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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삼긴 사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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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삼긴 사람

 

노래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 근심과 걱정이 많기도 많구나.

말로 하려 하나 다 못 하여 (노래로) 풀었단 말인가?

진실로 풀린 것이면 나도 불러 보고 싶구나.

 

노래를 처음으로 만든 이는 시름도 많기도 많았겠구나.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 노래를 불러 풀었단 말인가.

진실로 이렇게 하여 풀릴 것이라면 나도 불러 보리라.

요점 정리

작자 : 신흠(申欽)

갈래 : 평시조

성격 : 영물가(詠物歌)

표현 : 연쇄법

제재 : 노래

주제 : 노래를 통해 시름을 풀어 보고자 하는 마음

출전 : 진본 청구영언(珍本靑丘永言)

내용 연구

삼긴 : 만든

하도할샤 : 많기도 많구나

닐러 다 못닐러 : 말로 하려 하나 다 못하여.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의 병을 겉으로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심정을 의미한다.

풀릴 거시면은 : (근심과 걱정이 노래로) 풀리는 것이라면

다음에 제시된 시조는 문학 작품의 창작 동기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을 중심으로 문학의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자.

지도 방법 : 이 활동은 구체적 작품의 내용을 바탕으로 문학의 기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는 활동이다. 개인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는 문학의 기능 중 어떤 쪽이 강조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특히 시조에서 '풀어 준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음에 유의하도록 지도한다.

풀이 : 문학은 정서의 순화를 통해 개인의 삶의 질을 고양시켜 준다.

이해와 감상

 

'신흠'의 시조는 우리 삶에서 '노래'의 역할을 잘 드러냈다. 살면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시름을 그냥 말로는 풀 수 없어서 등장한 것이 노래[詩]라는 것이다.

 

어지러운 당쟁과 광해군의 난정(亂政) 속에서 삼공(三公)의 벼슬을 지낸 작자는,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체득했을 것이다. 작자는 그런 벼슬을 내던지고 자연으로 돌아와 자연을 사랑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속을 떠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그래서 노래로써 그것을 풀 수 있다면 나도 불러 보겠다고 한 것이다.

심화 자료

신흠의 시조

 

조선 인조 때 영의정까지 지낸 작가가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벼슬살이를 마치고 은퇴하여 자연을 벗삼아 세속을 떠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 근심, 걱정을 노래로써 풀어 보고자 하는 소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에는 우리 삶에서 '노래'의 역할을 잘 드러냈다. 살면서 필연적으로 생기게 마련인 시름, 걱정을 그냥 말로는 풀 수 없어서 등장한 것이 노래(時調)라는 것이다.

신흠(申欽)

 

1566(명종 21)∼1628(인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상촌(象村)·현옹(玄翁)·방옹(放翁). 증판서 세경(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영(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승서(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기수(麒壽)의 딸이다.

 

송인수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585년(선조 18)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1586년 승사랑(承仕郎)으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1583년에 외숙인 송응개(宋應漑)가 이이(李珥)를 비판하는 탄핵문을 보고 “이이는 사림(士林)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장악한 동인으로부터 이이의 당여(黨與 : 정치적인 견해를 같이하는 집단 또는 사람)라는 배척을 받아 겨우 종9품직인 성균관학유에 제수되었다. 그 뒤 곧 경원훈도(慶源訓導)로 나갔으며 광주훈도(廣州訓導)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다.

1589년 춘추관 관원에 뽑히면서 예문관봉교·사헌부감찰·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의 배척으로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이어 도체찰사(都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했으며, 그 공로로 지평(持平)에 승진되었다.

1593년 이조좌랑에 체직,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 제작의 필요와 함께 지제교(知製敎)·승문원교감을 겸대하였다. 1594년 이조정랑으로서 역적 송유진(宋儒眞)의 옥사를 다스리고 그 공로로 가자되면서 사복시첨정으로 승진했으며, 곧 집의(執義)에 초수(超授 : 뛰어넘어 제수됨)되었다. 같은 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 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로로 군기시정에 제수되었다.

1595년 함경도어사와 의정부사인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성균관사예(成均館詞藝)·종부시정·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홍문관교리·홍문관응교·의정부사인·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99년 선조의 총애를 받아 장남 익성(翊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되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형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병조참지·우부승지·이조참의·예조참의·대사간·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01년 ≪춘추제씨전 春秋諸氏傳≫을 합찬(合纂)한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되고 곧 예문관제학이 되었다. 1602년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으로 좌천되었다가 곧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거쳐 예조참판에 발탁되었다.

이어서 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도승지·예문관제학·병조참판·도승지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604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면서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상호군(上護軍)·경기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애책문(宣祖哀冊文 : 선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짓고 한성부판윤·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세자의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으며, 1610년에는 동지경연사·동지성균관사·예문관대제학을 겸대하였다.

그러나 1613년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인 까닭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616년 인목대비 (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김제남(金悌男)에의 가죄(加罪 : 죄를 더함)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으며 1621년에 사면되었다.

1623년(인조 즉위년) 3월 인조의 즉위와 함께 이조판서 겸 예문관·홍문관의 대제학에 중용되었다. 같은 해 7월에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좌의정으로서 세자를 수행하고 전주에 피난했으며, 같은 해 9월 영의정에 올랐다가 죽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문명을 떨쳤다. 벼슬에 나가서는 서인인 이이와 정철을 옹호하여 동인의 배척을 받았으나, 장중하고 간결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선조의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문한직(文翰職)을 겸대하고 대명외교문서의 제작, 시문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문운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사림의 신망을 받음은 물론,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학의 정종(正宗 : 바른 종통) 또는 월상계택(月象谿澤 : 月沙 이정구, 象村 신흠, 谿谷 장유, 澤堂 이식을 일컬음)으로 칭송되었다.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년(효종 2)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 및 편서로 ≪상촌집≫·≪야언 野言≫ 등과 〈현헌선생화도시 玄軒先生和陶詩〉·〈낙민루기 樂民樓記〉·〈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 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황화집령 皇華集令〉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月沙集, 芝峯集, 象村集.(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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