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 혹은 되새김의 미학
by 송화은율느림 혹은 되새김의 미학 / 최문규 연세대 독문학과 교수
전통적인 공간 의식이 시간 의식으로 대체되었던 시기는 서양의 경우 바로 18세 기였으며, 이후 하나의 목적에 빠르게 도달하려는 소위 ‘시간의 가속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의 아름다운 상을 현재로 불러들이는 시간의 가속화와 맞물려 있던 사상은 다름 아닌 역사는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낙관적인 진보 이념이었다. 이와 같은 시간의 가속화와 낙관적인 진보 이념의 상호 결합은 보수적인 혹은 진보적인 역사관으로 사회 발전을 모색하였던 모든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했다. 그 실례로 역사의 발전은 종종 ‘기관차’로 비유되었고, 이러한 은유는 바로 사회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빠르고도 힘차게 달려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전 세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재의 정치사회적 담론은 모두 테크놀로지의 담론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테크놀로지의 담론은 ‘빠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 이제 존재를 위한 투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기술적인 발전이며 앞으로는 ‘기술자의 황금시대’ 가 도래할 것이라는 환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모든 영역을 기술적 발전의 빠른 과정에 내맡기는 경향은 언뜻 보기에 개인의 자유 및 기회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개인성을 말살시킬 수밖에 없는 대중소통의 틀을 유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빠르기’를 바탕으로 하는 기술화 및 실용화는 사실은 자유이자 구속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더욱이 19세기의 사회적 발전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은 기계와 인간간의 자리바뀜에서 나타나는 소외가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기계와 그것이 주는 빠른 속도와의 친밀감 속에서 인간의 자기소외라는 더욱 추악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보편적인 현상이라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1960년대 이후 우리의 정치사회적 삶은 서구에서 2백년 이상 진행되어 왔던 시간의 가속화 담론 및 발전 이념을 더욱 증폭시키는 담론으로 점철되어 왔으며, 마찬가지로 테크놀로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또한 가히 압도적이다. 마치 앞에 달리는 자동차를 추월하기 위해 과속 운전하고 있는 사람처럼 우리는 불안정한 심리상태에 시달려 왔다. 이 밖에도 항상 미래의 유토피아를 현재화시키는 담론, 가령 ‘몇 년 후면 세계 5강의 선진국가 대열에 낄 수 있다’ 는 거대한 상징적 담론이 정치사회적 공간 및 문화적 공간을 채색해 왔으며, 이러한 담론의 장밋빛 환상은 일상적인 삶에도 영향을 끼쳐 마찬가지로 ‘몇 년 안에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환상을 쉽게 부추겨 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자의적으로 혹은 타의적으로 행해진 모든 부조리하고도 추한 수단의 사용이 매순간 합리화되거나 혹은 그것이 드러날 경우 마치 불행한 ‘하나의 사고’ 인 양 해석되곤 했다.
이제 너무도 빠르게 진행되어 온 우리의 삶 혹은 빠른 속도를 찬양하는 듯한 담론에 대항하는 ‘느림’ 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빠르기에 토대를 둔 생활 방식 이면에 사실 망각, 대인관계에서의 폭력성, 신경성 불안감 등이 도사리고 있는 반면에, 그와 같은 자기망각적이고도 폭력적인 삶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는 것이 ‘느림’ 이다. 언젠가 필자는 또 다른 글에서 느림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느림은 이전 사회로 복귀하려는 보수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나 메시아니즘에 젖은 혁명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도 아니며, 모든 사회적이고도 문화적인 혁신을 거부하는 탈역사적인 행위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문명의 발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독한 삶을 영위하려는 무기력하고도 공허한 행위도 아니다. 오히려 여유와 느림은 성찰적인 리듬의 회복인 것이다. 즉 그것의 최소한의 의미는 지식 및 정보의 빠른 교환, 조령모개 식의 아이디어 생산, 기계적인 시간에의 맹목적인 종속등과 같은 상태속에서도 다시금 자기의 걸음걸이에 대해 성찰해 보는 시간을 되찾는 데 있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느림에 대한 사유의 편린은 과연 시대 경향에 뒤떨어진 소박한 생각일까? 혹자는 도대체 느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필자는 지나간 것을 되새겨 보는 것, 거친행위보다는 부드러운 느낌의 회복, 타자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현 등에서 그 ‘느림’ 의 구체적인 형태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우선 지금까지 빠르게 진행되어 왔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지나간 것이 너무 쉽게 망각되어 왔지만, 이제 무기력한 망각에 대항하여 지나간 것을 되새기는 반성적인 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만남은 가령 일종의 계약, 이해타산의 행위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도 하며 때로는 마치 기계적인 빠른 움직임에 적응한 듯이 ‘자동적으로’ 상대방을 친구와 적으로 분류하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행위를 다시 한 번 되새겨봄으로써 그와 같은 표피적이고도 피상적인 만남 속에서 상실되었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 간의 근원적이고도 친숙한 감정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되새김이란 느림의 또 다른 표현인 셈이다.
시간의 가속화와 기계적 문명의 발전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우리의 행동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거칠어지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거친 행위에 대항하여 부드러운 느낌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출입문이나 냉장고 문을 빠르고 거칠게 여닫는 행위는 바로 버튼과 리모콘으로 움직이는 기술적인 문화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된 폭력성의 흔적이며, 이러한 폭력성은 단순히 사물에 대한 거친 행동 자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인관계에도 확장되기에 더욱 위험스럽다. 사물을 더 이상 자동화된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낯선 것’ 으로 대하고 동시에 그것을 부드럽게 감지해 내는 느낌의 회복이 바로 느림이며, 이러한 사물에 대한 부드러운 느낌이 회복될 때 비로소 사람 사이의 친숙한 감정까지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느림이란 타자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현이며, 이러한 예는 선물을 주고받는 우리의 행동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의 어느 철학자는 일종의 사회적인 기능 행위로 전락된 오늘날의 선물 행위를 비판하면서, 선물의 진정한 의미란 바로 선물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상상해 보는 자세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사실 오늘날에는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기에 물건은 마구잡이로 선사(교환)되며, 또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주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나 물건을 고르는 일에 자신의 시간이 낭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아무렇게나 빠르게 선택된 선물을 건네줌으로써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대급부에는 지나치게 병적으로 집착한다. 이러한 병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상대방을 주체로 생각하고 그가 갖게 될 행복감을 그려보는 상상력을 가져 본다는 것, 바로 이러한 행위가 느림을 가늠케 해주는 좋은 예로 작용한다. 즉, 느림은 더 이상 나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행복, 타자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발현하려는 자세에서 찾아질 수 있다.
빠르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이와 같은 느림에 대한 몇 가지 풍경은 사치스러운 생각으로 간주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 속에서 점차 상실되어 가고 있는 기억, 느낌, 애정 같은 작은 느림들이 회복도리 때 비로소 지금까지 우리를 억압하였던 ‘빨리 빨리’라는 강압적인 요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그 거대한 정치 사회적인 담론은 장밋빛 속에서 인형처럼 길들어져 왔던 우리들은 다시금 자기 자신을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느림은 장엄한 행위와 의식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나오는 소리 없는 작은 움직임인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2백년 이상 시간의 가속화와 기술적인 문명 발전을 토대로 목적론적 행위만을 추구해 왔던 서구에서 이제 느림과 명상이 중요한 학문적인 개념으로 다시 검토되고 있다. 이전에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행동하는 인간만을 역사의 주인으로 해석해 왔던 그들이 명상적인 시간에 자신을 내맡겨 보려는 삶의 철학을 제기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그와 같은 반성은 아마도 기계적인 시계에 도취된 나머지 쉽게 망각되고 상실되었던 진정한 시간의 의미를 다시 찾으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느림이라는 화두는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서구인들의 반성을 다시금 모방해 내는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되며, 너무도 빠른 시일 내에 너무도 빠르게 달려온 우리에게는 절실한 실제적인 움직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느림, 그것은 삶을 정지시키거나 시간의 흐름을 외면하자는 비관적이고도 허무적인 요청이 아니라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간의 친숙한 감정과 느낌이 숨쉬는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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