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여왕 / 동화 / 전문 / 안데르센
by 송화은율눈의 여왕 / 안데르센 / 김선희 번역
일곱 가지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
거울과 거울 조각
자, 그럼! 시작할까. 이 이야기가 끝나면 여러분은 의외로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녀석은 아주 성질이 사나운 호브고블린이다. 이 고블린은 아주 사악한 종류의 도깨비요정으로, 사실 악마나 다름없었다. 어느 날 이 악마가 요상한 힘이 있는 거울을 마침내 완성해기분이 무척 좋았다. 이 거울은 선하거나 아름다운 것을 비추면 쪼그라들어 거의 보이지 않고, 반면에 아무짝에 쓸모없고 추한 것은 도드라지면서 훨씬 더 추하게 보였다. 이 거울에서 아름다운 풍경은 끓는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보이고 아주 선한 사람은 섬뜩해 보이거나 물구나무를 섰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주근깨가 하나 있는 사람이라면 코와 입까지 죄다 주근깨로 뒤덮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웃기는군!”
악마가 말했다. 사람의 마음에 흐르는 선하고 경건한 생각도 이 거울에서는 음흉한 미소로 보였다. 악마는 이 독창적인 발명품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악마가 가르치는 호브고블린 학교 학생 악마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이제 이 악마들은 처음으로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진짜로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다며 떠들어댔다. 녀석들은 이 거울을 들고 허둥지둥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마침내 지구상에 살아있는 사람이나 대지는 이 거울로 온갖 수난을 당했다.
이윽고 악마들은 하늘로 올라가서 천사 그리고 신을 조롱하고 싶었다. 거울을 들고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악마들이 거울을 움켜잡을 수 없을 만큼 거울은 점점 더 끔찍하게 웃었다. 더 높이 더 높이, 천국과 천사에 점점 더 가까이 갔다. 문득 그 웃음 짓는 거울이 무지막지하게 흔들리더니 녀석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땅으로 떨어져서 수천, 수만, 수백만, 수십억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어쩌면 그보다 더 잘게 깨졌을 것이다. 이제 이 거울은 깨지기 전보다 훨씬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어떤 것은 모래알보다 잘게 깨졌는데 이것이 넓은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일단 사람들의 눈에 들어가면 눈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그 사람이 보는 건 무엇이든 왜곡시켜서 사물의 오직 나쁜 면만 보게 했다. 아무리 유리 조각이 작아도 거울 전체에 있던 것과 똑같은 힘이 있었다.
몇몇 사람은 마음속에 유리 조각이 박히기도 했는데, 심장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버리기에 무척 끔찍했다. 어떤 것들은 제법 커서 창문 유리로 썼다. 그 너머로 친구들을 내다보는 그런 창문은 아니었다. 그 유리 조각으로 안경을 만들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또렷하게 보려고 이 안경을 썼다가는 큰일이 난다. 악마들은 그게 하도 웃겨서 옆구리가 아프도록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그 유리의 미세한 조각이 여전히 허공을 떠돌고 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려주겠다.
두 번째 이야기
어린 소녀와 어린 소년
큰 도시에는 집도 많고 사람도 많기에 작은 마당을 갖기도 쉽지 않아서 사람들 대부분은 화분 하나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 가난한 두 아이가 사는 곳에는 화분보다는 조금 더 큰 텃밭이 겨우 하나 있었다. 둘은 남매는 아니었지만 남매만큼이나 서로를 퍽 아꼈다. 부모님들은 다락방이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집에 살았다. 두 집 사이, 지붕이 만나는 곳에 빗물통이 흐르고 창문이 서로를 마주 보아서 서로의 집에 가려면 창문에서 창문으로 그냥 넘어가기만 하면 됐다.
이 창밖에 부모님들이 커다란 상자를 하나 두어서 집에서 먹을 채소와 작은 장미 나무도 한 그루 키웠는데, 아주 잘 자랐다. 부모님은 이 상자를 빗물통에 걸쳐두어서 두 아이는 더 가깝게 서로에게 갈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꽃 담장처럼 보였다. 콩이 상자 위로 드리우고 장미 덤불이 길게 늘어지면서 창틀을 휘감고 서로에게 허리를 숙여서 마치 꽃과 풀로 이루어진 개선문 같았다. 상자는 꽤 높아서 위로 올라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둘은 종종 자그마한 의자를 지붕으로 내놓고는 장미 아래 앉아서 재미있게 놀곤 했다.
물론 겨울이 되면 이런 즐거움도 사라졌다. 창문에는 종종 두껍게 성에가 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난로 위에서 구리 동전을 뜨겁게 달구어서 성에가 잔뜩 낀 창문에 가져다 댔다. 그러면 아주 멋진 동그란 원이 생기는데 그 동그라미 너머로 친근한 밝은 눈동자가 각자의 창문에 나타났다. 소녀와 소년이 밖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게르다이고, 소년의 이름은 카이였다. 여름에는 한 걸음만 떼어도 서로 어울릴 수 있었지만, 겨울에 서로의 집에 가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옆집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밖에는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하얀 꿀벌이 떼 지어 가는 것 좀 보려무나.”
“여왕벌도 있어요?”
남자아이가 물었다. 진짜 벌 사이에는 여왕벌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물었다.
할머니가 대답했다.
“그럼, 정말 있지. 여왕벌이 벌떼 속에서 날지. 가장 크단다. 절대로 땅에 잠자코 붙어 있는 법이 없어. 그러다가 다시 먹구름 속으로 돌아간다. 숱한 겨울밤 동안 거리를 날아다니면서 창문을 엿보지. 그러다가 마치 꽃으로 둘러싸인 듯 희한한 모습으로 얼어붙어.”
“아, 네. 우리 그거 본 적 있어요.”
두 아이 다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아이가 물었다.
“눈의 여왕이 여기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러자 남자아이가 소리쳤다.
“흠, 들어오게 하자. 내가 뜨거운 난로 위에 놓고 확 녹여버릴 테니까!”
하지만 할머니는 카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날 저녁 어린 카이는 집에서 잠자리에 들려다가 창가 의자로 다가가 그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눈꽃 몇 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가장 큰 눈꽃이 꽃 상자 귀퉁이에 날아가 앉았다. 이 눈꽃은 점점 더 커졌다. 그러더니 마침내 여자로 바뀌었는데 아주 섬세하고 투명하리만큼 얇은 하얀 옷을 입었다. 마치 수백만 마리의 별 모양 눈꽃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아름답고 우아했지만 얼음처럼 반짝였다. 눈동자는 밝은 별 두 개처럼 빛났지만 그 안에는 평화로움도 고요함도 없었다. 여인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소년은 덜컥 겁을 집어먹고 의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소년의 눈에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창문을 휙 지나가는 듯 보였다.
이튿날은 날씨가 맑고도 서늘했다. 이제 눈이 녹고 봄이 왔다. 태양이 비치고 초록 풀이 돋아났다. 제비들이 둥지를 틀고 집집마다 창문을 열었다. 또다시 아이들은 집 위 빗물통 위 그 작은 지붕 마당에서 놀았다.
그해 여름 장미가 아주 아름답게 피었다. 게르다는 성가 하나를 배웠는데 거기에 자신의 꽃을 떠올리게 하는 장미에 대한 가사가 한 줄 있었다. 게르다는 카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고 둘은 곧 그 노래를 함께 불렀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잡고 장미꽃에 입을 맞추고는 투명한 햇빛을 올려다보며 예수의 아이가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하늘에 대고 말했다. 정말 아름다운 여름이라고, 절대로 시들 것 같지 않은 향기로운 장미 덤불 아래 있으니 무척이나 향기롭다고…….
어느 날 게르다와 카이는 새와 동물에 관한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교회 탑의 시계가 다섯 번 울렸다. 카이가 소리쳤다.
“아! 내 가슴이 아파. 눈에도 뭐가 있어.”
카이는 눈을 깜빡였다. 게르다는 카이의 목을 잡고 들여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이가 말했다.
“없어진 것 같아.”
하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바로 마법의 유리에서 나온 그 유리 조각이었다.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위대하고 선한 것은 무엇이든 작고 추하게 비추지만 모든 사악한 것들은 크게, 작은 흠도 엄청나게 크게 비추는 저 호브고블린이 만든 거울을 말이다. 불쌍한 카이! 유리파편은 심장도 뚫었다. 그러니 심장이 곧 얼음덩이로 변할 것이다. 고통은 멈추었지만 유리 조각은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이가 물었다.
“너 왜 울고 있니? 그러니까 못생겨 보인다.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더니 불현듯 뭐가 떠올랐는지 이렇게 말했다.
“아! 저 장미는 죄다 벌레가 뜯어 먹었네. 봐, 이 꽃은 비뚤어졌어. 게다가 저 장미, 어쩜 저렇게 추할 수가 있지, 꼭 자기들이 사는 상자하고 똑같아.”
그러더니 그 상자를 발로 툭 찼다. 장미도 확 꺾어버렸다.
“카이! 너 무슨 짓이야?”
게르다가 소리쳤다. 카이는 게르다가 화를 내자 꽃 한 송이를 더 꺾고는 사랑스러운 게르다만 혼자 남겨 놓은 채, 자기 집 창문으로 펄쩍 뛰어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게르다가 자기 그림책을 가져다주었을 때 카이는 그건 요람에 든 아기들에게나 딱 맞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언제나 “그런데……” 하며 끼어들었다. 기회를 틈타 할머니 안경을 훔쳐서 자기 코에 걸치고는 할머니 흉내를 냈다. 어찌나 잘하는지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머지않아 그 거리에 사는 사람들 모두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상하고 추한 것들을 모두 다, 카이가 어쩌나 흉내를 잘 내는지 사람들은 말했다.
“저 아이는 확실히 머리가 좋아!”
하지만 그건 눈과 심장에 박힌 유리 조각 때문이었다. 그 유리 때문에 카이는, 온 영혼을 다해 자신을 아끼는 사랑스러운 게르다조차 놀려댔다.
이제 카이는 둘이 예전에 함께 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놀이를 했다. 둘은 좀 더 철이 들었다. 어느 쌀쌀한 날, 눈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카이는 집 밖으로 커다란 돋보기를 가져와서 파란 코트 자락을 펼치고는 거기에 눈송이가 떨어지게 했다.
“자, 이제 그 돋보기로 봐봐.”
카이가 게르다에게 말했다.
눈송이 하나, 하나가 훨씬 더 커 보이면서 마치 거대한 십각형의 별처럼 보였다. 놀라웠다.
카이가 이어 말했다.
“봐, 정말 멋지지! 진짜 꽃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어. 눈꽃은 아주 완벽해. 눈꽃은 흠잡을 데가 없어, 녹기 전까지는…….”
얼마나 지났을까, 카이가 장갑을 끼고 어깨에 썰매를 지고 내려와서는 바로 게르다의 귀에 대고 소리쳤다.
“다른 남자아이들이 노는 마을 광장에서 나 놀아도 된대!”
그러더니 휑하니 달려갔다.
광장에는 좀 더 대담한 소년들이 자기들 썰매를 농부의 수레 뒤에 묶고는 멀리 끌려가며 놀았다. 신나는 놀이였다.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데 커다란 썰매 한 대가 다가왔다. 온통 새하얗게 칠한 썰매였는데, 마부도 투박한 하얀 털외투를 입고 똑같이 하얀 털모자를 썼다. 그 썰매가 광장을 두 바퀴 돌자 카이는 재빨리 그 뒤에 자기 썰매를 묶었다. 그러자 썰매는 더 빠르게, 빠르게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마부는 친근하게 몸을 돌려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것처럼 카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이가 자신의 작은 썰매를 풀려고 할 때마다 마부는 고개를 다시 끄덕였다. 카이는 계속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마을 입구까지 내달렸다.
문득 눈이 세차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소년은 앞에 있는 자기 손도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썰매에서 빠져나오려 손에 잡은 밧줄을 갑자기 놓아 버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이의 작은 썰매는 단단히 묶여 있어서 바람처럼 나아갔다. 카이는 소리도 질러봤지만 듣는 이 하나 없었다. 눈은 더 세차게 몰아치고 썰매는 내내 달려갔다. 이따금 울타리나 도랑을 넘는 것처럼 펄쩍 뛰기도 했다. 카이는 공포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기도라도 해보려 했지만 떠오르는 건 구구단뿐이었다.
눈송이는 점점 더 굵어져서 마침내 하얀색 커다란 암탉처럼 보였다. 갑자기 눈의 장막이 쓱 벌어지더니 그 커다란 썰매가 멈추고 마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털외투와 털모자는 눈으로 만든 것이었다. 마부는 여자였다. 키가 크고 몸매가 가냘프고 눈이 부시게 희었다. 바로 눈의 여왕이었다.
여왕이 말했다.
“우리 꽤 빨리 왔구나. 추위로 떨고 있는 거냐? 내 곰털 코트 속으로 기어 들어와라.”
여왕은 자기 옆 썰매에 카이를 앉혔다. 그러고는 카이의 몸을 감싸주었다. 카이는 눈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 들었다.
“아직도 춥니?”
여왕이 물었다. 그러고는 카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브르르르. 그 입맞춤은 얼음장보다 더 차가웠다. 카이는 심장 반이 이미 얼음덩어리였는데도 심장까지 추웠다. 한순간 숨이 넘어갈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곧 편안해지면서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 썰매! 내 썰매 잊지 마요!”
카이에게는 오로지 이 생각뿐이었다. 둘은 하얀 암탉 한 마리에 썰매를 묶었는데 이 암탉이 등에 썰매를 지고 내내 날아다녔다. 눈의 여왕은 다시 한번 카이에게 입을 맞추었다. 카이는 사랑스러운 게르다, 할머니, 집에 있는 모두를 잊었다.
여왕이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입맞춤은 없다. 그랬다가 너는 죽을 테니까.”
카이는 여왕을 쳐다보았다. 여왕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예쁜 얼굴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더 이상 얼음으로 만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카이의 창밖에 앉아서 손짓했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카이의 눈에 눈의 여왕은 완벽했다. 그리고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분수 암산을 할 수 있다는 것, 여러 나라의 인구를 안다는 것도 들려주었다. 여왕은 내내 웃음 지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이는 생각만큼 알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머리 위 드넓은 우주 공간을 올려다보았다. 여왕은 먹구름 위로 카이를 데리고 날아오르고, 그 사이 폭풍은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듯 쌩쌩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숲, 연못, 수많은 대지와 바다 위를 날았다. 빛나는 눈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갈 때, 그 아래로는 바람이 차갑게 휘몰아쳤으며 늑대가 울부짖고 흑까마귀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저기 위에 달은 크고 환하게 빛났다. 카이는 긴 긴 겨울밤 내내 그 달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낮에는 눈의 여왕 발치에서 잠을 잤다.
세 번째 이야기
마법을 부리는 여인의 꽃밭
카이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어린 게르다는 어떻게 지냈을까? 카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무도 몰랐다. 누구도 카이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다. 소년들은 카이가 아주 멋진 커다란 마차에 그 작은 썰매를 매달고 따라갔다면서, 길을 따라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말만 했다. 누구도 카이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눈물을 쏟아냈다. 게르다가 누구보다 슬프게 울었다. 사람들은 카이가 죽었다고 말했다. 분명 마을에서 멀지 않은 강에 빠져 죽었을 거라고 했다. 아, 긴 겨울은 정말이지 우울했다!
하지만 봄 그리고 그 따스한 햇빛이 마침내 찾아왔다.
“카이는 죽어서 완전히 사라졌어.”
게르다가 말했다.
“설마.”
햇빛이 말했다.
“카이는 죽어 버렸어.”
게르다가 제비들에게 말했다.
“그럴 리 없어.”
제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마침내 게르다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혼잣말을 했다.
“내 빨간색 새 구두를 신겠어. 카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야. 강가에 내려가서 카이에 대해 물어봐야겠어.”
퍽 이른 아침이었다. 게르다는 아직 잠들어 있는 할머니에게 입을 맞추고는 빨간색 구두를 신었다. 내내 혼자서 마을 밖으로 나가 강으로 내려갔다.
“내 소꿉친구를 네가 데려갔다는 게 사실이니? 카이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면 내 빨간 구두를 줄게.”
게르다에게는 물결이 아주 수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게르다는 신발을 벗었다.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지만 강물에 그 신발을 던졌다. 하지만 신발은 멀지 않은 강가에 떨어져서 잔잔한 물결에 휩쓸려 게르다에게 다시 돌아왔다. 강물이 카이를 품고 있지 않으니까 게르다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신발을 멀리 던지지 못한 게 안타까워서 갈대밭 사이에 있는 배 위로 올라가 배 끝에 서서 다시 물속으로 신발을 던졌다. 하지만 그 배는 묶여있지 않았다. 게르다가 움직이자 배는 강둑에서 멀리 떠내려갔다. 게르다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물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배 맞은편에 이르렀을 즈음, 배는 이미 강둑에서 1미터 정도 벗어나 점점 빨리 나아가고 있었다.
어린 게르다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눈물을 터뜨렸다. 참새 말고는 게르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참새들은 게르다를 땅으로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물가를 따라 날아가며 그저 짹짹거리기만 했다.
“우리 여기 있어! 우리가 여기 있어!”
마치 게르다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배는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고 게르다는 양말만 신은 채 그저 차분히 앉아 있었다. 그 빨간 구두는 뒤에서 둥둥 떠내려 왔지만 배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서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양쪽 강가의 풍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꽃들이 사랑스럽게 피고 나무들은 무성하고 언덕은 소떼와 양떼가 먹을 풀밭이 가득했다.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게르다는 생각했다.
‘아마 강이 카이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려나 봐.’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일어나서 몇 시간이고 아름다운 초록색 강둑 풍경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커다란 벚꽃나무 동산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이상하게도 울긋불긋한 창문이 달리고 지붕은 지푸라기를 엮어 만든 작은 집이 한 채 있었다. 집 밖에 배를 타고 지나가는 모두에게 거수경례하는 모양의 나무 병정 둘이 있었다.
게르다는 그 나무 병정이 살아있다고 생각을 해서 크게 소리쳤지만 당연히 병정들은 게르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배가 물살에 강둑으로 떠내려가자 그 병정에게 퍽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게르다는 훨씬 더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노파가 집 밖으로 나왔다. 노파는 비뚤배뚤 휜 지팡이에 기대어 섰는데 머리에 햇빛을 가리는 커다란 모자를 썼다. 모자 위에 아주 아름다운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노파가 소리쳤다.
“가엾은 것! 어쩌다가 이 큰 물살에 길을 잃은 거니, 이 넓은 곳으로 어쩌다가 지금껏 쓸려왔어?”
노파는 물속까지 걸어와서 그 지팡이로 배를 꽉 움켜잡고는 물가로 끌어당겨 게르다를 배에서 끄집어냈다.
게르다는 다시 땅을 밟아서 아주 기뻤다. 하지만 자신에게 말을 하는 이 낯선 할머니가 살짝 무섭기도 했다.
“와서 네가 누구인지 말해 보렴, 어떻게 여기 왔는지도.”
게르다는 모두 들려주었다. 노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흠, 흠!”
게르다는 이야기를 다 마치고 혹시 카이를 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노파는 카이가 지나가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언제든 올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게르다에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버찌를 먹으며 꽃이나 구경하라고 했다. 꽃은 어떤 그림책보다 더 아름다웠다. 버찌마다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듯했다. 문득 노파가 게르다의 손을 잡고 그 작은 집으로 이끌었다. 노파는 문을 잠갔다. 창문이 벽 높이 달려 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창으로 햇빛이 이상야릇한 빛깔로 섞여 들어와 비추었다. 탁자 위에 가장 아름다운 버찌가 있었다. 이제 두려움은 사라져 게르다는 버찌를 실컷 먹었다. 버찌를 먹는 사이, 노파는 황금빛 머리빗으로 게르다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게르다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장미꽃처럼 둥글고 탐스러운 작은 얼굴 양쪽으로 황금빛으로 빛나며 흘러내렸다.
노파가 말했다.
“너처럼 예쁜 아이를 무척이나 바랐단다. 이제 우리 둘이 얼마나 잘 지내는지 보려무나.”
머리를 빗으면 빗을수록, 게르다는 점점 더 카이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렸다. 이 노파는 마법을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나쁜 마녀는 아니었다. 그저 재미로 장난치듯 마술을 부렸다. 귀여운 게르다를 무척이나 곁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마당으로 나가서 장미 덤불 전체에 지팡이를 가리켰다. 한창 아름답게 피던 그 꽃이 전부 다 흔적도 없이 시커먼 흙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노파는 걱정스러웠다. 만약에 게르다가 그 꽃을 보면 자신의 장미와 어린 카이를 떠올리고 다시 달아날지도 몰라서 말이다.
게르다는 꽃밭으로 나왔다. 꽃밭이 얼마나 향기롭고 사랑스러운지! 모두가 아는 사계절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어떤 그림책도 그렇게나 예쁘고 화려할 수가 없었다. 게르다는 좋아서 깡충깡충 뛰었다. 태양이 키 큰 벚나무 뒤로 넘어갈 때까지 마당에서 놀았다. 이윽고 아름다운 침대, 빨간 비단 퀼트 이불 밑에 몸을 눕혔다. 그곳에서 게르다는 잠을 잤다. 그곳에서 여왕이 결혼식 날에 꾸는 꿈만큼이나 화려한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게르다는 다시 따뜻한 햇볕 속으로 나가 꽃과 함께 놀았다. 그렇게 여러 날을 보냈다. 게르다는 꽃을 속속들이 모두 알았다. 그런데 한 가지 꽃이 없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게 뭔지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앉아서 노파의 햇빛 가리는 모자를 보고 있었다. 꽃 그림 중에서 가장 예쁜 것은 장미 한 송이었다. 노파가 마당에서 진짜 장미를 사라지게 했을 때, 자기 모자의 이 장미를 깜빡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게르다가 물었다.
“여기에는 장미가 하나도 없어요?”
게르다는 꽃밭 사이로 가서 보고 또 보았다. 하지만 장미는 한 송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다. 문득 그 뜨거운 눈물이 장미 덤불이 가라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따뜻한 눈물이 땅을 촉촉이 적시자, 장미 덤불이 다시 올라오더니 무성하게 피어났다. 게르다는 장미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다. 마침내 자신의 예쁜 장미꽃이 떠오르고 카이가 생각났다.
게르다가 말했다.
“아, 내가 얼마나 늦은 거지? 카이를 빨리 찾아야 해.”
게르다는 장미에게 물었다.
“그 애가 어디 있는지 아니? 그 애가 죽어서 사라졌을 것 같아?”
그러자 장미꽃이 말했다.
“그 애는 죽지 않았어. 우리는 죽은 사람들이 있는 땅속에 있었는데, 그곳에 카이는 없었어.”
“고마워.”
게르다는 꽃송이 모두에게 가서 입을 맞추며 물었다.
“카이가 어디 있는지 아니?”
하지만 꽃들은 햇빛 속에서 자신들의 동화라든가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게르다가 많은 꽃들에게 귀를 기울였지만 카이에 대한 얘기는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었다.
참나리 꽃은 뭐라고 말했을까?
“북소리 들리니? 둥, 둥! 음계가 두 개뿐이었어. 언제나 둥, 둥! 여인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어봐, 사제의 기도를 들어 봐. 빨간색 긴 옷을 입은 여자 힌두교 신도가 주위의 사람들 사이로 살아있는 남자를 생각하면서 장례식 장작더미 위에 서 있어. 그 남자의 눈동자가 불꽃보다 더 뜨겁게 타고 있다고 생각해. 불꽃보다 더 깊이 심장을 뚫는 용맹한 눈길을 생각하고 있어. 곧 여자의 몸은 재가 될 거야. 심장의 불꽃이 장례식 장작더미에서 사라질까?”
“난 정말 모르겠어.”
“그게 내 동화야.”
나팔꽃은 뭐라고 말했을까?
“오래된 성 하나가 산속 좁은 길에서 높이 솟아 있어. 빽빽한 덩굴 잎이 발코니까지 자랐어. 거기에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서 있어. 신부는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여 길을 내려다보네. 어떤 장미꽃도 이 여인만큼 아름답지 않고, 바람에 실려 오는 사과 꽃도 그렇게나 싱그럽지 않아. 여인의 실크 옷이 사각거리는 소리 좀 들어 봐. ‘그 사람은 결코 오지 않는 걸까?’”
“카이를 말하는 거야?”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내 자신의 꿈을.”
나팔꽃이 대답했다.
작은 스노드롭은 뭐라고 말했을까?
“나무 사이 밧줄 두 개에 나무판자 하나가 걸려 있어. 그네야. 눈처럼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예쁜 소녀 두 명이 초록색 기다린 리본이 나풀거리는 모자를 쓰고 그네를 타고 있어. 그 애들 오빠는 소녀들보다 큰데, 그네 뒤에서 두 팔에 밧줄을 감고 버티고 있어. 한 손에는 작은 컵을, 다른 손에는 도자기 피리를 들고 있어. 그네가 움직이자 비눗방울이 색색으로 변하며 둥둥 떠다녀. 그네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마지막 비눗방울이 그릇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 나비처럼 팔랑거리네. 검은색 작은 개가 뒷다리를 바닥에 대고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그네에 뛰어오르려고 해. 하지만 그네가 멈추지 않아. 그네는 높이 올라갔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마침내 개는 균형을 잃고 화가 나서 마구 짖어대. 그러자 아이들이 개를 놀려. 비눗방울이 터지고. 그 비눗방울이 터졌어. 비눗방울 속의 그네 그림. 이게 나의 이야기야.”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인 것 같아. 하지만 넌 아주 슬프게 말했어. 카이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어.”
히아신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세 자매가 있었어, 꽤 솔직하고 온화했어. 첫째는 빨간색, 둘째는 파란색 셋째는 하얀색 옷을 입었어. 달빛 밝은 밤, 고요한 호수 옆에서 손에 손을 맞잡고 춤을 추었어. 세 사람은 요정이 아니라 인간이었어. 공기는 달콤하고, 세 자매는 숲속으로 사라졌어. 공기는 점점 더 달콤해졌어. 세 자매가 누운 관 세 개가 숲에서 미끄러지듯 나와 호수를 가로질러. 반딧불이가 깜빡이는 불처럼 주위를 날아다녀. 그 춤추는 자매는 잠을 자고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은 걸까? 꽃향기는 세 자매가 죽었다고 말해, 장례식을 위해 저녁 종이 울려 퍼져.”
게르다가 말했다.
“넌 나를 아주 슬프게 하고 있어. 네 향기는 너무 강해서 그 죽은 자매들 생각이 떠올라. 아, 카이는 정말로 죽은 걸까? 장미꽃이 땅속에 있었는데, 카이는 죽지 않았다고 했단 말이야.”
히아신스가 종소리를 냈다.
“딩, 동. 우리는 카이를 위해 종을 울리지 않았어. 우리는 그 애를 몰라. 우리는 그저 우리 노래를 부르고 있어. 그냥 우리가 아는 노래지.”
그래서 게르다는 번들거리는 초록잎 사이에 빛나는 미나리아재비에게 갔다.
“너는 밝은 해 같구나. 있잖니, 어디 가면 내 소꿉친구를 찾을 수 있는지 아니?”
미나리아재비는 게르다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빛을 뿜었다. 하지만 미나리아재비는 무슨 노래를 할까? 확실히 카이에 관한 건 아닐 것이다.
“작은 마당에, 하느님의 태양이 봄의 첫날을 밝게 비추고 있었어. 햇빛은 옆집 흰 벽을 따라 반짝였어. 그리고 봄에 처음으로 핀 노란색 꽃들이 따스한 햇살 속에서 황금처럼 빛났어. 늙은 할머니가 밖에 나와 의자에 앉아 있었어. 가난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인, 할머니의 손녀가 잠시 집에 들르러 왔어. 손녀는 할머니에게 입 맞춰주었어. 정말로 마음이 가득 담긴 황금 같은 입맞춤이었지. 입술에도 황금, 꿈속에도 황금, 아침 햇빛 속에도 황금이 가득했어. 자, 이게 나의 작은 이야기야.”
미나리아재비가 말했다.
“아, 불쌍한 우리 할머니. 할머니는 날 엄청 보고 싶어 하실 거야. 카이 때문에 슬퍼했던 것처럼 나 때문에 몹시 슬퍼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난 곧 집으로 돌아갈 거야. 카이도 데리고 갈 테고. 꽃들에게 카이 소식을 묻는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 꽃들은 자기들 노래 말고는 아무것도 몰라. 내게 들려줄 소식이 없어.”
게르다가 말했다.
이윽고 게르다는 재빨리 달아날 수 있게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지만 수선화를 펄쩍 뛰어넘으려 할 때, 수선화가 게르다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래서 게르다는 걸음을 멈추고 그 커다란 꽃 위로 몸을 기울였다.
“나한테 뭔가 할 말이 있나 보구나.”
게르다가 물었다.
수선화는 뭐라고 말했을까?
“난 내가 보여! 난 내가 보여! 아, 내 향기는 어떻게 이렇게 향기로울까! 저 위 좁은 다락방에 옷을 대충 입은 어린 무희가 있어. 먼저, 한쪽 발로 섰다가 두 발로 서. 무희는 세상을 경멸해. 그 무희는 환상 속에 살아. 손에 든 천 조각에 주전자 물을 따라 부어. 청결은 정말 대단한 미덕이야! 무희의 하얀색 옷이 고리에 걸려 있어. 그 옷 또한 주전자 안에서 빨아서 지붕 위에 말렸어. 무희는 그 옷을 입고, 목에 사프란색 스카프를 둘러 옷을 더 희게 돋보이게 했어. 발끝을 뾰족하게 세워! 다리 하나로 얼마나 균형을 잘 잡는지 봐. 난 내가 보여! 난 내가 보여!”
“난 관심 없어. 그런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지?”
게르다가 말했다.
그러고는 마당 끝으로 달려갔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게르다는 녹이 슨 걸쇠를 마구 흔들어 마침내 걸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게르다는 맨발로 넓은 세상으로 도망쳐 나왔다. 세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게르다는 더 이상 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커다란 바위에 앉아 쉬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여름이 가고 이제 늦가을이 되었다. 언제나 태양이 비추고 사계절 내내 꽃들이 활짝 피어 있는 아름다운 마당 안에서 이처럼 세월이 빨리 지나갔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내가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허비했어. 여긴 벌써 가을이야. 더 이상 꾸물거릴 수 없어.”
게르다가 말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이 아프고 피곤했다! 주변의 모든 게 너무나 차갑고 황량했다! 기다란 버드나무 잎은 샛노랗게 물들고, 축축한 안개가 이슬방울처럼 후드득 흘러내렸다. 나뭇잎이 하나 둘 땅에 떨어졌다. 야생 자두나무만 아직 열매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열매는 너무 시어서 이 끝이 아플 정도였다.
아, 주변에 보이는 이 넓은 세상이 얼마나 우울하고 칙칙해 보이는지.
네 번째 이야기
왕자와 공주
게르다는 어쩔 수 없이 또 쉬어야 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게르다 앞 하얀 눈 위로 총총 다가왔다. 까마귀는 아주 오랫동안 게르다를 지켜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까악, 까악! 정말 멋진 까마귀 날이야!”
까마귀는 이보다 더 멋지게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왠지 소녀가 측은했다. 그래서 이 드넓은 세상에서 혼자서 어디로 그렇게 가고 있냐고 물었다. 게르다는 ‘혼자서’라는 말을 듣고 까마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까마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모두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카이를 못 봤냐고 물어봤다. 까마귀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쩌면 봤을 수도, 어쩌면 그럴 수도!”
“뭐라고? 정말 본 것 같아?”
꼬마 소녀가 소리쳐 물었다. 까마귀에게 입 맞추며 죽어라 꽉 껴안았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내가 본 게 그 꼬마 카이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아이는 공주 때문에 널 잊었을 거야.”
까마귀가 말했다.
“카이가 공주랑 같이 산다는 거야?”
게르다가 물었다.
“그래. 잘 들어봐! 하지만 내가 너희 언어로 말하는 건 무척 힘들어. 네가 까마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내가 훨씬 더 쉽게 말할 수 있을 텐데.”
까마귀가 말했다.
“난 까마귀 말 몰라. 우리 할머니는 아시지만. 아기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진작 배워뒀으면 좋았을걸.”
게르다가 말했다.
“됐어. 내가 최대한 너한테 말해줄게. 하지만 그게 그다지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다.”
까마귀가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왕국에, 무척 똑똑한 공주가 있어. 그건 당연하지, 공주는 이 세상 신문은 모조리 읽고 다 까먹었어. 그렇게 똑똑해. 음, 얼마 전에 공주는 왕이 되었어. 그건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만큼 그렇게 즐겁지 않았어. 그래서 공주는 옛 노래를 흥얼거렸어.”
“왜, 정말 왜, 나는 결혼하면 안 되지?”
“음, 그거 좋은 생각이야!”
공주가 말했지. 공주는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신랑감을 찾는 즉시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저 근엄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옆에 서 있는 사람 대신 말이야. 그런 사람은 정말 지겹거든. 공주는 북을 쳐서 궁궐의 귀부인을 모두 모이게 했어. 부인들은 공주의 생각을 듣고 모두 기뻐했어.
“아, 정말 좋아요! 우리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부인들이 말했어.
“정말이야. 내가 하는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다 사실이야. 내게는 궁정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유순한 내 사랑이 있거든. 내 사랑이 전부 다 이야기해 줬어.”
까마귀가 말했다.
물론 까마귀의 애인은 역시 까마귀였다. 다 끼리끼리 노는 법이니 말이다.
“즉각 신문이 발행되었어. 신문에는 하트 모양 테두리에 공주 이니셜이 적혀 있었어. 용모 단정한 젊은 남자는 누구나 궁정으로 와서 공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렸어. 최고로 말을 잘 하는 사람, 그리고 궁정에서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을 공주가 남편으로 고를 거라고 했지.”
“그래, 그래. 내 말 믿어. 내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것처럼 그 이야기도 명확한 사실이야. 사람들이 성으로 몰려들었어. 엄청난 인파가 모여 발 디딜 틈이 없었지. 하지만 첫째 날은 물론이고 둘째 날에도 아무도 선택받지 못했어. 밖에 길거리에 있을 때 사람들은 모두 입담이 좋았어. 하지만 보초들이 은빛 실로 수를 놓은 군복을 입고 지키고 선 궁정 문에 들어서서, 금빛 실로 수를 놓은 군복을 입은 신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계단을 올라,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힌 접견실에 도착했을 때는 할 말을 잃었지. 왕좌에 앉은 공주 앞에 섰을 때, 공주의 마지막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게 고작이었어. 공주는 자기 말이나 따라 하는 소리는 전혀 듣고 싶지 않았지.”
까마귀가 말했다.
“접견실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수면제를 잔뜩 마시고 잠이 들기라도 한 것 같았어. 하지만 거리로 나오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어.”
“지원자의 줄이 마을 입구에서 궁정까지 길게 이어졌어. 나도 직접 가서 봤어. 사람들은 배도 고프고 목도 말랐어. 하지만 궁정에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미지근한 물 한잔 주지 않았지. 확실히, 똑똑한 지원자 몇몇은 샌드위치를 싸왔어. 하지만 이들은 옆 사람과 나눠먹지 않았어. 모두 이렇게 생각했지. ‘저 인간이 배고프게 보이도록 놔둬야 해. 그러면 공주는 저 인간을 선택하지 않을 테니까!’”
까마귀가 말했다.
“그런데 카이는, 우리 카이는 언제 왔어? 그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어?”
“여유 좀 가져. 시간을 갖고 좀 기다려봐! 이제 그 이야기하려고 하잖아. 셋째 날 어린 사람 하나가, 말도 없고 마차도 없이, 궁정으로 과감하게 성큼성큼 걸어 올라갔어. 그 아이의 눈은 네 눈처럼 반짝반짝 빛났지. 게다가 긴 머리가 무척 멋졌어. 하지만 옷은 형편없었지.”
“아, 카이가 맞네! 이제 카이를 찾았네.”
게르다가 손뼉을 치고 기뻐하며 말했다.
“그 아이는 등에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어.”
까마귀가 게르다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건 분명 그 아이 썰매였을 거야. 카이는 길을 떠날 때 썰매를 가지고 있었어.”
게르다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걸 자세히 보지는 않았거든. 하지만 내 사랑이 말했어. 그 아이가 궁의 문으로 걸어 들어오며 은빛 보초들을 보았을 때, 계단을 올라오며 금빛 보초들을 보았을 때, 그 아이는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고. 그 아이는 고개를 까닥이며 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계단에 서 있는 거 정말 따분할 것 같네. 나라면 안으로 들어갈 거야.’”
까마귀가 말했다.
방은 환하게 불을 밝혀두었어. 국무 대신과 고문관들은 맨발로 걸어 다니고 있었어. 앞에 황금 쟁반을 들고서 말이야. 모두를 엄숙하게 하기에 충분했지. 그 아이의 신발에서 소리가 크게 났어. 하지만 그 아이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어.“
“분명 카이가 틀림없어. 카이가 새 신발을 신고 있다는 거 알아. 할머니의 방에서 그 신발이 엄청 찍찍거리는 걸 나도 들었어.”
게르다가 말했다.
“아, 내내 소리가 났어. 하지만 그 아이는 공주에게 곧장 걸어가며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 공주는 물레만큼 커다란 진주 위에 앉아 있었지. 궁의 귀부인들과 조수들의 조수들의 조수들, 그리고 신하들과 신하들의 신하들의 조수들이 그곳에 서 있었어. 문에 가까이 서 있는 사람일수록, 그 표정은 더 오만했어. 문지방에 서 있는 시종의 시종의 시종은, 늘 실내화를 신었는데,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이었어.”
까마귀가 말했다.
“정말 끔찍했겠다! 그런데 카이는 공주와 결혼했어?”
게르다가 크게 소리쳤다.
“내가 까마귀가 아니었다면, 내가 공주와 결혼했을 거야. 나한테 약혼녀가 있어도 말이야.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애는 내가 까마귀 언어로 말할 때처럼 아주 유창하게 말을 했대. 내 사랑이 그렇게 말해줬어. 그 아이는 씩씩하고 잘 생겼어. 게다가 그 아이는 공주한테 알랑거리려는 게 아니라 공주의 지혜를 들으려고 왔어. 그 애는 공주가 마음에 들었고, 공주도 그 애가 마음에 들었어.”
“물론 카이는 정말 그래. 카이는 너무 똑똑해서 분수도 암산으로 할 수 있어. 아, 제발 날 그 성으로 데리고 가줘.”
게르다가 말했다.
“말이야 쉽지,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내 사랑과 한 번 이야기해볼게. 내 사랑이 어쩌면 뭔가 방법을 알려줄지도 몰라. 하지만 너처럼 어린 소녀는 절대 성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알아둬야 해.”`
까마귀가 말했다.
“아, 들어갈 수 있을걸. 카이가 내 소식을 들으면, 밖으로 나와 나를 당장 데리고 들어갈 거야.”
게르다가 말했다.
“저기 저 문 옆에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까마귀가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날아갔다.
어둠이 내려앉았을 때 까마귀가 돌아왔다.
“까악, 까악! 내 사랑이 너 칭찬하더라. 이 빵 한 조각 너 주래. 내 사랑이 이걸 부엌에서 찾아냈어. 거기에는 빵이 충분해. 너 배고프겠다. 넌 그 맨발로는 궁정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은빛 옷을 입은 보초와 금빛 옷을 입은 군인들이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울 필요는 없어. 우리는 방법을 찾아낼 테니까. 내 사랑이 침실로 곧장 통하는 계단을 알아. 그곳 열쇠를 어디에 두는지도 알고 있어.”
까마귀가 말했다.
이윽고 게르다와 까마귀는 정원으로 들어가 나뭇잎이 하나둘씩 떨어지는 넓은 산책로를 따라 걸어갔다. 궁정의 불빛이 하나둘씩 꺼질 때, 까마귀는 게르다를 이끌고 살짝 열려 있는 뒷문으로 갔다.
아, 게르다의 심장은 두려움과 그리움으로 마구 뛰었다. 뭔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정말 사랑스러운 카이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 틀림없이 카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의 반짝이는 눈빛과 긴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집에서 장미나무 아래 앉아 웃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렷이 기억났다. 카이는 게르다를 보면 정말 반가워할 것이다! 자신을 찾으러 이렇게 멀리까지 온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반가워할 것이다. 카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는 걸 알면 무척 반가울 것이다. 게르다는 두렵기도 기쁘기도 했다.
이제 둘은 계단을 올라갔다. 자그마한 등잔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까마귀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게르다를 보고는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게르다는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내 약혼자가 당신 이야기 많이 했어, 귀여운 소녀. 네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무척 감동적이야. 저 등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내가 앞장설게. 우리는 곧장 계속 가야 해. 그러면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을 거야.”
까마귀가 말했다.
“누군가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아.”
게르다가 말했다. 뭔가 휙 지나갔다. 벽에 드리운 그림자 같았다. 그림자가 가느다란 다리와 흔들리는 갈기의 말 모양으로 비쳤다. 거기에는 말에 올라탄 남자와 여자 사냥꾼의 그림자도 있었다.
“저건 꿈일 뿐이야. 왕실 주인들한테 사냥을 가자고 데리러 온 거야. 이건 오히려 다행이야. 이건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네가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 하지만 장담하는데, 네가 높은 지위와 권력에 오를 때, 너는 고마워하는 마음도 잊지 않을 거야.”
궁의 까마귀가 말했다.
“쯧 쯧! 그런 말 할 필요는 없어.”
숲에서 온 까마귀가 말했다.
이제 일행은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장밋빛 넓은 방이었다. 꿈 그림자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바람에 게르다는 귀족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계속 화려한 방이 이어져서 게르다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마침내 왕실 침실에 이르렀다.
침실 천장은 값비싼 유리 잎사귀가 달린 거대한 종려나무 가지 같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침대 두 개가 커다란 황금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침대는 백합 모양이었다. 하얀색 침대에 공주가 누워 있었다. 또 다른 침대는 빨간색이었다. 게르다는 카이를 찾으러 빨간 침대로 뛰어올랐다. 게르다가 진홍색 꽃잎 하나를 들춰보니 가느다란 갈색 목덜미가 보였다. 분명 카이임에 틀림없었다. 게르다는 카이의 이름을 외치며 등잔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말에 탄 꿈들이 다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잠에서 깨 고개를 돌린 사람은 카이가 아니었다.
왕자는 목만 카이를 닮았다. 왕자는 젊고 잘 생겼다. 공주가 백합처럼 하얀 자기 침대에서 밖을 내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게르다는 울면서 자신의 이야기, 까마귀들이 자신을 위해 해준 일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불쌍한 어린 것 같으니라고.”
왕자와 공주가 말했다. 둘은 까마귀들을 칭찬해 주었다.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더욱이, 까마귀들은 보상을 받아야 했다.
“어디든 마음대로 훨훨 날아가고 싶니? 아니면 궁의 까마귀가 되어 평생 부엌의 음식 찌꺼기를 먹고 싶니?”
공주가 물었다.
까마귀 두 마리는 고개를 깊이 숙여 부엌을 택했다. 이 둘은 자신들의 미래와, 자신들의 ‘늙은 나이’를 생각했을 때, 그게 훨씬 낫다고 말했다.
왕자는 침대에서 일어나 게르다에게 자기 침대에 누우라고 했다. 왕자가 베푸는 최고의 행동이었다. 게르다는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사람들도 동물들도 참 착하구나.’
게르다는 눈을 감고 평온하게 잠이 들었다. 꿈이 모두 다시 날아 돌아왔는데, 이들은 천사처럼 보였다. 천사들이 자그마한 썰매를 끌었는데, 그 썰매에 카이가 앉아 있었다. 카이가 게르다에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다. 그래서 꿈에서 깨었을 때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게르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실크와 벨벳 옷을 입었다. 공주와 왕자는 게르다에게 성에 머물며 멋진 시간을 보내라고 했지만, 게르다는 그 대신에 작은 마차 하나, 작은 말 하나, 작은 신발 한 짝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넓은 세상으로 달려 나가 카이를 찾겠다고 했다.
공주와 왕자는 신발 한 짝과 토시를 내주었다. 둘은 게르다를 아주 멋지게 입혔다. 게르다가 떠날 준비가 되자, 문 앞에는 황금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에는 왕자와 공주의 왕실 문장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마부와 하인 모두 황금 관을 쓰고 있었다. 왕자와 공주는 직접 게르다가 마차에 올라타게 도와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숲에서 만난 까마귀는, 이제 결혼을 했는데, 처음 약 3마일 정도 게르다와 함께 동행해 주었다. 뒤로 돌아앉으면 속이 안 좋았기에 게르다 옆에 앉았다. 궁의 까마귀는 문 옆에 서서 날개를 흔들었다. 그 까마귀는 부엌에서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아파 따라오지 않았다. 마차 안에는 달콤한 과자가 나란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좌석에는 과일과 진저브레드가 한가득 놓여 있었다.
“잘 가, 잘 가.”
왕자와 공주가 크게 외쳤다. 게르다는 울었다. 까마귀도 처음 몇 마일 동안 울었다. 이윽고 까마귀는 작별 인사를 했다. 정말 슬픈 이별이었다. 까마귀는 나무 위로 날아올라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커다란 검은 날개를 흔들었다. 마차는 햇빛 속에서 밝게 빛났다.
다섯 번째 이야기
산적의 딸
마차는 불타는 횃불처럼 어두운 숲으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몇몇 산적들 눈에 확 띄었다. 산적들은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금이다! 금이다!”
산적들은 소리쳤다. 그러고는 앞으로 내달려 말을 붙잡고 마부와 하인을 죽이고 어린 게르다를 마차에서 끌어냈다.
“정말 포동포동한 게 아주 예쁘네. 나무 열매를 아주 잘 먹어 살을 찌웠나 봐! 통통한 양 한 마리쯤 되겠어. 아주 맛있는 한 끼가 될 것 같은데!”
나이 든 여자 산적이 소리쳤다. 이 산적 얼굴에는 거친 수염이 길게 나고, 눈썹이 덤불처럼 무성했다. 산적은 이렇게 말하고는 무시무시하게 번쩍거리는 칼을 꺼냈다.
“아얏!”
문득 산적이 꽥 소리쳤다. 바로 그 순간, 산적의 딸이 귀를 물어뜯었다. 딸은, 산적의 등에 업혀 있었는데, 사납고 제멋대로 굴었다.
“이 짐승 같은 녀석!”
산적이 소리쳤다. 그 바람에 게르다에게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나 쟤랑 놀 거야. 저 아이가 나한테 입고 있는 저 옷하고 토시를 줄 거야. 내 침대에서 나랑 함께 잘래.”
산적 딸이 말했다. 그러고는 한 번 더 깨물었다. 산적은 너무 아파 펄쩍펄쩍 뛰었다. 다른 산적들도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꼬마를 업고 춤추는 저 꼴 좀 봐.”
“난 마차에 탈 거야.”
산적 딸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 딸은 제멋대로인데다 고집이 엄청 셌다. 산적 딸과 게르다는 마차에 타서 나무와 돌이 깔린 울퉁불퉁한 길을 지나 숲 깊숙이 들어갔다. 산적 딸의 키는 게르다 정도였지만, 힘이 훨씬 세고 어깨가 떡 벌어졌다. 갈색 피부에, 눈은 칠흑처럼 까맸는데 표정은 퍽 우울해 보였다. 산적 딸이 게르다를 껴안고 말했다.
“내 마음에 들면 사람들이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너 공주니?”
“아니, 아니야.”
게르다가 말했다. 게르다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줬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스러운 카이를 얼마나 걱정하는지도 말해줬다. 산적 딸은 게르다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내가 너한테 화가 나도, 사람들이 널 죽이지 못할 거야. 내가 너를 직접 죽일 테니까!”
그러고는 게르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자신의 두 손을 게르다의 부드럽고 따스한 토시에 찔러 넣었다.
마침내 마차가 산적이 사는 성 마당에 멈추었다. 성벽은 아래부터 위까지 쩍쩍 금이 가 갈라졌다. 까마귀와 갈까마귀들이 성벽에 뚫린 총구멍 사이로 날아다니고, 사람도 잡아먹을 정도로 커다란 개들이 공중에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짖는 게 금지되었기에 짖지 않았다.
돌이 깔리고, 연기 자욱한 낡은 방 한가운데에 불이 활활 타올랐다. 그 연기가 천장까지 차오르며 밖으로 나갈 길을 찾았다. 커다란 가마솥에는 수프가 펄펄 끓고, 꼬치에 토끼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너는 오늘 밤 나랑, 우리 동물들이랑 같이 잔다!”
산적 딸이 말했다. 실컷 먹고 마시고 나서, 둘은 지푸라기가 깔린 구석 자리로 갔다. 잠자리 주위로 나뭇가지와 횃대 위에 비둘기가 백 마리 정도 모여 있었다. 비둘기들은 잠이 든 것처럼 보였지만, 어린 소녀 둘이 가까이 다가오자 꿈틀거렸다.
“저 비둘기들은 모두 내 거야.”
산적 딸이 말했다. 옆에 있던 비둘기를 붙잡더니, 다리 하나를 잡고 흔들어대 마침내 비둘기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얘한테 입 맞춰.”
산적 딸이 소리치며 새를 게르다의 얼굴에 툭 던졌다.
“저 두 녀석은 몹쓸 장난꾸러기들이야. 숲의 장난꾸러기들이지. 저렇게 막아놓지 않으면 금세 달아나 버릴 거야.”
그러고는 저 높은 곳, 벽에 나무 막대기로 막아 놓은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내 단짝 친구 베에야.”
그러더니 순록의 뿔을 확 잡아당겼다. 순록의 목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구리 목걸이가 걸렸다.
“녀석을 잘 감시해야 해. 안 그러면 곧장 달아날 테니까. 매일 밤마다 나는 녀석의 목을 칼날로 간지럽혀. 그러면 녀석이 잔뜩 겁을 집어먹거든.”
산적 딸은 벽의 구멍에서 기다란 칼 하나를 꺼내 순록의 목에 겨누었다. 불쌍한 동물이 발버둥 치자 산적 딸은 마구 웃으며 게르다를 자기 침대로 끌어당겼다.
“자면서 계속 칼을 들고 있을 거야?”
게르다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난 언제나 칼을 들고 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고, 네가 어린 카이에 대해 아까 나한테 해준 말, 네가 넓은 세상을 방황한 이유에 대해 다시 말해줘.”
산적 딸이 말했다.
게르다는 이야기를 모두 다시 들려줬다. 그러는 사이 야생 비둘기들은 머리 위 새장에서 구구 울어대고, 집비둘기들은 잠이 들었다. 산적 딸은 한 손으로 게르다의 목을 움켜잡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꽉 쥔 채,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누구나 들을 수 있을 만큼 시끄럽게 코를 골았다. 하지만 게르다는 전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살아남을지 죽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산적들은 불가에 앉아 노래하고 마셔댔다. 그리고 나이 든 그 여자 산적은 재주넘기를 했다. 게르다가 보기에는 꽤 끔찍했다.
이윽고 숲비둘기가 말했다.
“구구. 구구. 우리가 카이를 봤어. 하얀 암탉이 그 아이 썰매를 끌었어. 카이는 눈의 여왕의 썰매에 앉아 있었어. 여왕의 썰매는 우리 둥지가 있는 나무 위까지 바짝 스쳐 지나갔어. 눈의 여왕은 어린 것들을 다 날려 죽여 버렸어. 우리만 살아남았어. 구구, 구구.”
“거기서 하는 말, 그게 무슨 말이야? 눈의 여왕은 어디로 갔어? 뭐 아는 거 없어?”
게르다가 소리쳐 물었다.
“눈의 여왕은 분명 라플란드로 갔을 거야. 거기는 늘 눈하고 얼음으로 덮여 있어. 네 옆에 묶여 있는 순록한데 물어보지그래?”
순록이 게르다한테 말했다.
“그래,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땅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어. 그 드넓고 반짝이는 들판을 맘대로 뛰어다닐 수 있지. 눈의 여왕은 거기에 여름 숙소가 있어. 하지만 여왕의 본거지는 북극 근처에 있는 성이야. 스핏스베르겐이라고 부르는 섬에 있지.”
“아, 카이, 사랑스러운 카이.”
게르다가 한숨지었다.
“잠자코 누워 있어. 안 그러면 칼로 네 배를 푹 찔러버릴 거야.”
산적 딸이 말했다.
아침에 게르다는 숲에 사는 비둘기들이 해준 말을 모두 산적 딸에게 들려줬다. 산적 딸은 곰곰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게 소리쳤다.
“나한테 맡겨! 나한테 맡겨!”
그러고는 순록에게 물었다.
“라플란드가 어디지 알아?”
순록이 두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난 그곳에서 태어났어. 그곳에서 자라고, 그곳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어. 눈밭을 가로질러 달렸지.”
“잘 들어! 너도 알다시피, 남자들이 다 갔어. 우리 엄마는 아직 이곳에 있어. 엄마는 계속 여기 있을 거야. 하지만 아침이 되기 전에 엄마는 저 커다란 병을 다 마셔버릴걸. 그러고는 보통 낮잠을 늘어지게 자지. 엄마가 잠이 들자마자, 내가 너한테 친절을 베풀어줄게.”
산적 딸이 게르다한테 말했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펄쩍 뛰어나와, 달려가 자기 엄마의 목을 감싸고, 엄마의 까칠까칠한 수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잘 잤수? 우리 사랑스러운 염소 아줌마.”
산적 딸의 엄마는 소녀의 코를 잡고 시뻘게질 때까지 비틀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순수한 사랑의 표시였다.
엄마가 병을 비우고 잠에 곯아떨어지자마자, 산적 딸은 순록에게 달려가 말했다.
“널 여기 계속 가둬두고, 이 날카로운 칼로 널 간지럽히고 싶어. 내가 그렇게 하면 넌 엄청 좋아하지.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내가 밧줄을 풀어 밖으로 빼내줄게. 그러면 라플란드로 돌아갈 수 있어. 이 아이의 소꿉친구가 있다는 눈의 여왕의 성까지 이 애를 데리고 가야 해. 이 애가 나한테 한 말을 너도 분명 들어서 알지. 이 애가 엄청 큰 소리로 말해서 너도 엿듣고 있었으니까.”
순록은 허공으로 뛰어갈 생각에 무척 기뻤다. 산적 딸은 게르다를 순록 등에 태우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힌 다음 작은 쿠션 하나를 주기까지 했다.
“아직 안 끝났어. 여기, 거지 같은 털신발 받아. 거기는 엄청 추울 테니까. 토시는 내가 가질게. 왜냐하면 너무 예쁘거든. 하지만 네 손가락이 동상에 걸리면 안 되겠지. 이거, 우리 엄마 장갑이야. 네 팔꿈치까지 올라갈 거야. 이거 껴. 이제 네 손이 우리 못생긴 엄마의 큼지막한 손처럼 보이네.”
게르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징징 우는 거 못 봐주겠네! 이제 행복해 보여야지. 여기, 빵 두 조각이랑 햄 받아. 이거면 굶어죽지는 않을걸.”
산적 딸이 말했다.
빵과 햄을 순록의 등에 묶고는, 산적 딸은 문을 열고 커다란 개들을 모두 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칼로 순록을 묶은 밧줄을 툭 끊고는 순록에게 말했다.
“이제 달려가. 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잘 돌봐야 해.”
게르다는 커다란 장갑 낀 손을 산적 딸에게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이윽고 순록이 펄쩍 뛰어갔다. 나무와 자갈 위로, 드넓은 숲을 가로지르며 습지를 넘어 평원을 힘껏 달렸다. 늑대가 짖어대고, 갈까마귀가 울어댔다. 하늘이 이리저리 환하게 빛났다. 누군가 훌쩍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내 친구 오로라야. 저 아름다운 빛 좀 봐.”
순록이 말했다. 그러고는 밤이고 낮이고 더 빨리 달려갔다. 빵과 햄을 다 먹었다. 이제 드디어 라플란드에 도착했다.
여섯 번째 이야기
라프족 여인과 핀족 여인
순록은 작은 오두막 앞에서 멈췄다. 그곳은 대충 지은 허름한 집이었다. 지붕은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고, 문은 너무 낮아서 식구들은 납작 엎드려 기어서 드나들어야 했다. 집에는 늙은 라프족 여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 여인은 고래 기름 등잔에 생선을 굽고 있었다. 순록은 그 여인에게 게르다의 이야기를 모두 들려줬다. 하지만 그전에 자기 이야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이야기부터 들려줬다. 게다가, 게르다는 너무 추워서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아, 이 불쌍한 것 같으니라고.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았어. 아, 핀마크로 가려면 몇 백 마일은 더 가야 해. 거기에서 눈의 여왕이 휴가를 보내며 매일 밤마다 파란색 불꽃을 불태우고 있지. 내가 말린 대구 위에 전갈을 적어줄게. 내겐 종이가 없거든. 그 전갈을 저기 위쪽에 사는 핀족 여인한테 가지고 가. 그 여자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네게 알려줄 수 있을 거야.”
라프족 여인이 말했다.
게르다가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요기를 하고 나자, 라프족 여인은 말린 대구에 몇 자 적고 잘 가지고 가라고 당부했다. 그러고는 게르다를 다시 순록의 등에 단단히 묶어주었다. 순록은 다시 달렸다. 밤새도록 하늘은 탁탁 숙쉭 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선사했다. 마침내 핀마크에 도착해, 핀족 여인의 집 굴뚝을 두드렸다. 문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집은 무척 뜨거웠다. 그래서 핀족 여인은 거의 벌거벗은 채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몸집이 작고 더러운 그 여자는 곧장 게르다가 장갑과 신발과 옷을 벗도록 도와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 안에서 버티기 힘들었다. 그러고 나서 여자는 순록의 머리 위에 얼음조각 하나를 올려놓고는 대구에 적힌 글을 읽었다. 그걸 세 번 읽고 외운 다음에 대구를 수프 냄비에 넣었다. 대구는 먹을 만했다. 여자는 뭐든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었다.
순록은 그 여자한테 자신의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고 어린 게르다 이야기를 했다. 핀족 여인은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록이 말했다.
“당신은 엄청 현명한 분이군요. 당신이 목화 실로 세상의 바람을 모조리 묶을 수 있다는 거 난 알아요. 뱃사람이 매듭을 풀면, 우리가 좋아하는 바람이 불어요. 또 다른 매듭을 풀면 강풍을 맞을 수 있고, 만약 세 번째, 네 번째 매듭을 풀면 숲속 나무를 쓰러트릴 정도로 엄청난 강풍이 불어요. 이 어린 소녀에게 마실 것을 좀 줄 수 없나요? 이 아이를 남자 열두 명만큼 강하게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그래야 눈의 여왕을 이길 수 있을 테니까요.”
“남자 열두 명이라. 정말 그럴듯하군.”
핀족 여인이 툴툴거렸다.
여자는 선반으로 가, 돌돌 만 커다란 짐승 가죽을 내려 펼쳤다. 그 가죽에는 희한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자는 그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마에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순록은 게르다를 도와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게르다는 애처로운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여자는 다시 눈을 깜빡였다. 여자는 순록을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순록의 머리에 얼음조각 하나를 또 올려주며 속삭였다.
“카이는 정말 눈의 여왕과 함께 있어. 거기 모든 게 그 아이한테 아주 잘 맞아. 그 아이는 그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소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건 그 아이 심장에 유리 조각이, 눈에 작은 유리 조각이 박혀있기 때문이야. 그 유리 조각들을 빼내지 않으면, 그 아이는 다시는 인간이 될 수 없을 거야. 눈의 여왕은 엄청난 힘으로 그 아이를 계속 붙잡아둘 거야.”
“게르다에게 뭔가 마실 걸 당신이 만들어줄 수는 없나요? 전부 다 상대할 힘을 줄 수 없나요?”
“내가 저 애한테 줄 수 있는 힘은 저 아이가 지금 이미 갖고 있는 힘보다 크지 않아. 인간과 짐승들이 저 아이를 도우려 하는 거 안 보이니? 이 넓은 세상에서 저 아이가 애초에 맨발로 이렇게나 멀리까지 온 게 안 보여? 우리는 저 아이한테 그 힘에 대해 말하는 안 돼. 그 힘은 저 아이 마음속에 들어 있어. 저 아이는 아주 사랑스럽고 순수하거든. 저 아이가 직접 눈의 여왕한테 가서 어린 카이에게서 그 유리 조각을 빼낼 수 없다면, 우리가 저 아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넌 저 어린 소녀를 그곳에 데리고 가, 눈에서 자라는 붉은 베리로 뒤덮인 커다란 관목에 내려놓아야 해. 그러고 나서 거기 서서 수다나 떨지 말고 얼른 이곳으로 와.”
핀족 여인은 어린 게르다를 순록 위에 들어 올렸다. 순록은 있는 힘껏 달려갔다.
“아! 신발과 장갑을 깜빡하고 놓고 왔네.”
게르다가 소리쳤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신발과 장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하지만 순록은 감히 멈추려 하지 않았다. 순록은 전속력으로 달려 마침내 붉은 베리가 뒤덮인 커다란 관목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순록은 게르다를 내려놓고 입을 맞추었다. 얼굴에는 반짝이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힘껏 달려 되돌아왔다. 게르다는 신발과 장갑도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핀마크 한가운데 서 있었다.
게르다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눈송이가 게르다를 향해 휘몰아쳤다. 하지만 그 눈송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오로라가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송이가 땅으로 휘몰아쳤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커졌다. 게르다는 돋보기로 눈송이를 보았을 때 무척 크고 기이해 보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에서 눈송이는 훨씬 더 괴기스럽고 으스스했다. 눈송이는 살아 있었다. 이 눈송이는 눈의 여왕의 선발대로, 정말 기괴한 모양이었다. 너무 많이 자란 흉측한 호저를 닮은 것도 있었다. 어떤 건 똬리를 튼 뱀처럼 생겼는데, 사방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털을 죄다 곤두세운 뚱뚱한 어린 곰처럼 생긴 눈송이도 있었다. 모두 하얗게 반짝반짝 빛났다. 모두 살아 있는 눈송이였다.
너무 추웠다. 게르다가 주의 기도를 읊조리자 입김이 구름처럼 눈앞에서 꽁꽁 얼었다. 구름은 점점 더 짙어지며 작은 천사들의 모습이 되었다. 연기구름이 땅에 닿으며 점점 더 커져갔다. 천사들은 모두 머리에 투구를 쓰고 손에는 방패와 창을 들었다. 점점 더 늘어났다. 게르다가 기도를 마치자, 한 무리 천사들이 게르다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사들은 창으로 끔찍한 눈송이들을 찌르고, 수천 조각으로 베어버렸다. 게르다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경쾌하게 걸어갔다. 천사들이 게르다의 손과 발을 비벼 따뜻하게 해주었다. 게르다는 눈의 여왕의 궁전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카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야 한다. 게르다는 카이의 마음속에서 아주 멀리 밀려났다. 카이는 게르다가 궁전 밖에 왔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일곱 번째 이야기
눈의 여왕의 궁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그리고 그 뒷이야기
성벽은 휘몰아치는 눈으로, 창문과 문은 살을 에는 듯한 바람으로 지었다. 성에는 백 개도 넘는 방이 있었는데, 그 방은 바람에 휩쓸려온 눈으로 만들었다. 가장 큰 방은 수 마일 뻗어 있었다. 방마다 오로라의 불꽃으로 환했다. 모두 엄청 크고 모두 텅 비었다. 모두 얼음장처럼 춥고 모두 화려했다! 즐거움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북극곰이 폭풍의 음악에 맞춰 뒷발로 어기적어기적 걸으며 최고의 예의범절을 과시하는 그런 사소한 춤도 없었다. 눈먼 곰의 가죽 또는 새끼들을 위해 수건을 숨기는 놀이를 하는 조촐한 파티도 열리지 않았다. 암컷 흰여우들이 수다를 떨어대는 오후의 조촐한 커피 모임도 없었다. 눈의 여왕의 방은 다 텅 비고, 크고, 추웠다. 오로라는 규칙적으로 빛을 내, 언제 가장 높고 언제 가장 낮을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드넓고, 텅 빈 눈의 방 한가운데 꽁꽁 언 호수가 하나 있었다. 호수는 수천 조각으로 금이 가 있었지만, 각각의 조각은 똑같은 모양이었다. 마치 위대한 장인의 작품처럼 보였다. 눈의 여왕은 집에 있을 때 그 호수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이것을 ‘이성의 거울’ 위에 앉는다고 말했다. 이 거울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최고의 물건이라고 했다.
카이는 추위에 온몸이 새파랗게 변해 거의 시커메졌다. 하지만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눈의 여왕이 입을 맞추어 떨지 않게 해주었다. 또한 카이의 심장은 거의 얼음으로 변해 버렸다.
카이는 뾰쪽하고 납작한 얼음조각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패턴으로 맞추려 했다. 우리가 집에서 하는, 자그맣고 납작한 나뭇조각들을 특정한 디자인으로 꿰맞추는 중국 퍼즐 게임과 비슷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 게임에서 조각을 교묘하게 늘어놓았다. 눈에 박힌 유리 조각 때문에 그 패턴들이 눈에 확 들어오고 가장 중요해 보였다. 카이는 조각을 배열해 수많은 단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나 맞추고 싶어 하는 한 가지 단어는 결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 단어는 ‘영원’이었다. 눈의 여왕은 카이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네가 알아맞히면, 넌 너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어. 그럼 내가 너한테 이 세상을 주겠다. 그리고 스케이트 한 벌도 새로 주지.”
하지만 카이는 그걸 알아맞힐 수 없었다.
“난 이제 따뜻한 나라로 날아가겠다. 검은 가마솥을 들여다봐야 해.”
눈의 여왕이 카이에게 말했다. 검은 가마솥이란 에트나 화산과 베수비오 화산을 뜻했다.
“살짝 하얗게 칠해야 해. 그래야 하거든. 그러면 오렌지하고 포도나무가 마음을 푹 놓을 거야.”
그러고는 날아가 버렸다. 카이는 그 텅 빈 얼음장 방 안에 혼자 앉아 얼음조각으로 퍼즐을 맞추었다. 머리에서 딱딱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하도 꼿꼿하게 잠자코 앉아 있어서 누군가는 마치 얼어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불현듯, 게르다가 살을 에는 바람의 그 큰 문을 지나 성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게르다가 저녁 기도를 읊자 바람이 잦아들었다. 게르다는 차갑고 텅 빈 넓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카이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를 한눈에 알아봤다. 얼른 달려가 품에 안았다. 카이를 꼭 껴안고 울부짖었다.
“카이, 사랑하는 카이! 마침내 널 찾았어!”
하지만 카이는 꼼짝 않은 채 꼿꼿하고 차갑게 앉아 있었다. 게르다는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이 카이의 몸에 떨어져 곧장 심장으로 들어갔다. 그 눈물이 얼음덩어리를 녹이고 그 안에 박힌 유리 조각을 태워 없앴다. 카이는 게르다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게르다가 노래했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카이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니 눈에 박힌 작은 유리 조각이 씻겨 나왔다.
“게르다! 우리 사랑스러운 게르다, 이렇게 오랫동안 어디 갔었던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카이는 게르다를 알아보고는 행복에 겨워 소리쳤다. 이윽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어 말했다.
“여기 정말 춥다! 엄청 넓고 아무것도 없어!”
카이는 게르다를 꼭 안았다. 게르다는 웃었다. 마침내 행복한 눈물이 게르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들의 행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유리 조각조차 곁에서 춤을 추며 행복을 함께 나누었다. 유리 조각은 점차 지쳐갔다. 이제 하나의 패턴으로 떨어지며 눈의 여왕이 카이에게 말했던 바로 그 단어를 만들었다. 카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온 세상과 새 스케이트 한 짝을 얻기 위해 찾아야만 하는 바로 그 단어를…….
게르다는 카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뺨이 다시 발그레해졌다. 게르다는 카이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 카이의 눈이 게르다의 눈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게르다는 카이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다. 카이는 다시 튼튼하고 건강해졌다. 눈의 여왕은 이제 언제든 내킬 때 돌아올지 모른다. 카이를 풀어준 말이 얼음덩이에 적혀 있었다.
카이와 게르다는 손을 맞잡고 거대한 성을 느릿느릿 빠져나왔다. 둘은 할머니에 대해, 지붕 위의 장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걸을 때마다 바람이 멎고 태양이 비쳤다. 빨간 베리로 뒤덮인 관목에 이르자, 대기하고 있던 순록이 두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순록은 사랑스러운 순록 짝과 함께 있었는데, 그 순록에게는 이 아이들이 마실 수 있는 따뜻한 우유가 있었다. 순록이 아이들에게 입을 맞춰주었다. 이윽고 이 순록들이 게르다와 카이를 태우고 먼저 핀족 여인에게로 갔다. 아이들은 그곳 뜨거운 방에서 몸을 녹였다. 핀족 여인이 집으로 가는 방향을 알려주었다. 아이들은 라프족 여인에게로 갔다. 라프족 여인은 이들에게 새 옷을 만들어주고, 썰매를 태워주었다.
순록 두 마리는 함께 북쪽 끝까지 나란히 달렸다. 이제 처음으로 초록 봉우리가 보였다. 이곳에서 카이와 게르다는 순록 두 마리와 라프족 여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안녕.”
작은 새들이 처음으로 짹짹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 숲에는 이제 초록 봉우리가 가득했다. 문득, 숲에서 말을 탄 소녀가 당당하게 나왔다. 게르다는 그 말을 알아봤다. 그 말은 한때 황금 마차를 몰았었다. 말에 탄 소녀는 머리에 빨간색 모자를 쓰고, 허리춤에는 권총 두 자루를 차고 있었다. 바로 그 산적의 딸이었다. 산적 딸은 집에 있는 게 지겨워져, 북극 나라로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그곳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세상은 넓으니 산적 딸이 갈 수 있는 곳은 널려 있었다. 산적 딸은 게르다를 한눈에 알아봤다. 게르다 또한 산적 딸을 알아봤다. 즐거운 만남이었다.
산적 딸이 카이에게 말했다.
“너 돌아다니는데 일가견이 있구나. 누군가 널 위해 지구 끝까지 달려갈 만한 가치가 너한테 있는지 정말 알고 싶네.”
하지만 게르다는 산적 딸의 뺨을 토닥이며 왕자와 공주에 대해 물었다.
“둘은 외국으로 여행 중이야.”
게르다에게 알려주었다.
“까마귀는?”
“아, 까마귀는 죽었어. 까마귀의 사랑이 이제 혼자가 되었어. 그 까마귀는 검은 양털 조각을 다리에 두르고 있어. 자기 연민에 빠졌어. 모두 터무니없는 짓이야. 이제 네 이야기 좀 해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카이를 찾아냈는지.”
산적 딸이 말했다.
게르다와 카이는 산적 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이쿠, 얼씨구. 그럼 다 잘 되었네.”
산적 딸은 악수를 나누고, 둘의 마을을 지나가게 되면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말을 타고 떠나갔다.
카이와 게르다는 손을 꼭 잡았다. 길을 걷는 내내 화창한 봄 날씨가 이어졌다. 땅은 초록으로 물들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교회 종소리가 울리고, 커다란 마을의 높은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둘이 살던 마을이다. 게르다와 카이는 곧장 할머니 집으로 걸어가 계단을 올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게 떠나올 때와 똑같았다. 시계가 째깍거리고, 시곗바늘이 시간을 알려줬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선 순간, 한 가지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지붕 위 장미가 보였다. 작은 의자 두 개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카이와 게르다는 그 의자에 앉아, 서로 손을 꼭 잡았다. 둘 모두 마치 몹쓸 꿈이었던 것처럼, 눈의 여왕이 살던 궁정의 차갑고 호화로운 텅 빈 공간을 까맣게 잊었다. 할머니는 신의 선한 햇빛을 받으며 자리에 앉아 성서를 읽어주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카이와 게르다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둘은 자신들이 부르던 오랜 성가의 뜻을 마침내 깨달았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둘은 이제 어른이 되어 그곳에 앉았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이였다. 이제 여름이 되었다. 따뜻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름이었다.
옮긴이 약력 : 김선희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공부했습니다. 소설 『십자수』로 근로자문화예술제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뮌헨국제청소년도서관(IYL)에서 펠로십(Fellowship)으로 어린이 및 청소년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현재 <김선희’s 언택트 번역교실>을 진행하며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토머스 모어가 상상한 꿈의 나라, 유토피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윔피 키드」 「드래곤 길들이기」 「위저드 오브원스」 「멀린」 시리즈, 『생리를 시작한 너에게』 『팍스』 『두리틀 박사의 바다 여행』 『공부의 배신』 『난생처음 북클럽』 『베서니와 괴물의 묘약』등 200여 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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