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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을 찾아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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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을 찾아서

 

과수원들이 자리잡은 한적한 길의 안내판을 따라가면 어느새 생가에 다다른다. 길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 두어 채가 보이는 곳인데 바로 그곳이 한용운선생의 생가이다.

 

오른편으로 생가터 안내문, 왼편에는 초가로 지어진 관리사무소가 있는데 그를 지나면 싸릿대 울타리가 나온다. 복원된 만해 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고 방 2, 부엌 1칸으로 일자형 구조다. 아직도 '한용운' 문패가 걸려 있어 생전의 만해선생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방안에는 만해의 영정과 앉은뱅이 책상 하나가 놓여있다. 부엌 옆에는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마당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있고 오석에는 만해의 '나룻배와 행인'이 새겨져 있어 사람들을 명상에 잠기게 한다. 생가에 조금 떨어진 곳에는 만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다. 만해의 동상은 홍성읍내에세 보령으로 내려가는 21번 국도변에 있는데 생가 방문 후에 들러보는 것이 좋겠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446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

 

<참고자료>

 

작가 소개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습니다.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간 후, 1899년에는 설악산 백담사에 등지를 전전하다가 세계 여행을 계획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갔으나 박해를 받고 돌아와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1904년 봄에 고향으로 내려가 여러 달을 머물다가 초여름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습니다. 백담사에 머물면서 참선과 수도를 하던 그는 1908년 일본 여행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게 됩니다. 동격 도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고, 유학중인 최린과 사귀지요.

 

개인 및 사찰 소유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측량 학교를 세우고, 송광사,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 대회를 개최하는 등 불교 개혁 운동과 독립 운동에 앞장선 그는 1911년 한일 합방의 울분을 참지 못해 만주로 망명을 합니다. 거기서 그는 독립군에게 민족 독립 사상을 북돋워 주고, 망명중인 박은식, 이시영, 윤세복 등과 만나 독립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1913󰡔조선 불교 유신론, 1914년에는 󰡔불교 대전󰡕을 간행하는 등 불교 대중화를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지요.

 

문학 활동올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188년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편집자 겸 발행인이 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잡지에 논설과 신체시를 탈피한 신시 을 발표하고 이후 문학 창작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의 한 명으로 참여하여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를 발표했습니다. 출옥 후에는 옥중시 무궁화를 심고자(1922), 장편 소설 죽음(1924), 시집 님의 침묵(1926)을 잇달아 간행했습니다.

 

1933년부터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을 짓고 기거하면서 장편 소설 흑풍, 박명등을 짓고, 불교에 관한 논설과 수필을 발표하던 그는 1944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망우리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18세 때 의병에 가담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기개 있고 고매한 삶은 오늘날까지도 민족 지도자요 선각자의 표상으로 살아 있습니다.

 

한용운의 시는 '소멸'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를 소멸의 시학 또는 모순의 시학이라고 합니다. 그에게서 모순은 소멸을 통해, 소멸은 다시 모순과의 변증법적 갈등과 화해를 통해 새로운 극복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를 모순으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님의 소멸이라는 극적인 발상을 했습니다. 그의 시는 식민지 시대의 억압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사회 의식을 소멸과 모순의 변증법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한용운은 고전적 정신과 불교의 가락을 체득해 은유적 방법을 확립하고 현대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모호한 상상과 퇴폐적 감상주의가 주조를 이루던 당대의 시적 풍토를 뛰어넘어 그가 간 길은 귀중한 우리의 자산입니다. 그는 종교 의식과 예술 의식의 교차점에서 개인과 사회를 접맥시키고, 이것을 다시 역사의식으로 고양시켰습니다. 이 점이 바로 한용운이 대시인으로 칭송되는 이유입니다.

 

한기애김성권 공저, 현대시 노트(동녘,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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