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여성

by 송화은율
반응형

남자를 위해 만들어지는 여성

- 박완서

 

 

라디오 방송의 낮 시간대는 거의 여성을 위한 시간이고, 그 시간의 청취율은 대단히 높은 것 같다. 집에서 의식적으로 듣지 않더라도, 외출해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려면 저절로 듣게 된다. 우선,버스나 택시 운전기사의 대부분은 남자이건만 승객의 기호엔 아랑곳없이 그 시간을 일방적으로 서비스해 준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각 국마다 여성 청취자들의 편지를 읽어주는 시간이고, 답지하는 편지의 양도 막대한 걸로 알고 있다. 여성들이 집 안에서 속상하는 일을 속으로만 다스려 가슴앓이를 만들거나, 기뻤던 일을 우물가에서 조심스럽게 자랑하지 않고, 매스컴이라는 나팔치고도 어머어마하게 큰 나팔 --- 온나라에 울려퍼지게 큰 나팔로 불러대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는 건 실로 놀라운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말하고 또 남의 생각을 듣는다는 건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나 자기 발전을 위해서 매우 유익한 방법이다. 남성시간은 없는데 여성시간은 있어서, 이런 대화의 광장을 마련해 주고 또 그게 크게 환영받아 꾸준히 성업중이라는 건 여성에 대한 특혜라기보다는 그밖에 다른 방면에서 주어지는 여성 발언의 기회가 너무 인색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 뜻으로 그런 시간은 매우 고무적인 어떤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시간에 보내 온 편지 내용을 조금만 귀 기울여 들어면 낯 간지러울 적이 많다. 거듭 말하거니와 매스컴이란 매우 큰 나팔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안 울려펴지는 데가 없다. 조그만 일에 기쁨이나 슬픔을 느낀 얘기도 좋지만 우물가에서 해도 눈총을 맞을 소리는 곤란하다.

 

남편의 일거수 일투족에 흐렸다 개었다 속상했다 풀렸다 하는 얘기는 우물가에서, 요샌 우물가도 혼치 않으니까 전화통 정도 붙들고 자랑을 하든지 푸념을 하든지 하는 정도면 족하지 않을까?

 

매스컴'이라는 큰 나팔을 통해 불려면 크고 거창한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아무리 작은 기쁨, 작은 슬픔이라도 집의 울타리를 넘어야 할 타당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누고 싶은 생활의 지혜라든지 듣는 사람이 같이 기뻐하거나 속상해 해줄 공동의 문제, 사회성 같은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런 게 없는 전혀 사사로운 얘기도 재미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두 번이라면 몰라도 허구헌 날 그런 얘기를 듣는다는 건 짜증스럽기도 하다. 행복에 겨운 얘기 중엔 흡사 애완동물이 주인의 애무를 받고 교성을 지르는 걸 듣는 것처럼 민망한 것도 적지 않다.

 

여자들이란 온종일 밥 먹고 생각하는 것이 미혼이면 적당한 남자를 잡는 것, 기혼이면 남편의 사랑을 놓치지 않도록 기교와 전략을 짜고 저녁엔 무슨 반찬을 해놓고 무슨 옷을 입고 남편을 기다릴까'가 전부인 것 같은 나팔을 허구헌 날 불어댄다는 건 남성과 여성에게 동시에 미치는 세뇌작용이 막강할 줄 안다. 여성의 인간화는 커녕 인간적인 고민이나 자기 나름의 주장, 사회적인 관심을 가진 여성도 스스로 주제넘는 것 같아 자제하게 될 수도, 남성들은 옳다구나 그런 여성을 무슨 괴물처럼 기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행동규범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매스컴에 동의(同意)함이 적지 않음을 생각할 때, 이런 여성시간이 여성 모두를 애완동물로 퇴행시킬 우려조차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모처럼의 발언의 기회요, 또 처음 가져보는 큰 나팔을 슬기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여성 자신의 각성과 매스컴의 제작 태도 반성이 아쉽다.

 

라디오의 여성시간만이 아니라 텔리비젼 화면이나 신문에서도 여성들의 발언을 자주 대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제일 민망한 건 남편에 대한 존대말이다. 결혼한 지 채 일 년도 안돼 보이는 애티나는 새댁이 화면에 나와 아빠가 이러시구저러시구, 진지를 잡수시고, 말씀을 하시고 등등 최고급의 존대말을 쓰는 걸 들으면 얼른 꺼버리고 싶어진다.

 

심지어는 극중에서도 새며느리가 시부모 앞에서 서방님께서 말씀하시고' ‘진지 잡수시고' ‘안 계시고' 하는 투로 말하는 것도 봤다.

 

남존여비가 철저했을 적에도 아내가 남에게 남편을 말할 때는 남편을 자기와 동격으로 봐서 자기를 낮춰서 남편을 높여 말하는 게 우리의 어법이다.

 

시부모에게 남편을 말할 때 애비가 어쩌구저쩌구가 마땅하지, 아빠가 이러시구저러시구는 옳지 않다. 그러나 남편의 제자가 찾아왔다거나 할 때는 물론 선생님이 이러시구저러셨다고 해야 한다. 이런 어법에 비춰볼 때 새파랗게 젊은 새댁이 청취자 앞에서 제 남편에게 최고의 존대말을 쓰는 건 청취자를 모두 자기의 아랫사람 취급하는 거와 다름 없다. 그야 제 집 안방 속에선 남편의 용안을 우러러 수라상을 받든대도 남이 아랑곳 할 바 아니지만 매스컴이란 공적인 장소다. 영향력이 막강하다.

 

이젠 이런 잘못된 어법이 거의 일반화되다시피 해서 딸의 친구로부터 아빠께서 식성이 까다로우셔서 어쩌구 하는 애교 섞인 하소연을 듣고도 그게 즈이 아버지 얘기가 아니라 남편 얘기임을 알아차리게 됐다.

 

하대보다도 존대말이 나쁠 것은 없지만 동격의 관계에서 일방적인 존대말이 보편화된다는 건 자칫 동격의 관계를 귀천의 차이가 있는 관계로 자타에 인정시키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성지를 보건대 여성지니까 여성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건 당연하나, 오늘의 여성문제가 과연 유행, 화장, 요리, 육아, 그리고 사랑받는 것이 전부일까? 저으기 반감을 느낄 때가 있다. 가장 여성문제를 직시해야 할 여성지가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문제로부터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다.

 

여성지에서조차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사랑받기 위해, 선택받기 위해, 또는 선택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초적인 기교, 아니면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기에 급급하다. 시대적이며 필연적인 욕구인 여성의 인간화를 주도하기는커녕 그 초점을 흐려놓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의 공기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이 되버린 전파매체와는 달리 여성지는 우리가 돈 주고 사는 상품이고 상품은 고객의 기호를 눈치보며 만들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실정의 우리 여성이 여성지의 고객인가조차 의심스럽다.

 

여성지를 사는 사람은 남편들이란 말이 있다. 실제로 월말 월초에는 여성지를 봉투째 든 선량한 남편들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여성지가 여성보다 남성의 눈치를 봐가며 남성이 길들이고 귀여워하기 편한 여성을 만들기에 주력하는 까닭을 알 만하다. 여성이 스스로의 읽을거리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한 여성의 지위 향상은 언제나 시기상조론'만 거듭될 것이다.


박완서. 소설을 쓰고 있다.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부끄러움을 가르침니다, 배반의 여름등 많은 작품집을 냈다.


개인별 탐구 과제

1. 낮시간에 주로 편성된 여성을 위한 방송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무 엇인지 정리해 보자.

2. 매스컴의 특성을 고려할 때 바람직한 방송 내용은 어떤 것이라고 했는가?

3. ‘여성 자신의 각성 매스컴의 제작 태도 반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가?

4. 여성이 자기 남편을 지나치게 높여 말할 때 어떤 결과가 온다고 하였는가?

5. “여성지에서조차 여성은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는 말을 정당화시키는 예를 찾아 보고 그러한 여성지에 대해 나름대로 비판을 해 보자.

6. 여성지를 남성이 주로 사는 이유는 무엇이라 했는가?

 

모둠별 토의 과제

1. 여성이 스스로를 남편보다 낮춰 버리는 경우를 주변에서 찾아보자. 그리고 그 러한 말, 혹은 행동에 대해 비판해 보자.

2. 이 글을 토대로 바람직한 여성상에 대하여 토의를 해 보자.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