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 외국소설 / 앞부분과 요점 정리 / 서머셋 모옴
by 송화은율달과 6펜스 / 윌리엄 서머셋 모옴
1.
솔직히 말해서 찰스 스트릭랜드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무슨 뛰어난 점이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위대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출세한 정치가나 성공한 군인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위대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물 그 자체에서 나오는 위대함이라기보다 그가 차지하는 지위에서 비롯되는 위대함이다. 그러므로 상황이 바뀌면 그런 위대함은 금방 대단치 않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는 관직에서 물러난 재상이 거드름 피우는 수다쟁이에 지나지 않고, 퇴역장군이 작은 고장의 평범한 노인으로 바뀌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진정한 위대함이다.
그의 예술에 대해서 별로 호감을 갖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흥미를 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매혹시키기 때문이다. 그를 비웃건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또한 그를 변호하고 칭찬하는 사람을 괴팍한 성격이라며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오히려 그의 많은 결점조차도 그의 장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예술가로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아직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며,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아첨이나 그를 헐뜯는 사람들의 비방이 모두 그때의 기분에 의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천재였다는 점이다. 예술에 있어 가장 흥미로운 것은 예술가 자신의 개성이며, 그 개성만 특이하다면 그 밖의 모든 결점은 기꺼이 옹호해주겠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벨라스케스가 엘 그레코보다 훌륭한 화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한 찬사는 이제 낡고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반면에 관능적이고 비극적인 크레타인(엘 그레코)은 마치 우뚝 솟은 제물(祭物)인 양 자신의 마음속의 신비를 보여 준다, 화가나 시인, 혹은 음악가를 막론하고 예술가란 누구나 자신의 작품에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장식을 하여 우리의 심미감을 만족시켜 준다. 그런데 그 심미감이 묘하게도 성본능(性本能)과도 같이 야릇한 원시성을 띠고 있으며, 예술가는 이것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있는 그대로 모두 보여 주는 사람이다. 그들의 비밀을 추적하는 일은 추리소설과 같은 매력이 있다. 아니 이 우주와 같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고도 할 수 있다.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가장 보잘것없는 것조차 그의 독특하고 복잡하며 고뇌에 찬 개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이 점에는 무관심할 수 없도록 만든다. 이러한 점이 바로 그의 생애와 성격에 대해 깊은 흥미를 느끼게 하는 이유이다.
스트릭랜드가 세상을 떠난 4년 후에, 모리스 위레는 <메르퀴르드 프랑스>지에 글을 발표했다. 바로 이 글 때문에 무명화가는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비운을 간신히 모면했을 뿐 아니라, 그 휴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몇몇 작가들이 게승한 이 화가에 대한 관심도 또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모리스 위레만큼 오랫동안 확고부동한 권위를 누린 평론가는 없었으므로, 그의 학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위레의 학설은 처음에는 좀 지나친 과장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 후의 평가들이 모두 위레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찰스 스트릭랜드의 명성은 위레가 주장했던 토대 위에 확고한 낭만적인 사실 중 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스트릭랜드의 인격에 영향을 준 것 이외에 그의 작품에 대해선 일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화가들은 문외한이 그림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마음에 들면 조용히 수표책을 꺼내는 것이 그의 감상력을 잘 드러내 준 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오만스러운 주장에는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예술을 전문가만이 완전히 알 수 있는 기술적인 면밖에 보지 않는 터무니없는 오해이다. 예술은 정서의 표현이고, 정서란 모든 사람들에게 통하는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의 기교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비평가의 입장에서 작품의 기교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이 비평가의 입장에서 작품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러한 모험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뛰어난 화가이며 능력 있는 내 친구 에드워드 레가트가 《현대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작품 세계》라는 그의 저서에서 스트릭랜드의 작품에 대해 빈틈 없이 논평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문체는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을 정도이다. h 다행스럽게도 문체는 영국보다는 프랑스에서 더 발달했다.
모리스 위레가 그 유명한 논문에서 간략하게 써놓은 스트릭랜드의 생애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예술에 대한 사심 없는 정열을 가지고 있던 그의 진정한 목적은 매우 독창적인 이 천재에 대해 세상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었으나, 원래 지나칠 만큼 날카로운 저널리스트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던 그의 ‘인간적 흥미’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달성시키는 데 더 유리하리라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스트릭랜드와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 예를 들면 런던에서 그와 알고 지내던 작가들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그와 사귀던 화가 등의 사람들은 자기들과 어깨를 맞대며 지냈던 사람이 진짜 천재로 밝혀지자 깜짝 놀랐다. 그 후 프랑스나 미국의 신문. 잡지 등에 스트릭랜드에 대한 회상기나 감상론 같은 기사가 잇따라 게재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국 스트릭랜드의 평판을 높이는 동시에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도 크게 디여했다. 바이트 브레히트 로트홀츠 같은 사람은 그의 논문에서 스트릭랜드에 관한 글을 쓴 여러 권위자들의 명단을 수록해 놓았다.
인간에겐 천성적으로 신화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다. 조금이라도 비범한 인간이 나타나기만 하면 곧 이 본능이 작용하여 그 인간의 생애에 대한 신비스럽고 색다른 사건들을 탐욕스럽게 찾아내어 그것을 전설로 꾸미고, 다시 그것에 광신적인 믿음을 부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대수롭지 않는 일상생활에 대한 로맨틱한 반발인 셈이다. 전설상의 사건 하나하나가 그 주인공을 영구불멸의 나라로 보내 주는 가장 믿음직한 패스포드가 되는 것이다. 가령 익살맞은 사색가라면 미소를 머금고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윌터 롤리 경의 이름이 인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유도 미지의 여러 나라에 영국이라는 이름을 알렸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가 밟고 걸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망토를 땅에 깔았다는 일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스 스트릭랜드는 불행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친구보다는 적을 더 많이 만든 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관한 회상기를 썼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회상을 공상력으로 보충했다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그에 관해 세상에 알려져 있는 사실들이 많지 않지만, 낭만적인 저술가들에게는 결코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쓸거리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 이상하고 끔찍한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의 성격에도 다소 난폭한 점들이 있었고, 그의 운명에도 연민을 느낄 만한 일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사정으로 인해 당연한 과정을 거쳐 일련의 전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각 있는 역사가라도 함부로 공격하기가 망설여지는 성질의 전설이다.
그런데 바로 그의 아들인 로버트 스트릭랜드 목사야말로 그리 지각 있는 역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의 만년에 대하여, ‘현재 유포되고 있는 어떤 오해를 풀기 위한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며 그의 전기를 썼던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세상에 퍼진 스트릭랜드에 관한 이야기 가운데는 점잖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점도 많았다. 나는 상당한 흥미를 가지고 그 전기를 읽었으나 그 내용이 별 의미 없는 우둔한 관찰이라 느끼고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스트릭랜드 목사는 이 책에서 자기 아버지를 자살하고 근면성실하며 온후한 성품을 지닌 아버지이며 남편으로 그려 놓은 것이다. 이른바 성경 해석학이라는 학문을 재주가 있었다. 효도를 하느라고 그랬겠지만. 아버지의 일생 중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사건을 그럴 듯하게 해석해 내는 수완은 실로 경탄할 만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장차 어느 시기가 오면 성공회의 중요한 자리 하나쯤 차지하기에 어려운 점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벌써부터 높은 성직자들이 다리에 차는 그 각반을 장딴지에 꽉 졸라맨 그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이 책은 그로서는 한 가지 훌륭한 업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일종의 모험적인 일이기도 했다. 세상에 퍼진 여러 가지 ‘전설’들이 스트릭랜드의 명성을 높이는 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스트릭랜드의 괴팍한 성격이나 그의 죽음에 대한 측은함에 이끌려 그의 예술에 매혹을 나온 이 노력은 오히려 그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사람들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말았다.
실제로 스트릭랜드의 전기 출판에 따른 논쟁이 한바탕 전개된 뒤에,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사마리아의 여인>(냇가에 누워 있는 소사이어티 군도의 한 원주민 여자의 나체화, 야자와 바나나 등의 열대 식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는 60인치×48인치)이 크리스티화상(畵商)에게 팔려갈 때에는 그보다 아홉 달 전에 어느 저명한 수집가 ㅡ 이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이 그림은 다시 경매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ㅡ 의 손에 들어갔을 때보다 2백35파운드 정도 값이 떨어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마침 훌륭한 신화를 만들어 내는 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화에 실망을 안길 만한 이야기를 모두 말살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찰스 스트릭랜드의 역량과 독창성이 뛰어났다 하더라도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에는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다행이 얼마 안 가서 바이트 브레히트 로트홀츠 박사의 공들인 작품이 나타나서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걱정을 없애주었다. 로트홀츠 박사는, 인간성이란 더할 수 없이 추악한 것이 속하는 역사가이다. 실상 독자들은 소설의 중요인물을 반드시 가정과 도덕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심술궂게 생각하고 있는 작자들의 작품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사람들의 작품을 더 재미있어했다. 나 역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사리에 경제적인 유대밖에 존재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으며, 현재 알려져 있는 것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다행스럽게도 없지만) 티베리우스 황제가 조지 5세 같은 완벽한 군주였다고는 믿을 수가 없다. 로트홀츠 박사는 이러한 입장에서 스트릭랜드 목사의 죄 없는 전기를 다뤄, 그 결과 이 불우한 목사에게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로트홀츠 박사는 목사가 어떤 문제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지나가는 것을 위선이라고 몰아붙이고, 완곡하게 표현하게 표현한 것은 거짓으로 규정하고, 어떤 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독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혹평하였다. 이 대수로울 것 없는 허물이 문필가로서는 비난당하더라도 자식된 도리로서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앵글로 색슨 민족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점잖은 체하며 사람을 속이려들고, 허풍을 떨며 교활하게 우쭐거리고, 심지어는 맛없는 요리에 대해서까지도.
내 개인적으로 스트릭랜드 목사가 경솔했다고 생각되는 점은, 자기 부모의 불화설ㅡ이미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ㅡ까지도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찰스 스트릭랜드가 파리에서 보낸 어느 편지에서 자기 아내를 ‘훌륭한 여인‘이라고 말했다고 했는데, 로트홀츠 박사는 그 편지를 그대로 복사하여 공개하였다. 문제의 구절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내에 대해서는 말하기조차 싫네. 어쨌든 훌륭한 여자지. 지옥에나 가버렸으면 좋겠어.”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는 교회라도 자기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이렇게 마구 다루는 예는 없었을 것이다.
로트홀츠 박사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려한 찬미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를 훌륭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그가 지닌 인간적인 약점들을 덮어 두는 일은 하지 않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 가운데 비난받을 만한 비열한 동기가 숨겨져 있음을 그는 놓치지 않고 꿰뚫어보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술 연구가인 동시에 정신 병리학자였으므로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사실조차도 그에게는 비밀이 될 수 없었다. 어떠한 신비가도 일상적인 신변잡기에서 그만큼 깊은 의미를 찾아 내지 는 못했다. 신비가는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범위의 것을 보는 반면에, 정신 병리학자는 입에 담으려 해도 차마 담을 수 없는 사실을 안다.
주인공의 인기에 손상을 줄 만한 사정까지도 샅샅이 찾아내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 박식한 저자의 집요한 태도에는 독특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는 주인공의 비열한 면, 잔인한 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낼 때마다 오히려 가슴 뿌듯해지는 진한 애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 한 예로 그는 로버트 스트릭랜드 목사의 효도를 뒤집어엎어 놓을 때마다 화형에 처해지는 이단자를 보는 조요 재판관인 양 매우 기뻐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부지런해서, 아무리 사소한 사건이라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가령 찰스 스트릭랜드가 세탁소의 청구서 한 장이라도 지불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있었다면 이를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 있었다면 이를 빠뜨리지 않고 상세히 인용·기록하였고, 또한 반(半) 크라운의 은전 한 닢이라도 빌려 쓰고 갚지 않은 일이 있었다면 그 자초지종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충실하게 기록하였을 것이다.
2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니, 내가 새삼스럽게 더 이상 드레 대해 언급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화가를 평가하는 데는 그림 이상의 것이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스트릭랜드란 인간에 대해서 나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나는 자부한다. 나는 그가 화가가 되기 전부터 그와 사귀었고, 그가 파리에서 어려운 나날을 보낼 당시에도 자주 만났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내가 타히티 섬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에 관한 회상기를 써볼까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타히티 섬에서 만년을 보냈고. 바로 거기서 보니 그의 비극적인 일생 중에서 아직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라는 생각이 든다. 스트릭랜드가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는 사람들의 견해가 옳다면, 그를 직접적으로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의 사적인 회고담이 전혀 무의미한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나와 스트릭랜드가 친했던 만큼 엘 그레코와 친했던 사람이 그에 관한 회상기를 썼다면 우리는 그를 위해서 보수를 아끼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구태여 이런 변명이나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사람은 정신수양을 위해 매일 두 가지씩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 적이 있다. 매우 현명한 말이므로 나는 그 교훈을 충실하게 지켜오고 있다. 그것은 결국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잠을 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성격적으로 다소 금욕적인 경향이 있어서 육체에 심한 고행을 가하곤 했다. 나는 여태까지 매주 <타임즈> 지의 문예 부록을 읽는 일을 게을리해 본 적이 없다. 거기에 소개되는 방대한 양의 책들을 생각해 볼 때, 또 그 책들의 저자가 출판에 앞서 갖는 무지개와 같은 희망과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해 볼 때, 그 일은 확실히 내게 유익한 고행(苦行)이 아닐 수 없다. 한 권의 책이 대중 속에 파고들 수 있는 가능성은 대체 얼마나 될까? 또한 어쩌다 좀 팔린다 해도 그것은 한 계절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가 몇 시간 머리를 식혀주기 위해서, 또는 여행의 지루함을 덜어 주기 위해서, 작가는 얼마나 해한 고통을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쓰라린 경험을 치렀으며, 또한 얼마나 큰 번민을 해왔겠는가.
또한 서평(書評)을 읽다 보면, 이러한 책들 중에는 깊은 사색을 하고 심혈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씌어진 훌륭한 책들도 많으며, 뿐만 아니라 작가가 평생을 바쳐 쓴 역작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얻은 교훈은, 책을 쓰는 대가로 작가가 얻는 보수는 그 속에 간직된 사상의 짐을 벗어 버리는 해방감밖에 없으며, 그 외에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따위에는 관심을 갖기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새로운 풍조를 만들었다. 젊은 세대는 우리들 구세대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신(神)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 다음 세대가 지향하는 방향 또한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힘의 자각에 들뜬 이 젊은 세대는 문을 노크하는 따위의 수고는 이미 내던져 버렸다. 그들은 노크도 없이 방으로 거칠게 뛰어들어와서 우리들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뿐이다. 그들의 부르짖음 때문에 주위는 매우 소란스럽다.
나이 든 사람들 중에도 젊은이의 기묘한 행동을 흉내내면 자기들 시대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고 자기만족을 구하려 드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지만, 그들이 아무리 혈기왕성하게 외쳐도 그 고함 소리는 입 속에서만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그들은 마치 덧없이 흘러간 청춘의 푸른 꿈을 다시 찾아보려고, 눈썹을 그리고 분을 칠하며 짙은 화장을 하는 가련한 탕녀와도 같다. 현명한 미소 속에는 너그럽지만 차디찬 냉소가 스며 있다.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똑같은 소란과 똑같은 조소를 퍼부으며 자기만족에 빠진 구세대를 짓밟아 왔으며, 지금 용감하게 횃불을 든 이 젊은이들 또한 얼마 안 가서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마지막이란 말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니네베(아시리아의 수고) 사람들이 하늘 높이 그 영광을 쌓아올렸을 당시, 이미 새로운 복음은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신기하고 아름답게 들리던 이 찬란한 말들도 사실은 똑같은 억양으로 몇 백 번이나 되풀이된 것이다. 흔들리는 추는 항상 같은 곳만 왔다갔다할 뿐이고, 같은 원 둘레를 돌고 있는 사람에게만 언제나 새로울 뿐이다.
사람이란 어쩌다가 자기가 자리를 잡은 시대에서 전혀 낯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살아남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인간희극 가운데서도 가장 기묘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오늘날 조지 크랩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도 생전에는 유명한 시인이었고, 그가 천재임을 온 세상이 인정했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복잡해진 사회에서는 그런 일치된 평판을 얻기가 어려워졌다.
조지 크랩은 알렉산더 포프 유파에게 시의 기법을 배우고, 압운대련(각운을 맞춘 대구의 형식)의 교훈시를 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나폴레옹 전쟁이 터지자, 시인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시를 쓰게 되었다. 그러나 크랩은 여전히 압운대련의 교훈시만 썼다. 물론 그 역시 당시에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기는 했을 테지만, 분명히 그런 시를 하찮게 생각했으리라. 사실 대부분은 그랬다. 그러나 키츠와 워즈워스의 서정시 몇 편, 콜리지의 시 한두 편, 그리고 셸리의 시 서너 편 등은 일찍이 아무도 개척하지 못한 정신의 광대한 새 영역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와 비교할 때 크랩의 시는 거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는 끊임없이 교훈시만 썼던 것이다.
나 역시 젊은 세대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어 보기는 했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키츠 이상의 정열의 시인, 셸리 이상의 천상의 시인이 나타나서 후세에도 즐겨 애송될 만한 훌륭한 작품을 발표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나는 세련되고 정묘한 그들의 문체에 - 그들의 문체는 너무 완벽해서 새삼스레 전도유망하다고 말하기도 어색할 정도이다 -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더없이 감탄했다. 그러나 언어에 대해 그렇게도 조예가 풍부한데도 - 그들은 아마도 요람에 있을 떄부터 로제의 용어 사전을 뒤적거렸던 것 같다 - 그들은 도무지 말해주는 것이 없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아는 것도 너무 많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것 같다. 그들이 나의 등을 툭 치는 그 허물없는 태도라던가 내 가슴에 덥석 몸을 내던지는 그 기분을 나는 참을 수가 없다. 그들의 꿈도 어딘지 모르게 지리한 데가 있어 보인다. 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라는 인간은 벌써 쓸모 없는 존재가 되었나 보다.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압운대련의 교훈시만 쓸 작정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나 자신의 즐거움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쓰지 않을 것이니, 그야 말로 더할 나위 없는 바보가 될 것 같다.
3
이제까지 말한 것은 여담이고 처녀작을 쓰던 당시 나는 무척 젊은 나이였다. 다행히도 그 첫 작품이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여러 방면의 인사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다.
수줍어하면서도 호기심이 강했던 내가 처음 문단에 소개되었을 때의 일을 이것저것 돌이켜보면, 왠지 우울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내가 문단에 등단한 것도 오래 전 일이지만, 요즘 문단의 기이함을 묘사했다는 소설들의 내용이 정확한 것이라면 이젠 문단도 무척 변한 것 같다. 문인들이 모이는 장소로부터 다르다. 햄스테드, 노팅 힐 게이트 하이 스트리트, 켄싱턴 같은 옛장소 대신 첼시와 브룸즈베리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40세 이하라면 명예롭게 생각했었는데, 요즈음에는 스물다섯 살 이상만 돼도 벌써 우스울 정도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들은 모두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무척 부끄러워했고, 남에게 조롱당할까 봐 두려워 좀처럼 드러내어 잘난 체하는 법이 없었다. 저마다 점잖은 척하는 그 보헤미안 세계에 무슨 두드러지게 고상한 교양이 있었을까마는, 그래도 요즘과 같은 노골적인 혼란 상태는 없었다고 기억된다. 우리들은 우리의 위선(僞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감정에 대해 솔직히 표현하지 않았다. 여자도 자기 본연의 감정을 솔직히 나타내지 않았던 때였다.
내가 살던 곳은 빅토리아 역 근처였다. 버스를 타고 먼길을 달려 손님들을 융숭하게 대접해 주는 문인들 집으로 놀러가던 일도 생각난다. 몇 번이나 망설이며 거리를 왔다갔다한 끝에 겨우 용기를 내어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고는 알지 못할 불안감에 휩싸여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사람들로 가득 차서 공기가 나쁜 방으로 안내되었던 것이다. 그 유명인사들에게 차례로 소개될 때마다 그들은 내 작품에 대해 뭐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었고, 그 친절한 말에 오히려 나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들은 내가 뭔가 적당한 대답을 바란다는 것을 알았으나, 파티가 끝날 때까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당황함을 감추어 보려고, 나는 홍차라든가 잘못 잘라진 버터빵 등을 손님들에게 돌리곤 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내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나는 유명인사들을 마음놓고 관찰했고, 그들이 주고받는 멋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큼지막한 코에 탐욕스런 눈을 하고 같은 옷을 걸친 덩치 크고 완고한 부인네들과, 부드러운 음성에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득이던 조그만 생쥐 같은 올드 미스들이 생각난다. 장갑을 낀 체 버터빵을 먹던 그들의 고집에 나는 항상 감탄했고, 동시에 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면 의자에다가 슬쩍 손들 닦는 그들의 뻔뻔함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가구는 틀림없이 더러워졌을 것이고, 그 집 여주인 또한 자기가 친구를 찾아갈 차례가 되면 으레 그 집 가구에 같은 짓을 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최신 유행에 따라 치장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뭐 소설 하나 썼다고 해서 시대에 뒤떨어지게 입고 다닐 필요가 어디 있어요? 몸이 날씬하면 그걸로 최대한 이용해야죠, 작은 발에 세련된 구두를 신었다고 해서 편집자가 작품을 거절하겠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술적인 옷감'에 야성적인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다녔다.
남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이상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문인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들은 보통의 사회인으로 보이기를 바랐으며, 실제로 시내에 있는 어느 회사의 중견 간부쯤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항상 좀 피곤해 보였다. 그전에는 작가를 한 사람도 만나 본 적이 없던 내게는 그들이 매우 특이하게 보였고, 그래서 더욱 그들이 실재 인물같이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항상 재치 있게 느껴졌으며, 동료 작가가 그 자리에서 나가기만 하면 당장 그에 대해 날카로운 독설을 퍼붓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라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외모나 성격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까지 미친다는 데 있다. 나는 도저히 그렇게 적절하고 유창하게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하나의 기술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라, 재치 있는 화술은 냄비 밑에서 가시나무를 태우는 기술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대화도중 경구도 자연스럽게 나오곤 했는데 - 아직까지는 우둔한 사람들이 재치를 가장하는 수단으로 타락하지는 않았으므로 - 대화에 생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다양하고 재치 있는 대화를 지금은 하나도 기억할 수 없다니, 정말로 유감스런 일이다. 그러나 화제가 일단 우리들이 업으로 삼는 예술 이외에 그 뒷면에 감춰진 세부적인 돈 얘기 같은 것으로 옮겨가면 그 전처럼 마음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흥분하기도 했다.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작품의 장단점을 서로 얘기하고 난 다음에는 으레 그것이 몇 부나 팔렸는가, 저자가 선금을 얼마나 받았는가, 또 그것으로 저자가 돈을 얼마나 벌겠는가 하는 것으로 화제가 흘러갔다. 그리고는 출판사 얘기로 이어져서 어떤 출판사는 돈을 잘 쓰는데 어떤 출판사는 인색한다든가, 인세를 두둑하게 주는 출판사가 나은가 책이 가치가 있든 없든 그 책을 잘 팔아 주는 곳이 나은가 하는 것에 대해 토론을 하곤 했다. 출판사에 따라 어느 곳은 광고를 잘하는데, 어느 곳은 못 한다느니, 또 어느 출판사는 유행을 잘 따라가는데 어느 곳은 아직도 구식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도 오갔다. 그 다음에는 출판을 알선해 주는 대리인들과 그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계약, 편집자들마다 어떤 종류의 원고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1천 자당 얼마를 주며, 지불은 즉시 해주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얘기하곤 했다. 이런 모든 것이 내게는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무슨 비밀결사에라도 가입한 것 같은 친근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4
그때 누구보다도 내게 친밀했던 사람은 로즈 워터퍼드였다. 그녀는 남성적인 지성과 여성적인 괴팍함이 한데 얽힌 여인이었고, 곧잘 기발한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다. 내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만난 것도 바로 이 여자의 집에서였다. 그날 미스 워터퍼드는 티파니를 열었는데, 그녀의 조그만 응접실에는 여느 때보다 더 빽빽이 사람들이 들어찼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은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수줍음을 타서 자기네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임에 끼여들지 못하고 있었다. 미스 워터퍼드는 손님들의 접대에 매우 신경을 쓰는 여주인이었다. 그녀는 난처해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말을 걸어 봐요. 그분은 당신 소설을 좋아해요."
"무얼 하는 분이죠?" 내가 물었다.
나는 문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으므로, 만약 스트릭랜드 부인이 유명한 여류작가라면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아 두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던 것이다.
로즈 원터퍼드는 더욱 효과 있게 대답하려는 듯이 눈을 아래로 얌전히 내리깔고는 말했다.
"저 여자는 가끔 오찬회를 열지요. 당신도 조금만 얘기를 해보세요. 당장 초대를 받을 테니."
로즈 워터퍼드는 인생을 냉소적(冷笑的)으로 보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있어 인생은 다만 소설을 쓰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일 뿐이고, 대중은 그 소재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가끔 집에 초대하여 상당히 융숭한 대접을 하곤 했다. 그녀는 사회 유명인사들을 무조건 숭배하는 것을 내심 경멸했으나, 그들 앞에서는 예의를 차려 유명한 여류작가의 역할을 해내곤 했다.
나는 곧 스트릭랜드 부인을 소개받아 10분 정도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예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특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부인의 집이 어느 아파트라는 말을 듣고, 나 역시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이웃이기에 호의를 가졌다. 템스 강과 성 제임스 공원 사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육해군 백화점이 그들을 결속시키는 표시였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내 주소를 물렀고, 2, 3일 뒤에 나는 오찬회 초대장을 받았다.
나는 약속도 별로 없어서 그 초대에 즐겁게 응했다. 그날 시간이 좀 이르지 않을까 하여 교회 주위를 세 번이나 빙 돌면서 시간을 보낸 다음에야 가보니 오찬회는 벌써 한창이었다. 미스 의트퍼드, 제이부인, 리처드 트와이닝, 그리고 조지 로드가 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문인들이었다. 날씨가 좋은 초봄이었고 우리는 무척 유쾌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미스 워터퍼드는 샐비어 빛 푸른 드레스에 수선화 한 송이를 꽂고 파티에 나가던 소녀시절의 심미주의와, 어른이 되어 높은 구두와 파리의 멋쟁이 같은 옷을 좋아하는 경박함, 이 둘 중 어느 쪽을 택해야할지 망설였는지 두 분위기를 오락가락하는 새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친구에 대해서 내가 여지껏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신랄하게 공격했다. 제이 부인은 음란한 말을 하는 것이 재치라고 잘못 알고 있는 듯이, 눈과 같이 흰 테이블보도 장밋빛으로 물들일 만한 난처한 이야기들을 낮은 목소리로 태연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리처드 트와이닝은 이상야릇한 엉터리 화제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조지 로드는 이미 세상에 널리 퍼진 이야기들을 새삼스레 꺼낼 필요가 없음을 알았던지 잠자코 음식만 먹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비교적 말수가 적었으나 화제가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조정하는 데는 대단히 훌륭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말이 중단될 경우에는 부인이 그 상황에 꼭 알맞은 한마디를 해서 이야기가 다시 계속되도록 하였다.
그녀는 서른 일곱의 나이에 키가 큰 편이었고, 뚱뚱할 정도는 아니지만 포동포동했으며,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다정한 갈색 눈이 돋보여서 전체적으로 호감을 주는 인상이었다. 피부는 좀 창백한 편이었고, 검은 머리는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의 여성 중에서 부인만이 화장을 하지 않아, 다룬 여성들에 비해 더욱 소박하고 꾸밈없이 보였다.
식당은 당시의 추세에 따라 꾸며져 있어서 다소 엄숙해 보였다. 하얀 나무로 세운 높은 기둥에 초록색 벽지를 바르고 그 위에 휘슬러의 동판 벽화 몇 장을 수수한 검은색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다. 공작 무늬를 수놓은 초록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고, 숲에서 뛰노는 흰 토끼 무늬가 새겨진 초록색 융단은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듯했다. 벽난로 위에는 푸른색 델프트 도자기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시절 이와 똑같이 장식된 응접실이 런던 시내에만도 자그마치 5백 개는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간소하고 예술적이긴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그 집을 나올 때 나는 미스 워터퍼드와 동행이 되었다. 날씨도 좋고 그녀의 모자도 새것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공원 안을 산책 할 마음의 여유까지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오찬회가 무척 재미있는데요."
"음식은 어때요? 괜찮죠? 내가 그녀에게 얘기해 줬거든요. 문인들을 부르려면 음식 대접을 잘하라구요."
"훌륭한 조언이었군요. 그런데 왜 그녀는 문인들을 좋아하죠?"
미스 워터퍼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문인과 사귀는 것이 재미있다는군요. 시대에 떨어지지 않겠다는 것이겠죠. 좀 단순한 편이라서, 문인들은 모두가 훌륭하게 보이는 모양이에요. 어쨌든 그녀는 우리를 오찬에 초대해서 즐겁고, 우리 역시 손해 볼 게 없잖아요? 난 그녀의 그런 점을 별로 싫어하지 않아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 가장 높은 햄스테드의 세련된 봉우리에서 체니워크의 구렁텅이 아톨리에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의 뒤를 쫓아다니던 문학 팬들 중에 아마도 스트릭랜드 부인이 가장 순진하고 악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녀는 시골에서 조용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뮤디 순회문고에서 보내오는 책들은 그녀에게 책 자체의 로맨스뿐 아니라 런던의 로맨스까지도 전해 주었다. 그녀는 정말로 독서를 좋아했으며 - 그녀 또래의 문학 소녀들이 대부분 책보다는 저자에, 그림보다는 화가에 더 흥미를 갖는다 - 자기 자신만의 공상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일상생활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다. 그래서 직접 문인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마치 지금까지 관람객에서만 봐오던 무대 위에 직접 서보는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그녀는 연극의 주인공을 보는 듯이 문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고 또한 그들이 자물쇠를 채워 둔 그 깊은 곳까지 찾아감으로써 자기자신이 보다 넓은 삶을 살아가는 것같이 느꼈다. 그리고 작가들이 인생을 게임하듯이 즐기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서도 그녀 자신의 행동규범은 그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의 도덕적인 탈선, 이상한 복장, 얼토당토않은 이론과 역설 등은 단지 그녀가 즐기는 구경거리였을 뿐, 그녀 자신의 생활신조에는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편이 있습니까?" 내가 물었다.
"있고말고요, 시내에서 꽤 알려진 주식 중개인이죠, 하지만 재미는 없는 사람이에요."
"부부 사이는 좋습니까?"
"두 사람 사이는 굉장하죠. 만찬회에 초대받으면 만나실 수 있을걸요. 그렇지만 만찬회는 자주 열지 않아요. 남편은 도무지 말이 없는 사람이고요. 더구나 문학이니 미술이니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요."
" 어떻게 그렇게 재주 있는 여자가 그런 무취미한 남자와 결혼했는지 모르겠군요."
"똑똑한 남자가 어디 재주 있는 여자에게 장가들려고 그러나요?"
이 말에 나는 언뜻 대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부인에게는 아이들이 있느냐고만 물었다.
"있어요. 남매인데, 둘 다 학교에 다녀요."
그들 부부에 대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어서 두 사람은 다른 화제로 옮겨 갔다.
5.
그 해 여름에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과 자주 만났다. 때로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열리는 간소하면서도 유쾌한 오찬회라든가, 그보다는 좀 거창한 티파티에도 나갔다. 우리는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젊었고 문학이란 어려운 길에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으므로 그녀로서는 나를 인도한다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던 모양이다. 또한 나는 조그만 걱정거리가 생길 때 뛰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적당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런데 이 동정심이란 사랑스러운 성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동정심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남용되기 쉬운 법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동정심 속에는 탐욕스럽고 잔인한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친한 사람의 불행을 보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사정없이 달려들어 자신의 재주를 발휘하여 만족감을 느낀다. 이러한 감정은 유전(油田)처럼 솟구쳐 올라와서 마음대로 쏟아지기 때문에 오히려 동정을 받는 사람이 당황할 때가 많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동정의 눈물에 흠뻑 젖어서 새삼스레 내 눈물로 그들을 적실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많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이런 점을 아주 재치 있게 이용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동정을 받다보면 오히려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이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젊은이다운 감격에서 이 말을 로즈 워터퍼드에게 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유는 물론 맛있죠. 더구나 브랜디라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더욱 맛이 좋죠. 그렇지만 소의 입장에서 보면 단지 누가 자기의 젖을 짜주어서 기분 좋은 것뿐이잖아요? 젖이 불어 오르면 여간 불쾌한 게 아니니까요?
미스 로즈 워터퍼드는 독설가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렇게 신랄한 말을 좀처럼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만큼 멋있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내가 스트릭랜드 부인을 좋아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그녀가 자기 주위를 우아하게 꾸며놓는 재주가 있다는 점이다. 아파트는 항상 꽃으로 장식되어 깔끔하고 아늑한데다가 아름다웠으며, 응접실의 벽지도 장중한 무늬였지만 밝고 아름다웠다. 예술적 분위기가 풍기는 조그만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 또한 즐거웠다. 식탁도 훌륭했고, 하녀 두 사람의 차림새도 깔끔하고 귀여웠다. 게다가 요리 솜씨까지 일품이었다, 그러니 스트릭랜드 부인은 누가 봐도 훌륭한 가정주부였다. 또한 어머니로서도 훌륭한 사람인 듯 했다. 응접실에는 남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로버트라는 아들의 나이는 열여섯, 럭비 학교 생도로서 플란넬 운동복에 크리켓 모자를 쓴 사진, 연미복에 깃을 세우고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시원스런 이마와 기품 있고 사색적인 두 눈은 어머니를 닮았으며, 단정하고 건강하고 순진해 보였다.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지만, 성품은 착해요. 성적도 좋고요."
어느 날 내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딸은 열네 살이었다. 어머니를 닮아 숱이 많고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우아하게 늘어 뜨렸으며, 역시 어머니를 닮아 친절한 표정과 차분하고 침착한 두 눈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이 둘 다 어머니를 그대로 닮았나 봐요."
"네, 저희 아버지보다는 나를 더 닮았나 봐요."
"주인 어른께 왜 저를 소개시켜 주지 않습니까?"
"만나보고 싶으세요?"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고 곧이어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 정도 나이의 부인이이렇게도 쉽사리 낯을 붉힌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아마 이러한 순진함이 그녀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을 것이다.
"사실 저의 남편은 문학과는 담을 쌓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 방면에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그 말에는 전혀 아는 게 없어요."
그러나 그 말에는 조금도 비난의 어조가 들어있지 않았고, 오히려 남편이 가장 큰 결점을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친구들 의 비방에서 남편을 보호하려는 듯한 애정이 스며 있었다.
"증권 거래소에 다니죠. 전형적인 중개인이에요. 만나 보시면 정말 지루하실 거예요."
"부인께서도 역시 그러십니까?"
"아뇨, 저야 그의 아내인데 그렇다면 어떻게 함께 살겠어요? 그리고 저는 그를 좋아한답니다."
부인은 수줍은 마음을 감추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막상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로즈 워터퍼
드 같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했을 비웃음이 내 입에서도 나오자 않을까 하고 그녀는 은근히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약간 망설이다가 차츰 상냥한 눈빛을 띠었다.
"물론 남편은 잘난 척하진 않아요. 증권 거래소에 다니긴 하지만 돈도 그렇게 많이 벌지 못하는걸요. 마음씨가 착하고 친절한 사람이에요."
"전 그분이 무척 좋아질 것 같은데요."
"그럼 언제 저녁 식사에 초대할게요, 그렇지만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해요. 나중에 지겨워서 혼났다고 얘기해고 난 몰라요."
6.
이렇게 해서 마침내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게 되었지만 그때는 겨우 얼굴만 익혀두는 정도에 그쳤다. 어느 날 아침, 스트릭랜드 부인이 짤막한 메모를 보내 왔다. 저녁에 만찬회를 열예정인데, 손님 중에 한 분이 갑작스레 못 오게 되었으니, 그 자리를 내게 메워 달라는 것이었다. 그 메모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매우 지루하고 답답하실 것입니다. 본래 아무 재미도 없는파티이지만, 그래도 와주신다면 정말 고맙겠어요. 저와 둘이서 따로 얘기할 기회도 있을 거예요.'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이 예의였다.
부인이 나를 소개하자 스트릭랜드는 무표정하게 악수할 손만 내밀었다. 그래도 부인은 유쾌한 듯 남편을 향해 간단한 농담 한 마디를 건넸다.
"나한테도 남편이 있다는 걸 보여 드리기 위해 이 분을 초대했어요. 남편이 있다는 걸 믿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요."
스트릭랜드는 별로 우습지도 않은데 예의상 우습다는 표시만 살짝 지은 후 역시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와서 집 주인을 찾는 바람에 나는 그만 혼자가 되고 말았다. 이윽고 손님들이 모두 모여 식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식당으로 들어갈 때 내가 안내하기로 돼 있는 어떤 부인과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나는 문화인들은 이 짧은 일생을 왜 이렇게 지겨운 일에 써버리며 머리를 썩이고 있을까 하고 새
삼스레 생각해 보았다. 이런 파티는 왜 주인이 애써 손님을 청하고, 손님은 구태여 왜 오는 지 그 이유도 분명하게 모른다, 초대받은 사람은 전부 열 명이었는데 그들은 그저 서로에게
별 관심도 없이 만나서 헤어질 때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지으며 편안해하는 단순한 사교 모임이었다. 스트릭랜드 부부와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으나 저녁을 대접할 빚이 있기 때문에 초대했고, 또 손님들 역시 그런 줄 알고 초대에 응한 것이다.
왜? 가족끼리만 모여 저녁을 먹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또 하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
아니 무엇보다도 초대를 거절할만한 이유가 없으니까, 또한 자기들도 초대한 일이 있으니까.
대부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식당은 불쾌할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왕실 변호사 부부, 어느 관리와 그 부인, 스트릭랜드 부인의 친정 언니와 그 남편 맥앤드루 대령, 그리고 어느 국회의원 부인, 이 부인의 남편이 의회에 빠질 수 없어서 내가 대신 초대를 받은 것이다. 엄숙할 정도로 점잔 빼는 모임이었다, 부인들은 너무 고상하게 치장하는 데만 신경 써서 옷을 제대로 차려입었다고 할 수조차 없었고, 자신들의 지위에 신경 쓰느라 재미있게 한번 웃지도 못했다. 남자들은
모두 자신만만한 것 같았고, 자신들의 물질적인 번영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파티를 잘 이끌어 가고 싶은 마음에 다들 약간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음성을 높여 말하고 있어서 실내는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런데도 모두에게 공통된 화제는 없었고, 다만 자기 옆 사람하고만 얘기하고 있었다. 수프와 생선과 야채가 나올 때는 오른쪽 사람에게, 구운 고기와 과자와 디저트가 나올 때는 왼쪽 사람에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시국 이야기, 골프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요즘의 연극 이야기, 왕립 예술원의 그림 이야기, 날씨 이야기, 휴가 중의 계획..... 이런 것들이었다. 화제는 조금도 쉴 틈도 없이 이어져 실내는 더욱더 시끄러워졌다. 스트릭랜드 부인으로선 성공적인 파티였다고 자축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남편도 훌륭하게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해내었다. 조금 말수가 적은 탓인지 파티가 끝날 무렵, 그의 양쪽에 앉아 있던 부인들의 얼굴에 약간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 그가 너무 재미없고 답답해서 참을 수 없는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두 번 스트릭랜드 부인의 걱정스런 시선이 남편에게 머물기도 했다.
마침내 스트릭랜드 부인이 일어나서 부인들을 식당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스트릭랜드는 부인이 나간 뒤에 문을 닫고 테이블 저쪽 편으로 가서 왕실 변호사와 정부 관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포도주를 다시 한 잔씩 돌리고 궐련을 권했다. 왕실 변호사가 그 포도주 맛을 칭찬하자 그는 그 포도주를 얻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우리들은 한동안 포도주와 담배 얘기를 했다, 변호사는 그가 맡고 있는 사건에 대해 얘기했고, 대령은 폴로 경기에 관해 얘기했다. 나는 할 얘기가 아무것도 없어서 가만히 앉아 예의상 그들의 대화에 흥미를 표시하기만 했다. 그리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마음 놓고 스트릭랜드를 관찰했다.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키가 컸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마르고 보잘것없는 체격일 거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만나 보니 어깨가 딱 벌어져서 듬직하고 손발도 큰 거구였다. 그는 이브닝 코트를 어색하게 걸치고 있었는데 마치 마부가 잔칫날 예복을 입은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이는 마흔 안팎으로, 미남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추남은 아니고 이목구비는 오히려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모든 것이 조금씩 필요이상으로 커서 결과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았다. 수염을 깨끗이 깍은 것이 오히려 그 넓은 얼굴을 어색할 정도로 다 드러내 보이게 했다. 붉은 머리를 짧게 깎아 올렸고 푸르면서도 잿빛이 나는 두 눈은 작은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아주 평범하다는 인상이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그에 대해 친구들에게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심리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술(藝術)이나 문학(文學)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여성에게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사교성(社交性)이 없어 보였으나, 그런 사교성이 없어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평범(平凡)을 벗어난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선량하고 정직하고 멋대가리 없고 약간 지겨운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의 훌륭한 점을 칭찬해 줄 만한 사람은 있어도 그와 친구가 될 만한 사람은 전혀 없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무(無)와 같은 존재(存在)였다. 그는 아마 사회에 한 구성원으로서 훌륭하고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성실하며, 증권 중개인으로서도 정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론 사람을 상대로는 시간을 낭비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그런 인물이었다.
사교시즌이 끝나가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피서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가족과 함께 노퍽 해변으로 떠난다고 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바다를 즐기고 남편은 골프를 즐긴다고 했다. 우리는 작별인사를 주고받으면서 가을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런던을 떠나려던 그 날 나는 백화점에서 나오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인을 만났다. 나처럼 그녀 역시 런던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건을 사러 나온 것이었다. 모두 더위에 지쳐 있었기에 나는 공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자고 제의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내게 자기 아이들을 보여 주고 싶었던지 내 제의에 두말없이 따랐다. 아이들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도 더 사랑스러워서 그녀가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내가 젊은 사람이었기 때문인지 아이들은 조금도 수줍어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었다. 참으로 귀엽고 건강한 아이들이었다. 시원한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서 무척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시간쯤 지나서 그들이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나는 어슬렁어슬렁 클럽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나는 약간 쓸쓸했던 것 같다. 흘끗 들여다본 단란한 가정생활에 부러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재치 있는 말을 기준으로 본다면 찰스 스트릭랜드는 재미없고 따분한 사람이겠지만, 그는 자기 주위환경에 충분히 알맞은 머리도 갖고 있었고, 그것으로 남부럽지 않은 성공과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복까지도 보장받은 것이다. 매력적인 부인까지도 남편을 사랑했다.
나는 그들의 생활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세상의 어떤 곤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직하고 점잖은 생활, 그리고 명랑하고 귀여운 두 아이가 있어, 그들이 속한 민족과 신분의 건전한 전통을 이어나가도록- 그 전통 또한 그리 의미 없는 것도 아니다- 숙명 지어진 가정, 이들부부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늙어 갈 것이다. 그 동안 자식들은 커서 철이 들고 적당한 과정을 밟은 후 결혼을 한다. 남자아이는 장래에 건강한 아이들의 어머니가 될 어여쁜 처녀에게, 여자아이는 멋진 군인에게 시집을 갈 것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결국 두 사람은
윤택하고 점잖은 은퇴생활을 누리고 자손들의 사랑을 받아 가며 행복하고도 결코 헛되지 않
은 일생을 충분히 맛본 후에 저 세상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부부들의 일반적인 인생이다. 그리고 그 생활이 보여주는 인생의 무늬에는 소박한 아름다움이 엿보인다. 그것은 잔잔한 시냇물이 푸른 목장의 시원한 나무 밑 그늘을 완만히 굽어 들며 이윽고 넓은 바다로 쏟아지는 광경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바다란 것이 너무 잔잔하고 너무나 고요하고 너무나 초연한 것 같아, 오히려 갑자기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인생 행로에 대해 약간 어긋난 점이 있다고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 무렵의 내 기질 속의 어떤 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인생이 지닌 사회적 가치도 인정하고 또 그 균형 잡힌 행복도 인정하면서도, 내 핏속에 끓어오르는 정열은 좀더 거친 인생행로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 안일한 인생의 즐거움 속에는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이 숨어 있을 거 같았다. 나는 좀더 모험적인 생활을 갈망했다. 어떤 변화나 예기치 않은 일에서 오는 흥분만
있다면 나는 불쑥 튀어나온 암초도 위험한 모래섬도 두려워하지 않고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었다.
8.
스트릭랜드 일가에 관해 지금까지 써온 것을 읽어보니 그들에 대한 묘사가 다소 막연하게 느껴진다. 책 속의 인물에 현실적인 생명을 불어넣는 뚜렷한 개성을 그들의 모습에 부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잘못이 내게 있는 거 같아서, 어떻게 하면 그들의 존재를 생명감 있게 묘사할 수 있는 특징을 찾아낼까 하고 머리를 짜내어 보았다. 가령, 말할 때의 어떤 특징
이라든가 남다른 버릇 같은 것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의 개성을 드러나게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해 본 것이다. 지금의 그들은 마치 낡은 융단의 무늬처럼 인물과 배경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 게다가 먼 곳에서 보면 그 무늬조차 희미해져서 다만 하나의 아름다운 색배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가지 변명을 하자면 그들이 준 인상이 그 이상을 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조직의 일부에서만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조직 안에서, 그리고 그 조직에 의지해서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희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몸 안의 세포와 같이 없어서는 안돼는 존재이지만, 그 세포는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동안에만 전체 속에 포함될 수 있는 는 성질 인 것이다.
스트릭랜드 일가는 평범한 중산 계층의 가정이다. 문단의 약간 인기 있는 문인들과 사귀고 싶다는 결코 해가 될 것 없는 욕망을 가진 아름답고 붙임성 있는 부인과, 자비로운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생활 가운데 자기가 맡은 의무를 다하는 좀 따분한 남편, 그리고 귀엽고 건강한 두 아이. 이보다 더 평범한 가정이 있을까. 그들에게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 만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생각해 볼 때, 그 당시 찰스 스트릭랜드란 사람에게서 무슨 특별한 점을 하나쯤은 찾아냈을 법한데도 그토록 모르고 있었다니 내 자신이 너무 둔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런지도 모른다. 그대와 지금을 비교해 볼 때, 사람을 보는 눈이 상당히 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처음 스트릭랜드 일가를 만났을 때 지금 정도의 인생 경험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들을 달리 보았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라면,
인간이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 해 초가을 런던에 돌아오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으리라.
돌아온 지 하루도 못 되어, 나는 저민 거리에서 로즈 워터피드와 마주쳤다.
"기분이 무척 좋으시군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내가 물었다.
그녀는 생극 웃었다. 그 두 눈은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이상스런 악의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친구 중에 누군가의 스캔들을 듣고 그녀의 작가다운 육감이 잔뜩 긴장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찰스 스트릭랜드 만난 적 있어요?"
얼굴뿐 아니라 몸 전체에 야흣한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친구가 가엾게도 증권 거래소에서 무슨 타격을 받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버스에 치이기라도 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그가 부인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는군요."
미스 워터피드도 길거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야말로 예술가답게 간단한 사실만을 그대로 전할 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이유로 자세한 이야기를 못 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으나, 그녀는 끝내 고집을 피웠다.
"정말 난 몰라요." 내가 놀라서 다그쳐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해 보인 다음 한마디 덧붙였다. "시내 어느 다방의 젊은 여자 한 명이 얼마 전에 그만두었죠, 아마."
그러고는 내게 다시 한 번 생극 웃어 보이더니 치과의사와 약속이 있다면서 쾌활한 걸음걸이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근심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당시 나의 인생경험이란 직접 얻은 것
이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책에서 본 것과 같은 사건이 생기면 나는 무척 스릴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이런 종류의 사건이 내 친구들 사이에 일어났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무척 놀랐다. 스트릭랜드는 확실히 마흔 안팎이었을 텐데 그 정도 나이의 남자가 연애사건에 관련되었다니 생각만 해도
불쾌했다. 젊은 사람의 오만불손한 기분에서 나는 서른 다섯을 남자가 웃음거리가 되지 않고 연애할 수 있는 최고 한계의 나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소식이 나를 개인적으로 좀 당황하게 만든 것은, 시골에서 내가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런던으로 돌아간다는 편지를 보냈고, 거기에 거절의 답장이 없으면 며칠날 그들 집으로 찾아가 차라도 대접받고 싶다고 썼는데, 그 날이 마침 약속한 날이었으나 부인에게서는 아무런 답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인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또 당장의 충격 때문에 내 편지를 깜빡 잊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 그와 반대로 부인은 모든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이상한 소식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는 눈치를 조금이라도 보이는게 큰 실례가 되지 않을까? 나는 점잖은 여인의 감정을 건드리지는 않을까 하는 근심과, 공연히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사이에 끼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 짐작에도 부인은 틀림없이 괴로워하고 있을 것 같았고, 나도 내가 도와줄 수 없는 그러한 괴로움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부인이 그 고민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 은근히 보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결국,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방문해서 하녀를 통해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만나도 좋은지 물어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부인이 나를 만나기 싫으면 그냥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작 하녀에게 마음속에 준비했던 말을 하면서도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어두운 복도에서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느라고 온 힘을 다했다. 하녀가 돌아왔다. 정신 없던 내 눈에도 그녀의 동작으로 보아 이 집안에 불행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하고 하녀가 안내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갔다.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져서 좀 어두운 실내에 스트릭랜드 부인이 등불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형부인 맥앤드루 대령이 불도 지피지 않은 벽난로에 등을 쬐는 자세로 서 있었다. 이런 곳에 들어온 나 자신이 더할 수 없이 어색했다. 내가 찾아온 것이 그들에게는 의외인 것 같았으며, 다만 부인이 미리 거절하는 걸
잊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들어오라고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대령도 뜻밖의 방해를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제가 올 줄 아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
"알았고말고요. 앤이 곧 차를 가져올 거예요."
어두운 실내였지만 부인의 얼굴이 울어서 부어 올라 있음을 곧 눈치챌 수 있었다. 평소에도 그리 좋지 않은 안색이 그날따라 더욱 창백했다.
"저의 형부, 기억하시죠? 휴가가 시작되기 바로 전의 만찬회 때 만나셨죠?"
우리들은 악수를 했다. 나는 너무나 겸연쩍어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부인이 곁에서 거들어 주었다. 그녀가 여름 동안 무얼 했느냐고 묻는 바람에 나는 차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대령은 위스키 소다를 청했다.
"에이미도 한 잔 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고 그가 권했다.
"아니, 전 홍차로 하겠어요."
이것이 무슨 불상사가 일어났다는 첫 암시였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부인을 이야기에 끌어들이려고 최선을 다했다. 대령은 난로 앞에 버티고 선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한시라도 빨리 실례되지 않게 이 자리를 뜰 수 있을까 생각했다. 도대체 부인은 왜
나를 들어오도록 허락했을까 의아했다. 실내엔 꽃 한 송이도 없었고 여름 휴가 동안 치워 두었던 실내 장식용 골동품들도 아직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았다. 전에는 그렇게도 화사해 보이던 방이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었으며, 벽 건너편에 시체라도 누워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차를 다 마셨다.
"담배 피우시겠어요?" 스트릭랜드 부인이 물었다.
그녀는 담배 상자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머, 담배가 없나 봐요."
그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고는 그만 바깥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이 늘 사오던 담배가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그녀에게 남편을 생각나게 했고, 여태까지 습관적으로 이어져 왔던 이 생활의 즐거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생각이 갑작스레 고통을 준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체면 같은 것을 차릴 여유가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실례지만, 저는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일어서면서 대령에게 말했다.
"그 불한당 같은 녀석이 에이미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얘기 들으셨죠?" 그는 감정을 폭발시키며 방이 떠나갈 듯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세상에는 원래 말이 많은 법이니까요. 이 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만 막연히 들었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 녀석이 도망을 쳤다오." 웬 여자와 같이 파리로 달아났대요. 에이미에겐 한 푼도 남겨 놓지 않고."
"정말 안됐군요." 나는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만 말했다.
대령은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의 그는 나이는 쉰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머리는 반백이었으며 콧수염을 길게 늘이고 있었다. 두 눈은 엷은 하늘빛이고, 입은 빈약해 보였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것과, 군에서 퇴역하기 전 10년 동안 매주 사흘은 폴로 경기를 했다는 것을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런 때 제가 찾아와서 부인께 도리어 괴로움만 끼치게 된 것 같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으면 기꺼이 돕겠다고요."
그는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에이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소. 게다가 어린아이들이 있는데 공기만 먹고 살지는 못할 것 아니오? 벌써 17년이나 되었는데."
"17년이라뇨?"
"결혼한 지가......"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하지만 동서가 됐으니 참을 만큼 참았지. 그 녀석이 도대체 신사같이 보이기나 하냔 말이오. 애초에 그따위 녀석과 결혼한 게 잘못이었소."
"그럼 완전히 끝장났다는 겁니까?"
"이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밖에 없지 않소? 이혼하는 수 밖에. 아까 당신이 들어올 때도 그 얘기를 하고 있었소. 당장 이혼 소송을 제기하라고 했죠. 에이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이오. 그 녀석 내 앞에 얼씬거리지 않는 게 아마 좋을 거요. 눈에 띄면 반 죽도록 두들겨 패주고 말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스트릭랜드가 워낙 건장한 사내라서, 대령이 말만 그렇지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물론 입 밖에는 내지 않았다. 세상에는 도덕을 어긴 자에게 직접 응징을 가할 만한 완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도 많은데 유감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빨리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부인이 들어왔다.
눈물을 닦고 화장도 다시 고친 모양이었다.
"갑자기 울어서 미안해요. 아직 가시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나와 관계없는 이 일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왠지 쑥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여자들은 사적인 이야기도
털어놓는 상대방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기들의 사적인 이야기도 털어놓는 커다란 약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부인은 스스로를 억제하느라고 무척 애쓰는 것 같았다.
"벌써 사람들이 얘기하고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자기 가정의 불행에 대해 내가 이미 모두 알고 있으리라고 추측하여 말하자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전 시골에서 방금 돌아와서 아직 로즈 워터피트 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그대로 얘기 좀 해주세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다시 한 번 졸랐다. "꼭 듣고 싶어요."
"세상의 소문이란 다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여자가 말하는 것도 어디 믿을 수 있나요. 남편께서 집을 나가셨다고 말하더군요."
"그것뿐이에요?"
나는 로즈가 헤어질 때 다방에 있던 여자에 대해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하고 갔다든가 하는 얘기는 없던가요?"
"없었어요."
"전 다만 그것을 알고 싶었어요."
나는 약간 어리벙벙했으나 어쨌든 이제는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과 작별의 악수를 하면서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다고 말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누구라도 저를 도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녀는 핏기 없이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더 이상 동정을 표시하기도 어색하고 해서, 나는 대령에게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 손을 잡으려 하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나도 가야겠소. 빅토리아 거리로 가시려거든 같이 갑시다."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내가 말했다.
9
"엄청난 일이지 않소." 그는 거리에 나서자마자 말을 건넸다.
나와 동행하겠다는 것은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처제와 의논한 문제를 다시 한 번 나와 의논해 보고 싶어서인 것 같았다.
"사실 같이 달아난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르오. 다만 그 나쁜 놈이 파리에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죠."
"두 분 사이가 꽤 좋은 줄 알고 있었는데요."
"그야 좋았죠. 아까 당신이 들어오기 바로 전에도 에이미가 말합디다. 결혼하고 난 두 부부싸움이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당신도 잘 알잖소. 에이미같이 착한 여자는 이 세상에 없을 거요."
상대방이 이렇게 먼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이쪽에서 몇 마디 물어 보아도 실례될 것은 없을 듯했다.
"그럼 부인께선 아무 눈치고 체지 못하셨단 말씀인가요?"
"전혀 몰랐지요. 8월에 가족과 함께 노퍽에서 지낼 때도 평소와 조금도 다른 점이 없었다는군요. 우리 부부도 2, 3일 같이 있었는데, 나는 그와 골프까지 같이 쳤소. 9월이 되자 그가 동업자에게 교대로 휴가를 줘야 한다고 런던으로 가고 처제는 그냥 시골에 남아 있었다는군
요. 거기서 빌린 집이 6주 계약이라, 계약이 끝나 며칠날 런던에 돌아가겠다고 편지를 띄웠더니 아, 글세 답장이 파리에서 왔다는 겁니다. 더 이상 같이 살 생각이 없다고 말이오."
"이유가 뭐래요?"
"이유가 어디 있겠소? 나도 그 편지를 보았지만 겨우 열 줄도 될까 말까 했소."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때 마침 우리는 길을 건너야 했고 주변에 사람들이 혼잡해서 이야기가 중단되었다. 조금 전에 맥앤드루 대령이 한 이야기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도 사실의 일부를 감추고 있는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17년 동안이나 결혼생활을 해온 남자가 처자식을 버릴 때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무슨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아내가 전혀 짐작하지 못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령은 곧 나를 뒤쫓아왔다.
"다른 여자하고 도망쳤다는 것밖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소? 아마 말 안 해도 에이미 스스로 알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한 모양인데, 녀석은 원래부터 그런 인간이요."
"부인은 어떡하실 작정인가요?"
"글쎄요. 우선 무엇보다도 증거를 잡아야겠지요. 그래서 내가 직접 파리로 가볼 작정이요."
"사업은 어떻게 할 거래요?"
"그것이 그놈의 교활한 점이라오. 지난 1년 동안 사업규모를 조금씩 줄여 왔다니까요."
"동업자에게는 그만둔다는 얘기를 했던가요?"
"아니, 한마디도 없었다는군요."
대령도 사업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나 역시 그 방면엔 문외한이라 스트릭랜드가 어떻게 사업을 그만두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얼핏 듣기에 동업자가 노발대발해서 곧 소송절차를 밟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과, 모든 것이 정리되면 스트릭랜드 쪽이 4, 5백 파운드 가량 손해를 본다는 것이었다.
"아파트 가구들이 에이미의 명의로 되어 있어 그나마도 불행중 다행이지요. 어쨋든 그것만은 붙들고 있을 테니 말이오."
"아니, 그럼 부인께선 무일푼이 되셨단 말씀입니까?"
"그렇다니까요. 현금 2, 3백 파운드에 가구밖에는 남은 게 없다는군요."
"앞으로 생활은 어떻게 하죠?"
"그걸 누가 알겠소."
문제는 더욱더 복잡해진 것 같았다. 대령은 분노를 터뜨리며 욕설을 퍼붓느라고 내게 사정을 알려주기는커녕 머리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육해군 백화점 앞을 지나가다 그가 우연히 시계를 쳐다보고, 클럽에서 카드 약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는 혼자 성 제임스 공원 쪽으로 가버렸을 대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10.
그러고 나서 하루나 이틀 후에 스트릭랜드 부인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저녁 식사 후에 잠깐 와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가보니 부인 혼자였다. 엄숙할 만큼 검소한 검은 드레스는 버림받은 여인의 슬픔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감정을 억누르고 자진의 처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점잖게 차려 입은 것을 보자, 솔직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제가 부탁드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해주시겠다고 그러셨죠?" 하고 부인이 입을 열었다.
"네, 그랬어요."
"그럼 파리로 가서 찰리를 좀 만나 주세요."
"네? 제가요?"
나는 얼떨떨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를 딱 한 번 밖에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부인이 대체 내게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프레드는 자기가 가겠다고 해요." 프레드는 맥앤드루 대령의 이름이다. "그렇지만 형부가 가시면 곤란해요. 오히려 일만 망쳐 놓을 게 뻔하거든요. 그렇다고 달리 부탁드릴 만한 사람도 없고……."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한다면 몰인정한 인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댁의 남편과 채 열 마디도 얘기를 나눠보지 못한 사이인데…… 그분은 나를 알지도 못할 겁니다. 제가 가봤자 문전에서 쫓겨나고 말 텐데요?"
"그런 일로 기분 상하시지는 않겠죠?"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녀가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제 생각엔 남편이 당신을 모르는 게 차라리 잘된 일 같아요. 아시겠지만 그는 정말 프레드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는 프레드를 바보라고 생각했죠. 그는 군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게다가 프레드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성격이라 싸움만 일어나고 말 거예요. 그러니 일이 잘 되기는커녕 더 나빠질 게 뻔해요. 제 대신 왔다고 말하면 그도 당신을 쫓아내진 않을 거예요."
"제가 부인과 알게 된 것도 별로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문제는 자세한 내용을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 이외에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일 같은데요. 게다가 전 저와 별로 관계없는 일에 끼여들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부인께서 직접 가서 만나 보시면 어떨까요?"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으셨군요."
나는 입을 다물고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찾아가 명암을 내미는 나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면 그는 그 명함을 두 손가락 사이에 쥔 채 방으로 들어올 것이다.
"용건이 뭡니까?"
"당신 부인 일에 관해 상의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 그래요! 당신도 나이가 좀 들면 남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다는 걸 알게 될 거요. 머리를 조금만 왼쪽으로 돌려 보시오. 문이 보일 거요. 자, 그럼 잘 가시오."
아무튼 체면 상하지 않고 돌아오기가 무척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부인이 이 난국을 해결할 때까지 런던에 돌아오지 말걸 하고 후회하기까지 했다. 부인을 흘끗 쳐다보니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얼굴을 들고 나를 쳐다보더니 깊은 한숨을 짓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정말 의외였어요. 같이 산 지 17년이나 되거든요. 전 그이가 다른 여자에게 바지는 그런 사람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우린 늘 사이 좋게 지내 왔어요. 물론 제 취미가 가끔 그에게 맞지 않기도 했지만요."
"그럼 부인께서는 그…… 나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남편과 같이 갔다는 여자가 누군지 아시나요?"
"아뇨. 전혀 짐작도 못 해요. 이상한 일이죠. 보통 어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귄다면, 같이 다닌다든가 점심을 먹는다든가 하는 것을 부인 친구들이 보고 가르쳐 주는 법이니까요. 그런데 난 도무지 아무 말을 듣지 못했어요. 난 그이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줄 알았어요."
그러고는 가엾게도 또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정말 불쌍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에 그녀는 진정했다.
"이렇게 바보 노릇을 해봐야 아무 소용 없는 일이지요." 눈물을 닦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에요."
그러고는 다소 두서 없이 최근에 있었던 일과 처음 만났을 때, 그 동안의 결혼 생활에 관해 얘기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나름대로 두 사람 생활의 윤곽을 그림처럼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가지의 내 추측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부인은 인도 주재 관리의 딸이었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퇴직하자 시골 깊숙이 은퇴하여 매년 8월 온 가족을 데리고 이스트본에 요양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부인이 스무 살 때, 찰스 스트릭랜드와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여기였다. 그때 찰스는 스물 세 살이었다. 그들은 같이 테니스를 치기도 하고, 해변가를 걷기도 하고, 흑인 노래를 부르는 순회극단의 공연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자가 정식으로 청혼하기 일 주일 전에 여자쪽에서는 이미 결혼을 승낙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런던의 햄스테드에 살다가 형편이 차츰 나아지자 도심지로 옮겨 왔다. 그러는 동안 그들에게는 아이가 둘 생겼다.
"그이는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했어요. 나한테는 싫증이 났다해도 어떻게 아이들까지 버릴 수 있는지 믿어지지가 않아요. 지금도 이 일이 사실같이 생각되지 않는걸요."
결국 부인은 그가 보낸 편지를 보여주었다. 사실 나는 그 편지를 무척 보고 싶었지만 차마 보여달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에이미
집에는 별일 없을 거요. 앤에게 당신이 시킨 대로 말해 놓았으니까 돌아오면 당신과 아이들 식사도 준비되어 있을 거요. 그러나 그때 나는 거기에 없을 거요. 나는 당신과 떨어져 살기로 결심했소. 내일 아침 파리로 떠날 거요. 이 편지도 그곳에 도착하는 대로 부칠 생각이오. 다시 돌아가진 안겠소. 내 결심은 바뀌지 않을 거요. 이만.
찰스 스트릭랜드
"한마디 설명도 없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어요. 세상에 어쩌면 이럴 수가 있어요?"
"이런 경우의 편지치고는 너무 이상한데요." 나는 대답했다.
"한 가지 설명은 있어요. 그것은 여느 때의 그이가 아니라는 거예요. 어떤 여자가 그이의 마음을 빼앗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 때문에 사람이 완전히 변했어요. 오랫동안 사귀어 온 사이인가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프레드가 알아냈어요. 남편은 일 주일에 3,4일 밤은 항상 브리지게임을 한다고 클럽으로 갔어요. 프레드가 그 회원 중에 한 사람을 알고 있어서, 찰스도 굉장한 브리지광이라고 그랬나봐요. 그러니까 그분은 깜짝 놀라면서 찰스가 카드실에 있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더래요. 그러니 내가 카드 놀이를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 여자와 같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아이들 생각이 났다.
"로버트에게 설명해 주느라고 무척 힘드셨겠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직 한마디도 안 했어요. 저희가 돌아온 날이 바로 아이들이 개학하기 바로 전날이었거든요. 그래서 침착하게 아버지는 사업상 출장가셨다고만 얘기해 두었어요."
이런 불행한 비밀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태연하게 쾌활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편안히 학교에 갈 수 있도록 일일이 신경 쓰며 소지품을 챙겨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부인의 목소리는 다시 울음을 머금은 채 떨렸다.
"가엾게도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그녀는 자제하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경련이라도 난 듯이 두 손을 꽉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았다. 보기에 여간 딱한 모습이 아니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야 물론 파리에 가겠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말씀해주세요."
"저는 그이가 돌아오기만을 바랍니다."
"맥앤드루 대령께선 부인께서 이혼하실 거라고 말씀하시던데요."
"이혼은 절대 안 해요." 부인은 갑자기 강경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전해 주세요. 그 여자와는 절대로 결혼 못 하게 하겠다구요. 제 고집도 그이 못지 않아요. 결코 이혼은 안 해요. 아이들 생각도 해야 하니까요."
부인은 이 마지막 말을 그녀의 처지를 내게 설명하려고 첨가한 것 같았으나, 내게는 이것이 모성애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질투심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분을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나요?"
"그것은 뭐라고 말 못 하겠어요. 아무튼 그이가 돌아오기만을 바라요. 돌아오기만 하면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생각하겠어요. 17년 동안이나 같이 산 부부니까요. 나도 마음이 좁은 편은 아니에요. 그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만 모르면 아무 상관도 하지 않겠어요. 그이도 그 정신 빠진 일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금 돌아오면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되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스트릭랜드 부인이 세상의 소문에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을 보고 나는 약간 불쾌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세상 이목이 여자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있어 세상 평판이란 그들의 가장 깊숙한 감정에다 위선의 그림자를 던지는 것이다.
스트릭랜드가 있는 곳은 알고 있었다. 그의 동업가 스트릭랜드의 거래 은행으로 편지를 보내어 거처를 감추고 있다고 강경하게 그를 비난하자, 스트릭랜드는 아주 냉소적이고 익살스러운 답장을 보내어 자기 주소를 확실히 알렸다는 것이다. 아마 어떤 호텔에 묵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 이런 호텔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어요. 프레드는 잘 알고 있다는데, 꽤 비싼 곳이라나 봐요." 그녀가 말했다.
부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호화로운 방에 들어앉아, 이집 저집 비싼 레스토랑으로 식사하러 다니며, 낮에는 경마로 밤에는 연극 구경으로 그날그날 보내는 광경을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 나이에 오래 계속하진 못하리라고 생각해요." 부인이 말을 이었다. "나이가 벌써 마흔이잖아요? 젊은이가 그런다면 이해해줄 수도 있지만, 그 나이가 되어 가지고 다 자란 아이까지 있는데 그럴 수가 있어요? 첫째, 몸이 지탱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가슴속에는 노여움과 슬픔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이에게 말해 주세요. 집에서는 모두들 그를 비난하고 있다고요. 예전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으면서 모든 게 달라진 것 같아요. 전 그이 없이는 못 살아요. 차라리 죽고 말겠어요. 그에게 지난날 우리들이 겪은 일들은 모조리 얘기해 주세요. 아이들이 물으면 대체 전 뭐라고 대답하면 좋아요? 그이 방을 집을 나갈 때와 같이 그대로 놔두었어요. 그 방도 그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고는 내가 해야 할 말을 일일이 가르쳐 주었다. 거기에다 그가 할 듯한 말도 미리 생각하여 치밀한 대답을 마련해 주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주시겠죠?" 그녀는 사정하는 듯한 어조였다.
"제가 얼마나 곤란을 당하고 있는지 잘 좀 말씀해 주세요."
부인은 내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동정에 호소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그녀가 소리 내어 우는 바람에 나도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스트릭랜드의 그 냉혹한 잔인함에 분노를 느꼈으므로, 그가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모레 출발하기로 했으며, 어떤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파리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얘기를 나누는 동안 시간도 오래되었고, 둘다 감정을 지나치게 소모하여 지쳐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집을 나왔다.
11.
파리로 가는 동안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맡은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스트릭랜드 부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되자, 훨씬 더 냉정한 입장에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었다. 부인의 행동에는 모순된 점이 있어 나는 좀 얼떨떨했다. 부인의 처지가 불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 불행을 과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눈물을 보일 작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손수건을 미리 여러 개 준비해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인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도리어 그것이 눈물을 덜 감동적으로 보이게 한 것 같았다. 남편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정말 남편을 사랑해서인지, 아니면 세상의 이목이 두려워서인지 나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부인이 느끼고 있는 괴로움 가운데는 버림받은 애정의 괴로움과 함께 자존심이 상한 데서 오는 고통 또한 섞여 있지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러한 것은 나의 젊은 마음에는 좀 천하게 느껴졌다. 그때 나는 사람의 천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몰랐다. 성실한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가식이 들어 있고, 또한 무뢰배들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가를 모르고 있었던 때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약간 모험적인 면이 있어서, 파리에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마음이 들떴다. 나 자신을 연극 속의 인물로 그려보았으며, 바람난 남편을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아내에게 돌려 보내는 진실한 친구의 역할이 싫지는 않았다. 나는 다음날 저녁때 스트릭랜드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만나는 시간을 신중하게 정해야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일은 점심식사 전에는 거의 효과가 없는 법이다. 나 자신도 그 무렵 애정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지만 오후의 차 마실 시간까지는 결혼의 행복이나 부부의 사랑 같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투숙한 호텔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묵고 있다는 호텔을 물어 보았다. 호텔 이름은 오텔 데 벨쥬였는데, 약간 의외인 것은 호텔 종업원도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듣기로는 리보리 거리의 뒷골목에 있는 크고 호화스러운 호텔이라고 했다. 나는 종업원과 함께 전화번호부에서 그 호텔을 찾았다. 그런 이름의 호텔은 므완 거리에 딱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일대는 상류 지역이 아니며 오히려 좋지 않은 지역이라고 종업원이 말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아닐 텐데."
종업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파리에는 그런 이름의 호텔이 거기밖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트릭랜드가 주소를 속였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동업자에게 엉터리 주소를 가르쳐 주곤 그를 골탕먹일 작정이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때 왜 그런 추측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동업자를 파리까지 불러들여 추잡한 동네의 더러운 호텔로 헛걸음 시켜 놓곤, 스트릭랜드가 꽤 재미있어 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튼 한번 가보기는 해야겠기에 다음날 여섯시쯤 나는 마차를 몰고 므완 거리로 갔다. 호텔에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미리 봐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길 모퉁이에서 일단 내렸다. 그곳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찾을 만한 일용품 가게들이 가득한 거리였고, 그 한가운데로 걸어가니 왼쪽으로 오텔 데 벨쥬가 있었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은 수수한 편이지만, 여기에 비하면 호화스럽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높고 보잘것없는 건물에 몇해 동안 페인트칠이라곤 해보지도 않은 듯했다. 호텔 전체의 더러움 때문에 양쪽에 있는 집들이 오히려 돋보일 정도였다. 더러운 창문은 전부 닫혀있었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명예나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모두 버리고 멋진 여성과 함께 도망쳐서 죄악에 파묻힌 쾌락을 누리는 곳이라면 이런 곳일 리가 없었다. 조롱당했다는 모욕감에 나는 화가 벌컥 났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돌아오려 했다. 그래도 결국 들어가 보기로 한 것은 오로지 부인에게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출입문은 어떤 상점 옆으로 나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고, 사무실은 2층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계단 중간의 넓은 장소에 유리로 막은 칸막이 방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안에 탁자 한 개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바깥에는 긴 의자가 하나 있었는데, 아마 그 위에서 밤 당번이 매일 밤 새우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고, 다만 벨 밑에 ‘보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것을 누르니까 잠시 후 보이가 나타났다. 남을 힐끗힐끗 쳐다보는 것 같은 눈초리에 퉁명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젊은 녀석이었는데, 짧은 셔츠에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주 태연하게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혹시 스트릭랜드란 분이 여기 묵고 있지 않나?”
“6층 32호실입니다.”
나는 어찌나 놀랐는지 잠시 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계신가?” 보이는 사무실 안의 칠판을 들여다보았다.
“열쇠를 안 맡겨 두셨으니, 올라가 보세요.”
나는 이왕이면 한마디 더 물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부인도 같이 계신가?”
“아니, 혼자이십니다.”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는 나를 의아스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층계는 어두웠고 탁한 공기와 기분 나쁜 곰팡이 냄새까지 풍겼다. 3층으로 올라가니 실내 가운을 걸치고 머리를 풀어헤친 웬 여자가 문을 열고 내가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윽고 6층에 올라가 32호실이라고 써 있는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조금 열렸다. 그 다음 내 눈앞에 찰스 스트릭랜드가 서 있었다.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를 몰라보는 게 분명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한 다음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보이려고 무척 해를 썼다.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군요. 지난 7월에 댁의 만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들어오시오.” 그는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와서 반갑소. 거기 어디 앉으시죠.”
나는 들어갔다. 아주 작은 방으로 프랑스인들이 루이 필립식이라고 부르는 가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커다란 나무 침대가 있었고. 그 위에는 파도와 같이 부풀어 오른 붉은 빛의 새털 이불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양복장이 하나, 둥근 탁자가 하나, 아주 작은 세면대, 붉은 헝겊으로 커버를 씌운 의자가 둘 있었다. 모든 것이 지저분하고 낡아빠진 것으로, 맥앤드루 대령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던 스트릭랜드의 방탕적 사치스러움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한쪽 의자에 얹혀 있던 옷을 마룻바닥에 던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거기에 앉을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조그만 방 안에서 보니까 그는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 낡은 노퍽 재킷(허리에 밴드가 있고 앞뒤에 주름이 있는 헐렁한 남자 재킷)을 입었고, 수염은 며칠이나 깍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보았을 때는 단정하게 차리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편치 않은 기색이었는데, 이번에는 옷차림도 엉망이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는데도 아주 마음 편하게 보였다. 내가 미리 준비해 가지고 온 말을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부인을 대신해서 찾아왔습니다.”
“마침 저녁 전에 한 잔할까 하던 참이었소. 나와 같이 가시지 않겠소? 압생트 술을 마실 줄 아오?
“마실 줄 압니다.”
“그럼 갑시다.”
그는 손질도 하지 않은 중절모를 집어 썼다.
“우리 함께 저녁이나 합시다. 당신이 한 번 저녁을 낼 빚이 있지 않소?”
“좋습니다. 그런데 혼자 계시나요?”
그 중요한 문제를 아주 자연스럽게 끄집어 낼 수 있어서 나는 속으로 기분이 아주 좋았다.
“아 그럼, 혼자죠. 사흘 동안 누구와 얘기 한 번 못 했다오. 불어 실력이 워낙 시원치 않아서.”
앞장서서 층계를 내려가면서 나는 그 다방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벌써 둘이 싸우고 헤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의 애정이 식어 버린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거의 1년이나 이런 필사적인 모험을 위해 준비공작을 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우리 두 사람은 클리시 거리까지 걸어가 어느 큰 카페의 도로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12.
그 시간에 클리시 거리는 사람들로 인해 꽤 혼잡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천박한 로맨스의 주인공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회사원과 여점원들, 발자크의 소설 속에서 금방 걸어 나온 것 같은 노인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먹고 사는 가지가지 직업의 남년 군상들이 거기에 있었다.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의 거리에는 예기치 못한 일로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파리를 잘 아십니까?” 내가 물었다.
“아니, 신혼여행 때 한 번 왔을 뿐, 그 이후로는 처음이오.”
“그럼 도대체 지금 그 호텔은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누가 가르쳐 주더군요, 싼 곳을 찾으니까.”
압생트 술이 나왔다. 우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녹아드는 설탕 위에 물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제가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나는 약간 난처한 기분을 느끼면서 말문을 열었다. 그의 눈이 반짝 거렸다.
“조만간 누가 오리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소. 에이미에게서도 여러 번 편지가 왔으니까.”
“그럼 제 용건도 대강은 짐작하시겠군요?”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았소.”
나는 잠시 여유를 가지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용건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미리 준비해 온 말들이 그의 동정에 호소하는 어조이든, 그를 비난하는 어조이든 간에 여기 클리시 거리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갑자기 그가 껄껄 웃었다.
“맡은 일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닌 모양이군요?”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이봐요, 그럼 빨리 해치워 버리고 우리 유쾌하게 한잔 듭시다.”
나는 망설였다.
“부인께서 얼마나 슬퍼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곧 괜찮아질 거요.”
이렇게 대답할 때의 그의 냉담함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바람에 나는 잠깐 당황했으나 그런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나는 목사인 헨리 삼촌이, 친척들에게 ‘특별 목사보(牧師褓)협회’에 기부금을 내도록 설득할 때의 어조로 “솔직히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죠?” 라고 말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할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없소.”
“그럼 부인에게 무슨 불만이라도 있단 말인가요?”
“아니, 하나도 없소.”
“그럼, 불만이 하나도 없다면서 17년 동안이나 살아온 결혼생활을 그런 식으로 파괴한다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심하죠.”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의의를 달지 않고 순순히 동의하자 버티고 서 있는 발 밑이 무너져 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되자 내 입장이 복잡해진 것은 물론이고, 아주 우스운 꼴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를 설득하고 사정하고, 그 담엔 권고와 훈계, 그리고 간청을 한 후에 그래도 안 된다면 화를 내며 꾸짖고 욕설과 비난을 퍼부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죄지은 자가 서슴없이 자기 죄를 고백하는데, 훈계하는 쪽에서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항상 모든 것을 부인해 보는 습관이 있던 나로서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그 다음은 뭐요?” 스트릭랜드가 물었다.
나는 일부러 입을 삐죽거려 보았다.
“그렇게 모든 걸 다 인정하신다면 더 말씀드릴 것도 없잖습니까?”
“그렇겠군요.”
이런 식으로 가다간 내가 맡은 임무를 수행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느껴지자 나는 확실히 초조해졌다.
“아니, 이봐요. 세상에 한 푼도 남겨 놓지 않고 자기 아내를 버리다니 말이나 됩니까?”
“뭐 안 될 이유라도 있소?”
“아니 그럼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이오?
“17년 동안 벌어 먹였으니, 이제 자기 힘으로 살아 보는 것도 좋을 거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한번 해보라고 하시오.”
대꾸를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라든가 결혼으로 인해 남자가 공공연히 혹은 암암리에 승인해야 하는 계약이라든가 그밖의 여러 가지를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결국 한 가지였다.
“그래서 부인을 더 이상 돌보지 않을 작정이오?”
“그렇소, 조금도.” 하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당사자들에겐 아주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겠지만,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나는 그의 행동을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환기시켜야만 했고 그의 부도덕함에 분노를 느끼려 애를 써야만 했다.
“원, 세상에! 아이들 생각도 해야 할 것 아니오.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이들이 낳아 달라고 당신한테 부탁이라도 했습니까? 그대로 놔두면 거리로 나앉을 거요.”
“그 애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어느 애들보다도 호강스럽게 지내 왔소. 아마 누가 돌봐 줄 거요. 사정이 딱하게 되면 맥앤들루 대령이 학비쯤은 대줄 거요.”
“애들이 귀엽지도 않소? 정말 귀여운 애들이던데요. 그 애들과도 완전히 인연을 끊겠단 말인가요?”
“그야 어릴 때는 귀여웠죠. 하지만 이젠 다 크고 보니 별로 귀여운 생각도 안 듭니다.”
“당신은 인간도 아닙니다!”
“당연하오.”
“염치도 없습니까?”
“없소.”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개나 돼지와 같다고 할 겁니다.”
“마음대로 그러라지.”
“아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멸시하고 경멸해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오?”
그의 간단한 대답이 어찌나 경멸에 차 있던지, 당연히 내 질문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다시 물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멸시를 받는 줄 뻔히 알면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란 누구나 양심을 갖고 있는 법입니다. 당신도 곧 양심의 가책을 느낄 겁니다. 가령 부인이 죽는다고 생각해 보시오. 그런다고 해도 후회가 안 되겠습니까?”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으나 결국 내가 다시 침묵을 깨뜨렸다.
“왜 대답이 없으시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바보라는 것밖에 할 말이 없군요.”
“어쨌든 싫든 좋든 가에 당신은 처자식을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법률이 그들을 보호해 줄 거요.”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이렇게 쏘아붙였다.
“아무리 법률이라도 목석한테서 피를 짜낼 도리가 있겠소? 나는 돈이라고는 한푼도 없소. 있다고 해도 겨우 1백 파운드나 될까.”
나는 더욱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기야 그가 묵고 있는 호텔을 보더라도 그의 말이 사실인 것 같긴 했다.
“그 돈마저 쓰고 나면 어떻게 할 거요?”
“벌면 되오.”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상대방을 조롱하는 미소를 머금고 있어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이 오히려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이젠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에이미는 재혼하면 될 것 아니오? 아직 아니도 젊은 편이고, 꽤 매력적이니까. 아내로서도 나무랄 데 없고, 이혼하고 싶다면 필요한 이유쯤은 대줄 수도 있소.”
이번에는 내가 웃을 차례였다.
아주 약하게 굴고 있지만, 그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어서 여자와 같이 도망친 사실을 감추려고, 지금까지 이런저런 딴소리를 해서 그 여자가 있는 곳을 숨기려 한 것이 뻔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해 주었다.
“부인은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이혼은 못 해주겠다고 합니다. 단단히 결심하셨더군요. 그러니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정말 놀랐다는 듯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꾸민 듯한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입가에는 웃음이 사라지고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야 난 아무 상관도 없소. 이혼을 하든 안 하든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
나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것 봐요, 그렇게 우리를 바보 취급하지 마시오. 당신이 어떤 여자와 같이 도망갔다는 것쯤은 이쪽에서도 이미 알고 있단 말이오.”
그는 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게 웃었던지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돌아보고 그 중엔 같이 따라 웃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웃을 일이 아닌 텐데.”
“에이미도 별수 없는 인간이군.”
그는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에 격렬한 냉소의 표정이 떠올랐다.
“여자란 별수 없나 보군요? 사랑, 그저 언제든지 사랑이야. 남편이 자기를 떠나면 으레 다른 여자에게로 가는 줄 알거든. 당신도 내가 여자 하나에 미쳐서 이러는 바보라고 생각하오?”
“아니 그럼, 여자 때문에 부인을 버린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그야 물론이지.”
“당신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왜 내가 그런 식으로 물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나도 꽤 순진했던가 보다.
“암, 내 명예를 걸고서라도 맹세하오.”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집을 나왔단 말이오?”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요.”
나는 오랫동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혹시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나는 젊었기 때문에 그를 단지 다 늙은 중년 남자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대답을 듣고 미처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얼떨떨하기만 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마흔 살이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소.”
“전에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까?”
“어릴 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소. 그런데 아버지가 그림으로는 돈을 벌기가 어려우니 장사를 배우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림을 포기했던 거요. 사실 1년 전부터 조금씩 그리기 시작했소. 지난 일 년 동안 밤에 그림 공부를 하러 다녔소.”
“아, 그러니까 부인에게는 클럽에 브리지를 하러 간다고 하고 거기 가신 거군요?”
“그렇소.”
“그럼 왜 부인에겐 얘기하지 않으셨습니까?”
“혼자만 알고 싶었소.”
“그래, 그림은 잘 됩니까?”
"아직은 잘 안 되오. 그렇지만 앞으로는 잘 될 거요. 내가 여기 온 이유도 거기에 있소. 런던에서는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었지만 여기선 될 거요."
"당신 같은 나이에 시작해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소? 대개는 17,8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잖소."
"지금도 18세 때보다 빨리 배울 수 있소."
"당신은 그 정도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죠?"
잠시 대답이 없었다. 지나가는 군중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들을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지만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무튼 나는 그림을 그려야겠소."
"그건 보통 모험이 아닐 텐데요?"
그는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이상한 광채를 띠고 있어서 나는 약간 불안해졌다.
"당신은 몇 살이오? 스물 셋?"
그의 질문은 화제의 초점을 벗어난 것이었다. 나 정도의 나이에 그런 모험을 한다면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이미 젊음이 지나가 버린 중년이고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가장이며 안정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증권중개인이 아닌가. 내게는 당연한 일이라도 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일이 될 수 있다. 나는 가능한 한 공정한 입장에서 애기하고 싶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난다면 당신도 화가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기적이 일어날 확률이 만분의 일도 안 된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결국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느낄 실망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하오." 그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가령 당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삼류 화가에 그치고 만다면, 그래도 그것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직업이라면 아주 뛰어난 재능이 없다 해도 상관없겠죠. 그저 보통 정도의 능력만 있어도 그럭저럭 해나 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술가는 전혀 다르죠."
"당신은 정말 지독한 바보로군."
"아니, 이렇게 명백한 얘기를 하는데 뭐가 바보란 말이오?"
"어쨌든 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말했지 않소.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수영을 얼마나 잘 하나 못하나 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소?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물에서 빠져나오든지 아니면 죽든지 그것밖에 더 있겠소?"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진실한 정열이 담겨 있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명을 받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어떤 격렬한 힘을 내게도 느껴졌다. 그 힘은 너무도 강하고 압도적으로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의 의지로는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는 마치 어떤 악마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으며, 그 악마가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그의 몸과 마음을 온통 헝클어뜨려 놓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는 아주 정상적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아도 그는 나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낡은 노퍽 재킷에 먼지투성이의 중절모를 쓰고 앉아 있는 그가 다른 낯선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바지는 자루같이 불룩하고 손은 씻지 않아 더러웠으며, 면도도 하지 않아 턱에는 붉은 수염이 자라 텁수룩했다. 또한 조그만 눈과 그와 대조적으로 커다란 코, 모든 것이 거칠고 야성적으로 보였다. 게다가 입은 커다랗고 입술은 두껍고 육감적이었다.
이런 모습이니, 나 역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럼 정말 부인에게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군요?"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절대로 안 갈 거요."
"부인께서는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없었던 일로 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십니다. 지난 일에 대해서 당신을 전혀 책망하지 않고 말이오."
"마음대로 하라지."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비열한 사람이라고 욕해도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부인과 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러 다녀도 상관없단 말입니까?"
"내가 알 바 아니오."
나는 다음에 할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힘주어 천천히 말했다.
"당신은 천하에 둘도 없는 비열한 사람이오."
"자, 이제 그만 하면 당신도 속이 후련해졌을 테니 이제 어디 가서 저녁 식사나 합시다."
13.
내가 이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분노를 그대로 보여 주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비열한 사람과는 함께 식사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와 버렸다고 보고할 수 있다면 최소한 맥 앤드루 대령은 나를 좋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 나는 항상 어떤 문제에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꺼려하곤 했다. 이 경우에도 내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봤자 스트릭랜드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런 얘기를 꺼내기가 싫었다. 백합꽃이 꼭 필 거라고 기대하며 아스팔트 도로 위에 열심히 물을 주는 사람은 시인이나 성자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술값은 내가 내고, 우리는 손님들이 북적거리는 허름하고 시끄러운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나는 젊었기에 어찌할 수 없는 식욕이 있었고 그는 양심이 이미 굳어 버린 사람이었기에 둘 다 배부르게 실컷 먹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술집으로 가서 커피와 술을 마셨다.
이제 내가 파리에 온 용건에 대해서는 모두 말한 셈이었다.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은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그의 비장한 무관심에는 나도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었다. 나는 포기할 줄도 모르고 같은 일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스트릭랜드의 지금 심경을 자세히 관찰해 두는 것이 더 좋을 거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또한 내 관심도 그 쪽에 더 쏠렸다. 그러나 스트릭랜드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언어란 자기의 생각을 전달해 주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 그는 의사표현이 매우 서툴렀다. 그러니 그가 상투적으로 많이 쓰는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는 속어, 모호한 몸짓 따위로 그의 정신상태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별로 대수로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성격에는 남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 나름대로의 성실성이나 순수성이었을 것이다. 그는 신혼여행 때를 제외하곤 처음 와본 파리에도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틀림없이 신기해 보일 정경을 보아도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나는 파리에 자주 오는 편이지만 올 때마다 흥분을 느끼며 가슴 설레곤 한다. 이 도시를 걸어다니면 항상 어떤 모험 속으로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그는 그의 영혼 속에 소용돌이치는 어떤 영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 밤 좀 뜻밖의 일이 생겼다. 그 술집에는 작부들이 많이 있었는데 몇 명은 남자들과 같이 앉아 있었고 몇 명은 자기네들끼리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 중 한 여자가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스트릭랜드의 시선과 부딪치면 그 여자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여자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잠시 후 밖으로 나가더니 곧 다시 들어왔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우리 테이블 쪽으로 와서 마실 것을 한잔 사달라고 청했다. 여자가 자리에 앉자, 나는 말을 건네 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관심은 확실히 스트릭랜드에게 가 있었다. 내가 그는 프랑스어를 모른다고 했더니 여자는 반은 몸짓으로, 반은 엉터리 프랑스어로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알아듣기가 더 쉽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영어도 몇 마디 섞어 가며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녀는 자기네 말로밖에 할 수 없는 것은 내게 통역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은 일일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았다. 스트릭랜드는 기분이 좋아서 즐거워하는 것 같았으나 그녀에게도 무관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예요." 하고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좋을 것 없소."
만약 내가 그의 입장이었다면 그처럼 침착하지 못하고 당황해서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그녀는 눈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고, 입술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나이도 젊어 보였다. 그녀는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내게 통역을 해달라고 졸랐다.
"이 여자가 당신과 같이 나가고 싶다는데요."
"싫소." 하고 그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는 가능한 한 여자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말로 통역해 주었다. 이런 청을 거절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나는 그가 마침 돈이 없어서 그런다고 돌려서 말해 주었다.
"난 저 사람이 좋아요. 그래서 그러는 거지 돈 때문이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내가 그녀의 말을 통역해 주자 스트릭랜드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꺼져 버리라고 해요."
그의 몸짓으로 보아 내가 통역을 해줄 필요도 없었다. 여자는 얼른 뒤로 몸을 젖혔다. 짙은 화장을 해서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마 얼굴이 빨개졌을 것이다. 여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내뱉듯이 말했다.
"이 분은 신사답지 못하군요."
그러고는 밖으로 급히 나가 버렸다. 나는 약간 화가 났다.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모욕을 줄 필요는 없었잖소. 그 여자는 오히려 당신에게 호감을 느꼈다는데."
"난 저런 여자를 보면 구역질이 나." 하고 그가 거칠게 내뱉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정말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얼굴 자체가 야성적이고 육감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 여자도 스트릭랜드가 풍기는 이런 야수성에 홀린 모양이었다.
"여자는 런던에도 얼마든지 있소. 난 그런 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오."
14.
영국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부인에게 해야 할 말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해결된 일이 없었으므로 부인이 내 말에 만족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우선 나 자신도 만족할 수 없었으니까. 스트릭랜드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화가가 되려는 동기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에 어째서 화가가 될 생각이 들었냐고 물어 보았을 때도 그는 말을 할 수 없었든지, 아니면 하고 싶지 안았는지는 모르지만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셈이었다. 나는 희미한 반항심이 그의 우둔한 마음속에서 차츰 머리를 들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그가 여태까지 단조로운 생활에 초조한 기색이나 불만을 내보인 적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그러한 생각을 가로막았다.
만일 그가 권태로운 생활을 참다 못해 진절머리나는 모든 관계를 끊기 위해 화가가 될 결심을 했다면 이해할 수도 있었고 또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느낀 바로는 그의 경우는 이런 흔한 일에도 해당되자 않았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해 본 끝에 내가 생각해도 무리인 줄 알면서도 나 자신이 그때는 괘 낭만적이었기에 나름대로 제일 만족스러운 설명을 꾸며댔다. 그것은 이렇다.
주위 환경에 의해서 그 동안 숨겨져 있긴 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창조적 본능이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는데, 이것이 암세포처럼 맹렬하게 퍼져나가 그의 온몸과 마음을 휘감아서 그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도록 만들고 드디어는 어떤 행동을 일으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뻐꾸기는 다른 새 둥지에 알을 낳는데 알에서 깨어난 새끼 뻐꾸기는 함께 깨어난 다른 새끼 새들을 모두 쫓아내고 나중에는 그 둥지마저 부숴 버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도 창조본능이 하필이면 이 평범한 증권 중개인을 사로잡아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까지 불행으로 몰아넣다니 너무도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도 신이 권세와 부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따라다니며 굴복시켜 결국은 그들이 세속적인 즐거움이나 여자의 사랑까지도 모두 버리고 고통스럽고 엄격한 수도원 생활을 택하도록 하는 운명의 장난보다 더 기구할 것은 없다.
이렇듯 운명을 바꾸는 것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성난 격류에 바위가 먼지처럼 부서지는 격변을 거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에 돌이 닳듯이 서서히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스트릭랜드는 광신자들의 솔직함과 사도들의 격렬함을 모두 다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가, 그가 과연 그를 사로잡고 있는 정열이 정당화될 만큼 훌륭한 작품을 그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런던에서 그림 공부를 하러 다닐 때 동료들이 그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하더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히죽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줄 알더군."
"여기서도 화실에 다니시나요?"
"그렇소, 오늘 아침에도 그 선생이란 작자가 내 그림을 한번 쓱 훑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냥 지나가 버리더군."
그는 말을 하고 나서 혼자 껄껄 웃었다. 그러나 조금도 낙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와 얘기하면서 가장 곤란했던 것이 바로 이런 점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이상한 행동을 알아채지 못할 거라고 확신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되는 행동을 곧잘 하는 것은 오히려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습을 타파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인습에 지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의 눈에 인습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일쯤은 그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그런 일은 그리 흔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터무니없는 자존심까지 생기게 된다. 위험이라는 불편도 겪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은 문명인의 가장 뿌리깊은 본능일 것이다. 때문에 사회의 격분한 도덕적 일격이나 화살에 자신을 노출할 수 있을 만큼 대담하게 인습을 타파하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가장 먼저 체면이라는 방어물 안으로 숨어 버리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의 평판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일수록 믿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오는 허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꼬리를 잡힐 것 같지 않으니까 세상이 뭐라고 하든 겁날 게 없다는 식이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정말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인습은 그의 행동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그는 온몸에 기름을 칠한 레슬링 선수와 같아서 아무도 그를 잡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불법행위와도 같은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사람들이 모두 당신처럼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세상은 과연 어떻게 되겠소?"
"별 쓸데없는 소리를 다 하는군. 도대체 누가 나를 따라하겠소?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범한 생활을 하는 데 상당히 만족하는 법이오."
또 한 번은 이렇게 빈정거려 보기도 했다.
"당신은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겠죠? 네 자신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그런 말을 들어 본 적도 없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헛소리요."
"아니, 이것은 칸트가 한 말입니다."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지."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양심에 호소를 한단 말인가. 거울도 없는데 그 속에 비치는 그림자를 찾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양심이란 사회가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여러 법칙을 개인의 마음속에서 지키는 감시인이 아닌가. 그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 마음속에 그 법률이 침범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경찰관이다. 우리들 자아의 성채 깊숙이 들어가 있는 스파이이다. 주위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고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나 강하기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적을 문 안에 불러들이는 셈이다.
그러면 이 적은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여 집단에서 이탈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자기 주인인 사회를 위하여 일찌감치 끊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보다 사회의 이익을 앞세우게 되고 개인을 전체에 얽매어 놓는 억센 사슬을 형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익보다 더 크다고 스스로 납득시킨 집단의 이익 앞에 굴복하여 주인 앞에 나선 종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주인을 귀빈석에 앉히고 자기의 어깨 위에 떨어지는 왕의 채찍에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양심의 예민함을 자랑할 따름이다. 그리고 양심을 지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입이 따갑도록 비난과 욕설을 퍼붓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그가 이런 인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을 너무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비난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을 보고, 나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이 괴물에 소름이 끼쳐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그가 던진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에이미에게 나를 쫓아다녀 봤자 소용없다고 전해 주시오. 곧 여관도 바꿀 생각이니까 더 이상 나를 찾아내지 못할 거요.”
“제 생각에도 부인이 당신 같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그거 좋은 말이오. 당신이 제발 잘 얘기해서 그녀를 설득해주시오. 하지만 여자들이란 여간 단순한 바보가 아니라서......”
15.
런던에 돌아와 보니 스트릭랜드 부인에게서 온 편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에 곧 와달라는 내용이었다. 가보니 맥앤드루 부부가 벌써 와 있었다. 스트릭랜드 부인의 언니인 대령의 부인은 동생과 닮은 점이 있긴 했지만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녀는 상류 계층의 부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고 마치 대영제국을 혼자서 짊어지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자기들이 특권층이라는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행동도 신속하고 예절도 갖추었으나 인간으로 태어나 군인이 될 수 없으면 차라리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 낫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잘난 척한다고 싫어했고 잘 찾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부인들에 대해서는 입에 담기도 싫다는 투였다. 옷차림은 돈만 많이 들였지 촌스러워 보였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옆에서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어서 얘기 좀 해주세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스트릭랜드 씨를 만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한 것 같았어요.”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시더군요.”
“아니, 뭐라고요?” 부인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그분이 그런 일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계셨던 것을 지금까지 전혀 몰랐습니까?”
“그 녀석이 완전히 미쳤군.” 대령이 소리쳤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얼굴을 약간 찌푸리고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기 전에 그림 물감 통을 갖고 다니던 기억이 나요. 그렇지만 그런 엉터리 그림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솜씨가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우린 늘 놀려 주곤 했죠. 그는 그림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 말은 핑계일 뿐이야.”
스트릭랜드 부인은 한동안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한 말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주부로서의 본능으로 어느 정도 괴로움을 극복했던 모양인지 이제는 응접실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처음 이 집에 찾아왔을 때 보았던, 세를 놓기 위해 내놓은 집 같은 그런 황폐함은 없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스트릭랜드를 직접 만나 보고 온 지금에는 그가 이 방에 다시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이가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면 왜 제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스트릭랜드 부인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맥앤드루 부인은 말이 없었다. 이 여자는 자기 동생이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교양(culture)’이라는 말을 일부러 비웃듯이 ‘컬초’라고 발음했다.
스트릭랜드 부인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이에게 무슨 재능이 있었다면 제일 먼저 격려해 줄 사람은 바로 저예요.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증권 중개인보다 화가와 결혼하는게 훨씬 좋으니까요. 아이들만 없다면 전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 첼시의 누추한 아틀리에서 살아도 이 집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에이미,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따위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믿고서 하는 말이냐?” 맥앤드루 부인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끼여들자 그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마흔 살이나 되는 남자가 이제 와서 화가가 되겠다고 사업과 가족을 버리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틀림없이 당신들 같은 예술이나 한다는 그런 여자에게 빠져서 머리가 돌아 버린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스트릭랜드 부인의 창백한 뺨이 붉게 물들었다.
“어떤 여자던가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할 말이 일종의 폭탄 선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없었어요.”
맥앤드루 부부는 못 믿겠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니, 당신은 여자를 만나지도 못했다는 말인가요?”
“만나고 말고 할 게 없었습니다. 그분 혼자였으니까요.”
“그럴 리가 없어요. 말도 안 돼.” 대령 부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갔어야 했어. 나라면 당장 여자를 찾아냈을 텐데.” 이번에는 대령이 말했다.
“네. 당신이 가시는 게 더 좋았을 겁니다.” 나는 약간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그랬다면 당신의 추측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아셨을 테니까요. 우선 호텔도 고급 호텔이 아니었습니다. 지저분한 거리에 있는 초라한 여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며 향락을 좇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돈도 한푼도 가지고 있지 않더군요.”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무슨 나쁜 일을 저지르고 경찰이 무서워서 꼼짝도 않고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이런 빗나간 추측은 모두의 가슴에 서광을 비춰 주는 듯했으나 나는 전혀 귀를 귀울이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왜 바보같이 자기 주소를 동업자에게 가르쳐 주었겠습니까?”
나는 날카롭게 반박했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그분은 여자와 도망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분은 연애 같은 것엔 관심도 없어요. 머릿속에 온통 다른 일이 꽉 차 있어서 그런 건 들어갈 틈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내가 한 말을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는지 한동안 말이 없이 침묵이 감돌았다.
“만일 당신이 한 얘기가 사실이라면.......” 마침내 맥앤드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사태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군요.”
스트릭랜드 부인은 언니를 흘끗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아름다운 이마가 어두워지며 험악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대령 부인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일시적인 변덕이라면 곧 나아질 거야.”
“에이미, 당신이 한 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떨까?” 대령이 마음을 정했다는 듯 말했다. “한 1년쯤 파리에 가서 같이 살아도 좋을 거야. 아이들은 우리가 돌봐 줄 테니. 그 사람은 근래에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 아무튼 얼마 안 가서 곧 런던으로 돌아오고 싶어할 테니 그렇게 걱정할 일은 없을 꺼야.”
“나 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꺼야.” 맥앤드루 부인이 말했다.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면 얼마 안 있어 꼬리를 내리고 돌아올 거고 예전처럼 편안하게 지내고 싶어할 거야.” 그러고는 동생을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에이미, 네가 똑똑하게 굴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남자란 괴상한 동물이라서 여자들이 다루는 법을 잘 알아야 해.”
맥앤드루 부인은 보통 여자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남자들이란 자기에서 호의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여자를 버리는 잔인한 습성이 있으며, 남자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여자 쪽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또 다른 이성을 가지고 있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우리 세 사람을 차례로 천천히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그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너도 방금 들었잖니. 그 사람은 누가 옆에서 보살펴 주지 않으면 잠시도 못 견디는 사람이고 여지껏 고생도 모르고 지내 왔잖아. 그러니 그런 초라한 호텔방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건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그리고 돈도 없다잖아. 그는 곧 돌아올 거야. 틀림없다니까.”
“그이가 어떤 여자와 함께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때는 아직 희망이 있었어요. 그런 일은 오래가지 못하니까요. 석 달만 있으면 그 여자에게 싫증이 날 게 뻔하거든요. 그렇지만 그런 문제 때문에 집을 나간 게 아니라면 모든 게 끝난 거예요.”
“그것 참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군.” 대령은 자신의 군인 기질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런 사고 방식을 경멸하는 투로 힘을 주어 말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소? 그는 반드시 돌아온다니까. 언니도 얘기한 것처럼 한동안 자기 맘대로 그렇게 지낸 다음에 다시 돌아올 거야.”
“하지만 난 그이가 돌아오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에이미, 그게 무슨 말이야?”
스트릭랜드 부인은 노여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창백한 표정은 냉정과 격한 분노에서 온 것이었다. 그녀는 숨을 약간 가쁘게 쉬면서 말했다.
“어떤 여자에게 미쳐서 달아난 거라면 난 차라리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그렇다면 그이를 비난하지도 않겠어요. 본래 남자란 유혹에 약한 법이잖아요.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달라요. 난 그이를 증오해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맥앤드루 대령 부부는 번갈아 가며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그들은 너무 놀라서 그녀에게 지금 제정신이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들은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아시겠죠?”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부인 말씀은 그분이 여자 관계로 부인을 버린 거라면 용서할 수 있어도 어떤 이상(理想)을 위해서 부인을 버린 거라면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여자라면 상대해 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인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를 바라보았지만 그것은 결코 호의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마 내 말이 정확하게 핵심을 찌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스트릭랜드 부인은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그 사람을 이만큼 미워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동안 난 이 일이 아무리 오랫동안 계속된다 해도 결국에는 그이가 돌아올 거라고 나 자신을 위로했어요. 마지막 죽는 순간에는 그도 날 부를 것이고 그러면 나는 곧 달려가서 그이를 어머니처럼 간호해 주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겠다고, 난 늘 당신을 사랑했다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말할 생각이었어요.”
나는 항상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가 죽는 순간에 이렇게 아름답게 임종을 지키고 싶어하는 그 열정에 좀 당황스러워 하곤 했다. 때로는 그들이 그런 극적인 장면을 보여 줄 기회가 없을까봐 남편들이 오래 사는 게 불만일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 때조차 있었다.
“하지만 이젠...... 이젠 모든 게 다 끝났어요. 이제 그에겐 아무 관심도 없어요. 그가 남같이 느껴져서 그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그가 단 한명의 친구도 없이 가난하고 굶주린 채 비참하게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아주 몹쓸 병에 걸려 썩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전 이제 그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이제 모든 게 완전히 끝났어요.”
나는 이제 스트릭랜드가 한 이야기를 마저 들려 주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부인께서 이혼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그에 필요한 소속을 해드리겠다고 하더군요.”
“내가 왜 그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죠?”
“물론 그럴 필요야 없겠죠. 하지만 그분은 그러는 편이 부인을 위해서 더 낫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는 그때 그녀에게 약간의 실망감을 느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사람을 좀더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의 내부에 그런 무서운 복수심이 숨어 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한 사람의 마음속에 비열함과 숭고함, 악의와 자비, 증오와 사랑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을 괴롭히고 있는 그 비참한 굴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없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어찌됐든 그런 말을 꺼내 보기로 했다.
“스트릭랜드 씨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모두 책임질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떤 힘에 사로잡혀 이용당하고 있으며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 같았습니다. 마치 누군가 마술을 걸어 놓은 것처럼 말입니다. 전 사람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서 본래 있던 사람을 몰아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분을 만났을 때 그런 기이한 이야기가 생각나더군요. 이간의 정신은 육체 속에서 늘 불안정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어느 순간 이상한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라면 아마 그에게 귀신이 씌웠다고 했겠지요.”
맥앤드루 부인이 웃옷자락을 쓸어 내리자 금팔지가 손목으로 흘러내렸다.
“터무니없는 말이에요.” 그녀는 불쾌한 어조로 매섭게 내뱉었다. “에이미가 남편을 너무 믿은 게 탈이에요. 그 동안 자기 일에 정신 팔려 있지만 않았어도 남편에게 이상한 기색이 있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을 텐데. 만일 내 남편이 일 년 동안이나 어떤 계획을 품고 있었다면 난 그렇게 까맣게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대령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그만큼 교활한 데라고는 전혀 없는 순진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어쨌든 찰스 스트릭랜드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요.” 대령 부인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가 왜 에이미를 버리고 달아났겠어요? 그건 순전히 자기 이기심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요."
"하긴 그게 가장 간단한 설명이 되겠군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피곤해서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일어섰을 때 스트릭랜드 부인은 나를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16.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스트릭랜드 부인은 의지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고통을 겪어도 그것을 결코 밖으로 들어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남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어 주는 데 금방 싫증을 내고 남이 괴로워하는 모습은 될 수 있는 한 보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불행을 동정하는 친구들이 그녀를 자주 초대했는데 그녀는 어디에서든지 전혀 흠잡을 데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녀는 적극적이었지만 결코 지나칠 정도는 아니었고 명랑하고 스스럼없이 행동했으나 결코 뻔뻔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자기의 불행에 대해 하소연하기보다는 남의 이야기에 더 열심히 귀를 기울이곤 했다. 남편에 대해 얘기할 때도 동정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그녀의 그런 태도가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아 좀 당황스러웠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남편이 혼자 있었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잘못 보신 것 같아요. 누구에게서 들었는지는 밝힐 수 없지만 그 동안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남편이 영국을 떠날 때 분명히 혼자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정말 그렇다면 그분은 자기의 흔적을 감추는 데는 천재적인 능력이 있는 것 같군요."
부인은 눈길을 돌렸고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누군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도 절대로 반박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러죠."
그러고는 부인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상한 이야기가 부인 친구들간에 떠돌고 있는 것을 알았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엠파이어 극장의 발레 공연에서 처음 본 어느 프랑스 무희에게 반해서 그녀를 따라 파리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문 덕분에 세상 사람들의 동정심이 스트릭랜드 부인에게 많이 쏠리게 되었고 동시에 적잖이 위신도 회복하게 되었다. 또 이 소문은 그녀가 직업을 갖기로 결심한 후였기 때문에 그런 점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언젠가 맥앤드루 대령이 스트릭랜드 부인은 무일푼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부인은 하루 빨리 생활수단을 찾아야 했다.
그녀는 여러 문인들과 알고 있는걸 이용해 그들에게 일을 얻을 생각을 하고 속기와 타이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부인은 원래 교육을 잘 받은 덕에 다른 타이피스트보다 우수했고 또 이번 일로 다들 그녀를 동정하고 있었으므로 알고 지내던 작가들은 자기 일을 맡기겠다고 약속을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맥앤드루 부부는 자식이 없었고 경제적인 형편도 좀 여유가 있는 편이라 아이들을 돌봐 주었기 때문에 부인은 자기 혼자만 해결하면 되었다. 아파트는 다른 사람에게 세를 놓고 가구는 팔아치웠다. 그러고는 웨스트민스터에 조그만 방 두 개를 얻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워낙 능력 있는 여성이라 그녀는 새로운 인생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다.
17.
그 일이 있은 지 5년이 지난 후 나는 잠시 런던을 떠나 파리에 가서 살기로 했다. 작품 활동도 부진했고 매일 똑같은 일만 되풀이하는 데도 싫증이 났던 것이다. 친구들은 안정된 길만 걷고 있어서 내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했고 만나 봤자 하는 얘기도 늘 똑같았다. 그들의 연애 사건까지도 지루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점에서 종점까지 다니는 전차와 같아서, 그 조그마한 구간 사이를 싣고 다니는 손님이 몇 명이나 되는지까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저 편하고 즐겁기만 하도록 틀에 박힌 그 생활이 나는 두려워졌다. 그래서 나는 작은 방을 비우고 몇 안 되는 물건들을 처분한 뒤 새로운 출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스트릭랜드 부인을 찾아갔다. 보지 못한 사이에 그녀는 꽤 많이 변해 있었다. 나이를 더 먹어 몸도 수척해졌고 주름살도 더 많아졌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도 변한 것 같았다.
그 동안 그녀는 사업에 성공하여 지금은 챈서리 레인에 사무실을 내고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타이핑을 하지 않았고 그녀가 고용한 네 명의 타이피스트들이 친 원고를 교정해 주었다. 그녀는 원고를 좀더 우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푸른색과 붉은 색 잉크를 많이 사용했고 제본을 할 때도 표면이 우둘두둘한 엷은 빛깔의 종이를 사용했다. 그녀는 일이 깨끗하고 정확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고 돈도 꽤 벌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손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다지 품위 있는 일이 아니며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기가 원래 귀부인이었다는 것을 드러냈고,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가까이 지내는 명사의 이름을 자꾸 끄집어내어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인식시키려고 애를 쓰곤 했다. 부인은 자기의 용기와 사업 수완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했으며, 그보다 내일 밤 사우스 켄싱턴에 사는 어느 왕실 변호사와 저녁 약속이 있다는 것을 더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아들이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닌다고 말하며 무척 기분 좋아했고, 또 사교계에 나간 지 얼마 안 되는 딸에게 무도회 초청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살짝 웃기까지 했다.
그때 내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어리석은 일이다.
"따님에게 앞으로 이 사업을 맡기실 생각이세요?"
"아니, 천만에요. 그애에게 이 일을 시킬 순 없죠. 귀엽고 예쁘니까 어디 좋은 데로 시집갈 거예요."
"난 단지 그러면 부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린 겁니다."
"어떤 분은 그 애에게 연극배우를 시키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전 내키지가 않아요. 제가 유명한 극작가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배역을 맡게 할 수는 있겠지만 전 그 애가 이 사람 저 사람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게 싫어요."
부인의 그러한 배타적인 상류 의식에 나는 좀 기분이 상했다.
"그 동안 스트릭랜드 씨 소식은 좀 들으셨습니까?"
"아뇨, 한 번도 듣지 못했어요. 벌써 죽었는지도 모르죠."
"이번에 파리에 가면 혹시 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분 소식을 들으면 알려 드릴까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이가 정 어려운 처지에 있다면 조금 도와 드릴 생각은 있어요. 당신에게 돈을 좀 보내 드릴 테니 필요한 대로 그이에게 조금씩 전해 주시면 좋겠어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하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제의가 친절이나 호의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고생이 사람의 성격을 고귀하게 만들어 준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행복은 가끔 그러기도 하지만 불행은 대부분의 경우 인색하고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 뿐이다.
18.
나는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찰스 스트릭랜드를 만나게 되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 담 거리의 어는 집 5층에 조그만 방을 구하고 200프랑으로 우선 필요한 가구들을 샀다. 그리고 그 집 아주머니에게 아침마다 커피를 타줄 것과 방 청소를 부탁했다. 그런 다음 친구인 더크 스트로브를 만나러 갔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더크 스트로브는 생각만 해도 비웃음을 참지 못한다든가 아니면 어깨라도 한 번 으쓱거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타고난 어릿광대였다. 화가이긴 하지만 그림은 형편없었다.
처음에 그를 만난 곳은 로마였는데, 그의 그림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는 흔해 빠진 소재를 언제나 진지한 태도로 그리곤 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사랑으로 가슴을 불태우면서, 스파냐 광장에 있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돌계단 주위를 서성이는 사람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화실에 가득 쌓여 있는 그림들도 눈이 큰 농부가 턱수염을 기르고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 누더기를 걸친 장난꾸러기, 울긋불긋한 치마를 입은 여자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교회의 돌계단을 거닐거나, 때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키프러스나무 그늘에서 즐겁게 놀고 있기도 하고, 르네상스식 우물가에서 사랑을 속삭이거나, 우차를 따라서 캄파냐 들판을 걷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나 꼼꼼하게 그리는지 사진보다 더 실물과 똑같을 정도였다. 빌라 메디치에 있던 어떤 화가는 그를 '초콜릿 상자그림의 대가'라고 부른 적이 있다. 사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모네라든가 그 밖의 인상파 화가들이 존재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화가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미켈란젤로만큼 훌륭한 화가는 아니야. 하지만 약간의 재주는 가지고 있지. 내 그림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내 그림은 모든 가정에 낭만적인 분위기를 전달해 주지. 이래봬도 내 그림이 네덜란드뿐 아니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에까지 팔리고 있다고. 사는 사람은 대부분 상인들이야. 그 중에는 꽤 돈 많은 무역 상인들도 있지. 자네는 그런 나라의 겨울이 어떤 줄 아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어둡고 춥다네. 그래서 모두들 이탈리아라는 나라를 내 그림과 똑같은 곳으로 생각하는 거지. 바로 그것이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고, 나 역시 이곳에 오기 전에는 이탈리아를 그렇게 상상했거든."
생각해 보니 언제나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눈을 현혹시킨 것은 바로 이 환상이었다. 무자비한 현실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마음의 눈으로 이탈리아를 낭만적인 도적과 아름다운 폐허가 있는 나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가 그리는 것은 하나의 이상이었다. 보잘것없이 평범하고 낡아빠진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의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 이상이 그의 성격에 독특한 매력을 안겨 주었다.
나는 그런 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스트로브를 조롱하지 않았다. 동료 화가들은 그의 그림에 대해서는 경멸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했다. 그가 너무 마음이 좋고 남이 아쉬운 소리를 하면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믿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형편이 어려운 동료들은 그러한 그를 오히려 비웃고 놀리면서도 그에게 돈을 빌려가곤 했다. 또 그는 감정이 풍부하고 쉽게 감동해서 오히려 정서적으로 좀 우스운 면이 있었던 터라 그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것은 어린아이에게서 돈을 빼앗는 것처럼 쉬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어리석다고 경멸했다. 마치 손동작이 빠르다고 자랑하는 소매치기가 보석을 가득 넣어 놓은 핸드백을 마차에 놓고 내리는 부주의한 여인에게는 오히려 분노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는 타고난 세상의 웃음거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감각이 둔한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여전히 비웃음을 살 만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자진해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천성이 착한 그는 끊임없이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서도 절대로 남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 아무리 같은 일이 반복되어도 독사가 자기를 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물린 상처만 나으면 곧 다시 정답게 가슴에 품어 안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인생은 소란한 익살로 씌어진 한 편의 비극이었다.
나는 그를 결코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내게 무척 고마워했고, 항상 내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이것저것 늘어놓곤 했다. 그런데 애처로운 것은 그가 하는 이야기들 중에서도 가장 슬프다는 것이 항상 우스꽝스러운 것이어서 그의 입장에서는 사연이 딱할지 몰라도 듣는 쪽에서는 자꾸만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화가로서는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미술에 대한 감각은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미술관에 가는 것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림에 대한 칭찬은 진실했고 비평은 예리했다. 관심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광범위했으며 모든 것을 포용했다. 옛 대가들의 작품을 진지하게 비평했을 뿐 아니라 현대 작가들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천재들의 재능을 찾아내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정확한 안목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또한 여느 화가들보다 교육수준도 높았으며, 그들과는 달리 미술과 연관성이 있는 다른 분야의 예술에도 꽤 조예가 깊었다. 음악과 문학에 관한 그의 관심은 그의 그림에 깊이와 다양함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래서 나 같은 젊은이에게 그의 조언과 지도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로마를 떠난 뒤에도 나는 그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두 달에 한 번쯤은 그에게서 괴상한 영어로 쓴 긴 편지가 오곤 했다. 나는 그의 편지를 읽을 때마다 요란한 제스처와 함께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는 내가 파리로 오기 얼마 전에 영국 여자와 결혼하여 지금은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마련하여 자리잡고 있었다. 그를 못 본 지가 4년이나 되었고 그의 부인은 물론 만난 적이 없다.
19.
온다는 것을 미리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스트로브의 아틀리에 벨을 누르자, 문을 열러 나온 그는 잠시 동안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곧 기쁨의 환성을 지르며 나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렇게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 주니 나는 무척 즐거웠다. 그의 아내는 난로 옆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일어났다. 그가 나를 아내에게 소개해 주었다.
"당신 기억나지? 내가 자주 얘기했잖아." 그는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나를 향해 "이 친구야, 왜 미리 온다고 연락하지 않았어? 파리에는 언제 왔는데? 얼마나 있을 거야? 한 시간만 더 일찍 왔으면 같이 식사라도 했을 텐데." 하며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그는 나를 의자에 앉혀 놓고 내가 마치 쿠션인 듯이 등을 마구 두드리면서 담배, 케이크, 술을 계속 권했다. 그는 잠시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침 집에 위스키가 없다고 낙담을 하기도 하고, 그럼 커피라도 끓여야겠다며 나를 위해 뭔가 대접할 것이 없나 열심히 머리를 짜내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싱글거리기도 하고, 껄껄 웃기도 하고, 즐거움이 넘쳐흘러 수선을 피우다가 그 바람에 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다.
"그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나는 그를 보고 웃으면서 말해다.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예전과 똑같았다. 그는 작은 키에 살이 쪘고 다리는 짧은데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는데 벌써 대머리였다. 얼굴은 둥글었고 혈색이 좋았으며 하얀 피부에 양 볼과 입술은 붉었다. 푸른 눈 역시 동그랗고, 커다란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눈썹은 옅은 금색으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는 루벤스가 그린 명랑하고 뚱뚱한 네덜란드 상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내가 잠시 파리에서 살 작정으로 방을 구해 놓았다고 하니까 그는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자기에게 알리지 그랬냐며 투덜거렸다. 자기가 셋방도 구해 주고 가구도 빌려 주고 이사할 때도 거들어 주었을 텐데, 일부러 돈 들여 가구까지 살 필요가 있느냐며 마구 야단쳤다. 그는 나를 도와 줄 기회를 주지 않은 데 대해 내가 자기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며 진심으로 서운해했다.
그가 그렇게 수선을 피우는 동안 스트로브 부인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양말만 꿰매면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운 채 남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보게, 아무튼 보시다시피 나는 그 동안 결혼을 했네. 내 아내 어떤가?"
그는 아내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안경을 콧등 위로 밀어 올렸다. 땀 때문에 안경이 계속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아니, 세상에 그런 말에 내가 어떻게 대답하겠어?"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참 당신도 ."
스트로브 부인도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어때, 굉장하지? 자네도 꾸물대지 말고 빨리 장가가라구. 이 세상에서 나는 제일 행복한 남자야. 저렇게 앉아 있는 내 아내를 보게. 한 폭의 그림 같지 않나? 샤르댕이 그린 그림 속에 나오는 여인 말야. 나는 지금까지 많은 미인들을 보았지만 더크 스트로브 부인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는 아직 보지 못했네."
"여보, 그만두세요. 그러지 않으면 전 나가 버릴 거예요."
"몽 프티 슈(귀여운 사람)." 그가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정열적인 목소리에 당황하며 얼굴을 약간 붉혔다. 그가 아내를 몹시 사랑하는 줄은 내게 보낸 편지를 통해서도 알았지만, 지금 보니 정말로 아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내도 그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엾은 어릿광대인 그는 여자들의 연애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 떠오른 미소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난 그녀의 수줍어하는 태도 뒤에는 깊은 애정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스트로브가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황홀한 미인은 아니었으나 정숙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키는 좀 큰 편이었고, 수수하고 잘 재단된 회색 드레스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아낌없이 드러내 주었다. 양장점보다는 조각가가 더 좋아할 몸매였다. 숱이 많은 갈색 머리는 간단하게 묶었고 얼굴은 좀 창백한 편이었으며 생김새는 두드러진 부분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었다. 회색 눈동자는 조용하게 가라않아 보였다.
그녀는 말하자면 미인이 될 뻔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놓쳐 버린 듯한 느낌이었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말하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 그러나 스트로브가 샤르댕의 그림에 비유한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사실 난 그녀를 보고서 이 위대한 화가의 불후의 명작 속에 나오는 여인―머리에 실내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상냥한 주부를 연상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솥과 냄비 사이를 조용히 바쁘게 움직이면서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집안일을 하나씩 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 하나하나의 행위가 어떤 정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그녀가 똑똑하다든가 재미있는 여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자기 일에 열중하는 듯한 진지한 열정에는 뭔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게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왜 더크 스트로브와 결혼했는지 궁금했다. 영국 여자라는 것 외에는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지방 사람인지, 어떤 계층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또 결혼 전에 무엇을 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말수는 적었으나 어쩌다 이야기할 때는 무척 쾌활했고 태도도 자연스러웠다.
나는 요즘도 계속 그림을 그리냐고 스트로브에게 물어 보았다.
"그림을 그리냐고? 물론이지. 예전보다 훨씬 더 잘 그리고 있다네."
우리는 화실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이젤 위에 놓여 있는 아직 작업중인 그림 하나를 가리켰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그가 아직도 캄파냐풍의 의상을 입고 로마 성당의 계단 위에서 쉬고 있는 이탈리아 농부들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요즘 그리고 있는 건가?"
"그럼, 여기서도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델은 마음대로 구할 수 있으니까."
"이 그림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이 사람은 내가 무슨 위대한 화가인 줄 알고 있다니까."
그는 변명하듯이 쑥스럽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어떤 기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의 눈은 아직도 자기 그림 위에 머물러 있었다.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평가할 때는 그렇게도 정확하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그의 심미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진부하고 통속적인 자기 그림에 대해서는 만족스러워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그림도 좀 보여 드리세요."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럴까?"
친구들이 아무리 조롱을 해도 더크 스트로브는 칭찬을 받고 싶어했다. 그는 순진하게도 자기만족에 도취되어서 자기 그림을 보여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었다. 그가 그림을 하나 더 가지고 왔다. 고수머리의 이탈리아 꼬마 둘이 공깃돌 놀이를 하는 그림이었다.
"정말 예쁘죠?" 스트로브 부인이 물었다.
그는 몇 장을 더 보여 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로마에서 몇 해 동안 그리던, 틀에 박힌 진부한 그림들이었다. 그는 파리에 와서도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왔던 것이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모두 거짓되고 불성실하며 겉만 그럴 듯한 가짜였다. 그러나 더크 스트로브를 볼 때는 그만큼 솔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이 모순을 누가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는 몰라도 나는 불쑬 이렇게 물었다.
"자네 혹시 찰스 스트릭랜드라는 화가를 만난 적 있나?"
"아니, 그럼 자네가 그 사람을 알고 있다는 말인가?" 스트로브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그 보기 싫은 사람 말이에요?" 그의 부인이 옆에서 말참견을 했다.
"마 포브르 셰리(나의 소중한 사람)."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서 두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 사람은 그를 무척 싫어하거든. 그런데 자네가 그를 알다니 정말 신기하군. 도대체 어떻게 그를 아는 건가?"
"저는 무례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아요." 하고 그의 아내가 다시 말했다.
더크는 여전히 웃으면서 나를 돌아보고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 내가 그 사람에게 우리 집에 와서 내 그림을 한번 봐 달라고 한 적이 있어. 그랬는데 그가 정말 우리 집에 왔더군. 그래서 내 그림을 있는 대로 모두 보여 주었지."
그러고 나서 그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나는 스트로브가 왜 자기에게 자랑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는 난처한 표정을 계속 감추지 못하면서 이야기를 마저 끝냈다.
"그 사람은 내 그림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 그래서 나는 다 볼 때까지 비평을 미루는 건줄 알았지. 내 그림을 다 보여 준 다음에 '이것이 전부입니다' 하니까 글쎄. 그가 하는 말이 '나는 당신에게 돈 20프랑을 빌리러 왔을 뿐이오.' 하지 않아."
"그런데도 저 사람은 그 돈을 빌려 주었다니까요." 하고 그의 아내가 분한 듯이 말했다.
"나는 그때 정말 당황했어. 하지만 거절하고 싶지는 않더군. 그 사람은 돈을 받아 호주머니에 넣더니 '고맙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대로 가버리더군."
더크가 너무도 멍청하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그가 내 그림을 보고 형편없다고 말했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한 마디도 말이야."
"당신은 그게 뭐 좋은 얘기라고 자꾸 하세요?" 그의 아내가 말했다.
나 자신부터 스트릭랜드의 무례한 행동에 분개하기보다는 이 네덜란드인의 우스꽝스런 모습에 더 재미있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사람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요." 스트로브 부인이 말했다.
스트로브는 빙긋이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벌써 기분이 다시 좋아진 것이다.
"아무튼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것만은 사실리야. 그것도 보통 뛰어난 게 아니지."
"스트릭랜드가 위대한 화가라고?" 나는 소리쳐 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인 모양이군."
"붉은 수염을 기록 있고 키가 크지. 찰스 스트릭랜드, 영국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만났을 때는 수염을 기르고 있지 않았는데 만약 길렀다면 붉은 색일 거야. 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겨우 5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그럼 바로 그 사람이 맞아. 그는 위대한 화가야."
"그럴 리가?"
"내가 언제 잘못 본 적이 있었나? 그 사람은 천재야. 나는 그걸 확신할 수 있어. 그는 분명히 천재라고, 앞으로 백년 후에 자네나 내 이름이 세상에 남아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찰스 스트릭랜드를 알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일걸세."
나는 정말 뜻밖의 말을 듣고 무척 놀랐으며, 한편으로는 대단한 흥분을 느꼈다. 갑자기 그와 마지막으로 만나 얘기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어디에 가면 그 사람의 작품을 볼 수 있나? 성공했겠군. 지금 그는 어디 살고 있는데?"
"성공이라니. 천만에. 아마 그림을 한 장도 못 팔았을걸. 그에 대한 얘기를 하면 모두 비웃고 말지만 나는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것을 알고 있네. 마네도 비웃음을 받았지 않나. 코로도 그림을 한 장도 팔지 못했고. 지금 그 사람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잘 다니는 곳에 안내해 줄 수는 있네. 어때, 내일 같이 가볼까?"
"글쎄,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할지 모르겠는걸. 나를 보면 잊고 싶은 옛날 일들이 생각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한번 가보기는 하지. 뭐. 그런데 그의 그림을 좀 볼 수 없을까?"
"그에게 부탁해 봐도 그건 안 될 거야. 아마 한 장도 보여 주지 않을걸. 내가 아는 화상(畵商)이 그의 그림을 한두 점 가지고 있어. 하지만 자네 혼자 보러 가선 안 돼. 내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자네는 봐도 모를 거야."
"여보, 참견하지 않으려고 해도 정말 못 참겠어요. 당신 정말 왜 그래요? 그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받고도 그의 그림에 대해 그렇게 말하다니." 스트로브 부인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내게 몸을 돌려 다시 말했다. "글쎄, 네덜란드 사람들이 이 그림을 사려고 오면 오히려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사라고 그 사람들을 설득시키지 뭐예요. 그리고 결국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직접 가져와서 보여 주며 사라고 졸랐답니다."
"부인이 보시기엔 그 그림들이 어땠습니까?" 나는 웃으면서 물어 보았다.
"어휴, 형편없었어요."
"당신이 몰라서 그래."
"천만에요. 그 네덜란드 사람들도 당신에게 막 화를 냈잖아요. 당신이 자기들을 놀리고 있다면서."
더크 스트로브는 안경을 벗어서 닦았다. 약간 흥분을 해서 그런지 불게 상기된 얼굴이 번쩍거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름다움이 해변가의 조약돌처럼 그저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다 주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의 혼돈 속에서 영혼의 고뇌를 겪으면서 이루어 낸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어떤 결정체야. 그리고 예술가가 그것을 창조해 냈다 해도 모든 사람이 다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도 예술가가 겪은 시련을 거쳐 보아야 알 수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예술가가 우리에게 들려 주는 멜로디와 같은 것이며, 그것이 내 가슴에서 울리도록 하려면 그만한 지식과 감수성, 그리고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럼 왜 나는 당신의 그림이 항상 아름답게 보일까요? 나는 당신의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 감탄하고 말랐는걸요."
스트로브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여보, 그만 자요. 난 이 친구와 잠깐 산책이나 하고 올 테니까."
20.
더크 스트로브는 다음날 저녁에 나를 찾아와 스트릭랜드가 잘 다니는 카페로 안내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카페가 지난번에 내가 그를 만나러 파리에 왔을 때 함께 압생트 술을 마셨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 동안 카페 하나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독특한 성격이라고 생각되던 나태한 버릇을 잘 말해 주었다.
"저기 있군." 카페에 들어서자 스트로브가 말했다.
10월인데도 저녁때는 아직 따뜻해서 보도 위에 놓인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나는 카페를 한번 둘러보았지만 스트릭랜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쪽 구석에서 체스를 두고 있잖아."
그쪽을 바라보니 체스판 위에 누군가가 몸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커다란 펠트 모자와 붉은 수염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테이블 사이를 뚫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스트릭랜드."
그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아, 뚱보로군. 무슨 일이지?"
"당신의 옛 친구를 데리고 왔소."
스트릭랜드는 나를 흘끗 쳐다보았으나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체스판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앉아. 그리고 좀 조용히 하고 있게."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말 하나를 움직이더니 곧 게임에 열중했다. 스트로브는 안됐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으나 나는 조금도 어리둥절해하지 않았다. 나는 마실 것은 주문하고 스트릭랜드가 체스를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오히려 마음 놓고 그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만났다면 아마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손질하지 않은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제멋대로 자라 얼굴을 거의 다 덮고 있었고, 머리카락 역시 길게 자라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랍게 변한 것은 몸이 무척 수척해진 점이었다. 그래서 그 큰 코가 더욱더 튀어나와 건방져 보일 정도였고, 광대뼈는 툭 불거져 있었으며 눈도 훨씬 커보였다. 게다가 양쪽 관자놀이까지 우묵하게 깊이 패어 있어서 몸 전체가 송장처럼 처참해 보였다.
옷도 5년 전에 보았을 때 입고 있던 것을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단지 여기저기 때가 묻고 닳아 해어졌으며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헐렁헐렁했다. 때가 낀 더러운 손톱은 길게 자라 있었고 뼈와 가죽밖에 남지 않은 손은 크고 억세 보였다. 예전에 꽤 보기 좋았던 모양새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체스에 정신을 팔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이상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어떤 강력한 힘과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그의 모습이 어째서 도리어 감동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스트릭랜드는 곧 말을 움직이더니 몸을 뒤로 젖히고는 멍한 표정으로 상대방을 응시했다. 그의 상대는 턱수염을 기른 뚱뚱한 프랑스인이었다. 그 프랑스인은 한동안 판의 형세를 살펴보더니 이제 졌다는 듯이 갑자기 쾌활한 어조로 몇 마디 내뱉고는 재빨리 말을 상자 속에 주워 넣었다. 그리고 나서 스트릭랜드에게 거리낌없이 몇 마디 더 퍼붓고는 웨이터를 불러 술값을 치르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스트로브는 의자를 테이블 가까이로 끌어당겼다.
"자, 이제는 얘기할 수 있겠군." 그가 말했다.
스트릭랜드의 시선은 여전히 그에게 머물러 있었는데 거기에는 심술궂은 표정이 담겨 있었다. 그는 무슨 조롱할 말을 찾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하는 옛 친구를 데려왔소." 스트로브는 즐거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말없이 거의 1분 동안이나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본 적이 없는데......" 그가 말했다.
그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두 눈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이 틀림없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해 전처럼 그렇게 쉽사리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다.
"얼마 전에 부인을 뵈었습니다. 당신도 부인 소식을 듣고 싶어 하실 것 같아서요." 나는 이렇게 말을 꺼냈다.
그는 잠깐 껄껄 웃더니 두 눈을 반짝거렸다.
"언젠가 하루 저녁 유쾌하게 어울린 적이 있었지. 그게 언제였더라?" 그가 물었다.
"5년 전이었죠."
그는 압생트 술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스트로브는 자기와 내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으며, 또 두 사람 다 스트릭랜드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경위를 떠벌리며 설명해 주었다.
스트릭랜드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는 나를 한두 번 흘끗 보기는 했으나 뭔가 자기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사실 스트로브가 그렇게 떠들어대지 않았다면 그와 이야기하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스트로브는 그렇게 30분 동안이나 떠들어대더니 시계를 보고는 가야겠다고 말하며 내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차라리 혼자 있으면 스트릭랜드에게 뭔가 들을 말이 있지 않을가 싶어서 조금 더 있다 가겠다고 말했다.
그 뚱뚱한 친구가 가버리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더크는 당신이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게 어떻다는 말이오?"
"당신 그림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뭐하러?"
"한 장쯤 사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요."
"난 팔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는걸."
"요즘 생활은 어떠십니까?" 나는 미소를 띠고 물었다.
그는 싱긋 웃었다.
"어떻게 보이오?"
"굶주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요."
"대충 그렇소."
"그럼 어디 가서 저녁 식사라도 할까요?"
"그건 왜지?"
"자선을 베풀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굶어 죽는 말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의 눈이 다시 번득였다.
"그럼 갑시다." 그가 재빨리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으니까."
21.
나는 그가 가고 싶은 식당으로 안내하도록 하고 가는 도중에 신문 한 부를 샀다. 그가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나는 신문을 생갈미에 술병에 기대어 놓고 읽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음식만 먹었다. 이따금 그가 나를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모르는 체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게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신문에 뭐 재미있는 기사라도 났소?"
그 침묵의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약간 화가 나 있는 듯했다.
"난 매일 신문의 문예란을 즐겨 읽고 있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문을 접어 옆에서 놓았다.
"맛있게 잘 먹었소" 그가 말했다.
"여기서 아예 커피까지 마실까요?
"좋소."
우리는 담배에 불을 붙여 말없이 피웠다. 그는 가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띠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참을성 있게 그가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 뭐하고 지냈소?" 이윽고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이야기할 것이 별로 없었다. 단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실험을 해보기도 하고 책과 인간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쌓아 가는 그런 생활을 했을 뿐이었다.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그의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에게 털끝만큼도 흥미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랬더니 결국 그 효과가 나타나서 그가 먼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 지난 5년 동안 겪은 일들을 대강만 이야기해 주는 게 고작이어서 나머지 살이 되는 부분은 내 상상력으로 채울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어렴풋이 밖에 알 수 없다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마치 부분적으로 훼손되거나 삭제된 불완전한 원고를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인생의 온갖 고난과 싸우는 쓰라린 투쟁이었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보통 사람에게는 몸서리가 쳐질 끔찍할 일도 그에게는 별로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스트리랜드라는 사람은 안락한 생활의 즐거움에 대해 전혀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보통의 영국인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는 그렇게 누추한 단칸방에서 사는 게 지겹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방 안을 아름답게 꾸밀 필요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내가 처음 그의 방을 찾아갔을 때도 그는 방의 벽지가 얼마나 지저분한 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불편한 식탁의자에 앉아서도 충분히 편안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저 굶주림의 고통을 진정시키 위해서만 음식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음식조차도 구할 수 없을 때는 그냥 굶은 채로 그렇게 지냈던 것 같았다. 6개월 동안 하루에 겨우 빵 한 조각과 우유 한 병으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관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런 것에도 무관심했다. 그는 궁핍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만으로 삶을 영위해 온 그의 태도에는 무언가 인상적인 면이 있었다.
런던에서 가지고 온 얼마 안 되는 돈마저 바닥이 났을 때도 그는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 그림은 한 장도 팔리지 않았다. 아마 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약간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농담삼아 한 이야기에 의하면 파리의 밤 풍경의 어두운 면을 보고 싶어하는 런던 사람들을 안내해 주는 일도 했다고 한다. 그의 냉소적인 성격에 잘 맞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바람에 그는 이 도시의 고상하지 못한 지역에 대해서도 상당히 많은 것을 알게 된 듯싶었다.
법으로 금지된 일을 보고 싶어하는 영국인들을, 그것도 될 수 있는 한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서 마들렌 대로를 몇 시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했다. 운이 좋을 때는 상당한 돈을 벌 때도 있었지만, 그의 옷차림이 너무 초라해서 관광객들이 겁을 집어먹어 자기를 믿고 안내를 부탁할 만큼 대담한 사람들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후에는 어느 우연한 기회에 영국 의사들에게 선전하기 위한 특허약품의 광고 문안을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고 또 페인트공들이 파업을 하는 동안 페인트 칠하는 일을 해보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림 그리는 일을 그만둔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화장실에 다니는 게 금방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자기 혼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래도 캔버스와 그림 물감을 사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던 때는 없었고, 자기는 그 이외에는 필요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는 그림 공부를 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은 듯했다. 남의 도움을 받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 때문에 선배 화가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기법상의 문제를 그는 혼자 힘으로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알 수 없는, 어쩌면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어떤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다시 한 번 그가 무엇인가에 홀린 듯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도저히 정상적인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 그림을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 것도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 이미
관심이 없어졌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꿈속에서 살고 있었으며 현실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자기 마음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추구해 보려는 일념에서 모든 것을 잊은 채. 자기의 그 격렬한 개성 전부를 캔버스 위에다 쏟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단 그림이 아니라 자기를 불태우는 정열만 연소시키고 나면 그것에 대해선 모두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림을 완성시키는 일이 거의 드물었으니까.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성과에 대해선 절대로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마음에 비치는 환상에 비하면 그런 결과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그림을 전시회 같은데 출품해 보시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남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렇게 생각하오?"
이 두 마디 말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경멸의 빛이 드러나 있었다.
"유명해지고 싶지 않습니까? 예술가들은 대부분 그 점에는 무관심할 수 없을 텐데요."
"풋내기들이나 그렇지. 개인의 의견에도 신경 쓰지 않는데 그렇게 속된 자들의 비평에 관심을 갖겠소?"
"사람이 항상 그렇게 원칙대로만 움직일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럼 누가 유명하게 만들어 준단 말이오? 비평가, 문인, 증권 증개인, 여자들이 만드는 것이지."
"그렇지만 전혀 알지도 못하고 만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당신이 그린 그림을 보고 미묘하고도 격렬한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멋있고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사람은 누구나 다 힘을 좋아합니다. 그 힘 중에서도 사람의 영혼을 감동시켜서 어떤 연민이나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힘만큼 멋있는 힘은 아마 없을걸요."
"유치한 감상이지."
"그럼 당신은 왜 그림이 잘 되고 못 되느냐에 신경을 쓰는 거죠?"
"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소. 그저 보이는 것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오."
"그럼 무인도 같이 아무리 둘러봐도 자기 밖에 봐줄 사람이 없는 그런 곳에서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요?"
스트릭랜드는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다만 그의 두 눈만이 그의 영혼을 황홀하게 하는 어떤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이상하게 빛날 뿐이었다.
"나도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해보기오 하오.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외로이 떠있는 섬에서 아무도 모르는 골짜기 속의 신비스러운 나무들에 둘러싸여 조용히 살아 볼까 하고 말이오. 그러면 내가 바라하는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가 이와 똑같이 말한 것은 아니다. 수식하는 말 대신에 몸짓을 쓰기도 하고 그 몸짓마저도 자주 막히곤 했다. 다만 그가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을 나의 말로 옮겨 본 것이다.
"지난 5년을 돌아볼 때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나를 쳐다 보았다. 내가 말한 것의 의미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다시 설명했다.
"당신은 누구도 부럽지 않은 편안한 가정과 생활을 버렸습니다. 그때 당신은 상당히 성공한 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파리에서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때가 다시 온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물론이오"
"부인과 아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으시더군요. 그들 생각은 전혀 안 하시나요?"
"전혀."
"왜 그렇게 매정하죠? 당신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에게 조금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단 말인가요?"
그는 슬며시 미소를 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아무리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옛날 일이 생각이 안 날 수는 없겠죠. 지금부터 7, 8년 전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오래 전에 있었던 일 말입니다. 부인을 처음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던 그 시절의 일들을 잊을 수 있겠어요? 부인을 처음으로 안았을 때의 즐거움이 생각나지 않으세요?"
"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소.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영원한 이 현재일 뿐이오."
나는 이 대답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뜻이 막연하기는 했지만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렇소."
나는 입을 다물고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내 시선을 받아들이는 그의 눈에는 냉소(冷笑)가 떠올랐다.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아니, 천만에." 나는 즉시 대답해 주었다. "구렁이 같은 인간에게 마땅하고 못 마땅하고가 있나요? 도리어 그런 사람의 심리 상태에 무척 관심이 많습니다."
"당신이 내게 관심을 갖는 것은 순전히 소설가라는 직업적인 흥미에서 나온 것이겠지?"
"그렇죠."
"아무튼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군. 그런 걸 보면 당신도 꽤 비열한 인간인걸."
"아마 그래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을 때 마음이 편할 겁니다."
내가 대꾸해 주었다.
그는 건성으로 메마른 웃음을 지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웃음을 제대로 표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은 마음을 매혹시키는 그런 웃음은 아니었으나 그의 침울한 얼굴 표정을 바꿔 주었고, 그로 인해 그의 천성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천천히 눈에서 시작되어 눈으로 사라지는 그런 미소인데 무척 육감적이었다. 잔인하다든가 친절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신화에 나오는 사티로스가 어떤 즐거움을 느끼며 짓는 미소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물어 본 것도 바로 그런 미소 때문이었다.
"파리에 오신 후로 연애를 한 적 있습니까?"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시간이 어디 있소? 인생은 사랑과 예술을 모두 다 누릴 수 있을 만큼 길지 않소."
"하지만 당신의 모습은 세상을 등진 은둔자 같아 보이지는 않는걸요."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군."
"사람의 본능이란 원래 그렇고 귀찮은 것 아니겠어요?"
"왜 날 보고 낄낄거리는 거요?"
"당신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으니까요."
"당신도 형편없는 바보로군."
나는 말을 멈추고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나를 속이면 무슨 이득이라도 생기나요?" 내가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나는 싱긋 웃었다.
"그럼 내가 말하죠. 몇 달 동안이라면 그런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을 테고 또 당신도 이제는 그런 일과는 영원히 인연을 끊었다고 스스로 믿을 수도 있을 테죠. 당신은 이제야 내 영혼이 내 것이 되었다고 느끼며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거요. 마치 별들 사이로 걸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일 거요. 그러다가 갑자기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고, 그와 동시에 당신은 두 다리가 지금 흙 속에서 뒹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래서 상스럽고 비천하고 야비하고 섹스의 전율이 마구 드러나는 그런 여자를 찾아내어 사나운 짐승과 같이 몸을 던지게 될 겁니다. 그러곤 정욕에 눈이 멀 때까지 도취해 버리는 거죠."
그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황홀한 상태가 지나가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세탁이 된 듯한 순수한 기분이 들 거요. 육체를 이탈하여 정신만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드어 아름다움을 당장에라도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을 거요. 그리곤 저 산들 바람에라든가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돋는 나뭇잎들이라든가 또는 오색 영롱하게 반짝이는 시냇물 , 이런 것들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마치 신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 기분에 대해 얘기해 주실 수 있으세요?"
그는 내가 이야기를 모두 마칠 때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다가 갑자기 시선을 홱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야릇한 표정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은 고문당하며 죽어 가는 사람과 흡사했다. 그는 말이 없었다. 나는 우리의 이야기가 이것으로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22
나는 파리에 자리를 잡고, 희곡을 쓰는 데 몰두했다. 오전에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뤽상부르 공원에서 산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내를 쏘다니거나 하며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루브르 미술관은 다른 어느 미술관보다도 마음에 들었고 사색하기에도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다. 때로는 사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헌책들을 뒤적거려 보고 강변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뒤적여 한 페이지씩 읽는 방식으로 그 동안 내가 알고 싶었던 위대한 작가들을 많이 알게 되어 만족스러웠다.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스트로브 집에도 가끔 들렀으며 간단한 저녁식사를 함께 하곤 했다. 더크 스트로브는 자신의 이탈리아 요리 솜씨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의 스파게티 솜씨는 그림 솜씨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토마토케첩을 잔뜩 곁들인 큰 스파게티 접시를 들고 그가 돌아올 때면, 그야말로 임금님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스파게티에 집에서 구운 빵과 붉은 포도주를 곁들어 먹었다. 블랑슈 스트로브와도 친해졌다. 내가 영국 사람인데다, 그녀도 프랑스에 아는 영국인이 별로 없었으므로 나를 만나면 무척 반가워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소박하면서도 언제나 말이 적었고, 왠지 가슴속에 남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인성을 주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말이 별로 없는 데다 그것이 수다스러운 남편 때문에 더욱 과장되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크는 정말 무엇이든 감추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일이라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아내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한번은 자기 아내를 얼굴도 못 들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언제가 무슨 설사약을 먹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때의 경과를 있는 그대로 실감나게 설명해 준 것이다. 자기가 곤란을 겪은 장면을 아주 정색을 하며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나는 배를 잡고 웃었고, 그 때문에 그의 아내는 더욱 화를 냈었다.
"당신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게 그렇게도 좋으세요?" 그녀가 말했다.
아내가 화내는 것을 보자, 그는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찌푸리며 난처한 듯이 쩔쩔 맸다.
"아니, 여보, 내 말에 화났어? 다시는 그런 것 안 먹을 게. 내가 변비가 좀 심해서 말이야. 늘 앉아 있는 생활만 하니까 운동 부족이잖아. 사흘 동안 도무지..."
"제발 그 입 좀 다무세요."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남편을 말을 가로 막았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야단 맞는 어린아이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듯이 내게 사정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그 표정을 보니 도저히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배를 움켜쥐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느 날, 우리 두 사람은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두서너 장 가지고 있다는 그 화상을 찾아갔다. 그러나 가보니까 이미 스트릭랜드가 모두 다 찾아가고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유는 주인도 모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점에 대해 내가 섭섭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원래 스트로브 선생의 얼굴을 봐서 받아
놓은 것이라서…… 그때도 혹시 필 수 있으면 팔아 드리겠다고만 말씀드린 것이니까요. 하지만……" 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이어 말했다. "저도 신인들에게는 무척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스트로브 선생께서도 그가 정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내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소.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친구들 중에 그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요. 내 말을 믿어요. 당신은 정말 좋은 돈벌이를 놓친 거요. 그 그림 두서너 장이 지금 가게에 있는 그림 전부보다도 값이 더 나갈 날이 있을 거요. 모네를 생각해 봐요. 백 프랑에라도 사겠다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죠?"
"그야 그렇죠. 하지만 그 시절에도 모네 못지 않게 훌륭한 솜씨를 가졌으면서도 그림이 전혀 팔리지 않는 화가들도 많았거든요. 그런 걸 어떻게 믿어요? 재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암, 없고말고요. 게다가 그 친구 분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직 두고 봐야 알 일 아닙니까? 지금도 스트로브 선생말고는 그의 그림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요."
"그럼 재능이 있고 없고를 어떻게 안단 말이오?" 더크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지며 물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잘 팔리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알 수 있죠."
"이런 속물 같으니!" 더크는 음성을 높였다.
"하지만 예전의 위대한 화가들을 생각해 보세요. 리파엘로, 미켈란젤로, 앵그로, 들라크루아.... 그들의 작품은 모두 잘 팔렸습니다."
"그만 가세." 스트로브는 나를 재촉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저 사람을 죽여 버릴 것 같아."
23.
나는 그 이후 스트릭랜드를 꽤 자주 만났고, 가끔 그와 함께 체스를 두기도 했다. 그의 기분은 일정치 않았다. 어떤 때는 곁에 누가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무슨 생각에 빠져 멍청히 있다가도, 기분이 좋을 때는 그 특유의 더듬거리는 말로 곧잘 떠들어 댔다. 똑똑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이야기는 못 했지만 거칠고 난폭하게 빈정거리는 그의 방식은 그런대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으며, 그는 항상 자기 의사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편이었다. 남의 기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을 더 즐거워했다. 특히 더크 스트로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았다. 늘 독설을 퍼부어 기분을 상하게 하는 바람에 더크 스트로브조차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면서, 너 같은 놈과는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에게는 이 뚱뚱한 네덜란드인의 의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단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다시 만나 봐야 또 잔인한 독설밖에 못 들을 줄 알면서도 개가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며 달라붙듯이 그에게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한 스트릭랜드가 왜 내게 독설을 퍼붓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좀 특이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50프랑만 빌려 달라고 했다.
"당신이 내게 그런 부탁을 할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해봤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가?"
"난 별로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난 지금 굉장히 곤란한 처지에 있소."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죠?"
"아니, 내가 굶어 죽어도 상관이 없단 말이오?"
"내가 왜 그런 일에 상관 있어야 하죠?" 이번에는 내가 역습을 가했다.
그는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을 잡아당기며 잠시 동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빙긋이 웃어 주었다.
"뭐가 그리도 우스워?" 그는 노기를 띠며 말했다.
"당신도 어리석기 짝이 없군요. 모든 의무나 의리를 인정하지 않는 게 바로 당신 아니오? 그러니 당신에게 의리를 느끼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그럼 내가 방세를 내지 못해서 쫓겨나, 목이라도 매고 죽는다 해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오?"
"물론이죠."
그가 껄껄 웃었다.
"허풍떨지 말게, 정말 내가 그러기라도 한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어쩔 줄 모를걸?"
"그럼 어디 한번 해보시죠." 나도 대꾸해 주었다.
눈가에 웃음이 슬쩍 지나갔을 뿐 그는 잠자코 압생트 술만 휘저었다.
"체스 한 판 두시렵니까?" 내가 물었다.
"좋지."
누리는 말을 세웠다. 말을 다 세우고 나자 그는 만족한 눈초리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전투태세를 갖춘 부하들을 바라볼 때의 만족감 같은 것이었다.
"내가 돈을 빌려 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물어 보았다.
"못 빌려 줄 것도 없잖소?"
"놀랐는걸요?"
"어째서?"
"당신도 역시 마음속은 감상적이라는 걸 알고 좀 실망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내 동정심에 호소하지만 않았어도 괜찮았을텐데."
"나 역시 그 정도에 당신 마음이 움직였다면 경멸했을 거요."
"잘 됐군요." 나는 소리내고 웃었다.
우리는 체스를 두기 시작했다. 둘 다 승부에 열중했다. 체스가 끝난 다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생활이 그렇게 곤란하다면 그림 몇 장 보여 주시오. 마음에 들면 내가 살 테니까."
"미친 소리 작작해." 그는 내뱉듯이 말하더니, 일어서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는 것을 내가 붙잡았다.
"당신 술값은 당신이 지불해야 되지 않습니까?" 나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내게 뭐라고 욕설을 퍼붓더니, 돈을 던지고 휙 나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동안 그를 만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저녁 내가 카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데 그가 들어오더니 곁에 와서 앉았다.
"결국 목을 매지는 않았군요." 내가 말을 꺼냈다.
"천만에, 일거리를 얻었지. 2백 프랑을 받기로 하고, 은퇴한 납세공업자의 초상화-이 그림은 그 후 릴의 돈 많은 어느 공장주가 가지고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밀려오자 소유자가 도망가 버려 지금은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스웨덴 사람들은 혼란한 틈을 타서 횡재를 하는 데는 귀신같은 솜씨를 가지고 있다-를 그리고 있는 중이오."
"그런 일은 또 어떻게 구했죠?"
"단골 빵집 여자가 말해 준 거야. 그 사람이 이 여자에게 초상화 그려 줄 사람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더군. 난 그 여자에게 20프랑 빚이 있거든."
"그래. 그 납 세공업자는 어떻게 생겼소?"
"근사하지. 얼굴이라는 게 양고기의 넓적다리같이 크고 붉은데다, 오른쪽 빰에는 커다란 사마귀가 나 있고 그 위에 긴 털이 몇 가닥 돋아나 있지."
스트릭랜드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더크 스트로브가 들어와 자리를 같이 하자, 그를 무자비하게 조롱했다. 그는 이 가련한 네덜란드인의 가장 민감한 급소를 찾아내는 데는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솜씨가 좋았다.
스트릭랜드가 쓰는 방식은 날카로운 풍자의 칼날이라기보다는 숫제 독설과 악담의 몽둥이를 휘둘러 상대방을 때려눕히는 식이었다. 더구나 언제나 예고 없이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스트로브는 항상 기습만 당할 뿐 방어는 할 생각도 못 했다.마치 겁먹은 한 마리 양이 어쩔 줄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모습 같았다. 더크는 놀란 나머지 얼떨떨해하다가 나중에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런데 내가 가장 곤란했던 점은, 스트릭랜드가 얄밉고 또 그 광경이 차마 눈 뜨고 보기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점이었다. 더크 스트로브는 아무리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도 더욱 우스꽝스럽게 밖에 보이지 않는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파리에서 지낸 그 해 겨울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더크 스트로브에 대한 추억이 가장 즐겁다. 그의 작은 가정에는 마음을 끄는 무엇이 있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그리는 광경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서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며,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에는 그윽한 향취가 풍겼다. 늘 우스꽝스런 행동만 하고 다니면서도, 그의 정열에 담신 진지함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의 아내가 그런 그를 안타깝게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남편에 대란 그녀의 태도가 그토록 상냥한 것이 보기에 좋았다. 만일 그녀가 유머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여자였다면 남편이 자기를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진짜 우상이라도 모시듯이 위해 주는 것이 오히려 쑥스러웠을 테지만, 그녀는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틀림없이 기뻐하고 감동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크의 영원한 연인이었다. 그녀가 늙어서 그 탄력 있는 몸매와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려도, 그에게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에게 여자란 항상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리라. 질서정연한 그들의 생활 가운데는 유실, 그리고 조그마한 부엌이 전부였다. 부인은 모든 집안살림을 혼자 했다. 더크가 그 형편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부인은 시장을 갔다 오고 점심을 준비하고 바느질을 하는 등 개미와 같이 부지런하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이면 부인은 아틀리에에 앉아 또다시 바느질을 하고, 더크는 부인으로선 이해하지 못할 듯싶은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제법 멋지게 연주를 했지만 언제나 필요 이상의 감정을 덧붙였으며, 음악에도 역시 진실하고 감상적이고 정열적인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었다.
그들의 생활은 목가적인 전원시였으며, 그래서인지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었다. 더크 스트로브와 관련되는 모든 일에 빠짐없이 붙어 다니는 그 우스꽝스러움이 뭔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불협화음처럼 그들의 삶에 기묘한 맛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현대적이고 더 인간적인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엄숙한 장면에 갑작스레 던져진 익살과도 같이 모든 아름다움이 갖고 있는 날카로운 맛을 더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24.
크리스마스 며칠 전의 일이었다. 더크 스트로브가 그날 밤 자기 집에서 같이 지내가고 나를 초청했다. 그는 크리스마스에 대해선 특별한 감상을 느끼는지, 친구들을 불러 놓고 상당히 격식을 갖추어 그날을 보내고 싶어했다. 우리 둘 다 스트릭랜드를 2, 3주일 동안 보지 못했다. 나는 파리에 잠시 머물고 있는 친구들 때문에 분주했고, 스트로브는 그와 다른 때보다 심한 싸움을 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지, 스트릭랜드가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낼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기분대로 스트릭랜드의 기분을 헤아려, 진실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 마련된 날에 그 외로운 화가가 혼자 고독 속에 내버려져 얼마나 쓸쓸해할까 생각하고는 무척 가슴 아파했다.
스트로브는 화실에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해 놓았다. 그는 이 축제의 나무에다, 우리에게 주려고 우스꽝스러운 조그마한 선물을 걸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트릭랜드를 다시 만난다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그토록 심한 모욕을 받고도 순순히 용서해 준다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결심한 화해의 자리에 내가 참석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와 함께 클리시 거리에 가보았으나, 스트릭랜드는 그 카페에 없었다. 바깥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너무 추워서 안으로 들어가 가죽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실내는 덥고 답답했으면, 담배 연기가 자욱해서 공기도 탁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스트릭랜드는 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와 체스를 자주 두던 프랑스 화가가 나타났다. 그와 나는 안면 정도는 있는 사이였으므로 그가 우리 테이블에 와서 앉았다. 스트로브는 혹시 스트릭랜드를 봤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 사람 앓고 있어요. 모르셨습니까?" 그가 말했다.
"많이 아픈가요?"
"꽤 심한 모양이던데요."
스트로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내게 편지라도 하지 않았을까? 그와 다투다니 내가 어리석었어. 당장 가보세. 돌봐 주는 사람도 한 명 없을 텐데 그가 어디에 살고 있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 프랑스인이 대답했다.
결국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하나 그의 주소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스트로브 점점 더 안절부절못하고 걱정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는 사람 하나 없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군. 그렇게 생각하니 더 견딜 수가 없어. 당장 찾아보세."
나는 막연하게 파리 시내를 찾아봐야 소용없을 것 아니냐고 스트로브를 납득시키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우선 무슨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우리가 너무 늦게 찾아서 손 쓸 새도 없을지 모른다고."
"이봐 좀 진정하고 앉아서 생각해 보세." 말하는 나 역시 초조했다.
내가 알고 있는 주소라고는 그 전의 벨쥬 호텔뿐인데 이사간지가 오래되어 그를 기억하고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자기의 거처를 비밀로 해두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떠나면서도 어디로 갈 것인지 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가 그곳을 떠난 지 5년이나 지난 이야기가 아닌가.
다만, 확실한 것은 옮겨도 멀리 옮기진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그것은 예전 호텔에서 살 때처럼 이 카페에 여전히 자주 드나드는 걸 보면 아마도 거리상 편리하기 때문이리라. 그때 갑작스레 내 머리를 스쳐간 것은 그가 단골 빵집을 통해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상점 안내서에서 빵집들을 찾아보았다. 카페와 가까운 곳에 모두 다섯 군데의 빵집이 있었다. 직접 찾아가 하나하나 물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스트로브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따라나섰다. 그의 생각은 클리시 대로 주위의 모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스트릭랜드가 세 들고 있는지 집집마다 물어 보자는 거였다.
그러나 나의 이 지극히 평범한 계획이 들어맞았다. 두 번째 빵집에서 일하던 여자가 그를 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어느 집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맞은편 세 집 중의 한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찾아간 첫 집의 아주머니 말이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보라는 것이었다.
"어디 아픈 모양이죠?" 스트로브가 물었다.
"아마 그럴 거예요." 아주머니는 아주 무관심한 말투였다,"요즘 며칠 동안 통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스트로브는 앞서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가다 보니 벌써 그는 셔츠 차림의 노동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무 방문이나 두드려서 불러 낸 보양이었다. 그 노동자는 다른 방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사는 사람이 화가이긴 한 모양인데 요즘 일 주일 동안은 통 얼굴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스트로브는 그쪽으로 다가가 금방 문을 두드릴 것처럼 하더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몹시 겁에 질린 듯했다.
"죽었으면 어떡하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대답했다.
내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었다. 손잡이를 돌려보니 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내가 먼저 걸어 들어갔고 스트로브는 뒤따라 들어왔다. 방안은 캄캄했다. 경사진 천장의 모양으로 보아 지붕 밑 방이란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줄기 희미한 빛이라기보다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천장 꼭대기 창구멍으로부터 비치고 있었다.
"스트릭랜드 씨!" 내가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방 안에 감돌고 있었다.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스트로브는 걱정으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동안 불을 켤까 말까 망설였다. 방 한구석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침대인 것 같았지만, 만약 불을 켰다가 그 위에 시체가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웠다.
"성냥도 없어, 이 바보들아?"
어둠 속에서 울려 나오는 거친 목소리는 틀림없는 스트릭랜드의 목소리여서 나는 움찔 놀랐다.
스트로브가 외쳤다."여보게, 이 사람아. 난 자네가 죽은 줄 알았네."
나는 성냥으로 불을 켜고서 양초를 찾았다. 그 바람에 그 조그마한 실내를 둘러볼 수 있었다. 화실 겸 방으로 겨우 있는 것이 침대 하나, 벽을 보고 있는 캔버스 몇 개와 이젤, 테이블 하나와 의자 하나가 전부였다. 방바닥에는 카펫도 깔려 있지 않았고. 난로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림 물감, 팔레트, 나이프, 그 밖의 여러 가지가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물건 중에 쓰다 남은 양초가 한 자루 있었다. 나는 거기다 불을 붙였다. 스트릭랜드는 자기 몸보다 훨씬 작아 아주 불편스럽게 보이는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옷을 있는 대로 다 덮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고열인 것만은 확실했다. 스트로브는 감정이 복받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아니, 여보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가 아픈 줄은 전혀 몰랐네. 왜 진작 알려 주지 않았나? 자네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다 해준다는 걸 잘 알 텐데. 언젠가 내가 한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렸나?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네. 아무튼 내가 잘못했어. 내가 성을 내다니 정말 어리석었네."
"집어치워." 스트릭랜드가 말했다.
"자, 정신 좀 차리게. 내가 편하게 해줄 테니. 돌봐 줄 사람도 없지 않나?"
그는 그 더러운 지붕 밑 방을 진저리난다는 듯이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부자리를 바로 해줬다. 그 동안 스트릭랜드는 거칠게 숨만 쉴 뿐 성난 듯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격분한 눈치를 보였다. 나는 가만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나를 위해 뭘 해주고 싶거든 우유나 좀 사다 줘. 이틀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어."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침대 밑에는 빈 우유병이 있었고, 신문지 조각에는 빵 부스러기가 남아 있었다.
"그럼 그 동안 뭘 드셨소?"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먹었어."
"아니, 며칠 동안이라고?" 스트로브가 크게 외쳤다. "이틀 동안 전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단 말인가? 맙소사."
"물은 마셨어."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곳에 둔, 커다란 양철통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내 당장 갔다 오지." 스트로브가 말했다. "뭐 또 생각나는 것 없나?"
나는 우선 체온계와 포도, 빵을 사오는 것이 좋겠다고 일러 주었다. 스트로브는 그저 자기가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에 기뻐서 계단을 쿵쾅거리며 부산하게 뛰어 내려갔다.
"바보 같으니라고." 스트릭랜드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박은 빠르게 뛰고 있었으나, 매우 약했다. 그에게 한두 마디 질문을 해보았으나 도무지 대답하기를 싫어했고, 그래도 계속 조르니까 귀찮다는 듯이 벽을 향하여 돌아누워 버렸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0분쯤 지나서, 스트로브가 숨을 헐떡이며 돌아왔다. 내가 일러 준 것말고도 양초와 고기즙, 그리고 알코올 램프를 사 가지고 왔다. 그는 이런 일에는 솜씨가 있는 사람이라 당장에 밀크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트릭랜드의 체온을 재어 보았다. 화씨 1백4도(섭씨 40도)나 되었다. 분명히 그는 중태였다.
25.
얼마 뒤 우리는 스트릭랜드를 남겨 두고 그곳을 나왔다. 더크는 집으로 저녁 먹으러 갈 작정이었고, 나는 의사를 데리고 다시 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 갑갑한 지붕 밑 방에서 나와 거리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자, 그 네덜란드인은 나더러 자기 아틀리에로 가자고 청했다. 그가 뭐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생각을 품고 잇는 것 같았고 꼭 내가 자기를 따라와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당장 의사가 와봤자, 우리가 한 것 이상 더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의 아내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크는 그녀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여보, 당신에게 청이 하나 있는데." 그가 말했다.
그의 아내는 애교를 부리면서도 엄숙한 기분을 잃지 않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그 분위기는 꽤 매력적이었다. 더크의 붉은 얼굴은 땀으로 번쩍였고, 표정은 우스꽝스럽게 흥분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둥글고 놀란 듯한 눈에는 열성적인 광채가 깃들여 있었다.
"스트릭랜드가 많이 아픈데, 죽을지도 몰라. 더러운 지붕 밑 방에 혼자 살고 있어서 돌봐 줄 사람 하나 없는 형편이야. 그래서 그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어."
그의 아내는 두 손을 재빨리 뺐다.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날쌘 그녀의 동작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싫어요."
"여보, 그렇게 거절하지 마. 난 그런 곳에다 그 사람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 그 생각만 하면, 밤에 잠도 못 잘 것 같아."
"당신이 돌봐 주는 건 마음대로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싸늘하고도 냉담했다.
"그럼 죽을지도 몰라."
"죽어도 그만이죠, 뭐."
스트로브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한 번 문지르고는 나를 향해 구원을 청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위대한 예술가야."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아무튼 전 그 사람이 싫어요."
"여보, 그 말 진심은 아니겠지? 여보 날 한 번 봐주는 셈 치고 그 사람을 여기 데려옵시다. 여기 오면 기분도 나아질 거고, 살아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당신에게 귀찮은 일은 하나도 없을 거야.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침대는 아틀리에에다 만들면 되잖아. 저렇게 개처럼 죽게 놔둬서는 안 돼. 그러면 사람도 아니야."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 될 것 아니에요."
"병원이라니? 그에겐 정성어린 간호가 필요해. 웬만한 간호로는 안 된다고."
나로서는 그의 아내가 그렇게 격분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식탁을 차리고 있었지만 두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란 사람, 정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아프다면 그 사람이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할 것 같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간호해 줄 텐데. 그리고 사정이 달라. 나는 그리 중요한 화가도 아니니까."
"당신이란 사람 정말 형편없어요. 땅에 엎드려서 세상 사람들에게 '날 밟아 주십시오.' 하는 꼴이 아니고 뭐예요?"
스트로브는 잠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의 아내가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지를 그제야 깨달은 것 같았다.
"당신은 그가 내 그림을 구경하러 왔을 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가 내 그림을 좋지 않게 보았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걸 보여 준 내가 어리석었지. 그리고 사실 말이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그림들이야."
그는 자못 비참한 표정으로 아틀리에를 한 번 휘둘러보았다. 이젤 위에는 한 송이의 포도를 머리 위에 얹고 서 있는 검은 눈동자의 처녀와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이탈리아 농부의 그림이 그리다 만 채 놓여 있었다.
"좋지 않게 생각한다 해도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게 모욕을 줄 필요가 있어요. 그 사람은 당신을 멸시하고 있는데, 당신은 결국 그 사람 손을 핥고 있는 격이잖아요? 전 그 사람 정말 싫어요."
"여보, 그는 천재야. 날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나도 천재였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나는 천재는 아니지만 천재를 보면 알 수 있어. 그리고 진심으로 받들어 주고 싶어. 이 세상에서 그런 일만큼 멋진 것은 없어. 그리고 천재란 것은 말이야, 당사자에게는 여간 무거운 짐이 아니야. 그러니 그런 천재에 대해선 우리가 최대한의 아량을 갖고 받아 주어야 하는 거야."
나는 이 부부의 싸움에 다소 당황하여 물러서 있었으며, 그리고 왜 스트로브가 나더러 동행하자고 졸랐는지 의아스러웠다. 그의 아내는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을 듯했다.
"하지만 내가 그 사람을 여기 데려오자는 건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야. 그 역시 인간이고 병들었고 가난하기 때문이야."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을 이 집에 들여놓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스트로브는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가 좀 얘기해 줘. 생사에 관한 문제라고 말이야. 도저히 그런 누추한 곳에다 그냥 놔둘 수 없다고 말이야."
"여기로 데려와서 간호하면 훨씬 쉬우리라는 것은 틀림없죠."내가 말했다. "하지만 상당히 불편할 겁니다. 그러니 사람을 하나 둬서, 밤낮으로 돌봐 주도록 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여보, 당신이 그 정도의 수고도 마다하지는 않겠지."
"그 사람이 여기 오면, 전 나가겠어요." 스트로브 부인의 어조는 매우 험악했다.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평소의 당신은 친절하고 다정하잖아."
"제발 절 좀 이대로 놔줘요. 이러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아요."
그러더니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양 어깨가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거세게 흔들렸다. 그러자 더크는 곧 그녀 곁에 무릎을 꿇고, 아내를 껴안아 입을 맞추면서, 애칭을 불렀다. 벌써 그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몸을 빼고 눈물을 닦았다.
"혼자 있게 해줘요." 그녀는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나를 돌아보고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겠네요."
스트로브는 어리둥절한 채, 계속 아내를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다.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득 잡혔고, 붉은 입술은 뾰로통하게 나와 있었다. 그 모습은 이상하게도 놀란 기니피그를 연상시켰다.
"그럼 아무래도 안 되겠단 말이오?"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듯한 몸짓을 했다. 지쳐 버린 것이다.
"아틀리에도 당신 것이고, 여기 있는 것 모두 당신 것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이 그를 여기 데려오고 싶다면 제가 어떻게 말릴 수 있겠어요?"
그의 둥근 얼굴에 미소의 그림자가 스쳐갔다.
"그럼 당신도 좋다는 거로군? 여보, 나도 당신이 승낙해 줄 줄 알았어."
그 말에 그녀는 갑작스레 몸을 도사리고 사나운 눈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마치 심장의 떨림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가슴 위로 두 손을 올려 움켜쥐었다.
"여보, 우리가 만난 뒤로, 저를 위해 어떻게 해달라는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못 해줄 일이 없다는 것쯤은 당신도 잘 알잖아."
"그럼 제발 스트릭랜드만은 여기 데려오지 말아 주세요. 다른 사람이라면 정말 당신 마음대로 하셔도 좋아요. 도둑이든 주정뱅이든 거리의 부랑자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돌보겠어요. 그렇지만 제발 스트릭랜드만은 데려오지 마세요.
"아니, 왜 그래?"
"그 사람은 무서워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 때문에 큰 봉변을 당할 거예요. 저는 알 수 있어요. 그런 예감이 들어요. 그 사람을 여기 데려오면 만사가 끝장이에요."
"그런 엉터리 말이 어디 있어?"
"아니에요. 제 말이 맞아요.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예요."
"왜? 우리가 좋은 일을 해주기 때문에?"
그녀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운 빛이 어려 있었다. 나는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다만 그녀가 형체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모든 자제력(自制力)을 잃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사람됨이 침착한 편이어서 그토록 흥분하고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스트로브는 어안이 벙벙한지 잠시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 아내야.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이라니까. 그러니까 당신이 조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아무도 데려오지 않을 테니 조금도 염려 말아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현기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이렇게 신경질적인 여자인 줄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 스트로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침묵을 깨뜨리는 데 어색한 감이 있었다.
"당신도 지독한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때 마침 구원의 손이 뻗치지 않았소? 그게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는 당신도 잘 알 거요. 그러니 이번에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일을 베풀어 보는 것도 좋잖아."
그 말 자체는 퍽 평범했으나, 내 귀에는 오히려 설교조로 들려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런데 그 말이 블랑슈 스트로브에게 미친 효과는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그녀는 멈칫하더니 남편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스트로브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로서는 그가 왜 당황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뺨에 희미한 혈색이 떠올랐다가 다시 창백해졌다. 아니 창백해졌다기보다는 새파랗게 되고 말았다. 마치 몸 전체에서 핏기가 사라져 버린 듯이 보였다. 손조차 창백해졌고,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리고 아틀리에 전체의 침묵이 한데 모여서 거의 만질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형체를 이루는 것 같았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스트릭랜드를 여기 데려오세요. 최선을 다하겠어요."
"고마워." 스트로브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두 팔로 아내를 안으려 했으나 그녀가 슬쩍 몸을 피했다.
"손님 앞에서 그러시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제가 바보처럼 보이지 않겠어요?"
그녀의 태도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을 보고 그녀가 조금 전에 심한 흥분에 떨었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26
다음날 우리는 스트릭랜드를 옮겼다. 그를 달래서 옮기기까지 이만저만 애를 먹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몹시 쇠약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트로브의 간청과 내 결단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할 힘이 없었다. 우리는 무어라고 힘없이 욕지거리를 퍼붓는 그에게 옷을 입혀 아래층으로 부축해 내려와 마차에 태우고, 결국 스트로브의 아틀리에까지 데리고 왔다. 그는 아틀리에에 도착할 즈음에는 힘이 없었던지 침대에 눕힐 때에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6주일을 계속 앓았다. 어떤 때에는 두 시간도 채 못 살 것 같기도 했으나, 어쨌든 목숨을 지탱해 나간 것은 오로지 그 네덜란드인의 정성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렇게 힘이드는 환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까다롭게 신경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도무지 불평도 없고 청하는 것도 없고 전혀 말이 없었다. 오히려 자기를 돌보아 주는 것이 원망스럽다는 그런 태도였다. 그리고 기분은 어떠냐, 필요한 건 없느냐 하고 이쪽에서 물으면 반드시 조소나 냉소, 혹은 욕설로 응수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그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난 그가 위독한 상태를 벗어나자 서슴치 않고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더크 스트로브는, 자기 일은 다 집어치우고 스트릭랜드를 간호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를 편하게 해주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재주가 좋아서 의사가 처방한 약을 교묘하게 먹일 때는 나로서도 언제 그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나 하고 놀랄 지경이었다. 아무튼 어떠한 고생도 스트로브는 힘들어하지 않았다. 자기들 부부만 살아가는 데는 그다지 부족함이 없는 재산이었지만, 그렇다고 여분의 돈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스트릭랜드의 변덕스러운 구미를 맞춰 주느라고 제철이 아니라 값만 터무니없이 비싼 식품을 사는 등 분수에 넘치게 돈을 썼다. 그가 스트릭 랜드를 달래서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참을성과 재치를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스트릭랜드의 무례한 언동에 대해서도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스트릭랜드가 시무룩해 있을 때는 못 본 척했고, 노골적으로 성미를 부리면 한번 껄걸 웃고 넘겼다.
스트릭랜드의 몸이 약간 회복되어 가끔 자기를 조롱하면서 기분 좋아 흥겨워하면, 일부러 더 어리석은 짓을 해서 그의 조롱을 기꺼이 받으려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내게 만족의 시선을 던지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환자가 얼마나 좋아졌는가를 좀 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스트로브란 인간은 그렇게 천진스러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아내이다. 그녀는 단순히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헌신적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스트릭랜드를 아틀리에로 데려오겠다는 남편의 청에, 강경하게 반대했다는 것은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환자에게 필요한 일로 자기가 할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곤 했다. 환자를 귀찮게 하지 않고 시트를 바꿀 수 있도록 침대를 다시 놓은 것도 그녀이고, 때로는 몸도 씻겨 주었다. 그런 솜씨를 내가 칭찬하면 그녀는 그 명랑한 미소를 조금 보이면서 한때 병원에 근무했었다고 했다. 스트릭랜드를 그렇게도 미워했던 표시는 조금도 내보이지 않았다. 환자와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그가 바라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는 데도 무척 빨랐다. 처음 두 주일 동안은 밤새도록 환자 곁에 붙어 있어야 했는데, 그때도 자기 남편과 교대로 그 일을 맡아서 했다. 나는 가끔 그녀가 캄캄한 밤에 환자 곁에 혼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침대에 누워 있는 스트릭랜드는 텁수룩한 붉은 턱수염에, 충혈된 채 허공을 응시하는 두 눈, 그리고 평소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어서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병 때문에 두 눈은 훨씬 커졌고 이상스러운 광채까지 띠고 있었다.
"밤에 환자가 무슨 이야기를 걸지는 않나요?" 내가 한 번 그녀에게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아뇨."
"아직도 그가 싫으세요?"
"그럼요. 더 싫어요."
그녀는 유순한 회색빛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때의 표정이 얼마나 평온하던지 언젠가 본 그런 격분을 일으킬 수 있는 여자라고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돌봐 줘서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적이 있나요?"
"아뇨." 그녀는 미소지었다.
"그게 어디 인간입니까?"
"정말 밉살스러워요."
스트로브는 물론 그런 아내를 퍽 대견스러워했다. 자기가 지워준 짐을 성의껏 수행하는 아내의 정성에 도무지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다만 블랑슈와 스트릭랜드가 서로를 대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여보게. 둘이 몇 시간이고 같이 앉아 있으면서 서로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겠나?"
언젠가 스트릭랜드의 병세가 썩 좋아져서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일어나겠다고 하던 때였다. 나는 그 둘과 함께 스트로브의 부인은 스트릭랜드의 셔츠를 꿰매고 있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채 한마디 말도 없었다. 어쩌다 문득 그의 눈길이 블랑슈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일종의 야릇한 냉소가 스며 있었다. 그 시선을 느꼈던지 그녀도 눈을 들었고 그들은 얼마 동안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때 그녀의 표정을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알 수 없는 당황함이 엿보였고, 그리고ㅡ왜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ㅡ충격의 빛이 스며 있었다. 스트릭랜드는 곧 시선을 거두고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냥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2, 3일 후에 스트릭랜드는 겨우 일어났다. 정말 뼈와 가죽밖에 남은 게 없어 옷을 입은 모습이 마치 허수아비에게 누더기를 걸쳐 놓은 것 같았다. 지저분하게 마구 자란 수염에다 긴 머리카락, 게다가 원래 보통보다 큰 이목구비가 병을 앓는 바람에 더욱 강조되어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기괴하기는 했으나 추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괴상한 모습에는 뭔가 기념비와도 같은 독특한 불멸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그때 내가 받은 인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아무튼 그의 육체는 거의 유령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영(靈)적인 어떤 걸 나타낸다고는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에 난폭한 관능성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소 터무니없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 관능성 자체는 이상하게도 영적인 데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어떤 원초적이고 원시적인 힘이 있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사티로스 같은 반인반수의 형체로 인격화시킨 불가사의한 자연의 힘을 지닌 듯했다. 그는 감히 신을 상대로 노래 실력을 겨루다가 결국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았다는 그리스 신화의 마르시아스를 연상시켰다.
스트릭랜드는 신비로운 하모니와 아직 아무도 시도해 보지 못한 새로운 행동양식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사람인 것 같아, 나는 결국 그가 고뇌와 절망으로 최후를 맞이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또 그가 귀신에 홀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귀신이 반드시 악귀라고 말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선과 악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어떤 원시적인 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그림은 그리지 못했다. 단지 조용히 아틀리에에 앉아, 공상에 잠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독서를 하거나 했다. 그가 좋아하는 책 또한 이상했다. 어느 땐가 <말라르메 시집>을 열심히 읽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는 어린애같이 글자를 하나하나 소리내며 책을 읽었다. 그래서 그 미묘한 운율과 난해한 구절들을 읽고 그가 도대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때로는 가보리오의 탐정소설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처럼 책을 선택하는 데도 결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기상천외한 그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또 이상하게 생각된 것은 몸이 그렇게 쇠약해졌는데도 몸을 돌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스트로브는 원래 편안한 것을 좋아해서 그의 아틀리에에는 쿠션이 좋은 안락의자 두 개와 커다란 소파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스트릭랜드는 도무지 거기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슨 금욕주의를 자처하는 것도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혼자 있을 때 내가 아틀리에에 불쑥 들어간 적이 있는데 역시 세 발 달린 둥근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 이유는 단 하나, 거기에는 앉기 싫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팔걸이도 없는 부엌용 의자 같은 데만 골라서 앉곤 했다. 그런 것을 볼 때면 나는 화가 벌컥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도 철저하게 자기 환경에 무관심한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후 2, 3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루쯤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고 루브르 미술관으로 갔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림들을 이것저것 보고 돌아다니면서, 그 그림들이 일으키는 감정으로 여러 가지 공상에 잠겨 보곤 했다. 그런 기분으로 긴 화랑(畵廊)안을 어슬렁거리다가 스트로브를 만났다. 나는 그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무엇에 깜짝 놀란 듯한 그의 뚱뚱한 몸은, 그를 보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자아내게 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는 이상하게도 기분이 울적해 보였다. 무슨 고민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우스운 것은 그의 모습이 마치 옷을 입은 채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 아직도 놀라고 있으면서, 그런 자기를 자신도 바보 같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몸을 돌려서 내 쪽을 쳐다보았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둥글고 푸른 그의 눈이 안경 너머로 번민의 그림자를 띠고 있었다.
"스트로브!" 내가 그를 불렀다.
그는 움찔 놀라더니 곧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슬픔이 깃들여 있었다.
"왜 그렇게 기운 없이 돌아다녀?" 나는 명랑한 어조로 물었다.
"루브르 와본지도 오래 되어서 어디 새로운 거라도 있나 하고 와봤지."
"아니, 이번 주 안으로 다 끝낼 그림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 화실은 스트릭랜드가 쓰고 있다네."
"그래?"
"내가 권했어. 아직 자기 집으로 돌아갈 정도로 몸이 회복되지는 않아서 둘이 같이 쓰면 되겠다고 생각했어. 이 근처에는 아틀리에를 공동으로 쓰고 있는 녀석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난 오히려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일하다 지치면 이야기라도 나누고 그러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고, 늘 생각해 왔던 거였으니까."
그는 약간 거북스러울 정도로 한마디 한마디씩 끊어서 말했다.
그러고는 그 순하고 어리석은 두 눈을 내게서 떼지 않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괴어 있었다.
"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의아스러운 듯이 말했다.
"스트릭랜드는 혼자가 아니면 일을 못 한 대."
"뭐라고? 아니, 그곳은 자네 화실 아닌가. 그가 그것도 모른단 말이야?"
힘없이 나를 쳐다보는 그의 모습이 가여웠다.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야?" 나는 좀 날카롭게 물었다.
그는 멈칫하면서 얼굴만 빨개졌다. 그러고는 비참한 표정으로 벽에 걸린 그림을 흘끗 보면서 울상을 지었다.
"그 녀석이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해. 나보고 나가라는 거야."
"아니, 뭐라고? 그럼 자넨 욕도 한마디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 녀석이 날 쫓아내는 거야. 힘으로는 좀처럼 당해 낼 수가 없었어. 그러고는 내 뒤로 모자를 던지고서 문을 잠가 버렸다네."
나는 스트릭랜드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스트로브의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그래, 부인은 뭐라고 그래?"
"시장에 가고 없었어."
"부인은 안으로 들여보내 주겠지?"
"그것도 모르겠어."
나는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스트로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선생님에게 야단맞고 있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럼 내가 대신 그를 몰아내 줄까?"
그는 약간 놀라더니 그 번들번들한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러지 마."
그러고는 내게 고개를 한 번 끄덕하더니, 그냥 걸어가 버렸다. 틀림없이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나는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28
1주일 뒤에야 비로소 진상을 알수 있었다. 밤 열시쯤이었을 것이다. 식당에서 혼자 저녁을 먹은 다음, 내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책을 읽고 있는데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복도로 나와서 문을 열었더니 스트로브가 서 있었다.
"들어가도 돼?"
층계가 어두워서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에는 나를 놀라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원래 술을 잘 안 마신다는 걸 몰랐다면 난 어디서 잔뜩 취해 가지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곧 그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앉으라고 권했다.
"다행히도 내겐 자네가 있어"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나는 전에 없이 격한 그의 목소리에 놀라서 이렇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그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는 항상 옷차림이 깔끔한 편이었는데, 그대는 차림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틀림없이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내가 막 그의 차림새에 대해 놀리려고 하는 데 그가 불쑥 말했다.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조금 전에 들렀는데 자네가 집에 없더군."
"저녁을 좀 늦게 먹느라고."
나는 생각을 바꿨다. 이렇게 그를 자포자기하게 만든 것은 결코 술이 아닐 것이다. 여느 때 같으면 홍조를 띠고 있을 그의 얼굴이 그때는 이상스럽게도 얼룩이 져 있었다. 두 손도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물어 보았다.
"아내가 날 버렸다네."
겨우 이 말만 하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의 아내가 남편이 하도 스트릭랜드에게 열중하는 바람에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게다가 스트릭랜드의 심술궂은 태도에 화가 난 나머지 그를 당장에 쫓아내지 않으면 떠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때는 얌전하고 침착한 여자지만, 일단 성질을 부리면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스트로브가 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그의 아틀리에를 뛰쳐나가고도 남을 여자였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사내가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보니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
"여보게, 너무 그렇게 낙담하지 말게. 부인은 곧 돌아올 거야.
여자가 홧김에 내뱉는 말은 곧이곧대로 듣는 게 아니야."
"자네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아내는 스트릭랜드에게 반했다네."
"뭐라고?"
그 말에는 나도 깜짝 놀랐으나,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느낀 순간, 그런 놀라움은 사라져 버렸다.
"여보게, 어리석은 소리 그만 하게. 설마 그 녀석을 질투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부인은 그 녀석을 꼴도 보기 싫어한다는 걸 잘 알잖아?"
"그건 자네가 잘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는 마치 신음하듯이 말했다.
"아니, 자네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 아니야?" 나도 적잖이 화가 나서 짜증스럽게 말했다. "자, 위스키 소다를 한 잔 줄 테니 좀 마셔 봐. 기분이 한결 나아질 거야."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인간은 교묘하게도 자기 스스로를 괴롭히려고 별의별 일을 다 꾸민다고 생각했다. 더크가 자기 아내가 스트릭랜드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서는, 아내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도리어 그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의 의심을 살 만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보게," 내가 입을 열었다. "자네 아틀리에로 같이 가세. 만일 자네가 지나친 생각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면, 부인에게 사과를 해야 하네. 내가 보기에 부인은 그런 일을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 둘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어떻게 아틀리에로 돌아가나?" 그는 지친 듯한 어조로 내뱉었다. "아내와 그 녀석이 거기 있어. 그들에게 전부 넘겨 주고 왔는걸."
"그럼 자네 부인이 자네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네가 그녀를 버렸군."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그래도 나는 아직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말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정말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 어쨌든 그 얘길 하러 왔을 테니, 처음부터 자세히 얘기해 보게."
"사실은 오늘 오후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스트릭랜드에게 이렇게 말했네. 이제 다 나았으니 그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이야. 나도 아틀리에를 써야 하니까."
"상대가 스트릭랜드가 아니었다면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조차 없었겠지." 내가 말했다. "그래, 그가 뭐라던가?"
"잠깐 허허 하고 웃더군. 그 녀석 웃는 모습 자네도 잘 알지? 즐거워서 웃는 게 아니라. 상대편을 바보로 만들려고 웃는 것 말이야. 그러고는 당장에 나가겠다며 자기 짐을 꾸리기 시작하더군. 그를 옮겨올 때 내가 그 녀석이 쓰던 방에서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모두 가져왔지 않나? 그러더니 그가 아내에게 그것들을 포장할 종이와 노끈을 달라고 하더군."
스트로브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숨을 헐떡거렸다. 나는 그가 당장 졸도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나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아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종이와 노끈을 가지고 왔어.
그 녀석은 아무 말도 없이 짐을 꾸리고 나더니 휘파람을 한 곡 불더군. 다른 사람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어. 눈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담고 말이야. 내 가슴은 천근만근 가라앉는 것 같았네.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더란 말이야. 내가 괜히 그런 말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녀석이 모자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는데, 바로 그때 아내가 입을 열더군. '여보 나도 이분과 같이 갈래요. 당신과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어요.' 라고. 나는 무슨 말을 해보려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져야 말이지. 스트릭랜드란 놈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네.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냥 휘파람만 불고 있더군."
스트로브는 여기서 다시 말을 멈추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겨우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으므로 나는 너무 놀랐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떨려오는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가까이 가서 아내를 껴안으려고 하니까, 그녀는 몸을 피하면서 손을 대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자기 곁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지금까지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바쳐 왔는지, 또 그 동안 두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생활을 해왔는지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나무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제발 저를 조용히 가게 해주세요, 더크."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모르시겠어요, 제가 스트릭랜드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저이가 어디로 가든 전 따라갈 거예요."
"하지만 저 사람은 결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해. 당신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면 안 돼. 그 길 앞에 어떤 운명이 놓여 있는지 당신은 모르고있어."
"모두 당신이 잘못이에요. 당신이 저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고집 피웠잖아요."
그는 할 수 없이 스트릭랜드에게 사정했다.
"제발 저 사람을 살려 주시오." 그는 애원하며 말했다. "그런 미친 짓을 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되요."
"그거야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는 거지." 스트릭랜드가 대답했다. "나는 오라고 하지 않았소."
"내 마음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녀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스트릭랜드의 모욕적인 냉정함이, 얼마 남지 않은 스트로브의 자제력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렸다. 맹목적인 분노의 불길이 그를 휘감자, 자신도 모르게 스트릭랜드에게 달려들었다. 불의의 습격을 당하자 스트릭랜드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오래 앓았다 해도 원래 튼튼했던 사람이었으므로 도리어 스트로브가 방바닥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웃기는군!" 스트릭랜드가 말했다.
스트로브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아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는 것을 알자, 그녀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 격투에 안경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으나 그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안경을 주워서 말없이 가져다 주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이 갑작스럽게 뼈저리게 느껴져, 수치스러운 짓인 줄 알면서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이윽고 그가 신음하듯이 말했다. "당신이 어쩌면 이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소?"
"저 자신도 어쩔 수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당신만큼 내가 사랑했던 여자는 이 세상에 없소.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었더라면, 내게 왜 진작 얘기해 주지 않았소? 그랬더라면 내가 곧 고쳤을 텐데. 나는 당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다해왔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그의 말을 단지 지겨워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코트를 입고 모자를 썼다. 그러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그는 그녀가 정말로 가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재빨리 따라가서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그 앞에 꿇어앉았다. 자존심은 모두 버렸다.
"제발 가지 마. 당신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어. 난 죽고 말거야. 내가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한 일이 있다면 제발 용서해 주오. 기회를 한번만 더 줘. 당신의 행복을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여보 일어나세요. 자꾸 이러시면 당신만 바보가 돼요."
그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는 황급히 물었다. "스트릭랜드가 사는 데가 어떤 곳인지 당신이 몰라서 그러는 거야. 당신은 그런 데선 정말 못 살아. 구역질나는 곳이야."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왜 당신이 걱정하세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얘기할 것이 있소. 그것마저 거절하지는 않겠지?"
"아무 소용 없어요. 전 이미 결심했어요. 당신이 어떤 얘기를 해도 면하지 않아요."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통스럽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당신 마음을 바꿔 놓으려고 이러는 게 아니오. 다만 잠깐만 내 얘기를 들어 줬으면 하는 거야. 이건 내가 당신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거절하지 말아 줘."
그녀는 발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는 듯한 두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 눈빛은 너무나 냉담하고 무심했다. 그녀는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말씀해 보세요."
스트로브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당신도 좀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공기만 마시고는 살지 못하잖아. 스트릭랜드는 한 푼도 없어."
"그건 저도 알아요."
"당신은 가난 때문에 진저리가 날 정도로 고생하게 될 거야. 그가 회복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알아? 거의 굶어 죽을 지경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야."
"그를 위해서라면, 내가 돈을 벌 수도 있어요."
"어떻게?"
"몰라요. 방법이 있겠죠."
무서운 생각이 이 네덜란드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는 몸을 떨었다.
"당신, 정신이 나간 모양이군. 어쩌다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거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가도 상관없겠죠?"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
그는 자기 아틀리에를 지친 시선으로 휙 둘러보았다. 그는 이방을 좋아했다. 이방은 아내가 있어서 가정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있더니 아내의 모습을 마음 속에다 새겨 놓기라도 하듯 그녀를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일어나서 모자를 집어들었다.
"내가 가지."
"당신이?"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당신이 그 구역질나는 더러운 다락방에서 살 거라는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어. 그리고 이 집은 내 집이기도 하지만 당신 집이기도 해. 여기라면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는 돈을 넣어둔 서랍이 있는 데로 가서 지폐를 꺼냈다.
"여기 있는 돈의 반을 당신한테 주고 싶어."
그는 돈을 탁자 위에 놓았다. 스트릭랜드뿐만 아니라 그녀도 말이 없었다.
그는 또 다른 일이 생각났다.
"내 옷들은 몽땅 꾸려서 관리인 아주머니에게 맡겨줘요. 내일 와서 찾아갈 테니까." 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럼 잘 있어요. 그 동안 날 행복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그는 걸어나와 문을 닫았다. 내 눈에는 스트릭랜드가 모자를 테이블 위에다 휙 던지고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는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스트로브가 내게 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의 연약한 성격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나의 불만을 그 역시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스트릭랜드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자네도 잘 알잖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를 그런 곳에서 살게 할 수는 없었어.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었네."
"그건 자네 사정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럼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나?" 그가 물었다.
"부인을 그런걸 다 알면서도 나간다고 한 게 아닌가. 그러니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스스로 책임질 일이야."
"그건 그래. 하지만 자네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럼 자네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나?"
"아무렴, 전보다 더욱. 스트릭랜드란 녀석은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인간이 못 돼. 결코 오래 못 갈 거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좋겠어."
"그럼 자네는 언제든 그녀를 다시 받아들일 마음이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아마 날 더욱더 필요로 하게 될 거야. 버림받고 혼자 상심해 있을 때 갈 곳이 없다면 얼마나 비참하겠나?"
그는 이번 일로 그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정신이 나갔다고 화를 낸 내가 오히려 평범하고 흔해빠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심정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물론 내가 그녀를 사랑하듯이 그녀가 나를 사랑해 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어. 나는 한낱 어릿광대이니까, 여자의 사랑을 받을 만한 인간은 되지 못해. 나도 잘 알고 있었지. 그러니 아내가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졌다고 해도 조금도 나무랄 일이 아니지."
"자네만큼 자존심 없는 인간은 정말 처음 보는군." 내가 말했다.
"난 나 자신보다도 아내를 더욱 사랑해. 사랑에 자존심이 끼여든다는 것은 상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겠지. 결혼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흔한 일이잖아. 그러다가 그 사랑이 식으면 다시 아내에게 돌아오고 아내 역시 남편을 받아들이잖아. 사람들도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말이야. 그렇다면 여자라고 뭐가 다르겠어?"
"이치로 봐서는 맞는 말이지." 나는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렇게 만들어지질 않았으니, 그럴 수 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스트로브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러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스트로브라도 이런 일을 미리 눈치채지 못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언젠가 블랑슈 스트로브의 두 눈에 이상한 표정이 나타났던 게 생각났다. 아마 그때 이미 자신에게도 충격적이고 놀라운 어떤 일이 싹트고 있다는 걸 막연하게나마 인식하게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그럼 자네는 여태까지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의심해 본 적도 없었나?" 내가 물었다.
"내가 묻는 말이 듣기 싫다면 그렇다고 말해."
"말을 해버리는 게 속이 편할 것 같군. 아 자네가 내 가슴속의 이 고민을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연필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사실 난 2주일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아내 자신보다도 내가 먼저 알았지."
"그럼 왜 스트릭랜드를 당장에 쫓아내지 않았나?"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그녀는 그를 보기도 싫어했으니까.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단순히 질투심이라고 생각했지. 사실 나는 항상 질투를 느껴왔거든. 하지만 그것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어. 난 아내가 아는 암자들을 모조리 질투했네. 자네도 질투했지. 내가 사랑하는 만큼 아내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고 있었어. 당연한 일이긴 해. 그래도 그녀가 내 사랑을 잠자코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그래서 두 사람만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일부러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가기도 했어. 나는 쓸데없는 의심을 품고 있는 나 자신을 벌하고 싶었네. 그런데 내가 밖에서 돌아가 보면 내가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어. 물론 스트릭랜드가 그렇다는 게 아니야. 그 녀석은 내가 있든 없든 상관도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아내가 그렇더란 말이야. 내가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가면 진저리를 치며 물러서기도 했어. 결국 확실하게 안 다음에도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어. 싸움이라도 벌이면 나만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못 본 척 하면,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될 줄 알았어. 싸우지 않고 조용히 그를 내보내기로 결심한 거란 말이야. 그 동안 내가 겪은 고통을 자네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그러고는 그가 스트릭랜드에게 제발 나가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계속했다. 때를 잘 선택해서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말을 꺼내느라 무척 애썼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유쾌하고 정답게 e들리기를 빌면서 조심스럽게 말하면서도 쓰라린 질투심이 자꾸 솟아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스트릭랜드가 그의 말을 받아들여 당장에 그 자리에서 떠날 준비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며, 더구나 아내가 따라갈 결심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차라리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걸 하고 후회하는 기색이었다. 아내와 헤어지는 고통보다는 질투의 고통이 더 나았던가 보다.
"그 녀석을 죽이고 싶었는데 오히려 나만 바보가 되었지."
그는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윽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기다리고만 있었으면 아무 일 없이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을 텐데. 내가 그렇게 조급하게 구는 게 아니었어. 가엾은 블랑슈! 내가 아내를 그 꼴로 만들어 버린 것 같아."
나는 어깨만 한 번 으쓱했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블랑슈 스트로브에 대해서는 조금도 동정할 마음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녀에게 대한 내 의견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더크에게 고통만 줄 뿐 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곤한 상태이면서도 그는 무슨 소리든지 지껄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의 광경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다시 한번 되풀이했다. 전에 내게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끄집어내어 말하는가 하면, 그렇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 건데 라며 자신의 무지를 탄식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하지 않은 걸을 탓해 보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밤은 점점 깊어가서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지쳐버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인가?" 내가 마침내 밀을 건넸다.
"무슨 도리가 있나? 아내가 날 불러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잠시 동안 어디 가 있으면 어떨까?"
"그건 안 돼. 그녀에게 내가 필요할 때 가까이 있어야 하니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렇다 할 계획도 없었다. 그만 가서 자라고 하니까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밖으로 나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거리를 쏘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와함께 하룻밤을 지내자고 설득시켜, 내 침대에 눕혔다. 거실에 소파가 하나 있어 나는 거기서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때쯤에는 지칠 대로 지쳐서, 내가 권하는 데에 항거할 기력이 없었다. 몇 시간 동안 푹 잘 수 있도록 약간의 수면제를 그에게 먹였다. 그것이 내가 지금 그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이었다.
30
생각과는 달리 임시로 마련한 잠자리가 너무 불편해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이 가엾은 네덜란드인이 들려 줬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블랑슈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단지 육체적인 끌렸을 거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진정으로 자기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애무와 안락에 대한 여자 특유의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는 어떤 나무에다 접붙여도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수동적인 감정일 뿐이다. 세상을 아는 어른들은 그러한 감정의 힘을 잘 알기 때문에, 처녀들에게 사랑은 자연히 생겨날 테니 너를 원하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전을 느끼는 데서 오는 만족감, 재산에 대한 자랑, 남이 자기를 원한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 가정을 지닌다는 만족감 등이 한데 어우러져서 생긴 감정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슨 정신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다만 여자들의 사랑스런 허영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단 열정에 휩싸이면 전혀 대항하지 못한다.
생각해 보니 블랑슈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를 극단적으로 혐오 한 것도 처음부터 막연하게나마 성적 매력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무슨 성의 신비를 풀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마 스트로브의 정열로써는 그녀의 본성이 요구하는 그 부분을 만족시켜 주지 못했을 것이며, 단지 그것을 자극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자기에게 줄 수 있는 힘을 스트릭랜드에게서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증오한 것이 아니었을까?
자기 남편이 그를 아틀리에로 데려오고 싶어했을 때 한사코 반대한 것은 물론 진심이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그가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이런 불행을 그녀가 미리 알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설인지 모르지만 그녀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느낀 공포는 어쩌면 그가 그녀의 마음을 이상하게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녀 자신에 대한 공포가 형태를 바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이 외모는 야성적이고 무뚝뚝했다. 두 눈은 냉정하고, 입은 관능적이며, 몸집은 크고 건장해서 마치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정열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즉 내가 그에게서 모든 물질이 대지(大地)와의 연관을 끊지 않은 채 그 자체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던 태초의 야성동물을 떠올렸듯이, 그녀 역시 그런 야성의 요소를 그에게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주면, 그녀는 필연적으로 그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녀는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아파서 누운 그와 매일 가까이 접촉하면서 그녀는 이상한 감동을 받게 된 것이리라. 환자의 고개를 들어올려 음식을 먹여 주어야 했는데, 그럴 때 안고 있던 머리는 묵직했을 것이고, 식사를 끝내고 나면 그 관능적인 입과 붉은 턱수염을 닦아 주었으리라. 그녀는 또 털이 숭숭 난 팔다리를 씻겨 주기도 했으며, 수건으로 손을 닦아 줄 때에는 매우 쇠약해지긴 했어도 그 손 역시 튼튼하고 남성적이었고, 손가락은 길고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유능한 예술가의 손가락이었으리라. 아무튼 그런 것들이 그녀에게 뭔지 모를 어떤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꼼짝하지 않고 죽은 듯이 잘도 잤다. 마치 오랫동안 사냥을 하고 난 다음, 깊은 휴식을 취하는 사나운 짐승과도 같았다. 그럴 때 그 꿈속을 어떤 공상들이 오갈까 하고 그녀는 생각해 보기도 했으리라. 사티로스에게 쫓겨 숲으로 달아나는 그리스 신화의 요정을 꿈꾸고 있을까? 요정은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지만 , 사티로스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와, 요정은 그의 뜨거운 숨결을 목덜미에 느끼게 된다. 그래도 여전히 요정은 말없이 도망치고, 사티로스 또한 말없이 그 뒤를 쫓아간다. 마침내 그가 그녀를 붙잡았을 때 그녀의 가슴을 떨리게 한 것은 과연 공포였을까, 아니면 희열이었을까? 블랑슈 스트로브는 잔인한 정욕의 손아귀에 사로잡혔다. 미워하기는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러면서도 그를 갈망했고, 지금까지 그녀의 생활을 이루고 있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친절하다가도 곧잘 화를 내고, 지각이 있는가 하면 전혀 지각이 없기도 하는 그러한 모순 덩어리의 여성에게서 벗어나, 그녀는 이제 바쿠스 신(神)의 무녀(巫女)가 되어 버렸고 욕망 그 자체로 변해 버렸다. 아니 이것은 지나친 공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만 남편에 대해 싫증이 난 나머지 냉담하게 호기심에서 스트릭랜드에게 달려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특별한 감정도 없이 서로 가까이 있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태한 나머지 사내의 유혹에 넘어갔고, 일단 그렇게 되자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져 스스로도 어찌할 길이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온화한 이마와 차가운 회색 눈 뒤에 숨은 생각과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사람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다루는 데 있어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더라도, 블랑슈 스트로브의 행동에 대해서는 몇 가지 그럴 듯한 설명을 붙일 수는 있다. 그러나 스트릭랜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내 보아도 내가 그때까지 알고 있던 그와는 전혀 상반되는 이번 행동에 대해서 설명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가 친구의 우정을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배반한다든가 남을 불행하게 만들면서까지 자신의 변덕을 만족시키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그것은 바로 그의 천성이다. 감사하는 마음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인간이며 동정심에 대해서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들은 그에게는 처음부터 존재한 적조차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 것은 마치 호랑이보고 잔인하다고 나무라는 것과 같다. 단지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변덕이었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블랑슈 스트로브를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사랑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부드러운 애정이 기본적인 감정인데, 스트릭랜드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도무지 애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사랑에는 일종의 약한 마음, 상대방을 보호해 주려는 마음, 선한 일을 하려 하거나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이 깃들여 있다. 그것이 이기심을 버리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마음은 생기는 법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포함된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스트릭랜드에게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일종의 탐닉이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으로부터 끌어낸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사랑이 끝날 것을 막연히 알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는 못한다. 또 그것이 하나의 환상인 줄 알면서도 그것에 현실성을 주고, 그것이 환상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빠지는 법이다. 사랑이란 사람을 약간은 그 자신 이상의 존재로 만드는 동시에, 또 약간은 그 이하의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의 개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물건, 자아(自我)에는 낯선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사랑이란 감상(感傷)을 아주 없애 버릴 수는 없는 것인데, 스트릭랜드같이 이런 약점과 거리가 먼 사람은 난 여태까지 보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사로잡는 사랑의 감정을 그가 참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낯선 구속을 그는 결코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그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는 알 수 없는 갈망과 자기 자신을 떼어 놓는 그 어떤 것도 가슴속에서 송두리째 뽑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령 온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고통스러울지라도. 내가 스트릭랜드에게서 받은 그 복잡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전달할 수 있다면, 그는 사랑을 하기에는 너무 크고, 동시에 너무 작다고 말해도 전혀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에 대한 개념은 사람마다 각자의 개성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므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스트릭랜드 같은 사람도 자기 나름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의 감정을 분석해 보려고 애써 보았으나 결국은 헛일이 되고 말았다.
31.
다음날, 내가 말렸지만 스트로브는 돌아가 버렸다. 내가 아틀리에에 가서 짐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했으나, 끝내 자기가 가겠다고 가버린 것이다. 아마 그들이 아직까지 자기 짐을 꾸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아내를 만나 볼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며, 어쩌면 자기 품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보니까 그의 짐은 벌써 다 꾸려져 관리인 방에서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관리인 아주머니 말로는 아내마저 외출하고 없다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도 그는 자기 불행을 주절주절 늘어놓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했으리라. 그는 아는 사람만 보면 어느 누구든 붙잡곤 이야기했는데, 그럴 때마다 동정을 살 생각이었겠지만 결과는 비웃음만 받을 뿐이었다. 그는 그렇게 못난 행동만 하고 다녔다.
언젠가는 부인과 못 만나는 걸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그녀가 시장 가는 시간을 알아내어 길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녀가 말도 하지 않으려는 것을 끈질기게 쫓아가 말을 걸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는 둥, 그녀를 너무도 깊이 사랑하고 있으니 제발 돌아와 달라는 둥, 침을 튀겨 가면서 애걸하다시피 말했지만 그녀는 대답조차 하려 하지 않고, 빠른 걸음걸이로 돌아가 버렸다. 그럴 때 살이 통통하게 찐 짧은 다리로 여자를 따라가 보려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내 눈에 선연했다. 급하게 따라가느라고 숨을 헐떡이며, 자기가 얼마나 가엾은 처지에 있는가를 말하면서, 자기에게 자선을 베풀어 용서만 해준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이 여행을 가보자고도 했다. 스트릭랜드는 이제 얼마 가지 않아 당신에게 싫증을 낼 거라고도 말했다. 이러한 답답한 장면을 세세하게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주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심한 분노를 느꼈다. 자존심이고 위엄이고 간에 모든 자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경멸스런 짓만 골라서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남자는 사랑하는데 여자는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경우에,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태도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럴 때는 친절이고 너그러움이고 없는 법이며, 미친 듯이 울화통만 터뜨릴 뿐이다. 블랑슈 스트로브는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남편의 얼굴을 힘껏 한 대 갈겨 주었다. 그녀는 그가 놀라서 어리둥절해하는 틈을 타서, 계단을 뛰어올라가 아틀리에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여자의 입에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셈이다.
내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는 아직도 얻어맞은 빰이 아픈 것처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러나 두 눈 속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과 놀라움이 깃들여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마치 심하게 매를 맞은 초등학교 아이같이 보여서 가엾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그 후로 그는 아내가 시장에 갈 때면 으레 지나갈 만한 길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그녀가 지나갈 때는 건너편 길 모퉁이에 서있곤 했다. 그는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못했지만, 가슴속에 가득 찬 호소를 그의 둥그런 두 눈에 드러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행여나 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그녀가 감동하여 마음을 돌리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후에도 시장에 가는 시간을 바꾸지 않았고, 또한 다른 길로 가지도 않았다.. 그녀의 냉담성은 잔인한 정도였다. 아마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가하는 고뇌에 은근히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왜 그를 그렇게도 증오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스러워했다.
나는 스트로브에게 좀더 현명해져야 한다고 타일렀다. 화가 치밀 정도로 그는 기백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자네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네." 내가 말했다. "차라리 지팡이로 그 여자의 머리를 두들겨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그랬더라면 그 여자는 자네를 그렇게까지 멸시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그에게 잠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조용한 그의 고향 마을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었다. 네덜란드 북부 어디인데, 그곳에 아직 그의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그들은 가난했다. 그들은 느릿느릿 흐르는 운하 옆에 있는, 작고 오래된 붉은 벽돌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거리는 넓고 인적은 드물었다고 하는데, 과거 2백여 년 전부터 점점 쇠락해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건물들은 전성기 때의 소박한 품위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먼 나라에까지 물건들을 팔러 갔던 부자 상인들은 그러한 집에서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으며, 낡긴 했지만 우아한 집들은 아직도 찬란했던 과거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고 했다. 운하를 따라 거닐다 보면 넓은 초원에 이르는데, 그곳에는 여기저기 풍차가 있고, 검 고 흰 소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더크스트로브가 그러한 환경으로 돌아가서 소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살다 보면 그의 불행도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내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여기 있어야 해."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 그 사람에게 어떤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가까이 있어야 해."
달과 6펜스 166 ~ 167 (중략)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녀가 약간은 변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과 마찬가지로 늘 입고 다니던 그 깔끔하고 꽤 잘 어울리는 회색 옷을 입고 있었으며, 자연스런 이마와 침착한 두 눈은 예전에 아틀리에에 앉아서 집안 일에 바쁘던 때와 하나도 다른 점이 없었다.
"자, 체스나 한 판 두지." 스트릭랜드가 말했다.
왜 그때 당장 거절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약간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으로 그가 늘 앉는 자리로 따라 들어갔다. 그는 체스판과 말을 청했다. 두 사람 다 너무나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달리 생각하려는 내가 더 이상한 느낌이었다. 스트로브 부인은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했다. 하긴 늘 조용했다. 혹시 그녀가 마음속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을까 하고 나는 그녀의 입을 쳐다보았다. 감추려고 해도 자연히 드러나는 표정이나, 고통과 괴로움의 표시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그녀의 눈을 살피기도 했다. 그녀가 언뜻 이맛살을 찌푸릴 때면 가슴속에 차 있는 감정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고 주시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감정 상태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가면 같았다. 두 손을 살짝 마주잡은 채 무릎 위에 얹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대로라면 그녀는 격렬한 감정의 소유자여야 했다. 자기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더크에게 그렇게 가혹한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격렬한 성격과 무서운 잔인함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남편이 보호해 주는 안전한 보금자리와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그 대신 자기 눈에도 뻔한 극도의 모험을 택한 여자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녀가 모험을 갈망하고 그날그날 되는 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그녀가 가사를 돌보고 살림하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볼 때, 적잖이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여간 복잡한 성격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점을 이 여자의 얌전한 체하는 겉모습과 대조되어 어떤 극적인 느낌마저 느껴졌다.
이렇게 마주친 데 대해 흥분을 느낀 나머지 나는 체스판에 정신을 집중해 보려고 무척 애를 쓰면서도, 공상을 그칠 줄 몰랐다. 스트릭랜드는 자기가 이긴 상대편을 멸시하는 인간인지라 난 항상 그에게 이기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겨서 정신 없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볼수록 더욱더 그에게 지기가 싫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졌을 때도 그냥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말하자면 그는 고약한 승리자이고 너그러운 패배자였다. 노름할 때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다고 하는데 아닌게아니라 이런 그의 태도에서 꽤 미묘한 추론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체스가 끝나자 나는 웨이터를 불러 계산을 치르고 그들과 헤어졌다. 만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이모저모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온 것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런저런 억측을 해봤자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호기심만 커진 셈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가능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육체 없는 영혼이 되어, 아틀리에 안에서 두 사람만의 생활을 보고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듣고 싶었다. 아무리 상상력을 작동시켜 보려고 해도 도무지 단서가 없었다
달과 6펜스 170-171 중략
“왜 자네가 직접 못 쓰지?”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썼는지 몰라. 물론 답장은 받을 생각도 안 했지만. 아마 편지를 뜯어보지도 않았을 거야.”
“자넨 도무지 여자의 호기심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녀가 그것을 읽지 않고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럴 수 있을 거야. 적어도 내 편지는.”
나는 그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대답은 매우 굴욕적으로 들렸다. 여자가 자기를 보는 눈이 얼마나 냉담하면 그의 필적을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자넨. 그녀가 자네에게 다시 돌아오리라 진심으로 믿고 있나?”
“어쨌든 나는 아내에게 알려 줘야겠어. 무슨 불행이 닥친다 해도 그녀는 나를 의지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그것을 자네가 좀 전해 달란 얘기야.”
나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그래 꼭 알리고 싶은 말이 뭐지?”
결국 내가 쓴 편지는 이런 것이었다.
친애하는 스토로브 부인
남편께서 전해 다라기에 몇 자 적습니다. 부인께서 그를 필요로 하면. 그는 언제든지 기꺼이 부인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해서도. 부인에 대한 유감스런 마음은 전혀 없으며, 부인에 대한 사랑도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지 다음 주소로 오시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트릭랜드와 블랑슈의 관계가 불행한 결말을 맺을 거라는 것은 나 역시 스토로브 못지 않게 확신하고 있었으나. 그렇게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름이 오자 날씨는 무덥고 바람 한 점 없었다. 밤에 되어도 낮 동안 지친 신경을 진정시켜 줄 만한 신선한 바람은 불지 않았다. 오히려 낮 동안 햇볕에 시달린 거리가 다시 그 열기를 토해 내는 바람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발길도 축축 처지고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스트릭랜드와는 벌써 몇 주일 동안이나 만나지 않았다. 다른 일들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와 그 사건에 대해서 감쪽같이 잊어버리고 있었고. 더크는 또 그 부질없는 넋두리에 조금씩 싫증이 나게 되어 만나는 것조차 피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골치 아픈 일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나는 파자마 바람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책상에 앉은 나의 상념은, 브로타뉴의 햇볕이 내리쬐는 모래사장과 싱그러운 바닷가를 헤매고 있었다. 곁에는 관리인 아주머니가 갖다 준 빈 거피 잔과 구미가 당기지 않아 그대로 놓아 둔 크루아상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옆방에서는 아주머니가 목욕탕의 물을 비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자 곧 내가 있느냐고 묻는 스트로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들어오라고 외쳤다. 그는 분주하게 방으로 들어오면서 내가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자살했어.” 쉰 목소리였다.
(달과 6펜스 174-175 중략)
있으면 연락해 달라고 말해 두었거든."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그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할 만했다.
"달려가 보니까 아내는 나와는 얘기를 통 안 하겠다는 거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 보고 나를 내보내 달라고 하더군. 내가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맹세를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아. 그러고는 벽에다 대고 머리를 부딪치려 드는 게 아니겠나. 의사도 내가 같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하더군. 아내는 줄곧 나를 내보내라고 야단이고. 할 수 없이 나와서 아틀리에에서 기다렸지. 조금 있다 병원차가 와서 그녀를 들것에 싣더군. 그리고 나더러 아내가 보지 못하게 부엌으로 들어가라고 그러는 거야."
스트로브는 내게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같이 가보자고 했다. 그는 내가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 더러운 병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지내지 않도록 아내를 위해 독방을 마련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그는 왜 내게 같이 가자고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즉, 그녀가 자기는 만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나는 만나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만나거든 자기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녀를 원망할 생각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도와주고 싶을 뿐이라는 것과, 그녀에 대해 자기는 아무런 자격도 없으며, 회복된 뒤에도 자기에게 돌아오라는 요구는 하지 않을 테니 그녀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등의 말을 전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막상 병원에 도착해 보니 기분 나쁘고 음침한 건물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울적해질 지경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보고 끝없는 계단을 올라가 길고 아무 장식도 없는 복도를 걸어간 뒤에 겨우 담당 의사를 만나 보니, 환자가 중태라 오늘은 누구도 면회할 수 없다고 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수염을 기른 키가 조그만 그 의사는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고, 곁에서 걱정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라고 생각하는 투였다. 더구나 이 일이 그에겐 히스테리컬한 여자가 정부(情夫)와 다투고 음독했다는 흔해빠진 일 중 하나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다크가 사건의 원인이 된 남자라고 생각했던지 필요 이상으로 퉁명스럽게 대했다. 그러나 내가 이 사람은 남편이고 모든 것을 용서해 주려 한다고 설명해 주자 갑자기 그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그 눈초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는 듯했다. 사실 스트로브는 아내에게 배반당한 못난 남편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는 보일 듯 말 듯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장 심각한 위험은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이러헤 대답했다. "다만 얼마나 먹었는지 모르겠군요. 겁이 나서 먹다가 그만두기도 하니까요. 여자란 늘 실연당하고서 자살하겠다고 덤벼들지만, 정말 죽지는 않도록 미리 조심하는 법이죠. 그건 상대편의 동정이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의 어조에는 싸늘한 냉소가 깃들여 있었다. 그로서는 블랑슈 스트로브 역시 그 해 파리 시내의 자살 미수자 통계에 숫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에 불과했다. 의사는 바빠서 우리에게 더 허비할 시간도 없는 모양이었다. 다만 다음날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면 만나 보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35.
나는 그날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트로브가 도저히 혼자 있지 못하겠다고 하여 나는 그를 위로해 주느라고 기진맥진해 버렸다. 그를 루브르 미술관에 데리고 가보기도 했으나 그는 그림을 보는 체하기는 해도 생각은 줄곧 아내에게 가 있는 것 같았다. 싫다는데 억지로 식사를 시키고 난 다음 억지로 눕게 했으나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 아파트에 2,3일 있어 보라고 말했더니 그 권유를 반갑게 받아들였다. 책을 읽으라고 권해 보기도 했지만 한두 페이지 들여다보다가는 비참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저녁에는 트럼프 놀이를 했는데, 날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을 하려고 나름대로 꽤 애를 썼다. 결국은 내가 약을 한 모금 먹인 뒤에야, 겨우 불안스럽게 잠이 들었다.
그 다음날 다시 병원에 가서 간호사를 만났다. 블랑슈가 조금 나아졌다고 해서 우리는 남편을 만나고 싶은지 물어 봐 달라고 부탁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더크의 입술은 부르르 떨렸다.
"어쩔 도리가 없어요." 간호사가 말했다. "아직도 중태거든요. 하루 이틀 지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죠."
"그럼 다른 누구를 만나 보고 싶다고 그렇지는 않습니까?" 하도 낮아서 마치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더크가 물었다.
"아뇨. 그냥 조용히 혼자 있게 해달라는데요."
더크의 두 손은 몸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이 이상하게 제멋대로 흔들렸다.
"혹시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데리고 오겠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난 다만 아내의 기분이 좋아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간호사는 조용하고 친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세상의 온갖 끔찍한 일과 고통을 다 보았어도, 아직도 죄가 없는 깨끗한 세계에 대한 꿈을 꾸며 평화를 잃지 않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부인이 좀더 마음이 가라앉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더크는 연민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 당장에 좀 전해 달라고 했다.
"이 밀을 들으면 병이 곧 나을 겁니다. 제발 지금 곧 가서 뭉어 봐 주십시오."
희미한 동정의 미소를 띠고 간호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 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들려왔다.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간호사가 다시 나와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말한 겁니까?"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리네요."
"아마 약 때문에 성대가 탔나 봐요."
더크는 나지막하게 신음 소리를 냈다. 나는 그에게 간호사와 할 말이 있으니 먼저 나가 현관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고 묵묵히 나갔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의지의 힘마저 완전히 잃어버린 듯, 말 잘 듣는 어린아이 같았다.
"왜 약을 먹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물어 보았다.
"없어요. 전혀 입을 떼지 않아요. 몇 시간이고 가만히 누워 움직이지 않는걸요. 그렇지만 계속 울고 있어요. 베개가 온통 젖어도 손수건 쓸 만한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눈물을 쏟아내고 있어요."
그 말에 나는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스트릭랜드가 옆에 있다면 그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간호사와 작별 인사를 할 때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더크는 층계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듯, 내가 가서 팔을 칠 때까지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걸어갔다. 나는 무슨 일이 생겨서 이 불쌍한 친구가 이런 엄청난 상황에 몰리게 됐는지 생각해 보았다. 스트릭랜드라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경찰에서 그의 진술을 듣기 위해 찾아갔을 테니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 전에 화실로 쓰고 있던 낡은 지붕 밑 방으로 다시 돌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여자가 그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아마 오라고 해봤자 스트릭랜드가 거절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잔인성을 보았기에 목숨까지 끊을 정도로 두려웠을까.
36
그 다음 일 주일 동안은 정말 끔찍했다. 스트로브는 하루에 두 번씩 병원으로 찾아가 회복 여부를 물으며 만나자고 했는데 여자는 끝내 거절했다. 처음에는 차츰 병세가 호전되어 간다는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 같았으나, 그러던 중에 의사가 염려하던 합병증이 생겨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자 절망에 싸여 버렸다. 비탄에 빠진 그를 간호사도 동정은 했으나, 실상 위로해 줄 만한 말도 없었다. 불행한 여인은 가만히 누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기다리기나 하듯이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죽음은 하루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늦게 스트로브가 찾아왔을 때 결국 죽고 말았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그는 완전히 기진맥진해 있었다. 그 수다도 다 없어지고 지친 듯이 소파에 주저앉았다. 어설픈 위로의 말을 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므로 그냥 조용히 눕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 무정하다고 생각할까 봐 그냥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그가 말을 하고 싶어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내게 친절하게 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정말 친절했어."
"쓸데없는 소리 말게." 나는 약간 부끄러웠다.
"병원에 가니까 나더러 좀 기다려 보라고 하더군. 의자를 주길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조금 있다 혼수 상태에 빠졌으니 들어오래. 턱은 온통 산으로 타버렸고, 그 곱던 살결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니까 너무 흉측했어. 숨이 끊어질 때는 어찌나 고요했던지 간호사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그런 줄도 몰랐어."
그는 울 기운도 없는 모양이었다. 팔다리의 기력이 다 빠져 기운 없이 가만히 누워 있더니, 잠시 후엔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일 주일 만에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잠든 것이었다. 그렇게
달과 6펜스 182-310는 책으로 읽으세요^^ (조한중 옮김/ 하서출판사)
작자 : 서머셋 모옴/ 조한중 옮김
성격 : 유미적, 환상적, 낭만적
주제 : 탐미적 예술 추구와 그 완성
특징 : 예술에 매혹된 남자의 철저한 이기주의를 절제된 문체로 냉정하게 묘사
줄거리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에서 소재를 얻었다. 런던의 증권회사 사원인 스트리클랜드라는 중년남자가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에 가서 화가가 되고, 다시 타히티 섬으로 건너가 토인 여자 아타와 동거하면서 대작을 남기고 문둥병으로 죽기까지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표현 : 제목의 '달'은 예술에 대한 주인공 스트리클랜드의 광적인 열의를 나타내고 '6펜스'는 그가 과감히 던져버린 세속적인 것을 상징
소재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폴 고갱의 생애에서 소재를 얻음.
내용 연구
이해와 감상
인생의 깊은 통찰이 주는 즐거움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은 그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서밍업》(The Summing Up, 1938)에서 자신이 문단에서 점하는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유력한 비평가들 가운데서 나를 진지하게 다루어 준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다. 영리한 젊은이들이 현대소설에 관한 논문을 쓸 경우에도 나를 고려에 넣을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사실 모옴만큼이나 부당한 멸시와 혹평을 견뎌 나가야 했던 작가도 드물다. 많은 비평가들(거의가 그의 모국인 영국의 비평가들이지만)에게 있어서 그는 사상이나 철학의 깊이가 없는 천박하고 피상적인 통속작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오스카 와일드, 월터 페이터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세기말의 예술지상주의의 시대에 비롯되어서 60여 년에 걸친 그의 창작생활이 문학사조의 변천이나 비평계의 움직임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이 일관된 작풍과 태도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이나, 소설가로서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 또한 수필가로서 그가 거둔 유례없는 성공을 고려해 볼 때 결코 그의 문학을 통속 내지는 대중문학으로 간단히 처리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모옴은 소설가의 기원을 원시시대에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동굴 밖에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피로를 풀어주는 <이야기꾼>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문학작품에서 철학이니 사상이니 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문학자는 어디까지나 문학자이지 철학자일 수는 없다. 철학을 추구하려거든 철학 서적을 읽는 게 옳다'라고 모옴은 말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에게 철학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모옴만큼 인간의 문제, 삶의 문제와 진지하게 맞선 작가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어떤 언어로 번역되어도 독자에게 가져다 주는 감명이나 흥미가 줄어드는 일이 없다. 그것은 그의 작품이 국경이나 언어의 장벽을 초월하여 인간적 보편에 호소하는 심오한 무엇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874 년 1 월 25 일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주불 영국 대사관의 고문 변호사였으며, 어머니는 파리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절세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옴이 여덟 살 되던 해에 그의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2 년 후에는 아버지까지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고아가 된 그는 영국 켄트 주 위트스테이블에서 목사로 있는 숙부 맥도날드가에서 소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자식을 길러본 경험이 없는 숙부집에서 보낸 그 시절의 고독하고 불행했던 생활은 그의 자전적 소설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1915)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유년기부터 심한 말더듬이였다. 13세가 되자 캔터베리의 킹즈 스쿠울에 입학하게 되었지만,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영국에 오기까지 영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영어 발음이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급우들과 교사들에게 몹시 구박을 받아, 거기서 얻은 콤플렉스가 훗날에 가서도 그의 문학활동이나 실생활면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콤플렉스가 그를 자기만의 고독한 세계에 들어앉게 하고, 또한 그 속에서 냉철하고도 냉소적인 눈으로 인간들의 우행과 희비로 뒤얽힌 세상을 내다보게 함으로써 모옴 특유의 문학적 기반을 닦을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폐결핵으로 한동안 학업을 중단하고 프랑스에 요양을 다녀온 그는 1891 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 청강생으로 약 1 년간 제나름대로 자유로운 청춘시절을 즐기게 되며, 거기서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여행하기도 한다. 독일유학에서 예술에 눈을 뜨게 된 모옴은 장차 작가가 되겠다는 결의를 안고 영국으로 돌아오지만, 숙부에게는 그러한 결의를 밝히지 못하고, 1892 년에 런던의 성 토마스 병원 부속 의대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는 빈민굴인 람베드에 인접해 있었고, 날마다 수많은 빈민들의 외래환자가 밀려들었다.
의학에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학업은 시험만 치를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해치우고, 그 대신 틈나는 대로 문학 서적을 탐독했다. 그러나 임상실습생이 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의학에 열을 올렸고, 빈민굴에서 기거하면서 그곳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려가며 나날의 생활을 즐겼다. 여기서 그가 맞부딪친 실제의 일들을 사실 그대로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이 바로 그의 처녀작인 <람베드의 라이자>(Liza of Lambeth, 1897)였다. 그것은 자연주의를 추구하던 당시의 지식층에게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저명한 비평가 에드먼드 고스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 모옴을 직업적인 작가로 나서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성 토마스 병원 부속 의대에서 보낸 4 년간은 장차 작가로 대성할 모옴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숱한 체험을 제공해 주었다. 졸업과 함께 의학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말았지만, 뒷날에 가서 그는 의학생활을 좀더 계속하여 보다 많은 것을 얻지 못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람베드의 라이자>로 문단에 나선 그는 뒤이어 <인간의 굴레>의 전신이 되는 <스테판 케어리의 예술가 기질>이라는 작품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출판사와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휴지로 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옴 자신이 말하듯 그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이 작품이 출판되었더라면 대작 <인간의 굴레>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후의 10 년간은 모옴의 입장에서는 거의 불모의 시기였다. 많은 작품이 뒤를 이어 발표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그가 바라는 성과를 가져 오지 못했다. 그 동안에 그는 파리에 건너가 보히미안의 생활에 젖어 보기도 했고, 초조한 끝에 극작가로 나서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여러 편의 희곡도 써 보았지만, 결과는 여전했다. 연애도 했다. 그러자니 돈이 필요했다. 그는 돈이 아쉬워 형편없는 작품을 계속 써냈다고 태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돈이란 제 육감과 같은 것으로, 이것 없이는 도저히 완전한 다른 감각의 기능을 바랄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나 겨우 돈을 마련해 놓고 보니 문제의 여인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린 다음이라 별수 없이 연애에 쓰려던 돈으로 여행을 했다고 모옴다운 고백도 하고 있다.
그러나 1907 년 가을부터는 사정이 급변한다. 그의 희곡 <프레드릭 부인>(Lady Frederick)이 폭발적인 인기리에 공연 회수 422 회라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극작가로서의 모옴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8 년에는 그의 희곡이 네 편이나 동시에 공연되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것은 모옴이 오랜 세월을 두고 애타게 기다려 온 축복이었다. 그는 물심양면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앞날의 생활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한 수입도 올렸지만, 이제까지 이를 악물고 견뎌 왔던 비참했던 지난 날들을 미소지으며 되돌아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4 년간 그는 유행 극작가로서 런던의 사교계를 드나들며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12 년경부터는 한동안 극작까지도 중단하고 오랫동안 그의 마음속에 체증처럼 엉겨 있던 대작 <인간의 굴레>를 쓰기 시작한다. 그는 이 소설의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행 극작가로서의 지위가 확립되기가 무섭게 나는 지난날의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는 수많은 기억들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죽음, 그에 뒤이은 가정의 와해, 프랑스에서 보낸 유년기. 전혀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데다 말까지 더듬어서 그토록 곤란했던 처음 몇 해 동안의 비참했던 영국에서의 학교생활, 처음으로 지적 생활에 발을 들여놓았던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낸 안일하고 단조로우면서도 흥분에 찬 나날의 즐거움, 병원생활의 몇 해 동안에 느꼈던 지겨움, 런던의 쓰릴, 이 모든 것이 잠을 자도, 산책을 해도…… 파티에 나가 있어도 쉴새 없이 집요하게 되살아나서 나를 짓눌렀기 때문에 나는 이를 빠짐없이 소설의 형태로 써 버리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길이 없다고 단정했다."(<서밍업> 51장)
말하자면 <인간의 굴레>는 작가 모옴이 언젠가 치르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었던 카타르시스였다. 영문학사상 불후의 고전으로 길이 살아남을 이 작품은 그후 2 년간의 산고 끝에 1 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겨우 탈고를 보게 된다. 출판 당시에는 이미 전쟁의 와중이기도 해서 영국 내에서는 이렇다 할 반향을 얻지 못했으나, 미국에서만은 자연주의 작가 테오도르 드라이저의 격찬을 받은 바 있고, 그에 뒤이어 많은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다.
1 차대전이 발발하자 자기만이 안일무사한 나날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친구 윈스턴 처칠경(당시 해군장관)을 찾아가 자기도 전쟁에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결국 프랑스 전선의 적십자 야전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훗날 그의 비서가 된 미국인 제럴드 핵스턴과 알게 된다. 그후 그의 어학의 재능과 작가라는 이점이 인정되어 1915 년에 모옴은 정보부의 첩보요원으로 선발되었으며, 스위스에서 독일 간첩의 감시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여기서 얻은 체험이 <애셴덴>(1928)이란 단편집을 낳게 했고, 독일측의 눈을 속이기 위해 제네바의 호텔에서 집필한 희곡이 그의 수작으로 이름높은 <훌륭한 분들>(1917)이다. 그러나 연일 격무에 시달렸던 탓인지 소년기에 앓았던 폐환이 재발되어 같은 해 그는 정보부를 사임하고 이듬해인 1916 년에 휴양차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서 다시 제럴드 핵스턴을 동반하고 남양제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이때부터 제럴드는 모옴의 여행에는 언제나 동행을 하게 되며,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이 결국은 모옴과 웰컴 부인 사이의 결혼생활까지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모옴의 전기 작가이자 친구의 한 사람인 리처드 코델은 모옴의 첫 남양제도 여행이 1 차대전과 관련된 모종의 특수임무를 띤 것이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이 여행을 통해서 모옴은 <비>(Rain)를 비롯한 여러 편의 주옥 같은 단편소설의 소재를 얻을 수 있었고, 특히 프랑스인 화가 포올 고갱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한 타히티섬 취재 여행은 모옴의 문학적 지위를 굳혀 준 걸작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pence, 1919)의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 이 소설은 출판과 동시에 미국에서 단번에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쟁 중에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인간의 굴레>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작품이다.
같은 해 미국에 돌아온 그는 뉴저지 주에서 시리 버나드(웰컴 부인)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엘리자베드라는 딸을 낳기는 했지만, 가정을 등한히 하고 늘 여행만 다니는 모옴의 방랑벽이 잦은 가정불화를 가져왔고, 1927 년에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다.
1917 년에 모옴은 그의 본국 및 미국 정부의 요청으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요꼬하마를 경유하여 러시아에 잠입한다. 케렌스키를 도와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시키기 위한 여행이었으나 그것은 실패로 끝나며, 체호프와 도스또옙스끼의 나라에서 떠날 때에 기대와는 달리 환멸만 안고 돌아온 그는 건강마저 악화되어 스코틀랜드의 정양소에서 한동안 요양생활을 하게 되며, 이때 집필한 것이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달과 6 펜스》이다. 그후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제럴드를 동반하고 중국,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로 여행을 계속하고 남양제도도 여러 차례 방문하게 된다. 그후 1930년에 발표된 《과자와 맥주》는 모옴의 원숙함이 최고도로 발휘된 작품이며, 모옴 자신도 가장 자신있게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다. 1933 년에는 《셰피》를 마지막으로 극작에서 손을 뗀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고, 1938 년에는 전술한 그의 자전적 회상기 《서밍업》을 출판했다.
1927 년 부인과 이혼한 그는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에 영주할 목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여행벽은 어쩔 수 없어서 1936 년에는 불령 서인도제도를 여행했고, 같은 해에 인도에도 들렀다. 동양인의 생활방식에 관심이 많았던 모옴은 이 여행에서 많은 시사를 얻어, 이를 바탕으로 하여 쓴 작품이 그의 만년의 수작 <면도날>(The Razor's Edge, 1994)이다.
1939 년 2 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프랑스에 영주하는 모옴에게 다시 정보활동의 명을 내린다. 그는 프랑스 군부와 연락을 취하고 군수 공장들도 시찰하여 <싸우는 프랑스>(France at War, 1940)라는 기사를 썼다. 프랑스에 대한 모옴의 사랑은 대단했다. 그가 프랑스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그곳에서 보냇으며, 그가 처음 배운 언어가 프랑스어였다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문학예술에 관해서도 그는 많은 것을 프랑스에서 배웠다. 모옴 자신이 자기를 교육시켜 준 것은 프랑스였고, 그의 소설의 스승도 모파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문학은 그의 본국에서보다는 프랑스와 미국에서, 그리고 동양 각국에서 보다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1940 년에 그는 독일측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어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고 석탄 수송선을 타고 영국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 쓴 글이 그의 <엄격한 인간>(1941)이다.
같은 해에 그는 다시 영국 정부의 위촉에 따라 선전과 친선의 임무를 띠고 도미, 남캐롤라이나 주의 별장에서 이른바 어용소설인 <새벽 시간>(1942)을 집필했다. 그러나 미국 체재중 그가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무엇보다도 <면도날>을 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인도 여행이 바탕이 되어 있지만, 모옴의 인간관과 종교관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이며, 모옴 연구가들 사이에서는 <인간의 굴레>, <달과 6 펜스>, <과자와 맥주>와 같은 일급작품보다는 좀 뒤지는 2 급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 같으나 미국에서는 가장 널리 애독되고 있으며, 모옴이 70 세 때 세상에 내놓은 작품이란 점에서 작가로서의 그의 정력이 여간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2 차대전이 끝나자 그는 리비에라로 돌아와 평론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대작가와 그 소설 등>(1948)을 비롯하여 <작가의 노트>(1949), <작가의 입장> (1951) 등이 그것이며, 1958년에는 84 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평전을 포함하는 탁월한 평론집 <작가의 입장에서>를 발표하였다.
모옴이 동시대의 어느 작가보다도 가장 장구한 60 여년의 작가생활을 통해서 발표한 작품은 장편소설이 20 편, 희곡이 30 편이며, 단편소설의 수는 백을 넘고, 그밖에도 여행기, 평론집 등이 10 여 권에 달한다.
1965 년 12월 16 일, 노작가 서머셋 모옴은 그의 아흔 두 번째 생일을 40 일 앞두고 리비에라의 자택에서 길고 파란 많던 대작가의 일생의 막을 내렸다.
모옴은 작품 활동의 기반으로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작가였다. 어떤 이야기도 그는 상상력만으로 끌고 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제 발로 걸어 보고, 제 눈으로 본 것을 기초로 삼았으며, 표현에 있어서는 상상의 힘을 빌기는 했으나 그 근처에는 거의 완전할 정도로 객관적인 리얼리즘이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건 희곡이건 그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은 임상의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로 분명하게 파악된 인물이며, 그 인물들이 배경에 밀착되어 독자로 하여금 그의 이야기 속에 말려들게 하고, 작중 인물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경험해 자가게 하는 데에 모옴 문학의 강점이 있다. 그의 문학을 단순히 오락 본위의 대중문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설이 가져다 주는 참다운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독자가 소설에서 시대적인 교훈이나 기교상의 실험보다는 오히려 인간성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 모옴의 문학은 시대의 변천에 관계없이 고전으로서의 위치를 지켜 나갈 것임에 틀림없다.
<달과 6 펜스>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은 발표와 함께 모옴의 전작 <인간의 굴레>에 대한 새로운 관심까지도 불러일으켜 작가로서의 모옴의 이름을 일약 세계적인 것이 되게 한 명작이며, 예술가로서의 모옴의 입장이나 그의 작풍이 보다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른 작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모옴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히 발견되며,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나>의 작품 속에 산재하는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모옴 자신으로 보아 틀림없는 인물이다. 내레이터 <나>는 하나하나의 사건을 냉정한 입장에 서서 관찰하고, 그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며, 또한 작중 인물들 상호간의 관계를 맺어 주기도 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역할도 한다. 이는 이야기에 박진감을 더해 주는 모옴 특유의 기법이다.
항간에서는 이 작품이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 포올 고갱의 전기를 왜곡해서 쓴 것이라고 해서 한동안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그리고 이 작품 때문에 고갱의 그림 값이 엄청나게 뛰어오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모음이 고갱이란 인물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고갱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직접 타히티 섬을 답사한 일이라든가,《인간의 굴레》 제 50 장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고갱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공경의 표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일이다.
"필립은 세상이 자기에게 가져다 준 정서를 캔버스 위에 그려내기 위해 평안과 가정, 돈, 사랑, 명예, 의무 따위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었던 그 사람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 보았다. 멋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러한 용기가 나질 않았다."
모음이 고갱의 전기에 마음이 끌리게 된 것은 그의 처녀작 발표 후의 불운했던 시기에 한동안 파리로 건너가 몽마르트 가에서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무명의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내던 때부터 비롯된다. S.D. 네일도 《영국소설소사》(1964)에서 《달과 6펜스》를 〈고갱과 그가 문명을 등지고 열대의 섬나라로 도피한 이야기〉라는 오해를 초래하기에 알맞는 간단한 해설을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어느 모로 보나 고갱을 그대로 모델로 한 것이 아니며, 그의 전기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고갱의 인품과 생애에서 얻은 영감을 통해 실생활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모옴 자신의 꿈을 펼쳐 나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사실상 주인공 스트릭랜드의 모습에는 모옴 자신의 모습이 중복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가 많다. 주인공이 가족까지 버려 가며 안일하고 평범한 런던 생활을 내동댕이치고 파리로 도피하는 대목은 다름아닌 모옴 자신이 파리의 보히미안 생활에 묻히게 될 때의 심경을 그린 것이며, 1 년 정도의 미술수업 끝에 화가로 전신하는 점 또한 모옴 자신이 그의 처녀작 《람베드의 라이자》가 에드먼드 고스의 인정을 받게 되자 안정된 생활을 약속하는 의사업을 내던지고 작가로 전신한 사실을 그대로 번안해 놓은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인공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등장 인물들의 입을 통해 모옴 자신의 인생관, 인간관, 여성관, 예술관 등이 단편적으로나마 여러 곳에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도 있다. 타히티의 폴고갱 무덤
(출처 : 타히티섬(프렌치폴리네시아)=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동아일보 2003-07-23 19:16:33)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 차대전을 사이에 둔 격동기로 추정되나, 거기에는 그 시대에 대한 비판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 그것은 모옴의 관심이 영원한 수수께끼라 해야 할 복잡하고 모순에 찬 인간의 정신적 세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작품 전체의 저류에 흐르는 것은 인생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가며 주어진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부정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인생관이며,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구속하는 가정이란 것과 여성에 대하여는 특히 혹독하고 신랄한 풍자를 가하고 있다. 주인공에게 채여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화가 스트로브의 아내에 대한 담당의사의 언동이나, 마지막 장에서 한때는 더러운 병에라도 걸려서 썩어 문드러져 버리라고 남편을 저주하던 주인공의 본처가 남편의 그림이 유명해지자 20 년이 지난 이제와서 그의 그림을 복제판으로 집안을 장식하고, 천재의 처 운운하면서 남편의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대목 등은 실로 모옴다운 풍자적이며 냉소에 찬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달과 6 펜스》의 창작에 임한 모옴의 태도는 한마디로 해서 그가 젊은 시절에 감싸여 있었던 세기말의 예술지상주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중용을 미덕 내지는 표준으로 삼고 모든 것을 적당히 얼버무려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소시민적 생활을 근저에서 뒤혼들어 주는 정열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중년남성이 홀연히 가정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돌진하는 태도는 모옴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인 것으로 비치었던 모양이다. 그러한 점에 초점을 둔 작품으로는 그이 희곡 가운데서 《집기둥》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달과 6 펜스》에서 내세워진 예술지상주의는 피아노 때문에 목숨까지 바쳐 버리는 청년 조지 블랜드가 나오는 그의 단편소설《변종》(1947)에서도, 또한 약간 형태를 바꾸어서 연(鳶) 때문에 연애결혼한 아내까지 버리는 허버트 선베리가 등장하는 단편소설 《연》 (1947)등에 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張旺祿)
심화 자료
미(美)에 순사한 예술가의 일대기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정열은 바로 미를 창조하고자 하는 정열이었단 말씀이죠. 그것이 그에게 한시도 평안을 주지 않고 그를 이리저리 몰고 다닌 거죠. 그는 영원히 신성한 향수에 홀려서 쫓겨다닐 순례자였죠. 그의 마음을 차지한 사탄은 무자비하기 짝이 없었어요. 세상에는 진리를 찾는 욕구가 너무나 강해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결국은 그들의 세계 그 자체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인간이 있죠. 스트릭랜드의 경우는 미가 진리를 대신했을 뿐이오."
이 말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원시적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찾아 프랑스를 떠나 타히티 섬으로 온 뒤에, 그의 임종과 외부와 단절된 화살의 그림들을 목격했던 쿠트라 의사의 회고담이다.
남이 전혀 호감을 가져줄 수 없는 인간성, 파행과 비정의 행동을 서슴지 않으며 외롭게 예술가의 길을 걸었던 스트릭랜드에 대해 아마도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판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 장편은 금세기에 대중적 갈채를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서머싯 몸의 대표적 명작이란 점도 있지만 화가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삼았다 해서 더욱 세속적 호기심을 자아내며 널리 애독되는 소설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청소년계층의 독자가 많아 70년대 후반의 독서통계에 의하면, 수년간 가장 많이 읽힌 소설로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 이어 <달과 6펜스>가 2위를 고수했다 한다.
독자의 호기심을 감안하여 먼저 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는 폴고갱의 생애를 더듬어보는 일도 무위하진 않을 것 같다. 고갱은 프랑스 후기인상파의 화가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증권거래소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경제적 안정을 누리기도 했으나, 20대 후반에 이르러 미술에 경도되기 시작하여 피사로, 세잔 등 당대의 유명한 화가를 알게 됨으로써 직장을 그만두고 예술의 길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때문에 생활은 어려워지고 설상가상으로 처자식과도 이별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후 자기의 예술세계를 확립해 나가는 한편 고흐와 더불어 남프랑스 아를르에서 같이 지내다가, 고흐가 귀를자른 사건을 계기로 하여 델리킷한 둘의 사이는 파국을 맞았다.
생활난은 가중되는데다가 문명세계에 대한 협오감을 떨칠 길이 없어, 중년에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옮겨 가 거기서 고갱 특유의 화풍을 승화시킨 많은 걸작을 남겼다.
여기에 비해<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런던에 거주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 역시 중권거래소에 나가면서 다정스럽고 우아한 아내와 귀여운 자식을 가진 가장으로 등장한다. 아내는 퍽 사교적이어서 특히 문인과 사귀는 걸 큰 기쁨으로 여기는 편이나, 남편은 이런 사교와는 담을 쌓고 철저히 무미건조하게 생업에만 몰두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날, 이 건실한 가장이 편지 한 통을 남겨 놓고, 파리로 출분한 사태가 야기된다. 그의 아내의 청으로 파리로 달려가서 스트릭랜드를 만난 화자 '나'의 관찰에 의하면, 그는 소년시절부터 즐겼던 미술을 되찾기 위해 그간 남몰래 미술연구소에서 수업을 받았다는 것이며, 이젠 가정과는 절연한 채 오로지 예술의 길을 걷겠다는 결심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시에 판이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극도의 가난, 또 자학적으로 그 가난과 불편에 함몰하는 것이 그렇고, 타인과의 고제, 남의 이목 그리고 기존 예술에의 거부가 그러하다.
뿐만 아니라 성격이 괴팍스러워 자기의 가정은 물론이려니와 남의 가정의 행복도 전혀 유념하지 않는 냉혈한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그림과 천재적 자질을 인정해주는 유일한 친구이며 또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친구 더크 스트루브에 대한 배신은 이 무렵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더크는 네덜란드 빈농 출신으로 대중에 영합하는 속된 그림을 그려 파리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화가이다. 그는 외모도 볼품이 없으려니와 어릿광대 같은 위인이지만, 우연한 기회에 미모의 여인 블랜치를 아내로 얻게되어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더크는 스트릭랜드가 온갖 조롱과 핍박과 물질적 피해를 다 끼쳐도 그의 재능을 아껴 이 모두를 감내한다. 예술에의 숭배는 현세적 행복의 결정체인 자신의 아내에 대한 아낌을 능가한다.
즉 스트릭랜드가 돌봐주는 사람이 없이 더럽고 음습한 다락방에서 중병을 앓고 있을 때, 아내의 극진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트릭랜드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간병한다. 간병을 맡은 사람은 자연 그의 아내일 수밖에 없는데 이 사이에 둘은 불의의 관계가 맺어진다. 블랜치가 그토록이나 혐오했던 스트릭랜드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전생애와 전인격을 예술에 바쳐서 세상살이에는 상처입은 야생마가 되어버린 남자, 일체의 규범이나 도덕률에서 해방한 원시적 본능의 사내, 비록 남루하고 쇠약해졌으나 헌걸찬 체구, 타는 듯한 눈빛에 그녀의 영혼이 눈 녹듯 녹아버렸을 전말을 상상하기엔 어렵지 않다.
심약한 더크는 그들 둘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집을 뛰쳐나가고, 또 스트릭랜드도 블랜치의 나체를 모델로 누드화를 완성한 후 블랜치 곁을 떠난다. 그는 예술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거나 얽매일 수 없는 인간이었다. 이 충격으로 그녀는 자살하고 만다. 내레이터인 '나'는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스트릭랜드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경멸을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에게 쏠리는 주의력을 거두지는 못한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파리를 떠나 마르세유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상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다만 그가 곧 타히티섬으로 옮겨가 거기서 수많은 걸작을 남기고 죽은 후 그의 그림에 대한 평가가 유럽전역에 불 일 듯이 일어난 뒤, 우연한 기회에 타히티 섬에 방문할 길이 있어 거기서 생전의 모습을 그곳 주민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 즉, 대예술가의 예술적 완성과 비극적인 생의 종말이 콘트라스를 이루는 부분이다.
'나'는 타히티 섬에 와서 처음으로 캡틴 니컬즈라는 부두 부랑자를 만나 스트릭랜드가 마르세유에서 타히티 섬으로 오게 된 말을 듣는다.
그리고 티아레라는 플레르 호텔 여주인으로부턴 그가 이곳에서도 극빈과 파행적 생활을 해나간 모습과 그 자신의 중매로 아타라는 어린 원주민 처녀와 짝을 지어주며 마을로부터 격리된 한 농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경위를 접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의 치료를 맡았던 쿠트라 의사에게서 병인과 예술 창작의 밀실을 전해 듣는다. 스트릭랜드는 타히티 섬에 와서 비로소 그의 예술적 본령인 원시적 건강성, 일체의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사물을 발견했던가보다. 격식도 윤리도 요구되지 않고, 허위에 치장된 대인관계를 등진 채 오직 자기가 추구해온 미의 조형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주민 처녀인 아타는 그에게 가장 바람직한 배우자여서, 그녀를 소재로 해서 원시림과 열대식물 그리고 상상에서 우러난 대상을 가미시켜 강렬하고 순수한 자기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는 말년에 이곳의 한 풍토병이라 할 나병에 걸린 채 칩거생활을 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화실 사방 벽에 최대의 걸작인 벽화를 완성시켜 놓았는데, 아마도 실명(失明)의 비참한 운명 속에서도 화필을 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타가 유언에 따라 그의 사후에 이 오두막집을 불태웠기 때문에 그 작품은 남겨지지 않았지만, 그 외 다른 작품들은 세계 도처에서 수집가들에 의해 고가로 경매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생의 종말도 고갱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고갱이 이 섬에서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종내엔 병마에 시달리며 고생한 거나, 원주민을 옹호하여 지배자인 백인과 충돌했던 사정을 주목해볼 일이다. 또 1901년 히바오아 섬으로 옮겨간 후, 매독에 걸린데다 잘 먹지 못하여 참담하게 죽어간 종말도 예외일 수 없다.
<달과 6펜스>는 인물 설정과 그 인물이 지향해 나간 생의 역정으로 볼 땐 탐미주의 계열로 볼 수도 있겠다. 김동인의 <광화사>를 필두로 해서 이러한 유사한 작품이 나오는 데 영향을 끼쳤을 법하다.
스트릭랜드라는 특이한 인간형을 창조했다든지 예술에 이바지한 주인공의 형극의 삶과 고독, 투쟁의 기록은 높이 살 많다. 예술가의 삶의 한 전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돋보인다.
그러나 일종의 스토리텔러라 이를 수 있는 서머싯 몸 작품의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작자인 하디 자신도 이러한 여인에 대해 동정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밭에나온 사나이는 밭에서일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만 밭에서 일하는 여자는 밭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묘사에서 여인에 대한 그의 견해를 읽어 볼 수 있고, 특히 테스라는 작중인물에 대해서는 이 책의 첫머리에' ……애처롭게도 상처받은 이름이여, 나의 가슴은 침상(沈床)으로서 너를 깃들게 하리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을 헌사로 놓은 의도에서 그의 내면의 뜻을 알게 된다.
우리는 세계명작을 섭렵하면서 여러 인생의 단면들을 경험한다. 우리가 사는 생애가 오히려 거짓과 위선투성이인 데 반해 작품 속에서 진실한 생활을 발견하게도 된다. 때로는 커다란 슬픔에 짓눌리기도 하고, 더러는 신선한 떨림을 느끼면서 이 세계와 삶의 넓이에 대해 개안(開眼)해 간다. 그리고 그러한 충격은 어김없이 우리의 정신 영역에 마르지 않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필자 :하디 (Hardy, Thomas; 1840~1928) , 영국의 소설가·시인으로 도세트셔에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 런던의 한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작가로 입신해서 1885년 막스 게이트에 집을 장만하고부터는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고 향리에서 취재한 소설을 발표하며 종생했다. <테스>(원제는 <더버빌 가의 테스>), <주드>를 발표하여 속물근성을 지닌 도덕군자들로부터 세찬 비난을 받으며 물의를 일으키자 소설에는 펜을 놓고 시작으로만 일관했다. 그의 시는 늙음을 모르는 신풍을 보이면서 시인으로서도 확고한 지위를 획득했다. 1910년에 O.M. 훈고장 수여.)
몸(W(illiam) Somerset Maugham)
1874. 1. 25 파리~1965. 12. 16 프랑스 니스. 영국의 소설가·극작가. 수식 없는 간결한 문체가 특징이며, 세계 곳곳을 배경으로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을 썼다.
10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의 손에서 자랐으며, 캔터베리의 킹스 스쿨에서 교육받았다. 하이델베르크에서 1년을 지낸 뒤에 런던에 있는 세인트토머스 의학교에 입학, 1897년 의사자격증을 땄다. 산부인과 의사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 Liza of Lambeth〉(1897)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어, 용기를 얻고 의사 직업을 그만두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1908년에는 그의 희곡들이 런던에서 4편이나 동시에 상연될 정도로 성공하여 경제적 안정을 얻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곳을 여행했으며, 1928년에는 프랑스 남부의 카프페라에 별장을 사서 그곳이 그의 본가가 되었다.
소설가로서 그의 명성은 주로 4권의 소설 덕분이다. 〈인간의 굴레 Of Human Bondage〉(1915)는 반자전적 소설로서 젊은 의과대학생이 힘겹게 성숙해가는 과정을 그리며, 〈달과 6펜스 The Moon and Sixpence〉(1919)는 관습을 타파한 미술가 폴 고갱의 일생을 모델로 쓴 작품이다. 〈과자와 맥주 Cakes and Ale〉(1930)는 유명한 소설가를 다루고 있는데, 토머스 하디와 휴 월폴을 풍자적으로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면도날 The Razor's Edge〉(1944)은 만족스러운 인생을 찾으려는 젊은 미군 제대병의 이야기이다. 그의 극작품은 주로 에드워드 7세풍의 사회희극들로서 곧 구식으로 취급되었으나, 단편소설의 인기는 계속 커져갔다. 많은 작품들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국적인 환경 속에서 유럽인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으며, 플롯을 다루는 솜씨는 모파상식으로, 절제와 서스펜스에서 뛰어나다. 〈서밍 업 The Summing Up〉(1938)과 〈작가수첩 A Writer's Notebook〉(1949)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철학을 체념적 무신론, 그리고 인간의 선한 본성과 지력에 대한 회의론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신랄한 냉소주의를 띠는 것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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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은 인간의 품성을 높이지 않고, 인간을 쓸 데 없이 집념 깊게만 한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지만, 자기 스스로는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잔학하다.
돈은 제6감과 같은 것으로 그것이 없으면 다른 감각을 완전히 이용하지 못한다.
미의식은 성본능을 닮아, 그것은 야만성(野蠻性)도 공존(共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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