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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주점 / 해설 / 에밀 졸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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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 '목로주점'

 

이건우 서울대 불문과교수

 

운명이란 의지와 노력에 따라 개척될 수 있는 것일까아니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인가종교적 인생관이 퇴색하고 물질에 의한 결정론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한 시대과학이 종교를 대신해 모든 현상의 불가사의를 헤쳐내기 시작한 시대에 던져진 질문의 답은 의외로 간단한 것으로 보였다

 

과학 만능주의의 세례를 받은 에밀 졸라는 작가란 작품 공간이라는 실험실에서 대상을 관찰하고 조작하는 과학자라는 주장을 펼치며 한 집안의 역사를 `루공 마카르 총서'로 엮어나간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 역시 유전적 요소와 성장 환경이라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를 분석하고 천착함으로써 얼마든지 설명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자연주의 문학의 문을 연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한 미혼모 사이에 태어난 제르베즈는 어린 나이부터 술에 손을 대지만 새로운 운명의 개척을 위해 파리로 올라온 이후로는 착실하기만 한 생활을 꾸려나간다열네살에 랑티에의 유혹에 넘어가 임신하기 시작해 벌써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려 보이는 상큼한 모습의 제르베즈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열성으로 세탁일을 맡아 하며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과 맞선다 하지만 삶의 터전을 두고 온 랑티에는 하는 일 없이 그저 빈둥거리다 결국 다른 여인과 함께 떠나버린다

 

비록 버림을 받았지만 제르베즈는 두 아이 에테엔느와 클로드에 대한 사랑을 힘으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상냥하고 무엇보다 맡은 일에 소홀함이 없어 주변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는다 그러는 사이 불행을 운명으로 살아온 이 여인에게 함석장이 쿠포가 청혼을 해온다온 동네 사람을 다 초대해 멋진 혼례를 치른 건실한 부부는 엄마를 닮은 예쁜 딸 나나까지 얻게 되고 더이상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간다운명이란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개척될 수 있는 것인가어려운 현실을 이겨나가는 도시 서민들의 건강한 삶에 대한 찬가가 `목로주점'을 가득 채울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삶의 시련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자 조건인 노동력을 상실하는 순간 운명은 다시 그 그림자를 드리우게끔 되어 있다바로 성실하기만 한 쿠포가 지붕 일을 하다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면서 `목로주점'의 행복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것이다남편의 치료를 위해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써버린 제르베즈는 자신에게 우정어린 사랑을 품고 있는 대장장이 구제의 도움을 받아 세탁소를 차리고 다시 어려움을 이겨내는 듯 싶지만 운명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다노동력을 상실한 쿠포는 그 성실성을 함께 잃고 랑티에가 그랬듯 아무 하는 일 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막다른 골목을 향해 치닫는다

 

랑티에로부터 버림을 받고 다시 시작한 술화려한 혼례식을 치르며 다시 시작한 술은 분명 현실의 고달픔을 잊게 해주고 새로운 미래를 축복해주는 신의 양식일 수도 있지만 유전적인 마력을 발휘하는 그 파괴적인 힘에는 그 누구도 맞설 수 없는 것이다되돌아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랑티에를 자신의 지붕 아래로 맞이하는 남편 쿠포에게 저항할 수 없는 순종적인 여인 제르베즈는 이들과 술만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미혼모였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어린 나이에 랑티에에게 몸을 허락한 이 여인은 술기운에 젖어 다시 랑티에를 거절하지 못하고 이제 혼인의 서약마저 깨고 만다

 

결국 `목로주점'에서의 술의 위력은제르베즈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 쿠포를 병원에서 죽게 하고 대장장이 구제의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이 건실했던 여인을 세탁소 주인에서 하인으로걸인으로 추락하게 만든다풍요롭기만 하던 혼례잔치의 예쁘고 청초한 신부는 어느덧 자기 세탁소의 하인이 되어 너무도 빨리 늙어버린 몸으로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다허기를 이기기 위해 동냥도 하고 쓰레기통도 뒤지는 이 추한 모습의 여인은 그 허기를 이기기 위해 한 모금의 술을 그리워하며 목로주점 밖을 서성이다 드디어 자신의 몸을 팔러 나서고자신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대장장이 구제마저 알아보지 못한 이 가련한 여인은 그에게 자신의 몸을 사줄 것을 애걸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자신의 부모처럼 술에 찌든 채 굶어 죽는 제르베즈의 운명은 제르베즈 자신의 파멸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다졸라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제르베즈의 세 아이는 `루공 마카르 총서'의 다른 작품들의 주인공이 되어 벗어날 길 없는 운명의 파괴력을 입증한다`제르미날'의 주인공 에티엔느가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해 저항하면서 자기 파멸을 모면하는 대신 다른 광부들의 파멸을 목도할 수밖에 없었다면`작품'의 주인공 화가 클로드는 완성할 수 없는 그림 앞에서 착란에 빠져 자살하게 되고이들의 이복 여동생은 `나나'의 주인공으로 어린 나이부터 꽃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뭇 사내들의 노리개감이 되기를 선택하고마침내는 고급 창녀가 되어 부유한 자들을 파멸로 이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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