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행자
by 송화은율
어릴 때부터 한스는 대답하기 곤란한 진지한 질문으로 부모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세상에는 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죠?
무엇을 위해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나요?
무슨 이유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살아가고 있죠?”
마치 한스의 어린 육체 안에 성숙한 영혼이 살고 있어서,
그 영혼이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실체를 꿰뚫어 보려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물음들이었다.
“왜 인간들은 병들어 죽게 되나요?
친구가 적으로 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죠?”
학교 교사도 한스의 진지한 물음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원래 그런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한스가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고작 그런 식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부모와 교사에게서 만족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하자,
실망한 그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한스는 책에서 생애 최초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책에 담긴 사상들이 그를 깊이 감동시키고
출구가 없을 것만 같은 삶의 어둠에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들을 두꺼운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 내려갔다.
마치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모아 한 편의 그림을 완성하듯,
언젠가는 생의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면서.
한스가 청년 철학도가 되었을 때,
그의 노트에는 번뜩이는 깨달음이 마지막 장까지 빼곡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어둠을 밝히기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했다.
더구나 대학에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도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강의실에서는 지혜를 찾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지식의 전달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비록 수준 높은 지식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때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교수들 중에 나이가 지긋한 페리곤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른 교수들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다.
여느 교수들과 달리 수염도 깎지 않고,
옷차림도 허름했으며, 권위를 앞세우지도 않았다.
겸손하면서 친절했고, 학생들의 고민에 늘 귀를 기울였다.
3학년이 끝날 무렵 한스는 페리곤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 마치 다리도 놓이지 않은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길 잃은 방랑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스의 얘기를 듣고 나서 페리곤 교수는 말했다.
“심연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분명히 존재하지.
하지만 자네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야.”
두 사람은 대학 건물 뒤에 있는 공원을 함께 산책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
때가 되면 자네 역시 영혼의 눈을 뜨게 될 거야.”
한스가 물었다.
“교수님은 영혼의 눈이 열렸나요?”
페리곤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못 보고 있지.
여기 있는 교수들처럼 어둠 속을 더듬으며 헤매고 있을 뿐이야.
교수들이란 항상 고상한 말을 늘어놓고 현란하게 자기를 포장할 뿐이지.
그렇게 때문에 나 역시 자네의 영혼을 비출 수가 없어.
자기 자신 안에서 스스로 빛을 찾은 사람만이
그 빛을 타인에게도 나누어 줄 수가 있지.
난 오랜 세월 그 빛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어.
삶의 근원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은 중도에 숨이 차기 마련이야.”
한스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교수님, 좀더 많은 이야기를 해주세요.”
패리곤 교수가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나도 그 이상은 아는 것이 없네.
하지만 자네가 온 존재를 다해 삶의 진실한 모습을 알고자 한다면,
자네는 더 이상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어.
현존에 대한 말장난이 아닌,
현존 그 자체가 바로 자네가 다녀야 하는 대학이지.
이곳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그래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삶의 무한한 의미를 발견하게.
편안하고 무신경한 생활을 포기하고 매 순간을 확인하며 사는 거야.
자네는 벌써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한스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자네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군. 자네는 진정한 구도자야.
여기 대학에서는 진리 추구에 대해 끝없이 말만 늘어놓을 뿐이지.
실제로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자네는 달라. 자네는 이성이 아니라 가슴과 영혼으로 지혜를 찾게 될 거야.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책이나, 교사, 학점을 따를 것이 없이
진리에 대한 열망만이 필요할 뿐이야.
게다가 그 길은 쉽지도 않고 지름길도 없어.”
한스가 강한 의지를 갖고 말했다.
“교수님, 제가 그 길을 가겠습니다.”
페리곤은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재능 있는 학생에게 학업을 그만두게 하는 것이 교수가 할 일은 아니지만,
대학이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야.
자네는 이제 삶이라는 대학에 등록해야만 해.
그것도 자네의 뜨거운 피로써!
그곳에서 자네는 진정한 학위를 마칠 수 있게 될 것이고,
먼지 쌓인 책에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얻은 지혜의 주인이 될 거야.”
한스는 페리곤 교수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교수의 말이 그가 가고자 하는 길 앞에 놓인 두려움을
모두 사라지게 한 것은 아니었다.
페리곤 교수는 그런 한스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이렇게 말했다.
"철학과란 온실 속 식물원 같아서 삶을 경험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
마치 말안장에 앉아 보지도 않고서 말타기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옛사람들의 사상을 반복해서 외거나
멀찌감치 떨어져서 삶을 분석할 뿐,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려는 용기와 열정은 없어.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세상을
실제로 경험하는 것인데도 말이야.
삶이란 절대로 잘 가꾸어진 정원이 아니야.
수많은 위험과 변화로 가득한 곳이지.
하지만 그만큼 가능성과 행복의 요소들로도 가득 차 있어.
그렇기 때문에 자네의 길을 가야만 하는 거야.
하지만 두려워하지는 말게.
왜냐하면 두려움이란 참된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위험한 적 가운데 하나니까.
언제나 호기심을 간직하게,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늘 의문을 가져야만 해.
자네는 서로 모순된 답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자네를 위한 지도가 숨어 있어.“
그의 말에 깊은 인상을 받고 한스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페리곤 교수님,
교수님은 진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이제 저는 저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페리곤 교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생의 심장부를 향해 가는 여행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울 것이고,
왜냐하면 자신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지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의미를 추구하고 있거든.
운이 좋다면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자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 것이고,
자네의 삶이 풍성해지도록 도와줄 거야.
그로 인해 자네는 더욱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가겠지.
그러나 마지막 목적지는 자네 혼자 찾아야 해.
자네의 영혼말고는 누고도 자네를 목적지로 안내해 줄 수 없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항상 눈을 뜨고 있어야 해.
육에만 눈이 있는 건 아니지. 마음에도 눈이 있고,
그 눈으로 보는 것만이 자네의 갈망을 채워 줄 거야.“
“저는 좀더 깊고 자유로운 통찰력을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너머의 알 수 없는 것을 제가 발견할 수 있을까요?”
“자네가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목표에 대한 지나치게 분명한 생각은 오히려 길을 더 멀게 만들 수도 있지.
자네는 자신의 상상력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열망하고 있어.”
한스는 교수의 말에 공감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탈바꿈시킬 수 있는
어떤 놀랄 만한 것을 찾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어쩌면 제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페리곤 교수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설령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자네의 뜨거운 열망이 그것을 발견하게 해줄 거야.
자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길 빌겠네.
그리고 자네가 언젠간 한번쯤은 내게 편지를 보낼 것이라 믿겠네.
하지만 억지로 편지를 쓰진 말게.
자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올 편지를 써서 보내 주게.”
페리곤 교수와 대화를 나누고 일주일 뒤,
한스는 배낭을 꾸려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났다.
모아 둔 돈과 자질구레한 물건을 팔아 한동안 겨우 먹고살 자금을 마련했다.
깨달음을 향한 열망만이 그에게 힘을 주고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불안과 절망감이 그를 힘겹게 한다 해도
강렬한 열망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암울하고 힘든 청소년 시절을 버텨 낸
자신에 대한 믿음이 큰 힘이 되었다.
여행의 처음 며칠과 몇 주는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값싼 유스호스텔에서 묵거나 때로는 노숙도 서슴지 않았다.
먹을 것은 가능한 최소한으로 줄였다.
발길 닿는 대로 도착한 모든 마을과 도시에서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다들 의아하고 어색한 듯한 반응만 보였다.
사람들은 낯모르는 여행자로부터
대뜸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저 머리를 흔들거나 어깨만 추켜올릴 뿐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대답을 해주었다. 한 농부는 말했다.
“내 삶의 의미는 밭을 일구어 가족을 먹여 살리고,
가축을 돌보고, 농사를 최대한 잘 짓는 데 있소.
그래서 아내에게 충실한 남편,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버지,
친구들에게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되는 거요.”
한 화가는 대답했다.
“내 생의 의미는 예술이오.
나는 그림을 위해 살고 있소.
그림을 그릴 때면,
주의 모든 것을 잊고 한 순간에만 몰입할 수가 있소.
자신을 잊은 채 영혼이 원하는 대로 붓을 놀리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오.
당신도 한번 그림을 그려보시오.
그러면 내 생의 의미를 알게 될 거요.”
어느 의사는 말했다.
“나의 소명은 사람들을 돕는 일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 한 의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각인되었고,
나 또한 의사가 되리라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 덕분에 나는 많은 이들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삶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는 모두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여깁니다.”
반면에 자신들의 삶에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만났다.
한스의 질문에 한 노인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야 그저 고통 없는 죽음을 맞이하길 바랄 뿐이지.
달리 뭐가 있겠나. 죽어야 이 한 많은 생에서 벗어나는 거야.
이놈의 인생은 한 번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아 본 적이 없어.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을 위해,
직장과 가정을 위해 나를 희생한 것밖에 없어.
마누라도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 버렸어.
자식놈들은 내 생일이나 되어야 겨우 한번 찾아올 뿐이야.
얼른 집을 물려받아 팔고 싶어하는 눈치가 역력해.
나도 나 자신을 위해 살았어야 하는 건데.
나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을 낸 적이 없어.
그리고 이젠 죽어야만 하다니!
내가 누구였는지도 모른 채 말이야. 그것이 마냥 서글플 뿐이야.”
어느 떠돌이는 중얼거렸다.
“내 삶에 의미가 있는지는 나 자신도 모르고 관심도 없소.
나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뿐이오.
때로는 구걸도 하고, 때로는 도둑질도 하면서 말이요.
그것조차 안 되면 하루벌이 막노동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크고 푹신한 침대에서 날마다 뒹굴 수 있으면 좋겠소.
그것이야말로 살 만한 인생이 아니겠소?
하지만 나한테는 그저 꿈에 지나지 않소.”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과부는 말했다.
“난 태어나서 단 한 번 진실한 사랑을 했고,
그 사랑 때문에 삶이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순간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기쁜 것도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끝없는 고통만 있을 뿐이에요.
나를 살아가게 하는 만드는 유일한 것은 꿈이에요.
그 꿈에 남편이 나타나 나에게 부드럽고 다정하게 말을 걸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한스는 차츰 자신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어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을 마치 학생이 책에서 인용문을 노트에 옮겨 적듯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문은 그것만으로는 완전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비참함,
부자들의 탐욕과 냉정함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거듭할수록 세상의 불공정과 마주치게 되었고,
그것이 그를 더욱 깨어 있게 만들었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돈과 폭력이었으며,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선과 자비가 결여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유와 자신의 모든 능력을 팔고 있었다.
그는 곳곳에서 절망과 슬픔을 목격했고,
사람들이 인내를 가지고 고통을 감수한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또한 이기주의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다.
말로는 쉽게 사랑한다고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아주 적었다.
페리곤 교수가 한 말이 맞았다.
인생이라는 대학은 결코 보호받는 식물원이 아니었다.
거칠고 때로는 잔인한 정글이었다.
그 정글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영혼을 슬프게 만드는 수단까지도 동원해
살아남기 위해 서로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스는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타인을 위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남을 도울 줄 알고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은 한스에게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곧 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한스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리하여 패리곤 교수가 말한 대로
인생 대학의 학위를 마치기 위한 수업을 한 단계씩 밟아 나갈 수가 있었다.
한스는 맑은 날과 흐린 날을 경험했고,
기쁨의 순간과 절망의 순간도 맛보았다.
삶의 모든 변화와 불확실성을 깨달았으며,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사람들이 머리로 생각하지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한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절실히 느꼈다.
머리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만을 생각하도록 부추기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모든 재앙이 사람들의 무감각과 냉정함에
뿌리를 두고 있음이 명백해졌다.
한스는 특히 자신이 추구하는 의미, 혹은 의미에 대한 추구가
인간이 겪는 고통과 불공정에 대항해 싸우는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
인간의 무분별한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불공정은
마치 치명적인 유전병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그는 보았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들까지도 별 것 아닌 하찮은 일을 놓고 싸우는 것을,
지혜가 부족해서 서로 다투고,
그것 때문에 서로를 힘들게 만들며 살아가는 것을.
그는 사랑의 기쁨과 고통도 알게 되었다.
그는 기쁨을 발견했지만,
곧 다시 잃어버리기도 했다.
모든 일이 지난 뒤에는 다만 하룻밤 꿈처럼 속절없이 사라지고
흐린 기억만 남을 뿐이었다.
어쩌면 그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지혜를 찾는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 때면 한스는 몸이 마비되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생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길을 쉽지도 않고, 지름길도 없다.’고
한 페리곤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 새로운 힘과 용기가 솟아났다.
한스가 학교를 떠난 지 4년 후,
우편배달부가 페리곤 교수의 방문을 두드렸다.
옛 제자인 한스로부터 온 편지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페리곤 교수는 긴장된 손으로 편지 봉투를 뜯었다.
교수는 그때까지 한스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더구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행길에 나서도록
자신이 한스를 부추겼다고 자책하고 있던 터였다.
편지의 첫줄을 읽는 페리곤 교수의 얼굴에는 가슴 벅찬 기쁨이 가득했다.
존경하는 교수님!
이제야 소식을 전하게 된 걸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교수님께서 저에게 조언과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교수님은 전에 공원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면서
저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물론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것은 길고도 어려운 추구의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힘든 세월 동안 저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그것을 어떻게 찾았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년 전, 저는 숲 속을 헤매다가 느닷없이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음흉한 얼굴과 눈빛으로 저의 보잘것없는 물건뿐 아니라
목숨마저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강도 두목이 칼을 빼 든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나이가 서로 다른 다섯 명의 수도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단호하게 나와 강도들 사이를 마치 벽처럼 가로막았습니다.
저의 눈에는 그들이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겁없는 행동은 강도들을 움찔하게 만들었고,
강도들은 이내 줄행랑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저의 감사에도 겸손해하는 모습에 더욱 놀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당신들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 부디 동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저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수가 적었습니다.
저는 곧 수도사들의 특이한 종류의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극도로 검소하게 생활했고,
꼭 필요한 것 외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굶주리고 아픈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겨울 동안은 수도원에서 지내며
이듬해의 여정을 위해 기운을 축적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이곳저곳 다닐수록
저는 그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불평을 늘어놓은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고,
서로 다투는 것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유머와 평온함으로 대처했고,
부자가 많은 돈을 기부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의 여행길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들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근원은 남을 돕는데 있으며,
물질에 대한 욕망을 없애고
약자 중의 약자를 도우며 살아가는 데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빵과 물,
기쁨과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도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들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어느 날 밤, 그들은 잠들었지만
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문득 나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용기를 내어 수도사들에게 청했습니다.
저를 그들의 교단에 받아 달라고.
수도사들은 서로 의미 있는 눈빛을 나눌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음 날 그리고 그 다음 날도 계속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확답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를 내쫓지마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나를 시험하고 있어.
아직 그 시험이 끝나지 않은 걸 거야.’하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코앞에 다가오자 수도사들은 그동안 고생하며
모은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원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습니다.
넉 달 동안 저는 수도사들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녔던 것입니다.
이제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간절히 청했습니다.
“부디 저를 수도원에 받아 주십시오!
수도원장님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해주세요.
저도 수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제야 저는 수도사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로타모의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겸손과 지혜는 저에게 늘 새로운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왜 그대는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는가?
우리를 만난 첫날 이미 그대는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을 왜 모르는가?
비록 그대가 수도복을 입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대를 오래 전에 우리 교단의 수도사로 받아들였다.”
제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저를 그토록 쉽게 교단에 받아들일 수 있었단 말입니까?
수도원장님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로타모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바로 수도원장이다.”
제 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마음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의 한스는 가장 고귀한 지혜와 생의 의미를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일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한스 크루파 글 / 서경홍 옮김 '마음의 여행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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