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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즈 - 현대의 굴레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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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즈 ', 현대의 굴레  

  감  독 : 찰리 채플린
  주  연 : 찰리 채플린, 폴레트 고다르
  장 르 : 코미디
  MODERN TIMES(1936)

      
         ◆ 1

찰리 채플린이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모던 타임즈』(1936)는 한 떠돌이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떠돌이'라. 산업혁명 이전에 사람들은 자신이 농사를 짓는 땅에 묶여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을 보살피고 그 땅의 소출을 가지고 의식주를 해결하던 시대, 그러니까 서유럽에서는 18세기 이전, 우리나라로 치면 20세기 초반까지, 땅을 떠나 생존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고 떠돌이는 아주 예외적인 존재였다.

굳이 찾자면,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는 거지나 장사하는 행상 정도를 땅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한 대규모 공장과 그 공장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땅과 결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대규모 공장의 작업은 규격화되어 있고, 이러한 단순 작업에 투입되는 사람은 별다른 기술이 없어도 좋았다.

노동자는 기계 부속처럼 단순한 동작만 하면 되었으므로 농부처럼 논밭을 경작하기 위해 절기와 기후, 강수량, 땅의 성질과 그곳에서 자라는 모든 식물들에 대해 모두 알고 익숙해야 하는 것과는 달리 자신이 하는 한가지 일만 잘 알면 된다. 자신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한 총체적인 통찰은 이제 별로 쓸모 없는 것이 되었고 영화에서 채플린이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에서 반복적으로 너트를 죄듯이 부분적인 작업만 수행하면 어찌어찌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곳저곳으로 떠도는 것이 가능해 진다. 이것이 『모던 타임즈』의 주인공 '떠돌이'의 존재 조건이었고 채플린은 이처럼 떠도는 삶을 현대의 특징으로 보았던 것 같다.

     ◆ 2                                                      

'떠돌이'를 양산해낸 공장의 조직과 작업 방식은 테일러(F. W. Taylor)와 포드(H. Ford)의 관리 이론을 근거로 삼고 있다. 산업 혁명이 이미 100여년간 진행된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규모가 커진 공장을 경영할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그 필요에 부응해 테일러는 노동자들이 하는 작업의 시간을 측정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목표량으로 설정하는 과업관리를 통해 작업의 효율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량과 시간의 표준화를 바탕으로 컨베이어 벨트 위에 흘러가는 물건들에 단순한 조작만을 가하면 되도록 작업대를 설치하고 필요 없는 동작을 줄인 일괄 생산 체계를 포드가 자신의 자동차 공장에서 현실화 시켰다.

사람들의 행동을 우리가 기계를 다루듯이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밑에 깔고 있는 20세기 초에 완성된 이러한 관리의 지침들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포드는 새로운 생산 방식 덕택에 자동차의 조립 주기는 514분에서 23분으로 단축되었고 생산량도 1914년의 28만대에서 1921년엔 100만대로 늘어났다.

연기를 뿜어내는 공장의 굴뚝을 배경으로 시계가 새벽 6시를 알리면서 양떼들이 무리 지어 등장하고 노동자들이 밀려나오는 영화의 첫 장면이 시사하듯이 현대는 '과학적'이라고 명명된 관리 기법에 힘입어 기계의 부품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협동 작업이 가능해 졌고 일견 현대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구석구석 많은 불평등이 존재하지만 물질적인 풍족함만이 행복의 기준이라면 현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사람들이 많은 시대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꽤 시간이 흐른 지금도, 약간의 수정과 보완이 뒤따랐지만, 기본적으로 테일러와 포드의 방법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

      ◆ 3                                                      

채플린은 공장을 조직하고 나아가 현대를 구성하는 이러한 방식들과 그 밑에 깔린 생각들이 만들어 낸 우스꽝스러운 결과들을 영화를 통해 보여 줌으로써 무엇인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영화에서 보듯이 잠시 일손을 놓을라치면 벽에 있는 화면에 감독자의 얼굴이 등장한다. "빨리 작업장으로 돌아가!".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재채기라도 하여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면 난리가 난다. 전원 작업을 중단하든지, 재빨리 놓친 일거리를 따라잡아 다음 사람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웃음을 자아내게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웃으면서도 섬뜩해지지 않는가? 조금의 틈도 없는 삭막함, 놓쳐 버린 부품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불량품, 그리고 그 불량품들이 만들어낼 지도 모르는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삼풍 백화점이나 KAL기 사고 같은 대형 참사.

현대를 조직하는 방식들에 어떤 문제가 있길래 이렇게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간담을 서늘케하는 장면들이 연출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생명과 생명 현상을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리라.

사람은 기계인가? 근래에 생화학과 분자 생물학이 발달함에 따라 생명 현상의 대부분을 기계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예를들어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이 자연의 정기(精氣)를 들어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산소를 허파를 통해 받아들여 이 산소를 헤모글로빈이라는 작은 기계가 온몸으로 전달하는 과정이라는 것, 그래서 이 산소를 이용해서 자동차가 연료를 연소하듯이 우리 몸도 연료를 태워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몸이 복잡하긴 하지만 하나의 잘 짜여진 기계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생명체가 기계라면 그것의 움직일 수 있는 범위와 효율을 물리적으로 측정해서 관리할 수 있다는 테일러나 포드의 계획이 실제로 실현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현대 생물학의 성과들을 고려할 때, 생명을 기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닌 듯이 보이지만 적어도 생명체는 테일러가 생각한 기계보다는 훨씬 복잡한 기계라는 사실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근대과학은 이상화된 조건 아래서, 단순한 시스템에 대한 고찰로부터 출발했다. 사람들은 흔히 갈릴레오가 기우뚱한 피사의 사탑에 올라가 가벼운 공과 무거운 공을 함께 떨어뜨려 낙하의 법칙을 알아냈다고 믿고 있지만 갈릴레오는 물체의 낙하에 대해서 기술할 때, 피사의 사탑이 놓여 있는 실제의 공간이 아닌 마찰력이 작용하지 않는 진공 상태를 가정하고 있었다. 한 두가지 요소만을 고려하면 되는 가상적인 시스템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대체적으로 결정론적인 예측에 들어맞았고 그러한 시스템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근대 과학의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수년전,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카오스 이론이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실제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은 근대 과학이 계산했던, 혹은 계산할 수 있는 요소들보다 훨씬 많은 원인들이 작용해서 일어나는 복잡한 것이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을 다루는 근대 과학이 세상을 완벽하게 기술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근대 과학의 전제를 경영에 응용한 테일러나 포드의 생각에도 똑같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 4                                                                

테일러의 뒤를 이어, 칸트가 과업 시간표를 만들었고 길브레스가 동작을 사진으로 찍어 세밀한 분석을 했으며 길브레스의 부인인 릴리안은 '관리 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창시하면서 테일러의 구상을 발전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시도들이 만들어낸 표준화된 틀과 그 틀에 맞추어 사람들을 관리하려는 생각은 많은 요소들을 단순화하는 근대 과학의 배경이 지닌 근본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일쑤였다.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자동급식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사람의 밥먹는 동작을 연구해서 표준화된 방식으로 밥을 빨리, 효율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먹게하는 장치가 꽤 유연하게 움직였지만 그 기계는 아주 복잡한 기계인 사람의 동작을 모두 예측할 수 없었고, 결국 음식을 채플린의 입이 아닌 엉뚱한 곳에 마구 쑤셔 넣는다. 관객들은 이 장면에서 채플린의 뛰어난 슬립스틱 연기에 배꼽을 잡는다. 하지만.....

  근대 과학의 이상과 성과에 기대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자동 급식기 위의 채플린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지? 어디든 떠돌아 다닐 수 있지만, 잠시라도 머무를라치면 부자연스러운 틀에 묶여야하는 사람들. 현대인들은 이런 운명을 감수해야만 하는가? 의도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회의 체제를 만들어보려던 사회주의 실험의 잠정적인 실패 이후에 거대 이론들이 속속 붕괴하고 포스트류의 이론들이 한껏 풍미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부자연스러운 틀 만들기를 즐기는 듯이 보인다.

여전히 현대는 떠돌이들의 세상이지만 그 떠돌이들이 편안히 머물 곳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잠시잠시 여러 가지 틀에 자신을 맞추어 보지만 곧 그것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공원, 선박공, 웨이터, 가수, ..... 이런 틀들을 떨쳐 버리고 그가 마지막에 소녀와 떠난 길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자연스러운, 자유로운 그곳에 대한 갈망, 그것이 채플린이 이 영화를 만든 동기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억측이 될까?

       ◆ 5

현대인들에겐 잘 맞지 않는 굴레가 씌어져 있는 셈이다. 그 굴레는 계속 지고 가야만 하는 원죄같은 것일까? 아니면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세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바꾸면, 나아가 어떤 태도로 우리의 환경과 상호 교감하면서 실천하면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굴레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지금과 다른 세상을 여러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상상을 통해서 모색해 보는 것이 다음 글에서 곰곰이 생각해 볼 화두이다. (서울대 자연과학대 / 영화를 통해 본 과학의 역사)

                                                                                                          출저: http://www.gulnar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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