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연가(戀歌) / 이해인(李海仁)
by 송화은율민들레의 연가(戀歌) / 이해인(李海仁)
은밀히 감겨 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 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날마다 봄 하늘에 시를 쓰는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얇은 씨를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해에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이는 나 혼자 만들어 불러 보는 노래이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왕에게 몹시 미움을 받은 운명의 별이 땅에 떨어져 민들레가 되었다고 한다. 민들레의 하얀 씨가 날개를 쳐 하늘로 나는 것은 민들레가 별의 혼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옛날, 이 땅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다른 것들은 다 피신하였는데, 뿌리가 깊은 민들레만 피신을 하지 못해 물에 휩싸여 죽게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이 민들레의 씨에 날개를 주셨고, 그래서 민들레씨는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 햇볕이 잘 드는 새로운 땅으로 피신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이후로 민들레는 하느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금빛 얼굴로 하늘을 우러러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민들레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에도 촉촉한 봄비가 내린다. 봄비를 머금고 배시시 웃으며 피어날 그 노란 꽃과의 만남에 소녀의 가슴은 벌써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하늘에는 주홍의 도포를 펄럭이는 따스한 해가 비춘다. 나는 어느 새 수줍어 얼굴을 가리며 ‘사랑합니다.’를 고백하는 ‘민들레 여인’이 되어 간다.
지금으로부터 열두 해 전의 이른 봄, 나는 까만 치마에 흰 저고리를 받쳐 입은 풋내기 자매로 수녀원에 입회(入會)했다. 수녀원에서의 생활은 꽤나 명랑한 날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안개처럼 스쳐 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슬픔에 종종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미 각오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수녀원 생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어려움의 대부분은 거의 내면적인 것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모두를 사랑하되 하나를 갖지 않고, 하나인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초연히 모두를 사랑한다고 함은 나에게 너무도 아득한 일로 여겨졌다. 나는 무엇보다도 내가 두고 온 사랑하는 이들과의 결별이 아쉬워 몸살을 했다. 그들을 그리워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죄책감에 엎치락뒤치락 잠을 설치며 스스로를 학대했다.
내 약한 마음이 지향할 바를 몰랐던 그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지도 수녀님을 찾아가서 아무래도 나갔다가 다시 오는 게 좋겠다는 내 나름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나는 호된 꾸중만 듣고 울면서 그분의 방을 나와야만 했다.
그럭저럭 일 년을 보내고, 이듬해 우리는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안리 수녀원으로 이사를 했다. 그 곳을 산책하던 어느 날, 나는 극히 좁다란 돌 틈을 비집고 당당히 피어난 노란 민들레를 보았다.
‘아, 어쩌면…….’
나는 민들레의 모습을 보고 솟구치는 기쁨에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한 민들레의 정다운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넌 왜 고민하니? 나처럼 살면 되잖아. 네가 원하기만 하면 좁은 땅에 앉아서도 모든 이를 뜨겁게 사랑할 수 있어.’
그는 내게 노래를 주었다.
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민들레와의 만남은 나에게 안주(安住)해야 할 땅을 확인하게 해 준 ‘소중한 발견’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랑의 슬기를 깨우쳐 주는 좋은 친구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아직은 가끔은 많은 이의 시선을 끄는 화려한 차림새의 ‘장미 여인’이 되고 싶은 허영이 살짝 고개를 쳐들 때도 있지만, 나는 민들레처럼 의연히 앉아 해를 보며 살기로 결심했다.
담담한 표정 밑에 뜨거운 언어를 감춘 기다림의 꽃은 결연히 말한다.
애처로이 쳐다보는
인정(人情)의 고움도 나는 싫어
바람이 스쳐 가며 노래를 하면
푸른 하늘에게 피리를 불었지.
진한 향기를 뿜지 못하는 앉은뱅이의 촌스러운 열등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부모가 된 어릴 적 친구들이 홀연 눈부시게 나타나 야릇한 연민의 눈길로 나를 싸안을 때 나의 자존심은 더러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런대로 뿌리를 내렸다 싶던 나의 신념도 가끔은 불확실했고, 꼭 만나야 할 애인의 모습은 오리무중일 때가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미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있었고, 그 사슬을 도저히 풀어 낼 수 없었다. 비록 비극을 초래할망정 햄릿의 오필리아나 오셀로의 데스데모나같이 극히 인간적인 사랑을 원했던 나의 꿈은 어떤 절대의 힘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일 듯하다가는 다시 멀어지는 그 사랑을 찾기에 나는 얼마나 지쳐 있었던가?
오랜 세월을 지나 겨우 사귄 나의 임은 무례한 폭군은 아니었으나, 다분히 오셀로적인 질투도 잊지 않으면서 서서히 접근해 왔다. 로미오와 같은 달콤한 감상도, 맥베드 왕 같은 야심도 없으면서 이상한 마력으로 나를 끌어당기던 힘, 아직도 지우지 못한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미련을 그는 용케 알아차리고 나에게 가끔씩 골탕을 먹였다. 그 때마다 나는 약이 올랐다.
보이지 않는 사랑을 위해 소리 없이 부서지는 내 파란 젊음이 왠지 억울하게 느껴져 회의에 빠졌다가도 흔연히 일어설 수 있음은 은총의 놀라운 기적이었다. 엉겅퀴처럼 돋아난 오만한 저항 의식이 순명의 ‘네’로 무릎꿇을 수 있음도 은총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었다.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사랑의 영(靈), 그 폭풍 같은 힘은 나는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는 민들레를 사랑했다. 그리고 민들레가 그에게 사랑을 바쳤을 때 민들레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미소를 흩날리게 되었다.
나는 많은 날을 착각 속에 빠져 허둥대었다. 그러나 그런 흔들림의 과정 역시 필요한 것이었다. 수녀 역시 사랑하는 여인이고, 그 사랑의 시력(視力)이 높아졌을 때 그는 감히 인류의 애인도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젠 아무도 뺏을 수 없는 은밀하고 보배로운 행복을 차라리 한숨 쉬며 민들레는 오늘도 이야기한다.
“사랑하올 임금님, 당신이 끼워 주신 언약의 반지에 제 사랑을 묶었습니다. 노오란 제 가슴이 하얗게 여위기 전 당신은 오시렵니까?”
그는 빙그레 웃음으로 대답해 올 것이다.
“많은 물도 사랑을 끄지 못하고 강물도 이를 덮지 못하느니, 작은 자여 내게로 오라. 겨울이 지나고 비도 지났도다.”
아, 태양에 쫓기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놀에 저렇게 긴 강이 흐르는 것을, 보고 싶은 얼굴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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