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문학의 효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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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효용

김 현 (문학평론가)

 

 

문학작품의 공리성과 오락성

 

문학 작품이 대량 생산되어 상품으로서 독자들에게 주어진 이후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문학적 논쟁 중의 하나가 문학의 공리성과 오락성에 관한 것이다.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정서적 반응을 불러 일으킨다면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 그에게 작용하게 될까? 또는 어떻게 그에게 작용시켜야 될 것인가? 어떤 극단론자들은 문학은 독자들에게 올바르고 선한 것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공리주의를 부르짖으며 어떤 극단론자는 문학은 단순한 오락에 불과하다는 유희오락주의를 주장한다.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는 문학의 교훈성이, 유희주의적 입장에서는 문학의 오락성이 강조되는 셈이다. 사실상 독자들은 작품을 읽을 때에 개인적인 즐거움을 느끼며, 동시에 그 작품이 주는 충격에 의해 자신의 삶을 반성한다. 쾌락과 반성은 좋은 독서의 안과 밖을 이룬다. 그 어느 한 편만을 주장한다는 것은 문학 작품을 억지로 토막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작품의 공리성과 오락성에 대한 주장은 톨스토이와 오스카 와일드에 의해 대표될 수 있으며, 한국 문학의 고질 중의 하나인 참여문학과 순수문학의 대립에 까지 그 여파를 미치고 있다. 고대에 있어서는 소위 아름다운 것, 착한 것, 참된 것의 삼위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 제일 좋은 것으로 치부되어 왔으나, 에드거 엘렌포우의 아름다움 중시의 시학에 크게 영향을 받은 프랑스 상징주의 이후로 아름다움에 대한 경사(傾斜)가 압도적으로 이루어 진다. 그와 거의 동시에 자연주의의 영향으로 참된 것을 찾는 노력이 에밀 졸라를 위시하여 광범위하게 행해진다. 아마도 쟝르의 분화계층의 대립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그런 두 개의 경향은 오스카 와일드의 쾌락으로서의 예술과 톨스토이의 윤리로서의 예술로 극단화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는 극단적인 명제까지 내걸고, 자기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지 말고 아름다운 것만을 그리라고 요구하며, 톨스토이는 도덕적으로 타락되어 있는 퇴폐적인 작품을 격렬하게 핍하(乏下)한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의 경우, 쾌락을 느끼는 주체자가 그가 속한 사회의 어느 자리에 위치해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없기 때문에 개인의 쾌락이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와 혼동되고 있으며, 톨스토이의 경우, 무엇이 정말로 도덕적인 것이냐에 대해 그가 전례적인 청교도적인 덕목을 제시하고 있어 복고주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아름다움은 현실적으로 추상적인 형태로 주어지는 법은 없으며 언제나 아름다운 것을 통해 현현(顯現)된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시대와 사회의 상상적 체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9세기에는 추하고 균형잡히지 아니한 것으로 판단된 것들이 20세기에는 균형잡힌 것으로 이해되며, 혹은 그 역으로 작용하고 있다. 도덕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원래 풍속을 뜻하는 단어가 발달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이나 착함이나 진실함의 어느 한 편을 쥐고 그것만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착한 것이며 진실한 것이냐를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의 연관 밑에 명백하게 밝히려고 애를 쓰는 일이다. 어떠한 인간적 노력도 가상의 이론과 가상과 현실에 입각하여 매도하고 거부되어서는 안 된다.

 

김기진과 박영희의 소설건축논쟁 이후 김수영이어령의 참여순수논쟁에 이르기까지 근 50여년 동안 한국 문학인들은 내용이 중한가 형식이 중한가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진실한 내용을 우선적으로 쓰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나 아름다운 형식을 찾아내야 한다는 주장이나를 막론하고 그 주장의 그럴듯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한국 문학에 큰 피해를 주어 왔다. 어떠한 것이 좋은 내용이며 형식인가가 미리 결정되어지는 주장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동어반복을 면치 못한다. 문학 작품은, 그러나 형식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도 않으며 내용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지도 않다. 문학은 인간 정신이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폭넓은 공간이며, 그래서 거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정신의 자유로움이다. 물론 쟝르에 따라 내용과 형식이 미리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위대한 정신은 언제나 그러한 제약을 뛰어 넘는다. 자기를 표현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정신은 정신이 아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정신을 문학적으로는 주제와 형식의 일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문학이 아름다운 형식을 필요로 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형식은 미리 만들어진 상태로 주어지는 법이 없다. 그것은 형식 자체를 부정하려는 강인한 정신과의 부단한 싸움 밑에서 얻어진다. 아름답다는 것은 상투적인’, 그리고 우리 앞에 널려 있는 것을 줍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좁은 형식 속에 잡아 가두어 두려는 모든 음험하고 악랄한 것과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보상인 것이다. 또한 문학이 참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참된 것 역시 아름다운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주위에 그대로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을 억압하고 축소시켜, 이때까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보다 큰 정신의 지평속에서 생활하게 만든 공간을 파괴하려는 힘과의 싸움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름답고 착한 것이,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착하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를 띠는 것인가를 반성하는 작업이야말로 문학 본래의 지평으로 문학인들을 이끄는 유일한 길이다. 문학은 단지 아름답고, 단지 착하고 진실한 것만이 아니다. 문학은 아름다우며 착하며 진실하며 그리고 그 이상의 것이다.

 

문학과 윤리성

 

을유문화사에서 나온우리말 소사전을 들추니까 윤리가 오륜의 준말이며 모랄(moral)과 동의어라고 설명되어 있다. 유교의 논리덕목인 오륜의 준말이 윤리라는 설명에는 무언가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도덕을 찾아보니 사람이 지켜야 할 행위의 절대 규범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그 사전의 설명을 따르자면 윤리는 상대적인 개념이며, 도덕은 절대적인 개념이다. 오륜은 유교의 덕목이지, 가령 불교나 기독교의 그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스포오드 사전을 찾아보니 윤리를 뜻하는 에틱스를 도덕과 관련된, 도덕 문제를 취급하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그 어원이 공동체조직체의 특성을 뜻하는 에토스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도덕을 습속성행위를 뜻한다고 풀이하고, 그것의 어원이 관습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규정에 의하면 도덕이나 윤리는 사람이 지켜야 할 절대 개념이 아니라, 한 시대가 만들어 낸 습속에 불과하다. 윤리는 한 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 그 사회에 부과한 풍속을 총칭하는 개념인 것이다.

 

어떤 사회이든지, 그것이 그것답게 존속하기 위해서는 자기나름의 금기(禁忌)체계를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금기란 원칙적으로 인간의 쾌락 본능을 억압하는 수단이며 그런 의미에서 금기가 적은 사회일수록 억압된 무의식이 더 많이 승화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금기가 적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만큼 억눌리지 않았음을, 그 사회가 그만큼 자유스러움을 입증한다. 어떤 사회가 그 속에 소속되어 있는 인간들에게 과하는 금기는 시간이 경과하면 풍속으로 변모하여 제도화한다. 제도화된 금기는 인간을 숙명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절대의 벽인 것이다. 윤리나 도덕이 문제시되고 재론되는 사회는 그러므로 풍속과 그것의 원초적 형태인 금기체계가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사회이다.

 

대체적으로 본다면 인간 사회의 금기체계는 성과 양식의 적절한 분배라는 원칙 위에 세워져 있다. 여자를 어떻게 분배하며 양식을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것은 풍속의 최저층을 이루는 문제들이다. 그렇게 형성된 풍속은 그것을 야기시킨 사회의 상징적 구조이며, 그 사회 구성원을 억압하는 규범적 구조이다. 풍속은 그것을 산출시킨 사회를 보여주는 전범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억제하는 관습법인 것이다. 그 풍속은 인구의 증가와 생산량의 증가에 의해 점차로 수정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오랜 시일 동안 그 모순에 대립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족체로 변모한다. 그것은 예민한 관찰력과 섬세한 신경을 가진 비정상인들에 의해 점차로 도전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것의 갈등과 모순이 첨예하게 부각된다. 비정상인들의 광태와 탈윤리는 풍속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제도화된 윤리로서의 풍속은 그것을 지탱시킬 수 있는 이념을 요구한다. 이념은 성과 양식의 분배라는 습속적(習俗的)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끝에 세워진 관념 체계다. 풍속과 이념이 행복하게 결부되어 있는 사회는 그 사회 속에 속해 있는 구성원들에게 행복감을 주며 만족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 사회의 배분 원칙이 문란해지거나 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풍속은 혼란에 빠진다. 그 때의 지적 노력은 그 풍속에서, 혹은 밖에서 형성된 이념에 그 풍속을 되돌리려는 노력으로 집중된다. 파스칼의 팡세 나 정약용의 목민심서 같은 것들이 그 예다.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파스칼이나 주자주의를 다시 확립시키려고 애쓴 정약용은 그런 면에서 이념주의자들이다. 그러나 그런 이념주의자들을 통해 그들이 옹호하려는 이념의 허망성이 더욱 크게 드러난다. 다시 앞의 예를 계속한다면, 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겠다는 굳은 의지로 집필되기 시작한 팡세는 신의 존재에 회의를 품기 시작한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역으로 읽히고 있으며, 주자주의를 다시 확립하여 왕도정치를 구현해 보겠다는 생각 밑에서 씌어진 목민심서는 그것 자체의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려는 자들에게 흥미로운 전거(典據)를 제공하고 있다. 과거의 이념을 고집하여 풍속과 그것을 계속 결부시키려는 보수주의자들의 자기 의사에 반한 노력의 곁에 과거의 이념과 풍속의 괴리를 지적하고 새로운 이념의 발굴에 주력하는 노력이 자리잡는다. 그러한 진보주의자들의 최대의 목적은 과거의 윤리의 공허성을 밝히고 새로운 윤리의 건강성을 선전하여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그곳으로 몰고감으로써 흔들리고 있는 윤리를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윤리는 당연히 성과 양식의 새로운 분배 원칙을 내포한다.

 

여말선초(麗末鮮初)와 개화기 시대를 휩쓴 윤리 풍속의 재개편 의지는 그 좋은 예다. 여말의 자유 분방한 성윤리와 개인 중심의 사고 체계는 선초에 오면서 엄격한 사대부 윤리로 재개편된다. 개화기 시대의 혼란상은 그것이 일제에 의해 아주 비참하게 유도되긴 하였지만, 유교적 윤리와 서구적 윤리의 대립에 의한 것이다. 대립에 의했다면 지나치게 형식적인 표현이 된다. 사실은 유교적 윤리의 붕괴 과정에서 새로운 윤리가 싹텄다고 보아야 한다.

 

문학 비평가나 문학사가들이 현대 문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문학은 그런 윤리감의 혼란을 깨달은 문학이다. 대혁명 이후의 문학에서 항상 윤리 의식이 문제되고 있음은 그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이념과 풍속의 괴리를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 이전의 고전주의 문학은 보편적인 윤리 기준을 아직까지 지킬 수 있었던 문학이다. 그것은 기독교 윤리를 신봉하는 대 부르즈와지와 귀족 세력을 위한 문학이며,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 인간에 대한 환상을 짙게 가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들은 그런 보편적 인간의 연애질투명예심우유 부단함을 묘사하며, 몰리에르코르네이유라신느 등은 인간 감정의 드라마를 엄격한 고전주의 작시법에 의해 표현한다. 그 보편성에 대한 환상은 혁명 이후의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회의되기 시작한다. 소위 제3세력이라고 부르는 시민 세력의 확대는 기독교 윤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샤토브리앙의 아딸라  르네에 아름답게 표현된 당대인의 연애는 엄격한 기독교 윤리에 희생된 청년들의 그것이다. 보편적 진리의 동요는 작가들에게는 이중의 부담을 지운다. 그 동요의 원인을 규명하고 새로운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과거에 침잠해 버리는 보수주의자들은 윤리의 동요를 배분 원칙의 동요에서 찾지 아니하고 인간성의 타락에서 찾는다. 과거의 윤리는 절대적인 것이며, 그것은 변모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흔들리고 있는 당대인들의 도덕심의 해이, 결국 인간성의 타락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를 탐구하려는 자들은 절대적 진리를 믿지 않는다. 진리는 원칙에 봉사하는 도구이지, 그것 자체로 자족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진보주의자들에게는 보수주의자들의 과거 집착보다 더 큰 위험이 주어진다. 그가 선택한 윤리가 하나의 허왕한 가설에 빠져 버릴 때는 현실 편에서, 그가 제시한 원리가 논리성을 띠지 못할 때는 문학 편에서 그에게 잔인한 복수를 한다. 1,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 대륙 문학의 혼란은 그 두 편의 위협을 진보주의자들이 극복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국 개화기도 그런 예중의 하나를 이룬다. 조선후기에서부터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사대부사회의 모순과 갈등은 김만중박지원 등의 작품을 통해 예술화된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개화기 때다. 개화기는 사대부사회의 윤리와 풍속을 전면적으로 바꿔 보려는 진보주의자들의 노력으로 특징지워진다. 새로운 민권 사상이 여러 형태의 산문을 통해 표현되고 과거의 가족제도가 전면적으로 재검토된다. 유길준이광수최남선 등의 노력은 과거의 제도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려는 지적예술적 노력이다. 물론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결국 그 방향을 바꿔 버리게 되지만, 상당 기간 동안 그것은 한말 지식인들의 초미(焦眉)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들의 지적, 예술적 노력은 식민지 시대에서는 염상섭채만식의 경우처럼 과거의 윤리풍속과 당대의 이념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염상섭은 한말 세대와 개화기 세대의 윤리 의식을 검열이 허용하는 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채만식은 양식 배분의 원칙 자체를 비판하고, 제국주의적 수탈을 합리화시키는 일제의 우민화교육의 한계를 파헤친다.

 

윤리나 도덕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교정될 수 있다. 그 주장은 그러나 인간성 개조론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성 개조론의 뒤에는 과거의 윤리에 대한 강한 동경이 숨어 있다. 인간성을 절대적인 자족체로 보고 그 최고의 상태를 미리 설정해 놓은 다음 그것을 향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주장은 논리가 아니라 신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비윤리적이다. 배분 원칙에 대한 반성 없는 윤리란 완고한 독선이며, 오히려 무서워 해야 할 윤리의 적이다. 윤리의 최고 상태를 미리 설정하여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에도 그것이 유용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한 극점인 반성을 불가능케 한다.

 

그것은 그러나 문학 이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문학의 예술성과 윤리성을 별개의 것으로 보게 만든다. 내용은 좋은데 표현은 나쁘다든지 표현은 좋은데 내용이 나쁘다는 그 흔한 문학 비평은 예술성의 최고 상태와 윤리성의 최고 상태를 관념적으로 설정하여 그것에 가까운 것을 지고지선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의 소산이다. 그것은 반성을 불가능하게 하며, 즉각적인 판단만을 강요한다. 그러나 완성된 윤리가 불가능하듯이 완성된 예술도 불가능하다. 예술이나 윤리성은 작품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그가 속한 사회의 배분 원칙을 자세히 관찰하고, 자기가 관찰한 것을 반성하여 그것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어떤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있어서의 윤리성이나 예술성이란 그가 얼마나 정직하게 그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그에게 요구하는 금제(禁制)들을 관찰하고 반성하고 있는가와 동의어이다. 그를 읽는 독자들은 그를 통해서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실한 구조를 알아낼 수 있다. 그 도중에 안도라든지 경악이라든지 분노라든지 증오 같은 감동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성의 딴 말인 표현이라는 용어 역시 도덕과 마찬가지로 당시대의 금기체계의 한 측면인 것이다. 윤리성이나 예술성이 문제된다면 그것은 그것을 문제시하고 있는 사회 자체가 문제되고 있다는 진술이다. 이 사회는 어떤 배분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그것은 무슨 도덕을 낳고 있는가, 그것은 과연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용하고도 필요 불가결한 것인가라는 따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예술가의 윤리 의식 혹은 예술 의식의 자연적인 발로이다. 인간은 행복하게, 그리고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그 문제 제기는 포함하고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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