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인의 방문 / 뒤렌마트
by 송화은율노부인의 방문 / 뒤렌마트
(전략)
클레어 : 시장님 귈렌 시민 여러분이 저의 방문에 대해서 보여 준 사심 없는 즐거움에 저는 감격했어요. 하지만 시장님의 연설에 나타나 있는 제 어릴 때의 모습은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늘 매질을 당했고 과부인 볼에게 준 감자는 실은 일 씨와 공동 작업으로 훔친 것이었고, 그 늙은 뚜쟁이 여편네에겐 굶어 죽지 말라고 준 것이 아니라 콘라쯔바일러 숲 속이나 페터씨네 창고 속보다도 더욱 편안한 침대에서 일 씨와 같이 자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즐거움에 보답하고자 저는 이 자리에서 귈렌 시를 위해 10억을 기꺼이 희사하겠다는 것을 천명하겠습니다. 5억은 시를 위해서 그리고 5억은 각 가정에 분배하도록 하겠습니다. (죽음 같은 정적)
시장 : (말을 더듬거리며) 10억이라구. (모든 사람이 여전히 넋을 잃고 있다.)
클레어 :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는 환호성을 터뜨린다. 춤을 추며 돌아가고 의자 위에 올라서고 체조 선수는 운동을 하는 등등. 일 씨는 감격해서 가슴을 북 치듯 한다.)
일: 옛날 그대로의 클라라야. 그럴듯하군 희한한 일이야. 우습게 됐군. 정말 옛날 그대로 내가 사랑하던 마녀에 틀림없어.
(그는 그 여자의 입을 맞춘다.)
시장 : 한가지 조건이라고 하셨지요? 그 조건을 여쭈어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클레어 : 그러면 제가 그 조건을 말하겠어요. 저는 여러분께 10억을 희사하는 대가로 정의를 사고자 합니다.
(죽음 같은 정적)
시장 : 무슨 말씀이신가요 부인?
클레어 : 무엇이든지 살 수 있지요.
시장 : 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클레어 : 보비 앞으로 나와요.
(집사가 오른쪽에서 세 개의 식탁 사이로 해서 중앙으로 나와 검은 안경을 벗는다.)
집사 : 여러분 중에 아직도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사 : 부장 판사 호오퍼 씨로군요.
집사 : 옳습니다. 내가 부장 판사 호오퍼요. 나는 45년 전에 귈렌에서 부장 판사를 지냈고 그 후 피겐의 고등 법원으로 갔었으며 그 곳에선 나는 짜하나시안 부인한테서 집사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을 때까지 봉직했었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는 좀 이상한 경력이긴 하지만 내가 받는 봉급이 아주 엄청난 것이어서…….
클레어 : 본론을 말해요. 보비.
집사 : 여러분이 들으신 바와 같이 클레어 짜하나시안은 10억 원을 제공하고 그 대신 정의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클레어 짜하나시안 부인은 부인이 귈렌에서 당했던 부정을 여러분이 다시 시정해 주신다면 10억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실례지만 일 씨. (일은 일어선다. 창백하다. 겁을 내고 놀라고 있다.)
일 : 저를 어쩌자는 것이지요?
집사 : 일 씨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일 : 좋소.
(그는 식탁 앞 오른쪽으로 나온다. 당황한 표정으로 웃는다. 어깨를 추어올린다.)
집사 : 1910년의 일이었습니다. 본인은 귈렌의 부장 판사였는데 친자 관계인지 소송을 심리(審理)하게 되었었습니다. 클레어 짜하나시안 그 당시의 이름인 클라라 베쉬는 일 씨 바로 당신을 자기가 난 아이의 아버지라고 고발했었습니다. (일 씨는 가만히 있다.) 일 씨 당신은 그런데 당시 그 부자 관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었습니다. 당신은 증인 두 사람을 데리고 왔었습니다.
일 : 다 옛날 얘기가 아니오. 난 젊고 철이 없었소.
클레어 : 토비 그리고 로비, 코비와 로비를 불러내요.
(껌을 씹던 두 거인은 두 사람의 눈 먼 고자(鼓子)를 무대 중앙으로 데리고 나온다. 그들은 즐거운 듯 손을 맞잡고 있다.)
두 장님 : 우리는 코비와 로비야. 우리는 코비와 로비야.
일 : 나는 저자들을 모르오.
두 장님 : 우리는 변했다오. 우리는 변했다오.
집사 : 너희들은 이름을 대 봐라.
첫째 장님 : 야곱 휜라인예요. 야곱 휜라인예요.
둘째 장님 : 루드비히 슈팔예요. 루드비히 슈팔예요.
집사 : 자 일 씨.
일 : 저자들에 대해선 난 전혀 아는 바가 없소.
집사 : 야곱 휜라인, 루드비히 슈팔 너희들은 이 일 씨를 알고 있나?
두 장님 : 우리는 장님예요. 우리는 장님예요.
집사 : 저 사람의 목소리로 그 사람을 알겠는가?
두 장님 : 그 사람의 목소리지요. 저 사람의 목소리지요.
집사 : 1910년에 본인은 재판관이었고 너희들은 증인이었다. 루드비히 슈팔, 야곱 휜라인, 너희는 귈렌 법정에서 무슨 맹세를 했었지?
두 장님 : 클라라하고 동침했다고 했어요. 클라라하고 동침했다고 했어요.
집사 : 그렇다고 너희들이 본인 앞에서 맹세했었다. 재판정에서 하느님 앞에서 그것이 사실이었던가?
두 장님 : 우리는 거짓 맹세를 했었습니다. 우리는 거짓 맹세를 했었습니다.
집사 : 그 이유는 뭐였지? 루드비히 슈팔, 그리고 야곱 휜라인.
두 장님 : 일 씨가 우리를 매수했어요. 일 씨가 우리를 매수했어요.
집사 : 무엇으로?
두 장님 : 소주 한 되로요. 소주 한 되로요.
클레어 :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했는지 이제 얘기해요. 코비와 로비.
집사 : 자 얘기를 해라.
두 장님 : 부인은 우리들을 찾아내게 하셨지요. 부인은 우리들을 찾아내게 하셨지요.
집사 : 그렇다. 클레어 짜하나시안은 너희들을 찾아내도록 했었다. 전 세계를 뒤졌다. 야곱 휜라인은 캐나다로 루드비히 슈팔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를 했었지. 그렇지만 부인은 너희들을 찾아냈다.
두 장님 : 우리한테 토비와 로비를 주셨어요. 우리한테 토비와 로비를 주셨어요.
집사 : 그리고 토비와 로비는 너희들을 어떻게 했지?
두 장님 : 고자를 만들고 장님을 만들었어요. 고자를 만들고 장님을 만들었어요.
집사 : 바로 이것이 진상입니다. 판사와 피고 그리고 두 사람의 위증자 그래서 1910년에 한 가지 오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
클레어 : 그렇게 되었어요.
일 : (발을 구르며) 시효가 소멸된 것이이오. 모조리 시효가 지난 것이에요. 낡고 미치광이 같은 얘기란 말예요.
집사 : 어린아이는 어떻게 되었지요, 부인?
클레어 : (낮은 목소리로) 1년밖에 살지 못했어요.
집사 : 부인께선 어떻게 되셨지요?
클레어 : 저는 창녀가 되었어요.
집사 : 그 이유는?
클레어 : 법원의 판결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요.
집사 : 클레어 짜하나시안 부인 그래서 이제 부인은 정의를 원하시는 것입니까?
클레어 : 이젠 나도 정의를 성취할 수 있겠어요. 누가 알프렛 일을 죽인다면 귈렌을 위해서 10억을 내어 놓겠어요.
(죽음 같은 정적. 일 씨의 부인이 일 씨한테 달려들어 부둥켜 안는다.)
일의 아내 : 알프렛!
일 : 이 귀여운 마녀 같으니라구. 당신이 그런 요구를 감히 할 수가 있소? 시간이 벌써 흘러간 지가 오랜데 말이오!
클레어 : 시간은 흘렀어요. 하지만 저는 하나도 잊질 않았어요. 일 콘라쯔바일러의 숲도 페터씨네 창고도 과부 볼네 침실도 그리고 당신의 배신도 잊질 않았어요. 이제 우리는 늙었지요. 당신이나 나나 말예요. 당신은 영락(零落)했고 제 몸뚱이는 외과들에 의해 난도질을 당했어요. 그래서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 서로간의 결산을 하자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자유롭게 선택했지만 제게는 제 인생을 걸도록 당신이 강요했어요. 당신은 아까 우리들의 청춘 시절의 숲 속에서 시간이 지양(止揚)되기를 원했었지요. 무상한 기분에 흠뻑 젖어서 말예요. 이제 저는 그 시간을 지양시킨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정의를 원하는 거고요. 10억에 대한 대가로 정의를 원하는 거예요.
(시장이 일어선다. 창백하지만 위엄을 보이며)
시장 : 짜하나시안 부인 우리는 아직도 유럽 천지에 살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올씨다. 저는 귈렌 시의 이름으로 그 제안을 거절하는 바입니다. 인간성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피를 보기보다는 차라리 가난한 대로 살아가겠습니다.
(굉장한 박수 갈채)
클레어 : 전 기다리겠어요.
(후략)
요점 정리
작가 :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 1921∼1990)
갈래 : 희곡
성격 : 풍자적, 희비극, 역설적
제재 : 노부인의 방문
주제 : 금전 만능 의식에 대한 비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게 타락하는 인간의 물신주의적 사고 방식에 대한 환멸
특징 : 기괴성을 이용한 표현,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작품의 저류에 흐름
작가의 작품 경향 : 생동력 넘치는 활력과 효과력이 강한 무대적 상상력을 지니고, 독특하고 비인습적인 경향을 지닌 재능 있는 극작가로 전통적 비극을 부정, 부조리연극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관객에게 충격을 주는 기발한 착상과 탐정적 소재를 즐겨 취급하고, 직접적인 상징을 통해 관중의 비평적 태도를 위한 소외효과를 노린다.
줄거리 ; 미국에서 대부호가 된 고급 창녀인 클래어 차하나시안은 나이가 들어 고향 방문한다. 실연의 슬픔을 안고 떠났던 몰락해 가는 고향 귈렌 시를 30여 년 만에 찾아온다. 그녀는 젊은 시절 이곳에서 청년 일(Ill)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배신을 당해 육체적·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적이 있다. 그래서 그녀의 방문 목적은 일(ILL)의 목숨을 빼앗는 데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일의 배신으로 그녀는 실연을 당하게 되고, 당시 일의 아기를 가졌던 그녀는 친부 확인 소송을 제기 했지만 일에 의해 매수된 두 증인의 위증으로 패소하였다. 그 결과 그녀는 귈렌 시를 떠나 창녀로 전락하게 되고 아이는 죽게 된다. 나중에 그녀는 백만장자와 결혼하여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부인이 되고 일도 부잣집 딸과 결혼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귈렌 시를 도와주는 대신의 일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며 그녀는 이것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이 도시에서 10억 마르크를 기부하면서 45년 전에 자신에게 등을 돌렸던 정의를 사려고 한다. 그녀는 고향 사람들에게, 배신하였던 옛 애인 일 씨를 살해하면 10억 마르크를 내놓겠다고 제의한다.
파산한 귈렌 시는 노부인에게 경제적 도움을 기대하나 처음에는 귈렌 시장을 비롯한 시민들은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시의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고 일의 가게에 지게 된 시민들의 빚이 늘어나자 귈렌 시민들은 일의 죽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결국 살인이 저질러지고 그 살인 행위가 민주적인 절차까지 거쳐 진행된다. 그리고 그 부인은 일 씨의 시체를 가지고 고향 도시를 떠나고 사람들은 시의 복지와 번영에 감사하는 노래를 부른다.
내용 연구
브라보! 이 근육! - 죽인 적도 있나요? : 차하나시안이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는 화려한 환영 행사보다는 일에 대한 복수에만 관심이 있다.
클라라는 유머가 - 저런 재담 ! : 자신의 목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지 모르는 일은 차하나시안의 말을 유머로 해석한다. 그럼으로써 사건의 미묘한 분위기가 창출된다.
우리는 아직도 유럽에 살고 있습니다 : 차하나시안의 제안이 매우 야만적이라는 지적과 아울러 자신들이 비록 가난하지만 문 명을 존중하는 문화인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기다리겠어요 : 지금은 자신의 제의를 꺼림칙하게 여길지 모르나 언젠가는 이 제의를 받아들일 거라고 확신한다는 의미이다. 제안을 받아들일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 오라는 뜻이다.
이해와 감상
뒤렌마트는 뛰어난 소설들을 여러 편 썼지만 오늘날 극작가로서 더 높게 평가되고 있는데, 처음에는 라디오 방송극을 여러 편 쓰다가 3막극 '노부인의 방문'이 나오면서 일약 세계적인 극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56년 발표되어, 1950년대 말 취리히에서 초연된 작품으로, 한국에서는 1968년 12월 극단 '가교(架橋)'에 의해서 초연되었고, 그 후에도 다투어 무대에 올랐다. 뒤렌마트는 인생은 무의미하며 인간은 쉽게 타락하는 존재로 본다. 그의 희곡에는 권력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가 등장한다.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의식하고 일생 동안 뭔가를 성취하려 들지만 그런 노력은 죽음의 공허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과, 권력은 선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면서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소유한 자에 의해서 타락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노부인의 방문'은 뒤렌마트를 세계적인 희곡 작가로 발돋움시킨 작품으로 그는 이 작품에서 인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얼마나 쉽게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며, 인간 정신에 대한 그 자신의 환멸을 드러내고 있다.
심화 자료
작가 뒤렌마트의 작품 후기
뒤렌마트의 '노부인의 방문'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상연된 작품으로서, 특히 미국에서는 'The Visit'로 알려져 있다. 외관상으로는 순전한 비유처럼 보이는, 그것도 마치 전후의 독일이 마아셜 플랜으로 부흥하는 과정을 비유극으로서 다루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는 이 작품의 후기에서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클레어 짜하나시안은 정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그 노부인은 있는 그대로의 여자다. 그 여자는 그리스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며, 마치 운명의 여신처럼 절대적이고 잔인하다. 그 여자는 그것을 즐길 수가 있다. 그래서 유머가 있다. 그 여자는 인간에 대해서 상품처럼 거리를 가지고 있고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거리를 가지고 있다. 기묘한 우아, 악의적인 매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질서의 테두리 밖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화석이 되거나 우상이 되지 않으면 변화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그 여자는 시적인 선상에 있으며 그 수행원도 고자들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재현하는데 있어서 사실주의적으로 무덤덤하게, 고자의 음성으로 할 것이 아니라 비현실적으로 동화처럼 조용하게 유령처럼 하여야 한다. 클레어 짜하나시안이 냉정한 태도를 취하게 되자 옛 애인인 일 씨가 주인공으로 바뀐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희생이 되며 생활 속에서 모든 것이 말살되었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남자다. 그러나 비로소 공포와 경악을 통해서 최고의 개성적인 것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정의를 체험하게 되고,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위대해지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위대한 동시에 무의미하다. 주인공들과 더불어 귈렌 시민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모두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다. 그들의 행동은 일 씨를 죽이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며 그저 경솔하고 모든 것이 곧 잘되리라는 허망한 생각을 가졌을 뿐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노부인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차차 빚을 지게 된다. 제2막은 그렇게 상연되어야 한다. 페터씨 네 창고의 장면에서 방향이 전환된다. 숙명은 그 이상 회피할 수 없다. 그 때부터 귈렌 시민은 서서히 살인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끝까지 인간적인 약점에서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 전 시민이, 이 작품에서 유혹에 빠졌던 학교 교사처럼 점점 유혹에 빠져 들어가는데 이 점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빈곤은 너무나도 혹독하고, 유혹은 커서, 약한 인간들은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악의에 찬 상연이 되어서는 안 되며, 분노가 아니라, 비애와 유머가 뒤섞인 인간적인 상연이 되어야 한다. 그런 것이 비극으로 끝나는 이 희곡에 있어서 가장 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진지성이기 때문이다.”
차하나시안의 정의
이 작품의 중심 이야기는 차하나시안이 내놓은 제안이 어떻게 실현되는가이다. 그 제안이 갖는 비인간적인 성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힘 앞에 무력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상황이 대조를 이룬다. 일에게 처참히 짓밟힌 기억이 있는 차하나시안은 일의 목숨을 대가로 1,000억을 내놓는다. 차하나시안은 자신에게 큰 고통을 안겨준 일의 죽음만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용서와 화해보다는 죄에 대한 응분의 대가만이 정의인 것이다. 차하나시안은 과거의 재판 과정에서 위증을 했던 코비롸 로비를 노비로 사들여 장님과 고자로 만든 일이 있다. 이 역시 차하나시안의 정의는 돈의 정의이기도 한다. 과거 일과의 재판 과정에서 차하나시안은 진신을 밝히는데 실패했다. 그녀에게 재판은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녀는 돈만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뒤렌마트(Friedrich Durrenmatt)
1921. 1. 5 스위스 베른 근처 코놀핑겐~1990. 12. 14 뇌샤텔.
스위스의 극작가로 그의 희비극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독일의 연극 부흥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33~45년 운좋게도 나치의 침략을 받지 않은 유일한 독일어 사용국이었던 스위스에서 자라, 취리히와 베른에서 공부했다. 스위스는 당시 독일 연극이 번창했던 유일한 곳으로, 뒤렌마트와 그와 같은 독일인인 막스 프리쉬는, 독일어권의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혁신적인 독일 연극을 보고 배울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추방된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아, 우화를 사용하고 해설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할에서 있는 배우들을 등장시키는한 걸음 나아간 연기를 할 수 있게 하는 등의 기법을 썼다. 뒤렌마트는 세계를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고 보았으며 인간적 상황의 기괴하고도 소름끼치는 극단적 양상들을 아무런 해석 없이 단지 제시할 뿐이었다.
그의 극들은 흔히 이상한 배경을 갖는다. 첫 희곡 〈그것은 쓰여 있다 Es steht geschrieben〉(1947 공연 및 출판)는 1534~36년에 있었던 뮌스터 시의 재침례교도 탄압에 관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장님 Der Blinde〉(1948 공연, 1960 출판)·〈로물루스 대제 Romulus der Grosse〉(1949 공연, 1958 출판)에서처럼, 역사적 사실들이 희극적 자유로 변용되어 있다. 구식 멜로드라마로 가장한 진지한 희곡 〈미시시피 씨의 결혼 Die Ehe des Herrn Mississippi〉(1952 공연 및 출판)은 그의 세계적 명성을 수립했으며, 미국에서는 1958년 〈바보들의 행진 Fools Are Passing Through〉으로 공연되었다. 뒤이어 나온 작품들로는 〈노부인의 방문 Der Besuch der alten Dame〉(1956 공연 및 출판), 보통 그의 최고작으로 일컬어지는 과학에 관한 현대적 도덕우화극 〈물리학자들 Die Physiker〉(1962 공연 및 출판)·〈혹성의 초상화 Portrat eines Planeten〉(1970 공연, 1971 출판) 등이 있다. 1970년 뒤렌마트는 "연극을 위해 문학을 포기하겠다"고 밝혔으며, 잘 알려진 작품의 각색 이외에는 더 이상 희곡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희곡뿐만 아니라 추리소설, 라디오 극본, 평론 등도 썼다.
뒤렌마트의 세계 인식
뒤렌마트는 인생은 무의미하며, 인간은 쉽게 타락하는 존재로 본다. 그의 희곡은 권력과 죽음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은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을 의식하고 일생 동안 뭔가를 성취하려 들지만 그런 노력은 죽음의 공허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과, 권력은 선을 위하여 창조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소유한 자의 타락에 의해서 스스로 타락하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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