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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좌(獨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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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좌(獨坐)

 

獨坐無來客 독좌무래객 혼자 앉아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空庭雨氣昏 공정우기혼 빈 뜰엔 비 기운만 어둑하구나.

魚搖荷葉動 어요하엽동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鵲踏樹梢翻 작답수초번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琴潤絃猶響 금윤현유향 거문고가 젖었어도 줄에서는 소리가 나고

爐寒火尙存 노한화상존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泥途妨出入 니도방출입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終日可關門 종일가관문 하루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단다.

요점 정리

 

지은이 : 서거정

갈래 : 한시(오언율시)

성격 : 서정적, 묘사적

제재 : 은거하는 삶에서 느끼는 고독

주제 : 은거하는 고독과 시절을 견디는 오롯한(남고 처짐이 없음) 몸가짐

표현 : 공간적 이미를 통해 화자의 내면을 드러내고, 화자가 처한 정치적 현실을 우의적[다른 사물에 빗대서 은연중 어떤 의미를 비춤]으로 표현함.

진흙길

거문고, 불씨

화자가 처한 정치적 현실(장애물)

화자의 존재 가치 확인

내용 연구

 

獨坐無來客 독좌무래객

혼자 앉아[속세의 권세와 거리가 있음 / 고독]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空庭雨氣昏 공정우기혼

빈 뜰엔 비 기운만 어둑하구나[작가의 우울한 내면을 공간적으로 형상화]. - 한적하고 고요한 가운데 느끼는 고독

魚搖荷葉動 어요하엽동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鵲踏樹梢翻 작답수초번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실제 풍경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상황에서 벗어나 변화를 바라는 화자의 심정을 형상화]. - 적막한 가운데 감지되는 미동들

琴潤絃猶響 금윤현유향

거문고가 젖었어도 줄에서는 소리가 나고[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확인]

爐寒火尙存 노한화상존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 무료함을 달램

泥途妨出入 니도방출입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작가 자신의 뜻과는 달리 세상과의 교류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

終日可關門 종일가관문

하루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단다. - 수상한 시절을 견디는 오롯한(원만하다) 자세

이해와 감상

 

출입을 가로막는 진흙길이 상징하듯 불우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문을 닫아 걸고 칩거하는 작가의 고독한 모습을 그린 한시이다. 전체적으로 적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여전히 소리가 나는 거문고와 불씨가 남아 있는 화로라는 상징물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다시금 강조하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심화 자료

서거정

1420(세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달성(達成). 학문이 매우 넓어 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성명(性命)·풍수(風水)에까지 관통하였다.

문장에 일가를 이루고, 특히 시(詩)에 능하였다. 1438년(세종 20)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44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그 뒤 집현전박사·경연사경(經筵司經)이 되고, 1447년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으로 지제교 겸 세자우정자(知製敎兼世子右正字)로 승진하였다.

저술로는 시문집으로 ≪사가집 四佳集≫이 전한다. 공동 찬집으로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경국대전≫·≪연주시격언해 聯珠詩格言解≫가 있고, 개인 저술로서 ≪역대연표≫·≪동인시화 東人詩話≫·≪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필원잡기≫·≪동인시문 東人詩文≫ 등이 있다.

조선 초기 세종에서 성종대까지 문병(文柄)을 장악했던 핵심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학풍과 사상은 이른바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훈신(勳臣)의 입장을 반영하였다.

그의 한문학에 대한 입장은 ≪동문선≫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우리 나라 한문학의 독자성을 내세우면서 우리 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을 편찬했는데, 그의 한문학 자체가 그러한 입장에서 형성되어 자기 개성을 뚜렷이 가졌던 것이다.

또한, 그의 역사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는 ≪삼국사절요≫·≪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에 실린 그의 서문과 ≪필원잡기≫에 실린 내용이다. ≪삼국사절요≫의 서문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세력이 서로 대등하다는 이른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서는 우리 나라가 단군(檀君)이 조국(肇國 : 처음 나라를 세움)하고, 기자(箕子)가 수봉(受封 : 봉토를 받음)한 이래로 삼국·고려시대에 넓은 강역을 차지했음을 자랑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러한 영토에 대한 자부심과 역사 전통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의 ≪방여승람 方輿勝覽≫이나 ≪대명일통지 大明一統志≫와 맞먹는 우리 나라 독자적 지리지로서 편찬된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주동해 편찬된 사서·지리지·문학서 등은 전반적으로 왕명에 따라 사림 인사의 참여 하에 개찬되었다. 이렇듯 많은 문화적 업적을 남겼지만, 성종이나 사림들과 전적으로 투합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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