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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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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

日照香爐生紫煙 (일조향로생자연)

遙看瀑布掛長川 (요간폭포괘장천)

飛流直下三千尺 (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 (의시은하락구천)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어리고

멀리에 폭포는 강을 매단 듯,

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피어나고

멀리 보이는 폭포는 긴강을 매단 듯 하네

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 듯 하네.

요점 정리

 

작자 : 이백(李白)

갈래 : 칠언절구(七言 絶句)의 근체시(近體詩)

성격 : 서정적

어조 : 비유적. 영탄적이면서도 맑은 어조

심상 : 서술적. 감각적 심상

구성 :

1행 햇빛 비친 자주빛 향로봉의 정경

2행 폭포의 위치와 정경, 멀리서 본 폭포의 모습

3행 폭포의 규모, 엄청난 폭포의 높이

4행 폭포수의 장관, 폭포에 대한 감상

제재 : 여산 폭포의 위용

주제 : 여산 폭포의 장엄한 위용을 노래함

출전 : 당시선(唐詩選)

내용 연구

 

廬山(여산) : 중국의 강남성(江南城) 구강(九江)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고 함

香爐(향로) : 여산의 북쪽에 있는 산봉우리

紫煙(자연) : 자줏빛 연기. 산이 해에 비치어 보이는 모습

直下(직하) : 곧바로 떨어지다

九天(구천) : 구중(九重)의 하늘. 높은 하늘

향로봉에 햇빛 비쳐 안개 어리고(피어나고) : 하늘과 맞닿을 만큼 높이 서 있는 향로봉에 붉은 해가 비치기 시작하니, 자줏빛 안개 구름이 피어나는 것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산이 해에 비치어 푸르게 보이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대목이다. 웅장한 폭포수에 의해 안개가 만들어지고 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멀리에( 멀리 보이는) 폭포는 강을 매단 듯(긴 강을 매단 듯하네), : 저 편 향로봉의 폭포를 바라보니 마치 길고 긴 강줄기를 거꾸로 매달아 놓은 듯하다. 강물은 수평상으로 흐르나 수량이 매우 많으며, 그에 비해 폭포는 수량이 적은 듯하나 낙하하기 때문에 그 힘이 강렬하다. 폭포의 위용을 표현하기 위해 강물의 흐름을 끌어들인 점이 당연한 듯 싶으면서도 매우 강렬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작자의 대략적인 위치와 폭포의 전경이 드러나 있다.

물줄기 내리 쏟아 길이 삼천 자 : 폭포의 규모 묘사와 함께 시적인 생동감이 두드러진 대목이다. 특히 떨어지는 폭포수의 흐름을 '飛(비)'자에 집약시켜 무한한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直下(직하)'는 산세가 급하고 험준하여 폭포수의 흐름이 급함을 형상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한시(漢詩) 특유의 과장적인 표현 기법을 살필 수 있다.

하늘에서 은하수 쏟아지는가(쏟아지는 듯 하네). : 제3행의 '내리 쏟아[直下]'의 시어를 발전시켜, 폭포수의 웅장한 기세를 높은 하늘에서 직접 떨어지는 은하수에 비유하여 표현한 대목이다. 이백의 풍부한 상상력과 함께 낭만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자신이 폭포를 본 경험을 생각하며 아래 빈칸에 들어갈 비유적인 표현을 서 넣어 보자. 만일 폭포를 본 적이 없다면 다른 경치를 본 경험으로 활동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일정한 형식적 제약을 주고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활동을 설정하였다. 이 활동을 할 때에는 자신의 경험을 되살펴 창작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하며, 작품을 패러디해 보는 경험을 통해 작품 창작의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필요한 활동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 활동은 비유적인 표현을 익히는 과정으로 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개인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활동이므로 개별적으로 창작하게 하는 것이 원칙이나, 모둠별로 공동 창작을 하게 하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든 발표를 하게 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시답안

(구곡 폭포)를 바라보며 햇빛 비치는 (봉화산 기슭)에 (하얀스크린)

멀리 바라본 (폭포)는 마치 (누에가 실을 뽑는 듯)

(아홉 굽이 동안 숨고르며 떨어지는)모습

(푸른 나무들 사이에 피어오르는 연기인 줄)알았다네

이해와 감상

"망여산폭포"는 중국의 절경(絶景) 중 하나인 여산(廬山) 폭포의 장관을 묘사한 7언 절구(七言絶句) 이전의 근체시 형식의 작품으로, 시선이라 불리던 이백의 감각적이면서도 낙천적이고 호방한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자연에 동화(同化)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임으로써 탈속(脫俗)의 낭만적 동경의 시정(詩情)을 담고 있다.

이 시는 이백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중국의 명승지인 여산의 향로봉(香爐峯)에 있는 폭포의 장엄한 위용(威容)을 노래한 것으로, 이 시의 전반부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최대한 이용하여 멀리서 보는 폭포가 흡사 강을 매달아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폭포의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은 햇빛에 비쳐서 안개가 어려 있는 여산의 봉우리이다. 이처럼 산과 폭포가 어우러진 풍경의 묘사는 그대로 한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한편 시의 후반부에서는 폭포의 높이가 삼천 자나 되기 때문에 그 모양이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지는 것 같다고 표현함으로써 시인의 호탕한 기개를 마음껏 표방하고 있다. 특히 삼천 자나 되는 높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 폭포의 물줄기는 시인의 강직한 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는 칠언칠구의 압축된 형식 속에서도 감각적인 표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폭포를 속세가 아닌 선경(仙境)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백의 웅장한 기상과 풍부한 상상력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인간 세상이 아닌 신선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장 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작자는 '여산의 폭포를 바라보며(망여산폭포: 望廬山瀑布)'라고 하여 자연에 대해 관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나, 실상은 대자연의 위력에 자신도 모르게 몰입(沒入)하여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낭만주의자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져 있다.

심화 자료

두보와 이백의 시풍 비교

구분

두보 - 시성

이백 - 시선

사상

유교적, 현실적, 평민적

도교적, 탈속적, 귀족적

성격

돈후(심덕이 두텁다), 인자

호방, 표일(뛰어나게 훌륭함)

경향

현실적 사실주의 문학

가공적 낭만주의 문학

내용

우수어린 인생 무상

낙천적, 유미적 내용

시작 태도

갈고 다듬는 시

단숨에 내리쓰는 시, 즉흥시

이백(李白/701~762)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 자 태백(太白). 호 청련거사(靑蓮居士).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로 병칭되는 중국 최대의 시인이며, 시선(詩仙)이라 불린다. 1,100여 편의 작품이 현존한다. 그의 생애는 분명하지 못한 점이 많아, 생년을 비롯하여 상당한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甘肅省] 룽시현[西縣]에 살았으며, 아버지는 서역(西域)의 호상이었다고 전한다. 출생지는 오늘날의 쓰촨성[四川省]인 촉(蜀)나라의 장밍현[彰明縣] 또는 더 서쪽의 서역으로서, 어린 시절을 촉나라에서 보냈다. 남성적이고 용감한 것을 좋아한 그는 25세 때 촉나라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따라서 장난[江南]·산둥[山東]·산시[山西] 등지를 편력하며 한평생을 보냈다. 젊어서 도교(道敎)에 심취했던 그는 산중에서 지낸 적도 많았다.

그의 시의 환상성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 의한 것이며, 산중은 그의 시적 세계의 중요한 무대이기도 하였다. 안릉(安陵:湖南省)·남릉(南陵:安徽省)·동로(東魯:山東省)의 땅에 체류한 적도 있으나, 가정에 정착한 적은 드물었다.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邱)·두보 등 많은 시인과 교류하며, 그의 발자취는 중국 각지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불우한 생애를 보내었으나 43세경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창안[長安]에 들어가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던 1, 2년이 그의 영광의 시기였다.

도사(道士) 오균(吳筠)의 천거로 궁정에 들어간 그는 자신의 정치적 포부의 실현을 기대하였으나, 한낱 궁정시인으로서 지위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는 궁정시인으로서의 그가 현종·양귀비의 모란 향연에서 지은 시이다. 이것으로 그의 시명(詩名)은 장안을 떨쳤으나, 그의 분방한 성격은 결국 궁정 분위기와는 맞지 않았다. 이백은 그를 ‘적선인(謫仙人)’이라 평한 하지장(賀知章) 등과 술에 빠져 ‘술 속의 팔선(八仙)’으로 불렸고, 방약무인한 태도 때문에 현종의 총신 고력사(高力士)의 미움을 받아 마침내 궁정을 쫓겨나 창안을 떠났다. 창안을 떠난 그는 허난[河南]으로 향하여 뤄양[洛陽]·카이펑[開封] 사이를 유력하고, 뤄양에서는 두보와, 카이펑에서는 고적(高適)과 지기지교를 맺었다.

두보와 석문(石門:陝西省)에서 헤어진 그는 산시[山西]·허베이[河北]의 각지를 방랑하고, 더 남하하여 광릉(廣陵:현재의 揚州)·금릉(金陵:南京)에서 노닐고, 다시 회계(會稽:紹興)를 찾았으며, 55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쉬안청[宣城:安徽]에 있었다. 적군에 쫓긴 현종이 촉나라로 도망하고 그의 황자(皇子) 영왕(永王) 인(璘)이 거병, 동쪽으로 향하자 그의 막료로 발탁되었으나 새로 즉위한 황자 숙종과 대립하여 싸움에 패하였으므로 그도 심양(尋陽:江西省九江縣)의 옥중에 갇히었다. 뒤이어 야랑(夜郞:貴州)으로 유배되었으나 도중에서 곽자의(郭子義)에 의하여 구명, 사면되었다(59세). 그 후 그는 금릉·쉬안청 사이를 방랑하였으나 노쇠한 탓으로 당도(當塗:安徽)의 친척 이양빙(李陽氷)에게 몸을 의지하다가 그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청소년 시절에는 독서와 검술에 정진하고, 때로는 유협(遊俠)의 무리들과 어울리기도 하였다. 쓰촨성 각지의 산천을 유력(遊歷)하기도 하였으며, 민산(岷山)에 숨어 선술(仙術)을 닦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랑은 단순한 방랑이 아니고, 정신의 자유를 찾는 ‘대붕(大鵬)의 비상(飛翔)’이었다. 그의 본질은 세속을 높이 비상하는 대붕, 꿈과 정열에 사는 늠름한 로맨티시스트에 있었다. 또한 술에 취하여 강물 속의 달을 잡으려다가 익사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그에게도 현실 사회나 국가에 관한 강한 관심이 있고, 인생의 우수와 적막에 대한 절실한 응시가 있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지는 방식과 응시의 양태는 두보와는 크게 달랐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대하여,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것도 없다.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두보의 시가 퇴고를 극하는 데 대하여, 이백의 시는 흘러나오는 말이 바로 시가 되는 시풍(詩風)이다.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대하여, 악부(樂府)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장기로 한다. ‘성당(盛唐)의 기상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한편으로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커다란 기개·자부에 불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기개는 차츰 전제와 독재 아래의 부패·오탁의 현실에 젖어들어, 사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하는 시인은 동시에 ‘만고(萬古)의 우수’를 언제나 마음속에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그의 시문집은 송대(宋代)에 편집된 것이며, 주석으로는 원대(元代) 소사빈(蕭士)의 《분류보주 이태백시(分類補註李太白詩)》, 청대(淸代) 왕기(王琦)의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등이 있다.

당시(唐詩)

중국 당나라(618∼907)의 시(詩). 당나라 때는 중국 서정시의 최성기이고, 그 시는 중국문학뿐만 아니라, 인류의 문학에도 위대한 유산으로 되어 있다. 당시의 원류(源流)를 이루는 것은 위(魏)·진(晉) 이후, 귀족 사회에서 발달되어 온 육조(六朝)의 시지만, 그것이 이 시대에 원숙한 예술로서 결실을 보게 된 밑바닥에는 일어서기 시작한 상공업자·농민의 굳센 생활력과 이민족(異民族)과의 접촉으로 인한 세계의 확대가 있었다.

육조의 시가 인간을 불안정한 것으로 보고, 인생의 절망을 주로 노래한 데 대하여, 당나라의 시인들이 이 절망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인생태도를 시의 골격으로 삼은 것은 시대의 흐름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당시는 일반적으로 초당(初唐:거의 7세기)·성당(盛唐:대략 8세기 전반)·중당(中唐:8세기 후반∼9세기 전반)·만당(晩唐:9세기 후반∼10세기 초기)의 4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초당의 대표적 시인으로는 사걸(四傑)로 불린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낙빈왕(駱賓王)을 들 수 있는데, 이 시기의 시는 외형의 미를 다루는 남조시풍(南朝詩風)의 계승면이 강하고, 시의 운율을 다듬어 근체시(近體詩:絶句, 律詩)의 시형을 완성시켜, 다음 대의 성운(盛運)에 앞장 선 공적이 크다. 성당, 즉 시문학이 융성한 때는 현종황제의 치세에 해당되며 당조(唐朝)의 국력이 최고에 달한 시기였는데, 이 시기는 대시인이 속출한 문학의 최성기이다.

대표적 시인으로서는 이 시기 전반에 활약한 이백(李白)과 후반에 활약한 두보(杜甫)가 있다. 이백은 이 시기 전반의 화려한 세상(世相)을 반영하여 오로지 쾌락을 노래하는 시를 특색으로 하였고, 초당의 진자앙(陳子昻)의 주장을 이어받아 한위문학(韓魏文學)의 기골을 부흥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 두보는 전란에 휩쓸린 후반의 어두운 세태를 반영하여 날카로운 우수(憂愁)의 노래를 특색으로 하였으며, 장편의 고시(古詩)에서는 민중을 대신하여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항의의 노래를 지었고, 율시(律詩)에서는 세밀한 감정을 정밀한 시형(詩型) 안에 주입시켜 이 시형의 실질적인 완성자가 되었다.

그 밖에도 이름난 시인으로 맹호연(孟浩然)·왕유(王維)·고적(高適)·잠삼(岑參)·왕창령(王昌齡)·왕지환(王之渙) 등을 들 수 있다. 중당(中唐)의 시인으로는 한유(韓愈)와 백거이(白居易)를 들 수 있다. 한유는 기험(奇險)·호방(豪放)하다는 장대한 미(美)를 사랑하였고, 백거이는 평이하고 찬찬한 표현으로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신악부(新樂府)》라고 하는 사회시(社會詩)를 창시(創始)하여 당대를 통해 최다수의 독자를 얻었다. 이 외에 유종원·이하(李賀)가 있다. 만당을 대표하는 시인으로는 이상은(李商隱)·두목(杜牧)·온정균(溫庭筠)을 들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시는 감상적·퇴폐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당나라의 모든 시인들의 전 작품을 수록한 것은 청(淸)나라의 강희제(康熙帝) 칙편(勅編)의 《전당시(全唐詩)》(900권)인데, 거기에는 대강 2,200명의 시 4만 8000여 수가 실려 있다.

장구령의 호구망여산산폭포

만길 붉은 길이 자색 기운으로 떨어지니

하늘 절반은 자색 기운으로 물들었다.

온갖 나무에 어지럽게 흩날리고

층층 구름에서 흘러 떨어지네

해 비치면 무지개 같고

하늘 맑으면 비바람 소리 들린다.

영산에 좋은 빛이 많으니

공중의 물은 천지의 기와 어울리고 있다.

작가는 호구에서 바라본 여산에 있는 폭포수의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시각적, 청각적 효과를 살리면서 한시 특유의 과장법을 통해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망여산의 폭포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장구령

 

광둥성[廣東省] 취장[曲江] 출생. 진사에 등과하였고 문재(文才)로 문인 재상 장열(張說)의 추천을 받아 중서사인(中書舍人), 중서시랑(中書侍郞)을 거쳐 733년 재상이 되었다. 안녹산(安祿山)이 위험인물임을 간파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반대파인 이임보(李林甫)에게 미움을 받고 좌천되었다(736). 《취장장선생문집[曲江張先生文集]》 20권이 현존한다.

청운지지 靑雲之志 :

'청운의 뜻'이란 의미로, 입신출세하고 싶은 마음 또는 고결하여 속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靑:푸를 청, 雲:구름 운, 之:의 지, 志:뜻 지

일반적인 의미는 입신출세하려는 대망, 즉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자 하는 뜻으로 '능운지지(陵雲之志)'와 같은 말이다. 다음은 당나라 때의 문인 장구령(張九齡)의 '거울을 비춰 백발을 보다'라는 뜻의 《조경견백발(照鏡見白髮)》이라는 오언절구의 시이다.

옛날 청운의 뜻을 품고 벼슬길에 나아갔는데[宿昔靑雲志 숙석청운지]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차질을 빚게 되었네[蹉醇白髮年 차순백발년]

누가 알리요, 밝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唯知明鏡裏 유지명경리]

그것을 보고 있는 내가 서로 측은히 여기고 있는 것을[形影自相憐 형영자상련]

위의 시에서 '청운지(靑雲志)'는 바로 입신 출세하여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을 나타낸 말이다. 이 시를 풀이하면, '그 옛날 푸른 꿈을 안고 재상이 되어 나라를 위해 힘을 다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고 늙은 나이에 미끄러져 물러나고 말았다. 거울 속에 비친 백발을 보며 서글퍼하는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리오'라는 내용이다.

장구령은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재상으로 문재(文才)가 뛰어나고 어진 재상이었으나, 이임보(李林甫)에게 미움을 받아 벼슬길에서 파직되어 초야에서 여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쓸쓸한 감회를 읊은 것이 바로 위의 시이다. 한편 '청운지지'는 높이 세상 밖에 초탈하여 속세를 떠나려는 마음인 '능운지지(凌雲之志)'와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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