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시보(南時甫)에 답함
by 송화은율남시보(南時甫)에 답함
학문은 오로지 벗 사이에서 갈고 닦는 힘의 의지하는 것인데, 우리 마을이 선비로서 뜻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른 일 때문에 이 일에 전심(傳心)하지 못하여, 경계되고 유익됨이 자못 적습니다. 산중에 홀로 앉아 있으려니까 날로 무디어지고 침체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전날 서울에서 함께 만나 즐기던 즐거움을 매양 생각하지만, 또다시 바른 사람을 만나지 못함은 나의 경우 역시 주신 편지에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학문을 함께 닦을 벗을 찾지 못해 걱정임
특히 이제까지 강학(講學)한 것은 거의가 망연(茫然)하고 한만(汗漫)한 지경에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회암(晦菴)의 글을 읽으며 친절한 뜻을 엿보고서야, 비로소 전날의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날의 강학이 잘못된 것이었음
대체로 이(理)는 일상 생활 속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동작 중에도, 쉬는 중에도 있고, 말하거나 묵묵히 있거나, 이륜(彛倫)에 따라 응접(應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있습니다. 세미(細微)한 곡절(曲折)의 경우에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그렇지 않은 게 없습니다. 눈앞에 드러나 있으면서 또한 아무 조짐(兆朕)도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이것을 버리고 성급히 고원(高遠) 심대(深大)한 것을 일삼아, 지름길에서 재빨리 손쉽게 얻으려 하지만, 이는 자공(子貢)도 하지 못한 것인데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한갓 수고로움만 있을 뿐 실행하는데 있어서는 망연히 의거할 실속이 없습니다. 연평(延平)이 "이 도리는 순전히 일상 생활 속에 있다."고 하였는데, 뜻 깊은 말입니다.
'이(理)'는 생활의 어디에나 있음
요점 정리
갈래 : 수필
연대 : 조선 명종 13년 무오년(1558)
문체 : 서간체
표현 : 설명적, 분석적
소재 : 학문
주제 : 학문에 임하는 퇴계의 자세
출전 : 자성록(自省錄)
내용 연구
남시보 : 남언경, 서경덕의 문인
경계(警戒)되고 : 나쁜 일이나 잘못된 일을 아니 하게 되고.
강학(講學) : 학문을 연구하고 닦음.
망연(茫然)하고 : 멀고 아득하며.
한만(汗漫) : 등한히 함.
회암(晦菴) : 중국 송(宋)나라의 철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의 호.
이(理) : ① 사물 현상이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 ② 중국 철학에서 우주의 본체. 만물을 형성 하는 정신적 시원.'기(氣)'의 상대 개념.
이륜(彛倫) :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응접(應接) : 어떤 사물에 접촉함.
세미(細微) : 매우 가늘고 작음.
곡절(曲折) : 자세한 사연이나 까닭.
조짐(兆朕) :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는 현상.
고원(高遠) : 높고 멂.
자공(子貢) : 춘추 전국시대 위(衛)나라의 유가(儒家). 성은 단목(檀木). 이름은 사(賜). 공자의 제자로서 십철(十哲)의 한 사람.
망연(茫然)히 : 넓고 멀어서 아득하게. 아무 생각 없이 성하게.
의거(依據) : 의지하고 빙자함.
연평(延平) : 중국 송(宋)의 이동(李洞)의 호. 주희의 선생.
산중에 홀로 ~ 걱정입니다 : 학문이란 서로 토론하고 비판적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발전할 것일진대, 홀로 공부하다보니 답보 상태에 놓이는 것 같아 걱정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도리는 순전히 ~ 속에 있다 :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를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길임을 가리킨다.
특히 이제까지 강학(講學) ∼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 특히 이제까지 연구하고 닦은 학문은 거의가 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등한히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륜(彛倫)에 따라 ~ 경우도 있습니다 : 사람의 도리에 따라 사물을 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 조짐(兆朕)도 ~ 묘하게 들어갑니다 : 어떤 일이 일어날 기미가 없는 데로 묘하게 들어갑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할 수 있겠습니까? :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理)를 말하고 있다.
이 도리는 순전히 ~ 속에 있다 : 일상 생활에서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를 추구하는 것이 학문의 길임을 가리킨다.
이해와 감상
이 편지는 조선 명종(明宗) 13년, 무오(戊午)년(1558)에 퇴계가 시보(時甫) 남언경(南彦經)에게 보낸 서신의 별지(別紙)로서 학문에 임하는 퇴계의 성실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서경덕의 제자였던 남언경은 스승에 의견에 동조하여 우주의 본질과 현상을 모두 '기(氣)'로서 설명, '기'의 영원성을 주장하고, '이(理)'는 '기'를 초월할 수도 없고 초월의 실재성(實在性)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는 무한하고 '이'는 무한하다는 이황의 주장을 반박하게 된다. 서경덕과 남원경의 주장을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라고 한다면, 이황의 주장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이다. 그들의 상호 문학적 논쟁은 당연한 일로써 이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해 학문에 대한 토론과 논쟁을 벌였다.
이 편지는 두 사람간의 대화로서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사연을 말하는 기능을 한다. 단순히 정보 전달뿐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유지의 기능을 지닌다. 즉, 편지 속에는 편지를 쓰는 사람의 감정 인품, 인정이 포함되어 드러나게 된다. 이 작품은 사상을 달리하는 두 학자간에 오간 편지로 학문적인 논쟁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두사람은 편지를 통해 학문에 대하 토론과 논쟁을 벌이지만 자신의 품격과 감정을 적절히 다뤄 학문과 인간 사이의 융화의 경지를 제시한다.
심화 자료
이(理)
중국철학, 특히 정주학(程朱學)의 근본개념. 이(理)의 형이상학적 개념화는 당대(唐代)에서의 화엄교리(華嚴敎理)의 사리무애법계관(事理無法界觀)의 영향도 있으나, 전통적인 유교도덕의 보편성과 절대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려는 요청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렇게 하여 또한 인륜을 부정하는 도불(道佛) 두 교(敎)를 비판할 수 있는 원리를 발견했던 것이다. 정이(程)는 만유(萬有)를 생성케 하는 음양 이기(二氣)의 작용 속에 그 작용의 원인으로서의 도(道), 즉 이를 보고, 또한 이 이(理)가 일체의 차별적 사상(事象)으로 하여금 차별적 사상이게 하는 근거라고 생각하였다. 이 이(理)는 원래 기(氣)나 차별적 사상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형이상적·초감각적이기는 하지만 차별적 사상에 내재현시(內在顯示)하여, 보편적 일자(一者)이면서 자신을 무한히 특수화한다.
그래서 만물에는 일리가 있는 동시에 일물(一物)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나중에 주자는 정이를 계승하여 기(氣)에 대한 이의 형이상적 존재성을 더욱 명확히 하여 ‘소이연(所以然)’과 ‘소당연(所當然)’으로 분석하고, 이의 존재론적 성격과 도덕적·법칙적 성격을 밝혔다. 육상산(陸象山)은 우주에 충색(充塞)하는 것은 일리뿐이라고 주장하고 이일원론(理一元論)을 내세웠으며, 명대(明代)의 왕양명(王陽明)은 기에 중점을 두고 이를 기가 구비하고 있는 조리(條理)라고 보았다. 또한 정주학에서는 ‘물(物)에 대하여 이를 구명(究明)하는 것’이 특히 중요한 의의를 가졌다.
기(氣)
생태계 일반을 두루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생명력. 기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이 농경사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사서인 ≪설문해자 設文解字≫는 기를 운기(雲氣), 즉 구름이라 풀고 있는데, 은·주시대 이전부터 기는 바람이나 구름을 포함한 기상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기상과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천기(天氣)와 땅의 기운인 지기(地氣)가 결합하여 곡물이 생장한다. 동물은 식물의 생명력을 소화·흡수의 과정을 거쳐 활동력으로 삼는다고 고대인들은 생각했다. 기는 이렇게 해서 생태계 일반을 두루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 생명력을 뜻하게 되었다.
인간의 생명 역시 기의 흐름이었다. 그것이 피의 순환과 연관된다고 보아 혈기(血氣)라 했고, 호흡이 그 관건이라 보아 기식(氣息)이라 했다. 내적 생명의 상태는 자연히 밖으로 드러난다 해서 기색(氣色)·기분(氣分)·기품(氣品)이라는 표현이 있게 되었다. 글에서는 문기(文氣), 글씨에서는 서기(書氣)가 문제되는 것도 동일한 맥락이다.
질병은 체내에 있는 기가 순조롭게 돌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이었다. 한의학에서는 치료를 엉킨 기, 막힌 맥(脈)을 소통시키는 행위로 이해한다. 한의학의 치료와 결합한 도교는 기를 잘 기르고 보존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자면 재산이나 명예 따위의 세속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생리적 필요에 충실해야 한다면서 연금술과 호흡법을 개발시켰다.
그런데 공자 이래 유가(儒家)의 생각은 달랐다. 생리적 욕구인 기는 오히려 다스리고 제어해야 할 대상이었다. 공자는 “혈기를 조심하라.”고 했고 순자(荀子)는 “인간과 동식물에 공통된 힘은 기이나,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이성으로 기를 제어해야 한다.”고 말했다.
맹자는 “의지가 굳으면 기를 움직일 수 있다.”고 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또 한편 순수한 감정과 도의적 자긍심을 야기(夜氣)·호연지기(浩然之氣)로 명명함으로써 논란을 예비했다.
수·당시대를 거치면서 불교와 도교가 치밀한 세계관과 인간관을 기반으로 사상계를 풍미하게 되자, 유학은 예의범절을 익히고 가르치는 수준을 넘어 포괄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정비하여야 했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周敦蓬)·정호(程顥)·정이(程蓬) 그리고 장재(張載)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우주와 인간을 관통하는 이기철학(理氣哲學)의 체계를 세운 사람이 바로 주희(朱熹)였다. 우리 나라에서 전개된 기의 사상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의 이기론을 약술할 필요가 있다.
주희에 의하여 기는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의 자격을 부여받았다. 자연세계는 물론, 인간의 감정·의지·사유까지 포괄적 기의 한 계기로 이해되었다. 기는 본래 유동적·활동적이어서 원초의 혼일적(渾一的) 기는 음양(陰陽)으로 자체 분화되고, 그것은 다시 오행(五行)으로 갈라진다. 모든 사물의 생성과 변화는 음양오행이 서로 갈등, 조화하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기의 이 같은 운동과 변화에는 일정한 질서가 있다. 주희는 이 정합적 질서에 이(理)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원리인 이는 흠없이 선하고 완전하기에 세계는 본래 조화롭고 질서가 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도식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와 의지로서의 기에도 그럴 만한 까닭이 있으니, 인간의 ‘표현’ 전체를 전면적으로 수긍하는 것이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길이다.
그렇지만 인간사의 불합리와 모순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실현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한 다음, 타고난 기질(氣質)을 그에 비추어 제재, 간섭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자학의 표어는 ‘성즉리(性卽理)’이다. 기가 아니라 이가 인간과 만물의 본성을 구성한다.
이의 구체적 내용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니 그 실현에 힘쓰라고 권했다. 명백한 논리적 모순을 해결하려고 ‘기의 자연적 변화에서 나타나는 질서인 이’와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이’는 같은 동전의 양면임을 주장하였다.
이는 소이연(所以然)이면서 소당연(所當然)이라는 것이다. 이 설득에 성공했기에 주자학은 오랫동안 관학(官學)으로서 강력한 사회통제의 이념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명청사상사(明淸思想史)는 주희가 무리하게 연결시킨 고리를 풀면서 인간성의 긍정, 개성의 발현을 주창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것은 물론 이보다 기를 앞세우는 ‘기의 사상’으로 흘러갔다.
요컨대, 주희에 있어서 기(또는 기질)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띠고 있다. 하나는, 주어진 신체를 통해 우주적 역사(役事)에 동참하는 나름의 개성으로서의 기, 그리고 또 하나는 도덕적 이념인 이의 실현을 가리고 방해하는 생리적 욕구로서의 기이다.
주희는 실제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두 가지로 모호하게 쓰고 있다. 주희 이후의 명청기학(明淸氣學),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이기철학은 주희가 남긴 애매함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에서 전개된 기의 사상〕
예술이나 한의학, 또는 일상어법에서 기는 널리 쓰이고 있었지만, 세계관과 인간관의 기본 개념틀로서 논의되고 발전된 것은 송대 이기론이 전래된 이후의 일이다.
(1) 정도전(鄭道傳) 비대한 사원경제와 권신(權臣)의 횡포를 막으면서 체제의 전면적 개편을 주도한 정도전은, 기를 정치·사회적 현실로 보고 이〔道〕를 정비된 질서로 이해하였다.
그는 “기에 청탁과 성쇠의 구분이 있는 까닭에 세도의 치란과 인재의 현우가 있다.”고 하면서도 난세는 필연적으로 극복된다는 개혁가다운 믿음을 지녔다.
그는 또 불교와 도교를 반사회적 집단으로 규정하였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심성 수양에만 힘쓰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이나 의무에 대한 자각 없이 양기(養氣)를 통하여 육체적 상태를 조절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려는 도가의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하였다.
(2) 서경덕(徐敬德) 정도전은 기의 일반적 용법에 입각해서 단편적 논의에 그쳤으나, 서경덕은 최초로 기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다. 우주에는 기가 꽉 들어차 있다. 허공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 태허(太虛)이다.
바람은 부채 속에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바람을 무라 하기에는 뺨에 와 부딪치는 서늘함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 체험을 통해 서경덕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기의 존재를 확신했다.
기는 동정(動靜)·합벽(闔闢)이라는 운동과 변화의 속성을 자체 내에 가지고 있다. 존재자는 기의 모임〔凝聚〕이다. 정신이나 지각 같은 고도의 정신능력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이나 소멸은 모였던 기가 풀려 본래의 태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에 기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생성과 변이·소멸에는 일정한 질서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이’이다.
이러한 이는 기를 제재, 간섭할 수 없다. 이른바 이가 주재(主宰)한다는 말은 밖에서 기를 명령하고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는 조화롭고 완미(完美)한 체계이니 인간은 욕구의 주체로 세계와 대립할 것이 아니라 포괄적 기의 순환에 동참하라고 권하였다. 그것이 ‘머무름〔止止〕’의 철학이다. 자신을 잊고 대상을 대상으로 놓아줌으로써 인간과 세계는 온전해진다고 본 것이다.
(3) 이황(李滉) 서경덕은 자아의 의지를 떠나 세계를 관조했기에 기를 신뢰할 수 있었지만, 이황은 그럴 수 없었다. 이황은 질서잡힌 자연보다 욕구와 의지로서의 기에 우선적으로 주목했다.
서경덕처럼 기를 낙관해 버리면 자칫 인간의 사악함까지 모두 긍정해야 하는 위험한 사태, 즉 이황의 표현에 의하면 인욕(人欲)을 천리(天理)로 인정하는 사태에 떨어지고 만다.
기는 제어, 통섭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자면 기보다 더 크고 강한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황은 기에 대한 이의 우위를 역설하였다. 이는 기의 제약을 받지 않으면서 기를 명령할 수 있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래야만 사회의 질서가 바로잡힐 수 있다. 그가 어찌하여 기대승(奇大升)에 맞서 “이기는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는지 이해할 만하다.
사단(四端)은 이가 발(發)한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한 것으로 서로 넘나들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이기의 통체구조에 입각한 주희의 사유와 어긋난다. 기대승이 그 점을 따지고 들자,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해서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고 이가 탄 것”이라는 절충안을 내놓기는 하였으나, 본래 생각을 굽히지는 않았다.
(4) 이이(李珥) 이이는 이황처럼 이기를 둘로 나누는 태도는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소치라 비판하면서 “이기가 한몸”이라고 주장하였다. 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실이라면, 이는 현실의 원리라는 생각에 충실했다.
그렇다고 이이가 서경덕의 생각에 완전히 동의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깨친 바가 있는 사람이면서도 서경덕은 기를 이로 인식한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다. 현실을 비판이나 매개 없이 그대로 용인해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서경덕의 학설은 그러한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가 하나임을 관철시키면서 현실의 다양한 모순과 갈등을 설명하자면 기를 그렇게 만든 이에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이에도 선악이 있다. 이는 절대선인데 거기에 악이 섞여 있다는 이이의 발언은 우주의 이법을 낙관하는 성리학의 자연주의와 어긋난다. 이이는 이 의혹을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으로 해결했다.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이일분수라면 기일분수(氣一分殊)도 같은 진리이다. 본연의 이와 한몸인 본연지기(本然之氣)는 흠이 없는데 기가 분화, 파생, 교섭하는 과정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도 생길 수 있다. 이것이 현실의 악(惡)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사태, 즉 이이의 표현으로는 기의 넘치고 모자람〔過不及〕은 인간의 노력으로 본래의 순수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도 그의 체계에 의하면 기의 몫이다. 본연의 기를 가리는 것도 기요, 그것을 회복하는 힘도 기이다.
이이에게서 이는 철저히 기 운동의 내적 원리로만 남아 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을 이발(理發)과 기발(氣發)로 나누었지만 이이는 짐작하듯 기발만 인정했다. 감정·의지의 표현에 있어 양자간의 구조적 차이는 없다.
이황처럼 사단을 통해 발현되는 인의예지가 일방적으로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을 다스려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보다 기의 상호연관성을 살피고 그 적부(適否)를 판단하는 사유〔意〕의 기능을 부각시켰다.
이이는 이렇게 현실적 기의 동향과 추이라는 구체성에 입각했기에 남다른 현실진단능력을 키울 수 있었고 정치의 개선방안을 적극적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5) 임성주(任聖周) 이황과 이이의 의견대립이 나중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낳는다. 원인은 결국 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다른 데서, 그리고 이것과 연관된 이의 해석이 달라진 데서 온 것이었다.
논쟁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사회적으로는 기의 우선·우위를 말하는 주기론(主氣論)보다 이의 절대성·교조성을 강조하는 도학파(道學派)가 여전히 위세를 떨쳤다.
조선 후기에 농업경제가 개편되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변모해 가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는, 신분제도에 기반한 사회통제와 규범적 질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를 중시하는 사상이 그 같은 경향, 특히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의 북학파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다. 임성주는 북학파 내부의 인물은 아니지만 북학파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임성주는 우주를 거대한 생명력의 흐름이라고 보았다. 각각의 존재는 주어진 신체를 바탕으로 우주적 생명을 나름대로 구현하는 개성이다. 그것이 기이고 생의(生意)이다.
그러므로 기에 맑고 탁함〔淸濁〕, 순수하고 잡됨〔粹駁〕의 구별이나 가치평가는 무의미하다. 잉어의 뱃속에도 바닷물이요, 방어의 뱃속에도 바닷물이듯 그것이 생명인 한, 가치의 우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질 밖의 초월적 이념이 본성이라는 생각에 반대하면서, 기질이 그대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다. 만물의 본성은 각각의 형체에 상응하는 생의의 발현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현실태와 이념태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기질, 다시 말해서 식색(食色)을 포함한 의지와 욕구, 개성적인 삶은 충분히 발현되어야 한다. 기질은 더 이상 이의 실현을 가리고 방해하는 부정적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이황과도 달랐고, 타고난 자연성을 개성으로 용인하자고 권유하는 점에서 실천과 개혁을 강조한 이이와도 달랐다.
인간과 세계를 온통 낙관한 그는 현실에 존재하는 악은 다만 맑은 물이 진흙에 흐려지듯 일시적인 ‘찌꺼기현상〔渣滓現象〕’일 따름이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6) 정약용(丁若鏞) 정약용은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고조되던 개성의 해방을 위태롭게 여겼다. 대내적 무질서, 대외적 위기가 심각한 당대의 현실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규제라고 생각했다.
모든 만물이 기로 형성되어 있고 그 기에 내재하는 원리가 동일한 이라면 인간과 사물존재의 구분이 모호해짐은 물론, 세계를 턱없이 낙관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인간은 주어진 현실을 부단히 개선, 변용, 창조하는 주체라는 인식에서 정약용의 사상은 출발한다. ‘이기가 한몸’이라는 세계관은 그러므로 폐기되어야 한다. 전대의 사상은 천지만물을 일리(一理)로 귀착시켜 대소·주객을 구분하지 않는 잘못을 저질렀다.
물(物)은 객관성·독립성·자주성을 가진다. 정약용은 세계의 보편적 원질이나 우주적 생명으로서의 기를 인간의 생리적 욕구로 환원시켜 버렸다.
식색안일(食色安逸)이 기의 정체라면서 성리학이 발전시킨 개념 이전으로 돌아갔다. 욕구〔氣〕는 타인과의 갈등과 대립의 원천이다. 자신에 집착하는 점착성(粘着性)을 극복하여 타인에의 관심과 사랑을 넓혀가는 것이 사람다운 노릇이다. 그것이 인(仁)이다. 이러한 극복은 기의 자연성을 넘어서는 초극이며 비약이다.
정약용은 그 초월에의 의지〔超形之心〕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선하며 그럴 수 있는 능력은 인간만이, 또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데, 이것(自主之權)이 인간의 진정한 본성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육신〔氣〕을 다스리는 일은 인간성의 억압이 아니라 그것의 진정한 실현이라고 하였다.
(7) 최한기(崔漢綺) 같은 실학자이면서도 최한기는 정약용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기를 성리학 이전으로 되돌리지 않고, 우주와 인간의 전 체계를 해명하는 기본틀로 삼았다. 우주는 기, 그것도 신기(神氣)의 움직임이다. 끊임없이 살아 있는 활동부정(活動不定)의 생명체임을 강조하고자 기에 ‘신(神)’이라는 접두어를 붙였다.
신기는 예외없이 형체를 빌려 드러나므로 존재는 각자 나름의 가치와 특성을 지닌다. 여기까지는 임성주의 생각과 유사하다. 그런데 사람의 신기만큼은 본래 아무런 경험내용도 확보하지 않은 백지상태였다가 사물을 지각, 경험하는 과정을 거쳐 점차 자라나고 폭이 커지는 시간성을 지닌다.
인간의 신기인 마음은 일차적으로 저것을 들어 이것과 비교하고 이것을 들어 저것을 징험(徵驗)하는 지각·인식·판단의 기능이다.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고 내면화시킨다. 이치와 원리의 탐구는 가시적이고 경험적인 것에서 출발해야 허탄(虛誕)에 떨어지지 않고 적실성·유용성을 가진다.
객관의 기와 주관의 기는 이렇게 만난다. 인간본성의 탐구에 있어서도 무턱대고 인의예지가 성이라고 규정할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실상을 면밀히 검토하고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이 타고난 천기가 곧 성이며, 이가 아니라 기가 인간의 본성이라 했다. 최한기는 이렇게 성즉리의 성리학 체계와 결별했다.
개체는 나름의 욕구와 개성을 표현, 실현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우선 인정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충돌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갈등은 생명의 본질이요 기의 당연한 귀결이다. 최한기의 사상체계는 이 갈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모험적 시도이다. 최한기는 그것을 변통(變通)이라 불렀다.
이때 미리 설정된 규범이나 사회적 관행을 강요하는 것은 적실한 해결책이 아니다. 인간의 기미와 사회관계의 조리에 대한 경험과 추측이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야 한다. 신기는 욕구의 충족이 이기적으로 수행될 경우 생기는 공동체의 곤경을 깨닫게끔 되어 있다. 이 사회성에의 자각을 바탕으로 갈등과 긴장이 해소된 바람직한 공동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
현실의 기는 늘 유동하고 변하는 까닭에 변통을 위해 과거에 마련되었던 잣대는 부단히 개선, 변혁되어야 한다. 공자가 공자다웠던 것도 고금을 참작하고 질문(質文)을 손익(損益)한 현재적 사유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세계의 의미, 인간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고 대동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은 완결될 수 없는 영원의 과제이다.
〔현대의 동향〕
우리 나라에서는 서구 열강의 침입과 민족항일기를 지나 광복을 맞은 지 40여 년이 지나도록 기의 사유는 끊겨 있었다. 전통은 불행한 과거의 유산이어서 청산해야 할 짐으로 생각하였기에, 기는 사유의 도구로 쓰이지 못하고 대신 서구의 학문과 조류가 오랫동안 이 땅에서 행세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실체와 현상’, ‘정신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 물들어 있는 서구적 방법론의 한계를 절감하고, 인간과 세계, 인간과 인간의 역동적 상호교섭을 포괄적으로 해명하고자, 기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참고문헌≫ 與猶堂全書, 明南樓叢書,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4), 韓國儒學資料集成 上·中·下(裵宗鎬編, 延世大學校 出版部, 1980), 中國哲學史(勞思光, 臺灣三民書局, 1981), 氣の思想(小野澤精一等 編, 東京大學 出版會, 1978).(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언경(南彦經/?~?)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의령(宜寧). 자 시보(時甫). 호 동강(東岡).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66년(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현감(砥平縣監)에 기용되고, 73년(선조 6)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탄핵받아 파직되었다. 92년 여주목사(驪州牧使)에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요(李瑤)와 함께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이황(李滉)을 비판했다는 주자학파의 탄핵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황(李滉/1501~157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 진보(眞寶). 초명 서홍(瑞鴻). 자 경호(景浩). 초자 계호(季浩). 호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 시호 문순(文純). 예안(禮安) 출생. 12세 때 숙부 이우(李%)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28년 진사가 되고 3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부정자(副正子)·박사(博士)·호조좌랑(戶曹佐郞) 등을 거쳐 39년 수찬(修撰)·정언(正言)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서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직하였다. 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舍人)으로 문학(文學)·교감(校勘) 등을 겸직, 장령(掌令)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이기(李)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고 응교(應敎) 등의 벼슬을 거쳐 52년 대사성에 재임, 54년 형조·병조의 참의에 이어 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68년(선조 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 주자(朱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理)·기(氣) 이원(二元)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形而下的)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具象化)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사상의 핵심으로 하는데, 즉 이가 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乘]는 것은 7정(情)이라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기대승(奇大升)과의 8년에 걸친 논쟁은 사칠분이기여부론(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 되었고 인간의 존재와 본질도 행동적인 면에서보다는 이념적인 면에서 추구하며,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은 절대선(絶對善)이며 여기에 따른 것을 최고의 덕(德)으로 보았다. 그의 학풍은 뒤에 그의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嶺南學派)를 이루었고,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은 이 두 학파의 대립과도 관련되었으며 그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 소개되어 그곳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스로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창설,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고 현실생활과 학문의 세계를 구분하여 끝까지 학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중종·명종·선조의 지극한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은 물론 글씨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단양(丹陽)의 단암서원(丹巖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예안의 도산서원 등 전국의 수십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퇴계전서(退溪全書):修正天命圖說·聖學十圖·自省錄·朱書記疑·心經釋疑·宋季之明理學通錄·古鏡重磨方·朱子書節要·理學通錄·啓蒙傳疑·經書釋義·喪禮問答·戊辰封事·退溪書節要·四七續編》이 있고 작품으로는 시조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글씨에 《퇴계필적(退溪筆迹)》이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자성록(自省錄)
퇴계는 평생 동안 백여 명의 사람과 천여 통의 편지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중 자성(自省)의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 '자성록'이라는 책을 펴냈다. 따라서, 이 책은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을 위해 엮은 퇴계의 '서간 문집'이다. 이 책에 수록된 편지들에서 퇴계의 인간 완성을 위한 고민, 생 활에 대한 경건한 자세, 학문에 임하는 성실성 등을 엿 볼 수 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이란 우주 현상과 인간의 도 덕성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유기적 이고 체계적인 해명을 위한 이론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이와 기로써 구성되었으며, '이'와 '기'에 의하여 생성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고, 동 시에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기론은 '이' 없는 '기'나 '기'없는 '이'만을 생각 할 수 없으면서, 또 한편 '이'는 '이'이고, '기'는 어디까지나 '기' 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이기론은 사실상 '이'와 '기'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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