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만해 한용운 / 김재홍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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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 김재홍(金載弘)

 

깊은 밤, 내설악(內雪嶽) 깊은 산 속의 적막을 깨고 범종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진다. 백담사(百潭寺)의 한 구석, 고즈넉한 승방(僧房)에는 조용히 흔들리는 호롱불 아래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중년의 승려 한 사람이 꼿꼿이 정좌해 있다. 오 척 단구에 파르라니 깎은 머리, 예리한 안광(眼光)이 빛나며 새벽을 꿰뚫는다. 무언가 설레는 침묵이 주위를 휩싸고 돈다.

 

임이시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워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 , 가요. 이제 곧 가요.

 

1925829일 새벽, 바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31 운동을 이끈 독립 운동가이며, 이 땅의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선생이 시집 임의 침묵을 탈고함으로써 문학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한 순간이었다. 한여름 내내 무더위에 시달리며 뜬눈으로 지새우면서 마침내 역사의 새벽을 예감하는 마지막 구절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피곤한 기색은커녕 눈빛에는 민족의 어둠을 밝히려는 듯 의지의 불꽃이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때는 191931. 명월관에는 민족 대표 33인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긴장된 얼굴에는 초조와 흥분이 교차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할 수 없게 되자, 민족 대표들은 부득이 이 곳으로 장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만해 한용운이 대표로 일어나 짤막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민족을 대표해서 한 자리에 모여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 함께 독립 만세를 부릅시다.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

 

우렁찬 만세 소리는 쩌렁쩌렁 연회장을 울리며 밖으로 흘러 나갔으며, 마침내 가까운 탑골 공원에 모인 수천 수만 겨레의 가슴에 독립 만세의 불을 지폈다. 선생을 비롯한 민족 대표들이 명월관에서 만세를 부르자마자, 왜경들은 이들을 즉각 체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굴하는 기색이 없이 당당하기만 하였다.

 

열서너 살의 어린 학생들이, 잡혀가는 선생을 보고 만세를 부르고 또 부르다가, 왜경의 제지로 개천에 굴러 떨어지면서도 만세를 불렀다. 한 학생이 잡혀가면 또 옆의 학생들이 이어서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매맞으며 또 끌려갔다. 이러한 장면을 목격한 선생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이는 평생, 선생의 가슴에 피맺힌 한()으로 남아서 정신의 힘이 되었다. 감옥에 갇혀서도 선생은 나라 잃은 판에 죽는 것이 무엇이 슬프냐?” 하고 태연하였으며, 재판 과정에서조차 동료나 학생들을 감싸 주는 등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다 지려 하였다. , 냉혹한 검사의 논고에 맞서서 옥중에서 민족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 논설 조선 독립의 서를 작성하였다. 날카로운 논리와 해박한 지식, 그리고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높은 사상은, 일인 검사로 하여금 이론은 정당하나, 본국 정부의 방침이 변하지 않으므로 어쩔 수 없다.”라고 탄식하게 할 정도였다.

 

선생은 또, 체포되어 온 어린 학생들에게 시를 지어 주어, 조국애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북돋워 주기도 하였다.

 

치사스럽게 사는 것은 오히려 치욕이니,

옥같이 부서지면 죽어도 보람인 것을!

칼 들어, 하늘 가린 가시나무 베어 내고,

휘파람 길게 부니, 달빛 또한 밝구나.

 

그뿐만 아니라, 차디찬 감방에서도 아름다운 시를 짓는 기백(氣魄)과 여유를 한껏 과시하였다.

 

물처럼 맑은 심경, 티끌 하나 없는 밤,

철창으로 돋는 달빛 또한 고와라.

모든 희로애락은 공()이요 마음만 있을지니,

석가도 원래는 보통 사람일 뿐인 것을.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 중에, 31 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풀어 주겠다고 유혹했으나, 선생은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재판을 받을 때에도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였고, 모진 겨울의 추위를 세 해나 넘기면서도 사식(私食)을 희망하거나 보석(保釋)을 신청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판검사를 상대로 논리적으로 싸울 수 있으니 변호사는 필요 없고, 평생을 독립 운동으로 싸울 터이니 사식은 무엇 하며, 신념을 가지고 한 일이니 보석은 얼토당토않다는 이유에서이다. 선생에게 있어 조국 독립과 겨레에 대한 사랑은 신앙(信仰)과도 같이 거룩한 것이었기에,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이다.

 

3년여의 영어 생활(囹圄生活)에서 풀려 나온 뒤에도 선생은 독립 운동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 때부터는 주로 강연과 사회 활동을 통해서 청소년을 계몽하는 데 주력하였다. 선생이 이르는 곳마다 우국 지사와 열혈 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선생은 항상 강연의 마지막에는 개성 송악산에서 흐르는 물이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 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의 흐르는 물이 촉석루의 먼지는 쓸어 가도 의암(義巖)에 서려 있는 논개의 혼은 못 씻는다.”라고 끝맺곤 했다.

 

선생은 생활이 구차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처 또한 일정한 곳이 없었다. 누더기 승복 외에는 딴 의복이 없었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애써 입지 않으려 하였다. 오로지 심성만이 가을 물같이 차고 맑았으며, 의기(義氣)만이 샛별같이 빛나고 있었다.

 

선생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인력거나 전차도 타지 않고 걸어다녔다. 참을성에 있어서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한번은 선생이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다가 이를 피해 만주로 간 동포들의 실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이 때, 험하기로 이름난 굴라재라는 고개를 넘어갈 때, 선생을 왜경의 앞잡이로 오인(誤認)한 동포 청년들이 선생을 저격하였다. 첩첩 산중의 험한 산간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동포들이 사는 마을에까지 수십 리를 기어가서 겨우 목숨을 보존했다. 수술을 받을 때, 마취를 하지 않고, 총탄에 으스러진 뼈를 바로 맞추고, 뼛속에 박힌 총알을 긁어 내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입만 굳게 다물고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정처 없이 떠도는 선생을 보다못해, 뜻있는 동지 몇 사람이, 변두리이던 성북동 산비탈에 작은 집을 지어 주기로 했다. 이 때, 목수들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남향으로 지으려 하자, 선생은 그건 안 되지, 남향으로 하면 돌집(조선 총독부 건물)을 바라보게 될 터이니, 차라리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더라도 북향으로 해야지.” 하고 우겨서 북향으로 심우장(尋牛莊)’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설날이 되어도 갈아입을 새 옷이 없고, 불을 때지 못해 얼음장 같은 냉돌 위에서 비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조선 사람이다. 왜놈이 통치하는 호적(戶籍)에 내 이름을 올릴 수 없다.”라고 하며 단호히 입적(入籍)을 거부하여, 모든 식량 배급은 물론,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 이 때, 창씨 개명(創氏改名)을 하는 등 변절한 옛 친구들이 선생의 딱한 사정을 돕고자 찾아왔으나, “내가 알던 그 친구는 죽은 지 오래다.”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진 1925년 어느 초여름날, 선생은 바랑 하나만 걸머지고는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내설악의 울창한 숲 속으로 표표히 걸어 들어갔다. 이 여름 내내 산 속에 묻혀, 마침내 민족의 시집 임의 침묵’ 88 편의 주옥 같은 작품을 지어 내었다.

 

임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임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임의 침묵은 사랑의 노래이다. 이별한 임을 그리워하며 고통과 슬픔 속에서 애타게 임을 기다리는 애절한 희망의 노래이다. , 이 시에는 빼앗긴 조국이별한 임으로 비유되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속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시집 임의 침묵은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만남의 노래이며 부활의 노래로 볼 수 있다. 선생은 암흑의 시대인 일제 강점하에서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고 노래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이럴 즈음, 독립 운동가인 김동삼(金東三) 열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죽어 그 유해를 찾아가라는 신문 보도가 있었으나, 일제로부터 주목받기를 꺼려서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비참한 생활 중에서도 선생은 단숨에 달려가서, 자신의 집으로 열사의 유해를 옮겨, 대성 통곡하며 정중히 장례를 치렀다. 이처럼 궁핍한 살림과 혹심한 탄압 속에서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강직한 지조와 의리, 그리고 따뜻한 인정미를 잃지 않는 데서 선생의 참된 인간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선생은 일제의 온갖 위협과 유혹에도 죽는 날까지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온갖 고초 속에서도 광복과 독립의 그 날, 역사의 새벽이 머지않아 다가올 것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광복을 일 년 앞둔 어느 날, ‘심우장차가운 냉돌 위에서 끝내 역사의 큰 별은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임은 갔지마는 나는 임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비록 불우한 삶 속에서 선생은 갔지만, 그 불타는 조국애는 민족의 가슴 속에 영원한 등불로 빛날 것이다. , 선생의 고결한 지절(志節)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로서 겨레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향기를 더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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