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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극에 대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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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극

 

민속 집단 생활의 전반에 걸친 민족의 기반적 생활 양태를 연극적으로 표현, 형상화한 것. 민속극은 농경의례나 장례의식 등 각종 원시 종교 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풍농·풍어제(동제 등)와 상제례 등에서 발생되어 예능으로 발전한 연극 양식을 그러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즉, 가면극을 위시하여 민속인형극·그림자극·판소리 등이 그러한 민속극에 속한다.

이 밖에도 민속극에 포함시킬 만한 것이 더 있는데, 가령 농악이라든가 굿의 난장이나 잡색놀이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나라의 굿은 예능적 측면이 강해서 탈놀이가 끼어 있다든가 주제가 뚜렷한 묵극적(墨劇的)인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속극은 일종의 초기 형태의 제의성이 강한 연극 양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성(희곡)보다는 춤·마임 등 표현성에 치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민속극을 구비문학에 포함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민속극은 모두가 축제의 일환으로 연행되어 왔으므로 놀이성이 강하다.

≪참고문헌≫ 韓國假面劇(李杜鉉, 한국가면극연구회, 1973), 韓國의 民俗劇(沈雨晟, 창작과 비평사, 198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농경의례, 장례의식 등 각종 원시종교의식에서 시작되었다. 농경의식설(農耕儀式說), 산대희설(山臺戱說), 기악설(伎樂說), 절충설(折衷說) 등이 기원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정조 때 유득공(柳得恭)은 그의 저서 《경도잡기(京都雜記)》에서 한국의 연극을 산희(山戱)와 야희(野戱)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산희는 사자, 호랑이, 만석(曼碩) 같은 것을 만들어 춤을 추는 것으로 지금의 꼭두각시, 인형극이 여기에 속한다. 야희는 당녀(唐女)와 소매(小梅)로 각각 분장하고 춤을 추는 것으로 지금의 가면극이다.

가면극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며 고려의 산대희, 조선의 산대도감극으로 이어져 오늘날 양주 별산대놀이, 봉산탈춤, 통영 오광대 등이 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인형극은 꼭두각시극으로 지금까지 전해 오는 산대놀이와 함께 조선 중엽으로 각본의 역사가 거슬러 올라간다. 풍자의 특성 때문에 서민들의 인기를 모았고 꼭두각시놀음, 만석중놀이 등이 전한다.

민속극에는 그 외에도 그림자극, 판소리 등이 있으며 넓게 보면 농악, 굿, 난장, 잡색놀이 등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문학성보다는 표현성에 더 치중되어 있으며 축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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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民俗) folk

민속의 정의

민속문화유산·민속문화·기층문화·민족풍습 등은 모두 민속을 표현하는 혼합된 개념들이다. 민속은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보편적인 전래 생활문화이지만 서유럽 사회에서는 일찍이 산업사회의 전개와 더불어 소멸, 축소를 거듭해왔고 오늘날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에서 강한 전승력을 보여준다.

민속은 민족생활의 독자성을 반영하면서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그 민족의 문화생활에 이바지해왔다. 그것은 민중들의 사고·언어·행동이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유형·무형의 일체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속은 민간인의 과거·현재·미래의 생활풍습을 모두 포괄한다.

어느 민족에 있어서나 민속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민속문화는 독자적인 민족정서를 내포한다. 각 나라와 민족은 저마다의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그 민족적 특질이 가장 잘 두드러지는 것이 민속문화이다. 한국의 민족구성은 매우 확고한 단일성원이기에 민속문화가 곧 전체 민족구성원의 민족문화이기도 하다. 둘째, 민속문화는 계층적 성격이 강하다. 어느 나라나 지배층의 문화와 민간층의 문화는 다르게 나타난다. 궁중 문화와 양반신분층 문화, 일반 농민들 사이의 문화는 매우 다르게 전승되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각 신분 사이에서 민속문화는 끊임없는 유동을 계속한다. 지배층의 상층문화가 기층으로 전파되어 기층화되기도 하며, 반대로 기층의 민속문화를 국가에서 적절히 수용하여 상층문화가 되는 경우도 있다. 셋째, 민속문화 역시 각 시기별로 차이를 보여준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정치적인 배경이나 사회경제적인 여건이 변화함에 따라 민속문화도 변화를 거듭하며, 여타 문화에 비해서는 비교적 완만한 속도로 진행되는 편이다. 넷째, 민속문화는 공동체문화이다. 공동체란 생산자와 수용자의 공동체성을 말하며 개인창작과 집단창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가령 일개 구연자가 전달하는 옛 이야기는 한 개인의 창작이기도 하지만 오랜 세월 전승되어온 공동체적 전승물이 한 개인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다섯째, 민속문화는 생산문화이기도 하다. 한국의 민속문화는 생산의 풍요를 염원하는 농경생활에서 비롯되었다. 각 절기에 따른 생활풍습과 한국의 자연지리적·사회경제적 처지에 알맞게 발전을 거듭해온 민속문화에는 반드시 생산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민속문화의 창작자와 수요자 자체가 생산자 농민이거나 어민·수공업자·상인들이었던 탓이다.

 

민속문화의 분류방식

 

민속을 분류하는 방식은 일찍이 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분류방식은 나라·시대·학자에 따라 다르다. 외국의 주요분석사례를 살펴보면, 프랑스의 P. 상티브는 민속자료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반면에 독일의 E. 뫼크는 언어에 나타난 민족의 심성(언어·명칭·민간문예), 신앙에 나타난 민족의 심성(미신·주술신앙·민간의료·생명관 등), 행위에 나타난 민족의 심성(사회적·정치적 결합), 제작물에 나타난 민족의 심성(주거·의복·식물)으로 분류했다. 영국의 C. S. 번이 1914년에 펴낸 〈민속학개론 The Hand-book of Folklore〉에서는 1부 신앙과 행위, 2부 관습(제도·의례·생업·공업), 3부 설화·민요·속담·수수께끼·방언으로 나누었다. 미국의 R. 도슨은 구비문학(구연예술·표현문학), 물질문화(물질적 민속생활), 사회적 민속관습(세시풍속·통과의례·제의·축제·민속신앙·민속의료 등), 연행되는 민속예술(민속음악·민속춤·민속극)로 분류했다.

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타오리판[陶立番]은 물질민속·사회민속·세시민속·인생의례·정신민속·구승언어민속 및 기타로 분류했고, 일본의 야나기다[柳田國男]는 유형문화·언어예술·심리표상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조지훈은 구비전승(설화:신화·전설·민담·동화·외담·笑話, 민요, 판소리, 무가, 속담, 수수께끼, 방언, 은어, 민속극의 대사), 신앙전승(예조·점복·금기·주부·자연숭배·동물숭배·이인숭배·가택신·부락신·무속), 의식·행사 전승(산속·혼속·상장·제례·연중행사), 기예전승(음식·의복·주거·민구·민속유희·민속경기·민속무용·민속음악·민속극·인형극·민간의료), 공동생활구조전승(가족제도·사회구조·경제조직·생업기술)으로 분류했다. 또 이두현은 〈한국민속학개설〉에서 마을과 가족생활(부락, 가족과 친족, 관혼상제), 의식주생활, 민간신앙(무속·가신신앙·동제·유교제례), 세시풍속(역법과 세시풍속, 춘절·하절·추절·동절의 세시풍속), 민속예술(민속악·민속무용·민속극·민속공예), 구비문학(민요·설화·무가·판소리·속담·수수께끼)으로 분류했다.

반면에 북한 학계에서는 식생활 풍습, 옷차림 풍습, 주택생활 풍습, 가정생활 풍습, 공동생활 풍습, 민간명절과 인사예법, 민속놀이로 분류하고 있다. 오늘날은 전세계적으로 민족과 문화·사회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총괄적인 범위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 민속의 내용

 

한국 민속은 크게는 민속공예같이 물질적 자료가 전승되는 경우를 말하는 유형(有形) 문화, 민속놀이같이 사람을 통해서 구전으로 전승되는 무형(無形) 문화로 분류된다. 좀더 세부적으로는 의식주생활 풍습, 민간신앙, 민간명절, 생산 풍습, 가족생활 풍습, 민속예술 등으로 나뉜다.

 

의식주생활 풍습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들인 의생활·식생활·주생활을 망라한다. 식생활은 이상음식·특별음식·다과류·음료를 포괄하며 식생활 관습과 식사예절도 포함된다.

 

민간신앙

 

기층신앙을 형성하는 마을신앙·집안신앙·무속의례를 망라한다. 민간신앙은 한국인의 심층에 가장 오래도록 존속해온 정신세계의 표상으로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 풍수신앙·독경신앙·기자신앙·사귀신앙 등도 포함된다.

 

명절

 

세시의 변천에 따라 24절기에 맞추어 지내는 세시명절로 춘하추동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정월 대보름, 한식, 3월 삼짇날, 4월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칠석, 7월 백중, 8월 한가위, 9월 중구, 10월 상달, 동지 섣달 등이 대표적이다. 민속음식뿐만 아니라 민속놀이 등에서도 독특하다.

 

생산 풍습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 재부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활동의 소산이다. 농업·어업·수공업 노동 등 노동의 종류에 따라 다르나 농업생산 풍습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다. 분야별로는 농기구·노동조직·장시관행 등으로 가른다.

 

가족생활 풍습

 

가족생활에 수반되는 개인 및 집안 풍습을 망라한다. 가족성원들의 상호관계, 친척들과의 친족관계, 집안의 대소사를 의미하는 관혼상제 등을 이른다.

 

민속예술

 

전래 민간예술(民間藝術)을 가리키며 전통예술이나 민속예술의 개념과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고 민중들에 의하여 전승되어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민속예술은 민속문학·민속악·민속극·민속춤·민속공예 등의 범주로 가른다.

 

① 민속문학:구비문학(口碑文學)·구전문학(口傳文學)이라고도 하며 민간전승의 문학이라는 개념을 지닌다. 신화·전설·민담을 포괄하는 설화·무가·민요·속담·수수께끼·민속극·판소리 등으로 가른다.

② 민속극:민속극이란 국가나 상류층에 대한 일반 민중의 공동체 내에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전승되어온 전통연극으로 탈놀이와 꼭두각시극이 대표적이다.

③ 민속악:민중들이 즐긴 음악으로 옛 문헌에는 속악(俗樂)이라고 나와 있으나 지금의 민속악과는 개념이 다르다. 농악·민요·판소리·선소리·잡가 등이 이에 속한다.

④ 민속춤: 민중들에 의해 전승이 이루어진 춤으로, 춤본이 뚜렷이 정해져 일정한 법도에 따라 추는 궁중무용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민속무용이라고도 부른다. 설자구춤·보릿대춤·덧배기춤·강강술래 등이 있다.

⑤ 민속공예:민속공예는 전통 수공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민중들의 생활풍습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예이다. 대개 지방 특산물로 발달해왔다. 목칠공예(木漆工藝)로서 집안의 가구를 짜는 소목공예(小木工藝), 자개를 만드는 나전공예(螺鈿工藝), 활과 화살을 만드는 전통공예(箭筒工藝), 죽세공예(竹細工藝)인 낙죽공예(烙竹工藝), 한산모시·바디공예·참빗공예, 악기공예로서 북공예, 금속공예로서 유기공예·입사공예(入絲工藝)·조각공예·장도공예·연죽공예(煙竹工藝), 모자공예로서 망건공예(網巾工藝), 석공예(石工藝)로서 벼루공예 등을 꼽는다.

 

한국 민속의 역사

 

민속의 역사는 왕조사나 사건사같이 시대적 흐름에 급격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연대를 정확히 구별하여 서술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시대별로 민속 역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민속문화의 시기에 대해서는 크게 선사시대·고대사회·중세사회·근현대사회로 구분할 수 있다.

 

선사시대의 민속

 

한국의 선사시대는 구석기로부터 출발했다. 함경북도 웅기의 굴포리, 공주의 석장리, 제천의 점말동굴 등을 통해 구석기인들은 동굴이나 평지에 살았으며, 노지(爐址)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서 불을 난방에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사냥도구로는 주먹도끼·찍개·찌르개, 취사도구로는 긁개·밀개 등이 전해지며, 구석기 후기에 원시신앙이 발생했다. 초기 원시신앙의 특성은 인간과 특정 동물, 식물과 무생물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믿는 토테미즘으로 씨족집단의 성원들은 그 토템이 자기들을 수호해준다고 믿었다. 또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물활론도 발생했다. 신석기시대풍습의 질적인 변화는 농경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다. 수렵이나 채취에 전적으로 의존하다가 농경정착생활이 시작되면서 민속 역시 정착되어갔다. 괭이농사가 시작되고, BC 2000년대초에 이르면 괭이농사보다 발전한 갈이농사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움집에서 살았으며 짐승의 가죽을 돌칼로 다듬은 후 뼈바늘로 꿰매서 옷을 짓는 방법이 개발되고, 옷에는 조개나 구슬 같은 장신구도 달았다. 씨족공동체인 신석기인들은 우주만물이 영혼을 지닌다는 애니미즘 신앙을 가지면서 샤머니즘을 발전시키게 된다.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가축을 이용한 갈이농사가 발전한다. 농경문청동의기(農耕文靑銅儀器)에는 따비로 농사짓는 남자와 항아리에 곡식을 담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당시의 농경생활을 잘 보여준다. 곡식을 파종하고 수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농경세시행사들이 이루어졌으나 역사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은 없다. 움집 대신에 움의 깊이가 매우 얕거나 거의 지상가옥에 가까운 집에 살면서, 고인돌·석관묘·움무덤 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식생활풍습의 변화도 두드러져서 독·항아리·시루·단지·보시기·대접 등 다양한 질그릇들이 이용되었다. 씨족공동체사회의 분화에 따라 계급의식이 생겨나고 사적소유제의 확립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지배권력의 확립을 가져왔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권력과 사제권을 일치시킨 제정일치의 관행이 성립되었다. 방울·거울 등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청동의기(靑銅儀器)들은 당시 사제권의 확보와 신앙풍습이 절대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는 아직도 석기류가 보편적이었으며 청동은 극히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거쳐 발전해온 원시농경은 철기시대에 들어와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철기시대에는 철제보습·나무후치·쇠낫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경도구에 의한 농경풍습이 새롭게 발전했으며 천체관측과 기상학적 경험에 기초하여 벼를 비롯한 오곡 재배방법들이 관습화되었다. 청동기의 거석문화는 이후에 마을 입석이나 선돌로 상징되는 신앙체계의 한 모태를 이루기도 했다.

 

고대사회의 민속

 

BC 100년 전반기 고조선에서는 청동문화가 발전했다. 청동으로 만든 도끼·자귀·끌·송곳·칼 같은 것이 중요한 노동도구가 되었다. 청동도구의 발전은 무엇보다 생산도구의 생산에서 일대 변화를 가져와 연장·후치 같은 농기구풍습을 발전시켰다. 고조선에는 8조법금이 있어 남의 물건을 도둑질한 자는 그 주인의 노예로 만들며, 만일 범죄자가 죄를 면하려면 50만 냥의 돈을 내야 한다는 규율이 있었다. 제정일치의 신앙풍습은 정치권력이 성장하면서 분리되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삼한에서는 사제장을 천군(天君)이라 불렀으며 이들은 소도(蘇塗)라고 불리는 별읍(別邑)을 주관했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서 일종의 신성구역을 설정했는데 죄를 지은 사람들이 소도로 피난을 가면 잡지 못했을 정도로 절대적인 신성성을 발휘했다. 예(濊)에는 책화(責禍)가 있어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했다. 또한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같은 세시풍습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부여의 영고는 12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면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기는 것이었다. 마한에서는 5월 씨뿌리기가 끝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모여서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수십 명씩 집단적으로 춤을 추며 놀았고, 10월 농사가 끝날 때에도 역시 같은 행사를 했다. 이러한 풍습들은 농업생산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된 농악무의 고대적 형태이기도 했다. 공동체사회풍습의 잔재인 이러한 행사는 공동체적 소유를 그 경제적 기초로 하고 있었다. 부여의 관습에는 살인자로 판결받은 사람의 가족은 노예로 만들며, 도둑질한 사람에게는 12배의 보상을 시킨다고 했다. 소의 발굽을 보아서 길흉을 점쳐 전쟁에 임하는 점복풍습도 부여에서 나타났으며, 후장(厚葬)을 하여 부장품을 묻고 영혼불멸사상을 믿는 장례풍습은 매우 보편적인 일이었다. 또한 청동기의 사용이 보편화되어 기하문 장식의 청동거울, 방울을 단 의기, 장대투겁, 새 모양 간두(竿頭) 같은 주술적 의기들이 쓰였다.

 

읍치국가를 벗어나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생산력도 급격히 증가하고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도 정비되어갔다. 삼국시대에는 지배계급을 천신·조상신·자연신과 일치시킨 고유종교가 한층 발전했고,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들 종교관념은 보다 깊어졌다. 고구려의 농경은 주로 조·수수·기장·콩을 기본으로 하는 밭농사로서, 10월 국중대회에서 신을 맞아 나라의 동쪽에 모시고 나무로 깎은 여신상을 모시거나 주몽을 신격화했다. 민속놀이로는 왕이 친히 패수에 나가 독려하는 가운데 패를 갈라 벌이는 석전(石戰)이 치열했다. 특히 고구려는 상무적 기풍을 중시하여 말타기·활쏘기·권법 같은 무예가 발달했으며 창춤·활춤 같은 민속무용도 발전했다. 혼례풍습으로는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취하는 풍습이나 처가살이혼풍습인 서옥제(壻屋制)가 행해졌다. 기후가 온난한 남쪽(백제·신라·가야) 지방에서는 보리·콩을 기본작물로 하는 밭농사와 논농사가 이루어졌다. 논농사의 본격화는 이후 한국 농경풍습의 모태를 이루게 되었다. 신앙풍습으로서 백제에서는 동명왕묘를 모셨으며 불교전래와 더불어 민속신앙과 결합된 다양한 민속종교가 존재했다. 백제에서는 특히 중국에서 들어온 오악(五樂)을 즐겼으며 가무백희의 기원으로서 민속놀이 역시 성행했음을 알려준다. 신라에서는 세시풍속으로 설날과 한가위 풍습이 전해진다. 특히 가배라 하여 길쌈경쟁을 통해 진 편에서 회소곡을 불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추석이 세시명절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농업생산을 반영한 대표적인 춤으로서 도솔가(두레놀이)도 성행했다. 신앙풍습으로 신라 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제정일치의 사제권을 지닌 무당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될 정도로 무격신앙이 발전했다. 이후 이차돈의 순교 등 민간신앙과 전래종교와의 갈등도 만만하지 않았다. 통일신라시대의 민속 역시 전대의 신라풍습을 이어받은 것이나 이때는 불교문화의 지배가 한층 가속화된 시기였다.

 

중세사회의 민속

 

중세사회 민속의 역사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나누어볼 수 있다. 고려 성립 이후 15세기에 이르는 농경풍습의 특징은 우선 토지이용에서 불역경법(땅을 묵히지 않고 해마다 부치는 것)이 확립된 것이다. 종래의 역전법(휴전농법)이 11세기에 와서 없어지고 해마다 파종하고 추수하는 불역경법이 널리 보급되었다. 새로운 영농관습은 농경풍습발전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논벼농사가 보다 확대되었고, 내한종·올종과 같은 좋은 벼품종들이 보급됨으로써 보다 넓은 지역에서 벼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경 벼·기장·조·수수·피·밀·보리 등의 작물 재배방법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목화를 비롯한 새로운 작물도 재배되었다. 특히 목화의 보급은 옷차림 풍습에서 일대 변화를 일으킨다. 고려시대에는 체력 및 무술단련놀이로서 말타기·격구·씨름·활쏘기·그네·돌팔매놀이·수박희·수희 등이 발달했다. 개인놀이로는 투호·바둑·쌍륙·농주희·저포(윷)·장기 등이 있었다. 어린이놀이로는 대말타기·풀던지기·연놀이·고누 등이 있었다. 또 이때 산대무극이 등장했으며, 이전부터 전해져온 처용무가 그 내용과 형식이 풍부해져 가면무용극으로 완성되었다. 〈동동〉 같은 고려가요는 당시의 민요 실상을 잘 알려준다. 명절풍습으로는 정초·상원·한식·상사(3월 3일)·단오·중구·동지·추석 등이 있었다. 특히 팔관회와 연등회 같은 독특한 종교행사들이 행해졌다. 명절에는 널뛰기·그네·씨름·활쏘기 같은 놀이도 즐겼다. 신앙풍습으로는 불교·유교 뿐만 아니라 자연숭배사상과 풍수지리설 등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고려말에 이르면 향도(香徒)가 조직되기도 하여 조선 전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로 접어들면 농법도 이전 시기에 비해 월등히 발전한다. 15세기 농서인 〈농사직설 農事直說〉에 의하면 그루갈이법과 2년4작법이 나타나며 논농사에서 2모작법이 부분적으로 보급되었다. 9가지 종자를 준비하되 충실하고 잡종이 섞이지 않은 것을 선택한다고 했고, 조선 후기의 〈천일록 千一錄〉에 의하면 종자로 쓸 것은 곡식을 베어들일 때 먼저 충실하고 온전한 이삭을 골라서 따로 베어야 한다고 했다. 종자보관법으로는 윗방 천장에 덕대를 매고 얹어두거나 처마끝에 걸어두는 방법이 있었다.

 

〈농사직설〉에는 파종시기가 되면 눈 녹인 물에 종자를 담갔다가 말리는데 이렇게 선별해 종자를 심으면 추위에 견딜 수 있고 수확도 배로 늘어난다고 했다. 거름장만에는 짚이나 북데기를 가축우리에 넣어 썩히는 방법이나 아궁이에서 흙을 구워 재와 함께 모아두었다가 쓰는 흙구이법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농사준비와 관련해서 잡풀을 태우는 쥐불놀이, 농사 전의 대동놀이인 농악놀이, 소를 위해주는 소날, 노비나 머슴을 위로해주는 머슴날[奴婢日] 등의 민간행사가 있었다. 밭갈이에 들어가면 기본도구로 보습이 필요했는데 호리·연장·가대기의 3가지 유형이 쓰였다. 파종법과 관련해서는 무삶이·건삶이·모내기 풍습이 있었다. 모내기는 모판에서 모를 따로 키워내어 논에다 옮기는 발전된 방법으로서 조선 후기에 다양한 농경생활풍습을 낳았다. 모내기가 끝나면 바로 김매기에 들어갔으며, 김매기도구는 호미·후치 등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호미가 가장 보편적이었다. 김매기는 대개 초벌·두벌·세벌을 했는데 공동으로 수행하는 두레가 널리 행해졌다.

 

북한 지역에서는 황두와 소겨리 풍습이 행해졌고, 남쪽에서는 두레가 전형적인 공동노동으로 자리잡았으며 상부상조하는 농경생활 풍습들은 바로 이러한 공동노동조직으로부터 배태된 것들이 많았다. 특히 두레는 자연마을을 단위로 조직되어 호미모둠·호미씻이 등의 세시풍속을 지녔으며 행수·도감·영좌·숫총각 등의 역원을 선출해 집체적으로 움직여나갔고, 반드시 두레풍물을 수반해 농민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세기 후반에 오면 삯김·자리품·고지 등의 고용노동 형태가 급속히 발전하여 농경생활풍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익은 곡식은 낫을 기본도구로 해 베었고, 소바리·수레·발구·지게 등을 이용해 날랐다. 탈곡은 게상질·도리깨질·홀태질로 해결했다. 곡식찧기는 절구·방아(디딜방아·물레방아·연자방아)를 이용했으며, 갈무리는 둥그미·섬 등을 이용했다. 민간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계가 발전·보급되었다. 상호부조조직인 문계·동계는 물론이고 상포계·혼인계·홍학계 같은 조직들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이같은 계들은 상호부조하는 공동화폐금융제도와 비슷한 중요한 풍습이었다.

 

마을에는 어느 곳에나 마을 공동의 신을 모시는 당산제·서낭제·당제·골메기굿 같은 유형의 마을신앙이 존속했으며 세분화되어 마을마다의 격식을 갖추게 되었다. 장승·탑·수구막이·솟대·짐대·벅수·당수나무 등 다양한 명칭의 마을신격들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어 마을마다 확립된 것도 바로 조선시대의 일이었다. 마을에서 대동으로 전곡을 추렴해 제관을 뽑아 금기를 행하고 마을 공동의 신에게 1년에 1번씩 제를 올리는 일은 매우 일반적인 풍습이 되었으며, 성주·칠성·삼신·업·터주·철륭·조상단지 등의 집안신을 개인적으로 모셨다.

 

농경생활의 확립과 더불어 세시풍속도 정형화되어갔다. 설날, 상원, 입춘, 한식, 3월 삼짇날, 4월 초파일, 5월 단오, 6월 유두, 7월 칠석, 7월 백중, 8월 추석, 9월 중구, 10월 상달, 동지 섣달 등의 세시풍습이었다. 세시풍속으로는 1월 설의 차례·설빔·청참(聽讖)·세배·덕담·복조리·야광귀(夜光鬼)·소발(燒髮)·세화(歲畵) 등의 풍습과, 정월 대보름에 오곡밥먹기·낟가리·더위팔기·다리밟기·복토훔치기·제웅· 쥐불놀이·나무조롱·조리밥·마당찧기·내농작(內農作)·모기팔기·노래기쫓기·부럼깨물기·농점(農占)·용알뜨기·대추나무시집보내기·복쌈·고고매(姑姑妹)·달맞이·소밥주기·마을보기·개보름쇠기, 유지방·귀밝이술·콩볶기·약밥·보름나물 먹기 등을 했고, 2월 1일은 머슴날로서 송편을 일꾼들에게 먹이고 영등제를 모셨으며, 3월 삼짇날에는 삼짇놀이를 즐기고, 4월에는 절에 다녔다.

 

5월에는 약쑥뽑기·단오석전·단오굿·그네뛰기·천중부적·씨름·단오선(端午扇) 등의 풍습, 6월에는 유두고사·삼복놀이, 7월에는 칠석차례·칠석공양·망혼제·백중놀이·우란분제, 8월에는 추석차례, 9월에는 중구놀이, 10월에는 상달고사, 동지에는 동지팥죽고사 등의 세시풍속이 이루어졌다. 이같은 세시풍속들은 조선 후기의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열양세시기 洌陽歲時記〉·〈경도잡기 京都雜記〉 등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다양한 민속놀이도 정착되었다.

 

경기놀이로는 씨름·널뛰기·그네뛰기· 줄다리기·활쏘기·말타기·격구·타구 등이 있었고, 겨루기놀이로는 윷·쌍륙·남승도·장기·바둑·고니, 가무놀이로는 탈놀이·꼭두각시놀이·불꽃놀이·등놀이·화전놀이·강강술래·길쌈놀이·삼삼이·박놀이 등이 있었다. 아동놀이로는 연띄우기·팽이치기·썰매타기·줄넘기·진놀이·바람개비놀이·숨바꼭질·공기놀이·수박따기·실뜨기·고을모둠·풀싸움·꽃싸움·자치기·대말타기·다리셈놀이 등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유교사상의 전면적인 확립으로 인해 관혼상제풍습을 대단히 중시했으며 특히 〈주자가례 朱子家禮〉에 의한 격식을 지켰다. 사람이 출생하면 먼저 백일과 돌 잔치를 하고, 성장하면 남자들은 관례(冠禮), 여자들은 계례(禮)를 올려 일종의 성인식을 거행했다. 혼례는 선보기·약혼·날받이·납폐·혼례식의 절차로 이루어졌는데 유교풍습과 전래풍습의 일정한 타협으로 반친영(半親迎) 제도가 성립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 환갑·진갑·팔갑·구갑을 성대히 열었고, 결혼 후 40년을 함께 산 부부는 회혼례를 했다.

 

상례로는 〈주자가례〉에 의한 엄격한 절차가 보편화되었으며 습·염·입관·지방세우기·명정드리기·성복·조상 풍습이 있었다. 운구는 상여로 했으며 봉분을 만들어 묻는 풍습이 일반화되었다. 초상을 치르고 나면 초우제·삼우제·졸곡·소상·대상·담제 등의 제사풍습이 뒤따랐고 가장 중요한 제사로 기제사를 지내며, 선대조상을 위해서는 시제를 지냈다. 또한 조선사회는 문벌을 중시하여 문중으로 대표되는 복잡한 친족관계에 따른 민속관행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근대·현대의 민속

 

조선 후기에 이르러 급격히 증가한 생산력은 근대로 접어드는 조선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촉진했으며 농업생산풍습의 질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이앙법의 전면적 실시와 더불어 두레문화가 전답지역인 북쪽까지 확산되어 농민문화의 핵심으로 자리잡고 풍물을 발전시켰다. 수공업생산 역시 급증하여 쇠를 다루는 수공업풍습과 민속공예의 획기적 변화를 이룩했다. 5일장의 확산은 전국적인 장시의 발전을 촉진했다. 근대의식을 소유한 실학파들은 민속에 관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입장에서 많은 저술을 간행했으며, 〈동국세시기〉·〈열양세시기〉 같은 세시기나 〈천일록〉 같은 농서들이 이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사회 풍습은 일제 식민지 당국에 의해 강제로 개편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한편 대한제국기의 개화는 민속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는 너울·장옷 등의 머리쓰개를 벗어버리는 등 옷차림 풍습에 큰 변화가 있었다. 일제는 차츰 민속놀이 같은 집단적인 놀이를 법으로 금지시키고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몰아 폐지시키는 방향으로 식민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전래풍습은 급격한 쇠퇴·소멸을 면치 못했으며 더욱이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징병·징용·정신대 등의 사회적 압박은 민속을 급격히 쇠퇴시켜 자생적인 농민문화의 발전을 어렵게 만들었다. 해방이 되면서 그간 맥이 끊긴 전래 풍습들이 다소 되살아나기는 했으나 남북 분단으로 민간의 풍습은 2개의 분단된 문화풍습으로 온존하며 각자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민족의 대이동과 생활상의 변화는 전래 농촌공동체에 뿌리박은 민속문화를 대다수 소멸시켰으며, 1960년대 이후 몰아닥친 산업화 역시 민속문화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현재는 전래의 민속과 더불어 새로운 풍습들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민속문화의 전망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민속문화 역시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 변화하기 마련이다. 오늘날같이 도시화·산업화라는 물질문화 만능풍조 속에서 문화혁신은 외래문화의 여과를 통한 창조적 수용 속에서 가능하다. 사회문화의 수준이 낮고 자급자족적·폐쇄적인 사회에 적합했던 혈연주의·지연주의·가족주의·권위주의 등 정체적 사회유산이 오늘날의 개방주의·자유주의의 역동적 사회에서 온존함으로써 한국 사회는 문화의 이중구조와 혼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현대적으로 조명해본 민속은 민중문화의 정통성을 가진 실체로서 전통문화의 집합표상이다. 민속은 자연환경의 생태적 특성, 향토의 공간적 역사성이 반영된 자기의식이며 민중의 의지이다. 서민의 사유생활과 언어행위를 담은 유형·무형의 문화적 형태와 상징적 체계로서 진솔한 삶의 자취가 뿌리내린 문화이다. 민속의 뿌리찾기가 어려운 것은 서민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고 문헌역사에서 소홀히 다룬, 흙에 남긴 삶의 정취가 시간과 더불어 변화되기 때문이다.

 

곧 민속은 문화·사회·물질·자연 상호간의 구조 속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문화갈등·문화재생·문화변용 등의 동태적 요인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쓰여지지 않은 문화, 무기록의 역사, 구전된 음성, 사유, 행동, 물질, 언어 등을 현지조사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현존하는 유적·역사자료·지방사료·문집·생활사기록·물질문화를 무기록 전승문화와 비교·연구하고 접목시켜 가장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전통문화를 재창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속의 어떤 형식과 내용을 계승 발전시키느냐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즉 한국민속의 미래는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 사회 속에서 민족적 삶의 양식을 대표하는 민족문화의 핵심으로서 그 생명력을 이어나갈 것이다. (李鍾哲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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