로 꽃과 관계된 의미로 굳혀져 왔다. 그러나 그 틀을 깨고 꽃을 바다로 바꾸면 바다에도 나비에도 다같이 화학작용 같은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나비와 꽃」, 「바다와 갈매기」 같이 굳은 살이 박힌 정형구에서는 도저히 지각(知覺)할 수 없었던 심상과 감동이 생겨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바다」와 「나비」의 두 단어가 「와」라는 연결 고리에 의해서 결합되는 순간이 바로 이 시가 태어나는 기점(起點)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바다와 나비를 결합시킨 것은 김기림이 처음은 아니다. 「네르발」의 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종래의 ‘꽃-나비’에서 ‘바다-나비’의 낯선 관계항(關係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바다와 나비」는 그것을 동기화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 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나비는 그게 바다인 줄 몰랐기 때문에 바다 위를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다는 말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순수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불에 덴 일이 없는 어린아이들은 불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그것을 손으로 잡으려 한다. 그 무구(無垢)한 눈과 순수한 의식으로 바라본 불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그것과는 전연 다른 불꽃일 것이다. 바다의 두려움을 모르는 나비의 눈 앞에 나타난 그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배가 깨지고, 상어의 이빨이 번득이고, 태풍이 산호초를 뒤엎는 그런 바다가 아닐 것이다.
나비가 날고 있는 그 바다는 즉물적(卽物的)인 바다, 어떤 선입견이나 관습에 오염되지 않은 의미 이전의 그 바다일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유리 바다와도 같이 투명한 바다이다. 바다와 나비의 대조 자체가 극소(極小)와 극대(極大), 점(點)과 면(面), 그리고 가벼운 공기와 무거운 물의 만남으로 초현실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실제로 그 나비가 철없는 어린 나비라는 것은 일련의 시를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한 다음 연을 보면 알 수 있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어린 날개’ 그리고 ‘공주처럼’과 같은 표현들은 그 나비가 이 세상에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어린 나비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순진한 어린 나비이기 때문에 거대한 바다 전체를 순식간에 ‘청무밭’으로 바꿔놓을 수가 있다. 이 지구의 공간은 바다와 육지로 되어 있으며, 모든 생물 역시 그 양대 영역에 의해서 분할된다.
‘칼 슈미트’는 <육지와 바다>에서 「우리는 육지의 아들인가, 바다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대립적 의미로 세계의 전 역사를 읽어간다. 그런데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에서 어린 나비 한 마리로 바다-육지의 그 거창한 대립 체계를 해체시키고 역사의 공간, 정치의 그 공간을 시적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섬[島]이란 말이 시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를 바다-육지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비가 바다 위를 나는 상상은 바다 가운데 육지가 있는 섬을 생각하는 것과 닮은데가 있다. 김기림의 나비는 극소화한 섬이며, 환상으로 변한 섬들의 파편인 것이다.
바다와 나비의 병치(竝置)는 색채의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흰 나비와 청무밭의 백(白)-청(靑)의 색깔은 청룡 백호의 경우에서 보듯이 우주를 나타내는 한국인의 오방색(五方色) 체계의 전통적 색채 대응과도 통하는 것이다. 바다-갈매기, 꽃밭-나비의 낯익은 배합이 이렇게 바다-나비로 짝이 바뀌어지면 바다에서는 온통 꽃향기로 물들고, 나비의 어린 날개에는 하나 가득 해조(海潮)의 짠바람이 배게 된다. 바다 위를 나는 나비는 꽃잎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런 나비가 아니다. 파도 위에 내릴 수 없는 그 나비는 온종일 날아다녀야 하는 동적(動的)인 나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꿀을 따는 노동과는 관계 없는 무상(無償)의 비상(飛翔)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비가 꽃보다도 바다와 결합되었을 때 더욱 시에 가까워지게 되는 이유이다. ‘공주’는 노동하지 않는다. 공주가 지치는 경우는 오직 무도회에서 춤을 출 때 뿐이다. 「공주처럼 지쳐서」라는 표현은 바로 나비의 비상을 춤에, 그리고 바다를 무도회장에 비기는 은유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나비가 꽃밭 보다도 바다와 결합되었을 때 더욱 그 춤이 춤다워지는 이유이다.
나비-바다의 결합이 이 시의 마지막에 이르면 나비-하늘로 그 병치법(竝置法)이 변화한다. 뭍으로 다시 돌아온 나비가 만나게 되는 것은 여전히 꽃밭이 아니라 하늘의 초생달이기 때문이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바다와 나비의 공간은 시간적인 좌표를 얻게 된다. 그것은 그냥 바다가 아니라 3월의 이른 봄바다이다. 그리고 나비 역시 꽃보다 먼저 이 세상에 나온 철이른 나비이다. 이런 계절감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라는 종구(終句)가 현실감을 얻게 된다. 우리는 벌이나 개미허리라는 말은 들었어도 나비허리라는 말은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비의 육체성을 강조하려면 그것은 아무래도 나비의 날개가 아니라 허리여야 한다. 그리고 의상을 걸치지 않은 맨살의 느낌을 주는 것도 역시 날개가 아니라 허리이다. 그리고 그 허리는 2연의 날개와 짝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바다의 물결에 날개가 저렸던 나비가 3연에서는 하늘의 초생달에 그 허리가 시린 것으로 묘사된다. 예민한 시독자(詩讀者)라면 바다가 하늘로, 물결이 초생달로, 그리고 날개가 허리로 병렬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바다와 밀착된 나비는 이제는 하늘과 맞닿는다. 삼월달 바다가 아니라 삼월달 밤하늘의 초생달은 얼음처럼 차갑다. 허리가 「시리다」라는 촉각과 온감각은 시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보다도 훨씬 대상과의 접촉거리가 가깝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것은 봄볕과 봄바람의 따뜻한 한늘에서 나는 나비가 아니다. 새파란 초생달 빛과 그 냉기를 품고 있는 참으로 낯선 나비이다. 그래서 시적 상상력으로 채집한 언어의 나비 표본실에는 지금껏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진귀한 신종 나비 한 마리가 더 진열된 것이다.
시가 하나의 생명체와 같다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DNA의 결합에 따라서 그 형태와 성격이 다른 무수한 생명체가 생겨나는 것처럼, 시인의 언어 역시 그 배함과 구성의 변화에 의해서 색다른 영상과 의미의 생명체를 낳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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