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노잔유기/ 해설 / 류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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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어의 '노잔유기'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울음으로 시작해 울음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다연암 박지원은 드넓은 요동벌을 만나 한바탕 통곡할 만한 곳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조선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지평선 사라지는 드넓은 벌 앞에서 그는 왜 통곡하고 싶다고 했을까울음은 영성(靈性)에서 나온 것이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이다짐승들은 결코 울 줄 모른다영성은 감정을 낳고감정은 울음을 낳는다울음에도 약한 울음과 강한 울음이 있으니울음에 의하지 않은 울음이야 말로 참으로 강한 울음인 것이다요동벌과 마주하여 조선의 숨막히는 현실을 아파한 연암의 울음이 그런 울음이요제국주의의 침탈 앞에 쇠잔해가던 청나라의 현실을 아파한 류어의 울음이 또한 그런 울음이었다

 

`노잔유기(老殘遊記)'는 류어(●,1857-1909) 1903년에 발표한 소설이다그는 이 소설 서두에서 `울음론'을 들고 나와이미 판이 끝나가는 중국의 암울한 현실을 통곡하는 취지로 이 소설을 집필했음을 밝히고 있다노잔이란 늙고 힘없는 사람이란 뜻이요유기란 여행자의 기록이다그러니 이 책은 늙어 힘없는 관찰자가 각처를 떠돌아다니며 견문한 사실을 적은 여행의 기록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노잔즉 라오찬은 요령을 흔들면서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병을 고쳐주는 떠돌이 의사다그는 중국 각처를 편력하면서 견문했던 당시 청나라의 사회상을 풍자하고 비판한다상징과 비유의 함축으로 이뤄진 소설 속의 이야기는 전아한 고문투의 유려한 문체와 사실적이면서도 정감 넘치는 묘사로 독자를 흡인하는 힘이 있다루쉰(魯迅)은 그의 `중국소설사략'에서 청말의 4대 견책소설(譴責小說)의 하나로 이 작품을 꼽았고후스(胡適)는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필치에 경탄한 바 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이와 비슷한 제목의 수많은 위작(僞作)들이 쏟아져나왔으니 그 당시의 인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그런데 작자 류어에게 이 작품은 유일한 소설이었고오히려 그는 치수학(治水學)과 갑골학에 대단한 식견과 조예를 지녔던 학자였다뒤에 위안스카이 정부를 비판한 죄로 신장(新疆)으로 유배가 거기에서 세상을 떴다

 

이 소설은 잡지에 연재된 뒤 한권의 책으로 출간됐는데매회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이 전개돼 독자를 작품 속으로 몰입케 하는 흡인력이 있다첫 대목에는 부호 황루이훠를 치료하는 이야기가 나온다온몸이 썩어가는 병에 걸린 그는 해마다 몇 군데씩 썩어 구멍이 생기고올해 치료하고 나면 다음해에는 다른 곳이 썩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다여기에 나오는 황루이훠는 황허(黃河)를 상징하고그의 몸에 생기는 구멍을 치료하는 일은 황허의 치수를 상징한다실제 그는 1888년 황허 범람때 직접 제방 공사를 진두지휘하여 치수에 크게 성공하였고이듬해 산둥(山東) 수재때에도 치수 공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일이 있다

 

또 두 사람의 친구와 함께 일출 구경을 위해 바다로 나가는 장면에서 성난 파도에 휩쓸려 표류하는 큰 배를 묘사한 대목이 나온다이는 당시 전운이 감돌던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과 서구 열강의 침탈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중국 현실에 대한 암유로 읽힌다작품 속에 나오는 자신의 청렴을 앞세워 백성들을 가혹하게 괴롭히는 혹리(酷吏) 이야기도 당대 현실에서 실제 인물들을 모델로 한 것이다스스로 정의롭다는 잘못된 자기확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을 숨막히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일은 비단 그때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이밖에 겨울철 꽁꽁 언 황하에 갇힌 배를 꺼내려고 밤새 혹한 속에 얼음을 깨는 백성들의 고초며몸을 파는 기녀들의 입을 통해 신랄하게 펼쳐지는 지식인들의 허위에 대한 폭로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폭력을 휘두르다 경을 치르는 쑹 공자 이야기 등은 모두 그 시대 현실을 다양한 창으로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매력은 이러한 현실풍자와 비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선쯔핑이라는 등장인물이 산골 처녀와 나누는 대화에서는 유불도(儒佛道) 3교를 넘나드는 고담준론이 펼쳐진다이 대목에서 발휘되는 저자의 호한하고도 해박한 식견은 아마 학술논문으로 정리한다 해도 이 책을 통해 요약되는 이상의 논의를 얻기 어려울 정도다또한 현실에 물들지 않은 아름다운 여인들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과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하나 둘 해결해나가는 라오찬의 심려 깊고 슬기로운 처신은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통쾌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이 작품은 고문투에 가까운 전아한 문체로 이뤄져 있다그런데도 전혀 고리타분하지 않고설교투도 아니다구시대의 소설임에도 읽는 재미는 오늘날의 소설에 조금도 밑돌지 않는다무엇보다 묘사의 치밀함과 서사의 파란은 읽는 동안 계속 영상으로 각각의 장면들을 뚜렷히 떠오르게 한다

 

라오찬은 지혜의 스승이면서 문제 해결사 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나 현실의 벽 앞에서 그는 결국 본질적인 문제 해결의 길을 외면한 채 속세를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그가 개탄했던 문제들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올해에도 양쯔(揚子)강 범람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중국 인민들에게 안겨주었고관리들은 탐욕에 젖어 구복(口腹)을 채우기에 급급하다그것이 어찌 중국만의 일이겠는가세상은 참으로 알 수 없다까마득한 옛날의 일인데도그것은 바로 목전의 일이기도 하다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도는 것이 세상 일이다

 

모든 새로운 것들은 나오는 즉시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이 현란한 삶의 속도 속에서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참으로 울고 싶은 암담한 현실 앞에서울음으로 울지 않는 `큰 울음'을 같이 울어줄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이 책은 `라오찬여행기'란 제목으로 지난 해 솔출판사에서 간행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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