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 안데르센
by 송화은율반응형
눈사람 / 안데르센 |
'내 몸에서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네! 참으로 추운 날씨야. 야호, 이 시원한 바람을 쐬면 정말 살아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낀다니까.' 눈사람은 추운 날씨를 좋아하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게 무얼까?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정말 아름다워.' 눈사람은 하늘의 해님을 쳐다보며 부러워 했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해님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눈사람의 얼굴에는 삼각형 돌멩이가 두 개 박혀 있는데, 그것이 눈입니다. 그리고 소나무 가지로 입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까지 나 있습니다. '어, 저건 뭐야?' 눈사람이 계속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이번에는 둥근 달이 둥실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반대 쪽에서 나타나네! 그래도 저 녀석은 나를 노려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달은 아주 크고 둥근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 얼마든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 보아도 좋아. 나도 네 모습을 자세히 볼테니까. 그런데 참 이상해.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을까? 나도 움직일 수 있다면 아이들처럼 썰매를 탈 수 있어 참 좋을텐데……. 하지만 난 움직이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눈사람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쇠사슬에 묶여있던 늙은 개 한 마리가 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얼마 있으면 해님이 너에게 움직이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거야." 그 개는 원래 방 안에서 키워졌을 때부터 쉰 목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야?" "나는 작년에 네 형들이 해님에게 가르침 받는 것을 보았거든. 움직이는 방법을 말야. 그래서 결국 모두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만……." 눈사람으로서는 개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통 모르겠어. 저 하늘의 저것이 나에게 움직이고 달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구?" "그럼." "그래 맞아. 조금 전에 내가 한참 노려 보니까, 자꾸만 저 녀석은 달려갔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지금은 또 다른 곳에서 살짝 나타났잖아." 눈사람이 '저 녀석'이라 한 것은 바로 달님이었습니다. 개가 말해 주었습니다. "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는 거야. 저 하늘의 것은 달님이고 좀 전에 네가 본 것은 해님이라고 해. 해님은 내일 아침에 다시 떠올라 너에게 시냇물 건너는 방법을 가르쳐 줄 거야. 그건 그렇고, 이젠 날씨가 몹시 추워지나 봐." "무슨 얘기인지 통 모르겠구나. 아까 반짝반짝 빛내다가 사라진 것이 해님이라고 했지? 하지만 해님은 내 좋은 친구가 아닌 것 같애." "멈멍멍." 쇠사슬에 묶여있던 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정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자, 안개가 온통 피어오르더니 바람이 세게 불어왔습니다. 이윽고 해님이 떠오르면서 아침이 밝자, 눈덮힌 세상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새하얀 산호성처럼 보였고 나무가지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하얀 꽃이 활짝 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땅 위에 쌓인 눈은 대리석을 깔아놓은 듯했고, 새하얀 작은 불꽃들이 셀 수도 없이 아름답게 빛을 냈습니다. 그런데 젊은 아가씨와 젊은 남자가 나타나더니 겨울 눈경치를 보며 기분좋아 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을 여름에 어찌 볼 수 있겠어." 아가씨가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이 눈사람도 여름엔 전혀 볼 수가 없지. 누가 만들어 놓았을까?" 아가씨와 남자는 팔짱을 끼고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걸어갔습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너는 이 집에서 오래 살았으니까, 저 사람들을 알고 있겠구나." 눈사람이 개에게 물었습니다. "그야. 물론이지. 저 아가씨는 나를 귀여워해 주었고 저 남자는 나에게 맛있는 뼈를 갖다주곤 했으니까. 그래서 난 저 두 사람 만큼은 절대 물지 않아." "누군데?" "저 두 사람은 약혼자야. 인제 두 사람은 같은 집에 살면서 같은 고기뼈를 먹게 될 거야." "그럼 저 사람들은 우리와 똑같은 거니?" "이런, 저 사람들은 우리의 주인이야. 넌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나는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아서 이 집의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거든. 지금은 비록 이렇게 추운 곳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말야. 예전에는 방안에서 살았지." "추우니까 신나잖아. 계속해서 이야기 좀 해 줘. 그런데 그 놈의 쇠사슬 소리는 내지 말았으면 딱 좋겠어. 아주 몸서리가 쳐지거든." "그래 알았어. 멍멍멍." "말해 봐." "나도 예전엔 예쁜 강아지였어. 그때는 아주 예쁜 의자 위에서 자기도 하고, 주인 무릎 위에서 자기도 했지. 사람들은 나에게 입맞춤을 했고, 예쁜 손수건으로 내 발을 닦아주기도 했거든. 그런데 내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에 하녀의 방으로 보내지게 됐단다. 저기 보이잖아." 개는 대문 안의 반지하로 된 방을 가리켰습니다. "아, 저 방에서 살았어?" "저 방에서 나는 하녀와 함께 살았어. 좀 춥긴 했지만 오히려 주인 방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야. 아이들에게 시달리지도 않았고, 전과 마찬가지로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었거든. 따뜻한 난로도 있었지. 난로는 이렇게 추운 날씨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거야. 난로 옆에 드러누우면 기분이 최고지. 아, 그때가 참 좋았는데……. 제기랄, 내 신세야!" "난로라는 게 그렇게 예쁘니? 그러면 나를 꼭 닮았겠구나." 난로를 본 적이 없는 눈사람으로서는 그것이 예쁜 소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개는 잠시 코웃음을 치더니 난로에 대해 더 말해 주었습니다. "너와는 전혀 반대야. 숯처럼 새까맣고, 목은 학처럼 길고, 몸통은 놋쇠로 되어 있지. 장작을 먹으면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와. 그러면 기분이 최고야. 저 창문 너머로 난로가 보이잖아. 잘 보라구." 눈사람은 방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놋쇠 난로가 반짝반짝 윤을 내며 서 있고 난로 아래 쪽에서는 새빨간 불이 눈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눈사람은 야릇한 흥분이 일었습니다. 가슴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너는 왜 저 방에서 나오게 된 거니? 왜 저렇게 좋은 곳을 나오게 됐냐구?" 눈사람은 난로야말로 예쁜 소녀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다가 실수를 했고, 이렇게 밖으로 쫓겨난 거야. 이렇게 쇠사슬에 묶이고 말야. 왜냐하면, 이 집 막내 아들이 내가 맛있게 먹고 있던 뼈다귀를 걷어차길래 너무 화가 나 그 녀석 발을 살짝 물었거든. 이에는 이, 뼈다귀에는 뼈다귀로 앙갚음을 해준 거지. 그런데 그 때부터 모두가 나를 미워하더라구." "안 됐구나!" "결국 이렇게 쇠사슬에 묶이고 그 아름답던 내 목소리는 영 엉망이 되어 버렸지. 나를 풀어달라고 애원을 하다보니 목소리가 아예 쉬어버린 거야. 멍멍멍. 이젠 모든 것이 끝장난 거야." 눈사람은 개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난로가 있는 방을 꼼짝없이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난로가 너무나 좋아 보였습니다. "이상하게 자꾸 가슴이 설레네. 내가 저 방에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단 하나의 소원인데……. 그래, 어떻게 해도 안된다면 저 창문을 깨고서라도 난로 곁으로 갈 거야." 눈사람은 단단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가 타일렀습니다. "넌 저 곳에 들어가면 안돼. 너는 금방 녹아버릴 거고, 그럼 너도 끝장이야." "녹아버려도 상관 없어. 아, 내 가슴이 터질 것 같애." 눈사람은 하루 종일 방안을 쳐다 보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방안의 모습은 더욱 잘 보였습니다, 잔잔한 불빛이 새어나오며 눈사람의 가슴을 더 한층 설레이게 했고 새빨갛게 물드는 듯 했습니다. '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저렇게 빨간 혀를 내미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긴 겨울 밤이지만 눈사람은 지루한 줄 몰랐습니다. 밤새도록 눈사람은 황홀한 상상에 빠졌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자, 차가운 바람이 쉴새없이 몰아쳤습니다. 그래서인지 난로가 있는 방안 유리창에 하얗게 성애가 끼었습니다. 참으로 추운 날씨였고, 추운 날씨란 원래 눈사람이 좋아하는 날씨인 것입니다. '그러나 난 조금도 기쁘지 않아.' 예전같으면 너무나 행복하게 느꼈을 추위지만, 그 추위로 인해 유리창에 성애가 끼고 그래서 난로가 보이지 않자, 눈사람은 추위가 너무 싫었습니다. 개가 제 집에서 나오며 또 타일렀습니다. "너는 지금 나쁜 병에 걸렸어. 눈사람이 난로를 그리워 한다구? 멍멍멍. 말도 안되는 일이야. 모두 잊어 버려." 점심 때가 되자 날씨는 따뜻하게 변했습니다. 눈사람은 이제 슬슬 녹기 시작하여 불평조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버렸습니다. "아, 내 몸이 어떻게 되는 거야!" "녹는 거지. 멍멍멍." 따뜻한 날씨가 며칠 간 계속 되자 눈사람은 드디어 무너져 버렸습니다. 눈사람이 서 있던 곳에는 눈사람 대신 쇠꼬챙이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그 쇠꼬챙이에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쇠사슬에 묶인 개가 중얼거렸습니다. "이제야 눈사람이 왜 그렇게 난로를 그리워했는지 알겠군. 눈사람의 몸 속에는 난로와 함께 사는 쇠꼬챙이가 있었기 때문이야. 그것이 눈사람의 몸에서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거지. 그렇지만 가엾게도 이젠 모든 것이 끝장이군. 멍멍멍!" 개는 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진 이상 그 누구도 이젠 눈사람을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김문기/동화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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