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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와 긍정 / 최인호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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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 타인의 방

 

도피와 긍정 / 이동하

 

지금 활약중인 현역 작가들 가운데서 최인호는 가장 많은 풍문을 몰고 다니는 인물로 꼽힐 수 있다. 1972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 「별들의 고향」에 의하여 화려한 인기의 초점으로 부상한 이래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시끄러운 풍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한편에는 그를 맹목적으로 우상시하는 독자 대중들의 열광, 도 한편에는 그를 타락한 상업주의의 권화로 규정하는 도덕주의자들의 비난-이처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두 가지 평가가 엇갈리며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서 최인호의 문학은 부피를 더하고 무게를 늘려온 것이다.

 

최인호를 둘러싼 풍문의 볼륨이 크게 요란했던 것과 나란히, 그의 문학에 대한 비평적 접근도 심심찮게 행해져 왔다. 그 대부분은 최인호의 문학 전반이 지닌 특징을 현대사회의 소외현상에 대한 비판으로 파악하면서 다분히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되 부분적으로 결함을 지적하는 경향을 띠었는데, 지금에 와서 냉정하게 검토해 보면, 이들 평문 자체가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같다. 최인호를 옹호한 평론가들이 그의 문학이 지닌 가치를 소외문제와 결부시켜 파악한 것 자체는 탁월한 관찰이며 후인들에게 많은 깨우침을 준 셈이지만 동시에 그들 중 대부분은 최인호에 대한 부정적인 풍문-그를 <더러운> 상업주의의 화신으로 낙인찍어 규탄하는 태도-과의 대결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객관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 무리한 입론으로까지 비약해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별들의 고향」을 남성 위주의 사회체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의 소산으로 이해한다든가 <이 세계가 타락한 상업주의의 구조라면 그의 문학 또한 운명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주장을 내세우는 따위가 그런 것인데, 이러한 논리는 그다지 설득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최인호의 문학이 가진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거기에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얼마든지 바람직하고 또 필요한 일이지만 「별들의 고향」과 같은 작품까지 체제비판적인 정신의 소산으로 보아서 옹호하려고 드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며 도 작가에 대한 애정의 정당한 발로라고 판단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이런 작품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비판을 가하고 그것이 지닌 부정적 성격을 적발하는 태도가 필요하며 작가에 대한 애정도 그런 경우에 차라리 더 진실하게 살아날 것이다. 또한 이 작가의 문학이 부분적으로 내보이고 있는 <타락한 상업주의>의 흔적으로 <이 세계의 탓>으로 돌리는 논리는 최인호와 동일한 세계에 살면서도 타락한 상업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작가가 단 한사람이라도 존재하고 있는 한 성립의 근거 자체를 상실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작가를 부정적인 풍문으로부터 지켜주려는 노력이 지나쳐서 설득력의 감손이라는 결과를 낳고 만 글들과 달리 최인호의 문학세계를 냉철하고 정확하게 분석한 평론으로서는 김현의 업적이 특히 두드러진다. 최인호의 작품을 다룬 그의 글로서 필자가 지금껏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세 편 (「초월과 고문」「재능과 성실성」「보기 흉한 제스처」)인데, 대부분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의 글은 1977년에 씌어진 것이 마지막이므로, 상당한 분량의 보충적 논의가 불가피하다. 1977년 이후에도 최인호는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계속해왔으며  그 가운데는 적지 않은 문제작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최인호의 문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매력적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냉정한 분석을 방해하고 독자들의 감수성에 맹렬한 기세로 달려드는 현란한 원색의 매력으로 충만해 있다. 그는 현대도시인의 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성감대를 찾아내고 그것을 교묘하게 자극하는 데 실로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과장된 수사, 팽팽한 속도감, 관능적인 분위기, 생동하는 문체, 흥미 만점의 구성, 우상 파괴적인 제스처 ― 어느 하나도 오늘날의 대중에게 어필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의 문학이 다수의 일반 독자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가장 애호받는 인기 품목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최인호의 문학이 지닌 매력의 밑바닥에 숨겨져 있는, 좀더 깊은 본질은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을 앞에 대했을 때 우리가 첫 번째로 눈길을 돌려야 하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무서운 복수(複數)」일 것이다. 최인호의 초기작 가운데서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중편은 학생 데모라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다.

 

최준호라는 이름-이것은 작가 자신의 별칭임이 명백하다-를 가진 이 작품의 주인공은 군에서 재대한 후 복학하여 소설을 쓰고 있는 인물로서 대학에 입학한 지 구년이나 되었는데도 졸업을 못 했다는 사실 때문에 깊은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다. 그는 교련 반대 시위로 대학가가 온통 들끓는 가운데서 지도급 학생의 한 사람인 오만준과 색다른 우정을 키우지만 스스로 데모에 참가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가 매달리고 있는 것은 「황진이」라는 소설을 쓰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소설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다.

 

대충 이러한 줄거리를 갖고 있는 작품 「무서운 복수」에서 일차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공 최준호의 태도이다. 그는 <나는 무슨 일이든 할 때마다 최악의 경우만을 상정하고 그리고 그런 경우에만 자신을 맡겨버리는 버릇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라는 고백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고통을 강요하는 사회의 온갖 모순과 혼돈 앞에서 가능한 한 직접적인 대결의 자세를 취하지 않고 도피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그는 자기 세대 전체의 동통된 문제점으로 파악하여 <우리 세대는 사실 그 한창 자라나야 할 나이에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으므로> <무슨 일에든 깜짝깜짝 놀라고, 소심하고, 자로 재고 무게를 달고 틀림이 없어도 일단 다시 한번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엄정한 자기 비판으로 성립되지 못한다. 그 세대에 속하는 사람이면서 소심하지 않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지 않는 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실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논리상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최준호의 자기 분석은 독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는데 그것은 적어도 그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거짓으로 분식(粉飾)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자기 반성과 정직성의 미덕을 결여한 영웅주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이처럼 솔직한 고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한 인상적인 경험이다.

 

그러면, 「문서운 복수」가 최인호 문학의 성격에 대한 해명을 위해 더없이 유리한 출발점을 제공해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최인호가 고백하고 있는 소심증과 도피욕구가 최인호의 초기소설에 나타난 몇 가지 특징들을 해명하는 데 매우 유효한 단서가 되어준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참고로 필자 자신이 근 십 년 전에 쓴 「사회의식과 문학정신」이라는 글 가운데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 보기로 한다.

 

최준호는 사회구조의 모순과 비리를 예민하게 통찰하고 있으며 삶의 근원적인 고통에 대해서도 진지한 성찰을 가할 줄 아는 의식인이다. 그는 학생들의 데모가 짓눌린 아픔과 소외의식의 발현임을 잘 알고 진정한 용기에 대하여 괴로운 모색을 거듭하지만 데모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한편 그는 자기 보호본능에 투철하고 <교묘한 화술로 문제의 핵심을 회피>해 버리는 데 익숙한 소시민이며 「황진이」라는 소설에 달라붙음으로써 자기와 세계 사이의 상극을 해소시켜 보려 한다.

최준호에 대한 이상의 설명은 작가 최인호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 같다. 작가 최인호는 명민한 의식인이다. 그는 산업화되어 가는 오늘의 세계가 인간을 자기 스스로에게서 소외시키고(「타인의 방」), 일상성의 권태 속에서 질식하게 만들며(「식인종」), 윤리적 규준은 말할 수 없이 흐트러져 있고(「침묵의 소리」), 편견과 무지의 보편화로 비인간적인 폭력의 군리를 주장하는가 하면(「미개인」), 진실에 기초한 개인의 항변은 한없이 무력하다(「조서」)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대신 <교묘한 화술>을 구사하여 도피처를 찾으려고만 한다. 「무서운 복수」의 한 구절을 빌린다면 <따스한, 그러나 머나먼 곳, 기억이 캄캄한 곳>에 대한 동경이 그를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기억이 캄캄한 곳>으로 향한 그의 욕구를 구체화하는 방법은 잘 얄려진 대로 관능과 파행(跛行)이다.

 

<그 때 나는 누군가 어두운 그림자가 내 몸을 어루만지고 바지 단추를 끄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무거운 눈을 뜨고 바라보니 그는 바로 이문수였다. 눈이 마주치자 소년은 입으로 손을 갖다대며 조용히 하라고 무어라고 변명하지 않아도 내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꿈쩍거리더니 마땅한 장소를 골라 기쁜 것처럼 조그맣게 신음소리를 발했다.>

 

남색을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은 「예행연습」의 결미를 이루는 대목으로서 최인호적 관능의 본질을 보여주는 전형적 장면이다. 이틀에 걸친 괴상한 예행연습이 헛수고로 돌아갔을 때 세계의 기묘한 허식은 가장 추악하고 저열한 모습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예리한 의식이 날카롭게 눈을 치떠야 할 순간이다. 바로 이런 순간에 난데없는 관능이 개입하여 세계의 부조리를 슬쩍 무마해 버리고 관심의 방향을 딴 데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어쩌면 지나치게 가혹한, 평정을 잃은 비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를 들어 실재하지도 않는 아버지를 찾아다니며 어른 뺨치게 술을 마셔대는 이상한 고아를 이야기한 「술꾼」이나 학교 앞의 야바위꾼을 골탕먹인 끝에 죽게 만드는 아이의 이야기인 「모범동화」, 술집에서 만난 처녀를 유인하여 몸을 빼앗고 돈까지 훔쳐 달아나는 젊은 형제를 그린 「침묵의 소리」 등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나는 파괴적 행위라든가 「예행연습」에 표출된 관능, 「황진이」 연작을 지배하고 있는 과장된 색정 따위를 볼 때, 이것은 세계를 항시 어렵게, 소심하게 대하면서 최악의 경우만을 상정해 온 정신이 그처럼 나약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반발로 일부러 취한 비정상적인, 그러나 여전히 현실의 핵심으로부터는 명백하게 도피적인 반응이 아닐까라는 느낌이 짙게 전달되어 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얼른 보기엔 최준호의 소심한 도피 성향과 「침묵의 소리」의 파괴적 행위가 정반대의 자리에 서는 것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의 관계로 결부되어 있다는 얘기이다. 이들 양자는 김현이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이상적 세계관이나 구속 없는 삶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린 자의 허무한 생존방식>이라는 공통점을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최인호의 첫 번째 단편집인 『타인의 방』은 바로 이러한 허무의 감각에 의하여 강렬하게 지배당하고 있는 셈인데, 그것은 지극히 병적인 성격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 신흘 개발단지 주민들의 집단적인 광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상이군인 출신의 국민학교 교사를 등장시켜 양심과 평등의 문제를 이야기한 작품 「미개인」과 같은 몇몇 회유한 예외를 제하면 최인호의 초기작들은 하나같이 병적인 도피의 인상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여기서 최인호를 일약 대중의 스타로 밀어올린 작품 「별들의 고향」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 글의 서두에서 잠깐 이야기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을 남성 중심으로 되어 있는 체제 속에서의 여성의 지위라는 문제와 결부시켜 일종의 사회비판적인 작품으로 해독하고자 한 노력이 없지 않았거니와,  그러한 견해에 대하여 필자는 상당한 회의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 전체를 시종일관 둘러싸고 있는 달콤하면서도 감상적인 분위기, 성적 방종을 추구하는 세태에 민감하게 영합하면서 <성처녀>니 뭐니 하는 말로써 그것을 미화시키는 태도, 철저히 수동적인 자세로 운명에 패배해 가는 주인공 오경아의 나약한 성격, 화자인 김문오의 니힐리스틱한 인간상 따위를 볼 때 필자로서는 차라리 이 작품이 종래의 신파극에 새로 산뜻한 페인트칠을 해 입힌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을 지경이다. 왜 작가는 그간 열성적으로 가꾸어오던 저 밀도 있는 중·단편의 세계에서 불쑥 이런 곳으로 뛰어나왔을까? 이것은 일견 어려운 물음 같지만, 그의 중·단편의 세계가 <이상적 세계관이나 구속 없는 삶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린 자의 허무한 생존방식>을 기조음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뜻밖에도 의문은 쉽게 풀린다. 이 작품 역시 넓게 보면 최인호의 초기 중·단편들을 지배하고 있던 병적인 도피의 세계, 과장된 관능의 세계를 그대로 연장시킨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대개의 인간은, 언제까지나 병적인 세계에 갇혀서만은 살지 못한다. 최인호 역시 언제까지나 그늘진 관능과 파행의 세계에 머무를 수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술꾼」이나 「모범동화」,「처세술개론」같은 <괴상한 아이들 이야기>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면서도 가슴속 한 구석에서는 은연중 건강한 세계에의 꿈을 키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꿈을 현실화시켜 햇빛 아래 드러내본 최초의 작품이 장편 『내 마음의 풍차』이다. 그것은 「술꾼」,「모범동화」,「처세술개론」의 괴상한 아이들이 그 괴상함의 탈을 벗고 건강한 영혼의 소유자로 변신해 가는 과정을 적은 이야기다.

 

위에서 필자는 최인호의 문학이 지닌 강렬한 매력에 대하여 잠깐 언급한 바가 있지만, 그러한 매력을 최고도로 살린 작품 가운데 하나가 이 『내 마음의 풍차』일 것이다. 예문관에서 나온 단행본 『내 마음의 풍차』에 해설을 쓴 김병익은 이 작품을 처음 통독했을 때 느낀 해일과도 같은 감격을 고백함으로써 그의 글을 시작하고 있거니와 필자 역시 이 소설을 단숨에 읽고 나서 온몸이 빨려드는 듯한 흥분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다. 천하의 개망나니 악동인 영후와 그의 배다른 동생이며 치매에 가까운 아이인 영민이 서로 갈등하는 가운데서 차츰 변증법적인 지양의 과정을 밟고 드디어는 두 사람 모두 건강한 인간으로 새롭게 탄생한다는 내용을 담은 이 작품은 그냥 소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최인호는 이 작품에다 그가 지닌 역량의 전부를 투입하여 한 편의 찬란한 서정시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몇 줄의 언어가 얼마나 화려한 광채를 담고 빛나는가를 보라.

 

내가 부는 젊은 날의 한 가닥 휘파람소리가 허공을 날아가 흩어져 그러다가는 또다시 내 가슴속에 날아와 틀어박혀서 보석처럼 반짝이듯이 그 새들은, 동생이 부순 도시들은 내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을지 모른다.

 

불어가는 바람이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내 마음속의 조그마한 풍차를 세차게 움직일 거야. 그리하여 풍요한 곡식을 찧고 있겠지.

 

내가 만드는 허위, 거짓말, 뻔뻔스러움 모두를 풍차 속에 집어 넣어 보석처럼 찬연한 곡식을 만들어내고 있을 거야. 그것이 있는 한 나는 외롭지 않다.

 

그러나 최초의 감격과 흥분이 진정되고 난 다음, 독자들은 마음속에서 차츰차츰 자라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후 형제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인간>의 정체가 문제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동경하며 마땅한, 순결한 생명을 넘치게 담고 있는 <침인간>인가? 아니면 그냥 기성 질서가 요구하는 바에 맞춘 이른바 <정상적 인간>의 표준형에 불과한 것인가?

 

일찍이 소설가 박태순은 제임스 딘이 주연했던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대한 감상문을 쓰면서 이 작품의 결말이 기성 질서와의 안이한 화해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었다. 최인호의 주인공들이 도달한 경지라는 것도 결국은 「이유없는 반항」의 결론과 대차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우리에게는 남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하여 우리 나름의 해답을 찾는 작업은 나중에 가서 시도하기로 하자. 여기서는 우선 다른 사실을 한 가지 언급해야 하겠다. 『내 마음의 풍차』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때까지 최인호가 전개해 온 문학세계를 잘 알고 있었던 독자들은, 대부분 그 작품을 하나의 일시적인 해프닝으로 여겼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내 마음의 풍차』 이전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회색 일변도의 칙칙한 빛깔로 칠해져 있었돈 판에, 이런 엉뚱한 소설이 난데없이 툭 튀어나왔으니, 그것이 어떤 지속성을 가지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인호는 이러한 일반의 생각을 간단히 뒤집어엎었다. 그 이후 최인호는, 비록 『내 마음의 풍차』에서처럼 순수하고 강렬한, 흡사 여름 아침녘 팔방으로 뻗어가는 햇살과도 같은 건강성을 다시 과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화해의 언어, 극복의 언어, 긍정의 언어를 말하고자 노력해 온 것이다. 『내 마음의 풍차』를 기점으로 해서 그는 뒤틀린 관능과 파괴적 충동의 세계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러고는 어쨌든 간에 세상에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거기엔 고통도 많고 눈물 흘려야 할 일도 숱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사랑과 각성에 의하여 화해의 경지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그 가치 여하는 둘째로 치더라도 하여간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아야 할 중대한 변화임엔 틀림없다.

 

어머니는 맑은 미소를 띈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그 누구의 부축을 받지 않고 천천히 발을 떼어놓았다. 아니다. 그건 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보다 큰 손, 보다 위대한 힘에 의해 떠받들리고 부축을 받고 있다. (중략)

그러나 어머니는 세 발짝도 걸음을 떼놓지 못하셨다. 풀썩 하고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곁으로 다가설 수 없었다. 북받쳐오르는 슬픔이 눈물이 되어 내 얼굴에 흘러내리고 내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비애로 찢어지고 있었다. 나는 흐느껴 울면서 소리질렀다.

「어머니 일어서세요. 그리고 제 곁으로 오세요. 썩어져 죽을, 저 산까지 걸어가세요. 일어서세요. 어머니는 할 수 있어요」

-「방생」에서

문득 떠나기 전 S연맹 구내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 드릴 때 부르던 찬송가의 구절이 거짓말처럼 분명하게 기억되었다. 나는 중얼거려 보았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의 크신 사랑 안에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서로 만날 때 다시 만날 그때까지 주님 함께 계심 바라네」

아멘.

밑도끝도 없는 단어 하나를 나는 웅얼거렸다.

-「다시 만날 때까지」에서

이러한 결말로 끝나는 소설이 우울한 절망, 추악한 파괴 욕구, 비틀린 관능으로 채워져 있을 수는 없다. 거기에는 비록 『내 마음의 풍차』처럼 화려한 불꽃으로 빛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분명히 뿌리칠 수 없는 인간에의 신뢰, 사랑에의 신뢰, 화해에의 신뢰가 잔잔한 음악처럼 흐르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 비전은 「방생」이나 「다시 만날 때까지」를 제외한 다른 많은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탕아 돌아오다>의 주제를 우화적인 수법으로 활용하여 독특한 매력을 빚어내고 있는 「두레박을 올려라」나 <최초의 인간>이 탄생하기까지의 전사(前史)를 펼쳐 보인 「진혼곡(鎭魂曲)」, 노인들 사이의 훈훈한 사랑을 정감 있게 그려낸 「천상(天上)의 계곡」, 가난하고 거친 밑바닥 가저에서 일어난 부자 간의 아름다운 사건을 이야기한 「위대한 유산」등의 작품에서도 희마의 빛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흘러나온다. 심지어는 보다 심각하고 어두운 테마를 담은 것으로 보이는 「돌의 초상」이나 「깊고 푸른 밤」에서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읽게 되는 것은 소박한 화해와 긍정의 언어이다.

 

그제서야 헤어질 무렵 내게 손을 내밀던 노인의 그 천진스런 웃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용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돌의 침묵으로 내밀던 노인의 딱딱하고 굳은 그 손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노라는 의미의 손짓이 아니었을까.

--「돌의 초상」에서

 

이제는 원한도, 증오도, 적의도, 미움도, 아무것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는 딱딱한 바위의 표면 위에 입을 맞추며 그를 굴복시킨 모든 승리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깊고 푸른 밤」에서

 

「돌의 초상」은 버려진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냉혹한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고자 한 것이고 「깊고 푸른 밤」은 <터질 듯한 분노 이상의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가슴을 가진 두 젊은이-가수인 준호와 소설가인 <그>-가 미국 땅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최인호 이외의 다른 작가가 이런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썼더라면 거기에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영원히 화해될 수 없는 투쟁이 살벌한 언어로 펼쳐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인호는 결코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아무리 참담한 분위기 가운데 이야기를 시작하더라도 그는 꼭 거기서 소박한 긍정과 수락의 언어를 끌어내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최인호의 초기 세계를 특징지었던 저 <섬뜩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최인호의 초기 문학이 갖고 있었던 병적인 특징을 장편의 세계에서 확대 재생산해 놓은 것이 「별들의 고향」이었다면, 『내 마음의 풍차』 이후 그의 문학이 새로이 획득하게 된 화해와 희망의 비전을 장편으로 환치시킴으로써 얻게 된 대표적 결실은 「도시의 사냥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랑의 힘과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며 그 결말은 「별들의 고향」과는 정반대로 행복한 승리에 의하여 마무리되고 있다. 오생근이 지적한 대로 「도시의 사냥꾼」은 후반부에 이르러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결함을 갖고 있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별들의 고향」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넉넉히 읽힐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내 마음의 풍차』를 발표한 이래로 최인호가 줄기차게 그려온 것이 소박한 화해와 긍정의 세계라고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문제는 우리가 앞으로 던져놓기만 하고 해답을 미루어 두었던 질문--『내 마음의 풍차』에서 이야기된 두 젊은이의 <거듭남>이라는 결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라는 질문의 연장선 위에 곧바로 놓이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 연속성을 의식하면서 일단 『내 마음의 풍차』로 돌아가 그 소설의 결말 부분을 정독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끝까지 애매한 상태로 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영후 형제가 건강을 회복하였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 건강이 참생명의 획득인가 아니면 범속성에로의 복귀인가라는 문제는 끝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소설은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이러한 애매성이 잔존함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의 풍차』가 던져주는 감동의 힘이 훼손되지 않는 것은 그 작품이 팽팽한 <출발의 긴장>을 가득 담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출발의 지점에서 모든 것이 다 말해질 수는 없다.--라는 것을 모든 독자들은 암묵리에 승인학소 있으며 따라서 작가가 남겨놓은 애매성의 공간을 전혀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최인호의 문학에서 특별히 흥미로운 사실은 『내 마음의 풍차』이후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계속 그러한 애매성이 견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그의 카드를 아직도 숨겨쥔 채로 있는 것이다. 「다시 만날 때까지」의 마지막에 기록된 기도의 말이 과연 어떤 차원에 놓이는 것인지, 「진혼곡」에서 말하는 <최초의 인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 것인지, 「깊고 푸른 밤」에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외치는 준호의 절규가 얼마만한 고뇌와 깊이를 감춘 것인지…… 작가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접힌 손바닥 안에 비장의 카드를 은닉한 채로 그는 다만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다.

최인호의 후기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이러한 애매성 가운데에는 확실히 어떤 아름다움이 있고, 또 사랑할 만한 점이 있다. 그것은 독자의 상상력을 움직여 작품 내의 공간에 참여케 하고, 때로 삶이란 이렇게 찬란할 수가 있구나라는 감동에 젖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최인호 문학의 이 같은 아름다움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총체적 관찰의 배제 내지 경시라는 대가를 지불하고서 비로소 얻은 것임을 간과하지 못한다. 「진혼곡」이나 「두레박을 올려라」처럼 아예 환상적인 우화의 성격을 진하게 띤 작품이나 「방생」,「천상의 계곡」 따위처럼 안정된 소시민의 가정이라는 좁은 울타리 내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작품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직접 사회의 현실에서 제재를 구해 온 작품조차도 자세히 보면 진한 주관성의 개입에 의하여 색칠되어 버림으로써 현실 자체에 대한 심층적 탐구라는 과제에서 이탈하여 시적 상태로 접근하고 있음이 밝혀지는 것이다. 매스컴에 의한 무형적인 폭력의 행사라는 문제를 다룬 「가면 무도회」를 비롯하여 「돌의 초상」「다시 만날 때까지」 등 어떤 작품을 보아도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소설의 본령을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비판에서 찾고자 하는 많은 평자들이 최인호의 작품에 대하여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주로 이런 데서 연유한다고 하겠는데, 필자 자신도 이 점에서는 최인호의 문학에 대하여 한 가닥 아쉬움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생근이 「도시의 사냥꾼」을 논하는 자리에서 적어둔 다음과 같은 비판의 말은 이러한 점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음미할 가치가 있다.

 

이 소설의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의 일상인들이 겪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오직 사랑의 문제에만 사로잡혀 있어, 환상적인 사랑을 구가하는 것처럼, 그리고 사랑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그려져 있는데, 사실상 사랑의 가치는 삶의 어려운 문제와 부딪쳐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도시의 사냥꾼」이 지닌 특징에 대한 지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내 마음의 풍차」 이후에 나온 최인호의 작품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도 적용될 만한 요소가 없지 않은 것이다.

 

최인호는 1984년이면 우리 나이로 사십 세가 된다. 이십대의 절은 시절에 청년문화의 깃대잡이로 떠올랐고 삼십대에 이르러서도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다수의 가작을 써 던졌던 이 동안(童顔)의 작가가 드디어 불혹의 고비를 눈앞에 맞게 된 것이다. 다 큰 아이들을 거느린 사십대의 중년신사로서 그는 과연 어떠한 작품세계를 펼쳐 보일 것인가? 많은 독자들은 넘치는 호기심과 적지 않은 기대, 참다운 애정으로 눈망울을 빛내면서 이 <작가 스타>의 내일을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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