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마리아의 노래 / 노발리스

by 송화은율
반응형

마리아의 노래 / 노발리스

 

아름다이 그려진 천 개의 그림 속에서

나는 그대 모습 보느니, 나의 마리아

하지만 어느 그림 속에서도

내 혼에 비친 그대 모습 볼 길 없어.

 

세상의 물결은 한낱 꿈결처럼

나로부터 멀리 사라져 버리고

말 못할 하늘 위의 크낙한 즐거움은

내 혼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뿐.


요점 정리

작자 : 노발리스

내용 연구

크낙한 : 크나큰의 잘못된 말. 크낙하다는 크나크다의 잘못.

노발리스의 다른 작품 : 밤의 찬가

이해와 감상

노발리스가 사랑했던 조피가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을 때 시인에게는 그 조피가 성모 마리아처럼 느껴졌다. 이 시는 '마리아 찬가'의 제2가이다.

심화 자료

노발리스(Novalis)

본명은 Friedrich Leopold, Freiherr von Hardenberg. 1772. 5. 2 프로이센 작센 오버비더슈테트~1801. 3. 25 작센 바이센펠스. 독일의 낭만주의 시인·이론가. 후기 낭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니더작센의 귀족계급에 속하는 신교 가문에서 태어나 가족이 전에 사용했던 이름 '노발리'를 본떠 자신의 필명을 붙였다. 청년시절 예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1790), 거기에서 실러와 사귀었다. 그뒤 라이프치히에서 공부하며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과 친교를 맺고 칸트와 피히테의 철학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793년 비텐베르크에서 공부를 마쳤고 1796년 바이센펠스에서 작센 정부 제염소의 회계 감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794~95년 노발리스는 14세의 조피 폰 퀸과 사랑에 빠져 약혼했다. 그러나 그녀가 1797년 결핵으로 죽자 자신의 비애를 표현한 아름다운 시 〈밤의 찬가 Hymnen an die Nacht〉(1800)를 썼다. 이 운문 섞인 산문시 6편에서 노발리스는 밤, 즉 죽음을 신 앞에서 누리게 될 더 높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으로서 찬미하며, 자신이 죽은 뒤에는 조피와 전 우주가 신비하고 애정어린 합일을 이룰 것을 기대했다.

그는 1797년 광산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프라이베르크 아카데미로 갔다. 1798년 다시 율리 폰 카르펜티어와 약혼했고, 1799년 바이센펠스에 있는 제염소의 광산 조사관이 되었지만, 결혼하기 전인 1801년 결핵으로 죽었다.

말년에는 백과사전적인 연구, 관념론에 토대를 둔 철학체계 초안, 시작(詩作)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다.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던 단편집 〈 꽃가루 Blutenstaub〉(1798)와 〈신앙과 사랑 Glauben und Liebe〉(1798)은 그의 정신세계의 폭을 잘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세계를 우화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철학·과학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유명한 신화적 로맨스 〈하인리히 폰 오프터딩겐 Heinrich von Ofterdingen〉(1802)은 이상화된 중세를 배경으로 젊은 시인의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탐구심을 그렸다. 그의 시에서의 중심적 이미지인 푸른 꽃은 동료 낭만주의자들 가운데서 널리 인정된, 낭만적 동경의 상징이 되었다.

노발리스는 〈그리스도교 세계:유럽 Die Christenheit oder Europa〉(1799)이라는 평론을 통해 종교개혁과 계몽주의 운동으로 중세 때의 문화적·사회적·지적인 통일이 파괴되었던 유럽을 새롭게 회복할 보편적 그리스도교 교회의 설립을 요청한다. 그가 죽은 뒤에야 발표된 이 평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향하는 낭만주의 세대의 동향을 확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낭만주의 - 에른스트 피셔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시민적 자본주의 세계, 즉 '환상을 상실한' 세계에 대한, 그리고 기업과 이윤의 거친 산문에 대한 열정적이고 모순적인 저항의 운동이었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에 대한 독일의 낭만주의자 노발리스의 호된 비판은 이러한 태도 중 특징적인 것이었다. (비록 또 다른 낭만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위대한 소설이라 극구 칭찬하였을 지라도).『빌헬름 마이스터』에서 괴테는 부르주아의 가치들을 적극적 정신으로 제시하며, 유미주의로부터 산문적인 브루주아 세계 안에서의 적극적인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추적한다. 노발리스는 그 중 의 아무 것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모험가, 코미디언, 창부, 가게주인, 그리고 속물들이 이 소설의 구성요소이다. 그것을 정당하게 되새기는 사람은 누구나 결코 다른 것을 읽지 않을 것이다.

루소(Rousseau)의 『과학예술논고』(Discourses)로부터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이르기까지, 낭만주의는 유럽의 예술과 문학에서 지배적인 태도였다. 낭만주의는 철학, 문학, 그리고 예술을 통하여 , 발전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을 소시민의식의 견지에서 가장 완벽하게 반영 한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순들의 본성과 기원을 인식하고 사회발전 의 변증법을 이해하며 노동계급만이 그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동일한 세력이라는 점을 인식 할 수 있게 되었다. 낭만적 태도는 달리 혼동될 수 없다. 왜냐하면 소시민은 사회적 모순의 구나 그 과정에서 뭉개져 죽을까 두려워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지만 구 시대의 확고한 세계질서에 집착하며, 그의 눈은 새 시대를 향하나 또한 보수적으로 '옛날의 좋은'시대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첫째로 낭만주의는 귀족의 고전주의에 대한 여러 규범과 기준에 대한, 귀족적 형식에 대한, 그리고 모든 '평범한'문제들이 배제된 내용에 대한 소시민적 반역이었다. 이러한 낭만주의적 반역자들에게 특권화된 주제는 없었다. 즉, 모든 것이 예술을 위하여 알맞은 주제였다. 스탕달과 메리 레의 찬양자인 괴테는 1803년 3월 14일 죽기 얼마 전에 이렇게 말했다.

극단과 변태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이득이 남을 것이다. ― 보다 자유로운 형식 외에도 ,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주제들이 획득될 것이다. 광대한 세계와 다양한 생활 속에서 어떤 대상도 더 이상 비시적인 것으로 배제되지 않을 것이다.

노발리스는 괴테가 지금까지 지지했던 모든 것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그 역시 낭만주의가 이제까지 금지된 테마에 대한 시적 취급을 장려한다는 접은 인정하였다. 그는"낭만화된 평범한 것에 고 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운 모습을 , 친근한 것에 미지의 존엄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셸리(Shelly)는 『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 는……친근한 대상들을 마치 친근하지 않은 것처럼 나타나게 만든다."낭만주의는 고전주의자들의 잘 손질된 공원에서 나와 광활한 황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는 고전주의뿐 아니라 계몽주의에도 반대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전체적인 대립이 아니라 기계론적인 이념과 낙관주의적 단순화에 대해서만 향해진 것이었다. 샤토브리앙 (Chateaubriand), 버크(Burke), 코울리지(Coleruge), 슐레겔(schlegel), 그리고 많은 다른 사람을 거부하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발전의 모순에 대한 통찰력이 좀 더 심원하였던 셸리, 바이런, 스탕달, 그리고 하이네는 계몽주의적인 작품을 계속해서 썼다.

낭만주의의 기본적인 체험들 가운데 하나는 점증하는 분업과 전문화, 그리고 거기에 수반된 생활 의 파편화로부터 불완전하고 외로워져 가는 개인의 체험이었다. 구질서 하에서 어떤 사람의 신분이란 타인 및 세계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매개물이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개인은 매개물 없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방인으로서, 무한한 '비아(非我)'에 대립된 단일한 '나'로서 홀로 사회와 대면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강력한 자아의식과 오만한 '나'와 동시에 신성한 초상의 발 밑에서 흐느끼는 '나', 세계를 이미 정복하였으나 외로움의 공포로 극복되어야할 '나'를 조장시켰다. 작가와 예술가의 '자아'는 고립되고 내면화되며, 시장에서 그 자신을 판매함으로써 생존을 위하여 투쟁하면서도, '천재'로서 부르주아 세계에 도전하고 잃어버린 통일성을 꿈꾸며, 과거나 미래 속에 상상적으로 투사된 집단을 열망하였다. 변증법의 삼위일체―정(최초의 통일성), 반(소외, 고립, 파편화), 합(모순 의 제거, 현실과의 화해, 주관과 객관의 일치, 회복된 낙원)―가 낭만주의의 바로 핵심이었다. 낭만주의에 내재된 모순들은 미국 독립전쟁에서 시작하여 워터루 전투에서 끝나는 혁명적 격변에 의하여 극단까지 나아갔다. 혁명과 거기에 채택된 태도―전체로서뿐 아니라 분리된 단계들마다 채 택되었던 태도 ―가 낭만주의 운동의 핵심 주제이다. 각각의 전환점마다 운동은 진보적 경험과 반동적 경향으로 갈라졌다. 마르크스가 슈바이처에게 써 보냈던 것처럼, 매번 소시민은 스스로가 '모순의 화신'임을 증명하였다.

모든 낭만주의자들이 공통으로 가졌던 것은 자본주의(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귀족적 각도에서 보았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평민적인 각도에서 보았다)에 대한 반감, 개인의 탐욕성에 대한 파우스트적인 또는 바이런적인 믿음, 그리고 '스스로의 권리에 대한 열정'의 승인(스탕달)이었다. 물질적 생산이 점점 칭송할 만한 껍데기로서 비공식적으로 간주됨에 따라서 예술가와 작가들은 외관상으로 잘 짜여진 부르주아 세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렬하게 이간의 마음을 드러내고 열정의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방법에 의하여 모든 가치의 상대성이 점차 명백해지면서 , 열정―체험의 강렬성―이 점차 절대적인 가치가 되었다. 키츠는 '가슴의 감동' 외에는 아무 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첸치일가』(The Cenci) 의 서문에서 셸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상상력은 사그라지는 열정의 회복을 위하여 불멸의 신처럼 체현된다."드라크 루아(Delacroix)가 제리코(Gericault)를 두고 '모든 것을 뒤덮고 압도하는 광희의 열병"에 대해서 , 그리고 "억누를 길이 없어 솟구쳐 오르는 화산의 불"에 대해서 적었다.

낭만주의는 실로 거대한 분출이었다. 이것은 거칠고 이국적인 것으로, 그리고 무한한 지평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신의 민중, 자신의 과거, 자신의 특성으로 돌아갔다. 위대한 낭만주의자들 모두는 나폴레옹을 '우주적인 자아', 해방된 개성이라고 찬양했다. 그러나 동시에 낭만주의적인 반역은 민족해방투쟁과 더불어 발생하였다. 포스콜로(Foscolo, 1778~1827, 이탈리아의 시인, 애국자)는 「해방자,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의 송시로 나폴레옹을 환영하였다. 1802년에 그는 알프스 이남의 키살핀(Cisalpine) 공화국, 즉 이탈리아의 독립을 선언하기로 나폴레옹과 서약하였다. 결국 그는 진절머리가 나서 정복자 나폴레옹에 반대하게 되었다. 레오파르디(Leopardi, 1798~1837)역시 프랑스의 해방자가 그의 조국을 해방시켜주지 못함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껴 『시가집』(Canzoni)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무기를 달라! 무기를! 나는 홀로 싸우리라, 나는 홀로 쓰러지리라, 나의 피가 이탈리아인의 가슴 에 영감을 주리라.

동유럽에서는 아직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하였고 민중은 쇠퇴하는 봉건주의 굴레 하에 노동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낭만주의는 순수하고 단순한 반항, 민중으로 하여금 국내외의 압제자들에게 항거하는 트럼펫소리, 민족의식에의 호소, 봉건주의·절대주의·외국의 지배에 대한 투쟁 등을 의미하였다. 바이런은 격정적으로 이러한 나라들 속에 뛰어들었다. 민중과 민속예술에 대한 낭만주의 적 이상화는 타락한 현상에 대하도록 민중을 선동하는 무기였다. 낭만적 개인주의는 인간의 개성 을 중세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수단이었다. 도구에서 부르주아민주혁명이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의 낭만주의적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하여 멀리 있는 불빛처럼 번쩍였다.

그러나 여러 나라들에서의 이 같은 표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낭만주의는 어디에서나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예술가가 자신과 일체화시킬 수 없는 세계에 대해 가지는 정신적 고립감, 민중과 민중의 노래 및 전설에 대한 열정('민중'은 예술가들의 마음속에서 거의 신비적인 통일성을 부여받았다), 개인의절대적인 독특성에 대한 찬양, 무제한적인 바이런적 주관주의 등이 그것이다. 모든 속박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작가는 낭만주의의 시대에 최초로 출현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부르주아 세계의 시장원리를 인정하였다. 그러한 작가들은 부르주아적 가치들에 대해 낭만적으로 반항하고 궁극적으로 해방을 위하여 보헤미안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그들이 탄핵하고자 했던 것―상품시장―을 작품으로 만들었다. 낭만주의는 , 중세에 대한 그것의 기구에도 불구하고, 현저히 부르주아 운동이었으며 오늘날 근대적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문제들이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은 서구의 자본주의 세계와 동구의 봉건세계 사이의 중간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 그리고 암울한 역사발전의 결과였던 '독일의 비참성' 때문에 , 독일 낭만주의는 모든 낭만주의 운동 가운데서 가장 모순적이었다. '예술에서의 자본주의적 환멸'은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독일에 보급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환상은 그것이 정당하게 승인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래서 혁명적 격변의 자본주의적 여파에 넌더리가 난 독일 낭만주의는 여러 혁명과 그 이념 및 주장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하이네는 여기에서 반자본주의적 저항의 요소를 인식하였다.

독일에서 낭만파 시인들이, 그 의도는 비록 정직하였지만, 현재로부터의 도피처를 과거에서 구하고 중세로부터 복귀를 주장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마도 오늘날(그가 썼을 당시)의 화폐숭상에 대한 혐오와 도처에 잠복해 있는 에고이즘의 추악한 모습에 대한 염증이었다.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이 시대의 발전하는 사회적 현실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그저 부정만이 결 코 영구적인 예술적 태도일 수는 없다.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그러한 태도는 그림자가 그것을 생기게 한 대상을 가리키듯이, 긍정(yes)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은 결국 미래가 구현되는 사회적 계급의 긍정에 다름없는 것이다. 서부의 여러 나라에서 노동계급은 시민 계급의 배후에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동구에서는 전체민중―농민, 노동자, 부르주아, 지식인―이 지배체재 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사업가를 이미 불쾌한 인물로 보았으며, 아직 비참한 독일 노동 계급 속에서는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어떤 힘도 발겨할 수 없었다. 이리 하여 그들은 이상화 된 봉건적 과거로의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본주의의 부정적 양상과 대비되는 과거의 긍정적 양상들―생산자나 직공 또는 예술가와 소비자의 긴밀한 유대, 사회관계의 상대적인 직접성, 강력한 집단의식, 좀 더 안정되고 덜 편협한 분업에 기인하는 인간 개성의 상대적인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정당하게 비판된 자본주의의 공포와 대립되기도 전에 관념화되고 물신화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삶의 '총체성'을 동경하면 서도 사회적 과정의 진정한 총체성을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 세계의 순진한 어린애들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모든 사회적 안정성을 일소하고 모든 기본적 인간관계를 파괴하며 사회를 원자화함으로써 사실상 새로운 통일의 가능성―물론 그것 자체 가 파편들로부터 새로운 전체를 전적으로 형성할 수는 없을지라도―을 위한 길로 준비하고 있다 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독일의 낭만주의자들 가운데서 가장 독창적이고, 위대한 재능을 탁월한 지성과 결합시켰던 인물인 노발리스는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측면을 잘 인식하고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놀랄만한 문장을 적은 바 있다.

상업의 정신은 세계의 정신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단순하며 장대한 정신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을 작동시키고 연결시킨다. 그것은 나라와 도시, 민족과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문화의 정신이며 인류 완성의 정신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통찰의 광휘는 종종 삶의 기계화 및 모든 형태의 기계에 대한 그의 불안으로 빛을 잃는다. 노발리스는 독일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상업적 부르주아 국가를 공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온건한 정부형태는 반 국가, 반 자연이다. 그것은 인공적이고 매우 망가지기 쉬운 기계―그리하여 모든 위대한 정신에게 고도로 불쾌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기계의 목마이다. 만약 이 기계가 살아 있는 자동적 존재로 변형될 수 있다면 커다란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이것이 '유기적인'것의 개념이며 모든 낭만주의자들은 이것을 '기계적인'것과 대립시켰다. 그들은 " 모든 삶의 시초는 메커니즘에 반대되는 반기계적인 것―격렬한 분출―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호프만(E. T. A. Hoffmann,1776~1822)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대조는 인간과 자동기계사이의 투쟁으로까지 격렬화되었다. 하이네가 말했듯이 호프만의 작품전부는 "20권의 분량에 달하는 두려움에의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유기적인'모든 것, '자연적으로'성장하거나 형성된 모든 것에 대한 낭만적 이상화는 혁명의 결과에 대한 반동적인 저항이었다. 즉, 낡은 사회의 계급과 관계는 '유기적인'것으로 간주되고, 새계급에 의해 창조된 운동과 조건은 사악하고 '기계적인'것으로 간주되었다. '세계의 정지'가 교란되어서는 안 된다. 고대의 밤이 새로운 대낮으로 대치되어서는 안 된다. 「밤의 찬미」(Hymns to the Night)에서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아침이 항상 다시 와야 하는가 지상의 사물들의 힘은 결코 끝나지 않는가 사악한 산업은 없애버린다 밤의 신성한 덮개를.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암흑시대'라는 문구에 반대하고, 그 현저한 인간성의 시기'는 사실 밤과 비 교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별이 빛나던 밤! 오늘날 우리는 혼란 되고 모호해진 반광명의 임시적인 국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밤을 비추었던 별들은 희미해졌고 대부분 사라졌다. 그라나 날은 아직 새지 않았다. 한 번 더, 보편적 이해와 행복이라는 새로운 태양의 절박한 출현이 우리에게 공표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 방식으로도 성급한 약속을 확증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것이 곧 충족될 것이라고 희망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 이유란 보통 일출에 선행하는 아침 공기 속의 약간의 냉기일 뿐이다.

'잃어버린 환상'의 모티브와 병행하여 우리는 '차가움'의 모티브, 즉 외롭고 황량한 세계의 느낌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목은 낭만주의에 의하여 처음으로 주어졌지만 그 이래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의 발전을 통하여 삶의 점차적인 소외 속에서 더욱 더 주장되었다. 이러한 감정과 더불어서 따뜻함과 안전함, 즉 상상 속에서 어머니의 자궁과 비슷한 조건으로의 복귀에 대한 동경이 생겨난다. 또한 죽음의 관능성, 독일 낭만주의에 특이한 죽음에의 욕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 통일성, 모든 것을 망라하는 총체성 등은 죽음과 동일시된다.

어느 날 모두는 일체가 되리라, 거룩한 피 속에서 행복한 한 쌍이 떠다니고, 대양은 이미 벌개지고 절벽은 솟아올랐다. 향기로운 살덩이로

낭만주의에 보편적인 성욕과 죽음의 욕구는 프로이트의 어떤 관념을 연상하게 한다. 마치 프리드 리히 슐레겔이 '디오니소스적인'것과 '아폴론적인'것에 대한 개념과 더불어 프리드리히 니체를 예 감했던 것처럼 말이다. 노발리스는 "사유의 기관은 자연의 생식기관, 세계의 성기"라고 적었다. 또 그는 "성적인 즐거움, 종교, 그리고 잔인함의 결합이 그 밀접한 관련성과 공통의 경향에 있어서 주목받게 된 것이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점은 진귀하다"고 말했다. 낭만주의적 정신에서 사회적 현실은, 비록 '폐지되지'는 않을 지라도 엄청나게 왜곡되고 아이러니로 용해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독일 시는 점점 더 깊이 과거를 탐구하고 있다. 그것의 뿌리는 전설 속에 있으며 거기에는 환상 의 흐름이 원류로부터 신선하게 흐르고 있다. 그것은 유머를 통해서 실재 세계의 현재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계는 낭만화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본래의 의미는 ……평범한 것에 고상한 의미를, 일상적인 것에 신비스러운 모습을, 알려진 것에 미지의 존엄을, 유한한 것에 무한의 외관을 부여함으로 써……다시 발견된다. 우리가 몽환적인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신체기 관과 지각의 취약성에 기인될 뿐이다.

실재 세계의 배후에 있는 이러한 '몽환적인 세계는 사실주의적 수단에 의해서는 접근될 수 없으 며, 의식의 불이 꺼지고 꿈이 들어설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노발리스는 예술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

꿈처럼, 연결이 없다 단지 연상만을 가진 이야기, 단순히 아름답고 아름답게 소리나는 단어들로 채워진, 그러나 또한 전적으로 의미와 연결이 없는 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몇 마디 시 행, 이러한 모든 것은 절대적으로 상이한 사물들의 파편이어야 한다.

부서진 세계, 파편들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느낌, 현실로부터 신비적인 실재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나 연결이 없는 연상으로의 비상 등 이러한 관념들은 초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개진되었지만 나중에는 부르주아 세계에서의 예술적 원리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낭만적인 반항, 과거로의 도피는 또한 긍정적 측면을 가 지고 있다. '밤'뿐 만 아니라 '낮'도 있었다. 인간의 통일성에 대한 심오한 절망과 인간이 그의 운명을 지배하 수 있는 잠재적 능력에 대한 고상한 미음으로 표현되었다. 노발리스는 이렇게 적었다.

공동체, 복수성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다. 우리를 억압하는 폭군은 우리의 정신적 나태다. 우리의 활동을 확대하고 교화시킴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운명으로 될 것이다……만약 우리가 우 리의 지성과 세계 사이의 조화를 확립한다면, 우리는 신과 동등하게 된다.

하나의 전망이 얼핏 보였다. '새롭고 개화된 시적 시기의 시작으로서 세상의 심판'이 그것이다. 결국 독일 낭만주의의 부정적이고 후진적으로 보이는 양상들은 낭만적 작가들을 완미한 카톨릭 과 반동주의자로 전환시켰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순수하게 기독교적으로 아름다운 감성"의 예 술을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는 "악마적인 열정의 헛된 마력, 바이런의 시가 점점 빠져들어 갔던 심연"을 비난했다. 그래서 바이런이 그리스에서 자유를 위하여 싸우다 습지열병으로 죽었고, 스탕달이 이탈리아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였으며 푸슈킨이 12월 당원들에게 공감하였던 반면, 많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메테르니히의 조수가 되었으며 하이네의 다음과 같은 경멸 적인 판결 을 받을 만하였다.

"그들의 말은 거짓말 덩어리이며 그들은 신성동맹의 추종자, 과거의 모든 비참함, 공포, 어리석음으로의 복귀자들이었다."

독일 낭만주의와 그 후의 모든 유사한 운동을 고찰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의 내적인 모순을 분석해 야 하며 부정적인 역할과 긍정적인 역할을 동시에 인식해야한다. 항상 동일한 갈등이 있다. 즉, 한 편에는 부르주아의 가치들과 자본주의의 기계성에 대한 심각한 반항,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과 불가피하게 반동으로 이르는 신비화로의 도피가 갈등하고 있었다.

 

독일 낭만주의는 우리 시대의 표현주의, 미래파, 초현실주의를 포함하여, 나중에 자본주의 세계의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번성하였던 다기(多技)한 예술운동들의 원형이었다. 그러한 운동들에서의 갈등 은 또한 거기에 관련된 예술가들 모두가 결코 반동주의자로 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반영되었다. 독일 낭만주의자들 가운데서 하인리히 하이네와 니콜라우스 레나우는 혁명가가 되었다. 그리고 우란트와 아이헨도르프 같은 사람들은 결코'거짓말 집단'과 야합하지 않았다.

또한 낭만주의의 일부는 사회에 대한 현실주의적 비판으로 발전하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은 많은 위대한 작가들―바이런과 스코트, 크라이스트와 그릴파르처, 호프만과 하이네, 스탕달과 발자크, 푸슈킨과 고골리―의 작품 속에서 밀접하게 뒤엉켜 있어 때로는 낭만적 요소가 우세하고 때로는 리얼리즘적 요소가 우세하다.

후기 부르주아 세계의 위대한 리얼리스트 작가인 토마스 만(Thomas Mann)은 독일 낭만주의의 전통에, 특히 아이러니 속에 포함된 의미의 번쩍거리는 다양함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만 자신은 아이러니를 '기본적인 본능들의 굴절'로서 기술한 바 있다. (출처 : 에른스트 피셔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