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 김상용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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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꼬인다 : 유혹한다.

 

시집 망향(望鄕)(1937년판) 중에서 / * 첫발표 - 󰡔문학󰡕 2, 1934.2


<핵심 정리>

 

감상의 초점

이 시는 우리 나라 전원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 흙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시적 화자의 삶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원에서 안분 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태도, 훈훈한 인정, 달관의 모습을 넉넉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성격 : 서정적, 전원적, 자연 친화적, 관조적

운율 : ‘-’, ‘-’, ‘-의 반복을 통한 규칙적인 반복

어조 : 소박하고 겸손하고 친근한 회화조

제재 : 전원에서의 생활

주제 : 전원 생활을 통한 달관의 삶. (자연 친화적인 삶의 자세)

 

 

<연구 문제>

 

1. 이 시의 화자의 태도와 유사한 고시조 작품 한 수를 외워 쓰라.

 

십 년(十年)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 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 순>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는 옌가 하노라. <조 식>

 

초암(草庵)이 적료(寂廖)한데 벗 없이 혼자 앉아

평조(平調) 한 닢에 백운이 절로 존다.

어느 뉘 이 죠흔 뜻을 알 리 있다 하리오. <김수장>

 

2. 이 시에서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각각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180자 정도로 설명해 보라.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에 잘 나타나 있듯이 새 노래는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혜택의 대유적 표현인데, 공으로 듣겠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가 무상 행위(無償行爲)로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원리로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도 발전적으로 적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3. 은 화자의 어떠한 인생관을 나타낸 말인지 4자의 한자 숙어로 쓰라.

安分知足

 

4. 에 나타난 삶의 태도를 10자 내외로 쓰라.

초월과 달관의 자세. (삶에 대한 관조와 여유)

 

 

< 감상의 길잡이 1 >

전원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아가려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복잡한 도시 생활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종의 모성 회귀(母性回歸)의 본능과 같은 것이다.

 

화자는 이 전원 생활 속에서 스스로 만족을 느끼며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도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라고 말하고 있다. 땅을 일구고 자연을 벗하며 인정미 넘치는 삶의 여유와 관조가 회화조의 친근한 어조에 용해되어 시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잔잔한 웃음으로 답하는 모습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초월과 달관의 경지를 함축적으로 보여 주는 시적 표현의 백미라 할 수 있다.

 

< 감상의 길잡이 2 >

거울은 모든 것을 거꾸로 비춰준다. 다만 그 반사된 모습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사람의 얼굴은 대칭형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그렇다. 좌우가 뒤바뀌어 있는데도 그것을 자기 얼굴이라고 믿는다. 조우만이 아니라 사실은 앞뒤까지도 뒤바뀌어 있다. 내가 북쪽을 보고 있을 때 거울 속의 나는 정반대로 남쪽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거울이 정직하게 자기 모습을 비춰 준다면 거울 속에는 자기 얼굴이 아니라 그 뒤통수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간까지가 그렇다. 거울 속에서는과거현재처럼 혹은 다가오는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달리는 자동차의 백미러를 보면 이미 지나온 그 길들이 다시 다가 오고 있지 않던가.

 

시의 텍스트도 때론 거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생활을 시의 언어에 비춰 보면 아마도 김상용의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같은 풍경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대낮에도 형광 등을 켜야 하는 도시의 빌딩 창문들은 동서남북의 구별이 없다. 그것을 시의 거울에 비춰 보면남으로 창이 나 있는 우리들의 작고 따뜻한 옛집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죽어서도 남향받이가 아니면 묻히려 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오랜 삶을 가리켜 온 화살표이다.으로 창이 난 회색의 도시가 압박해 올수록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시 첫구절은 절규처럼 들려 올 것이다.

 

창이 밀봉된 빌딩 속, 플라스틱 사무 용품과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화이트칼라의 하얀 손가락 위로밭이 한참가리/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베지오라고 한 그 흙묻은 손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의 온갖 기계 부품들 사이로 사람의 손때 묻은 괭이와 호미가 얼비치게 될 것이다.시인과 농부라는 곡목도 있듯이 시인들은 현대 문명의 아스팔트 위에서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들이다. 시를 뜻하는 영어의 버즈(VERSE)가 바로 밭을 간다는 말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지 않던가!

 

노동만이 아니다. 놀이와 휴식의 양상도 뒤집혀 있다. 밭갈이의 노동은하늘(구름)의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휴식과 놀이의 상황으로 옮아간다. 그것이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라는 구절이다.

생각해 보면 도시인들은 모두 구름의 꼬임 때문에 흙을 버리고 떠나온 사람들이다. 이 떠돌이의 도시 문화는 농경 문화와 대립하는 것으로신 유목민(네오 노마드)이라고 불려진다. 그 들의 놀이는 관광처럼 끝없이 돌아다니거나 노래도 돈을 주고 부르는 노래방 같이 소비 위주의 오락이다. 그러나 농경민들의 놀이와 휴식은 한 곳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그리고 자연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자적(自適)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자연과의 관계는 그대로 인간과의 관계로 이어진다.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가 그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은강냉이가 익걸랑이라는 말이 암시하고 있듯이 바로 계절이라는 자연의 리듬이다. 그것은 시장 원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인간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시장은 자신들이 생산한 것을 매매하고 거래하기 위한 것이지만 강냉이가 익는 곳은 함께 먹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한 잔치이다.

 

사회학자일리치의 용어를 빌리자면컨비비얼리티(conviviality)라고 불리는 공식(共食)과 상생(相生)의 장치 문화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김상용의 거울은 경쟁의 전리품인 도시인들의먹이를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의 의식(儀式)같은빵과 포도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렇게 이 시인은 산업 문화의 생활양식을 그 전후좌우가 모두 바뀌어 버린 농경 문화의 전형적인 풍경으로 비춰 준다. 시적 메시지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시의 구성도 그렇게 되어 있다. 이 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에는 땅 다음에는 하늘, 그리고 마지막에는사람으로 --人 三才 思想의 삼태극 도형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구성은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최종 악장의 스타카토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남쪽으로 낸 창문, 밭갈이, 구름과 새노래, 그리고 강냉이를 함께 먹으며 지내는 그 생활은 모두가어떻게 사느냐에 답하는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그 어떻게가 갑자기 튀어나온라는 그 물음에 의해서 핸들을 꺾고 급회전을 한다.

 

삶의 양식삶의 본질, 요즘 말로 하자면노 하우에서노 와이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된다. 개미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라는 원인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어떻게!라는 해결로 돌진한다고 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인간은 그렇지가 않다. 잘된 일이든 못된 일이든 우선라고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바로 근대 합리주의의 삶이며 모든 것을 이성과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한 서구의 로고스 중심주의 사상이다.

 

그러나라는 물음에 대해서 말로, 논리로 답하려고 할 때 이미 그 삶은 삶 자체의 빛을 잃고 생명의 선혈은 싸늘하게 굳어 버린다.

 

석가도 시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말 대신 그냥 웃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염화시중(華示衆)이라고 하고 기호학에서는폴리세믹(복합적이고 암시적인 기호체계)이라고 한다.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시(예술)이고, 설명해서는 안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종교라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과학(논리)으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모나리자의 미소이다. 모나리자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지만, 그 모델 조콘다의 이름은생의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죽음의 슬픔과 생의 기쁨이 엇갈려 있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다빈치의 그 신비한 미소는 살 수 있다.

 

왜 사느냐라는 말에 그냥웃지요라고 대답한 김상용 시인의 미소는 말로는 표현할 수도 논증될 수도 없는 삶 그 자체이다. 애매성과 모순성으로 뭉쳐진 삶 자체의 다의성(多義性)을 그대로 옮긴 것이 그 웃음이며 시의 언어이다.

과학과 법과 정치와 경제가 우리의 삶을 해부하고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할 때 시인은 오직 침묵으로 웃음으로 삶과 마주 본다. 그래서 우리는 김상용의 그 시적 텍스트를 요술 거울 속에서 본다. 도시인들이 차고 다니는스마일배지의 뒤통수를 뒤집어 놓은 참신하고도 은밀한 한국적 미소의 그 반사체(反射體)····. <이어령 교수>

 

 

< 감상의 길잡이 3 >

자연 귀의(自然歸依)라는 자연애와 인생의 정관(靜觀)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동양인의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소위 전원시라 불리는 작품 중 백미(白眉)로 꼽힌다. 3연의 간결한 형식과 밝은 시어, 민요조의 단순하고 소박한 가락을 이용하여 전원 생활에 대한 동경을 제시하는 것에 그칠 뿐, 그렇다고 해서 전원 생활에 대한 굳은 신념을 남에게 억지로 주입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 주는 밝고 건강한 이미지와 함께 잘 나타나 있는 이 시는 시인의 개인 취향의 산물로 볼 수도 있지만, 1930년대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한 삶의 자세라고도 볼 수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다는 것은 집 안을 밝게 한다는 단순한 채광(採光)의 의미를 넘어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건강하고 낙천적인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소망을 뜻하며, 한참을 갈 수 있는 농토인 한참갈이는 무욕(無慾)과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으며, ‘구름은 허망한 속세의 삶이나 어떤 유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새 노래는 자연이 주는 무량 무한(無量無限)의 은혜와 축복을 뜻하는 것으로 자연에 있어서의 무상(無償)의 생활을 의미하며, ‘공으로는 자연과는 반대로 현실 생활이 유상(有償) 생활임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고 하겠다.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가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라면, ‘강냉이가 익걸랑 / 함께 와 자셔도 좋소.’는 이에 대응하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새 노래가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와 축복을 대유하는 것처럼 강냉이는 자연에 인간의 노동이 가해져 이루어지는 오곡 백과의 대유이며, 함께 와 먹어도 좋다는 것은 돈을 내고 사 먹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대가 없이 공으로, 즉 무상으로 먹어도 좋다는 의미로 시인의 넉넉한 마음씨가 잘 드러나 있다.

 

마지막 연의 왜 사냐건 / 웃지요.’ 라는 심경은 이백(李白)의 시 <산중문답(山中問答)>*의 둘째 구절 笑而不答心自閑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 시는 삶의 허무 의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합일되어 무위의 상태에 다다른 시인의 인생관 내지 삶에 대한 태도를 함축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1930년대 중반 유행처럼 번지던 서구적 취향의 모더니즘 시 세계와는 상반된, 다분히 한국적이면서 동양적 생활 철학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참다운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산중문답(山中問答)(李白)

 

問余何事棲碧山 어인 일로 푸른 산중에 사느냐고 나에게 묻기에

笑而不答心自閑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桃花流水杳然去 복숭아꽃 실린 물이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 별천지요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 감상의 길잡이 4 >

작중 화자는 평화로운 전원적 삶에의 소망을 말한다. 해가 잘 드는 남쪽으로 창문을 내고 흙과 더불어 사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구름, 즉 헛된 세속적 이익이나 명예 따위가 유혹한다(꼬인다) 해도 그는 가지 않으려 한다. 다만 너그럽게 자연을 즐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왜 사느냐고 묻지 말라. 이 평화로운 삶의 기쁨, 그것이 곧 삶의 여유가 아니겠는가?[해설: 김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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