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by 송화은율
녹이상제 살지게 먹여
녹이상제와 같은 명마를 살찌게 먹여 시냇물에 씻겨서 타고, 용천설악과 같은 보검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메고, 대장부의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러운 절개를 세워 보려 하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최영(崔瑩) 갈래 : 평시조. 단시조. 정형시 율격 : 3(4)·4조. 4음보 성격 : 호기가(豪氣歌), 남성적, 의지적, 직서적 표현 : 대유법, 대구법 제재 : 명마(名馬)와 보검(寶劍) 주제 : 위국충절(爲國忠節) 출전 : 가곡원류 내용 연구 綠 (녹이) : 주(周)나라 목왕의 준마 霜蹄(상제) : 굽에 흰 털이 나는 좋은 말 綠 霜蹄(녹이상제) : '좋은 말'의 대유 살지게 : 살찌게 싯겨 타고 : 씻겨 타고 龍泉(용천) : 보검의 이름 雪鍔(설악) : 날카로운 칼날 龍泉雪鍔(용천설악) : '좋은 칼'의 대유 들게 갈아 : 잘 들게 갈아서 두러메고 : 둘러메고 丈夫(장부) : 사내답고 씩씩한 남자 爲國忠節(위국충절) : 나라를 위하는 충성스러운 절개 이해와 감상 최영은 공민왕 때 홍건적으로 물리치고,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치는 등 빛나는 공로를 세웠고,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할 때 최영은 팔도도통사로 정명군(征明軍)을 일으키는 등 고려 왕조의 최후를 지키는 자랑스런 기상을 보여 주었다. 초장과 중장은 준마(綠 霜蹄)와 보검(龍泉雪鍔)을 소재로 해서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겠다는 무인(武人)의 호기(豪氣)를 대구법에 의한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 종장에서는 위국 충절을 다짐하는 주제가 돋보인다. 변함 없이 충성을 다하겠다는 장군의 기상이 담긴 호기가(豪氣歌)이다. 이 시조에는 하루에 천 리나 달린다는 준마를 타고, 용천검을 갖춘 대장부의 늠름한 기상과 무인으로서의 기개를 한껏 펼치고자 한 지은이의 우국(憂國) 충정(忠情)이 숨김없이 나타나 있다. 지은이의 이러한 무인다운 호기(豪氣)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처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내가 사는 동안 한 번이라도 내 욕심을 채우려 하였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것이오.'라고 할 정도로 꿋꿋했으며, 지은이가 죽은 뒤 정말 그의 무덤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나지 않아 그의 무덤을 가리켜 적분(赤墳 : 붉은 무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심화 자료 최영(崔瑩)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고려 후기의 명장·재상. 본관은 창원(昌原).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풍채가 괴걸하고 힘이 뛰어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우달치〔于達赤 : 司門人〕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다. 그 때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가오유〔高郵〕 등지에서 싸웠다. 1355년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莊)에서 싸워 용맹을 떨친 뒤 돌아왔다. 이듬해부터 고려가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자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 인당(印槻)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 : 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해 격파하였다. 1359년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西京)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와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등지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듬해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를 거쳐 그 이듬해 서북면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1361년에 홍건적 10만 명이 다시 침입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우·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훈(勳) 1등에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이 되었고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이어 양광도진변사(楊廣道鎭邊使)를 겸하였다가 도순문사를 겸하였다. 1363년에는 김용(金鏞)이 공민왕을 시해하려 했던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을 평정시켰다. 그 공으로 훈 1등에 진충분의좌명공신(盡忠奮義佐命功臣)이 되었고, 이어 판밀직사사 평리(判密直司事評理)를 거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덕흥군(德興君 : 충선왕의 셋째아들)을 왕으로 받들고 군사 1만 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선주(宣州 : 평안북도 선천)에 웅거하였다. 이에 서북면도순위사(西北面都巡慰使)로서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수주(隨州 :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싸워 물리쳤다. 또, 연주(延州 : 평안북도 운산)에 침입한 동녕로만호(東寧路萬戶) 박백야대(朴伯也大)를 장수를 보내 격퇴시켰다. 이듬해 교동(喬桐)·강화(江華)에 왜구가 출몰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東江)에 나가 지켰다. 이 때 신돈(辛旽)의 참소로 계림윤(鷄林尹)으로 좌천되었다가 귀양길에 올랐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6년 만에 풀려나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1373년에는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있으면서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였다. 또, 나이 70세 이상인 사람들로부터 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1374년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가 되었을 때, 육도도순찰사 시절에 6도를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 해 명나라가 제주도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는데,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왔다. 이에 제주도를 치기로 하고,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을 지휘, 제주도를 평정하였다. 그리고 1375년(우왕 1)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1376년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한 왜구에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 때 노구를 이끌고 출정하기를 자원하여 홍산(鴻山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377년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한편, 왕으로 하여금 교동·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여 군자(軍資)에 충당하게 하였다. 이 무렵 왜구가 침입하여 개성을 위협하므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군사로서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 : 지금의 淵德)에 침입하자, 이성계·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섬멸하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80년에는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렸다. 이 때 왕은 공을 기록한 철권(鐵券)과 공을 치하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듬해 아버지에게는 순충아량염검보세익찬공신(純忠雅亮廉儉輔世翊贊功臣)·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판문하사(判門下事)·영예문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상호군(上護軍)·동원부원군(東原府院君)이 증직되고, 어머니 지씨(智氏)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이 되었다. 그 자신은 수시중(守侍中)이 되었다가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고,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에 올랐다. 1388년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왕의 밀령(密令)으로 부패와 횡포가 심하던 염흥방·임견미(林堅味)와 그 일당을 숙청하였다. 그 해 그의 딸이 우왕의 비(寧妃)가 되었다. 이 때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고 철령 이북과 이서·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요동정벌을 결심하고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한편,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로 하여금 군사 3만 8,800여 명으로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하여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기세가 오른 이성계의 막강한 원정군을 막지 못하여 결국 도성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는 고려 말기의 군벌(軍閥) 대립에서 고려왕조를 수호하려는 구파 군벌이 고려왕조를 부정하려는 신진 군벌에게 패배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강직용맹하고 청렴했던 그는 이성계에게 잡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충주로 옮겨졌다가 공료죄(攻遼罪 : 요동을 공격한 죄)로 개성에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고, 그 해 12월에 참수(斬首)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개성 사람들은 저자의 문을 닫고 슬퍼하였으며, 온 백성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다. 개풍군(開淵郡) 덕물산(德物山)에 있는 그의 무덤은 풀이 나지 않는다 하여 적분(赤墳)으로 불린다. 그 산 위에는 장군당(將軍堂)이 있어 무당들에게 숭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崔瑩(金庠基, 朝鮮名人傳, 朝鮮日報社, 1939), 崔瑩(閔丙河,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6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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